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신학과 교회

신학입문 조회 수 5215 추천 수 161 2004.09.08 14:15:55

2장

신학과 교회

 

 

신학 무용론

 

신학생들은 대개 앞으로 교회에서 목사로 활동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학을 교회의 실용적 학문으로 여기는 편이다. 그런 생각은 원칙적으로 옳다. 설교, 심방, 예배인도, 전도, 교회 조직과 관리 등, 목사로서 감당해야 할 많은 업무를 신학대학교에서 충실하게 익혀야만 한다. 신학생들이 미래에 지도자로 활동하게 될 교회 공동체는 어떤 종교적 관념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인 인간의 모임(에클레시아)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교회의 업무는 분명히 실(實)과 용(用)이라는 성격이 있다. 그러나 신학은 목회와 일치하는 게 아니다. 신학과 교회, 또는 신학과 목회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두 세계가 전혀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신학은 결국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단지 도구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학과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과연 있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의 시작과 끝부분에 이 문제를 반복해서 다루고자 한다.

우선 이 관계를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에릭 프롬은 그 책에서 사랑의 의미와 실체에 대해서 소상하게 해명해 주고 있다. 그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듯이 사랑은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 속한다든지, 또는 사랑은 예술처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이 옳든 그르든 일단 사랑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행위를 우리의 경우에 대입시킨다면 ‘신학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사랑의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랑에 관한 이론을 충분하게 이해했다는 사실과 우리가 어느 구체적인 대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이론을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론에는 ‘빠삭’하지만 실천에는 무능력한 사람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 사랑에 대한 이론적 반성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탐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프롬의 책이 풀어내려는 사랑의 세계에 대한 이론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랑의 삶 사이의 관계가 관점에 따라서 가까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위에서 예로 든 사랑의 이론과 그 능력에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은 하나님의 세계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고 교회의 목회는 그 하나님을 교회 공동체 안에 실현해나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가까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은 신학을 목회의 도구로만 생각함으로써 교회 현장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생산해내고 있다. 그것은 곧 신학을 신학적 토대로부터, 예컨대 계시나 말씀 등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류를 말한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니까 접어두기로 하고, 신학적이지 않은 목회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에 대해서만 한 마디 짚도록 하겠다.

그것은 곧 교회의 자기 목적론적 사유체계이다. 교회의 존재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둔다는 말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의존적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난 역사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교회가 이 세상의 다른 단체나 조직과 별로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조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온전하게 전승시켜온 공동체는 교회 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고유한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스스로에게 존재의 토대를 둘 수 없다. 신학적인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교회가 역사 안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를 놓고 볼 때도 역시 교회는 절대적인 조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 근거를 당연히 자기 자신 내부에 놓을 수가 없다.

만약 신학이 교회의 존재 근거를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두어야만 하는 그 운명에 관한 사태를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신학적 성찰은 분명히 목회 현장에서 필수적이다. 이런 필수적인 신학작업이 우리 교회 현장에서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있는 이유는, 즉 교회 현장에서 신학 무용론이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교양으로서의 기독교 신앙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의 신앙이 교양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적이다. 신앙이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세계에 천착하기보다는 인간의 일반적인 종교심이나 욕망을 자극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좀더 세분화해서 살펴보자.

일반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는 가장 강렬한 동기는 초능력적인 존재를 통해서 자기 삶의 조건을 확대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데에 있다. 이런 신앙의 형태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기복주의’, 또는 신앙의 도구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 이런 기복적인 요소가 뿌리깊이 놓여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교묘하게 결탁해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삼박자’ 축복이라는 용어로 기독교인들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신년이 되면 ‘신년맞이 대축복성회’라는 집회를 연다. 학생들의 수능시험을 앞두고 앞 다투어 특별 새벽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이런 성격의 모임이 몇몇 이벤트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소 교회의 구조가 그렇게 작동된다는 데서 그 심각성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 믿고 잘 먹고 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자극한다는 말이다.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려는 욕망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런 욕망이 교회의 신앙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일종의 위기이다. 교회가 이런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 한 신학은 교회 안에 발 디딜 틈을 마련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이원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복주의가 기독교 신앙을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원론은 신앙과 삶을 구분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제자도(弟子道)’를 회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제자도는 본회퍼가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는 엄청난 역동성을 보이고 있지만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하다. 군사독재 앞에서 침묵하며,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부의 양극화 현상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생태파괴를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에 대해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노동, 성, 남녀평등, 삼세계, 폭력, 전쟁, 평화 등등, 이런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독교 신앙이 이런 인간의 모든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간섭하고, 더 나아가서 교회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기 목소리를 내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교와 구원을 우리 신앙의 토대로 삼는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을 철저하게 분리시킴으로써 우리 신앙이 매우 공허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역사와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기독교가 이 역사 앞에서 어떤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역사적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일종의 편이주의에 빠졌으며, 결과적으로 신학 무용론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짚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현상인 신앙의 도구화와 이원론적 세계관의 결합으로 인해서 오늘 우리에게 일반화한 신앙의 유형은 곧 신앙의 ‘교양화’다. 그것이 때로는 종교적 열광주의로 나타나고, 때로는 문화적 지성주의로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기독교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교양의 차원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적으로 대학이나 사회교육에서 교양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말투와 행동이 세련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처럼 종교적인 교양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모습을 갖추는 신앙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신앙적인 교양이 있는 사람은 예배 참석, 기도, 헌금, 각종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봉사 활동 등, 기독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확보함으로써 교회에서 매우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신앙적 교양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면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의 순으로 직분이 상승된다. 기독교인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자신들의 교양을 쌓는 일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예컨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복지관, 실버타운, 사회봉사를 위한 여러 조직 등이 그런 것들이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요소들이 교회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근본 이유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전통이 구약과 초기 기독교로부터 계속되어왔다는 사실을 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교양에 속한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이런 교양이 바른 신앙의 토대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한다면 교회의 구원론적 징표를 약간 드러내는 수단이 되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업적의(義)로 작용하게 된다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훼손시킬 뿐이다.

여기에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흡사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신앙적 교양을 갖춘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생각하지만 이런 신앙 유형이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한다. 교양 중심의 신앙생활에는 곧 기독교 신앙이 인간학의 수준으로 떨어져버린다는 위험성이 있다. 폴비츠의 <신이 된 심리학>을 참조하라. 이런 차이를 식별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상황과 인간적 정서와 심리가 작용하는 상황을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그 당시에 가장 첨예한 논란거리는 ‘안식일’ 문제였다.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당장 죽는 사람이 아니라면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치료를 하라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그런 것을 도외시하고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예수의 행동이 당연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세련된 행동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종교적으로 세련된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는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종교적 교양에 치중해 있는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와 자유의 영에 개방적이고자 하는 신학적 성찰이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신학에 대한 무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신학의 무용론 현상을 교회의 현실에만 책임을 미룰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목사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제 이 문제를 목사 스스로에게서 찾아보도록 하자.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핵심적으로 짚어야 할 대목은 목사가 신학을 모르고 대신 대중추수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학을 모른다는 사실과 대중추수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이 두 현상은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목사의 정체성에서는 서로 맞물려 있다. 즉 신학을 모르는 목사는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욕망에만 치우치는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두 문제를 여기서 함께 다루다보면 글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니까 주로 목사의 ‘신학 없음’에 근거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자.

7년 내지 10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고, 평생 성서를 읽으면서 설교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신학이 없다고 한다면 기분이 나쁠지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다. 신학이 없다는 말은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중세기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른 전체 신학적 전통에 대한 소상한 지식이 없다는 뜻보다는 기독교가 말하려는 근본을 모른다는 뜻이며, 아울러 기독교 교리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해 목사들은 하나님, 그의 나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오해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들은 매 주일마다, 또는 거의 매일 설교를 하면서 자신들이 전하고 있는 그 대상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금 공부를 한 목사라고 한다면 몇몇 신학자들의 논리를 제법 열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그마는 그것 자체가 지난 수천 년간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미래의 역사까지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공부한 몇 가지 체계 안에서 기독교 신학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사는 넘치는 자신감으로 신자들에게 구원을 강요하거나 선동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단 주어진 교리를 적당하게 포장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신자들에게 재주껏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지는 다년간 목회경험이 있는 목사들의 행위에서,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행위에서 금세 확인된다. 한 교회에서 설교를 어느 정도 오래 한 목사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태도가 나타난다. 하나는 설교의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이들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설교를 너무 쉽게 잘하는 이들이 있다. 서로 정반대의 현상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정신적인 상태는 거의 똑같다. 대부분의 목회자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전자의 사람들은 매번 똑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소위 명설교자로 정평이 나 있는 후자의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언변을 통해서 그 내용을 화려하게 포장할 줄 알기 때문에 설교를 즐기는 편이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지루하게 전달함으로써 본인과 신자들이 설교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포장을 매끄럽게 함으로써 설교의 위기가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설교가 담아내야 할 내용이 이미 완료됨으로써 역사와 세계를 향해 개방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교자가 신학적인 사유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오늘 교회 안에서 복음은 역사와 더불어서 심화하거나 확장되는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판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 같다. 소위 미국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이들은 복음을 이미 완성된 상품으로 간주하고 판매기술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 ‘총동원 전도주일’이나 ‘여리고 작전’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도 프로그램들이 아무런 신학적 반성 없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 심지어는 전자제품 회사나 자동차 판매 회사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따라서 ‘올해의 전도왕’을 뽑아 시상하는 일들도 흔하다. 요즘 한국 교회가 ‘목회상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와 연관되는 현상이다. 결국 신학(Theologie)의 실체와 그 깊이를 모르는 목회자들로 인해서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겉모양만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추구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거의 보험 회사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수행으로서의 목회

 

이제 목사는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약장사 같은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야만 한다. 이 말은 목사의 설교와 행위가 너무 유치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해 있어야 할 ‘수행’의 차원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성서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설교해야 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할 목사는 이미 완성된 상품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진리를 향해 ‘수행’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그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아직 우리의 인식 세계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리고 그의 궁극적인 생명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다. 흡사 우리는 꽃씨만 볼뿐이지 아직 화려한 자태의 꽃을 보지는 못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폐된 생명의 세계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꽃씨만 보고 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설교행위는 결코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자동차나 보험의 판매 기술이 아니라 장좌불와나 독거의 방식으로 어떤 세계를 열어 가는 도(道)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생명, 은폐성, 수행 등등, 이런 개념 안에서 목회를 하다가는 신자들이 모두 도망가고 말 것이라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은 그렇게 철학적으로 심각하기보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단순한 사건에 있다는 점에서 목회도 여전히 단순해야 한다고 말이다. 두 가지 반론이 모두 옳다.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스스로 학자연하거나 복음을 추상적 사유 체계 안에서 해명하려다가는 당장 먹고 마시는 생존의 문제에 급급해 있는 신자들에게 기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계시와 역사, 종말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점에서 가능한대로 복음을 단순하게 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옳다. 그러나 여기서 목회를 수행의 차원에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은 복음을 전한다면서 고담준론만 읊조려도 된다거나 신자들을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일반 신자들까지 모두 신학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목사만이라도 그런 깊은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만 복음이 왜곡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목사가 그런 길을 의식하고 꾸준하게 전하고 실행한다면 결국 신자들의 신앙 세계로 목사만큼 깊어질 것이다. 진리(알레테이아)는 근본적으로 그런 존재론적인 비은폐성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으로서의 목회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목회를 공격적으로 하지 말고 오히려 수동적으로 끌어가는 게 옳다. 일종의 소극적인 목회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이 하시기 때문이다. 이 성령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역할을 가능한 대로 축소시켜야만 한다. 여기에도 반론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우리가 세계선교의 사명을 받았으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믿음 없는 소리 그만 해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인간학적 착각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통해서 일한다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도 역시 주도권은 그 영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자신을 배워두어야만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구원을 펼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인간의 열정이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의 영은 숨쉬기 힘든 상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의 자유와 복종

 

오늘 우리는 ‘교회와 신학’이라는 주제 안에서 신학 무용성이라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좀 분석해보았으며, 아울러 목회의 본질을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해보았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 글을 시작할 때 제시하고 답을 찾았던 것처럼 교회와 신학의 바른 관계에 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면 신학은 교회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니면 의존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앞에서 검토한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주어졌다고 본다. 신학은 교회에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자리에 놓여 있다. 이런 변증법적 자리에서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관계가 적절하게 유지될 때 교회도 살고 신학도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신학이 교회에 의존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간단히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의 근원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헬라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변증하려는 목적을 두고 신학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 초기 기독교가 자신들의 신앙을 주변 세계에 변증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신앙에만 자족하고 있었다면 신학 작업은 아무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교회가 다른 세계를 향해서 어떤 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려는 신학 행위는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사귐인 교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초기 기독교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토대가 부실했다면 아예 신학적 사유와 그 토대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신학이 기본적으로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그 자료로 삼는다는 사실에서 그 교회론적 기능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아무리 철학적 인식론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그 어떤 기구도 교회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신앙, 그리고 그런 역사를 담고 있는 기구는 없기 때문에 신학자는 근본적으로 성서와 교회의 역사를 가장 핵심적인 자료로 삼아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끊임없이 교회에 의존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학의 의존성은 교회를 절대화하려는 게 아니다. 교회의 전승이 아무리 소중하고 신학 자체가 그 전승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진리에만 의존한다는 점에서 교회로부터 자유롭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면 진리를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역사적 교회 현실을 뛰어넘어 활동하는 영에게만 의존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왜곡 현상을 직시하고 비판할 수 있었다. 자유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신학은 교회의 상부구조인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야 한다. 둘째, 신학은 세계 보편적 진리와 대화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신학과 교회, 교회와 신학의 이런 상호적으로 변증법적 관계를 날카롭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어 신학적인 교회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끝으로 이런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언급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의 주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자.

 

신학은 교회를 섬기되 특히 교회 내에서 설교직, 교육, 목회상담을 떠맡은 지체를 섬긴다. 신학은 이들의 인간적인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는가를 항상 새롭게 물어야 한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저들의 말의 근원이요, 대상이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이들로 하여금 진리물음에도 훈련시켜서 이 문제에 있어서 올바른 이해, 사고 및 말을 모범적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신학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익숙케 해야 한다. 즉 신학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만큼 열심히 작업해야 하고, 이 작업의 지침까지 제시해야 한다. 시계추가 시계의 운동을 조정하듯이 신학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일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지적했다. 따라서 신학이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 세상, 인간, 역사적인 일들 등에 관심을 갖는다면 신학의 본분을 상실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지체)들, 특히 책임을 부여받는 지체는 자신의 상황과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학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섬김에 있어서 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칼 바르트, 이형기 역, 복음주의신학 입문,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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