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성령에 대해

조직신학 조회 수 7307 추천 수 125 2005.10.12 23:27:17
16장
성령에 대해

성령론의 접근 방법론
교회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성령 받으셨어요?”라거나, 또는 “성령 받으세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는 우리가 성령을 어떤 상품처럼, 조금 더 좋게 해석해서 어떤 은사처럼 생각해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다거나, 하나님 말씀에 대한 큰 감동이 임한다거나, 자기도 모르게 확신이 든다거나, 심지어는 방언이 터진 현상들을 보고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구분되고, 특히 방언이 이런 성령 임재의 중요한 표식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이런 현상들을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의 기록은 늘 ‘삶의 자리’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서의 보도 자체가 그렇기도 하고, 저자의 자리가 그렇기도 하다. 예컨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는 마가복음 기자의 진술은 그들의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독을 마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한 성서의 보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삶의 자리를 전제하고 성령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주제로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성령에 대한 성서의 부분적인 진술에 집착할 게 아니라 성서 전체의 가르침, 그리고 더 나가서 2천년 기독교 역사라 할 수 있는 신학의 토대에서 성령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런 게 곧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해석학의 기초에도 타당한 태도이다. 성서 전체는 성령에 대해서 하나의 방식으로만 진술하지 않는다. 창조 사건에 연루된 성령과 이스라엘 전쟁에 관여한 성령, 요엘 예언자의 묵시적 성령 이해를 비롯해서, 보혜사로서의 성령,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는 영,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영, 등등, 많은 다양한 성령에 대한 이해와 진술이 성서에 보도되고 있다. 특히 신학은 성령을 기본적으로 삼위일체의 구도 안에서 접근한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가 성령을 아무리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경험은 늘 삼위일체의 구도 안에서 반성되어야 한다. 즉 성령은 신론 내부에서 정당해야 하며, 기독론 내부에서 정당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에서 성령은 신론과 기독론과는 거의 상관없이 오히려 인간론적 구도에서만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의 영인, 그래서 결국 창조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성령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은 무시한 채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것만 좇아간다는 말이다. 간증 중심으로 설교 현장에서 자주 발견하듯이 그들은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성령과 일치시키곤 한다. 이런 방식은 성령에 대한 논의에서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물론 바울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언급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다. 우리는 이런 대목에서 또 다시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지 성령 자체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이런 가치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생명의 힘들이다. 특히 바울이 이런 열매들을 언급하기 이전에 ‘육체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진술이 곧 갈라디아 교회가 처한 부도덕한 상황을 경계하려는 훈화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구절을 근거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작용, 도덕적인 변화, 더 나가서 물질적인 축복 같은 것을 성령활동의 토대로 설정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론적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인간학이 신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인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술한다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를 놓치는 일이다. 하나님은 창조 행위로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할 때 그의 창조 사건, 성서 기자들의 표현으로 그의 ‘질그릇’인 인간을 읽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런 관점을 신학하기의 토대로 설정한 학자들이 바로 불트만을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는 명제가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할 수 있는 모든 근거가 된다. 사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그 세계를 넓히는 모든 작업은 결국 인간의 사유와 언어를 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실존주의적 인간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예민하게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사유와 언어가 신학행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학의 근거라고 말하면 좀 곤란하다는 사실이다. 신학은 그 신학이 가능하게 하는 근원인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전제한다. 우리의 사유와 언어까지도 뛰어넘는 그런 존재의 자가 노출, 자기 알림에 근거해서 우리의 신학행위가 가능하다. 만약 이런 관점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신학의 뿌리를 놓게 된다면 결국 신학은 심리학이나 철학으로 자리를 바꿔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을 우리 마음을 위로하는 어떤 심리적인 작용으로, 실존적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인식 작용으로 생각할 수 없다. 비록 부분적으로 그런 작용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영이 바로 우리가 언급해야 할 ‘성령’이라는 말이다. 이게 바로 우리 신학자들이 감당해야할, 어쩌면 숙명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학문적 짐인지 모른다. 인간학적 한계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 너머의 영적인 현실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는 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작업이 가능하려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금 각자 개인의 영적 경험에 머물지 말고 오랜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그런 영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심화한 결과로 남겨진 성서의 지평 안으로 훨씬 깊이 들어가야 하며, 그것에 대한 해석인 신학의 지평 안으로 들어갈 뿐만 아니라 오늘 현재 성령 활동에 대한 흔적이라 할 인문학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령에 관한 기초적 질문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령이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에 대해서 교리사적인 발자취를 밝혀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성령에 관한 논의보다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니케아(325년) 회의에서도 다룬 주제가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가, 혹은 다른가에 있었지 성령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앞에서 ‘삼위일체’를 다루면서 언급한대로,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영인가, 아니면 아들에게서도 오시는 영인가, 소위 ‘필리오케’(Filioque)에서 다루어졌다. 동방정교회는 필리오케를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에 서방교회는 이른 정통교리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신학적 긴장이 따르고 있는데, 그냥 윤곽만 잡는다면 동방교회는 신론 중심의 삼위일체론에 그 중심을 둔다면, 서방교회는 기독론적인 삼위일체론에 그 중심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을 언급할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하나의 대목은 인간의 영과 성령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루아흐’를 불어넣으셨고, 그 결과로 인간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창세기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연속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큰 전제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영에 아무리 신적인 속성이 담겨 있는 것 같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피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영이시다. 결국 여기서 두 가지 상반되는 개념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영이 몸과 마찬가지로 피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성서는 왜 이렇게 모순되는 주장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은 분명히 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소통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성령과 대등하거나 유사하다기보다는, 또한 스스로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주체라기보다는 성령의 조명에 반응할 수 있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목회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성령의 내재적 활동이라는 ‘은사’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특히 순복음교회를 필두로 하는 오순절적 은사 중심의 성령이해가 시간이 갈수록 훨씬 심각하게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매우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방언, 병고침, 물질축복, 주로 기복적인 요소에 집중되고 있는 이런 성령 이해가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의 내적인 역동성을 제고시키는 데 한몫 단단히 한 건 사실이만, 그것으로 인해서 성령론이 왜곡되었다는 사실도 묵과할 수 없다. 온건한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제시하고 있긴 하다. 예컨대 김균진은 이런 오순절적 은사운동이 성령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것을 교회에서 막아서도 안 된다는 입장을 보인다. 신약성서에 이런 은사들이 적지 않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런 현상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위에서도 한번 언급했듯이 신약성서의 기록들이 역사적으로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런 현상들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 교회 같이 열광적인 종교현상에 치우쳤던 이들에게 목회의 차원에서 적절한 방법을 제시한 고린도서의 진술을 오늘의 우리 삶에 무조건 일치시키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식으로 완전하게 포착해낼 수 없는 성령의 역할에 의존하고 있다면 교회 안에서의 모든 영적인 현상들을 무조건 기계적으로 따라가거나 또는 반대로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의해서 재단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성서 전체, 신학 전체라는 전망으로 성령을 훨씬 심층적이고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런 포괄적인 작업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개념은 생명의 영이다. 결국 성령은 생명의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은 이 생명의 영을 판넨베르크의 글 “생명의 영”과 졸고 “생명의 영, 미래의 힘”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

생명의 영
<W. Pannenberg, “The Spirit of Life”, in: faith and reality, (tr.)John Maxwell, 20-38, 요약발췌, 코멘트)

신구약성서의 영 인식
우리는 지금 삼위일체론적인 의미에서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에 비해서 약간 격이 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를 생명의 영이라는 일반적 용어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원래 기독교가 시작하면서 성령론이 그렇게 확고한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래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의가 훨씬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381년에 개최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졌다. 그 공의회에서 성령이 생명을 주는 규정되었다. 생명의 영이라는 이 용어는 이미 신약성서에서 바울과 요한에 의해서 언급되었다. 즉 영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을 소생케 하는 분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이런 생명의 원천이기보다는 구원론적인 의미로, 즉 신앙 안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는 힘에 모아진다. 판넨베르크는 이 성령의 문제를 구약성서와 그 시대로부터 풀어가고 있다.
고대인들은 생명의 신비한 능력을 숨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고대 근동과 헬라에서도 역시 프뉴마(영)와 프노에(숨)는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공기라고 보았으며, 아낙사고라스**는 이성적 마음이 코스모스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숨이 끊기는 것을 죽음이라고 볼 때 그것이 곧 영이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 Anaximenes: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와 더불어서 밀레토스 학파의 세 철학자이다. 기원전 494년 이전에 활동했으며, 만물의 기본이 공기라고 주장했다. 영혼도 공기이며, 불은 희박해진 공기이다. 공기가 짙어지면 물이 되고, 더 짙어지면 흙과 돌이 된다.
** Anaxagoras: 이오니아 사람으로서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전통을 물려받았다. 철학을 처음으로 아테네에 도입했다. 그는 물리적인 변화의 제1원인이 정신이라고 최초로 주장했다. 정신은 무한하고 자율적이며 모든 운동의 근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00년경에 출생했다.

숨과 공기의 관계에 대한 구약성서의 기본 이해도 이와 비슷하다. 구약성서는 신적인 영을 바람이나 폭풍과 비슷한 힘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컨대 에스겔의 환상이나 시편104편에 보면 신적인 영은 강한 바람과 동일시되고 있다. 특히 성령에 대한 구약성서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생명을 공급하는 행위(The life-giving activity of the divine Spirit)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영은 예언자의 환상이나 영감만이 아니라 예술가들과 시인들의 세계에서도 요청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적인 영은 모든 생명을 새롭게 하는 능력과 함께 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생명의 완성이라고 보았는데, 그의 입장도 역시 위에서 언급한 구약성서의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즉 부활의 생명은 생명을 공급하는 영과 결합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시 에스겔이나 요엘 등,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공급된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약성서의 영 이해는 영을 모든 생명의 창조적 기원이라고 보는 유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을 개인의 마음속에서 인식론적 근거로 작용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서, 판넨베르크는 위에서 요약한대로 보다 거대한 생명의 힘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생명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견인해나가는, 혹은 토대하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성령을 생명 공급자로 생각할 수 있다면 기독교는 모든 일반 학문과 더불어서 하나님에 대한 논의를 실행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교부시대의 영 인식
헬라 교부들이나 동방 교회도 역시 성령이 창조 행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 이레네우스: 성령을 신적인 영감의 예언적 경험과 결부시켰다.
2)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알렉산드리아): 그는 성령이 창조 안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사도 교부 시대 이후로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를 주요 과제로 생각했는데,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이 인간될 수밖에 없었다는 교리에 바탕을 두고 이런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것은 로고스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예수가 바로 참된 신이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주장은 로고스의 한계에 근거해서 예수의 반(半)신성을 주장한 아리우스와 대립된다.
3) 루터, 칼빈: 이들 종교개혁자들도 역시 성령의 기능을 창조 사건에서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를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관계 가운데서 풀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성령 행위를 구원론적 개념으로 돌아가게 했다. 판넨베르크의 이러한 분석은 옳다. 종교개혁자들의 성령론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들도 역시 성령을 개인의 심성에 작용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분으로 믿고 있다.
4) 경건주의: 정통주의 신학체계와 교회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반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윤리 실천을 도모했던 경건주의는 성령 개념을 훨씬 축소시키고 말았다. 예컨대 17세기 초 요한 아른트는 성령이 창조 사역에 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5)도 성령의 창조 사역을 죽은 전통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성령은 시나브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아니라 경건의 문제로(as a matter of Christian Piety) 격하되고 말았다. 즉 자연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원리가 아니라 주관적 경험이 되고 말았다.
5) 주관주의자: 일반적으로 데카르트로부터 그 근대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주관주의는 객관적으로 규정된 사태에서 현실성의 범주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 느낌, 의지, 가치, 혹은 신앙에서 생각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주관과 객관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주객도식이라는 근대 사유의 기초를 형성했다. 근대는 바로 이런 주체성이 철학의 근본원리로 등장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경험론과 합리론에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초개인적인 주관주의라고 한다면, 헤겔은 반대로 객관주의라 할 수 있다. 그 뒤를 이어서 생의 철학과 실존철학은 헤겔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본격적인 주관주의인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주관주의는 성령을 인간의식의 내적인 불빛으로 밝혀나갔다. 예컨대 존 로크는 마음 안에서 실행하는 행동 윤리의 본질을 성령으로 보았다. 결국 주관주의에서 성령과 인간의 의식(정신)이 동일시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주관주의적 언급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신적인 영과 인간적인 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신적인 영을 인간 의식(정신)과 구별함으로써 결국 신적인 영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하게 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성령론의 갱신을 위해서 경건주의나 주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서 창조 행위에 참여한 성령의 역할과 자연신학에 대한 성령론의 공헌이라는 점에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사실 판넨베르크만의 것은 아니다. 몰트만도 역시 <Gott in der Schöpfung>에서 이런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몰트만의 창조신학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자연신학적인 구상을 통해서 성령론을 확대시켰다.

주관주의적 성령론을 극복하기 위한 현대신학의 시도
1)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 ‘On life and Spirit’ 항목에서 영을 생명의 차원으로 설명한다. 영은 ‘power of animation’이다. 인간은 영의 차원이 지배하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은 자기 통합, 자기 창조, 자기 초월이라는 기능에 담지된 생명의 모호성을 극복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 도와주어야 영적인 삶의 세 영역의 통일성을 획득할 수 있다. 즉 문화, 도덕성, 종교라는 영역의 통일성을 말이다.
2)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영적 중심부로부터 진화적 생명의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성령이 모든 생명을 활기 있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틸리히와 접근해 있다. 또한 영을 인간의 의식과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의 자기 초월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관점에 서 있다. 그는 진화를 성령의 역사로서 그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떼이야르는 신적인 목표로부터 창조적 조화로서 세상 과정에 대한 환상을 에너지에 대한 언급과 관련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했다. 비록 그의 철학 안에서 영과 에너지가 같은 리얼리티로 규정되고 있지만 말이다.

영과 에너지라는 용어에 대한 질문
성서는 분명히 생명의 원천을 피조물 밖에서 찾는다. 반면에 현대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삶의 기능으로, 자기 재생산적인 세포의 기능으로 생각한다. 피조물들이 바로 환경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극단적이지만, 피조물은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생명의 과정에 안에서, 그 수단 안에서 자기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다. 모든 생명체는 개인적인 미래와 종족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이 자기를 초월하는 본성인데, 떼이야르는 이것은 ‘radial energy’라고 불렀다.

생명의 자기 초월
영과 생명에 대한 떼이야르와 틸리히의 이론은 생명의 자기초월이 영의 현상에 대한 열쇠가 됨으로써 영적 리얼리티를 재해석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신학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현재를 모든 생명체의 계속적인 자기-초월과 구분한다. 이런 점에서 떼이야르는 틸리히와 일치하지 않는다. 떼이야르에 의하면 생명체의 자기 창조 기능과 자기 통합은 계속되는 자기 초월에 의존케 된다. 그런데 생명의 자기 초월이 생명체의 자율적 행위라는 사실이 완전하게 설명될 수 있다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영적 리얼리티는 토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초월적 생명의 복잡한 현상이 이중적 정의를 요구한다면 생명의 근원으로서 성령에 대해 언급되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의 반성적 마음(man's reflective mind)은 성령의 능력에 참여할 특별한 형식과 새로운 무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인간적 자기 초월의 특별한 유형으로서 반성적 인간 의식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인간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이러한 반성적 인간 의식 안에서 사회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즉 사회가 그 실존의 통일성과 정체성의 개인적 경험을 형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영적인 모든 인간 행위와 성취 안에서, 세계 개방성을 통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이라는 추상적 사유에 대한 인간의 능력 안에서 자기를 초월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영적 리얼리티를 경험한다. 이런 특별한 영적 자유의 경험은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 인간 실존의 독특한 성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성령의 능력에 결합되어 있는 게 아니다. 낙심, 불안, 무의미성, 갈등, 죄, 실패, 죽음에 지배당한다. 따라서 떼이야르가 말하듯이 우리의 생명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에 희망과 의미를 공급하는 상호적인 신뢰 경험은 비록 우리의 삶의 여전히 취약하고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정체성과 통합을 우리의 생명에 부여하게 됨으로써 초자연적인 성격을 갖는다. 더 이상 죽음에 지배받지 않는 새 생명을 확신함으로써 기독교 사신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그리고 성령의 새로운 현재를 보장한다. 그 생명의 중심은 하나님의 미래와 관련된 존재의 전망이다. 이 전망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형상화되었다. 그런데 이 새 생명의 성령은 (신앙적 공동체 안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생기 있게 하는 것과 결코 다른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풍부한 자기 초월의 영감으로 인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같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는 현실 도피적인 아편이나 경건이 아니라 세상의 모순과 실망을 궁극적으로 정복하고 신뢰하게 만드는 힘이다.

위에서 ‘생명의 영’이라는 판넨베르크의 아티클을 간단하게 요약한대로, 그의 신학의 출발은 신앙의 주관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에 있다. 근대주의 이후로 세계의 사태에 대해서는 언급할 내용을 갖지 못한 기독교가 성령을 신자 개개인의 영적인 구원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격하시켰다는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지식 가운데서 신앙의 뼈대를 세우고자 한다.”
생명의 영은 고대로부터 초기 기독교 사상을 거쳐서 중세와 종교 개혁자들에 이르는 방대한 교리사의 흐름을 통해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구약성서와 헬라철학, 초기 기독교는 성령을 창조적 기능으로 이해했는데, 개혁자 이후 경건주의와 주관주의를 거쳐서 단순히 경건과 주관으로 떨어져 버렸다. 따라서 성령론의 갱신을 위해서는 생명 신학적 접근이 필요한데, 틸리히와 샤르뎅에게서 그런 실마리를 제공받을 수 있다. “자기 초월”이 영의 본질을 밝히는 열쇠가 된다. 영의 본질인 자기 초월은 반성적 능력이며, 또한 세계 개방적 능력이다. 따라서 새로운 생명(부활)으로 견인해 가는 기독교의 성령은 기독교만의 특수한 성격이 아니라 보편사에 나타나는 자기 초월적 근원이 되는 영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판넨베르크의 논리에 대해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예술, 문화, 스포츠 등을 통한 인간의 자기 초월 경험과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라는 기독교의 실존적 경험이 근본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경험이 한결 같이 성령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인간을 참되게 구원하는 데 어딘가 부족하다는 말인가?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와 성서적 이해가 결국 같은 것을 말한다면 신학은 늘 생물학에 의존적이어야만 하는가? 물론 판넨베르크는 생물학이 생명의 리얼리티를 온전하게 풀어낸다면 성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없다고 보고, 역으로 생물학이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판넨베르크의 생각처럼 아무리 생물학이 발전하더라도 결국 생명의 신비에는 도달할 수 없을까?
부활이 바로 새로운 생명의 선취라고 할 때 그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판넨베르크의 주장이 과연 어느 정도나 설득력을 갖게 될까? 새로운 생명 형식의 완성인 부활을 자연과학적 지평에서 논증해야 할 문제로 대두시켰다는 것은 신학의 자리를 너무나 위태하게 만드는 것을 아닐까? 즉 부활에 대한 역사과학적 증명이 분산된다면 그의 모든 신학 설계가 붕괴되는 게 아닐까?
위에서 제기한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생명의 영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소홀하게 생각된 성령의 지평을 역사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특기 개인의 죄와 은사의 차원에서만 성령을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볼 때 “생명의 영”은 생명을 화두로 보는 세계의 모든 실천이나 사유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준다 하겠다.


생명의 영, 미래의 힘
-성령론 풀어쓰기-

죽음
우리 가족은 함께 모이는 저녁 식탁 자리에서 간혹 초보적이긴 하지만 철학이나 물리학, 또는 종교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죽음이 화제가 된 날 저녁에 초등학교 4년인 둘째 딸이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죽는 게 무서워요.” 생명의 충만을 향해서 쭉쭉 뻗어나가야 할 어린 소녀가 비장한 어조로 내뱉은 이 말은 무(無)에 대한 실존적인 자각이기보다는 무언가 자기에게 익숙했던 세계와 단절된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일까?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죽음과 삶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게 이에 대한 답변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건 잠이 무엇인지 알며, 내일 아침에 다시 깨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두려울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잠에서 깨듯이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이해하고 확신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죽음 같은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이렇게 오랫동안 애를 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완전히 사라질지, 환생할지, 다른 생명체로 윤회할지, 부활할지 아무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게 두려움의 뿌리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죽음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들은 이 땅에서의 삶에 집착한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를 확인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난 인류사에서, 특히 인간의 문명 역사가 시작한 이후로 인간이 정치, 종교, 경제, 과학 등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사실을 잠시만 더듬어보아도 이것은 아주 자명하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서 건축한 피라미드는 바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웅장하고 장엄한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 생명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으로부터 2001년 9월11일 테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간의 노력으로도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확인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그 어떤 위로도 받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그렇게 애를 쓰다가 죽어갔을 뿐이다. 생각해 보라. 만리장성을 건축한 중국 사람들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고 생명의 비밀을 밝혀낸 것일까? 로마의 씨이저들이, 혹은 미국의 대통령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취로 인해서, 달을 정복한 인류가 그것으로 영원한 자유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 생명의 궁극적인 본질이 밝혀졌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해도 인간의 생명을 성취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생명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고 싶어 하는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약간씩 우리를 자극할 뿐이지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인간을 다시 일상적인 불안과 허무 속으로 몰아갈 뿐이다. 심지어는 절대의 세계를 성취해나가는 예술행위도 그것 자체로는 온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베토벤이나 윤이상, 렘브란트, 혹은 톨스토이 같은 이들이 자기들의 작품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과 미술, 혹은 문학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기가 생산한 것에서 결정적인 구원(생명)을 얻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인간은 생명의 세계에 가까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멀리 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인지 모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장자는 당대의 최고 음악가들을 가혹하리 만치 비판했다. 온갖 연주 기법은 인간을 오히려 작위적 체계 안에 가두어버리기 때문에 소리의 도(道)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규범마저도 역시 인간의 자연적인 삶을, 즉 참된 생명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장자의 생각이 극단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인간이 예술, 윤리, 문학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도 고대인들이나 지금 우리나 마찬가지로 생명의 근본을 별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또한 그 생명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는 걸 보면 그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의 일에 집착함으로써 무언가 생명을 성취해보려는 인간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재 드러나 있는 모든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사실도 역시 생명의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주지 못한다는 데에 생명의 근원에 도달해보려는 인간의 시도는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고대인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과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생명 현상에 대한 정보를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거기다.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우리도 그렇다.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그들도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우리도 역시 그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대인은 생명체의 유전암호를 어느 정도 풀어냈기 때문에 생명 현상에 상당히 접근했다고 볼 수도 있다. 수년 전 복제 양 돌리 사건이 전 세계를 충격과 놀라움으로 휘몰아친 이후로 그와 유사한 유전공학적 사건들이 줄을 이었으며, 지금도 역시 그것이 바로 인간 생명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요술 상자인 것처럼 온갖 기대를 모아가고 있다. 설령 세포 하나로 그 세포의 주인과 똑같은 생명체를 기술적으로 생산해내고, 그런 생명공학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유전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왔다고 하더라도 생명 현상이 완전히 그 껍질을 벗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생명 공학이 이루어낸 업적이라는 것은 결국 생명 현상을 부분적으로 해명하거나 변형시키는 것이지 생명 자체를 조성해내는 것은 아니다. 체세포에 일정한 기술을 가함으로써 양이나 인간을 복제해낼 수는 있지만 돌이나 철로부터 어떤 생명체를, 혹은 무에서 생명체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어떤 과학자도 실험실에서 몇 개의 원소를 결합해서 생명체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어떤 사람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기고, 거기서 다시 단백질이 생성되고, 거기서 다시 단세포 생명체가 발생했다는 진화론에 근거해서 먼 훗날 인간이 이런 생명 발생을 인위적으로 재생시킬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설령 진화론적인 생명 발생설이 전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이미 생명 현상이 이 지구 안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엄청난 우주론적 격변기를 거쳤으며, 매우 우연한 사건의 연속에 의한 결과라는 점을 전제한다면 생명을 단순히 실험실에서 반복적으로 생산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궁극적인 생명 문제는 인간이 풀어내거나 성취할 수 있는 그 한계를 벗어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존재
인간이 과학적 업적을 통해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갖게 되었는데도 왜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몇 가지 방향에서 주어질 수 있겠지만, 근원적으로는 물리적 사실의 불확실성에 있다. 프랑스의 생물학자이며 가톨릭 신학자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샤르뎅은 어머니가 한 움큼의 머리카락을 마당으로 들고 나와 불에 태우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약간의 재로 변해버린 걸 본 샤르뎅은 그 순간에 심각한 사유의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1분전에 있었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무엇이 있음이며, 무엇이 없음인가? 어린 샤르뎅의 이런 궁금증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사물의 비밀은 캐면 캘수록 더 깊은 신비의 세계로 빠져들어 갈 뿐이기 때문에, 몇 가지 화학과 물리법칙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리고 물리적으로 무엇이 궁극적인 존재인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오늘의 미시 물리학에 의하면 물질은 이미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이라고 한다. 어떤 소립자는 그 안에 그 소립자에 비해서 너무나 작은 질량의 입자가 에너지와 결합해 있을 뿐이며, 그 작은 입자는 그 안에 또 하나의 너무나 작은 입자와 에너지가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결국 물질은 빈 공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조금 더 실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들자면, 지구를 사과 한 개 정도의 크기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가설을 상상해볼 수 있다. 지구의 중력이 소립자의 구조를 깨뜨릴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하면 이게 가능하다. 이런 상태가 블랙홀이다. 즉 지구라는 물체는 스펀지처럼 빈 공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단지 에너지에 의해서 지구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물리적 불확실성 가운데서는 우리가 생명 현상에 대한 정보를 아무리 많이 수집하더라도 근본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물리적 현상을 일단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내재해 있다. 이 현상 자체가 전적으로 시간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있었던 사물은 지금 없을 수 있고, 지금 없는 사물이 내일 있을 수도 있다. 영원한 사물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지구도 그렇고, 태양도 역시 대충 50억년 이후면 사라진다는 것이 물리적 사실이다. 그런데 생명 현상의 본질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물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시간이 우리의 인식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덱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이 사물의 시간 의존성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면서 철학의 방향을 근원적으로 돌려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쨌든지 이런 사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생명 현상을 언급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비록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 토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생명 현상만으로도 몇 가지 단서를 제시할 수 있긴 하다. 그 중의 하나는 모든 생명현상이 고립,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상호적으로 발전, 변화, 진화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이미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과 유전(流轉)을 만물의 실상이라고 보았으며, 20세기의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도 역시 리얼리티를 과정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생물만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사물들도 역시 어떤 변화와 움직임 가운데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나간다고 보아야한다. 예컨대 우주 자체가 계속적으로 운동하고 있으며, 지구의 표면과 내면도 역시 매우 강력하게 운동한다. 지구가 이처럼 생명 현상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지구의 중력과 달의 중력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지구의 지각이 운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지구 안에 있는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결합해서 운동 과정을 통해서 생명 현상을 발현시켜나가는 셈이다. 그렇지만 운동으로서의 생명 현상이 모두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생명 자체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선 생명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원리와 개념인 진화라는 범주에 한정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생명 현상의 우연성
생명 현상을 고찰할 때 우리가 우선적으로 눈여겨보아야 한 점은 오늘 이 지구상에 나타난 생명체들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없을 수도 있는 아주 우연한 현상이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간혹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모습을 한 생명체가 바로 지구에 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구상에는 그런 외계인과는 달리 지금과 같은 온갖 종류의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절대적으로 전제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되었다. 따라서 지구의 생명현상이 근본적으로 우연의 지평에 속한다는 점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강신익의 설명에 따르면 유전자 기능의 그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별로 많지 않으며, 설령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단지 통계학적인 연관성만이 주어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많은 생명체에서 유전체의 염기서열이 완전히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체(대장균, 초파리 등)를 완전히 알게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유전체를 “인간 종의 역사”라고 보았으며, 유전체 속의 유전자는 “역사 속의 사건”이라고 규정했다(창비 113, 2001년 가을). 어떤 사건이 똑같은 역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닌 것처럼 유전자만으로 유전체를 온전히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기계적 역학이 어느 범주 안에서만 동일한 규칙성을 보일 뿐이지 그 범주를 벗어나면, 즉 양자와 같은 미시의 세계나 우주 공간의 거시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미 20세기 초에 독일의 하이젠베르크는 이런 문제를 불확정성 원리에서 증명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거의 원인에 의해서 오늘의 결과가 기계적으로 도출되는 조건이 충족될 때만 설득력이 있는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은 자신들의 이러한 학문적 토대의 한계를 전제해야만 한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현상이 원래 이런 원인과 결과의 규칙적인 반복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현상만 보고 현재를 분석하기는 어렵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약간만 높았다면 세계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에 의해서 역사 자체가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언급할 때도 반드시 물리학과 생물학의 원리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힘을 전제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에서는 카오스 이론이나 장 이론이 제시된 바 있다.
물론 앞으로 이런 자연과학이 좀더 발전하게 되면 생명의 모든 현상과 원리를 완전히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명 현상에 대한 정보를 알면 알수록 물리적 메커니즘을 뛰어넘는 어떤 요소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학으로 밝혀지는 사실들이 전혀 필요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좀더 포괄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관점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의 접목은 일찌감치 이루어졌으며,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역시 매우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다. 철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그것이 결국 존재하는 것들과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알아보자는 우리 인간들의 노력이라면 이 두 학문이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은 이 두 학문만이 아니라 예술, 문학, 고고학 등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그것이 진리론적 바탕에 투철하기만 하다면 모든 사물과 현상의 궁극적 토대인, 따라서 구원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열어 가는 작업에서 같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도 예외가 아니며, 필자가 이제부터 이 글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이런 사유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다.

생명의 영
기독교 사상은 유대 사상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신(神)과 연관해서 생각한다. 구약성서에 신이 언어(로고스)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그 내용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빛,  둘째 날- 하늘, 셋째 날- 육지와 식물, 넷째 날- 별, 다섯째 날- 날짐승과 어족, 여섯째 날- 들짐승과 인간. 신이 육일 동안 우주와 생명체의 창조를 끝내고 칠일 째 쉬었다는 전승에 따라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생각하고 노동을 멈춘다. 아주 지독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이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첫째 날, 둘째 날을 지금의 하루로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간의 기간이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신이 온 세상과 생명체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다른 생명체에 비해 인간은 약간 특이한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生靈)이 되게 했다. 인간 창조 사건에서 핵심은 흙과 영이다. 다른 식물이나 동물들에 대한 서술에서는 그저 신이 언어로 만들었다는 사실로 끝나지만 인간 창조에 대한 서술에서는 훨씬 구체적이고 확실한 내용이, 즉 흙이라는 질료와 영이라는 형상의 결합이 부가되었는데, 이유는 인간 창조를 모든 창조의 완성으로 여긴 탓인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계 내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서 훨씬 탁월한 생명 형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인간 창조의 특수성은 받아들여질 만하다.  
인간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성서의 진술은 우리에게 생명과 흙의 연관을 깊이 통찰하도록 각성시킨다. 우리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은 흙에서 시작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윤기와 탄력을 자랑하는 젊은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흙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모든 식물은 뿌리를 흙에 대고 대기 중에서 탄소를 받아들여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생명을 연장시켜 나간다. 동물들은 이런 풀이나 나뭇잎을 먹기도 하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도 하는데, 그들도 결국은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별게 없다. 쌀이나 밀이 몽땅 흙의 소산이고, 소고기도 역시 풀을 먹는 소의 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흙에서 난 것을 먹고사는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상관없이 몽땅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도 토끼나 다람쥐처럼 똑같이 이 흙에서 나와서 주어진 것만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너무 일반론적인 표현이지만, 이런 점에서 땅이 곧 생명이며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서가 진술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 중에서 신이 인간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영적인 존재가 되게 했다는 사실이 성서의 인간 이해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창조 때 원시 대양의 물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흙으로 빚은 인간에게 생기, 곧 영을 불어넣어 사물로부터 영적인 생명체가 되게 했다. 구약성서에서 이 영은 인간이 숨을 거두면 죽는 것처럼 호흡, 혹은 바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에스겔의 환상에 의하면 광야의 마른 뼈들 위에 하나님의 영이 호흡처럼 불어와서 생명을 되찾게 된다. 이런 서술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많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핵심은 성서가 영을 생명의 힘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구약성서는 신(神)적인 영이 바람이나 폭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을 보이지 않은 어떤 힘으로 간주했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에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힘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헬라 사상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에게도 영을 의미하는 프뉴마나 호흡을 의미하는 프노에는 상관적 개념이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 생각했고, 아낙사고라스는 정신(영)이 우주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영은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기(氣)나 도(道)와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기독교 사상의 영과 동양사상의 기나 도는 한결같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말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양기도 장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되었고, 맹자의 호연지기도 우주에 충만한 광대한 기라고 생각되었는데, 이것 역시 몸에 가득히 차 있는 그 무엇이다. 기는 산천 등의 자연 속에서 느끼는 영적인 것까지를 포함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음양과 오행으로 발전하여 우주 구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이게 되었다. 영이라고 불렀든지 기라고 불렀든지 언어의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개념이 일치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여호와라 하든, 알라라 하든 상관이 없듯이 영과 기나 도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영과 기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한 요소가 있다. 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신관과 동양 신관의 차이에 토대 하는 것으로서 영의 인격성을 말한다.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근본인 영이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이해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일종의 자연 원리로 이해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기도 한 그 거룩한 영의 뜻과 인간의 반응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생명의 역사가 진행된다고 보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원리인 그 기와 도에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영이 인격적이라는 말의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영이 인간의 사유를 초월해서, 즉 우연한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과연 생명은 역사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시작되고 유지되는 한 현상인가, 아니면 그것 자체로 영원한 자연의 한 속성인가? 우리는 이 자리에서 어떤 쪽이 옳은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접어두기로 하자.

창조와 진화  
생명 현상을 하나님의 영과 연관해서 이해하고 있는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핵심은 생명이 바로 신에 의해서 시작했고 유지되며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소위 창조론이다. 아마 이 말을 듣는 이들 중에서는 이미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이 끝장난 마당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하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기독교가 진화론에 대해서 독단적으로, 혹은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탓이 크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재단해 버린 기독교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론이 말하려는 바의 근본이 제대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진화론과 창조론을 그렇게 첨예하게 상치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싼 역사를 잠시만 되짚어보자.
1859년에 발행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결국은 헉슬리와 후커 등의 지원을 받은 진화론이 기독교 일각에서 끈질기게 제기된 창조론을 제압하고 학문 세계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미 지동설 문제로 인해서 이런 학문세계에서 권위를 손상 받은 기독교는 이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진화론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신학이 자연과학을 비롯한 일반 학문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엄밀한 과학적 자료와 분석에 근거한 진화론이 가져온 사태 앞에서 기독교가 취한 태도는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위 “창조과학회” 류의 사람들로서,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과학적으로도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진화론의 허점을 자기들 나름의 과학적 논리를 통해서 집어내고 성서가 오히려 과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변호한다. 예컨대 노아 홍수 때의 방주를 찾겠다고 터키의 계곡 사이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으며, 이스라엘이 아모리 민족과 전쟁할 당시에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을 잠시 멈추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를 성취한다는 성서 구절이 나오는데(여호수아10:12), 몇 가지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이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성서의 창조론을 진화론과 대치시킴으로써 성서와 기독교의 권위를 지켜내려는 이들의 노력이 아무리 눈물겹고 절실하지만 이런 자세는 이미 근본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에 별로 귀를 기울일 만한 주장이 못된다. 이들은 과학과 신학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혼동함으로써 성서를 과학이라는 범주 안에 속박시켜버린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의 근원과 실질이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서나 과학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이 놓친 셈이다. 따라서 신학은 자연과학과 맞서는 또 하나의 유사 자연과학을 생산하려고 공연한 수고를 기울일 게 아니라 자연과학적 사실을 기초로 해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자세다.
두 번째의 태도는 과학과 신학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갈라놓는 것이었다. 과학은 과학이고 신학은 신학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인 진화론과 종교적 경험에 대한 고백인 창조론 사이에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신학자는 20세기 전반부를 대표하는 칼 바르트다. 소위 말씀의 신학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신학적 특성에 의하면 신학은 세계의 학문과 과학에 대해서 관여하지 말고 단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보도라 할 성서를 해석하는 것에 한정해야 한다. 이런 경향은 바르트에 의해서 확고한 틀을 형성하긴 했지만 이미 신학과 교회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일반학문 세계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한 이후에 자폐증을 앓듯 끊임없이 자기 내부로 숨어든 역사적 과정과 연관선상에 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하듯이 인간의 절대의존 감정만이, 혹은 리츨이나 헤어만이 말하듯이 인간의 윤리만이 기독교의 관심분야가 되고 말았다. 앞서 설명한 창조과학회 류의 입장은 기독교 내부에서 소수의 근본주의자들과 관계된 저항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의 입장은 기독교의 주류를 대변하고 있는데, 이들도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설명해야할 자신의 기본적인 책임을 유기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다른 세 번째의 흐름이 있는데, 위에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진화론적 창조 개념이 그것이다. 자연이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진화해 나간다고 주장한 그에 의하면 세계의 실재와 사실들을 밝히는 빛이라 할 진화론은 단순히 생물학의 한 분야이거나 신학적으로 검증 받아야 할 가설이 아니라 지구의 운명을 형성하고 있는 중심 원리다. 진화의 과정은 복합적 의식의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이 법칙이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첫째, 물질은 시간을 통해서 점차 복잡한 구조로 진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둘째, 물질의 복합성의 증대에 상응해서 물질에 의식이 발생한다. 따라서 의식은 주입된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의 산물이다. 그의 입장은 우주를 물질계로부터 정신계로 진화해나가는 생물학적인 지평에 설정함으로써 진화론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던 기독교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하는데 공헌하긴 했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과는 작지 않은 틈을 보인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태도 이외에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에 확고하면서도 이 세계의 생명 현상에 대한 설명인 과학적 탐구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오늘의 새로운 자연 신학적 대안이 있다. 이는 곧 신학과 철학과 과학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견해이다. 우선 신학의 입장에서는 자연과학의 사실적인 논거에 대해서 시비를 걸 하등의 이유가 없다. 과학은 늘 한 현상에 대해서 실험하고 분석함으로써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런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사물과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체세포 복제나 게놈연구에서 밝혀진 생물학적 사실의 경우에도 역시 유효하다. 다만 신학은 우선 과학자들이 생명현상이라고 부르는 그런 생물학적 현상이 궁극적으로, 혹은 보편사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언급할 수 있다. 나아가 그런 궁극적인 보편성을 전제하지 않는 한 부분적인 현상 연구가 결국은 생명의 리얼리티를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다는 점도 논증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이해와 신학적 이해는 실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을 의미한다. 즉 생물학적 연구는 생명에 대한 부분적인 현상을 엄밀한 증빙에 의해서 드러내는 작업인 반면에, 신학은 생명의 궁극적이고 전체적인 리얼리티에 대해서 성서의 전통과 기독교 사상의 전승에 근거해서 예기(豫期)하는 작업이다. 여기에 바로 자연과학과 신학이 생명이라는 화두를 놓고 함께 논의해나갈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 있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이고 신학은 주관적 체험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입장과 방향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록 실험실에서 얻어진 답변은 아니지만 신학도 역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오늘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신학의 학문적 방법론을 배타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이 양측이 진리론적인 태도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간(間)학문적인 소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세계와 생명을 신의 창조물로 주장하는 기독교의 입장이 실제로 진술하고자 하는 그 핵심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미래의 힘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유지하고 완성한다는 기독교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든 실질(實質)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진화론이었든지, 아니면 지동설이었든지, 오늘날의 양자역학이나 역장이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역사와 종교사, 궁극적으로 인간 생명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실과 현상들이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당장 우리 인간이 살아가며 확인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을 아는 게 중요하지 종말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공연히 그렇게 뜬구름 잡는 주장을 하는 건 인간의 삶을 기만하는 요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기독교를 향한 이런 날카로운 비판은 그 역사가 깊다. 포이에르바흐로부터 시작해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러셀 등 많은 사상가들이 기독교의 도그마를 비현실적이며 민중 기만적인, 그리고 정신 분석적으로 미숙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예컨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허망한 하늘에 대한 희망을 가르치는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땅에 충실하라고 외쳤으며, <도덕계보학>에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무신론을 주장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기독교 신앙을 죄의식에 근거한 일종의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비판했으며, 마르크스도 민중의 아편이라고 혹평했다. 필자는 니체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인간학적 비판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지향하는 기독교 사상이 그렇게 단순한 인간의 자기 투사이거나 현실 도피적인 망상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각은 엘리아데가 분석한 것처럼 현실의 문제를 간단히 미래로 유기시켜 버리기 위한 탈(脫)역사적, 세계 도피적 편의주의가 아니라 참된 생명이 완성되는 때에 대한 시각을 미래에 두자는 사상이다. 일종의 미래적 존재론이다. 이는 곧 오늘의 결정론적인 역사관과 과학관을 극복하고 모든 사물과 생명이 완전히 그 실상을 드러낼 종말의 시각으로 오늘을 바라보는 태도다. 오늘의 모든 학문과 인간 행위가 그러하듯이 현재를 현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부분적인 분석으로만 끝나버리지 실질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묶어내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온전한 정체성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혹은 죽음 이후에야 온전히 드러나는 것처럼 우주 전체의 운명과 본질도 역시 종말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관은 근본적으로 역사 결정론의 극복이며,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미래(종말)로 열려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시각은 신구약성서의 중심 사상이다. 우선 구약성서는 세계를 헬라인들처럼 공간적인 의미의 <코스모스>로 여기지 않고 시간적인 의미의 <에온>으로 보았다. 헬라인들이 세계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순환적인 것으로 보았다면 유대인들은 시작과 끝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역사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모든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온전한 생명의 세계가 다가온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곧 그들의 묵시문학적 세계관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그들은 현재의 삶이 아무리 화려하고, 혹은 비참하다고 하더라도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함으로써 잠정적이고 무상한 이 세계를 견뎌냈다. 그 마지막 때가 되면 오늘의 이런 생명 형식과는 다른 생명 형식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 세계는 곧 생명의 영이 충만하고 생명의 영이 통치하는 세계다. 다음에 인용한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부여된다.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 그 날, 나는 남녀종들에게도 나의 영을 부어 주리라.”(구약성서, 요엘3:1,2).
구약성서의 이러한 묵시문학 사상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종말론적인 역사관으로 연결된다. 특히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표상은 바로 이런 종말론적인 시각에 근거했다. 그가 가르친 모든 비유와 아포리즘(경구)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표상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5장3절-8절에 나오는 소위 “행복예찬”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는 가난한 사람과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했는데, 이런 일은 우리의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배고픈 사람이 배부르게 되는 때는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 형식은 적자생존의 질서에 의해서 운영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가 없지만 이런 형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형식에 의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분명히 가난한 자가 행복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는 이런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살았기 때문에, 즉 자신의 삶을 이런 종말에 전적으로 위임했기 때문에 현실유지(status quo)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종교(유대교)와 정치(로마제국)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의 사상과 그 사건을 체계화한 바울도 그 종말론적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12).

새로운 생명 형식
초기 기독교는 이 종말을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경험했으며, 이에 토대해서 전혀 다른 생명 세계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종말에 성취될 참된 생명이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선취(先取)되었다고 믿는다. 원래 복음서 기자들은 부활 사건의 세세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신약성서에 부활보도가 매우 산만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예수의 무덤이 비었으며 죽었던 예수가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현현 했다는 사실만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명백했다. 우리는 지금 2천년 전 예수 공동체에게 일어난 현상을 확증하기 힘들지만 그들이 세계의 마지막 날에 예수에게서 발생했던 부활 사건이 모든 죽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확신했다는 점만은 일단 인정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확신한대로 과연 종말이 올 것이며, 그 때 모든 죽은 이들이 부활하게 되고 온전한 생명의 세계가 완성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따질 겨를이 없다. 또한 그렇게 왈가왈부 하더라도 역시 어떤 객관적 판단이 종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보충적인 논의만으로 이 문제를 마감하려고 한다.
예수는 종말에 발생하게 될 부활의 나라에서는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가고, 흡사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했다(마태복음 22:30).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희열이라고 했다(로마서 14:17). 또한 그는 마지막 때에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한다고 설명했다(고린도전서 15:53). 이런 일련의 언급들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삶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이 도래한다는 말이다. 과연 그 변화된 몸, 혹은 생명의 다른 형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우리는 지금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완성될 종말이 이르러야 실증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독교인들이 현재의 잠정적이고 무상한 생명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절대 생명을 의미하는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극복되었다고 믿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자신을 의존시키고 살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단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지평에 속한다.  
아마 어떤 사람은 “그것 봐라. 또 이상한 말만하지. 새로운 생명 형식과 영적인 세계 운운한다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이고 망상적인 자기기만에 불과한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 형식을 내다보고 기대한다는 게 그렇게 무모하고 허망한 것은 아니다. 미래의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 우리의 손에 잡혀 있지는 않지만 이미 선취된 한 사건을 통해서 그 미래의 생명 세계를 예기한다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삶의 태도가 아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의 종말론적인 부활 생명이 참된 생명의 미래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보다 더욱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한다. 인간이 과학과 복지 제도를 통해서 이 땅 위에서 세워나가는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지상낙원이 생명의 궁극적인 리얼리티를 확실하게 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세계는 여전히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무상성을 벗어날 수 없다. 혹은 어떤 원리에 따라서 생명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생명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도 없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자리로 돌아올 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는 이런 생명 형식으로 영원히 존재한다면 결코 절대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생명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인 부활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가 희망하는 종말론적인 부활 생명이 비록 현재의 생명 형식과 전혀 다른 생명 형식이지만 현실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흡사 씨앗처럼 그 미래의 생명을 현재의 생명 형식 안에 담지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인 사랑의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궁극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미래의 생명을 참되게 희망하는 사람만이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산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새로운 생명 형식을 내다보는 사람만이 잠정적인 현재의 생명을 초월함으로써 진정한 세계 연대성을 회복할 수 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러한 미래를 희망했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한 희망 가운데서 자기 실존을 꾸려나가고 있다.
  
끝으로, 오늘 이렇게 궁극적인 생명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인간을 비롯해서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생물학적인 연구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게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생명 이해를 전제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존재가 신비이듯이 생명은 미래를 향해 열려진 신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 위에서 인간의 생물학적인 건강을 확보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일련의 행위가 과연 인간이 자기 실존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의 양식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영)의 양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마태복음 4:4참조). 이런 점에서 모든 죽은 자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종말(미래)의 시각에서 오늘의 생명 현상을 조명하고 규정해나가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생명의 본질을 열어가려는 오늘의 모든 자연과학적인, 그리고 인문학적인 작업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생명의 영, 미래의 힘'은 여기 특강 메뉴에 올라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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