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칭의와 성화

조직신학 조회 수 8955 추천 수 136 2005.09.22 08:53:17
13장
칭의와 성화

기독교 윤리의 문제
우리가 12장 ‘은총론’에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나름으로 정리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그 문제는 아직도 논쟁 중이며, 앞으로도 여전히 논쟁의 길을 가야만 할 것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폐기할 수는 없다. 과연 누가 이 은총과 율법의 관련성을 완벽하게 해명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함께 검토하게 될 ‘칭의와 성화’에 연결된다. 복음은 바로 칭의이며, 율법은 성화이다.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업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복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의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칭의이다. 또한 은총의 복음 안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완성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기독교인은 복음과 율법의 중간 쯤 어디엔가, 그리고 칭의와 성화의 중간 쯤 어디엔가 서 있는가? 아니면 복음과 은총 쪽으로 기울어 있는가? 또는 복음 안에 율법이 있으며, 칭의 안에 성화가 놓여 있는가? 오늘 우리가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칭의와 성화의 관계이다.  
칭의와 성화에서 우리가 가장 핵심적으로 정리해야할 부분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존재) 사실과 기독교인답게 살아야 한다는(윤리) 사실이 어떻게 연관되는가에 있다. 신학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내가 과연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는가? 성령이 그럴 능력을 제공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윤리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옳은가? 기독교 윤리에 관한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여기서 한 두 마디로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생각이 닿는 정도 안에서 방향을 잡아나가자.
우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않아야 한다는 말은 옳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웃의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행동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많은 설교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윤리에 대해서 강조하는 일이 많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과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흔하게 듣는다. 그런데 여기서 파생되는 곤란한 문제는 이런 윤리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거짓말과 파괴적인 행동이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어떤 점에서 기독교인보다는 이슬람교도와 불교도들이 이런 점에서 훨씬 윤리적으로 살아간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 잘 믿는 미국이 그렇지 못한 인도보다 더 도덕적인가? 예수 잘 믿는 한국 사람들이 토착 불교를 믿는 일본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증거는 별로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별 상관없이 인간이 양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윤리적 행동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한걸음 더 나가서 인간이 윤리적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파렴치한 행위는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 건 신앙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양심으로도 판단될 수 부분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윤리 문제가 단지 직접적으로, 의도적으로 남을 파괴하는 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사태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컨대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을 하고, 거기서 얻은 노획물로 흡족하게 살아갔다. 아마 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도 제법 많을 텐데, 그들은 아무런 신앙적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부리면서도 아무런 신앙적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오늘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그러면서 자신이 성화되어간다고 믿고 있다면 이것처럼 큰 모순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 시대의 비윤리적 행위 중에서 많은 것들은 역사가 흘러야만 그 실체가 드러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우리가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성화의 관계를 단순하게 처리할 수 없다. 이 시대에 그런 문제들이 무엇인지 몇 가지만 간추려보자.
요즘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글로벌 스피릿’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실정이다. 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모든 사람들을 무한의 경쟁 구도로 몰아넣는 이 현실 속에서 기독교인들도 역시 무력하기는 똑같다. 개인으로서 기독교인이 이런 시대정신(Zeitgeist) 안에 긷든 마성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을 고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쩌면 비윤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또 하나의 현실은 분단체제라는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며, 이와는 반대로 친미를 바로 기독교 신앙의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나름으로 신앙의 체험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분단체제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면 판단력을 아주 쉽게 잃어버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그에게 아무런 윤리적 에너지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건 불문가지이다.
기독교 윤리에서 사형 제도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최근에 한기총에서는 사형 제도를 존속시키는 게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했으며, KNCC에서는 그 반대로 주장했다. 여기서 어느 쪽의 입장이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접고, 인간의 윤리가 같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극과 극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충분할 것이다. 한 인격체가 이런 문제를 정당하게 판단하려면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가보다는 이 사회와 역사와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 끊임없는 긴장이 따르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이 당위 앞에서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거나 기껏해야 상대적인 가치만 확보되어 있다는 이 현실이 우리에게 심리적인 짐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천천히 종교개혁자 루터의 입장을 따라감으로써, 그것이 가능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이런 곤혹으로부터 벗어나보자. 그 시작은 인간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인 ‘솔라 피데’ 개념에 대한 논의이다.

솔라 피데(soa fide)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입장과 대립되는 명제로서 ‘솔라 피데’(sola fide)를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믿음은 개신 교회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믿음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의 생각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약간의 차이라는 게 보기에 따라서 근본적일 수도 있고, 별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문제를 정리해야만 한다.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 획득되는 ‘의’, 소위 칭의론과 관계된 사태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과 행위의 근본인 ‘존재와 행위’의 관계이다.
기독교가 ‘의’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운 존재라는 사실과, 이에 반해 인간은 불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구약성서도 이런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가 대비가 흔하게 등장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예언에서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가장 적나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대목만 인용하자.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암 2:6-8).
이렇게 불의한 인간들이 의로운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만이 아니라 모든 도덕과 윤리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있다. 인간의 불의를 막기 위해서 모든 민족은 나름의 미풍양속을 지켜왔으며, 모든 국가는 실정법을 발전시켜왔다. 아마 이러한 미풍양속과 실정법이 인간의 불의를 막고, 의를 키워주는 역할을 실제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명이 발전한 민족이나 국가일수록 이런 법체계가 매우 자세하게, 어떤 점에서는 좀 장황하게 확장되고 있다.
기독교 역시 ‘어떻게’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이 약간 구분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행위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개신교회는, 특히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인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삶으로 그런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결코 통전적인 의로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믿음과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경우가 우리의 현실에서 늘 일어난다는 걸 전제한다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칭의가 눈에 보이는 칭의로 나타나기 위해서 결국 행위를 통한 의로움이라는 문제도 믿음을 통한 의로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 트리엔트 공회에 근거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칭의 신앙을 윤리적 가치가 결여된 사상이라고 비판한다. 슐라터(A. Schlatter)에 의하면 칭의론은 행위를 배재하고 신앙만을 남겨 두는 것으로써, 바울의 생각과 어긋난다. “신앙이 있는 곳에는 사랑과 회개와 복종과 기도와 행위도 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에게 신앙 외에는 아무 것도 바치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만든다.”(Gottes Gerechtigkeit, 450). 이런 가톨릭교회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야고보서의 말씀이나,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게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언급이나,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윤리적인 문제를 매우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로마서를 염두에 둔다면 ‘솔라 피데’라는 주장이 오해를 살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반해서 루터의 입장은 인간의 의 문제를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법적인 문제로 본 것 같다. 그가 칭의론을 실질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문제로 보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불의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눈여겨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simul iustus et peccator”,* 즉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의인이며, 동시에 실제로는 여전히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이다.

*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루터의 이 명제는 훨씬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신학적 구도로 접근해야만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 신학적 해석이 따르지 않는 경우에 이 주장은 자칫 현학적인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김균진의 설명에 따르면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이 명제는 먼저 죄인과 의인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2) 이 명제는 서술을 뜻하는 동시에 명령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의 의로움에 대한 인정(Zuspruch)인 동시에 요구(Anspruch)이다. 3) 이 명제는 기독교인들이 의로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을 의미한다. 4) 이 명제는 칭의의 재판적-간주(看做)적 성격을 가리킨다.(김균진 3, 242-247참조).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를 성취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뚫어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미 어거스틴 수도회에서 깊은 수련을 쌓고, 가톨릭교회의 사제요 신학자로서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살아가면서 의를 추구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의도 성취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로마를 방문했을 때 루터는 무릎으로 계단(상타 스칼라?)을 올라가는 고행에 참여하면서 ‘이건 아닌데!’하는 깨우침을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인간이 의를 획득하는 일에 완전히 무력하다면 결국 실제적인 의를 실행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그 사건 안에서만 의를 획득할 수 있다면, 결국 인간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는 ‘오직 믿음’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터가 이렇게 인간의 의 문제 앞에서 행위를 무능력한 것으로 제쳐두고 믿음에만 그 토대를 놓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행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에게 걸어둔다는 뜻이다. 이는 흡사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비유와 비슷한 관점이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자유, 기쁨, 평화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이런 세계에 들어갈 수는 없다.
‘솔라 피데’는 율법 폐기론*인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런 질문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절대적인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루터의 진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서도 매우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참고적으로 김균진은 칭의 문제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와 행위도 포함시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대립되거나 모순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종합적인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1)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2) 믿음만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한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선한 행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3)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 한 번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이와 동시에 칭의는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하여 일어나는 과정이다.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의로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단지 부분적으로 실현할 뿐이다. 5)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하여 오신 사건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언제나 다시금 주어지는 은사이다. 6)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내어놓을 수 없으며 자랑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인간이 받을 보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261).

칭의의 의미
우리는 위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대체적인 윤곽을 정리했으며, 나름으로 개략적인 대답도 제시한 편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믿음을 통한 칭의’를 심층적이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성화론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태를 좀 더 명백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이제 칭의와 성화의 기초적인 교의를 각각 점검하자. 이런 과정을 통해서 칭의와 성화 사이에 근본적으로 놓여있는 도그마의 리얼리티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稱義)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의 ‘디카이운’을 번역한 것으로서 그 뜻은 “재판에서 의롭다고 선고하는 것”이다.(W. Elert, Der christliche Glaube, Grundlinien der lutherischen Dogmatik, 469. 김균진 3, 224에서 재인용, 이하 ‘칭의의 의미’ 항목은 김균진의 책 참조). 주로 법정 용어로 사용된 이 단어가 신학적으로 재해석되어,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새기게 되었다. 이것을 좀 더 세부적으로 해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칭의의 소극적인 면: 칭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죄를 현실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만약 인간에게 죄가 없다고 한다면 의를 선고한다는 말이 자체가 무의미하다. 물론 여기서도 무엇을 죄라고 하는가에 관한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보면 옳다.
2) 칭의의 적극적인 면: 칭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전제하는 신학개념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죄의 결박 가운데 있던 인간이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사건이 곧 칭의이다.
3) 칭의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 칭의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는 신학 개념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칭의가 아니라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인 율법과 제사행위를 통해서 임시적으로 죄를 씻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율법적인 행위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칭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칭의의 구성 요소는 다음과 같다.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서(sola scriptura).
4) 죄의 용서, 화해, 거듭남, 계약의 성취: 칭의는 기본적으로 죄의 용서인데,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죄 된 과거가 죽는다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죄와 죽음의 세계로부터 하나님의 의가 통치하는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또한 칭의는 하나님과 화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아울러 새로운 사람으로의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근원적인 쪽에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의 성취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칭의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벼운 행동주의나 업적주의를 근본으로부터 허물고 모든 존재의 근거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보려는 이 칭의론이 빠질 수 있는 모순과 함정은 무엇일까? 그걸 우리가 경계해야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이다. 첫째, 칭의론이 인간 삶을 담아내지 못한 교리화(Doktrinalisierung)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칭의가 단지 개인주의(Individualisierung)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셋째, 칭의가 영성화(Spiritualisierung)함으로써 세계적 지평이 간과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 칭의는 개신교 신학에서 상수로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 논쟁
요즘 한국교회에서 칭의론의 밑천이 바닥난 탓인지 몰라도 성화를 강조하는 설교와 그런 목회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이 원초적인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변화된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단 바람직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성화가 신학적으로 정당한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신자들의 삶을 건강하게 끌어가는지에 관해서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서로 맞물려 있는 몇몇 신학적 혼선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 요즘 성화를 강조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칭의로만은 충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칭의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더욱 거룩한 삶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성화의 과정이 곧 칼빈이 말하는 ‘신자의 견인’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런 주장이 일견 매우 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근본 가르침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얼마나 부실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성서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칭의와 성화가 서로 다른 신학적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구원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즉 구원의 실체에 관한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칭의와 성화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성화 역시 칭의에 포함된 사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분의 목회자들이 칭의를 성화와 대칭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인간의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까지 칭의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에 반발해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장했다는 기초적인 사실만 알고 있어도 기독교인다운 윤리에 해당되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것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칭의가 성화를 통해서 보충되어야만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신생아가 자라는 과정을 예로 든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인간이긴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도 성숙한 기독교인과 그렇지 못한 신자들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믿기는 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칭의의 엄밀성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인간은 아무리 성화되어도, 즉 순교자 정도의 신앙적 순수성과 프란체스코처럼 실제의 삶에서도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칭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없다면 아무도 자기의 행위(윤리)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칭의 이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기보다는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칭의를 보충하기 위해서 성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칭의가 성화이며, 성화가 곧 칭의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정당하다.
셋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서 본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매우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삶의 변화는 아예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역시 자비와 평화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도 그런 삶의 변화를 늘 마음에 두고 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불과한 이러한 사실을 칭의와 성화라는 구조를 통해서 매우 대단한 가르침인양 떠든다는 게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인간 삶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반 교육에서도 학생들을 책망하거나 잔소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거나, 더 근본적으로 삶과 역사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를 모색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정직해라.’, ‘착하게 살아라.’, ‘섬기며 살아라.’ 하고 외친다는 건 기독교의 복음을 율법과 윤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런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거기에 철저히 의존해서 행동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설교자들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아닌 성화로 신자들을 닦달하는지 모르겠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공연히 고상한 것처럼 성화 운운하지 말고 최소한 ‘칭의’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서와 신학공부나 다시 철저하게 하는 게 어떨는지.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보는 입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이야말로 성화까지 포함하는 역동성 신학개념이다. 만약 칭의 개념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성화와 대립한다거나 아니면 그것을 간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적 인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이런 신학적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채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지 실제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평인 졸고 “신학적 포즈의 뒤안길”에서 몇 대목을 검토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성화의 율법적 해석
위에서 박 목사의 관심이 ‘구원 이후’의 성화에 있다고 밝혔듯이 그가 투정부리는 듯한 한국 신자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기독교인다운 삶, 인격,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독교인다운 ‘성품’을 강조한다는 건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화의 실체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혼란스럽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교양이나 인격에 있지 않고 자기 의존성으로부터 ‘하나님 의존성’(2004.11.21)으로 돌아서는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신학적인 견해를 밝히면서도 성화의 단계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해결해야 할 구체적인 윤리와 성품을 거론하고 있다.(‘의’ 42, 94).

신자들의 가장 큰 오해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기도원에 얼마나 많이 갔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가 자랑의 초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한 것, 여러분이 성경 본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게 하고 분을 내지 않게 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하고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며 악덕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의’ 102).

일단 그의 이런 주장은 옳다. 기도와 전도와 교회 봉사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참여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에는 거의 무기력한 한국교회의 실상을 그는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격적인 삶의 변화를 바로 율법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라고 구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골자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는 길을 가야 합니다.(‘의’ 206).

우리는 박 목사의 이런 일련의 진술에서 웬만해서는 문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적으로 옳은 말을 하며, 또는 평범한 설교자들이 놓치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끌어낼 줄 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는 상당히 세련된 신학적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포즈만으로 본인에게 있는 신학적 오류와 한계를 계속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마 5:17), 율법과 사랑의 관계(롬 13:10)는 변증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율법(윤리)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지만 박 목사처럼 노골적으로 구원 이후의 삶을 이렇게 율법의 수행으로 직결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그의 태도에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보았다. 그는 율법의 성취인 성화가 인간적인 연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의’ 99, 102) 매우 용감하게 선포하면서, 친절하게 방법론까지 제시하고 있다.

성화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봉사기관에 가입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서 성화에 관한 연습을 스스로 하려고 기다리면 일 년 동안 한번 할까 말까입니다. 그 한번이 언제냐 하면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자선냄비에 돈 넣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훈련되기 위해서 자신을 봉사기관에 예속시키십시오.(‘의’ 103).

나는 그가 도대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연습을 통해서 성화에 이르러야한다고 주장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양, 지식, 의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던(‘의’ 282) 그가 어떤 근거로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더 나아가 그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를 가리켜 인격과 품성을 훈련받는 곳이라고 주장하는지(‘고린도’ 302)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극복하려고 했던 율법 신앙, 업적 신앙, 윤리 신앙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걸까?
아마 박 목사는 이런 내 말에 근거가 없다고 펄쩍 뛸지 모르겠다. 신학적이지 못한 일반 교회의 신앙생활은 기복적이고 감상적이고 자기중심이지만 신학적인 박 목사가 가르치는 성화는 여전히 인격적이고 이성적이고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이다. 과연 그런 차이가 있을까? 필자의 눈에 이 두 모습은 무늬만 약간 다를 뿐이지, 요즘 젊은이들 표현으로 짝퉁이다.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집중적으로 검토하겠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설교자들에도 신학적인 오류가 자주 발견되지만 이런 분들이야 스스로 신학적이 못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면 되지만, 한국교회는 도덕성 회복이 아니라 신학적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2004.11.7), 실제로 신학(교리)적으로 설교하고 있는 박 목사에게서 이런 오류가 발견된다는 것은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만들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
내 생각에 박 목사의 신학은 칭의와 성화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박 목사에 의하면 칭의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로도 가능하지 않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따라서 여기에 필요한 인간의 책임은 믿음뿐이지만, 성화는 하나님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없는 오직 인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목이라는 것이다. 그가 볼 때 한국교회는 이 두 사태, 즉 칭의와 성화를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의’ 94).  

평신도들은 눈치 채기 힘들겠지만, 칭의는 하나님의 소관이고 성화는 사람의 책임이라는 박 목사의 발언은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단정한다.

주님은 우리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여기가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화를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됩니다.(‘의’ 109).

이런 진술은 그의 설교에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그가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지경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칭의와 성화에 이르는 길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이다. 칭의는 단지 우리의 믿음에 의한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 그의 신학적 뉘앙스를 살려서 설명한다면 사람이 믿어서 칭의를 얻고 구원받았다기보다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믿게 된 것이지만(‘의’ 72), 성화는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칼 바르트에게 이르기까지, 어떤 점에서는 조직신학 전반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학자들에 따라서 칭의와 성화를 정확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어느 한쪽에 더 큰 무게를 두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신학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마틴 루터는 칭의에 무게를 둔 반면에 캘빈은 성화에, 그리고 바르트는 양쪽에 같은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법’적인 차원의 칭의와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할 ‘실천’적인 차원의 성화를 구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박 목사처럼 칭의와 성화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한 정통 신학자는,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다. 구분은 하지만 이원적으로 분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누구든지 한수 지도를 바란다.
미리 한 마디 밝힌다면 신학적으로 약간 예민한 이런 주제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아래의 책들을 다시 한 번 들추어보았다. 칼 바르트의 <義認과 聖化>,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하인리히 오트의 <신학해제>, 한국신학연구소 편 <하나인 믿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3>. 이신건 <조직신학입문>. 박 목사 덕분으로 이번에 기초신학을 다시 공부한 셈이다. 이 문제를 가능한 요약적으로 정리해보자.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 신학 안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은혜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 박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이지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기 때문은 아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박 목사가 혼란을 일으킨 것 같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인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존재론적 분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에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인식론과 존재론의 차이를 예민하게 식별하지 못함으로써 벌어지는 신학적 과오는 적지 않다. 구원, 하나님 나라, 삼위일체, 종말론 등등, 거의 모든 주제가 이에 해당된다.    
약간 길지만 우리가 깊이 음미할만한 칼 바르트의 신학적 명제를 몇 대목만 간추려보겠다. 바르트는 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한다.

의인은 지금 여기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묵과이다. 성화는 이런 죄 안에 있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청구이다./ 의인의 은혜는 우리의 삶이고 성화의 은혜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죄인-사랑의 역사에 있어서 의인은 영원한 측면이고 성화는 시간적 측면이다./ 동일한 하나님의 엄숙성으로써 의인의 은혜는 우리를 크고 절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놓고 성화로서의 은혜는 신앙과 복종의 작고 상대적인 결정 안에 세워 놓는다./ 의롭다 인정된 죄인의 신앙과 성화된 죄인의 복종은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자비에 대한 찬양이고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리의 인정이다.(의인과 성화, 17-48).

위의 신학적 명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칭의나 성화 모두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이며,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순종할 뿐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화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서 성취되는 것이라는 박 목사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박 목사는 정통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신앙적 오류에 빠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비판의 화살은 곧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존재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결국 이원론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이 순간에 박 목사는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둘러댈지 모르겠다. 기도, 전도, 회개 같은 종교적 현상에 머물러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강조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성화가 칭의와 달리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야 할 어떤 상태인 것처럼 명시적으로 발언한 내용들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건전한 신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한 분이라고 한다면 성화의 과정에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이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발언을 결코 취소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런 발언들은 목회적 필요에 의해서 우연하게 나온 게 아니라, 그의 신학적 확신, 따라서 신학적 오류와 한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실증주의적(혹은 결정론적) 구원론
필자가 보기에 박 목사가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이라는 덫에 걸린 이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실증주의적 구원론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실증주의적 구원론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면 아무리 의도가 순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구원파’ 유의 함정에 걸려들 위험이 높다.  

분명히 단언하는데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해도 천국 가는 것을 취소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매는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의’ 187).

구원받은 사람의 범죄 행위가 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구원이 결정된 사람에게 발생하는 죄는 단지 성화의 과정이라고 그는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구원파 유의 사람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의 죄론은 관념화한다. 관념화한 죄론에서는 아무리 기독교인다운 품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마저 관념으로 떨어질 뿐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런 문제를 희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이 편치 않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죄짓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신앙인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족하여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의’ 75).

겨우 죄의식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여부가 결정된다면 결국 박 목사는 자신이 경계하고 있는 신앙적 센티멘털리즘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 그가 성화의 문제에 그렇게 집착하면서도 성화의 사회적 차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말자. 이미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적 분리로 인해서 그의 신학적인 토대가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과 엇갈려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밝혀진 마당에, 더구나 자신의 가르침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니까(‘하나님’ 298, 306) 이에 연관된 더 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할 것이다. 다만 그의 주장이 목회 현장에서, 혹은 그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신자들의 성숙한 삶을 위해서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만족하자. 만약 실증주의적 구원론에 근거한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적 가르침이 실제로 신자들의 삶에 실효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신학적으로 완벽할 수 없다는 전제와 또한 기독교의 도그마가 여전히 미래로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 내 비판을 조용하게 거두어들일 용의가 있다.  

성화의 리얼리티
필자는 이 마지막 대목을 박 목사의 수사적 기법에 기대서 설명하겠다. 지난날 거지였다가 왕의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신분과 자리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지만 지난날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왕자를 향해서 박 목사는 왕자다운 품위를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중이다. 박 목사의 이런 태도는 율법 해체론이 극단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집단을 향해서는 어느 정도 대안적 가르침이 될 수 있지만,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 대한 통전적(integrity) 관점에 근거해서 선포해야 할 정상적인 복음적 설교로서는 방향설정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왕자가 왕자다운 품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은 그에게 왕자의 신분을 갖추라고 다그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왕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주는 데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가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믿음의 차원이지 훈련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박 목사는 성화의 ‘리얼리티’에 대한 해명에는 등한한 채, 어쩌면 그 세계를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화의 ‘당위’성만을 열정적으로 선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성화의 리얼리티인 사랑이 우리의 연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사랑 자체인 하나님만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능력이며, 계시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 지난 20년간 줄기차게 선포한 그의 설교가 목회 현장에서 별로 실효성이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박 목사도 상당히 곤혹스러워 하리라.
물론 박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자의 고유한 자리를 놓치거나 오해함으로써 결국 설교를 잔소리로 만드는 경우가 흔하다.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좀 고급한 잔소리와 저질의 잔소리가 있다는 것뿐이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통치와 그의 미래와 그 완성을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서 풍부하게 제시하기만 하면 설교자와 신학자로서의 역할은 이미 끝난 것이다. 만약 설교자가 제시하는 그런 생명의 세계가 설득력이 있다면 기독교인답게 살아야한다고 닦달하든 않든 상관없이 청중들이 그 길을 향해 갈 것이다.
인간, 신학, 세계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고, 교회 현장에 대한 감수성도 예민한 박 목사에게서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혼선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신학적으로 ‘부분’에 묶인 채 ‘전체’를 놓침으로써 기독교의 근본으로부터 약간 이탈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다른 설교자들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듯이 전체의 틀을 놓치는 경우에는 신학과 설교에서도 견강부회는 종종 일어나는 법이다. 이는 곧 박 목사가 한국교회의 유치한 신앙을 성숙한 신앙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그럴듯한 신학적 포즈를 취하긴 했지만 그 포즈의 뒤안길은 결코 신학적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들에게 조직신학 공부는 필수적이다. “조직신학적인 성찰 없이 주석으로부터 직접 설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의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만 견인될 뿐이다.”(판넨베르크, 신학과 철학,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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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09.23 14:21:09
*.249.178.14

한성영 씨,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 동감합니다.
나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그런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과 문제의식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싹트는 게 분명합니다.
끝없이 제기될 수 있는 그런 삶의 깊이를 우리가 어떻게 한꺼번 풀어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비슷한 대답을 찾을 수는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신학의 대가들도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대답이 정답도 아니니까 우리가 참고할 뿐이지,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나구요?
어떻게에 대한 대답은 없습니다.
길을 가는 거에요.
무작정 길을 가는 게 아니라 길로서의 길을 찾아야겠지요.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지침서가 성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도 간접적으로 지시할 뿐이지 길 자체라고는 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길은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숫자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가 길이라는 하나의 대답이 있지만
예수를 길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길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리고 많은 모순과 딜레마를 제시했네요.
옳습니다.
나는 이렇게 조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를 형성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0]

2005.10.01 02:07:15
*.187.239.89

'원칙적으로 본다면 성화 역시 칭의에 포함된 사건이다.'

라는 말과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칭의를 보충하기 위해서 성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칭의가 성화이며, 성화가 곧 칭의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정당하다.'

라는 부분을 보았을때

칭의가 곧 성화라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그 반대, 성화가 곧 칭의라는 말이 걸리네요.

성화와 칭의가 모두 신에게서 주어지는 것으로
즉 둘 다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성화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믿음 만능주의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칭의를 얻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성화이다 라는 뜻으로
솔라 피데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하신 거라 짐작이 됩니다만



성화란 엄밀히 말해 칭의에 포함되는 개념이라 한다면
칭의란 것은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를,

성화 또한 칭의와 같이 믿음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고
결국 믿음으로만 성화와 칭의를 이루어 낼 수 있다. 라고 해석하여

믿음이 없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지나친 비약이거나 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리고 만일 이것이 맞는 말이라면 된다면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성화의 의미는 매우 초라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요.

또한 다시 위로 돌아가서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칭의가 눈에 보이는 칭의로 나타나기 위해서 결국 행위를 통한 의로움이라는 문제도 믿음을 통한 의로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
라고 하신 말씀은 어느 정도로 해석해야 하는지

그리고 "믿음은 있지만 윤리적으로조차 옳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라는 정도의 말만이 가능한지 궁금하네요

뭔가 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네요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02 19:14:21
*.249.178.7

이름이 그저 한자로 '설'로만 되어있군요.
설 씨, 하려니까 발음이 좀 이상하고,
설 님, 하면 어떤지...
설 형제?
설 선생?
그건 그렇고,
너무 꼼꼼이 읽으셨군요.
아마 강의안 초고에 군데군데 손볼 때가 많을 겁니다.
일단 그렇게 구성해 놓고,
다음 기회에 다시 정리해나가야지요.
그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지적받아야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결국 강의 전체가 허술하게 되니까요.
칭의와 성화를 어떤 관계로 보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성화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결국 윤리의 근거가 취약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는 옳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람의 윤리가 반듯해지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국 믿음은 무능력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 자체는 무능력합니다.
강철 같은 믿음을 소유해도 그가 실제로 변화되는 건 없습니다.
변화되는 시늉은 낼 수 있지요.
실제의 변화는 믿음이 없어도 가능한 부분입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남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신의 이름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고도의 윤리성을 유지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일까요?
이게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절대적인 어떤 세계와 관계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남을 위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의 감정과 사귐 같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건
내 강의안에도 진술되어 있겠지만 '법'적인 차원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의로워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신앙이라면 없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예수가 세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들을 변화 시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성화, 윤리, 도덕을 요구한 게 아니라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힘들 거든요.
자기가 노력해서 무언가 그럴듯한 인간이 되는 것은,
성화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인간이 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 것이 무의미한 상태에 들어가는 게 힘든 일입니다.
그런 상태가 곧 믿음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존재'하는 공기를
들어마시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하나님,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흡사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돈오'와 같은 상태입니다.
이 말에는 좀 비약이 있군요.
그러나 비슷한 측면이 여기에 있습니다.
돈오와 믿음 사이에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성철 스님이 사람들에게 성화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물론 착하게 사는 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성화하려는 노력으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런 게 주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질문은 상당히 많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믿음으로만 인간이 실제로 성화될 수 있는지,
믿음의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성화가 필요 없다면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정말 없다는 것인지,
아무리 종교가 절대적인 세계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꾸준하게 노력해서 인간답게 사는 게 중요하지 않는가,
뭐 대충 이런 질문들이 나옵니다.
다 옳은 주장들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완벽한 대답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가능한 게 아니니까요.
이렇게 정리하면 괜찮을 듯 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또는 기독교인답게 산다는 이 사태를,
-사실 이런 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요?-
-아무도 이런 걸 증명할 수 없지요?-
존재론적으로 접근할 때 칭의론이 중심이고,
인식론적으로 접근할 때 성화론이 중심입니다.
실제로 칭의와 성화가 어떤 관계인지를 실증적으로 밝힐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개념적으로 그것을 조명해나갈 뿐입니다.
조명한다기보다는 틀리지 않도록 교정해나갈 뿐입니다.
믿음은 좋지만 윤리가 시원치 않은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그것도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앞에서 예수 주변에 있었던 죄인들을 기억해보세요.
사람들은 그들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보았지만 예수는 그렇게 안 보았거든요.
그래도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겠지요?
어린이 유괴범, 파렴치범 ...
이런 건 신앙의 차원과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됨의 기초에 어긋나는 일이죠.
말이 잘 됐는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칭의의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화의 노력이 없어도 그는 이미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는다고 말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0]

2005.10.02 19:48:49
*.187.239.89

대답 감사드립니다

호칭은 그냥 설 군 정도로 불러주시는게 좋겠군요
아직 목사님께 선생이나 님소리를 듣기에는 제가 너무 어리군요

제 생활이 여러 종교의 사람들과 지나치게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인지
이런 문제들이 매우 복잡하게 다가옵니다.
성화와 칭의. 단지 기독교 내부에서만 얘기할 떄는 그렇지 않지만
근본주의자에서부터 이웃종교의 사람들까지, 그야말로 종교 다원적인 제 삶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많은 일들과 얽히게 됩니다.

특히 성화를 통한 칭의를 말하면서
타 종교와의 대화의 장을 연 카톨릭을 볼 때 그렇습니다.

신앙을 가졌음에도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믿음과 인간적 윤리가 꼭 같을 필요가 없다는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칭의론이 타종교 구원가능성의 절대 부정과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무기로 사용되어지는 모습을 볼 때
뭔가 '이건 아닌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타종교의 구원가능서에 대한 희망은
어찌보면 성경의 권위를 상당히 낮게 책정했다는 의심을 받는
존 흭과같은 다원주의자 신학자들이나
카톨릭의 가르침에만 의존해야 하는 걸까요

성서는 정말로 이에 대해 침묵하고 믿음 외의 구원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감당할 수 없이 무겁고
또한 진부한 주제이지만
늘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03 18:50:16
*.249.178.7

설 군,
삶의 현장이 여러 종교와 연관된다니
생각이 깊어질 것 같네.
타종교의 구원 문제라...
만약에 칭의론이나 성화론에 기대서 타종교의 구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보면 되네.
아니 종교라는 미명으로 구원이기주의, 또는 그런 독선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할 걸세.
그 이유는 칭의론과 성화론이 기본적으로 타종교 문제를 다루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 기독교도 역시 구원론을 끝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라네.
이런 문제는 좀 복잡하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저 예수의 가르침으로만 집중해봐도 답은 나온다네.
잊기 전에 한 마디 한다면,
기독교 교리와 예수의 가르침이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게.
기독교 교리는 일차적으로 바울에 의해서,
그 다음에 교부들에 의해서 헬레니즘화 되었다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교리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네.
이미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교리의 작업이었으며,
더군다나 삼위일체론은 말할 것도 없다네.
사실 성서의 경전화 자체가 신학적 해석작업이라네.
이 경전 문제는 이길용 박사 사이트로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네.
역사의 예수와 교리화된 예수 사이의 일치점과 불일치점을
우리가 소상하게 밝혀나가면서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해석해야만
우리는 독단론에 빠지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네.
예수와 타종교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예수는 일단 타종교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고 보아야지.
그는 단지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했던 분이네.
그 과정에서 결국 하나님과 아이덴티화이 된 거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문제가 기독교를 이해하는 게 결정적인 문제라네.
우리는 오늘 거기까지 나가지 말아야겠네.
예수는 타종교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네.
2천년 전 나사렛 시골에서 서른살까지 살았던 그가 어떻게 세계 종교를 알았겠나?
그는 앞에서 말한대로 유대교적 전통 안에서
그 전통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아니 그 나라를 실천하고, 그 안에서 그냥 살았다네.
물론 예수도 유대교 전통과 약간 다른 사마리아 신앙을 알고 있었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만났을 때의 상황을 기억해보게.
사마리아 사람들의 전통과 예루살렘 전통은 다르다네.
그 역사적 뿌리는 참으로 깊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과 장군이었던 여로보암 때로 올라가야하고,
이건 내가 말할 게 아니라 구약신학자의 몫이지만,
아마 더 거슬러 올라가야하지 않을까?
예수는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뭐라고 말했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1,24).
하나님은 영이시네.
잘 생각하게.
예수가 왜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이미 구약에서도 루아흐라는 단어가 영으로 번역된다네.
바람이기도 하고 영이기도 하지.
그 프뉴마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마 갇혀 있을 수 없지.
프뉴마가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을 수 있겠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독교를 상대화해도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네.
그리고 쉽게 종교다원주의를 추종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네.
우리가 구원이 그렇게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거네.
근본적으로는 기독교가 어떻게 루아흐로서의 하나님을
세상에 보편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네.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서 오늘 이만 그치겠네.)

[레벨:0]Pathfinder

2008.01.24 22:39:48
*.125.223.146

"인간 삶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반 교육에서도 학생들을 책망하거나 잔소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거나, 더 근본적으로 삶과 역사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를 모색한다"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고 말로 주장하는 것이나,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남? 말로 가르치려는 것은 인간적인 불쌍한 노력이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은 성령의 감동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삶과 역사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한다고?' 아 글쎄 어떻게 그렇게 할 거냐고? 안 가르치고, 저절로 알아 먹게 하는 비법이라도 가지고 계신다는 건가? 본인이 주장하고 계시는 주장 자체가 얼마나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지 아시는지요? 가르침이 없이 어찌 변화가 가능한가? 인간이 없이 어찌 가르침이 가능한가? 도대체 성령의 역사를 무슨 귀신놀음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들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네요.

"그는 성화의 리얼리티인 사랑이 우리의 연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사랑 자체인 하나님만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능력이며, 계시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
"기독교의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믿음의 차원이지 훈련의 차원은 결코 아니다." 연습도 필요없고, 훈련도 필요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령의 역사인가요? 하나님만의 자유로운 행위라구요?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혼자 노시는 법이 없으신대요. 칭의도 성화도 모두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정도 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그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인간의 책임과 역할의 필요성 마저도 무시되고, 마치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치 않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요? 전에 '제자훈련은 가능한가'라고 하는 글에서도 비슷한 뉘앙스를 받았는데요. 정말 성화도 훈련으로 되지 않는다면, 강의는 왜 하시는지요? 설교는 왜 하시는지요? 그냥 언어존재론을 믿으시면서, 선포해 놓으면, 성령이 알아서 역사하시나요? 그리고 설교 준비는 왜 하시나요? 그냥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줄줄 읽어주면, 그거야 말로, 덜 때묻은 언어존재론을 통해서 성령께서 사람들을 설득시킬 것 아닌가요? 사실 저는 무식해서 말씀하시는 '언어존재론'이 뭔지도 잘 모릅니다만... 마치 인간적인 차원에 있어서의 연습이나 훈련이 전혀 필요 없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봅니다. 사실 성서의 수많은 구절들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고, 말씀대로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타종교를 알 수도 없었다고 보시는 건, 예수님의 신성을 너무 무시하고, 예수님을 인성의 차원에서만 보시는 건 아니신지... 그래서 자유주의자라는 비판도 받으시는 건 아니신지 모르겠네요.. 가끔 하나님 말씀을, 설화라고 표현하시는 것도 그렇구요.
profile

[레벨:6]상수리

2008.01.28 14:25:05
*.99.193.27

패스파인더님! 최근에 답변을 다셨군요!! 정목사님께서 보시고 본인의 의견을 말씀하시는게 순서(?)겠지만, 제가 느낀 점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주제인 성화와 칭의문제에서, 다시 정리하면, 성화와 칭의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존재론적으로). 저도 완전히 이해한것이 아니지만,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다면 위의 쓰신 글의 궁금증이 해소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진정으로 인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은 성화하기위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 세계로의 존재론적 참여에 대한 참다운 인식과 그 길을 찾아 가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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