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교회란 무엇인가?

조직신학 조회 수 7884 추천 수 121 2005.10.19 23:27:45
17장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의 교회가 매우 견고한 체제와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긴 하지만 원래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으로부터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예수가 교회를 세웠나? 세우라고 명령했나? 그런 암시라도 있나? 우리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대답을 찾기는 힘들다. 물론 마태복음 16장18절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가 직접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특히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보는 게 옳다. 성서학자들의 주석이 더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론에 대한 예수의 생각과 사도들의 생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해명하고 있지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물론 예수 사건 없이는 교회 출현도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예수와 교회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는 어떤 사람이 회사를 설립하는 것과 같은 인과관계 안에서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선포했다가 결국 동일시됐던 하나님 나라의 신학적 인식 가운데서 해명될 수 있다. 이 말은 곧 오늘의 교회는 그것 자체로 존재론적 근거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완벽하게 의존해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교회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서도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이런 성격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미 분명했다.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 나사렛 파 일행은 자신들끼리 일정한 모임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유대교로부터 분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당시 바리새파, 사두개파 처럼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매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경건한 무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선생인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의 종교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은 1) 여전히 성전을 출입했으며, 2) 율법을 준수했고, 3)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다시 한 번 더 이 문제를 정리한다면, 기구로서의 교회는 사실 매우 역사 우연적인 결과다. 어떤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인격과 사건, 특히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하던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서 우연하게 등장한 기구다. 이 말은 곧 교회가 자기 스스로 존재 근거를 갖거나,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게 아니라 잠정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간혹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1. 교회론의 오류

첫째, 교회의 절대화는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벌어진 잘못이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유명한 도스토옙프스키의 통찰에 의하면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다. <형제들>에는 세 명의 형제들과 배다른 동생이 등장한다. 제일 큰 형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저 생각 없이 술 잘 마시고 정열적으로 살아가며, 둘째 이반은 가장 이지적인 불가지론자로서 시대와 종교와 전통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셋째 알료사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늘 전형적인 성직자 상으로 등장하는 인격의 인물로서 당시 정교회의 승려다. 오랜 전에 읽어서 분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배다른 동생은 아마 정신이 좀 모자라는 여자를 아버지가 겁탈함으로써 태어난 것 같다. 카라마조프라는 한 가족 안에 그 시대의 모든 인물상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 날 이반은 자기 동생 알료사 장로에게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심문관’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러시아에 와서 옛날 그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교회의 조직을 확대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사람들에게 기쁨을 알려주는 일만 했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정교회 집행부가 예수를 체포해서 감금했다. 어느 날 밤 정교회 대주교가 감옥으로 예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흥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내려왔소? 당신 없이도 이 땅의 일은 우리가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당신은 당신의 나라인 하늘로 돌아가시오.”
이 이야기에서 도스토옙프스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주 명확하다. 이 땅의 현실적인 교회는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잘 굴러가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예수가 없어야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status quo)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하지만 진심으로는 예수를 귀찮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교회의 대주교의 흥정처럼 “당신은 하늘나라만 관장하고 이 땅은 우리가 관리하겠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받아온 교회의 자기 유혹이며 위기였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그의 삶 전체는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가르침이나 행위가 온전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즉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교회는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흡사 구원을 나누어주는 기관처럼 자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우리의 한국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운영되는가를 약간만 들여야 보아도 이런 현상은 아주 명확하다. 교회를 개척하기만 하면 그 즉시로 교회당을 짓는 일이 지상 목표가 되어버리고, 그 일이 끝난 다음에는 수양관을 건축하고, 복지관을 짓고, 혹은 교회 공동묘지를 준비하는 일에 매달린다. 물론 노숙자, 결식자, 장애인, 외국 노동자, 미혼모 같은 이들을 돕기도 하지만 그런 일도 대개는 교회 확장과 연계될 때만 힘을 얻고 있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겨우 형식적으로만 운영된다.
둘째, 교회 해체론 역시 교회론의 오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 교회 해체론은 다시 적극적인 입장과 소극적인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적극적인 해체론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외친 니체나 종교를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비난한 프로이트, 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일갈한 마르크스 같은 이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기독교 비판은 상당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 자체에 반론을 펼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인간들에 의해서 벌어진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머무르는 게 좋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 세계에서 소위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상당히 크게 활동하는 것 같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가 내포하고 있는 허구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을 물고 늘어지면서 교회 해체 주장에 한몫 거들고 있다. 이런 안티 사이트가 발생하게 된 이유가 우리 교회의 잘못에 기인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한편으로는 학문적 진정성이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선정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서의 역사비평에서 이미 다루어진 문제인 성서 테스트와 신화의 문제를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주장한다거나, 교회 안에서 벌어진 스캔들이나 재정 사고 같은 것들을 부풀려 전달하는 그들의 행동은 정당한 기독교 비판으로서의 무게를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소극적인 해체론은 여러 소종파 형태로 발생한 ‘무교회주의’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구로서 자기를 목적으로 삼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오직 성령이 지배하는 영적인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목표로 무교회주의를 제창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교신과 함석헌을 중심으로 이런 운동이 한동안 힘을 얻었지만,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로 접어들은 것 같다. 우리는 일단 기성교회에 제기하는 그들의 비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조직으로 교회가 작동하다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자기 조직을 확대해야만 한다는 조직 원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한 보이는 교회, 조직, 카리스마를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그런 것들의 본질이 인간학적 원리에 의해서 훼손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교회가 이미 구원을 담보한 공동체라기보다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리는 공동체이며, 또한 구원을 시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할 공동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종말론적 지평에서 자기를 개혁해나가기만 한다면 그런 흠이 있는 교회가 그것을 포기하는 교회보다는 훨씬 바람직한 교회라고 볼 수 있다.


2.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를 위에서 짚었는데, 이제는 그런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 그것은 곧 교회의 존재 근거가 되는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교회의 미래라는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미래인 것처럼 교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교회는 어거스틴 이래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일치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종말과 하나님 나라가 개시되기 전 메시아의 천년 왕국이 시작한다는 유대적-기독교적 기대와의 연결고리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어거스틴은 메시아 왕국을 교회의 시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러한 전(前)천년설적 표상의 모든 종말적 드라마를 제거했다. 이러나 동일화에는 물론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분리될 수 없으며, 양자는 교회가 좇아야 할 미래를 특징짓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미래는 교회의 현재를 이미 규정하고 있다. 교회의 선포에서 그리스도 통치는 사실상 현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로 불러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지상적 활동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속 유지한다.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현재적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이 보장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에서 행해지는 기독교인들의 친교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보다 우월하다.(사도신경해설, 193).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성서 신학적, 윤리 신학적, 조직신학적 검토를 포괄적으로 수행하기는 힘들다. 이 문제는 또 다른 과제로 주어질만한 것이기도 하고, 오늘 우리의 논점의 핵심이 아니니까 몇 가지 요점만 정리해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인간의 태도는 오직 회심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셨다. 즉 임박해 있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회개뿐이라는 말씀이다. 과연 회심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길일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실정법을 어기거나 파렴치한 행위를 죄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회개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윤리나 전통이나 사회적 습관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생각한다면 회심은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 나라로 전환한다는 뜻의 헬라어 ‘메타노이아’에서 볼 수 있듯이 한두 가지 태도와 습관을 고치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회심이라고 한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자기 성취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회심한 사람들이 아니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순간을 자기 성취의 기회로만 사용한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옳은 말이다. 이게 바로 ‘하마르티아’(죄)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신자들에게 이런 저런 종교적 행위나 업적을 강요하거나, 혹은 기독교적인 교양을 쌓게 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교회의 외적 성장만을 고집하고 집중한다면 교회는 회심한 공동체가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공동체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는 어떤 업적이나 노력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하면서, 자기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게 인간에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사랑, 해방, 기쁨 등의 속성으로 드러나는 나라, 그의 통치이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자들이 차지하게 될 어떤 찬란한 왕궁 같은 곳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변화, 움직임, 해방, 자유, 사랑이 임하는, 즉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이다. 겨자씨 비유, 포도원 농부 비유, 탕자의 비유, 슬기로운 처녀들의 비유가 모두 한결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게 될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가리킨다.
오늘 교회는 이런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에 대한 선포를 자기의 사명으로 여겨야만 한다. 교회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확대되는 세계를 선포하고 그것을 자기의 존재 이유로 삼아야 한다.
3)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는 종말론적이다.
19세기 유럽의 교회와 신학은 성직자 중심주의와 추상적 교리주의에 반대하고 철저하게 인간애에 바탕을 두고 이 세계를 발전, 진보시켜 나가려한 시대적 흐름 가운데서 존재 근거를 이런 윤리와 사회봉사에 두려고 했다. 인간 계몽, 종교성, 인간애, 사회복지가 중요하게 대두된 시대적 경향에 부응하는 태도였다. 오늘의 교회 중에서도 약간 지성적인 교회나 의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는 사회복지관 설립을 교회의 지상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런 일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회의 진보, 복지 프로그램을 교회의 주 업무로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이런 노력으로 성취될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역사 진보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판넨베르크의 지적은 옳다.

교회의 특별히 사회적인 활동(복지시설, 보육원, 간호시설, 병원, 학교 등등)은 부차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교회는 정치 공동체의 대리인으로서 이런 일들을 하는 데 불과하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의 정치적 기구에 속하는 것이 타당한 이런 책임들을 국가가 인수하도록 준비시키고 또 인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를 시기하고 어떤 복지 활동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사명을 기묘하게 곡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정치 단체를 고무하여 그 책임을 인수하게 하는 데에서 만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회적 공헌은 생명의 궁극적 신비, 즉 영원한 하나님과 역사 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인간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인간적 생명의 인격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신학과 하나님 나라, 127).

4)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선취되었으며, 지금 은폐의 방식으로 활동한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과 선취의 성격은 기독교 신학에서 변증법적 방식으로 인식된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무조건 미래의 사건으로만 방기된다면 오늘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책임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이 역사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소외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주의에 빠질 수 없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 역사 안으로 선취한 사건이며, 여기에 근거해서 아직 마지막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지만 여기서 지금(here and now)우리는 그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선취인 근거와 이유를 역사적으로 증명해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작용하는 교회의 선교라 할 수 있다.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교회 개념

우리는 위에서 교회론의 방향을 어느 정도 정리한 셈이다. 이제 교회의 교리사적인 해명에 귀를 기울일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교회가 신학적으로 어떤 속성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명이 그것이다.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준거로 작용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우리말 사도신경의 교회 항목은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신조(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됨)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진술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세 가지 특성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네 가지 특성이 바로 교회가 자기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교회의 다층다기한 ‘속성’, 즉 거룩성, 단일성, 가톨릭성, 사도성은 그 본질에서 이미 완성되거나 상존하는 기구의 특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그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할 선교 운동의 시금석이다.”(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188). 즉 기존의 교회가 이 특성들을 본질적으로 완성시킨 게 아니기 때문에 교회가 이 기준에 따라서 자신을 개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네 속성의 근본 의미를 생각해보자.

1) 단일성-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면 이들은 당연히 그 내부에 단일성을 전제한다. 자동차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그 물건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벌면 그만이지만 교회는 예수가 온 세계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고 선포하는 이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로 배타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 기독교의 2천년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도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았으며, 그 분의 이름으로 성만찬에 참여했다. 구원론적으로 하나의 근원을 갖고 있다면 이들의 일치와 친교는 분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 교회를 본다면 어처구니가 없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현상이 한국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데, 곧 백 개 이상으로 분열된 교파 현상이 그것이다. 세계에서 예수를 가장 열심히 믿는다는 한국 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분열과 분파 작용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물론 이런 교파 분열로 인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얻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분열의 역사가 합리화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교회의 단일성은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매사에 만장일치, 또는 획일화라고 할 수는 없다. 즉 “자유 속에서의 일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비록 한국 교회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지만 이런 기회를 좋은 쪽으로 살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 즉 각각의 교파가 자신의 특색을 살린 가운데 일치 정신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다양성 가운데서의 일치인 셈이다. 이러한 교회의 단일성과 일치는 분열된 이 세계 가운데서 진정한 일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징표가 될 수 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그럴 가능성과 의지가 있을까?
2) 보편성- 영어의 카톨리시티를 번역한 보편성은 원래 지역적인 교회에 대해서 대교구에 있는 주교회, 감독교회를 의미했다. 말하자면 지역교회도 역시 온전한 교회이고 그것을 감독, 관리하는 노회나 총회까지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온전한 교회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일치와 연관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교회의 단일성이 교회의 수렴적인(intentiv) 보편성을 의미한다면, 교회의 보편성은 교회의 확장적인(extensiv) 일치를 의미한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 카톨리시티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탓에 개신교회는 보편적이라는 말 대신에 “일반적인”, 혹은 “기독교적인”이라는 말로 대치했다.
이런 교회의 보편성에 근거해서 한국교회의 모습을 반성해보자. 앞서 교회의 단일성에서도 언급한 문제이지만 기독교 교회는 구체적인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그런 교회들의 연대와 일치를 통한 전체로서의 교회라는 차원도 역시 중요한데, 우리는 이런 요소를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특히 개신교회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야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예컨대 교회 개척문제만 해도 대개는 개교회의 확장이라는 차원에서 실천되고 있지 전체 교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 재정이 넘쳐나는 교회가 있는 반면에 여전히 미자립 교회가 30%에 이른다는 말은 교회의 보편적 지평이 말살되고 있다는 뜻과 다른 게 아니다.  
3) 거룩성- 초기 기독교로부터 예수 믿는 자를 성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런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다. 성도를 뜻하는 “하기오스”라는 단어는 거룩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따로 구별된”이라는 뜻도 있다. 하나님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거룩한 힘을 체험한다는 것과 똑같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들려온 음성이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것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는 소리였다. 신약성서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성도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거룩한 자들이며, 구별된 자들인가? 만약 우리가 매 주일 교회에 나오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드리고, 이러한 일정한 종교의식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든지, 구별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일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이 세상적인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이 이룬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인정된다. 말하자면 자기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으로 자기 인생을 설정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의 굳어진 질서를 변호하고 고착화시키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과 개혁을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가난 속의 거룩함”이라고 표현했다. ]
교회의 거룩성이 왜곡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거룩성을 확보하려는 ‘세계 도피적 경건성’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한 가운데서 영속적 기구로 자리함으로써 거룩성을 확보하려는 ‘잠정성의 망각’이 그것이다. 교회의 거룩성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 안에서의 영속적 기구가 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할 미래 앞에서 모든 것의 잠정성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사랑의 창조적 동인과 연결되는 곳에 확보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4) 사도성- 기독교 교회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본다고 하더라도 순전히 사도적 전승에 의존해 있다. 예수가 직접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으며, 그의 가르침과 실천이 오로지 사도들에 의해서 전승되어 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직접 경험하는 게 아니라 사도들의 경험을 2차적으로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온전히 사도적이라는 말이다. 쉴링크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적인 증언 없이는 그리스도가 감추어져 있을 것이며, 다만 이런 사도적 증언에 토대해서만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식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교회의 세 가지 특징은 이 사도직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사도직 문제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첫째, 교회의 복음과 가르침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람, 즉 첫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길은 현대의 여러 사상에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사도의 가르침, 특히 그들이 경험한 십자가와 부활과 얼마나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둘째, 교회는 사도의 선교적인 사명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가 조직으로 자기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온전히 사도적 사명이 그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본질로부터 이탈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도적 선교 사명에 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사도의 선교적 사명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부활절 사건에 의해서 종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4. 교회론에 대한 오늘의 차원

몰트만은 오늘의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변화된 사회적 상황에 능숙하게 적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과 다가오는 나라의 능력에 의해서 교회가 내적으로 갱신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교회를 움직이는 내적인 불안에 의해서 주어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의 교회에 대해서, 성령의 현재와 능력 속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인식되는 불안을 가리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네 차원에서 교회론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몰트만, 박봉랑외 4인 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80, 13-30참조)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체화 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개는 교회를 확장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다른 질서가 교회를 지배하도록 방기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지 않으려면 꾸준히 그리스도에게 의존해야 한다. 1934년의 바르멘 신학 선언 제1항은 국가에 종속되는 교회론을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종속되는 교회론을 제창했다.

“그가 성서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고, 삶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가 신뢰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의 선교의 근원으로서 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밖에, 그리고 이 말씀과 병행해서 또 하나의 다른 사건들, 권세들, 형태들,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식할 수 있고 또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잘못된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론은 교회론을 지배하는 주제이다. 즉 교회에 관한 모든 명제는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명제는 바로 교회에 대한 서술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명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를 넘어서 교회가 봉사해야 할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에까지 미치기 때문이다.(몰트만, 17).
신학적 토대가 부실하게 될 경우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의존하는 대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교회가 교회 자체를 의존하고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국가나 사회 권력을 의존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라는 구조를 보존하고 있지만 그것을 상대화하면서 자신을 변혁시켜 나가야 하며, 또한 국가라는 조직을 상대화하면서 정치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야만 한다.
2) 선교하는 교회
몰트만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교회는 교회 자체와 교회의 위탁을 세계사의 틀 안에서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교회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서술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선교하는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다. 하나는 교회가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둘째는 선교는 곧 하나님의 선교라는 것이다. 선교는 오늘의 지평에서 교회가 지신의 기구를 확대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종말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교회 자체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이 교회의 목적이다.”
3) 에큐메니칼 교회
교회의 본질은 하나의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거룩한 교회에 있듯이 에큐메니칼 개념은 바로 교회의 교회다움을 담보해주는 토대다.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된 이후 11세기와 16세기에 벌어진 기독교의 대 분열 이후로, 특히 개신교 안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교파 분열의 역사를 보였다. 한국의 교파 분열은 아마도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인데, 이의 극복이 바로 교회다움을 찾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몰트만은 이런 에큐메니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논쟁신학(Kontroverstheologie)으로부터 협동신학(Kooperationstheologie)으로 전진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신앙고백의 혼합이나 신학적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교회에 대한 질문과 관심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의 길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거부로부터 대화로’, 그 다음에는 ‘대화로부터 협력으로’ 나아가며, ‘협력으로부터 종교회의(Konzil)’로 전개된다. 아마 한국 교회는 이런 에큐메니칼 운동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야 할 텐데, 그러한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교회의 존재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둔 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탓이리라.
4) 정치적 교회
교회가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선교적 교회이며, 에큐메니칼 교회라고 할 때 이런 요소들은 이 땅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교회를 정치화하자는 게 아니라 교회의 구원론적 업무가 정치적인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속하는 정의와 평화가 단순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범주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라면 정치적인 성격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둔 교회가 정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고, 다른 한편에서는 틀렸다. 세속 권력을 교회가 함께 누리려는 생각에서 정치와 결탁한다면 그것을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교회의 업무가 순전히 인간의 영적인 세계 만이라고 생각해서 정치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책임 회피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가 정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이 정치적 차원은 제한적인 요소이다. 정치와 교회의 관계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마 22:15-22, 2005. 10.16.)이라는 필자의 설교 마지막 단락을 아래에 인용하겠다.

저는 예수님이 로마법에 따라서 세금을 내고, 율법에 따라서 헌금을 내면 된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되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존되고,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카이사르의 것을 따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것을 따로 돌려드린다는 말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문제는 본문만으로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다른 가르침이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서 윤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카이사르의 것이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카이사르의 것을 인정하는 듯이 말씀한 이유는, 혹은 그런 근거는 하나님의 나라는 카이사르의 방식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반어적 확증입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움켜잡아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인간들의 욕망인데, 이것과 하나님의 통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사랑은 공장에서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사랑 스스로의 능력으로 우리를 찾아오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카이사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주어버리는 게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역사는 이상하게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카이사르를 대리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카이사르와 아무런 상관없는 하나님의 통치에만 집중하셨던 분이 왜 카이사르에 의해서 죽었을까요?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도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형식적 권위를 내버려두지만 신적인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목표를 넘어서 새로운 힘에 의해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세상과 대결하는 사람들이 곧 기독교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와 고난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역사의 우연으로 출현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타난 교회의 속성, 그리고 현대 신학적 차원에서 몰트만이 제시한 문제들을 검토했다. 그 이외에도 교회론에 관한 오늘의 논쟁점들은 많다. 퐬판에 따르면, 참된 교회의 표지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드러난 교회와 숨어 있는 교회, 교회와 국가, 교회의 민주화, 교회와 교회들, 교회와 직무 등(교의학, 387)이 그런 것들이다. 우리가 이런 문제까지 자세하게 다룰 여건이 아니기도 하고, 이 문제들이 그렇게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대신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에 두고 교회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공동체’를 해명하는 것으로 이 강의를 끝내도록 하겠다.

종말론적 공동체
교회는 지난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런 전통적 교회론에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시켜나가기만 한다면 교회의 영적인 건강은 회복되고 그렇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이 말에는 우선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가 새겨져 있다. 왜냐하면 종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그리고 역동적으로 작동시키는 일에 온갖 수고를 아끼고 있지 않지만 이런 간절한 수고와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역시 종말이 오기 전인 이 중간시기의 ‘잠시’에만 해당될 뿐이다. 물론 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물도, 조직도, 이념도 종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목적으로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인간 문명 이후로 가장 절대적인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국가도 역시 종말론적인 힘이 없다. 많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인간의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한 국가 조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국가는 결코 절대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종말론적인 힘에 의해 지배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현실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자리를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 능력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들은 교회가 자신을 목적으로 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교회와 신자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목적으로 삼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지면도 지면이지만 약간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신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여긴다면 우선 자기를 상대화시키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우습게 여기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지켜온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는 종말론적 우선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워내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방식을 세상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간혹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또는 교묘한 술책으로 교회당을 지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행태는 하나님 나라에 기대어 존재근거를 갖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삼은 교회의 모습에 불과하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초석으로 삼는 교회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자기와 자기 조직을 절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는 태도이다.
위에서 말한 부분이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내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외면적인 관점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변화시켜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내용이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이 종말론적 지평에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인간과 자연이 일치되는 세상, 인간 삶의 무의미성이 극복되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현재 남북의 분단체제가 극복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교회에 앉아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복 받고 잘살게 되는 것만을 기도한다면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종말론적인 미래는 이런 사회개혁이나 발전으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지사회가 도래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다. 자칫 그런 복지 시스템이 하나님 나라를 끌어올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그런 프로그램의 개발을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더 크게 훼손시킨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인식에 담겨 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킬 수 없는 그 미래의 세상을 향한 열린 자세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구체적인 땅의 삶에 제한 받으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종말론적인 삶으로 열려져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독특한 긴장이 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절대 사이에서, 즉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말 사이에서 어떻게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근본에 대한 질문을 열어둠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그것이 곧 종말론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선교적 몫이다.



<부록>

종교개혁 484주년 기념, 대구경북지역 목회자 협의회, 신앙 고백문

종교개혁 484주년을 기리며
근본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됨으로써 그 본질이 유지된다는 종교 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까지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자 한다. 가장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되던 21세기의 초입에 오히려 극도의 반문명적이며 광신적인 폭력과 억압이 전(全)지구적으로 소용돌이치는 이 순간, 우리는 정의로운 평화의 나라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래와 같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바이다.
1.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다(골1:18). 교회는 교회를 설립한 사람들이나 교단의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자본제적 가치관과 성장 논리에 기대어 교회를 관리하고 사유화하고, 또는 담임 목사의 세습 방식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사태를 용인할 수 없다.
2. 교회는 하나다(고전12:20). 성령이 하나이고 그리스도가 하나이며, 하나님이 하나이고 세례가 하나이듯이 교회도 역시 하나임을 고백한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교파 분열 현상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실질적인 일치 노력도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히 죄다. 이제 우리는 남한 내의 모든 교회가 성만찬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회복하여 진정한 일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서 지역과 세대와 남북 간의 화해를 견인해낼 수 있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3.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다(행4:31).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며, 생명과 진리와 자유와 해방의 영인 성령이 교회의 직제와 실천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두고자 한다. 우리는 젊은이, 여성, 가난한 이, 장애인, 외국 노동자를 비롯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서 교권이 일부의 사람들에게 독점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회를 혁신해 나가고자 한다.  
4. 교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향한다(롬5:1). 우리는 허무와 고독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구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됨으로써 성취된다고 믿는다. 또한 어느 한 국가나 체제의 우월한 힘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상극의 질서(팍스 로마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토대를 둔 상생의 질서(팍스 크리스티나)만이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사이에 정의로운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5. 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신10:14).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새로운 창조와 그 보존과 완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할 사명이 있다. 이 우주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명으로 충만한 이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교회는 자연과의 일치 안에서 우주론적인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성취하는 일에만 골몰했던 우리 교회의 구조와 행태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보다 확장된 유기론적 생명 담론을 선교와 설교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

2001년 10월30일, 대구경북지역 목회자 협의회 회원 일동


[레벨:0]smallway

2006.08.04 21:36:13
*.130.11.4

원장 선생님의 윗글을 신길교회 또 하나의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shingil.cafe?iframe_url=/ArticleList.nhn%3Fclubid=12052768%26boardtype=L(신길광장)으로 스크랩해갑니다.

▒☞ 나사렛Nazareth, (퍼간이 注)

... 누가복음 4장 16절과 2장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요셉의 고향이 나사렛이라고 기록하고있다.
(they returned into Galilee, to their own city Nazareth.)
... 그러나 나사렛이란 말은 나사렌(Nazarene 또는 Nazarite) 이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 것이지
... 지명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 그 이유는 사도행전 24장 5절에서 바울이 반국가 선동죄로 잡혀 팔레스타인 총독 앞에 나타났을 때
... 한글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기록되어있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 예수 살아계실 당시 '나사렛'이란 마을은 없었고, 정박사님의 견해처럼 종파(sect)의 하나로 본다.
... 나사렛이란 마을은 그 시대가 지나가고 8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 생긴 마을이었다.
.

[레벨:0]smallway

2006.08.04 23:24:48
*.130.11.4

" 네 반석(바른 믿음)위에 내 교회(義仁信)를 세우리라"
그 말을 애써말한 당사자는 지금 무척 후회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오고 싶어도 챙피해서 못 오고 계신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말씀대로 공동체안 혹은 밖에서 본을 보이고 계신 목사님들과
신앙의 선후배님들이 있기에 아직도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

[레벨:1]팔색조

2006.12.31 13:33:44
*.150.206.158

예전에 이제민신부님의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읽고 많은 공감을 했었습니다. 그때와 공감과는 또 다르게 여기에서도 많은 배움을 얻게 되네요.

[레벨:18]天命

2013.05.22 14:51:30
*.62.2.5

조직신학을 두번째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4. 교회론에 대한 오늘의 차원    1)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둘째 문단 끝에 있는 다음 구절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거룩한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를   "....잘못된 가르침을 우리는 거부한다."로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05.22 15:03:53
*.94.91.80

이재천 집사님 지적이 옳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오타를 쳤을까요.
나중에 바르멘 신학선언 원서를 보고
정확한 용어를 찾아보겠습니다.
일단은 '잘못된'으로 바꿔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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