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11월10일)

조직신학 조회 수 7100 추천 수 157 2005.11.06 21:25:28
18장
진아(眞我)를 찾아서
-기독교와 불교 사상의 만남을 위한 인간학적 담론-

(이 글은 판넨베르크의 저서 <Christliche Spiritualität>에 실려 있는 “Auf der Suche nach dem wahren Selbst”의 번역이다. 그는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위한 인간학적 토대를 해명하고 있다.)

유럽사회에서 지속된 근대화의 과정은 개인주의적 구성원들이 점점 더 소외의 감정을 강하고 폭넓게 경험하고 있다는 데서 확인될 수 있다. 산업화와 관료주의의 발전은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현대사회를 유별나게 복잡하고 익명적인 체제로 형성해나가고 있다. 이런 체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과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정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며,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가정과는 달리 전통적 사회의 통합적 구조가 파괴되거나 축소됨으로써 개인들은 자주 고향을 잃은 것 같은, 그리고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더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심연에서는 이런 느낌이 훨씬 심각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개별적 인간의 정체성이 문제로 대두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들을 심리학자들의 도움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그런 의미심장한 삶이 그들의 행위의 결과로는 야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자아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삶의 내용은 별로 확실한 게 못되며,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삶의 내용은 임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아가 이런 방식으로 의혹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불교의 복음을 통해서, 그리고 불교의 명상 훈련을 통해서 평화를 발견하고 싶어 할 것이다. 여기서 이들은 자아의 유약성과 무상성에, 즉 자기에게 허용되지 않은 세계에 대한 욕망과 이로 인한 고통에 몰두한다. 이런 평화의 약속은 개인적인 정체성과 진아*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불교의 가르침과 심리분석은 여기서 이웃지간이다. 물론 이들의 영역은 다르다. 심리치료가 자아를 강화시킨다면 불교는 자아의 요구와 갈망을 체념하게 한다. 이 두 방식은 오늘날 참되고 권위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평화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진아(眞我)는 독일어 das wahres Selbst의 번역이다. 독일어 Ich는 ‘나’, 또는 ‘자기’로, Selbst는 ‘자아’로 번역되는데, 자기는 어떤 객관적 관계성 속에서 규정되는 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자아는 훨씬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어떤 사람의 참 모습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 글에서 전통적 의미의 인격주의를 비판하면서 바울과 루터의 극단적 변형론에 근거해서 불교와의 일치점과 차별성을 인간론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역자는 가능한대로 이 두 단어를 구별했지만 간헐적으로는 문맥상 적당한 쪽을 선택했다.

현대의 개인들은 이 세속 사회에서 스스로 소외된 자로 경험되고 있는데, 불교의 영성은 최소한 잠정적으로 이런 개인들의 영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매우 명백하게 중요한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참회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제시되는 것 같다. 전통적인 유럽의 기독교는 이런 참회 중심의 신앙심을 여러 생명 형식으로 각인시켰다. 불교의 가르침은 개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자기의 삶과 사회 환경의 열악한 상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책임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회개하라는 말은 개인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의미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그런 방식에 늘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 안에서 획득하는 자기 자신과 남에 대한 경험은 개인들이 익명의 사회 체제 앞에서 무력하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다. 과거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하게 고수되었던 도덕적 기준이 이제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별로 설득력이 없든지 아니면 해체되었다. 왜냐하면 개인들에게 주어진 삶의 스타일이 다원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도 역시 대다수의 개인들은 죄를 고백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자기 삶의 확실한 경험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여전히 그 문제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Selbst)를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에 돌입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매우 인위적이고 곤란한 형식이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들은 주로 인위적으로 생산되는 게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연적으로 명증하게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의 복음을 아주 단호하게 인간 경험의 차원과 연결시켰다고 보는 게 옳다. 죄의 개념은 우선적으로 개인적 자기 경험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경험을 해명하는 차원에 자리매김 된 것이다. 경건주의 전통이 주장하듯이 모든 개별 인간은 그가 신실하다면 자기를 직접적으로 죄성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기독교인의 자기 이해는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기울어지는 우리 행동의 분명한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직접 죄인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이 경험이 신율과 도덕률의 개별 조항에서 허용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하게 된다면, 이 개별 조항은 늘 이렇듯 신율적이고 도덕률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이미 인간적 주관성을 완전히 명확하게 내면적으로 진술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죄인으로 경험하는 것의 기초이다. 중세기 교회와 종교 개혁 시기에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기독교 교리의 이러한 내면화가 일반적으로 전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의 다른 진술에 대한, 더구나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말씀이나 또는 이것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한 경험적 토대를 획득하기 위해서 개개인들에게 자기의 죄를 의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선교와 기독교 선포의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의 문제점을 전반적으로 통찰할 수 있다면 죄론은 결코 기독교의 다른 사안들을 서술하거나 해명하는 가치로 자리를 잡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죄 개념을 해석 범주로 오용하게 되면 당연히 인간의 주관성 구조를 다른 식으로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토대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관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이런, 또는 저런 형식으로 특징화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은 기독교와 불교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적합한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다소간 다른 종교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에 인간학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와의 대화는 거의 직접적으로 신관으로 집중될 수 있다. 힌두교와의 대화에서는 인간학적 질문이 현실성 일반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 빠져든다.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대화에서 그 배경이 된다. 이 두 종교는 인간과 자연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전혀 달리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종교 사이의 대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학에 집중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듯 우주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학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 두 종교가 비록 상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이 세계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폴 틸리히는 이미 1960년대에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인간 실존의 내적인 목표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르게 대답하는 데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인간 실존의 목표(telos)를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모색하는 반면에 불교도들은 니르바나(Nirwana)*에서 모색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언급은 당연히 비판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진리순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보려고 한다. 틸리히는 불교가 개인 너머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방식인 반면에 기독교는 개인주의적인 사유방식이라고 대별했다는 점에서 옳게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 규정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과 그 사태를 단지 윤리적 언어학에서만 서술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폴 틸리히는 트릴취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셈이다. 트릴취는 서양의 “윤리적”(ethisch) 종교를 동양의 “존재론적”(ontologisch) 종교와 구별했다. 이 두 종교는 실존의 목표를 내용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만 구별되는 게 아니라 이미 실존의 구조 내지는 인간의 주관성을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틸리히는 주관성 범주의 구조적 분석에 대해 매우 주목할 만한 연구를 내놓았다. 이 주관성 범주는 근대 불교 사상이 불교의 입장을 서술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니르바나는 불교의 최고 목표를 나타내는 말로서 일반적으로 열반(涅槃)이라고 번역된다. 열반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주로 번뇌를 초극한 정신의 평화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순간(Wahrheitsmoment)이라는 단어는 독일어 ‘진리’와 ‘순간’의 합성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우리말로는 약간 어색하게 들리지만, 본문에서 틸리히의 주장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론적 차원에 대한 강조라고 보면 충분하다.

히사마추 쉬니키(Hisamatsu Shinichi)는 “무신론”을 다룬 한 논문에서 종교, 또는 종교성의 세 유형에 대한 도식을 제시했다. 중세기의 이질적(heteronom) 종교성, 근대의 자율성, 그리고 근대이후의 “이질적” 자율. 이질적 종교성이 권위적 요청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율적 자아는 전승된 권위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본래적인 인간의 자아(Ich)에 대한 본성이나 체질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다. 이제 자아의 구조는 자기 자신을 유한한 주관의 하나로 알게 됨으로써 부정성의 한 요소가, 즉 자기 부정이 자기 구조에 속하게 된다. 유한한 주관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성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부정성에 대한 지식은 자아를 벗어나서 자아에 대한 준(quasi) ‘이질적’ 구성으로 전환된다. 절대적인 주관이나 또는 비교할 수 있는 법정(法廷)을 통해서 말이다. 히사마추는 자기의 이러한 준 ‘이질적’ 구성을 불교적 가르침과 연결시켰다. 진아는, 즉 각성된 자기는 경험적 자아와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서로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히사마추의 유형적 도식은 교양이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질적, 자율적, 그리고 신율적 문명이라는 폴 틸리히의 유형론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틸리히 사상의 전체 발전은 인간 주관성의 종교적 재구성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유발되었다. 이 인간의 주관성은 자율적 주관을 초월시키며, 따라서 모든 주변 환경과 더불어서 존재의 신적인 근원의 토대를 갱신시킬 수 있다. 이런 전망에서 볼 때 훗날 틸리히가 존재론적 언어를 선호하게 된 것은 신율적 문화를 추구하는 국면이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틸리히는 독일 이상주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점으로서의 주관성 구조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틸리히가 인간적 숙명의 현실화를 문명 세계와의 일치에서 찾아보려고 했지, 개인의 실존적 고독 가운데서 찾아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틸리히는 신학 발전의 마지막 국면에서, 즉 조직신학에서 주관성 구조의 모델을 존재론적 언어로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본질과 실존이라는 용어는 주로 신화적이었다. 틸리히는 자율적 주관성을 인간의 인격에 대한 신율적 해석과 통시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의 이런 이론은 별로 철저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틸리히는 단순 자율과 대립해 있는 신율을 기독교와 불교의 대립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영역에서 윤리적 종교성과 존재론적 종교성의 대립에 대한 도식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가 말하는 자율과 대립하는 신율의 개념은 불교의 자아철학에 대한 집중적 분석에 이르는 길을, 또한 자율적 주관성의 근대 원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철학자 마사오 아베(Masao Abe)는 이 두 종교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짤막하게 서술했다. 불교의 깨침과 기독교의 회심은 양자가 인간의 죽음을 구원의 본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베가 생각했던 바울 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게 될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사상의 인간학적 적용은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드물게 인식되었다. 바울은 새로운 아담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자아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할 인간의 운명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있지 않은가? 경험적 자아, 또는 경험적 자기의 상태는 무엇인가? 로마서 7장 22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하나님의 법을 반기고 있는 ‘속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기에 대한 지식 가운데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경험적 자아인가? 바울이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인간인가? 바로 이 두 번째 추정은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반항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과 근사하다. 루터는 이 본문을 그렇게 해석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언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돌아서기 이전에 겪었던 인간적 갈등이라는 근대의 주석과 생각을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속사람’이 소위 ‘자연적 인간’의 자기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운명의 빛에서 언급되는 바로 그 인간의 인격이 여기서 관건이다. 이런 전망에서 언급되는 인격적 자아는 자기 자신을 자기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내 눈으로 나의 자아를 찾아내는 것과도 큰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다시 일치한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소외된 과거와 일치됨으로써 옛 아담과의 싸움에서 참된 자아의 은폐된 현재를 전제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현재 자기가 만족해하는 이런 참된 자아의 부족한 흔적을 이미 이전에 자기 자신이었던 인격의 ‘가장 내면적인 자아’의 해방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정체성의 증거로 삼는다.

*로마서 7장에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면에 이중성이 작용하고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롬 7:18,19).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찰 방법의 극단적 함축성은 후기 기독교 인간학에서 전혀 인식되지 못했으며, 인정받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시간의 의미가 무시되었다.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옛 아담이 행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옛 아담과 동일시된다. 반면에 후기의 기독교 사상은 로마서 7장이 언급하고 있는 “속사람”을 이성의 능력 안에 정치시켰다. 마치 모든 ‘속사람’이 이와 똑같은 법정의 모든 시간에 놓인 것처럼 말이다. 기독교 신학은 늘 자연적 인격이 은혜를 통해서 초월된다는 점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서 은총은 부가적인,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했다. 즉 인격의 중심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이미 실존하는 인격적 자아에 부가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도 서양 기독교 사상에서 인간적 인격은, 즉 이성적 개인과 자유로운 결단의 주관은 원상태에서 죄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으로 진행되는 과정의 지속적인 기초에 해당되었다. 루터의 비판이 바로 이런 문제였다. 루터가 신약성서와, 특히 바울의 신학과 일치될 수 없다고 옳게 보았던 자리가 은총의 관계에서 여전히 자연적 주관의 자유로운 의지에 주어졌다. 루터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울에 따르면 거듭나는 사건에서 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변화된다고 말이다. 바로 여기에 루터의 유명한 명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우리는 엑스트라 노스(extra nos,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말이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뜻이다. 신앙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옛 자아를 뛰어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신뢰함으로써 우리 실존의 토대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임하는 바로 그분에게 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그분에게 맡긴다. 완전히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능력이 놓여 있기 때문에 신앙의 행위는 단순히 옛 주체의 행위로만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사건에서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을 일종의 충격받음(Ergriffenwerden)이라고, 즉 우리를 우리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영적인 엑스타시의 생기(生起)*라고 서술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자유 의지를 위한 루터의 싸움을 이해해야만 한다. 루터는 선택 능력이 늘 인간적 인격실존의 상이한 특징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택 가능성의 등급은 행위하고 선택하는 주체의 한계를 통해서 한정되어 있다. 완전히 새로운 인격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에 속한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자유를 발견하며, 앞서 우리 자신이었던 사태를 뛰어넘어 우리의 참된 자아존재를 발견한다. 그렇지만 구원하는 사랑으로 인해서, 그리고 죄인을 향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의 고유한 자아는, 즉 지난 날 우리 자신이었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도달 가능한 인격의 참된 정체성은 그 어떤 외적인 한계로부터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옛 자아의 한계로부터도 자유롭다.

*독일어 Ereignis는 일반적으로 ‘사건’이라는 의미이지만 신문 보도처럼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가 포함된, 또는 해석된 현상이기 때문에 ‘생기’로 보는 게 맞는 번역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영적인 엑스타시의 생기라는 말은 영적인 열광 경험으로 인해 발생되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루터의 인간학은 바울 신학의 인간학적 극단화를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사상사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가 이전에는 왜 간과되었는지 물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대립된 개념이 나름대로 특별히 기독교적인 관심사에서 무성해졌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 관심사가 상이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의 개인적 인격과 그것의 영원한 가치에 대한 흥미이다. 즉 예수 자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흥미이다. 잃은 양이나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이런 흥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흥미는 기독교 사상가들로 하여금 모든 개별적 인간 개인을 영원한 주체로 생각하게 했다. 근대의 언어적 의미에서 주체는 이런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창조적으로 자유로운 하나님과의 유비(analogia)에서 자유로운 결단의 행위를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간적 인격존재의 최고치로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인간 존재의 무시간적 구조로서 구상되면 될수록 인간실존의 극단적 변형*과 자리매김을 수행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인간적 실존은 신앙행위에서 발생하며, 세례를 받음으로 서술되는 것이다.

*바울과 루터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있던 상태를 다시 회복하거나 부족한 것을 보충함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뀜으로써 구원받는다. 흡사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형되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인간학은 계몽이나 진보 개념이 아니라 극단적 변형 개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근대 역사의 과정과 근대 사상의 역사에서 루터에 의해 심화된 인간학적 통찰의 새로운 전망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인격주의가 자연법과 정치 철학에서 새롭게 발전되어 강화됨으로써 우위를 점했다. 그렇지만 오늘의 상황에서 개인적 자유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적 정체성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으로써 아주 분명하게 어려움 가운데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단지 형식적으로만 이해된 자유의 임의성과 피상성에 대한 감정이 잠정적으로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기는 하다. 이런 감정은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우리 서양 사람들의 언급에서 철저한 자기 신뢰를 제거시켰다.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인격주의*의 한계는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그 인격주의가 전제하는 토대로 인해서 불교와의 심층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기독교의 전통적 인격주의의 약점은 오늘날 서양 기독교의 문화적 풍토에서 불교 사상의 매력이 부각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인간적 자아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여러 관점에서 개인적 자유라는 서양의 주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심층적으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의 참된 인간학은 불교의 도전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인간학에 대한 루터의 생각과 불교 사상은 마사오 아베가 서술한 의식에서 공동의 토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자기(Ich)가 죽는다는 것은 구원의 본질적인 의미”이며, 또는 좀더 보편적으로 언급해서, 자연적 자기는 아직 인간의 참된 자아(Selbst)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양 사상이 말하고 있는 인간 자유의 피상성에 대한 불교의 비판은 특별히 루터 교인들에게 자유의지론에 대한 루터의 비판을 기억나게 한다. 또한 틀림없이 우리의 근대적 자유철학의 휴매니스틱한 근원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갖는 그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도록 자극할 것이다.

*인격주의(Personalismus)는 인격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관점으로서 헬라 철학에서는 아낙사고라스와 프로타고라스가 지식의 인간적 측면을 강조했으며, 특히 소크라테스는 인간 영혼을 모든 행위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초월적 입장과 헬라 철학의 인간주의를 종합했으며, 보에티우스는 ‘인격은 지적 본성을 갖는 개별적인 실체’라는 점에서 기독교적인 인격주의를 명시했다. 결국 이런 인격주의에는 자아가 지나치게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는 약점이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인격주의는 그것의 철저한 변형을 가르치고 있는 바울과 루터의 사상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뛰어넘는 불교와의 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루터의 관점과 불교의 관점이 자연적 자기를 자아라고 하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수렴된다고 해서 양자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결정적인 차이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마사오 아베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독교 신앙이 초월적 현실성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다는 데에 있다. 반면에 불교는 이원론적인 모든 형식을, 특별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불교도들은 자신의 자기를 초월적 너(Du) 덕분으로 거절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바로 부처의 권위를 “죽여야만” 한다. 더구나 삼사라(Samsara)*와 니르바나의 대립을 거부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원론과 대립의 모든 형식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윤회라는 뜻의 삼사라 사상은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또 다른 생명체에 주입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니르바나는 그런 윤회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방식에서 이것은 선(禪, Zen)에 해당된다. 반면에 정토진종(Jodo-Shin)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 Amida)의 강조는 무언가 다른 상을 제시한다. 칼 바르트는 불교의 이런 형식이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론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확증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신학자인 카추미 타키자와(Katsumi Takizawa)는 최근에 이런 질문과 연관해서 이 두 불교 학파 사이의 차이점을 간과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타키자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신란(Shinran)*이 주장하는 아미타불은 신앙하는 자의 자기와 상대해 있는 무언가 완전히 상이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다른 측면에서 도겐(Dogen)에 대한 선의 명상 기술은 개인적인 자기의 업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개인에게서 작용하는 참된 다르마(Dharma, 진리)의 업적으로 간주된다. 이런 해석이 옳다면 이 두 학파는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이라는 두 측면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인가? 기독교 신앙은 특별히 루터의 전통에서 볼 때 우리와 상대해 있는 어떤 타자의 리얼리티를,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리얼리티는 신자의 자기에 대립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종교의 근본적인 구조적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차이는 기독교인이 초월적 하나님을 믿는 반면에 불교도들의 궁극적 지혜는 비움인 수냐타(Sunata, 空)라는 사실에서 가장 명백하게 돋보인다.

*신란은 12세기 아미타불 신앙을 강조한 호넨(Honen)의 제자로서 타력적인 구원관을 강조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성급히 판단하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하다. 마사오 아베는 좀 오래된 논문에서 신적인 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구별되지 않은 객관주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만 했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히 초월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 말이다. 오히려 “초월적인 것만큼 내재적”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현재적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자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그의 나라와 나누일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히 불교 학자의 이러한 고찰을 확증할 수 있다. 즉 부가적 무게를 획득하는 고찰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불트만의 명제가 옳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객관화된 언어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관주의도 역시 조심해야만 하는데, 객관화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객관적인 언어로 진술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현실성이 주체와 상관없는 단순한 객관주의를 극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마사오 아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론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확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 피안적 표상을 함축적으로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종교적 초월의 초월’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 아베에 따르면 이 교리는 니르바나에 대한 불교적 부정과 비교될 만하다. 이 부정은 대승(Mahayana) 불교의 삼사라와의 대립을 말한다. 아베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격에서 기독론적인 도그마를 고찰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7절에서 언급한 그 유명한 문장을 기억해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고 말이다. 아베는 이 말씀을 17세기 루터교 신학자들과 아주 유사하게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근대 주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향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케노시스적인’ 자기 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형태에 부여된다. 반면에 근대 주석은 자기 낮춤을 성육신 사건의 신적인 로고스와 연결시킨다. 이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형태를 최초로 구성하고 것이다. 아베에 따르면 바울의 사유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낮추고 또는 부정함으로써 육신이 된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케노시스적 부정을 통해서 “내재와 초월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었다”고 보는 한에서 불교도는 케노시스적 그리스도를 ‘궁극적 리얼리티의 기독교적 상징’(the Christian symbol of Ultimate Reality)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의 판단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다음과 같은 기독교의 주장으로 인해서 구별된다. 이런 역설적 단일성은 역사에서 단 한번 현실화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이다. 이런 근거에서 아베는 이러한 객관화가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이원론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 번 더 루터의 생각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에 대한 루터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아베처럼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으로 주의 깊게 비판하고 있는 불교 사상가의 판단을 좀더 세밀하게 고찰하고 구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기가 감당함으로써 자기 부정의 길을 명확히 갔다. 기독교인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이 길을 가야만 한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의 심판에서 옳다는 사실을 증거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다. 루터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자기 부정은 기독교 신조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관계를 아베가 그랬던 것처럼 이원론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 이 관계는 반대로 신자들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통해서 특징화되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를 통해서 특징화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서 개별 신자들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일치도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의 단일성은 신자들의 친교를, 즉 교회를 포함한다. 이런 단일성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진술한다. 여기서 핵심은 분명히 아무 구별이 없는 무조건적인 단일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음으로써, 또한 자기가 감당해야만 했던 심판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아버지와 구별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약속을 자기에게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인격을 예수와 구별한다. 물론 이런 자기 구별로 인해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그리고 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숙고는 분명히 루터 자신의 구체적인 진술을 능가한다. 즉 이러한 숙고는 루터의 진술을 단순히 반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숙고는 함축적 구조를 보편적 방식으로 명백하게 하려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의 기독론적 진술에서, 특히 초기 문헌과 강의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신자들의 겸손과 밀접하게 연관시킴으로써 중세기 신학의 통상적 궤도를 떠났다. 그래서 이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맺는 영적인 단일성에 대한 직관이 이런 서술에서 발현되었다. 이런 영적인 단일성은 루터의 칭의론에서 근본적인 요소였다. 루터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원론적 기초구상의 범례가 결코 아니다. 그의 신학에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요소가 있지만, 이런 구별은 포괄적 단일성으로 통전화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이런 단일성의 항존적 조건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볼 때 기독교 사상사에서 구별과 단일성이 상호적으로 소통되었다는 사실은 늘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에서 논의되었다. 루터는 삼위일체론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건해보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구원의 역사에서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두 전망을, 즉 구원사와 신론을 연관시켜보려고 분명히 애를 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별과 단일성에 대한 인간학적 전망과 기독론적 전망은 포괄적 관계틀에서 연결된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논쟁은 결국 기독교가 일종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서 오류가 있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에 모든 이원론적 책임이 있다는 불교의 비판 앞에서 삼위일체가 창조와 구원사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이런 비판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이라는 사실이 명증하게 해명되는 경우에 양측의 논쟁은 창조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세계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도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계가 구별되는 것과 같다. 이 두 종교 사이의 대화는 인간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확실한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인데, 이런 대화는 참으로 실제적인 것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그 최종적인 결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차이를, 또한 자기와 세계 사이의 차이를 초월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논의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 두 종교 사이의 차이점은 훨씬 명확하게 해명되어야만 한다. 기독교 사상이 이원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불교 사상가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들은 비로소 기독교가 왜 그토록 명백하게 역사적 인물의 유일회성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마사오 아베는 이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피력했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신자들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현실성이라 할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 데 있다고 말이다. 선(Zen)의 본질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와의 일치나 부처와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공(Leere)과의 일치에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불교가 비판하는 그 도구를 이제 그들의 선생에게 적용시킬 수 있으며, 또한 어쩌면 그들이 말하는 공이 늘 이원론적 개념일지 모른다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은 소박하게, 그리고 반성적인 형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비판의 소박한 형식은 불교 승려들 중에서 깨침을 얻지 못한 이들과 얻은 이들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은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개념적 구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질문은 이렇다. 깨달은 자의 지혜와 그가 얻은 니르바나는 생성과 흐름의 세계와, 즉 삼사라의 세계와 대립해 있는가? 경솔하게 질문하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을 즉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원론의 모든 다른 형식과 함께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대립도 역시 부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니르바나는 삼사라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또한 ‘공’은 바로 이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삼사라의 일상적 현실성과 대립해 있는 어떤 대안적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질문은 두 번째의, 그리고 훨씬 반성된 형태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이제 이 질문은 부정 자체의 운동을 준비한다. 즉 부정 운동은 불가피하게 일종의 새로운 대립을 부정의 모든 단계에서 구성하는 것은 아닐까? 우선 부정은 발생과 흐름의 세계를 경험적 자기와 연관해서 준비한다. 여기서 이제 자기와 삼사라 세계의 모든 이중성에 대한 대립된 것으로서의 니르바나 사상이 발생한다. 그 다음 단계로 니르바나 자체가 삼사라와 대립되는 한에서 부정된다. 따라서 여기서 공 사상이 나온다. 그러나 공 사상은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이원성과 대립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공 사상이 이원론의 새로운 형식을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삼사라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은 삶과 얻지 못한 삶의 이원론을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이런 이원론이 여전히 더 확장된 단계로 극복될 수 있다면, 부정의 형식은 매 단계마다 이런 것으로서 새로운 대립을 생산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원론적 대립의 이러한 반복은, 부정적인 것의 부정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가 인간적 반성의 생산물로 간주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루터가 신앙의 생기(生起, Ereignis)라고 이해한 것과 아주 흡사하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뛰어넘게 하는 열광의 생기로 간주되지 않는 한 불가피한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이런 생기에서는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즉 우리를 제어하는 행위가 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런 경험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신적인 현실성이라는 사상은 이미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마하야나(대승) 불교 시대의 역사는 신적인 현실성에 대한 직관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는 사상을 암시하고 있다. 계속된 부정의 방법으로부터 이제 부정적인 것의 부정에 현재하고 있는 실증적 리얼리티로 주목을 전환시키게 됨으로써 말이다.
기독교에서 신(神)이 유한한 생명에 개입한다는 신비는 인간 실존에 대한 긍정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인간 실존을 긍정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인간 실존을 영원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루터가 약속의 내용으로 생각한 것인데,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와 맺는 관계라는 사상에서 다루었다. 약속의 내용은 좋은 소식이며, 큰 기쁨이며,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긍정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영원한 긍정이라는 경험에서 이제 일련의 모든 결과들이 발생한다. 그 중의 몇 가지만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절대적 현실성(Wirklichkeit)*이 기존의 의미로서만 능동적이거나 또한 인간적으로 파악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여기에 연루된다. 흡사 사랑하는 아버지의 상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듯이 말이다.

*현실성은 단순히 우리의 일상에서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차원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런 범주를 뛰어넘어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참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절대적 현실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둘째, 신(神)적인 것을 유한한 현존의 압도적인 긍정으로 보는 직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재만이 최종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연루되어 있으며, 또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역사적 유일회성이 모든 개인적인 생명에 의미를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과 연루되어 있다. 말하자면 피조물에 대한 신적인 긍정은 개인 실존의 결정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의 토대를 무상한 생명 너머에서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 희망은 곧 죽은 자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것이다. 신적인 현실성이 확실하다는 기독교의 생각은 기독교 신앙의 몇몇 특색을 설명할 만한 토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특색은 불교도들에는 정말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의 유일한 의미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색은 역사적 특성과 개인적인 것들의 가치를 확실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모든 개인들에게 주어진 특성은 이런 맥락과 상응한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마하야나(대승불교) 전승의 근본과 비교할 때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기독교의 긍정이 갖는 차이는 특별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생명 현실성에 대한 기독교의 긍정은 무상한 상태 그대로의 삼사라(윤회) 세계가 갖는 리얼리티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죽음과 무상성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목표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기독교는 생명 현실성을 긍정함으로써 일종의 변형적 역동성*을 통해서 특징화되는데, 이 역동성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희망을 각인시키며, 또한 기독교 윤리를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전체 창조물이 미래에 얻게 될 구원의 선구자인 인간에게 부여된 특별한 자리는(롬 8:19), 그리고 인간이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통해서 이 세상이 변형된다는 기독교적 열망과 연관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변형적 역동성(eine transformative Dynamik)이라는 용어는 현재의 생명 현실성이 부활의 생명 현실성으로 변형된다는 사실에 대한 신앙을 가리킨다.

이미 유대교적 전승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바로 이런 변형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죄를 강조하게 되었다. 죄는 생명을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로 변형시키는 영과 대립하는 모든 것의 공통분모*이다. 이 죄는 속사람 안에 있는 이런 생명의 영과 대립한다. 이 영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미래를 이 세상에서 일구어 나간다. 따라서 죽음과 고통과 질병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의 무상성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 역시 극복되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부터 이제 기독교적으로 전승된 신앙이 죄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해명될 수 있으며, 또한 기독교적 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현실성에 대한 긍정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다소간 약화되거나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도 설명될 수 있다. 즉 자기의 죄성을 간과한 채 단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함으로써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며 걱정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의 신앙과 영에 대한 이해가 왜곡될 뿐이다. 이 자리에서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영을 왜곡시켜왔는지에 대해서 그 자세한 흔적을 검토할 필요는 없다. 죄론이 그 참된 형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근본적으로 세계를 긍정하는 기독교 사신(使信)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요소는 바로 기독교 사신의 핵심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사신의 세계 긍정은 세계의 변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시간적이고 역사적 과정의 전망을 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피조 세계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인간에게 허락하는 해방과 새로운 정체성이 신앙을 통해서 확보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이기도 한다. 그런데 신앙을 통해서 이런 긍정적인 사랑과 이 사랑을 유효하게 하는 기쁨은 이제 인간의 삶에서 작용한다. 기독교에서 신앙 개념이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변형하는 역동성 덕분이다. 즉 개인에 대한 신적인 긍정이 역사적 역동성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인간적 인격의 정체성, 즉 참된 자아는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의 외부에서,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기독교 교리로 하여금, 진아를 모색하는 개체 인간의 역사를 포함해서 인간적 상황에 대한 해석과 연관해서 비(非)정체성과 비(非)진정성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고려하게 한다. 이 진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진아를 모색하는 길에 이미 현재하고 있다.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죄의 본질적인 개념을 매우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죄는 단지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이르게 하는 영과 대립하는 모든 세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만 지향하게 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도 역시 죄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서 보이는 교회와 교회당을 절대화하는 하는 태도도 역시 죄다. 우리가 미처 형상화 해낼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다스려나가는 그 하나님의 미래에 우리의 생명을 맡기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루터의 전승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에 공헌할 수 있을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경험적 자기의 자아 유지에 대한 불교의 비판을 수렴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루터의 전승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진정한 자기 정체성의 토대가 잡힌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적인 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전승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불교의 비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에 대한 기독교의 강조가 변형에 대한 확신과 연관되어야 한다. 절대적 현실성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환상은 바로 이 변형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라는 루터의 학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인간이 변형된다는 선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기독교 교리를 이렇게 번역해 내는 작업은 불교의 마하야나-전통과의 관계를 생산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전통은 삼사라 세계를 (인간 자신을 포함해서) 부정함으로써 니르바나와 삼사라의 대립을 부정하며, 결국 삼사라의 무상한 세계 한 가운데서 해방된 실존으로서의 공(空)이라는 학설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루터의 학설은 유한한 현실성의 이러한 확신에 대한 기독교적 형식을 매 단락마다 명증하게 만들어낸다. 인간의 자아 경험에 집중하는 불교의 도전은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특히 루터교인의 입장에서 죄와 사죄를 중심으로 한 신앙심에 대한 기존의 지나친 집착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집착은 복음의 기쁨을 훼손시킴으로써, 또한 세계를 긍정적으로 비추어 나가는 복음의 활동을 억압함으로써 종종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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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홈지기

2005.11.07 22: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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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我라.. 불교용어이지요.. 사실 불교의 핵심교설은 無我(anatman)이지만.. 그것이 중국으로 건네와 기존의 도가와 교묘한 습합을 이루면서 禪불교를 이루게 되고, 불립문자를 강조하고 경전에 매이지 않는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종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眞我를 이야기하게 되죠.

윗글을 꼼꼼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니르바나에 대한 설명이나 윤회를 설명하실 때 조금 애매하게 넘어가신 부분이 있어보입니다. 불교에서는 독립적인 영혼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karma는 유전되고 여옥되지만, 그것은 실존인의 행위로 얻어지는 업이고, 영혼개념과는 좀 다르죠. 따라서 사후에 독립적인 영혼이 타 생명체로 주입된다고 보기보다는.. 모든 존재를 실체론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불교입장에서는.. 존재의 5가지 유형, 즉 5온으로 불리는(독일어에서는 이를 Daseinsgruppe로 번역합니다) 존재유형의 재조합과정으로 이해하셔야 할 겁니다. 따라서 그런 세계 이해 속에서 모든 존재는 실체적으로가 아니라, 관계적으로 상호 연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지요.

그리고 니르바나는 인간이 현실을 곧이 곧대로 해석함으로써 생겨나는 실체적 욕망과 아집이 모두 사라진 적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어떤 대상이나 목표라기 보다는 불교적 깨달음을 획득한 이후 얻게 되는 경지를 지칭하는 형용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 점에서 불교적 구원은 인식론적 구원으로 봐야 하겠죠. 그걸 존재론적으로 풀게되면.. 조금 불교 이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유교같은 경우는 분명 존재론적 명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불교는 그렇지 못했기에.. 지속적으로 유학자들은 불교를 허망한 논리라고 몰아 세웠죠. 나이브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닌 유학자들 입장에서 불교도들이 이야기하는 인식론적인 세계 이해는 허망한 것 그 이상이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독일 학자들의 불교이해도도 그렇게 떨어지는 편은 아닌데.. 틸리히 같은 경우는 동양 종교에 대해서 무던히도 많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그 쪽 분야에 대한 이해에는 많이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더 길게 이야기 하고 싶지만.. 요즘은 타이핑하는 것도 귀찮아져서요^^

아래에는 불교에 대해 제자 적은 글 하나 옮겨봅니다. 에반게리온이라는 일본의 에니메이션에 대한 평을 쓰고 있는데 그 중 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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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홈지기

2005.11.07 2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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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로 읽는 존재의 비밀

에반겔리온 6화, "결전, 제 3 신동경시"

줄거리

다섯 번째 사도와의 결전을 위해 출격한 신지!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이 5번째 사도는 신지의 에바 초호기를 향해 강력한 레이저 광선을 선사한다. 불시에 당한 일격! 신지는 이내 정신을 잃어버리고 미사토는 서둘러 에바 초호기의 회수를 명령한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에바 초호기의 회수는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지고, 신지 역시 엔트리 플러그에서 빼내어져 곧바로 병실을 향해 옮겨진다. 혼절한 채 실려가는 신지의 그림자 옆에 근심에 가득한 미사토의 얼굴이 걸쳐져 있다. 그 상황에 잠시도 멈춤이 없이 사도의 공격이 개시된다. 사도는 날카로운 드릴을 가지고 직접 네르프의 지하 요새를 향해 돌진한다. 사도가 네르프의 본부에 다다르기까지는 대략 10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네르프 쪽도 이 시간 안에 사도 퇴치에 대한 묘수를 찾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사도에 대해 몇 차례의 공격을 감행해보는 네르프...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한가지뿐... 실패... 또 실패.... 다섯 번째로 찾아온 사도는 의외로 강력한 방어막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반복되는 공격실패 속에서 미사토는 사도 퇴치를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름하여 '야시마 작전'. 미사토는 이 무시무시한 다섯 번째 사도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고에너지 집중 장치에 의한 공격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엄청난 수준의 고에너지를 일시에 발사할 수 있는 무기를 통하여 사도가 펼치는 A.T. Field의 방어막을 뚫는 수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무기는 SSDF(전략 자가 방어력) 연구소의 자동 양전자포 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이 무기도 실전용이 아닌 원형! 그러나 미사토에게는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못하다. 결국 8.7%의 성공 예측율을 가지고 네르프는 미사토의 '야시마 작전'을 수행하도록 결정한다. 그러나 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시에 1억 8천만 KW의 전력이 필요하다. 과연 이 정도의 전력을 어디에서 끌어올 수 있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온다. "전 일본으로부터!" 그 후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된다. 서서히 전 일본의 전력을 한 정점을 향해 모아가고 있으며 리츠코 박사는 에바 초호기가 양전자포를 사용할 때 엄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수방패를 준비한다. 그리고 이 특수방패는 레이의 에바 영호기가 맡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도 신지는 병실에 누워있다. 신체적으로 별 이상이 없다. 그러나 강력한 사도의 공격으로 정신적으로는 적잖은 곤란을 느끼고 있다. 그때 레이가 언제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신지를 방문한다. 그리곤 담담하게 앞으로 있을 두사람의 작전 계획을 전해준다. 자신의 임무를 마친 레이... 다시 무덤덤한 모습으로 신지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사요나라...."

켄스케와 토지를 비롯한 신지의 반 친구들이 모여있다. 켄스케가 아버지의 자료로부터 에바의 출동시간을 알아낸 듯 하다. 잠시 웅성거리다... 산이 움직이며 동시에 등장한 에바 영호기와 초호기를 보고 신지의 친구들은 환호성을 올린다. "에반겔리온! 우리는 너희를 믿고 있어! 제발 저 놈을 막아줘!" 다시 네르프 본부... 다들 작전계획을 위해 분주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아직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듯 신지는 두려움에 주저하고 있다. 그때 던지는 레이의 언어! "넌 죽지 않아! 내가 널 지킬 거야!" 그리곤 전 일본은 정전으로 인해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어둠 속에 앉아 작전 개시를 기다리며 신지와 레이는 참으로 중요한 대사를 주고 받는다.

신지: 넌 왜 이일을 하지?
레이: 관계때문에..
신지: 관계?
레이: 그래, 사람과의 관계...
신지: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레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신지: 아야나미, 넌 강하구나.
레이: 그 외 다른 건 없어.
신지: 그게 무슨 뜻이지?
레이: 자, 이제 시간이 됐어. 가자. 안녕.

드디어 자정.... 네르프 쪽의 반격이 시작된다. 신지와 초호기는 정조 끝에 사도를 향해 회심의 한방을 터뜨린다. 그러나 사도는 이내 네르프쪽의 반응을 감지한 듯 위치를 잠시 바꾸며 에바 초호기가 보낸 회심의 일격을 곧바로 중화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사이 사도의 드릴은 이미 네르프 본부에 직접 향하기 시작한다. 긴박한 순간... 신지는 두 번째 발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듯 사도는 에바 초호기를 향해 또다시 강력한 에너지파를 발사한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상황! 그러나 그 순간 방패를 들고 나타난 레이와 에바영호기가 최선을 다해 사도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 사도의 고에너지파는 강력한 온도를 발생시켜 방패와 영호기의 몸체를 녹게 하고 있다. 그 와중 어렵게 목표점을 찾은 신지... 사도를 향해 강력한 양전자포를 선사한다. 기대했던 대로 양전자포는 A.T.Field를 뚫고 사도의 심장에 박힌다. 승리... 그러나 신지에게 여전히 남은 숙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포기하려 한 레이의 상태이다. 사도의 공격에 심하게 녹아있는 영호기로부터 엔트리 플러그를 빼내고 신지는 그의 아버지가 레이를 위해 했던 모습 그대로 해치를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들 신지도 레이라고 하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레이는 무사하다. 레이의 살아있음을 확인한 신지는 눈물을 보인다. 그때 눈물의 의미를 묻는 레이... 그리고 이에 대답하는 신지... 여기 또 멋진 대사가 펼쳐지며 에바 여섯 번 째 이야기가 정리된다.

신지: 아야나미, 괜찮아? 아야나미!
신지: '다른 건 없어' 라고 말하지마.
신지: 헤어질 땐 '안녕' 이라고 말하지마...
레이: 왜 울고 있니? 미안해.
레이: 미안해. 난 이런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신지: 이럴 땐 웃는거야...



1. 제작진의 도에 넘친 배려들

개인적으로는 6번째 에바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박진감 넘치는 화면진행이 참 맘에 든다.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 한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스토리의 진행이나 화면의 넘어감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참으로 깔끔하다. 애니매이션 하나에 이 정도의 치밀한 작전과 과정을 마무리하는 제작진의 '장인 정신'이 참 부러울 뿐이다. 사실 덤덤한 눈으로 6번째 이야기를 살펴보면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별달리 눈에 띄는 장면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역시 대사에 의존한 진행을 하다보니... 혹 스팩터클한 전투신을 기대하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시청 자체가 괴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그러한 독자의 의도(?)를 이미 계산에 넣었다는 듯이... 중간 중간 핵폭탄 급의 지뢰를 장치하고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사도의 공격을 받은 에바를 철수시키고 재래식 무기를 통해 반격을 개시하는 화면들은 마치 전쟁영화의 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이내믹하게 전개된다. 정말 무어라 시비 걸기 힘들 정도의 화면 진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의 앵글과 속도, 그리고 대사의 진행 등... 그 사이 5분 정도의 러닝타임이 흐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의 시간이 이 묘사를 위해서 투자되었을까 할 정도로 시청자들을 바쁜 호흡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물론 이는 극히 주관적인 필자의 판단이다. 안그렇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의견도 존중한다). 그러다 새로운 작전을 수립한 후 수뇌진의 허락을 받기 위한 장면에서... 곧바로 미사토의 클로즈업된 화면이 다른 화면, 즉 리츠코와의 에스컬레이터 상에서의 대화장면으로 전개시키는 식의 카메라 동작은 참 다이내믹하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런 기법을 쉼 없이 봐와서 별 다는 감흥이 없겠다마는... 그 사이에 전개될 수도 있는 수없이 많은 군더더기를 단순간에 짤라 버리는 제작진의 과감한 용단은 작품의 매끄러움을 더 해주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그 이외에도 사실적이고 세부적인 인물묘사를 끌고 들어와 그런 구석들만을 찾아내려고 하는 오타쿠들을 무척 기쁘게 만들어주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사도를 공격하기 위해 전일본의 전력을 에바에게 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놓치기 쉬운 그림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묘사장면에서 마악 신지는 사도에게 회심의 한방을 먹이기 위해 양전자포를 장전하게 된다. 바로 그때 작전의 진행을 쉴새없이 독촉하던 미사토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잠시의 침묵 후... 입맛을 다시는 그녀의 입술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가급적 프레임 수를 아끼려고 많은 양의 대사와 정지된 화면을 곳곳에 삽입하고 있는 이 에바의 제작진이 무슨 깡다구로 이런 묘사를 감행했을까? 자, 눈 있는 자는 찾아보시라... 제작진이 제공하는 이런 비밀의 서비스를! 그리고 그런 '부활절 계란(Easter Egg, 부활절 계란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혹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말하자면 프로그램 상에 제작자가 몰래 숨겨놓은 작은 팁들을 뜻한다)'를 발견하는 자 오타쿠라 불릴 자격이 있을 터!!



2. 옷깃만 스쳐도 인연-관계로 읽는 존재의 비밀

에바를 보는 이들은 아마도 제일 먼저 이 작품이 가지는 이중성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에바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것만큼 외양은 상당히 유대-기독교적이다. 에반겔리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복음을 상징하는 고대 희랍어 단어에서 따온 것이고... 사도(Angel)라는 존재의 설정과, 사해문서, 그리고 네르프의 상징 문양이 무화과 잎이라는 사실, 그리고 생명나무 지혜나무에 대한 이야기... 또한 후반부에는 배경음악으로 아에 헨델의 메시아를 사용하는 과감성까지 보여준다. 여하튼 등등해서 곳곳에 포장된 장식들은 대부분 이 유대-기독교문명에서 유래된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 혹은 선이해를 가지고서 이 작품을 대하게 되면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된다. 왠지 기독교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것 같다가도 그 배면에 깔린 논리는 그렇게 유대-기독교적이지 않다라는 의혹을 절대로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무얼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제작진이 파놓은 이 '파리통' 속에서 배회하기 마련이다.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러한 조장된 궁금증은 이 작품을 계속적으로 비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에바라고 하는 키워드는 청소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성인들을 위한 작품으로까지 격상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명탐정 코난과도 같은 분석기질과 불타는 탐구심을 지닌 이들이 이런 제작진의 암수를 무심코 지나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을 뒤지고 책장을 들척이며 에바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기어 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에바의 비의성만 더 증폭시키고 중도에서 그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워낙 이 에바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과 암호들이 복잡다단하고 혼란스럽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소재를 질서정연하게 줄을 세워 '열중서 차렷!'하기는 정말로 곤란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혼란감만 더 느끼게 되는 독자들은 그냥 에바에 대한 탐구를 때려치우든지... 아님 그저 소박한 매니어로 남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반 친절하게나마 에바의 이중성에 대한 단초라도 독자제현께 제공하려고 한다. 물로 이러한 단서는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일 뿐... 제작자 스스로도 그렇게 계산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 일본어에 능통하신 분이 있으면 안노감독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자, 그럼 시작이다~

난 에바가 지니고 있는 이중성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본다. 즉 그 외양은 유대-기독교적이되.. 그 내면을 흐르고 있는 세계관은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데에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에바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깔리는 세계관, 혹은 가치체계가 지극히 유대-기독교와는 선을 달리하고있음을 보게 된다.

그럼 에바는 어떤 세계관을 깔고 있는가?

나의 현미경에 그것은 오히려 불교적이다. 그러니까 유대-기독교적 외양에 불교적인 가치관을 깔고 작품을 만들게되니... 그 작품이 갖는 중의성과 애매함을 하늘을 찌를 만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고 어떤 것이 불교적인가? 오늘은 그 단초만 살펴보도록 하자...

6화의 일본제목은 "결전, 제 3 신동경시"가 되겠다. 그러나 제작진이 친히 붙여준 영어부제는 지난번 5화의 "Rei-I"에 이은 "Rei-II"이다. 그리고 사실 5화와 6화는 레이라고 하는 인격체(personality)을 통해 이어진 작품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 따라서 6화는 일본어 본 제목보다는 영어부제가 더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하튼 이 제목 하에 5화와 6화는 정신 없이 교차하는 관계들의 복잡다단한 모습을 깔끔한 화면으로 잘 담아주고 있다. 우선은 이카리와 신지라고 대별되는 두 남성을 통하여 서서히 사회화되어가는 레이의 성장기를 담고 있으며... 또한 레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관계들이 얽히고 섥히고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와중에 레이는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대사를 쏟아내고 있는데... 앞서 줄거리 요약에서도 인용했던 대사이다. 여기서 다시 그 대사를 음미해 보자...

신지: 넌 왜 이일을 하지?
레이: 관계때문에..
신지: 관계?
레이: 그래, 사람과의 관계...
신지: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레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신지: 아야나미, 넌 강하구나.
레이: 그 외 다른 건 없어.
신지: 그게 무슨 뜻이지?
레이: 자, 이제 시간이 됐어. 가자. 안녕.

여기서 독일어 번역은 레이의 대답을 'Bindung'이라는 단어로 정리하고 있다. 참고로 이 'Bindung'이라는 단어는 사람사이에 강한 정서적인 관계로 묶여있음을 의미한다. 아, 그리고 에바의 독일어판 자막은 일본인이 친히 작업하셨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의미상 오역이나 실수의 경우는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돌아다니는 에바버젼하고는 게임이 안될 것이다. 혹자는 일본넘이 독일어 잘함 얼마나 잘하겠냐고 비아냥거리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참고로 독일의 뒤셀도르프(Dueselldorf)라는 동네를 아시는지? 독일의 가장 핵심적인 주라고 이야기되는 (물론 돈은 바이에른이 많지만...)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의 수도이기도 한 이 도시... 바로 이 도시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 버젓이 일본간판이 보이고 일식점이 오만 곳에 널려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난 일본애들은 일어와 독어를 무척 간단하게 주무를 수 있단 말이시... 따라서 그런 넘들이 번역한 에바의 독어판의 신용도는 믿어 줄만 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독자제현들은 여기서 바로 이 'Bindung'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길 바란다. 그 '관계, 속박, 의무' 등등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단어가 왜 느닷없이 레이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만 것인가? 바로 이 즈음에서 우리는 에바에 흐르는 세계관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독자들께서 이 'Bindung'이라는 단어를 살짝 '인연'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보시라... 그럼 어떤 느낌이 팍 올 것이다(사실 독일어의 인연이라는 단어도 이 Bindung애서 파생한 Verbindung이란 단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신지: 넌 왜 이일을 하지?
레이: 인연때문에..
신지: 인연?
레이: 그래, 사람과의 인연...
신지: 우리 아버지와의 인연?
레이: 아니, 모든 사람들에 대한...

자, 이제 아시겠는가? 난데없이 등장한 레이의 이 대사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인 '인연설因緣說'(때로은 연기설緣起說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는 셈이었던 것이다.

고래적부터 옷깃만 닿아도 인연이라는 소리는 쉬도 없이 들었건만... 혹 그 안에 깔려있는 의미를 깊게 고민하신 분들이 계시는지... 자, 그렇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예서 불교의 인연설과 관계된 교리들을 아주 쬐금만 풀어보도록 하겠다. 약간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필자의 글 솜씨가 이 지루한 내용을 얼마나 흥미 있게 풀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바라기는 용기를 가지고 불끈 이 순간을 참아주시기 바란다.

불교라고 하는 종교는 인도에서 태동하였다. 그리고 그 교주로 우리는 붓다(Buddha)란 인물을 기억한다. 그러나 붓다란 이름은 한 위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단순한 보통명사이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가 '구세주, 메시야'를 상징하는 그리스어의 보통명사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붓다는 이 세상의 유일한 한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열명, 백명, 천명, 만명, 그 이상의 붓다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붓다, 혹은 부처라고 하면 떠올리는 인물은 그 수많은 붓다 중의 한사람일 뿐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불교를 통해 흔히 알고 있는 붓다는 고타마(Gautama) 가문의 싯다르타(Siddahartha)라는 이름의 구체적인 인물을 지칭하고 있다. 이 사람은 베나레스(Benartes)에서 대략 100마일 정도 떨어진 북부 인도 히말라야 산맥 밑의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사키아(Sakya)족의 소족장(小族長) 아들로서 태어난다. 그러니까 인도라고 하는 커다란 땅덩어리 중에서 한 지역의 대빵 아들로 세상에 빛을 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타마 붓다인 것이다. 그 역시 부유한 가정환경 속에서 별 무리 없는 유년생활을 보내다가 철이 들며 인생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아픔들과 고난들,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로 대별되는 사태들을 주시하고 출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싯다르타가 출가인의 대열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환락과 즐거움만을 주변에서 넘실거리게 했다고 한다. 제대로 키워낸 아들이 자신의 영역을 물려받기보다는 초세속적인 종교적 신념에 빠져 산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기에, 싯다르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과잉보호는 상당했었다고 한다. 그 정도가 어땠는가 하면...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성에 사는 이들에게 명하여 아들이 외출할 때에는 소년 소녀들 외에는 길가에 나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한다. 아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이들을 보고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아비의 배려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극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는 과감히 소방주의 신분을 떼어내고 출가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인도는 다양한 힌두교 전통이 성행하고 있었고 싯다르타도 그 전통에 따라 구도인의 생활을 하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6년간의 그의 고행은 아무 소득 없이 흘러가고 만다. 그러나 불굴의 싯다르타는 포기하지 않고 보드흐-가야(Bodh-gaya)라고 하는 한 숲으로 들어가 보리수(Badhi-tree, 그 뜻 자체가 '깨달음의 나무'이다)라고 알려진 나무 그늘 아래에서 큰 깨우침을 얻게 된다. 바로 그 깨달음으로부터 지금의 불교가 시작된다. 그렇담 과연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그 역시 당시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인생의 모든 것을 '슬픔'과 '고통'으로 읽었다. 나고 성장하는 것, 그리고 병들고 늙어가 끝내는 죽고 마는 그 모든 인생의 과정이 슬픔이요, 고통이요 희망이 없는 번뇌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힌두교를 따르는 이 들은 이 번뇌의 사슬을 깨뜨리기 위해서 각자의 전습되어지는 전통에 따라 고행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때로는 금식을, 혹은 금욕을, 혹은 쾌락의 극치를 추구함으로써 잊혀졌던 희락의 가치를 만끽하고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 우주의 존재적 근거가 되는 '브라흐만'(Brahman)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그 브라흐만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내 안의 아트만(Atam) 외에 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떤 이는 브라흐만, 아트만 같은 이야기는 다 생구라 이고 오직 남은 것은 물질적인 몸뚱아리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마치 중국의 백가쟁명의 시기와도 같이 다양한 호소와 오색찬란한 주장들이 당시 종교인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나타난 한 젊은이가 당당히 이렇게 주장하게 된다.

"다 생구라! 웃기는 소리! 아트만 따위는 있지도 않다!"

바로 이 한 마디 "자아(自我, atman)는 없다!"가 사실 불교의 핵심이고 근본이다. 그럼 지금 내가 이리 느끼고 있는 '나'라고 하는 정체성(identity)의 정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붓다가 된 싯다르타는 그것은 '왜곡된 인식'(maya)일 뿐이라고 말한다. 지구상에 나라고 느끼는 존재란 따지고 보면 5개의 스칸다(Skandha, 溫)의 조합으로 인해 구성된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느끼는 나라고 하는 주체는 사실 이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것의 일시적인 조합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찰나적으로 조합을 한 오온으로 인해 우리는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 존재론적으로보면 그것은 관계의 오묘한 조합이 뿐... 죽어서도 남게되는 나라고 하는 영혼이나 실체로서의 자아는 있지도 않는 '조작된 관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담 이 다섯 개의 스칸다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를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나눈다. 우선 색이라고 하는 것은 루파(Rupa)의 번역어로써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라고 하는 것은 베단타(Vedanta)로서 쾌락과 슬픔 같은 것들을 느끼고 감지하는 인식을 말한다. 상은 상냐(Sanjna)의 번역으로서 대상들을 상호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여 또 그것으로부터 일정한 감각이나 표상들 그리고 개념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 다음은 행이라 번역되는 삼카라(Samkhara)인데...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는 않다. 단어적인 의미는 성향, 동인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즉 현생과 전생의 옛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어진 일종의 무의식적인 본능, 혹은 의지적 충동 정도로 생각함 되겠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비즈나나(Vijnana)인데... 이는 식이라 번역한다. 그 의미는 의식의 집합을 뜻하는데 의식이란 6개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 현상(빛, 소리, 향기, 맛, 감각, 생각)이 반응하는 작용을 말한다.

바로 이런 5개의 온이 모여서 일시적으로 한 개인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 조합하고 해체하면서 끊임없이 유전하고 있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은 이들이 서로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흩어지고 조합하는 변화의 과정일 뿐... 이 변화의 과정을 초월하는 자아라는 실체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혼에 대해서도 부정하게 된다. 실체적인 영혼, 생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런 존재는 불교에서는 없다. 오직 있다면 전생의 삶 속에 축적된 나의 '업'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업은 이생으로 유전되기는 하지만... 그 업을 일으킨 실체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기에 영혼은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사실 이 부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불교 교리시간도 아니기에 이 정도에서 설명을 멈추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벌써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하는 독자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암튼 정리하자면... 붓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나는 없다. 그리고 너도 없다. 있는 것은 단지 오온의 조합일뿐이다. 그러나 조합된 오온으로서 살아가는 내가 이 생에서 축적한 업보는 후세까지 따라온다!"

뭐 이 정도로 이해함 되겠다. 그러면 그 다음은? 바로 여기서 붓다의 목표가 등장한다. 우선 붓다가 보기에 인생이 괴로운 것은 앞서 열거한 그러한 진리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붓다는 무명(無明)이라 표현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궁극의 자아를 찾고자 애쓰고 있는데...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땅히 수련함을 통해 이 세상에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있지도 않으며(諸行無常), 자아라고 하는 것 역시 조작된 관념일 뿐이며(諸法無我), 따라서 인생자체가 근심과 비탄뿐이라는 사실(一切皆苦)을 깨닫고(이를 불교에서는 三法印이라 부른다) 모든 존재의 열정과 욕망이 사라진 정적(靜寂)의 단계를 얻어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그 정적의 단계... 모든 윤회의 사슬을 끊고, 모든 욕망의 불을 태워버린 자리... 그것이 열반(涅槃, Nirvana, 존재에로 향한 모든 욕구가 절멸되어 꺼져 버린 상태를 의미. 그러나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의 경지이다.

따라서 불교라고 하는 종교는 철저히 인식론적인 전환을 통하여 구원을 초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구조와 존재의 비밀을 깨우치게 되어 그 존재의 구속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인 것이다.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길로서의 '깨달음(覺)'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 이 세상이라고 하는 존재.... 그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비가 있는 것은 자식이 있기 때문이요, 부인이 있는 것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요.... 스승이 있는 것은 제자가 있기 때문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의 틀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서있는 셈인 것이다. 딱히 하나 그 모든 존재의 사슬을 끊고 항존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깨우침을 통하여 항존하려고하는, 영원하려고하는 욕망을 끊어버릴 때야 비로소 영원할 수 있다라고 하는 약간은 아이러니한 결론을 붓다는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깨우침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좋은 그림이 하나 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비유가 될런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런 대로 설명하기에 유용한 도구가 있기에 그를 끌어들이기로 한다. 여러분들은 몇년 전 많은 SF매니아들의 가슴을 쥐 흔들었던 한편의 영화를 기억하실 것이다. 바로 그 이름 "매트릭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알 듯 말듯한 경계선과 시각의 역전들을 통하여 많은 세계관적 자극을 관객들에게 선사한 그 영화 말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 보시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인 컴퓨터를 에러나게 하고 하늘을 나는 슈퍼맨 네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코미디처럼 바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간혹가다 비아냥 거리는 웃음도 나올 법 싶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마지막, 이 장면은 그리 간단한 장면이 아니다. 영화의 설정 상... 네오는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 침입해 들어가 납치되었던 모르피스를 빼내오려다 가상세계의 요원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러나 곧 트리니티의 외마디에 네오는 무엇인가 변화를 겪게 되고 그 이후 그는 슈퍼맨과도 같은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날아오는 총알을 멈추게 하고... 스미스 요원을 한방에 박살을 내버리고 등등... 벌써 감이 빠른 독자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눈치챘으리라! 바로 이 변화의 시점이 붓다가 말하고 있는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계속 따라가 보자! 네오는 분명 요원들의 총탄에 살해당한다. 그러나 트리니티의 약간 코미디 같은 고백 이후에 다시 부활한다. 그런데 부활한 네오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그것은 가상세계의 참 모습이다. 비록 그때까지 그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에 대한 구분과 이해를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두 세계의 오고감 속에 적잖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요원들의 총탄이 몸에 박히고 나서... 네오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상세계의 코드를, 즉 '매트릭스'(메트릭스는 수의 항렬을 의미한다)를 읽게 된 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부활한 네오의 눈에 요원들을 비롯한 가상세계의 모습이 초록색 바탕에 수없이 흐르는 기계언어로 보였던 그 장면을!! 바로 매트릭스를 위대하게 만든 그 장면! 바로 이 세계의 코드를 확인한 네오의 시야를 표현한 장면이다. 자, 생각해보시라! 출중한 능력의 프로그래머가 한 프로그램의 코드 원본을 보게된다면? 바로 그것이다. 네오의 눈에 이제 가상세계의 본질이, 그 존재의 구조가 확연히 각인된 것이다. 즉, 가상세계의 코드를 완벽히 해독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순간 순간 그 코드의 진행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면 된 것이다. 그러니 그는 요원의 몸 안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도 있고... 또 하늘로 몸을 날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트릭스의 하늘을 나는 네오는 스타킹에 파란 빤슈를 입고 공중을 설치는 슈퍼맨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코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프로그래머의 위치처럼... 이미 네오에게는 자신을 구속할 그 어떤 장치도 이 가상세계에서는 없는 것이다. 이제 그를 다치게 하는 방법은 유일하게 현실세계에서의 접촉 외에는 없게 된 것이다(매트릭스에서 네오로 분한 키뉴 리브스가 리틀 붓다에서는 붓다로 나온 것도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영화에서 서로 유사한 깨달음을 맛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붓다의 깨달음도 그와 같은 것이다. 인생의 코드를 확인한 그는 이 세상의 구속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붓다가 읽은 존재의 비밀... 그것은 '관계'이다.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순간 순간 변화하며 흘러갈 뿐이다. 바로 그 관계... 모두가 얽히고 섥히어 있다는 생각... 바로 이 생각이 에바의 전편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가치관이요 세계관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된다는 명제는 누군가를 꼬이기 위해 만들어진 연애수법의 하나가 아니라 이처럼 세계를 읽는 진지한 대사인 것이다.

"내가 너를 도우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오온이 지금 이 순간에도 네 안에 있는 오온과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지금 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를 포함한 이 세상의 오온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지..."

따라서 레이의 대사는 지극히 불교적이다.

신지: 넌 왜 이일을 하지?
레이: 관계때문에..
신지: 관계?
레이: 그래, 사람과의 관계...
신지: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
레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물론 이런 레이의 독백은 예서만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편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제작진은 이런 그들의 계획된 의도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선 5화와 6화로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인간들의 관계 형성이 어찌 이루어지는 가를 세밀히 레이를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다. 5편에서 레이는 이카리 박사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사람에 대한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주변에서 머물려 다가서려 실랑이를 벌이는 신지라고 하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일 수 없음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6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제 5편의 레이의 위치에 신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카리 박사역에는 미사토가 등장한다. 부상당한 신지... 그에 대해 진지한 걱정의 눈빛을 쏟아 붓고있는 미사토...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누군가 또 다른 누군가를 걱정해주고 안타까워하는 과정을 묵묵히 주시하고 있는 레이! 이카리와 레이, 신지와 미사토라는 관계 설정 속에서 레이는 인간들의 관계 형성의 비밀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제작진은 그녀의 손에 들려진 안경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분주히 움직이는 네르프 본부직원들의 모습과 기기들을 레이가 든 안경을 통해 주시함으로써 그 안경 역시 레이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의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물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제작진은 레이와 신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관을 노출시키고 만다.

"모든 사람에 대한 관계"

그리고 사실 이 대사는 에바 전편에 깔리며 에바를 규정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여하튼 그 이야기는 차차 진행시키기로 하고...

여하튼 레이는 그렇게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배워간다.


신지: 아야나미, 괜찮아? 아야나미!
신지: '다른 건 없어' 라고 말하지마.
신지: 헤어질 땐 '안녕' 이라고 말하지마...
레이: 왜 울고 있니? 미안해.
레이: 미안해. 난 이런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라...
신지: 이럴 땐 웃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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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홈지기

2005.11.07 22:48:57
*.97.233.175

요즘들어 불교의 nirvana와 그리스도교의 basileia theo가 과연 얼마나 간극이 클까를 생각해 봅니다.
셀체론적 세계이해를 탈피하고, 존재를 관계로서 파악한 이가 갖게 되는 실체론적 욕망의 단절에서 맛보게 되는 경지..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여기서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물음의 대상입니다. 전통적으로 그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구체적으로 그를 표상하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을 수 있겠죠.

여하튼 그런 신론적 논의를 잠지 접어둔다면..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신적 통치의 실현을 묘사하는 형용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신적 통치의 실현에 대한 묘사나.. 인식론적 구원이 완성된 상태에 대한 묘사나..

그 지칭하고자 하는 것으로 따지자면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 것일까요?

요즘들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의외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지향하고자 하는 종교적 논리의 방향이 그렇게 멀지 않지는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 그렇다고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동일하다, 혹은 그 구원이 같은 것이다 라는 식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것을 실어나르는 종교적 언어의 구조가 생각보다 멀지 않지않은가란 추측성 발언입니다.

물론 이 역시 제 주된 관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 주된 관심은 유교쪽에 있습니다. 사실 불교는 이전부터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서 기초적인 과목들과 경전들 외에는 신경을 많이 안썼는데.. 요즘들어 조금은 후회스럽더군요^^;; 지금은 제 주관심이 그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인지라... 다시 불교 경전이나 교리책을 펴들 여력은 없구요..

여하튼 그렇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판넨베르크의 원문을 한번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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