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1. 플라톤 철학과의 연관성

플라톤 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이데아’에 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은 ‘형상과 질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한 가지 개념만으로 그리스 철학의 대표자들을 재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전이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맛보기’ 차원에서 형상과 질료 개념을 언급해보자.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 앞으로 자세하게 언급하게 되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 개념에 대해서만 한 마디 짚도록 하겠다.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질료만으로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이를 수 없다. 사물의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게 하는 힘이 곧 형상이다. 예를 들어 집의 질료는 목재요, 형상은 집이다. 모든 사물은 그 질료에 대한 형상을 갖고 있다. 생성과 결부시켜 말하면, 어떤 사물이 생성되려면 우선 만드는 사물의 형상이 제작자의 머리에 있어야 하며 그 형상을 실현시킬 질료를 구해야 한다. 여기서의 질료는 그 사물의 가능태라고 한다. 그러므로 형상과 질료의 대립관계는 곧 현실성과 가능성의 그것이기도 하다. 원래 이 형상을 최초로 생각한 사람은 플라톤인데, 플라톤에게는 이 형상이 바로 이데아와 같은 뜻이다. 기본적 착상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지만 플라톤은 그 형상이 개개의 사물 속에 공동으로 있을 수 있으며 또 사물을 초월하여 자체적으로도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반대했다. 이제 우리는 판넨베르크가 설명하고 있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검토해보자.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 form)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신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하나님의 ‘형상’(形象)과는 다른 의미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이 형상은 form이 아니라 image이다. 그러나 양측 모두 사물과 생명의 표면이 아니라 훨씬 심층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322/1)는 플라톤의 제자로서 플라톤이 죽기 까지 대략 20년 정도 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 철학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아무리 독창적인 철학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플라톤과의 사상적 관계를 일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을 주석한 학자들이 대부분 신플라톤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 흐름이 크게 상이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중세기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연구가 심화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플라톤 철학과 큰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보편개념의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위에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특성(eidos)을 질료와 묶여 있으면서도 사물의 실체를 구성하는 형상(hule)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육체는 hule이고, 영혼은 eidos이다. 이에 반해서 플라톤은 에이도스를 초월적인 이데아라고 보았다. 보편에 대한 중세기의 사유 유형을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1) universalia in re(실재 안에 있는 보편)- 이 유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으로서 개념은 인식될 대상 안에서 실현되다.
2) universalia ante rem(실재 앞에 있는 보편)- 이 유형은 이데아를 그것에서 모사된 사물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입장이다.
3) universalia post rem(실재 뒤에 있는 보편)- 이 유형은 소위 유명론* 해석인데, 이에 따르면 보편 개념은 사물과 상관없이 단지 사람에 의해서 유추된 이름뿐이다.

* 유명론(nominalism)은 보편의 실재론(realism)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실재하는 것은 물(物)이며, 보편은 그것의 뒤에 있는 이름(nomina post res)이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둔스 스코투스와 옥캄(1280-1349)이라 할 수 있다. 물은 명확히 개체를 의미하며, 결코 나눌 수 없다. 즉 물은 보편에서 연역적으로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보편은 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명론은 감각적인 자연을 신으로부터 독립시켜 그 고유한 존재론적 근거를 포착하려는 의도가 있는 셈이다. 옥캄에 의하면 감각적인 자연을 포착할 수 있는 기초는 감각적인 경험 말고는 있을 수 없다. 이런 지각을 가리켜 그는 직관적 인식(cognitio intuitiva)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 지식은 그것만으로 참된 지식이 될 수 없고, 이성을 통해서 검증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이성 작업을 통해서 사물 개체를 뛰어넘는 추상의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추상적 인식(cognitio abstractiva)이라고 한다. 옥캄은 이런 제2의 추상적 인식의 내용을 보편이라고 불렀다. 결국 그는 신으로부터의 연역을 거부하고 개체 사물로부터의 추상에서 이런 신의 영역을 확보한 것이다. (세계철학대사전 참조).  

참고적으로 고대인들이 질문하고 있는 이 보편성 문제가 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동양의 사유세계는 이런 보편이라는 개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직관하는 방식을 취한 반면에 서양의 사유는 그 내부의 체계를 논리적으로 해명해보려고 했다. 우리 앞에 명백하게 놓여 있는 이 실재라는 것은 유한하고 잠정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다층다기한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 모든 실재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보편적인 것이 이 실재 안에 있는지, 아니면 이 실재보다 우선하는지, 아니면 실재의 뒤를 따라다니는 허상인지 밝혀보려는 노력이 서양철학에서 끊이지 않았다. 사물의 실체를 직관하려는 동양의 사유는 그것이 일종의 그림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했다. 자연과 도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실재의 근원이라고 본 노장의 사유를 굳이 위에서 예시한 세 유형에 비추어본다면 서로 조금씩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영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검토해보자. 플라톤이 생각하는 영혼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선재하는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영혼의 선재설을 믿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물체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자기운동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운동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물체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영혼이 운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물체가 운동하는 근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역시 육체와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본 플라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다. 사물을 초월하는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 즉 생명체의 ‘형상’ 자체가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질료 안에서 형상이 현실화하는 것이 곧 생명체의 생성이라고 본 것이다. 운동은 여기서 생성이다. 즉 운동은 “현실성을 하나 되게 하는 생성이며 전체가 되게 하는 생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기서 얻어지는 구체적인 리얼리티가 곧 우시아, 즉 존재자다. 즉 형상과 질료로 구성된 존재자들이 여기서 획득된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현실태, 운동, 형상과 질료 등의 관계는 좀 복잡하기 때문에 대충 이런 정도로 접어두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핵심이라 할 질료와 형상개념이 기독교 신학, 특히 영혼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만, 특히 영혼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조금 더 검토하기로 하자.
형상이 질료와 묶임으로써 형태를 얻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은 13세기 초에 기독교 신학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질료적으로 실현된 형상들은 추상적인 인식에 의한 지각 조성자로부터 떨어져 나와야만 했다. 왜냐하면 거의 자연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사물을 관찰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질료와 분리된 형상만의 어떤 형태는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스가 영혼 안에서 활동한 결과로 인해서 이런 추상화의 인식은 해체된다. 그는 영혼과 나뉘어져 있지만 활동하는 누스만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에 몸과 묶여 있는 영혼은 몸과 더불어 사라진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 불멸성을 거부함으로써 플라톤과 날카롭게 대립한다. 활동적인 누스는 빛처럼 영혼 안으로 돌입하여 작용함으로써 영혼으로 하여금 지각 조성자에게 있는 그 정신적인 형상들을 인식하도록 자극한다. “단순히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영감의 모델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영감의 모델은 인식과정에 대한 고대 표상의 전체 역사를 규정하는 그것이다.”(90).
위에서 우리가 검토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의 연관성에서 몇 가지 두드러진 부분을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플라톤에게는 보편이 실재보다 우월한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실재와 동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식되어야 할 그 대상이 없이는 보편을 생각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플라톤은 보편이 대상을 초월한다고 보았다.
둘째, 영혼의 선재설과 불멸성을 믿는 플라톤에 반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한다. 아울러 플라톤은 영혼이 자체적으로 운동한다고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운동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운동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아퀴나스가 하나님을 부동의 동자로 증명하려고 한 것 같다. 또한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보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셋째,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초월적인 성격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감각적 세계의 형상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역사 초월적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데아는 역사 내재적인 셈이다. 플라톤은 이 세상을 초월하는 어떤 근원에 대해서 관심을 보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힘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다. 아퀴나스의 자연과 계시의 종합이 바로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2. 교부신학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플라톤의 철학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교부들만이 아니라 고대의 철학자들 모두에게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플라톤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수한 부분이 부각되기에는 플라톤 철학의 위력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 그 이유일 것이다. 개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교부들이 신론 부분에서는 거의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반면에 인간론 부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이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따라가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감각 세계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고, 영적인 세계와 신성은 이 범주론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는 없다. 출애굽기 3:1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존재자’로 계시하셨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클레멘스가 볼 때 이 존재자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었다. 하나님을 존재자의 피안이라고 주장하는 플라톤 철학만을 따르다가는 출애굽기의 ‘존재자’ 개념을 해명하기 힘들다. 여기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어디까지 적용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대두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하면 존재자(우시아)는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요소였다. 모든 것들은 이 존재자로부터 서술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도 역시 실체의 범주에 속하는 셈이다. 그래서 교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이 하나님을 제외한 감각 세계에 한정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기독교 신학에까지 여파를 미친 셈이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을 존재자이지만 존재의 피안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레고리우스(G. von Nazianz)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을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만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이 존재자는 존재자인지만 사물과 달리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범주(Kategorie)는 존재자를 정확하게 진술하는 보편적인 형식이며, 동시에 이들 존재자가 그 아래 포섭되는 최고 유개념인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가리킨다. 실체(ousia), 양(poson), 성질(poion), 관계(prosti), 장소(pou), 시간(pote), 위치(keisthei), 상태(echein), 능동(poiein), 소동(所動, paschein).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의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라서 최고의 존재자를 하나님이라고 설정한다면 아무리 최고의 수사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존재자(Seiende)에 불과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자라고 한다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능력한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범주 안에도 들어올 수 없는 피안에서만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범주 안에 들어오면 그 완전성이 손상당하고 피안으로 빠져나가면 우리의 인식론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일종의 불가지론에 빠지고 만다. 기독교 신학이 이 딜레마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역사초월과 역사내재의 변증법적 신비를 명확하게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해명해보려는 역사가 곧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에 근거한 삼위일체론 형성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테나고라스는 인간 영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통해서 기독교의 부활신앙에 의한 인간론을 해명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즉 영혼만 불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은 것처럼 참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비슷하다. 영혼과 육체는 ‘형상’을 통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이 되었다. 몸과 영혼의 단일성이라는 교리는 1312년 비인 공의회를 통해서 결정되었는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2세기에 이미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이 단일성 교리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3. 중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자신의 신학적 토대로 삼은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기독교 영역 안에서 절정기를 맞았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시대의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를 거론한 것이지 근본적으로는 13,14세기의 기독교 신학자들이 거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수용된 이유는 교부들이 플라톤 철학에서 느꼈던 그런 동질감이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논리적이고 경험론적인 시대사조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12세기 중반에 아리스토텔레스 문헌이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가질 수 있었다는 점도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제 몇 가지 주제와 학자들을 중심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1) 우선 인식론이다. 어거스틴은 신적인 진리의 빛을 통해서 인간의 영이 깨우치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인 대(大)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와 아퀴나스는 개념적인 내용의 추상화를 통해서 우리의 개념형성이 인식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활동적인 지성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활동적인 지성은 그 활동을 통해서 지각 형성자와 개념적인 내용을 해체시킨다. 13세기 중반에 요하네스(Johannes von Rupella)는 활동적 지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을 어거스틴의 조명이론과 연결시켰다. 이런 논의에 서로 다른 의견이 다양하게 작용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약간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 기독교 신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에 놓인 가장 큰 차이는 신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세계 운동자일 뿐이지 창조자가 아니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야훼 하나님을 세계 창조자로 믿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만약 하나님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일 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유는 손상되고, 이 세계는 일종의 자연과학적 원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13세기 초 파리의 주교로 활동한 빌헬름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조자의 말씀을 전혀 몰랐으며, 또한 비존재자들을 존재하게 하는 그 분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전혀 몰랐다. 즉 그들이 “창조자의 자유에 대한 개념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해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활동하는 지성이 곧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는 의지도 있다. 왜냐하면 의지가 없는 지성은 없기 때문이다. 이 의지는 하나님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신적인 창조 의지가 필연적으로 신적인 지성과 연결된다는 교리가 확인됨으로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즉 기독교는 이 신 개념을 확장시켜서 하나님을 세계 창조자로 표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변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적 착상에 어긋나는 것이긴 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유가 신인동형동성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이런 과정을 밟은 스콜라 철학의 심리학적 신론은 무신론의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런 신관은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3) 세계관 문제가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신론, 혹은 창조론에 관한 논의에서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데미우르고스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플라톤과 달리 이 세계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기독교 창조론과 마찰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렇게 세계를 일종의 코스모스로 보고 그 안에서 만물이 영원히 환원한다고 보는 게 헬라 철학의 일반적 입장이긴 했다. 범주론과 논리학에 근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적 서술을 과학적으로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신학자들에게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영원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야만 했다. 알베르투스는 세계의 창조 문제를 순수하게 신앙적인 진리로 설명해보려고 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야기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의 시간적인 시초에 대한 질문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즉 기독교의 창조론은 세계의 원인에 대한 신앙적 해명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세계의 작용에 의한 엄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비록 세계에 대한 다른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설득력은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인과 작용이 동시에 일어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01). 이들은 결국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해명을 서로 다른 지평의 문제로 방향을 바꾸어놓음으로써 그 긴장*을 해소시켜버린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기독교 신앙은 진화론 앞에서도 상당한 긴장을 경험하고 있다. 소위 창조과학회 유의 사람들은 성서가 진화론보다 훨씬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떼이야르 드 샤르뎅 같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진화론의 입장을 창조론 안으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이외의 대다수 신학자들은 진화론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태도를 표명하기 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정서 일반은 진화론을 부정하는 창조과학회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다. 이 창조과학회의 입장이 얼마나 비신학적인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 조자 없다. 그중에서 한 가지만 짚는다면, 그들은 역사해석과 연관된 성서 계시의 역동성을 축자영감설의 좁은 틀에 축소시켰다. 즉 해와 달이 동에서 올라와 서로 진다는 성서의 표현을 문자로 받아들이는 게 참된 신앙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뜻이다.
  
4)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와 만남으로써 변형하게 된 또 하나의 대목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모든 개개의 존재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곧 하나님의 자유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서 아리비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식의 근거인 신적인 이성이 자기 자신에게 놓여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적인 이성은 간접적으로만 하늘의 물체를 움직이고 코스모스를 움직인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신의 지성이 그 지성을 통해 발현하는 피조물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원인은 사물에 내재한 전형적인 것만(유와 종)이 아니라 개개의 특수성으로 확장된다. “피조물과 그 질서의 사실적인 생산은 당연히 신의 의지가 작용한 소산이다.”(102). 즉 이 세계를 하나님의 의지로 해명한 기독교의 섭리론으로 인해서 지고한 이성이 곧 신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 근대와 아리스토텔레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13세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르네상스를 맞은 15세기에 잠시 주춤했다가 17세기에 다시 한 번 더 정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16세기에 활동한 마틴 루터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거부되었지만 17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특히 그의 형이상학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제 근대의 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사물 사이에 환원될 수 없는 질적인 차이에 근거한다. -Seine Physik ist eine Physik irreduzibler qualitativer Differenzen zwischen den Dingen(bzw. ihren Arten).- 이에 반해서 근대물리학은 모든 물체가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데모크리토스의 학설을, 그래서 모든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차이로 되돌려야 한다는 그의 학설을 따랐다. 질적인 규정에서 양적인 규정으로 물리적 현상의 중심을 찾아보려는 경향은 만물을 장소 변화로 묘사하고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등장했는데, 기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든 운동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런 고전 물리학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그는 사물의 생성과 진행을 그것의 고유성, 즉 에이도스(사물의 특성)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고전 물리학의 공간 개념보다 훨씬 복잡하게 전개하고 있다.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운동하는 것은 곧 질적인 변화인 셈이다. 그런데 17,18세기의 물리학은 운동 개념보다는 이제 장소 변화를 중심으로 다룸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공간변화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물리학의 패러다임은 당연히 뉴턴에 의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에 관한 물리학적 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미해결로 남아 있다. 우리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양적인 변화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쓰임새가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약 나무를 불에 태운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무가 연기로 변한다는 점에서 질적인 변화로 볼 수도 있지만 ‘질량 불변의 법칙’에 의하면 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양측이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만 현재 물리학에서는 질적인 변화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전체는 부분의 총체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 ‘이상’이다. 즉 인간은 단지 단백질 덩어리의 총체가 아니라 그런 부분들을 통해서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훨씬 가깝게 진행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Substanzbegriff)이 계속해서 비판받았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실체가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이라는 주장이 사라지게 되었다. 신칸트주의자인 에른스트 카시러는 근대과학이 기능개념을 통해서 실체개념으로부터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적 기초개념인 생기(event)를 통해서 이 실체개념을 대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개념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고 판넨베르크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실체는 한편으로 (1)다른 것들과 구별되고 규정된 그 무엇(tóde ti)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2)모든 다른 것들이 그것에 의해 언급될 수 있는 그것이다. 진술형식(카테고리)으로서의 실체개념은 차선의 기능으로 타당하기는 하지만 우연한 결정의 변화에서도 여전히 존재론적 기준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체 개념의 이런 측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성격화한 것인데, 이런 측면의 존재론적인 해석이 비판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실체 사상은 그 무엇(tóde ti)이라는 의미에서 불가역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늘 그렇게 규정된 그 무엇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며, 또한 객관적인 리얼리티를 이러한 구별에 전가시키기 때문이다.(106).  

지금까지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대목을 정리하는 것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치겠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이 실재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초월적인 것으로 보았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이 세계에 내재하게 된다. 이 세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를 정확하게 범주화함으로써 논리적인 체계를 세워보려고 했다. 기독교 신학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정확하다고 보긴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에만 한정된다고 타협했다.
2) 인간론에서는 인간 영혼의 선재설을 주장한 플라톤보다는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신학에 훨씬 가까웠다. 즉 인간의 몸과 영혼의 일치를 주장하는 기독교 신학이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말이다.  
3) 13세기에 거의 유일한 철학으로 부각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창조자가 아니라 단지 세계의 운동자로만 본다는 것이었다. 비록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을 하나님의 의지로 확대 해석함으로써 창조의 영역을 확보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신인동성동형론적인 표상으로 빠지고 말았다.
4)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근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부침을 반복하였다. 비록 물질의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에 그 무게를 둔 근대물리학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패러다임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가능태와 현실태에 근거해서 에이도스를 해명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확보하고 있는 역동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장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양적인 차이를 뛰어넘는, 즉 전체는 단지 부분의 총체 그 이상이라는 개념을 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때로는 무시되고, 때로는 과장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그 창조 세계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질문해야 할 우리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철학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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