3장: 해석학의 세 기능에 관해서

기독교해석학 조회 수 5472 추천 수 164 2004.06.30 22:19:17
3장
해석학의 세 기능에 관해서
-해석학의 어원적 고찰-

해석학을 뜻하는 “헤르메노이틱”의 어원은 원래 헬라어 “헤르메네웨인”(해석하다)과 “헤르메네이아”(해석)에 있다. 동사형과 명사형으로 사용된 이 헬라어는 이미 고대 헬라 저술가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크세노폰, 플루타르크, 에우리피데스, 에피쿠루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이들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단어는 원래 헬라 신화에 나오는 신의 사자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헤르메스가 “인간의 이해 능력을 초월해 있는 것을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도록 전환시켜 주는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34). 즉 헬라인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이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인 언어는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작용이다.

설교 행위를 가리켜 성서 말씀에 대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헬라어 헤르메네이아의 어원과 연관해서 몇 가지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우선 텍스트(성서)의 은폐성이 한 가지이다. 헬라인들이 헤르메스라는 신의 사자를 통해서 해석 사건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바로 텍스트의 은폐성(초월성)을 전제했다는 말이다. 이 은폐된 사건인 계시를 오늘의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작업이 곧 해석학이며, 이런 해석학에 근거해서 성서를 청중들에게 풀어내는 행위가 곧 설교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은 이 텍스트의 은폐성이 말하려고 하는 그 본래의 의미를 확실히 의식하지는 못한다. 설교가 어려우니까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정도이지 계시와 진리의 본래적 은폐성이 말하고 있는 바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나 어떤 고전 문헌만이 은폐된 게 아니라 자연과 세계 자체가 그렇다. 자연과학의 작업도 따지고 보면 이 은폐된 세계를 어떻게 노출시켜내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 헬라 시대의 과학자들과 뉴톤을 거쳐서, 오늘의 수많은 물리, 생물학자들에 의해서 자연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계기가 있기 전까지는 그 사실과 현상이 숨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이미 그 현상이 있었지만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기도 하고, 또한 인식함으로써 그 현상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만유인력은 뉴톤이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그런 현상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며,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이 발명하기 전에는 없었다. 물론 발명 이전이라도 그런 현상이 완전히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노출 사건이 아무리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은 여전히 비밀이며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입자가 무엇인지는 그것을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준비되기만 하면 끝없이 우리에게 질문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현재는 우리가 모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인들도 역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숨겨진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여전히 은폐된 그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시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성서가 진리라고 한다면 어느 한 두 사람의 해석 행위로 그 세계가 완전히 노출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계시의 과정에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은폐되어 있다. 성서 말씀은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나 칼빈의 해석으로 완료되는 게 아니라 더욱 궁극적인 계시의 실질을 향해서 계속 노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현재 자기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가 되면 얼굴을 맞대고 보듯 확실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전13장). 진리의 종말론적 성격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래 해석학(Hermeneutik)이란 용어는 원래 ‘해석의 기술’, 즉 ‘본문을 해석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호흐케펠(W. Hochkeppel)에 의하면 해석학은 “전승된 본문들로부터 불을 지펴내는 ... 기술”이다. 해석학의 어원적 유래와 그 파생의 유래는 그렇게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략 어근을 통해서 볼 때 낱말, 용어를 가리키는 라틴어 verbum, 혹은 말, 이야기를 가리키는 sermo와의 연관 속에서 ‘sprechen'이나 ’sagen'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구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째는 “말하다”(독: aussagen, ausdrücken)로서 밖으로 표현해낸다는 뜻하며, 둘째는 “설명하다”(erklären, auslegen)로서 늘려서 펴는 것을 뜻하며, 셋째는 “번역하다”(übersetzen, dolmetschen)이다. 이 세 가지 용법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적인 것인지 언어사적으로 확정지을 수는 없으며, 종합적으로 ‘이해시키다’, 또는 ‘이해를 증거하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해석학은 언어를 통해서 실상이 해석되며, 의미를 통해 그 진술이 해석되며, 번역을 통해 낯선 말들이 해석되는 것을 가리킨다.(G. Ebeling, Hermeneutik, in: RGG, Bd.2, 243; H.G. Pöhlmann, Abriß der Dogmatik, 30 참조.). 각각의 항목을 검토해보자.

말하다

헤르메네웨인의 어두 부분인 ‘헤르메’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말하다’는 뜻의 라틴어 세르모 및 ‘말’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르붐과 매우 밀접하다. 이는 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성직자의 역할이 바로 무언가를 ‘공표하고’, ‘진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직자는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설명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선포한다는 뜻까지 포함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언어로 진술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성직자는 그런 차이를 뛰어넘어 ‘선포’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곧 해석학의 일차적 의미이다. 이런 성직자의 선포를 청중들은 들음으로써 문자적 차원을 뛰어넘어 신의 계시에 도달되어야 한다. 참고적으로, 독일어 ausdrücken은 ‘표현하다’는 뜻인데, 단순히 ‘말하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악가나 지휘자는 소리와 지휘의 행위로 표현하는데, 이런 소리와 몸짓도 역시 해석학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다. 노래나 연극의 대사도 역시 말하는 것으로서의 해석이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말하는’ 것으로서의 해석학에서 중요한 점은 이 행위가 근본적으로 구어(口語)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원래 언어는 소리로서의 말이지 문자로서의 말은 아니었다. 문자가 인간의 세계로 들어온 이후로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모호해지기 시작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문자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그것을 귀로 듣는 청각*을 통해서 이해와 의사교환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문자의 세계에 살고 있고, 텍스트 자체가 문어로 되어 있지만 해석은 이 문어가 토대하고 있는 원래의 구어를 회복해나가는 작업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어는 구어가 지닌 원초적인 표현력을 결여하고 있다... 모든 문어는 다시 구어의 형태로 변형되지 않으면 안 된다.”(팔머, 39).

*종교학적인 차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시각보다는 청각의 종교경험에 중심을 두는 종교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신 반면에 근동의 다른 종교의 신들은 화려한 종교의식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기 백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나를 위하여 그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선악과를 보았을 때 유혹을 받았다는 설화를 통해서도 유대교의 종교경험의 뿌리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 교회가 열린 예배를 드린다는 명분으로 화려한 시청각 도구를 사용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구어와 문어의 차이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이해와 해석의 과정에서 구어가 훨씬 심원하고 풍부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과 연극으로 보는 것을 비교하면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맥베드나 햄릿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 상태를 글을 통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한계가 있다. 연극 배우의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을 직접 들음으로써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원래의 세계에 훨씬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우리의 흥부전이나 춘향전 판소리*를 글로만 읽는 것과 명창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을 비교해보라. 판소리 명창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갈고 닦은 그 탁성이 빠진 판소리는 판소리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구어는 문학이나 예술작품이 해석될 때 일차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우리 음악 공부와 서양 음악 공부 사이의 차이점은 구어와 문어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전부터 서양에서는 악보가 사용되어서 그것으로 음악 공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반하여, 우리 동양에서는 악보 없이 그저 선생의 소리를 직접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공부가 이루어졌다. 어떤 쪽이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음악이라는 게 원래 악보로 완전하게 재현시킬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따라 부르는’ 방식이 근본적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서당 공부 방식이 바로 선생의 발음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동양 공부 방식의 근원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참된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 더구나 학문이나 예술처럼 미묘한 세계를 전달한다는 것은 단지 문자를 통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의 인식 사이에 감지되는 미묘한 느낌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장자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레바퀴를 만드는 장인이 있었다. 그 제작 기술을 알려 달라는 사람에게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말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터득해야 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근본에 대한 이해가 논리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리 자체가 모든 해석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면 충분하지 않다.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는 잡소리다. 어떤 사람이 “아!”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바흐의 악보를 보고 거기서 음과 음의 연결을 통해서 어떤 음악의 세계가 흘러나오는 것을 경험한다. 그 음을 아무렇게나 흩어 놓았다고 하자. 순서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면 음은 음이지만 아무 의미가 없다. 물론 의미 없는 소리 자체가 또 하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긴 하다. 예컨대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자가 피아노를 보고 건반을 마음대로 두드렸을 때 의사는 그 행위와 그 소리를 통해서 어떤 사실을 파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자폐증 환자가 내뱉는 어수선한 소리도 역시 의사의 귀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소리로 해석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접어둔다면, 의미가 있는 음이 되려면 그 음과 음의 조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의미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텍스트를 읽을(들을) 때도 역시 그렇다. 어린 아이들이 문장을 익힐 때 사용되는 낱말 퍼즐 게임을 보자. 다섯 개 정도의 낱말을 뒤바꿔 놓으면 그게 무슨 뜻인지 보통 아이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문장을 해석할 줄 아는 어린아이는 직감적으로 어순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소리와 의미는 해석 과정에서 순환적으로 작용한다. 일종의 읽기와 이해의 순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은 언어가 사건(event, Ereignis, 푹스, 에벨링, 가다머)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백해진다. 원래부터 언어가 있었던 게 아니라 어떤 사건을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가 발생했지만 어떤 사건이 언어화되면 그 언어 자체가 이미 사건이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제 원래의 사건이 내포하고 있던 그 의미가 확대되고 심화된다. 이럴 경우에 언어는 단순히 어떤 사건의 전달에 머무르지 않고 사건 자체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괴테의 <파우스트>라는 작품은 언어를 통해서 이미 나름대로의 사건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괴테가 원래 생각했던 그 사실과 의미에서 머물지 않고 해석과정을 통해서 훨씬 심층적인 세계로 변화되어 나간다. 모든 위대한 예술, 문학 작품들은 그런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과정은 종교 영역에서 더욱 분명하다.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나 성육신이라는 언어는 처음의 상태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지난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훨씬 풍부한 의미를 담게 되었다. 세례도 그렇고, 성찬식도 역시 그렇다. 원래 구어로 시작된 사건이 문어로 정리된다. 이 문어가 다시 구어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심화된다는 말인데, 이것이 곧 언어 사건의 지평이다. 물론 여기서 이런 언어 사건이 과연 언어만의 작용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이긴 하다.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자는 이 해석 과정에서 이 언어 사건보다는 보편사적 지평이 훨씬 근본적인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예정이니까 여기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다만 구어에 담긴 언어 사건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만 지적하기로 하자.    

한편으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 구어의 힘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바울의 서신들은 소리 내어 읽도록 기록되었다. 아마 감옥에 있던 바울이 구술하면 대필자들이 그대로 옮겨 적었을 것이다. 구약성서도 역시 오랜 세월 대를 이어 구전되던 이야기들이 그렇게 편집되었다. 예수님도 역시 글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말(소리)로 전하셨다. 복음서에는 그 예수님의 구어가 살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죽어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생생한 말이었다. 설명하는 부분도 역시 증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전하는 것이었지 논술이거나 에세이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신구약성서에 여러 문학적 성격의 문서들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들마저 사실은 눈으로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입으로 읽고 귀로 듣기 위한 것이었다.

말과 설교
현대 설교학에서도 문어체로 설교하지 말고 구어체로 설교하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말할 때는 억지로 꾸미지 않듯이 설교도 역시 억지로 말을 만들어서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로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명설교자들의 설교를 보면 대개가 구어체로 되어 있다. 글을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직접 설교를 들으면 매우 생생하게 전달되는 일들은 흔하다. 그런데 문제는 구어 해석학이라는 문제가 단순히 말을 그럴싸하게 잘하는, 즉 구어적인 기술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구어의 능력에 있다. 즉 그 언어에 담겨 있는 고유한 세계의 실질이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웃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설교를 할 때 그저 재담하듯이 설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어의 능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진리론적 성격이 드러나야만 살아있는 설교가 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신문의 뉴스처럼 일종의 사실 전달이 아니라 구원, 계시, 진리 사건으로 진술되어야(aussagen)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와 듣는 사람들이 부흥회 설교에서 잘 나타나듯이 반드시 어떤 실존적 감동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도 아니다. 구전된 사마리아 이야기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설교 행위를 통해서 다시 생생한 오늘의 사건으로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서의 문자가 가장 생생한 구어로 재생되는 사건인 오늘의 설교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고유한 성서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언어로 드러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어떤 세계는 그 세계를 경험한 사람만이 확실하게 알 수 있지 남에게 전해들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티베트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들은 풍월로 전달한다면 아무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반면에 언변이 약간 어눌하더라도 티베트를 직접 가본 사람의 말은 자신의 직접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성서의 언어를 구어로 바꾸어 내기 위해서 우선 그 성서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것의 참된 세계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 물론 지금 우리는 성서의 사건이 발생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성서와 교회의 역사가 이 사건을 사건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의 악보와 CD를 통해서 그 노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간접적인 경험이 직접적인 경험이 될 수 있게 하는 그 길에 곧 해석학이 놓여 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성서의 언어(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교회의 역사와 기독교의 사상적 체계를 공부하는 것이다.

설명하다

팔머에 의하면 그리스 델피의 신탁에서 획득되는 비밀스러운 메시지는 이미 ‘주어져 있는’ 텍스트를 해석한 게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이었다고 한다. 이 메시지는 무언가를 표현하기 했지만 동시에 이런 표현의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무엇은 이전에 설명된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신탁에서 제시되는 두 번째 요소는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늘의 비밀(진리)을 그대로 보도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 진술로는 모두 드러나지 않는 그 무엇을 듣는 사람의 상황, 혹은 맥락에서 풀어내는 것이다.
해석학의 어원적 차원에서 이 ‘설명’의 요인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훨씬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방법론을 모색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그런 방법론을 찾는 행위까지도 역시 이해의 과제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팔머의 설명을 들어보자. “따라서 우리는 설명을 보다 근원적인 해석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분명히 설명은 객관적(대상적) 분석의 도구들(방법)에 의존하지만, 이를 위한 도구의 선택은 이미 이해의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분석은 해석이다. 그리고 분석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역시 하나의 해석이다. 따라서 분석은 결코 근원적인 해석이 아니고 파생적인 형태의 해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분석은 자료를 갖고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해석의 단계를 전재하기 때문이다.”(팔머, 50).

예컨대 눅 24:25-27에 보면 부활한 예수가 그때까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기독론을 다음과 같이 다른 시각으로 설명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예언자들의 전승이 결국 예수 사건에 의해서만 해석된다는 말인데, 이는 곧 한 텍스트를 해석할 때 단순히 자체만의 분석이 아니라 훨씬 근본적인 맥락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행위에서는 일종의 굳어진, 폐쇄된 상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맥락과 지평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의미는 맥락의 문제이며 설명적 절차는 이해를 위한 터전을 만들어준다.”(팔머 51).
앞에서 참된 이해와 해석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 텍스트의 세계에 대한 직접 경험이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이 여기서 피력되고 있는 상황이나 맥락 문제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해석에 설명하는 요인이 작용한다는 말은 이를 통해서 구어 해석을 심화시킨다는 뜻이다. 즉 그 텍스트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어떤 하나의 독립된 사건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그 전후 맥락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된 해석은 있는 사실 보도가 아니라 그 정황에서 실제적인 사건(reality)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IMF에 관한 신문 보도를 다시 읽었다고 하자. 만약 진정한 역사 해석자라고 한다면 그 사건에만 국한해서 보는 게 아니라 세계사적인 전망과 우리의 근대사적인 전망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해서 국제 자본을 빌려왔다는 사건이 해석되려면 우리의 경제적 부실, 군사정권 때 시작한 정경유착, 투기성 국제자본의 성격을 충분히 고래해서 생각해야만 한다.

이런 설명적 해석에서 “설명이라는 맥락적이며 ‘지평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설명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와 의도의 지평 내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팔머 52). 팔머에 의하면 해석학에서 이렇게 전제된 이해의 영역을 가리켜 선(先)이해라고 부른다. 어떤 텍스트를 해석한다고 할 때 그것을 해석하는 자의 선이해는 해석하는 자가 그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각을, 또는 맥락을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이 선이해는 곧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융합되어서 새로운 진리 지평이 열리게 하는 조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평(地坪)은 어떤 사건의 맥락을 가리킨다. 예컨대 영화는 그 영화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세계가 있다. 영상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설명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예술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화의 지평이다. 서로 다른 지평들이 절대적으로 상호간에 넘나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구분된다. 다른 예를 들자면, 구약성서의 역사적 보도 중에서 유대인이 가나안을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보면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아이 성(成)의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 짐승과 어린아이까지 전멸시키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어디 그런 이야기뿐이겠는가. 구약성서의 율법은 이방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보도들은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지평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구조에서만 해석되어야지 오늘의 윤리적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한 개인이나 민족의 생존문제는 그들의 본질 문제를 뛰어넘는 그들만의 고유한 지평에 속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해석에서 “해석의 설명적인 기능은 텍스트의 이해를 위한 ‘선이해’*에 기초를 놓으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53).

*이런 선이해의 기초를 제공하는 해석의 설명적 기능을 확보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서읽기와 신학적 해석에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총을 들고 전장에 나서는 군인처럼 성서의 근원적인 메시지에 돌입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서성이는 결과를 맺고 말 것이다. 성서에 진술되어 있는 많은 사건과 경험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 그 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런 삶 전반에 대한 인식이 준비되어 있어야 그 성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성서를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거나 또는 도구적인 목적에서만 다루기 때문에 진리의 속성이라 할 그 은폐성이 우리에게 열리지 않는다.

설명과 설교
따라서 기독교의 설교자는 일단 성서의 지평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성서에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전후 맥락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설교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지평적 이해 없이 설교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난다. 아주 단적인 예를 들자면 십일조 헌금을 일괄적으로 모든 기독교인에게 적용시키는 설교가 그것이다. 십일조의 지평이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될만한 성서의 가르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설교한다. 물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더 할말은 없다. 그렇게 헌금을 드려서 교회도 부흥하고 신자들의 믿음도 좋아지니까 괜찮은 일이라고 강변한다면 기독교의 진리론적 입장을 포기하고 단순히 값싼 실용성에 매몰되고 마는 격이다. 이런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라고 할 수 있을는지. 여호와의 증인은 구약성서를 문자적으로 적용시켜서 수혈을 거부한다. 비폭력을 절대적인 윤리적 실천 규범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反)폭력까지 부정하게 된다면 명분상으로는 매우 성서의 정신에 투철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간 삶의 구체성이 왜곡되고 말 것이다.
이런 지평에 대한 선이해가 전혀 없다거나, 불충분하거나 왜곡되어 있다면 성서 해석 자체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불충분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은 성서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그것이 설교라고 여긴다. 늘 똑같은 설교를 듣고 살아왔기 때문에 약간의 입담만 있으면 아무런 신학적 훈련이 없이도 얼마든지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있을 정도다. 아마 이런 사람들은 설교를 신문의 사실 보도나 아니면 생물학자들의 과학적 분석, 또는 보험회사 직원들의 상품 설명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설교는 그런 이들보다는 시인과 역사학자들의 일에 훨씬 가깝다. 어떤 객관적 사실을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전달 방식을 총동원해서 감동적으로 전하는 것에 무게를 둔다기보다는 그 사건을 맥락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설교자는 철학, 문학, 예술,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성서의 세계에는 바로 이런 요소들이 그 바탕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번역하다

앞서 두 번째로 거론한 ‘설명하다’의 의미가 텍스트를 맥락적으로, 지평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면, 이 세 번째의 ‘번역하다’는 텍스트와 만나는 독자의 언어 세계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양자 모두 단순히 텍스트에 관한 사실 보도가 아니라 심층적으로, 지평적으로 이해한다는 데에서는 비슷하지만 독자의 언어 세계에 주안점을 둔다는 점에서 번역으로서의 해석학적 특성이 있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해석은 낯선 두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일인데, 이 두 세계는 다른 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바른 번역이 필연적이다. 아무리 중요한 문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를 번역해내지 못하면 해석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해석학의 어원적 의미에서 ‘번역하다’, ‘통역하다’가 세 번째 특성으로 거론된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마야 문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활동 상황과 그 연구 업적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된 적이 있다. 돌에 새겨진 마야의 상형 문자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야를 연구하는데 중요한지 어떤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지만, 어느 학자의 연구에 의해서 그 비밀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도 혼자만의 노력으로 달성되는 게 아니라 이미 앞서 있었던 어떤 학자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그 비밀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되는 해석의 역사가 마야의 상형 문자 사건에서 벌어진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럽 역사에서 12세기 어간에 모든 학문의 토대로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아라비아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을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데에 있다. 그만큼 번역은 학문 활동에서, 특히 인문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실 한국 신학도 여전히 번역의 단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유럽의 신학역사가 2천년인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겨우 1백년 내외라는 걸 감안하면 이런 요청은 당연하다. 어쩌면 어줍잖은 책을 쓰기보다는 번역을 반듯하게 해내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신학서적의 번역은 90년대 들어와서 상당히 많은 진척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너무나 열악한 상태다. 예컨대 칼 바르트의 “Kirchliche Dogmatik”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 나라와의 비교가 아예 무의미하다. 1권 1부가 2003년도, 또 하나의 다른 부가 2005년도에 겨우 햇빛을 보았다. 이렇게 신학 서적의 번역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 이유는 우선 그걸 감당할 만한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신학 전문 서적을 번역하려면 영어나 독일어에 대한 충분한 실력과 우리 말 읽기와 쓰기 훈련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하며, 근본적으로 신학적 소양이 그것을 지탱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원어 실력이 있어도 우리 말 읽기와 쓰기가 부족하면 번역가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런데 우리의 여건상 대학 교수들이나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데 학교 업무에 쫓기다보니 번역에까지 손이 돌아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이 번역 작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해외 선교사 한 명을 파송하는데 드는 경비가 일 년에 최소한 3,4천만 원이라고 한다. 이런 비용을 감당하는 교회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 교회의 저력을 실감하게 한다. 반면에 신학서 번역을 위해서 이런 돈을 투자할 교회가 없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기독교 출판사가 번역료를 충분히 감당할 만큼 우리의 출판 시장이 건강한 것도 아니다. 현재 너무나 값싼 노동력의 대가로 이 정도나마 번역서가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번역은 단순히 낱말의 사전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적용시킨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컴퓨터 번역 작업이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텍스트와 독자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격이, 특히 서로 다른 언어 사이에 놓여 있는 그 간격이 문자적인 번역으로는 결코 메워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단지 실용적인 의사소통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형성된 언어는 그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예컨대 독일어 Wirklichkeit는 어떤 세계의 진리론적 실질을 의미하는데, 이에 맞는 영어나 한국어는 없다. 이 작은 단어 안에 독일 사람들의 세계관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선 말일뿐만 아니라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우리 설교자들이 주로 다루고 있는 성서 번역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아주 확연하다. 성서의 세계는 오늘과 같은 문제들이, 즉 생태계 파괴, 핵무기, 세속화, 새로운 물리학 같은 문제들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물론 인간이 먹고, 배설하고, 죽는다는, 또한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이 실존적 문제야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세계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달랐다. 오늘 젊은이들의 관심과 기성세대의 관심 사이에도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데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과 동서양이라는 공간적 간격 사이에 놓여 있는 성서는 두말 할 것도 없다. 우선 텍스트의 사건을 맥락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지만 그것을 오늘의 언어 세계로 살려내는 작업도 역시 동일하게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해석의 어원적으로 세 번째 기능인 번역은 해석에서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성서시대의 세계와 오늘 독자의 세계 사이에 지평융해가 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불트만이 제시한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 논의는 이 번역의 요소에서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신화의 세계에서 형성된 언어가 과학적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려면 그 두 세계의 차이를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탈신화화 논쟁에 깔려 있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성서의 세계를 담고 있는 신화적 표상이다. 우리가 아무리 헬라어의 문법에 능통하더라도 성서를 완벽하게 번역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성서 헬라어가 신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이런 신화의 틀을 깨고 들어가 그 근본을 이해한 다음에 그것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만 참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불트만의 이런 주장이 지나치게 성서의 권위를 인간의 실존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킨다는 약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 언어의 세계와 과학적 언어에 익숙한 독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는 점에서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팔머는 탈신화화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탈신화화와는 성서의 해석에 의하여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결과이다. 하지만 앞서 보다시피 원칙적으로 탈신화화는 모든 역사적인 문헌이나 문학적인 텍스트들을 읽을 때에도 일어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는 탈신화화가 텍스트로부터 그 것의 극적인 직접성을 박탈하려 하지 않을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간단히 말해서 언어 자체의 함축된 그리하여 문학작품에서의 언어 사용에 함축된 세계관에 대한 상술은 기존의 문학 해석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61).

번역과 설교
해석학의 ‘번역하다’라는 어원적 의미와 설교의 관계를 위에서 말한 독자의 언어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좀 더 검토해보자. 우선 오늘의 많은 설교가 직역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해석학적인 관점에서 반성되어야 할 점이며, 따라서 설교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미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구약성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님은 율법을 새롭게 번역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안식일 논쟁에서도 역시 바리새인들의 해석은 직역에 머물렀지만 예수님은 그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살리는 의역으로 나갔다.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과거의 문자에 얽매여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그 문자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에, 즉 진리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텍스트는 그 당시의 구원 사건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사람은 오늘의 방식으로 새롭게 진술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새로운 해석이 빠진 설교는 죽은 설교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 전통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미 그 안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해석자는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대개의 설교자들은 성서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단지 주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편집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주석은 기껏해야 성서의 표면적 의미를 독자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에 머물기 때문에 그 진리의 세계가 새롭게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이 폐쇄되어 있으며, 편집은 성서의 여러 정보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나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서의 세계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많다. 헬무트 틸리케가 학생들에게 신학용어나 성서의 전문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설교문을 작성해보라고 숙제를 냈다고 했는데, 오늘의 설교가 과거의 문자를 그대로 베끼듯 사용하지 않고 오늘의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려 내는 작업이 설교 행위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원전의 세계관을 그대로 전하면서 그것을 복음적이라고 강변할 수는 없다. 설교의 이런 기능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면 설교자는 오늘의 언어 세계를 알아야 한다. 오늘의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 진리, 사상(事象), 현실성을 바탕에 두고 성서의 세계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평생 동안 한 번도 갈지 않은 단 한 자루의 칼로 수많은 소의 뼈와 살을 도려낸 어떤 백정처럼 말이다(장자). 오늘의 지성인들이 설교를 지루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설교가 이런 노력 없이 실행되는 까닭이다. 매일 듣던 이야기, 그 상투적인 용어와 구도를 약간의 수사적 기술을 통해서 전하려고 하니까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설교의 계시론적 능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구원’, ‘생명’,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오늘 우리의 언어세계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해석해낼 수 있을까? 또는 이런 성서의 언어에 어떤 내용을 채워야 오늘의 사람들이 리얼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성서를 해석해야할 설교자들의 고민이며, 동시에 일종의 화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원적인 의미에서 해석학의 세 가지 기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구어적 특징을 보이는 ‘말하다’, 지평적인 선이해를 요구하는 ‘설명하다’, 낯선 세계를 담고 있는 두 언어 사이에서 필요한 ‘번역하다’가 그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다루게 될 몇 명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해석학적 특징도 역시 기본적으로 이런 어원적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서와 교회 역사의 문서를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나게 해야 할 신학 작업도 역시 이런 구도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물론 현대 해석학이 이런 어원적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삶, 현상학, 존재, 상징, 역사 문제가 중심 주제로 부각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 세 기능은 해석학 논의에서 축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레벨:0]큰바위얼굴

2007.05.11 21:43:47
*.209.6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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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이길용

2007.05.11 22:11:20
*.141.1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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