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성서에 대해

조직신학 조회 수 7755 추천 수 140 2005.11.16 16:52:54
19장
성서에 대해

구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우리는 먼저 초기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자. 여기에는 몇 가지 잘 알려진 대답들이 있다. 우선 우리는 구약성서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하기 때문에 구약을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같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유대교는 구약성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그렇게 믿는 게 속 편하거나, 또는 마땅할지 모르지만 이런 문제 안에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우리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역사적 사연들이 놓여 있다.
아마 유대의 율법 학자들도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렇게 큰 세력은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아픈 곳을 찌르거나, 또는 자신들도 귀를 기울여야 할 내용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그 당시에 예수와 비슷한 메시아 운동을 벌인 사람들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도 역시 그런 인물들 중의 하나로 여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예수가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골치 아픈 문제 하나가 해결되었다고 한숨 돌리고 있었을 텐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 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 중에서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 예수 사건을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명해보려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혹시 예수가 참된 메시아는 아닐까? 그들은 그 어떤 근거에서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서 인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그럴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메시아라는 생각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유대 학자들과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사도들도 초창기에는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충분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우리가 복음서를 아무런 편견 없이 읽는다면 사도들이 예수에게 발생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별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했지만 사도들은 그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구약성서에서 발견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예수가 바로 구약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 사건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독특한 신앙 경험과 독특한 구약 해석에 근거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어쨌든지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에 의해서 전승되고 경전화한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 그대로 받아들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유대교의 경전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그 정황을 우리가 따라가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우리는 원시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사도생전에서 우리가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듯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로부터 독립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유대교의 기도 시간을 그대로 지켰으며,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고,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공동체가 안식일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 말은 곧 그 당시에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가 예측하듯이 유대교와 그렇게 결정적으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태에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대목은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때가 4세기 끝이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신학적 체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그 시기에 여전히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제 기독교가 단지 유대교를 반대하는 종교라기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이다.
원시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인 이유 중에서 조금 더 현실적인 것은 사도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 성서를 가정에서 접할 수는 없었겠지만 나름으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회당에서 그 말씀을 듣는 일은 자주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서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비록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구약성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와 구약성서의 관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소가 무엇인지 우리가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힘들기도 하고,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구약성서가 기독교의 경전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다. 바로 이 복합적인 작용이 하나님의 계시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인식의 상호 결합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기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린다기보다는 그것의 영적인 깊이를 충분하게 인식할 수 있는 성서기자들의 역동적 참여를 통해서 알리신다는 말이다. 유대의 신학자들은 구약성서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반면에 원시 기독교의 사도들이 인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식론적 활동이 이 부분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의미이다. 사도들과 성서기자들은 이런 점에서 예언자이며, 신비주의자들이며, 역사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해석이라는 말을 오해하지는 말자. 이 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시가 주도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 기자들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가 영감을 받아서 성서를 기록한 게 아니라 오랜 동안의 성찰, 기도, 토론, 묵상 등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해석했다는 말이다.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해석했다는 말은 자신들 앞에서 발생하는 이 인간의 역사, 세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이 왜 죽는지, 왜 전쟁을 하는지, 이 세상이 왜 인간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지,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왜 이유 없는 고난과 고통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의 결과가 전승의, 과정을 거친 다음, 문서화하고, 이어서 편집을 거쳐, 정경화한 게 곧 오늘 우리 손 안에 들어온 66권 성서이다.
우리는 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말씀이 단순히 문자의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하게 된 모든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즉 바르게 해석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와 만나게 된다. 참고적으로, 성서 안에는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말도 많고, 악한 영의 말도 많기 때문에,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는 그래서 성서를 계시의 삼중 구조에서, 즉 구원사건으로서의 계시, 기록된 계시, 선포된 계시에서 성서를 기록된 계시로 구분한다. 결국 우리는 이 기록된 계시인 성서를 통해서 원래 발생한 구원 사건을 찾아야 하며, 그것이 오늘 청중들에게 바르게 선포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런 작업을 위해서 몇 단락으로 나누어 “성서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심화해보려고 한다. 이번 강의는 필자가 성서에 대해서 언급한 기존의 짧은 글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며, 후반부에서는 성서에 관한 바르트의 아티클을 요약하게 될 것이다.

축자영감설에 대해
얼마 전에 성결교회 신학자들 모임에 잠시 참석했는데, 내 후배가 되는 어떤 교회사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신학대학교에서 성서에 대해서 역사비평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의 쉴라터(?)같은 대학자도 역시 축자영감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머리가 띵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축자영감설 운운하고 있는 건지 순간적으로 2백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거명하고 있는 그 신학자에 대해서 잘 모르겠거니와 그가 말하는 대로 그 신학자가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가 축자영감설을 떳떳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만큼은 매우 신학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그는 축자영감설에 얽힌 신학사적 속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사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서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이 거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축자영감설은 말 그대로 성서의 한자 한자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17,18세기에 유럽에서 축자영감설이 횡행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장이 왜 나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혹은 삶의 자리를 늘 염두에 두고 그런 걸 논의해야 한다. 종교개혁을 거친 다음에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시대의 신학사조를 가리켜 우리는 정통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함으로써 그 정신을 상당 부분에서 놓치고, 도그마에 치중하고 말았다. 그중의 하나가 곧 축자영감설이다.
그들이 성서를 축자영감설로 주장하게 된 이유는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에 닿아있다. 그게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대립적인 의미에서'솔라 스크립투라'를 제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만이 모든 신앙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들은 극단적으로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축자영감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로마의 교회전통과의 대립개념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축자영감설을 무조건 개신교의 성서관으로 도입하려는 것은 난센스다. 참고적으로 칼빈이 성서를 해석할 때 '성령의 내적 조명'을 언급했다고 해서 오늘날 툭하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우를 범하는 일이다. 칼빈도 역시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회에만 있다고 하는, 결국 사제와 교황에게만 있다고 하는 로마 가톨릭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을 언급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와 칼빈의 성령의 조명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축자영감설로 규합된 것인데, 이런 부분은 교리사적인 검토가 좀 더 있어야 한다. 어쨌든지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오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무조건 성서에 대해서 축자영감설의 구도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성서라는 텍스트를 해석학적 토대 없이 해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는 흡사 어느 시인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읽으라는 것과 같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보존하려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해석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성서가 진리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해석에 의해서도 진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석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니까 결국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축자영감설이라는 요새 안으로 숨으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서는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신출귀몰한 마술이나 주술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성서기자들에게 활동하셨다. 시인들이 영감을 얻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 성서에 오늘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도 역시 이런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비록 그런 진리론적 해석학이 고단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길을 포기하고 안전한 축자영감설에 숨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폐증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서 기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좀 살펴보자. 우리가 성서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미 태초에 하나님은 “빛이여, 있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빛을 창조하셨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친구 사이의 대화처럼 묘사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런 일련의 성서 보도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고지식하게 하나님도 우리 인간처럼 입이 있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요즘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싶어 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직접 들었다고 간증하고 다니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는 아직도 그런 분들의 영적 깊이를 따라잡을 만한 준비가 못되었기 때문에 가타부타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런 신앙적 태도가 바람직한 게 아니라는 점만은 신학적인 토대에서 해명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존재론과 언어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한다. 우리 인간의 경우에 그 존재와 언어가 구별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일치되어 있다. 박 아무개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박 아무개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그 사람 자체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박 아무개는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는 신실하다”고 말씀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말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면서도 신실하다고 말씀하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신실하다는 말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말씀 계시’가 하나님의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작동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한다는 이 명제에 근거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론을 정리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문제 앞에서 바른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사물의 존재방식에 지나칠 정도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여기 푸른색의 꽃병이 있다고 하자. 우리가 이 꽃병을 확인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일단은 우리가 손으로 만져보고, 또는 모양과 색깔을 눈으로 봄으로써 그것이 “여기에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인지, 자기 돈으로 산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탐구심이 많은 학생들이라면 이 꽃병이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꽃을 위한 것인지, 값은 얼마인지 등등,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범주로서 어떤 사물을 확인하는 우리의 인식론을 하나님에게까지 적용시키게 되면 하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물화하려는 인간의 의도를 경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더 철저하게 설명하자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우리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극적인 것을 인식해낼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유한하고 잠정적인 이 세상의 구성요소에 불과한 인간이 그것을 초월해 있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흡사 필터를 통해서 태양을 보면 그런 대로 괜찮지만 직접 태양을 보면 우리의 시력을 상실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물이 아니라 말씀으로 존재하신다고. 요한복음 1장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로고스)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말씀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소리를 뜻한다기보다는 ‘로고스’라는 헬라어가 의미하고 있듯이 존재의 근거인 언어와 이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생명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으로서의 언어존재론인 셈이다. 노자와 장자의 도를 단지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를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요한복음의 이 로고스를 오늘 우리의 일상적 경험 세계에서 명증하게 구별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을 계속 초월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침묵해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설명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다만 그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려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지만 간접적 방식으로 하신다. 때로는 시인의 직관을 통해서, 때로는 과학자들의 통찰을 통해서, 더욱이 신학자와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훨씬 자주, 훨씬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부활에서 증명되어야 할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런 간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기 위해서 오늘의 신학자와 설교자는 철학과 과학과 문학, 더 나아가 타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종말에 완성하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서와 역사비평
하나님이 역사 전체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그것에 대한 해석이 바로 성서라고 한다면 오늘 그 성서를 읽는 우리는 당연히 비평적으로 읽어야만 한다. 여기서 비평적이라는 말은 성서의 권위를 손상시키려는 게 아니라 성서 안에서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자는 것이다. 이 말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 뿐만 아니라 비신앙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성서를 고정된, 폐쇄된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면 성서 안에 놓인 삶의 자리와 독자가 살아가는 이 삶의 자리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 당연히 역사 비평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성서를 폐쇄적인 규범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별로 지혜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지도 못하다는 말이다. 지혜롭지 않다는 말은 성서의 절대화는 이단의 발호를 부추긴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들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무모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서 구절로 뒷받침하기만 하면 그들은 아주 쉽게 일정한 세력을 얻는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은 원래 역사적으로 전승된 성서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역사비평이 그런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서 해체된다는 뜻이다.
다시 질문하자. 우리는 왜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야만 하는가? 우선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문자로 된 성서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십계명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번갯불을 통해서 돌판에 글씨를 새긴 것처럼 성서가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자보다 먼저 소리가 있었다. 성서는 하나님이 글씨를 쓰셨다 하지 않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 무슨 언어로 말씀하셨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까 결국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언어이신가?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언어가 헬라어라는 뜻일까?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서기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신 것뿐이고, 실제로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자기의 모국어로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복잡한 상황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성령의 감동, 성서기자, 그의 모국어, 그리고 구체적인 성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정보 앞에서 우리는 성서가 어떻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초보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성령이 성서 기자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에 따라서 성서 기자가 성서를 기록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형식적인 대답으로 성서 형성의 깊이를 모두 찾아내기는 힘들다. 도대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 기자에게 영적인 감동을 준 성령은 누구인지 아는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들이, 신약의 경우만 본다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경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즉 신약성서가 기록된 그 시간으로부터 경전이 될 때까지, 최소한 300년이라는 역사는 무엇일까? 이런 대목에서 자꾸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고 믿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윽박지르면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우리가 성서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최대한으로 따져볼 건 따져보아야 한다. 교부들은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방식으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채택했다.
신약 문서가 처음으로 기록된 그 순간부터 정경으로 결정될 때까지에 해당되는 시간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으면 350년, 짧게 잡으면 30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은 오늘 우리 손에 남아있는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그 역사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곧 성서의 역사비평이다. 비록 그 작업이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역사 활동에 깊이 관여한 덕분으로 오늘 역사적 기독교가 이렇게 자리를 잡았으며, 또한 우리에게 성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런 작업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역사비평이 신앙을 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감당해온 그런 역사적 무게를 손쉽게 피하거나 거부하려는 일종의 신앙편의주의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오늘 우리가 이런 역사비평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의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려고 했던 기독교의 고귀한 전통을 넘겨주는 최소한의 당연한 사명이다.

성서주석과 해석의 문제
성서의 역사비평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교회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설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정통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은 말씀과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고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청중과 콘텍스트에 무게를 두고 설교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문제는 우리의 인식론적 편의를 위해서 구분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하나의 사태다. 텍스트는 늘 콘텍스트를 담고 있으면, 콘텍스트는 늘 텍스트에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성 가운데서 접근하지 않고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설교를 하게 되면 근본이 취약해진다.
어떤 설교자는 성서 안에서 우리의 삶에 그 어떤 현실성도 없는 이야기만 전달하고 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의 정보를 낱낱이 꿰고 있지만 이런 설교는 텍스트의 범주에 갇혀 있는 셈이다. 이런 설교는 청중들의 성서지식만 확대시키지 신앙의 성숙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중심의 설교보다 훨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콘텍스트에 사로잡혀 있는 설교다. 이들은 성서 구절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요령만 모색한다. 구원, 성령, 기도, 믿음 등, 우리에게 익숙한 기독교적인 용어를 나열하면서, 실제로는 오늘의 부박한 시대정신이 자극하는 삶의 처세술을 선전하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 강단이 이렇게 양극단에 치우쳐 있으면서 실제로 성서의 본질에서 멀어진 이유는 이 시대정신에 너무나 성급하게 영합한다는 데에 있다. 도시의 중산층 교회에서 매력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설교주제인 복지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가 이 사회의 복지문제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설교에 좋은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바로 설교자와 청중이 빠져들기 가장 쉽고 어리석은 함정이다. 기독교라는 것이 기껏해야 착하게 살고, 봉사 잘 하고, 이 세상의 복지 향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탈한가? 우리의 삶에 별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복지를 애물단지처럼 여긴다는 것은 설교의 근본이 상실되었다는 증거다. 물론 우리가 양심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고 우리의 세계를 복지사회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당연한 의무이지만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에 천착해야할 설교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토대에 놓여있어야 한다. 설교의 토대가 주변적인 것에 머물게 된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검토하게 되면 설교가 근거해야할 그 자리가 눈에 보이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설교가 정작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근본을 붙들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의 원(原)자료인 성서를 주석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지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은,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개 자신이 선택한 본문을 충분히 읽고 주석집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 말씀을 들어야 할 청중들의 형편을 고려해서 설교를 작성한다. 이들은 대개가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흡사 수능시험을 앞에 둔 수험생들이 문제를 풀어가듯이 성서를 공부한다. 머리가 좋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듯이 설교 능력이 뛰어나거나 노력을 많이 기울인 설교자는 그만한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나름의 수사학을 이용해서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설교는 늘 거기서 거기다. 본문이 바뀌더라도 똑같은 설교만 하게 된다. 기도 열심히 하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도록 반듯하게 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이미 아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전하는 것보다는 모르는 이야기를 찾아나간다. 원래 해석학이라는 원어가 헬라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신의 뜻은 숨겨져 있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해석학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사건을 선취적으로 해명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예언이며, 그것이 곧 진리의 능력이다.
사실 과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다. 과학 선생은 이미 나와 있는 과학이론을 가르칠 뿐이지만 진정한 과학자는 아직 모르는 과학의 세계를 연구한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누구에게 배우거나 누구를 가르치지 않고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열지 않고 연주자가 들어간 것만큼만 열기 때문에, 그 음악의 세계를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표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은 늘 이런 기술에만 머물러 있다. 사실 설교도 이런 수준에서 한걸음도 앞서지 못했다.
한국 교회의 설교는 아예 주석도 없이 자기의 종교경험만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아니면 정보차원의 성서주석에 치우쳐 있다. 전자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사이비성이 강하며, 후자는 진지하기는 하지만 진부하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했던 것처럼 설교의 지평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착근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때까지 잠정적이며 유한한 역사 내의 모든 것들은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
위에서 언급한 기초적인 성서관에 근거해서 이제 바르트가 성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자.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자’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성서와 말씀 중심의 신학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축자영감설의 차원에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훨씬 역동적인 차원에서 성서의 세계를 풀어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 두 논문을 참고로 했다. 하나는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이다.
바르트는 성서에 담긴 세계가 한낱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작용과 더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어떤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곧 그가 신학을 해석학적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해석학은 숨어있거나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풀어내는 인식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지평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들어간 세계만큼 그에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성서에서 언제나 우리가 찾는 만큼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것을, 신적인 것을 찾을 때 위대한 것과 신적인 것을 찾는다. 우리가 무가치한 것을, 역사적인 것을 찾을 때 그것을 찾는다. 우리가 아무 것도 찾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10).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가 생각하는 계시는 단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힘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더불어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계시의 쓰인 형태라 할 수 있는 성서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세계는 곧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에게만 그 하나님이 보인다. 그런데 간혹 성서에서 처세술을 배우려는 사람도 있고, 심리학을 배우려는 사람, 또는 종교사나 미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눈에 그런 요소들이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성서가 원래 전하려는 그 세계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에 바른 것을 찾는 자세를 성서를 읽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자기초월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해야만 한다. 우리가 바르트의 신학을 계시신학, 또는 하나님 중심신학이라고 부르듯이 ‘초월신학’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전이 성서가 해명하고 있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여러 족장, 왕, 예언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똑같은 인간사가 서술되고 있지만 결국 성서는 하나님에게 집중되고 있다. 성서가 때로는 몇몇 위대한 인간에 대한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그런 사람을 주목하게 될 위험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성서를 따라가는 사람은 그런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초월’이라는 말을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어떤 대상에게만 적용시키는 습관이 있다. 바르트가 말하는 초월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지평을 달리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꽃의 지평과 나비의 지평이 다르듯이 인간과 하나님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우리는 일단 그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전적 타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해야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은 곧 바르트 신학의 핵심개념인 ‘전적 타자’(ganz Anderer)와 연결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 안에 있는 모든 역사, 문화, 왕, 사랑, 희망, 약속 등, 그 모든 인간 역사의 파노라마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 전적으로 다른 존재가 개입됨으로써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역사로 전개된다. 만약 역사학자들이 성서 안에서 역사관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 기자들이 그런 역사관을 서술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는 곧 성서기자들이 역사서술을 통해서 전달하려 했던 그 대상이 전적 타자였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질적인 어떤 힘이 역사 안으로 개입된 상태에서 역사학자의 역사해석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거기에서 역사가 중단한다.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 거기에 서 전적인 다른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한다. 전적으로 특별한 근거와 가능성, 전제를 지닌 역사가 거기서 시작한다.”(14).
우리는 성서 안의 하나님을 전적 타자로 해명하는 바르트의 입장에 동의한다. 이 문제는 성서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를 해명하는 관점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즉 전적타자 개념은 판넨베르크 신학에서도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는 ‘우연성’ 개념과도 연결된다는 말이다. 일단 우리 앞에 소여된, 또는 소여되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다. 만약 이 세계가 우리의 계산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면 존재와 생명의 신비는 사라지고 단지 거대한 기계 덩어리로만 우리 앞에 놓일 것이다. 뉴턴 시대까지는 이 세계를 그렇게 보려고 한 학자들이 많았지만 이제 양자물리학 이후에는 그런 기계적 역학을 주장하는 소리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세상의 우연성 개념을 신학적인 용어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인격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사유범주를 벗어난 하나님의 의지가 이 세계에 작동되고 있다. 이 하나님을 바르트는 절대타자로 불렀다. 이렇게 우리를 초월하여 절대타자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범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바르트는 소위 자유주의신학이 주장하는 그런 인간학적 시도들을 거부한다. 다음과 같은 몇 관점이 이에 해당된다.

도덕성
바르트는 분명히 성서를 도덕 교과서로 사용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성서의 대부분은 학교를 위해서, 그리고 가장 좋은 경우에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서 거의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제적인 삶의 지혜와 감동적인 모범들이 거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15). 간혹 우리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교회에 나가는 거 좋지요. 다 잘되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거니까요.” 이것만큼 기독교를 오해하는 말도 없다. 기독교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개신교 역사에서 칸트와 리츨만이 아니라 종교사회주의를 비롯하여 오늘의 민중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색채를 띠고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더구나 하나님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고 있는 현재의 주류 교회도 역시 상당한 경우에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날 교회가 너무 개인의 신앙에만 치우쳐서 사회봉사와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개입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교회들이 경쟁하듯이 복지관을 세우기도 하고 사회시설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설교도 역시 이런 윤리적인 점들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은 많이 할수록 좋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이 성서의 고유한 세계는 아니다. 바르트가 바르게 보고 있듯이 성서의 세계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17) 초점이 놓여 있다.

종교성
19세기 신앙과 신학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윤리만이 아니라 ‘종교성’에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감정의 신학자인 쉴라이에르마허로부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인 트릴취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기독교를 종교 일반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가 성서 안에서 인간들이 갖는 종교적 경험을 발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여러 종교현상들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서는 인간들의 경건한 종교체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르트는 이렇게 끊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본다면, 종교는 전혀 없다. 다만 ‘다른’ 새로운 더 위대한 세계가 있을 뿐이다.”(19). 바르트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성서의 중심이 인간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20). 여기에 바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데우스 딕시트). 성서에서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은폐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의 생각만으로는 그가 은폐된 분이며, 반면에 하나님에게서 그는 계시된다. 따라서 성서 안에서 인간의 종교성을 찾으려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야만 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성서가 인간의 윤리나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 성서의 세계는 새롭다. 갈매기에게 인간의 세계가 새롭고, 인간에게는 민들레의 세계가 새롭듯이 우리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은 새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다. 대신 거룩, 영광, 전권이라는 개념으로 진술해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존재의 근원인 이 하나님의 새로움이라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이다(Gott ist Gott)
바르트는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표상을 의문시한다. “성서 안에 전개되는 강력한 수단들, 백성의 운동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전쟁들과 진동들, 거기서 계속 일어나는 기적과 계시들, 언제나 가장 새롭게 만들어지는 무한한 미래의 약속들, 이 모든 것들이 성서가 갖는 유일한 결과들이라면 아무 작은 결과들과의 이상한 관계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위대하지 않은가?”(23).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 자체를 봉쇄시킨다.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는 말문이 막힌다. 인간들의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어쩌면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한 부분을 만져보고 설명하려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입을 다문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식으로 하나님을 그려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성서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다음의 문장에 담겨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이다”(24).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인간의 인식으로 그 하나님을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고 하나님은 그 초월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 안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설명한다면 그런 설명과 더불어서 하나님은 그 속성을 뛰어넘는다. 무한한 양파 껍질처럼 한 껍질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껍질을 만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 인식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증언에 기대어 이 하나님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더듬거리고 암시하고 약속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설명한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땅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믿는 자들 안에 있다. 성령은 불의한 세계 한 가운데서 “하늘의 정의를 세우고 모든 죽은 자들이 살게 되고, 새로운 세계가 존재할 때까지 멈추거나 쉬지 않는다.”(26).

진보가 아니라 새로움
바르트는 19세기 역사 낙관주의에 근거한 인간 중심적 세계관과 그런 신학을 성서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해버린다.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이 세상의 체제와 제도와 사상을 개량해나감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자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지평에서 나오는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고 기다리자는 데에 있다. 그 새로움(노붐)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이 사회의 개량주의와 대립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조금씩 쓸모 있게 만들어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와 투쟁한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정치적인 것이든지 불문하고 개량주의적 모든 속성들과 싸운다. 간혹 기독교적 생태주의나 해방신학의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투쟁에 연대해야 하지만, 그것을 성서의 고유한 미래로 생각할 수는 없다. 아무리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정치 경제적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새로움’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서의 뒷부분과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묵시문학적인 새로움을 지향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이렇듯 역사진보가 아니라 역사의 새로움을 역설함으로써 자유주의의 진보사관에 철퇴를 가한 바르트의 공헌을 인정한다. 인간이 계몽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워진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성서 실증주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물론 그가 하나님을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런 설명의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모든 사유 논리의 밑바닥에는 성서가 준거로 작용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의 인식으로 하나님을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면 성서 자체가 그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서, 또한 그것을 뛰어넘어 모든 세계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계시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서적 질문, 통찰과 전망
몇 년 전,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계 신앙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청중의 입장으로 참석했다. 요즘 ‘잘 나가는’ 목사님들의 설교 방식과 그들의 관심을 알고 싶은 까닭이기도 하지만, 더 원천적으로는 말씀에 대한 갈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였다. 설교자가 개인적으로는 목회에도 성공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이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해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통찰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그런 설교를 ‘선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설교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어떤 목표를 이루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성이 담지하고 있는 영적 깊이를 만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선동이 아니라 예언이어야 한다. 즉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가 20세기 초에 활동한 바르트의 신학적 착상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바르트는, 앞에서 다룬 ‘성서 안의 새로운 세계’에서도 확인했듯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관심을 기울였던 인간론으로부터 성서의 관심인 하나님에게로 신학의 초점을 교정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사람 자체를 가장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는 관심을 많이 기울이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에는 관심을 잃는다. 겉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열을 내고 있는 같지만 그것도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열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존재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더구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실성을 확보해나가는 일에 모든 것을 걸어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학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학의 더 근원적인 토대가 하나님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신학이 간과했던 하나님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성서읽기에서 새롭게 찾아내려고 한다.

성서적 질문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신앙과 신학의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바를 믿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바로 ‘하나님’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바르트의 주장은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의 생각을 조금만 진지하게 따라가다 보면 그 주장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성서의 핵심 질문인 하나님 안에 인간의 “모든 자연적, 역사적, 미학적 및 종교적 해석들”(52)을 포함시키면서, 동시에 지양시키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모든 인간적 인식의 토대가 되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인식은 신인식 때문에 존속한다”(52)는 바르트의 과감하고 극단적인 주장은 옳은가?
우선 바르트의 진술을 들어보자. “성서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우리에 대한 질문으로 변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로 향한 이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긍정과 부정, 부정과 긍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이상야릇하게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바로 형편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53).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에 대해 질문하는 우리 인간은 성서 안에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객체가 될 뿐이다. 창조와 완성의 주인인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피조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 하나님 안에서 인간은 부정되기도 하고 긍정되기도 한다. 이 성서의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위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질문, 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는 것이 ‘신학과 교회’가 아니며, ‘종교적 감정’도 아니고, 철학적 계몽에 의해 구성된 ‘교의학적 사고’도 아니다. “성서에 관한 이성적이고 결실 있는 대화는 성서의 인간적 역사-심리학적 특징에 대한 통찰 너머에서 시작한다.”(59). 결국 바르트가 말하려는 바는 성서의 질문은 창조와 종말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인데, 그것은 인간학적 사유방식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개입되는 그분의 계시에 의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사적인 접근이나 심미적 차원에서 추적해본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우리는 결국 “먼지와 재”에 불과한 자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59). 이렇게 우리를 초월해 있는 그분에 대한 증거를 우리는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이런 성서의 증거들은 어떤 통찰인가?

성서적 통찰
위에서 지적한 대로 바르트는 성서를 종교사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거부한다. 성서 안에서 그런 요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스러기에 불과할 뿐이지 성서는 근본적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통찰이다. 그 어떤 새로운 것, 바르트의 수사적 멋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돌려 손을 눈에 대고 단층 지붕 위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쳐다보는 광경을 우리가 창문 밖으로 본다면”(61) 우리는 그들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할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행기를 보려고 그런 모습을 취한 것일지 모르니까. 그러나 성서 인물들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예를 든다. 바울, 요한, 누가, 야곱, 아브라함, 모세 등등.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전적인 타자’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이들의 이런 통찰은 그 어떤 종교사학적 분석으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나 새롭고 독특하고 달랐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종교사학파들의 잘못을 이렇게 진단한다. “즉 이 모든 사건은 종교학의 범주로서는 결코 충분히 표현하고 기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것은 사실을 이해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다. 성서의 체험 안에는 그 어떤 심리학적 감정이입과 재구성의 수단으로써도 체험으로 보여줄 수 없는 결정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64).
바르트가 기독교를 종교 비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말은 곧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 문화의 모든 긍정과 부정을 초월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리는 긍정이나 부정 속에 있지 않고, 긍정과 부정의 원천인 시초를 인식하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70). 이런 면에서 그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며, 전적인 초월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분을 인간의 인식능력 안에서 규정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며, 죄이기도 하다.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문화적 인식을 뛰어넘는 이런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통찰하고 있다.

변증법적 패러다임
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변증법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바르트는 생각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모든 긍정이 부정을 거쳐서 나온다는 것이다. “신약성서가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모든 긍정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전혀 고려될 수 없는 가능성과 예외 없이 관련되며, 바로 그렇기에 항상 동시에 새로운 질서에 속하는 가능성보다 철저히 앞서가는 거대한 비판적 부정과도 관련된다.”(76).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을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패러다임은 전적인 타자로서 자리 매김 된 성서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신학적 착상임에 틀림없다. 성서의 하나님 경험은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직관과 믿음의 차원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긍정과 부정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술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변증법적 신학을 다른 말로 하면 ‘기다림의 신학’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바르트의 신학은 성급하게 대결하거나 성취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활동하기를 기다린다.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진술은 새겨둘 만하다. “십자가를 걸림돌과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자들과 너무 성급히 맞서지 말자. 우리 모두도 본질적으로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의 동료들 전체가 닫힌 죽음의 문 앞에서 불안과 괴로움을 겪고 있고, 그 뒤에서 대기해 있을지 모르는 새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관념적 체계를 갖고, 복음전도나 사회봉사의 일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체험했노라 자처하며, 그들에게 달려가는 일은 아무튼 좋은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이다.”(80).
우리가 이런 바르트의 변증법적 패러다임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 삶에 관계된 사태를 이런 변증법적 구도로 해석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지적해야만 한다. 예컨대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타종교 문제를 이런 변증법적 신학으로 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변증법적 패러다임은 어떤 사태를 해석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행위가 따라오는 결단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성서적 통찰의 차원을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에서 해명함으로써 인간 역사의 일방적 진보사관에 기울어져 있던 당시의 자유주의신학을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인간의 온갖 인식론적 근거와 상상력으로 가려진 성서의 하나님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새롭게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작위적 태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이니셔티브를 변증법적 구도로 폭로시킨 이 바르트의 신학적 착상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설득력이 있다.

되돌아오는 질문
끝으로,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또는 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질문은 결국 그런 질문을 하는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한 것으로 돌아온다. 바르트는 그것을 가리켜 ‘성서적 전망’이라고 일컬었다. 인간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라고 요구한 바르트도 역시 이렇게 질문하는 인간실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논문에 실려 있는 그의 마지막 설명을 들어보자. “궁극 이전의 성서적 전망은 결국 불가피하게 우리 자신의 존재의 문제점을 다시금 꿰뚫어보도록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또한 이 불안의 뿌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의 추구와 실패, 우리의 서고 넘어짐, 우리의 기억과 망각, 우리의 긍정과 부정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에워싸여 있고 지탱되어 있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피조물인지 하나님은 아신다. 우리는 먼지임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우리는 인식되었다. 이 말은 너무 많은 말도 아니고 너무 적은 말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튼 이것은 궁극적인 성서적 전망이다.”(89).

종교지양과 진리의 보편성 문제
우리는 이 논문에서 바르트의 핵심적인 기독교 이해는 종교 지양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 현상은 우리의 인식으로 대충 그 윤곽을 잡아낼 수 있지만 성서에서 진술되고 있는 하나님 체험은 그런 종교 일반을 근본적으로 뛰어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지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엘리아데 같은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를 그런 종교학의 범주 안에서 판단할지 모르겠다. 19세기말에 종교사학자가, 또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의 보편성을 종교현상이나 사회주의 운동에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바르트는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아주 독특하게 지켜냈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그의 주장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타당한지는 좀더 논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겪었던 기독교의 위기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위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19세기 신학이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세상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즉 당시 유럽의 교양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학자들이 기독교를 교양과 학문, 즉 종교성으로 덧칠했다고 본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르트는 좀 과격한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 세상의 문화와 전혀 다른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질적으로 접촉이 불가능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우리는 그런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미 자연과학이 스스로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굳이 우리가 그들과 ‘다름’만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창조의 하나님을 우리가 변증해야만 한다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방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차원에서 기독교의 보편성을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레벨:20]신완식

2005.11.16 18:35:51
*.40.131.65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내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집에 한글 신학서적이 없어서 아내가 신학을 가까이 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얼마나 유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에도 일하는 시간에 짬을 내서 4개의 주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세시까지 아내와 신학적인 토론을 벌였고요.

아내도 저와 함께한 11년간의 군생활 영향 때문인지 ‘이념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목사님의 견해로 인해 다소 혼란스러운가 봅니다. 97년이던가요?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당시 제가 근무하던 공수부대도 약 40일간 현지에서 작전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른바 ‘Red Complex’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거기다 오래 전 돌아가신 제 장인이 1.4 후퇴 때 혼자 피난 온 이북출신이신데 국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상이용사로 오랜 동안 고생하셨거든요. 장모는 현재 국가 유공자 미망인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고요. 하지만 이해력이 있는 아내는 이런 견해 저런 견해를 대하면서 소화시킬 수 있도록 나름대로 애쓰고 있답니다. 그녀는 목사님의 설교 비평 부분을 일주일 만에 다 읽었습니다.

정목사님! 혹시 ‘성령의 은사’에 관해 정리하신 글이 있으신지요? 아내는 한신대에서 신학을 하시고 잠시 목회를 하신 바 있는 제 장인의 영향하에 장로교 통합 측의 서울 연동교회와 동숭교회에서 주로 신앙생활하며 자랐는데 저에게 시집 온 후로는 전혀 다른 교단의 분위기 때문에 많은 갈등을 느꼈답니다. 특히 방언을 못한다는 처지(^^) 때문에 신자들로부터도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있고 예언을 한다는 이들 때문에 (아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이들을 대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정신적으로 좀 힘들었나 봅니다.

저는 현재 ‘성령의 은사’ 문제를 제 논문 주제로 삼고 나름대로 씨름을 하고는 있는데 목사님의 고견을 좀 듣고 싶습니다. 저와 아내가 최근 목사님의 글을 탐독하게 결정적인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와, 정목사님은 이런 생각까지 하시는 분이시구나!’라는 데 있거든요. 뭐라고 할까, 목사님의 글은 숲을 보게 하고 큰 그림을 그리게 하는 듯 합니다. 나무에만 집착하여 이리저리 헤매기 쉬운 이들에게 ‘좀 더 높고 먼데서 큰 것을 보라’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시 제 공부를 접고서 <고공비행>을 즐기고 있는 셈이지요.

오늘도 좋은 하루 (참 그 곳은 벌써 저녁이군요. 여긴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인데요.) 되시고 평안하세요. 특히 건강 하시기를 빕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1.17 00:33:13
*.249.178.23

신 목사님,
공수부대에서 군목을 하셨군요.
나는 80-83년에 8사단 2년, 73(?) 후송병원1년 근무했습니다.
정말 젊었던 시절입니다.
만으로 27살에서 서른살까지 인생을 보냈던 군대생활이 아련하게 기억납니다.
강포라도 가 보고 싶고,
길명리도 가 보고 싶네요.
내 길을 좋게 읽어주시는군요.
여전히 생각이 깊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특별히 글을 쓴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설교는 한 적이 있을 것 같지만,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기억하고 있다가 기회가 되는대로, 가능한 빨리
그런 부분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큰 기대는 마세요.
이만.

[레벨:1]angelleaf

2007.10.16 13:37:17
*.228.66.190

오늘도 역시 잘 읽고 잘 배우고 갑니다^^*

군대 오기전에는

저 혼자 스스로 이런 깊이 있는 생각들을 못해봤는데

여기서 읽어나가면서

이런 깊은 생각들을 얻어간다?!라고 생각을 하니

맘이 뿌듣합니다..ㅎㅎ

작은자

2008.07.03 07:32:35
*.7.13.27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글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조금씩 먹겠습니다. 단숨에 읽어나갔습니다만
너무 좋습니다. 제가 원래 공부하고는 친하지 않는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부족함이라서 간혹 유치한 질문을 하더라도 관심 갖아 주세요^^

위의 글에서 원시 기독교회가 구약성경을 어떻게 해서 받아드렸는가를 잘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가지 좀 ...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서 저는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어요.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저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못하게 일부러 그러셨다고 제가 이해를 하는데요

제자들이 구약을 이미 자연스럽게 인정하였다는것의 근거로 혹시 부족할까요^^
저는 그런면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 공동채안에서 구약성경은 자연스럽게 받아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이구~ 부끄러워라~

원래 질문을 잘 해야 똑독하다던데 전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다음글을 또읽어야 겠습니다.

그리고 이글을 제가 담아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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