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강 한국교회의 미래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5071 추천 수 0 2012.07.06 22:25:28

제 43강

한국교회의 미래

 

반갑습니다. 창문을 좀 열어 놓았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들리네요.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요. 강의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날씨가 시원하고 좋습니다. 여름이기는 해도 아직 본격적인 더위는 전혀 오지 않았는데요. 문을 닫으면 더울 것 같으니까 열어두겠습니다.

 

주님의 얼굴

 

어제군요. 수요일마다 성경공부 겸 기도회 겸 교우들이나 시간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볼 겸, 함께 모여서 시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들어가기 전,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같이 읽고 나눕니다. 일전에 한 번 말했지만, 한국교회에는 자유 기도가 너무 많아요. 그것도 좋은 점이 있지만, 성문 기도, 특히 영성의 대가나 신학의 대가들이 먼저 고백한 기도문들을 읽고 기도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성서가 다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자유롭게 성령과 소통하며 기도드리는 단계에 들어가면 좋지요. 우리가 모두 그런 단계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전에도 어떤 분이 관상기도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요. 한국교회에 그런 기도 운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시작한 건 아니고 전 세계 기독교 운동 중의 하나인데, 한국교회에는 그것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어요. 기도원이라는 한국교회의 특이한 신앙현상에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다른 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쪽으로 이야기가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성문 기도가 참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많이 읽고 외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좋은 기도를 읽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 뜻으로 수요일에는 자유 기도를 하지 않고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읽고 있습니다. 책은 보여드렸죠? 어제 본 대목이 너무 좋아서 여러분께 꼭 읽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영혼에게’라는 제목이고요. 다섯 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에 다섯째 연만 읽을게요.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육신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전달이 되었나요?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하고 이어서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내가 죽게 된다 할지라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거든요. 볼 수 없어요. 왜 볼 수 없는지 제가 또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딱 그 부분이 아니더라도 강의 중간에 그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 겁니다. 하나님을 보면 우리가 왜 죽는 걸까요? 여러분이 그냥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걸 혼자 생각할 수 있어야 신앙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꼭 신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가장 기초적인 건데요. 성서와 그것을 기초로 한 교리들이 허투루 나온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것들은 세계, 역사, 시간, 인간의 삶, 죽음 등 전반적인 것을 직관한 사람들의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나온 진술들이지, 아무 바탕도 없이 그냥 기도해서 툭툭 튀어나왔거나 그냥 영감을 받아 쓴 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진술이 그냥 나온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다 그럴 만한 토대가 있다는 거죠. 그걸 생각해보십시오. 6개월 동안 강의를 들었는데 혼자서 풀지 못한다면 강의를 헛들은 겁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얼굴을 좀 제발 돌리지 말라고요. 내가 당신을 보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한다고 말이죠. 앞에서 죽는다고 하고 뒤에서는 산다고 했어요. ‘육신으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라는 이 부분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꼭 영육이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해체되어야 할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런 걸 의미하겠죠.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생명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부분들을 육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면 죽어요. 그런데 살기 위해서 주님 얼굴을 뵙고자 한다고 합니다. 저는 어거스틴이니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앞의 네 연이 쭉 발전되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이런 기도를 드리거든요. 신학적이면서 영성적인 기도입니다. 참 좋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육신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아멘

 

여기서 제가 질문하고 싶은 건요. 어거스틴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주님은 바로 어떤 분인가 하는 거죠. 우리가 보면 죽는 분이지만, 결국 우리로 죽어야 살게 하시는 그분, 그분이 누군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제가 누누이 말했는데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불확실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의미라고 했어요. 궁극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분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분에게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계속 어떤 걸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생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도록 영적인 훈련이 필요한 거죠.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어거스틴의 기도문이 좋아서 읽어 드렸습니다.

 

한국교회의 과거와 미래

오늘은 21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의 전망과 희망을 주제로 합니다. 전망이 별로 밝지는 않는데,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하니까 희망을 좀 노래하자는 겁니다. 시편의 기도들에서도, 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절망과 무죄한 자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잠잔다고 하는 세상 속에 살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희망들을 읽을 수 있거든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막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정확히 직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 암담하고 칙칙한 현실들을 뚫고 넘어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6·25 남북전쟁 이후 50년 동안 한국교회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10년 단위로 간략하게 정리를 하겠습니다. 50년대는 제가 태어난 연대군요. 제가 53년생이니까요. 여기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도 동지들이 많이 있죠? 휴전되던 시기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까, 큰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50년대에는 한국교회가 아주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열광적이고 묵시적인 성격을 뗬죠. 상당히 내세 지향적이었습니다. 그건 식민지 시대부터 계속 이어져 나온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이것이 극단으로 흘러서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이나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크게 열매를 맺기 시작했는데, 이런 것들이 다 한국교회에 뿌리를 박고 있는 거예요. 이단들의 발흥은 그만큼 그 종교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거든요.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가톨릭보다 개신교에 사이비 이단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별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입니다. 이단과 정통 사이가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거죠. 서로 연계되어 있어요.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지 않을게요. 정통 교회 안에 사이비성이 한두 가지입니까? 현상으로만 놓고 본다면 이단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그 안에 교리적인 차원에서 정통 교리를 붙잡고 있는지, 아니면 청중들이 원하는 쪽으로 갔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어쨌든 50년대의 한국교회는 내세 지향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이었습니다.

60년대는 분열과 에큐메니컬 운동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1959년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었던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죠. 기장과 예장은 그보다 앞서 분열된 상태였고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냐 근본주의냐 하는 문제로 갈라졌습니다. 59년에는 WCC 문제로 분열이 되었죠. 61년에는 제가 속해 있는 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고요. 이런 교파 분열이 이때부터 시작해서 계속되었습니다. 이건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할 거예요. 한 4-50년 어간에 백 몇 십 개로 교단이 갈가리 찢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했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 버금가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열의 단초가 WCC였어요.

WCC 총회가 7년마다 한 번씩 열립니다. 54년과 61년에 열린 WCC의 주제는 하나님의 선교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신학 문제는 접어두고요. 여기에 제가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말을 각주로 달았습니다. 노동운동, 식민지 독립운동, 각종 인권운동 등이 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신학적 근거가 여기서 중요합니다. WCC는 기독교 운동만이 아니라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인권운동에도 많은 지원을 했어요. 그게 얼마나 정확한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WCC의 자금이 반정부 운동, 게릴라 운동, 무력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도 흘러들어갔다고 합니다. 이게 빌미가 되어서 결국 WCC에 잔류하는가, 탈퇴하는가 하는 문제로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WCC가 용공주의에 물들었다는 겁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래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신앙적으로 옹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크게 미쳤어요. 한국교회는 50년대와 60년도에 있었던 ‘미시오 데이’ 운동으로 분열하게 되었던 겁니다.

70년대는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인데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1973년 봄에 제가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그때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열렸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대형집회인 것 같아요. 그 뒤로 계속 여러 번 열렸죠. 그걸 따라서 로마가톨릭에서도 그런 집회를 주최하기도 했고 불교에서도 한 번 개최한 것 같아요. 그 때 대형집회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대사회적으로 기독교의 힘을 보여주자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70년대는 그런 방식으로 한국교회가 아주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습니다.

80년대는 소위 큐티나 성경공부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물론 70년대에도 WCC나 대학생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순모임, 성경공부모임, 제자훈련모임 등이 있었죠. 옥한흠 목사님이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을 했지만 그 전에 다 있었던 것들이에요. 맨투맨으로 점 조직으로 했는데, 일종의 의식화 운동입니다. 이런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요. 큐티를 전문적으로 하는 정기 간행물의 숫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교회의 열정은 참 대단합니다. 어쨌든 7-80년대는 한국교회 발전의 황금기라 볼 수 있어요.

90년대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양적인 성장은 주춤했습니다. 클 만큼 컸죠. 전 국민의 20%까지 올라갔나요? 일반 사회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여러 종교가 경합하고 있을 때 20%이상 올라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기독교와 가톨릭을 합하면 26-7% 정도 되겠죠? 지금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퍼센티지가 많이 달라졌는데요. 90년대에 20%라고 했고,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은 20% 아래로 떨어진 것 같아요. 로마가톨릭교회는 5-6%하다가 지금은 7% 이상으로 쑤욱 올라갔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인숫자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아요. 2-3백만 명 될 겁니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나간다면 10년 후에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덩치가 비슷해지지 않을까요? 어쨌든 기독교가 20%를 넘어서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죠. 사실 20%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기적인 거예요. 그게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주춤했습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을 했다면, 그건 거의 수평 이동을 한 거라고 봐야죠.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큰 교회는 더 커지는 교인 이동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영향이 굉장히 커요. 사회학적인 영향 그 자체가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도 있긴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종교 사회학자들이 다 이야기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한 가지만 말한다면 급격한 이농현상이 한몫했습니다. 이농과 도시화가 한국의 모습이었잖아요. 전라도나 경상도에 살던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 서울로 몰려와서 일을 했고, 그로 인해 급격한 압축 성장을 했죠. 구로공단에 여공들이 많았어요.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가 오히려 선교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었죠.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돌진 근대주의라고 하더군요. 근대주의는 굉장히 합리성을 토대로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변형되었다고 할까요? 약간 성격을 달리해서 돌진 근대주의가 되었는데, 백 년에 걸쳐 이뤄야할 자본주의와 민주화가 압축되어 나타났습니다. 이것의 가장 큰 요인이 이농과 도시화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교회로 몰려들었고요. 군사 독재였기 때문에 민주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서 교회 안에 들어와 그런 이념들을 펼치게 되었죠. 여기서 하나 더 첨가하자면, 분단 상황을 꼽을 수 있습니다. 분단 그 자체보다도 그 결과로 인한 현상이 더 정확한 표현 같아요. 분단으로 인해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되었어요. 그들이 처음 개신교회의 주축을 이루었거든요. 영락교회가 대표적입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 북에 가족을 둔 사람들은 마음이 허전했어요. 급격한 이농과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도 그렇고요. 정치적으로도 정착할 데가 없었습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들이 정말 60-70년대에 대단했습니다. 제가 옆에서 실제로 많이 봤거든요. 현풍에 있을 때 그 교회 신자들도 그런 일을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이전에 천호동에 살면서 신학대학을 다닐 때 복부인들이 있었는데요. 복덕방에 가서 아침에 계약하고 저녁에 50% 붙여서 팔곤 했습니다. 그리고 복덕방 주인들은 2-3%의 커미션을 먹고요. 그게 지금은 강남 쪽에서 약간 세련된 방식으로 나오고 있죠. 불로 소득이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정말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 수 없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상당히 불행한 일들인데요. 이러한 것들이 한국교회가 고속 성장하게 된 사회학적인 근거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수 없었어요.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아전인수죠.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50년대는 굉장히 내세 지향적이고 열광적이고 대표적인 이단이 발호했습니다. 60년대는 교회가 정식으로 분열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이 나왔고 결국 그때부터 계속 갈라졌어요. 70년대는 대중 집회가 많았고 대학생 동아리 모임들, 선교단체들이 중심이 된 성경공부나 큐티 등이 80년대까지 계속 이어져서 한국교회 성장의 황금기라고 불릴 수 있구요.

90년대의 특징은 해외선교입니다. 국내에서 교회활동을 견인해 낼만한 동기가 없으니까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죠. 그때는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세계 정치 지형이 큰 변혁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요소이고요. 내부적으로는 더 이상 새벽기도나 부흥회나 큐티나 제자훈련 등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뭔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있어야 했던 거죠. 교회들도 뭔가 이슈를 붙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슈 없이는 지탱이 안 되니까요. 교회가 내부적으로는 아주 취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뭔가 하나에 집중하게 만들도록 해야죠. 5년 계획으로 교회를 새로 짓는다거나, 아니면 교인수를 배로 불린다거나, 아니면 복지관을 짓는다거나 묘지를 산다거나, 그렇게 하잖아요. 하여튼 90년대에는 해외 선교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그 결과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해외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다고 해요. 이게 잘하는 건지 아닌지는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교회의 부흥이 한국의 경제 성장과 닮은꼴이죠? 한국 경제는 관 주도형으로, 수출 드라이브, 저임금 정책 등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했어요. 이런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인데요. 먹고 살기 힘들 때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해서 경제를 살렸다고 하죠. 그래서 유신을 하고 정말 이상한 정치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고요. 그 때 한국 경제가 압축 성장을 했는데 이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제3세계이자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나라로서 우리나라처럼 민주화가 빨리 되고 경제가 성장한 나라는 없다고들 말하는데, 이렇게 빨리 된 게 좋은 것이었을까요? 좀 천천히 경제가 성장했으면 어땠을까요?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요? 지금 압축적으로 경제가 성장함으로써 일어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잖아요. 걷잡을 수가 없어요. 여기에 한국교회도 일조했습니다. 일조만 한 건 아니고, 그 덕택으로 성장한 거죠. 경제는 군사독재와 정경유착을 통해서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었어요. 그게 뭔지 잘 알 거예요. 교회는 군사독재에 침묵함으로써 일종의 도피처 구실을 했습니다. 어쨌든 경제나 교회가 사회변혁에 대한 역사적 경험 없이 부지불식간에 덩치만 커진 까닭에 졸부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제가 전부 싸잡아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전반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경제나 교회나 그 안에 거품을 물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정도로 근본이 허약하다는 겁니다.

제가 6·25전쟁 이후로 한 50년 동안 10년 단위로 한국교회의 특성을 말했는데, 조금 비관적으로 말한 것 같아요. 제가 일부러 나쁘게, 냉소적으로 보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제가 다른 교수의 말을 인용할게요.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김영민 선생인데요. 제가 가끔 인용했던 글입니다. 지금 김영민 선생은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왜냐고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온 것 같더군요. 그 이야기를 하면 또 길어지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분이 <한겨레 21>에 쓴 글입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시라.(한겨레21, 1999년 4월 15일자)

 

10년 전의 글이군요. 이걸 읽고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교회에 발을 내딛었지만 이제는 정말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기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항변하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이냐고요? 요즘 촛불시위를 하고 있죠. 쇠고기 파동으로 정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대형교회가 중심이 되어 이런 흐름들을 앞에서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허튼소리를 하고 있잖아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하는데요.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합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교회가 빨리 손을 끊어야 그나마 실추되었던 교회의 권위를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고 건질 수 있을 텐데요.

21세기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는가? 미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그만 두어야겠어요. 그냥 교회는 존재하게 되겠죠. 그럼 구원론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공동체는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대한민국이 이제는 분단체제를 넘어서야 하잖아요. 남북의 관계, 분단체제, 여기에 한국교회가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너머를 봐야 하는데, 다시 말해 분단 이후까지 내다보고 선교 정책을 벌여야 하는데, 오히려 이 분단 체제를 이용하고 있어요.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 빠져서 일반 보수 우익단체들이 쏟아놓을 만한 말들, 툭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식의 용어들이 한국교회 강단에서 그대로 표출되고 있잖습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예요. 일전에 대구에 있는 어떤 분이 자기 교회에 대해 하소연을 해서 거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새해 인사가 있는데, 기도문으로 나와 있더군요. 그 중에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그대로 축자적으로 인용하기는 힘들고요.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이제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서 회복해 나가도록 하자는 뜻이었어요. 그걸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보수적인 우익단체가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계산에서 말할 만한 용어들을 교회가 너무나 쉽게 인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한 이 분단 체제를 넘어서 한국교회가 구원론적 의미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되겠는가 하는 겁니다. 교회가 그냥 있기는 있는 거죠. 대형교회는 약장사를 하듯이, 청중 중심주의, 대중추수주의로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과연 구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긍정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그 문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떤 것이 과연 구원론적 현실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구원론은 정말 중요한 주제이요.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아주 좁은 의미로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걸 전제합니다. 교회의 메시지와 실천이 종말론적인 현실을 담지하고 있는가 하는 거죠.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한 마디 보충하고 지나간다면, 구원론적 현실을 담지한다는 말은 꼭 역사 참여를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역사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신학적으로 접근하면서 분단 체제를 뛰어넘는 미래를 말해야 합니다.

 

타종교

분단 체제를 뛰어넘는 구원을 말하는데 전제되는 게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의안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복음이 세상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강의안의 결론만 말한다면 이겁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초월해 있는 공동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정반대죠. 정말 세상 안에서 풀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정말 초월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집착해서 자기 기득권을 찾아내려고 하니까요. 예를 들면 어느 교회가 교회당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잖아요. 반대하면 짓지 말아야죠. 그런데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강압적으로 교회를 지어요. 조폭들을 동원하다시피 하면서 그걸 성취해내고는 자랑 삼아 간증까지 하죠. 그러니까 세속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영악한 거예요. 지나치게 표현해서 미안합니다. 교회가 영적인 어머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얼마나 세상에서 영악한지 알고 있죠? 사실 이런 점에서는 교회가 어수룩해야 하는데 이런 데는 아주 영악해요. 반면에 교회가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는 문제는 모른 척합니다. 아주 모순이죠. 이에 근거해서 21세기에 접어든 한국교회가, 아니 한민족이 콘텍스트 속에서 구원론적 상수로 붙잡아야 할 주제를 몇 대목만 간추려 보려고 합니다. 세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타종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유럽이 아니기 때문에 타종교와 좋든 싫든 같이 가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정황에서는 우리가 오히려 소수종파라고 할 수 있어요. 기껏해야 20%, 가톨릭과 합해도 25%예요. 나머지는 다른 세계니까 유럽과는 완전히 다르죠. 역사도 가톨릭교회는 200년이, 개신교회는 10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종교 다원 사회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좋든 싫은 같이 가야 해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지는, 여태까지 행한 잘못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을게요. 심심치 않게 훼불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절에 들어가서 불상의 목을 자른다거나, 심지어 절간에 불을 지르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정신적으로 약간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그들의 행동은 교회에서 받은 신앙 교육의 열매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어요. 지금도 툭하면 설교 시간에 타종교를 비난하고 냉소하고 조롱거리로 만들잖아요. 승려가 회개해서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그게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진짜 승려가 아니라 가짜였을 겁니다. 기회를 봐서 적당히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이에요. 그런 사람을 앞에 세워서 부흥회를 연다는 것은 우습지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같아요.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이유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근본주의와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가장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혹은 타종교에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반론을 펼칠 수 있겠죠.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 통치 앞에서 놀라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것에 마음을 여는 것만도 우리에게 벅찬데 어떻게 타종교의 구원까지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또한 진리이기도 하지만, 타종교의 구원 문제는 이런 명제와 지평을 달리합니다. 기독교인이 주력해야 할 부분은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의 세계를 가열하게 넓혀가는 것뿐이에요. 타종교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말이죠. 만인구원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요. 하여튼 저는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만인구원론이 옳으면 여러분이 손해 보는 것 같나요?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예수를 모르는 거예요. 신앙이 뭔지 모르는 거죠. 접어두고요.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구원은 이미 결정된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열려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교회 조직이 이것을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정작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구원의 현실들을 열어가고 있는 고등한 타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하고 자연을 소비의 수단으로 여기는 오늘의 시대정신, 세속적인 시대정신이에요. 이것이 바로 신약성서가 대적하고 있는 오늘의 적그리스도죠. 타종교 문제는 구원의 현실들을 종말론적으로 담지하고 확보해야 할 21세기의 한국교회가 고민해야 할 주제입니다.

 

남북통일

두 번째는 남북통일입니다. 그것이 구원 전체를 담는 것은 아니지만 분단 체제라는 이 범주 안에서는 구원입니다. 이 범주가 우주론적인 범주로 나가게 되면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모든 민족들이 하나가 되고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이 되니까요. 이보다 범주를 줄여서 현재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구원은 남북통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북한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개심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하거든요. 부끄러워서 같은 목사라고 말하기조차 힘들 때도 있어요.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온전한 보수주의, 보통 복음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이 열려져 있어요. 그래서 가능성들이 보이긴 해요. 그런 문제들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관련해서 두 가지 관점으로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북한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잘살고 북한은 못산다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불쌍해서 도와주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자는 거죠. 둘째는 북한 문제를 선교전략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자는 겁니다. 지금 각 교단마다 통일이 되면 신의주에 교회를 세우겠다, 평양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식으로 선교 전략을 세웁니다. 어쩌자는 겁니까? 통일 이후에도 북한에 우리 남한과 같은 교파가 생긴다는 말 아니에요? 그걸 막아야 합니다. 최소한 북한만이라도 하나의 교회가 되도록 하고, 그것을 기초로 남북한이 하나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장로교니 감리교니 다 때려치우고, 한국연합교회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고요. 한국연합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같은 정도로 교파만 유지해도 좋겠어요. 지금 남한에는 제가 듣도 보도 못한 수백 개의 교파들이 있으니까요. 어서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지금 각 신학교마다 신학생들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데 이것도 근본적으로 문제예요. 어떤 사람들은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교회를 세워야하니까 신학생들이 많이 나와도 괜찮다는 말을 할 정도인데요. 이게 순진한 신자들에게는 먹혀요. 이렇게 남북한의 문제를 선교전략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말자는 거예요. 통일되면 가서 열매를 따먹겠다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제발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통일 지향적인 노력을 실제적으로 벌였으면 좋겠어요. 불이익을 받더라도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이 뭔지 알고 있죠? 제가 일일이 다 가르쳐 드려야 하나요?

한 가지만 말한다면, 북한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무조건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면 한국교회, 즉 한기총이나 한국교회협의회(KNCC) 같은 곳에서 북한에 대한 이해를 깔고 정부의 태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정치가들은 늘 정략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북문제도 정략적으로 이용하거든요. 지난 4-50년간 계속 그랬잖아요. 정부가 그렇게 나오면,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교회는 다른 차원에서 그 문제를 접근해야죠. 그런데 교회가 한 수 더 뜹니다. 교회는 통일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통일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서 남북통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남북통일을 위해 교회의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언뜻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걸 짚고 넘어갈게요. 가장 구체적인 실천 방안인데요. 한국의 모든 교회가 일 년 예산의 10분의 1을 남북통일 기금으로 내는 거예요. 제 의견 어떻습니까? 낭만적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냥 그런 쪽으로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한국 사회에서 한국교회 이미지가 정말 달라질 거예요.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건 정말 남한에 있는 민중이나 북한에 있는 민중이나 모든 백성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죠. 남북분단으로 인해 들어가는 사회 비용이 얼마나 큽니까?

 

생태문제

마지막으로 생태문제입니다. 내용인데요.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손님이다.” 신학적으로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잠시 빌려 쓰고 가는 거예요. 그런 차원에서 이 땅이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귀한 생명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뒤에 아름답다고 한 이 땅을 어떻게 거룩하게 여겨야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요? 이 대목은 제 강의안을 천천히 읽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들어보세요.

21세기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과제로 삼아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삼천리 반도 땅이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사실과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말씀했으며(마태복음 5:45), 바울도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로새서 1:16)이 모두 그로 말미암는다고 증언했다. 요한은 급기야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장)이라고 하나님의 전권적 역사를 강조하고 있는데도 오늘 기독교인들은 생태 문제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껏 해야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시고 싶다든가, 유기농산물을 먹고 싶다든가,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다. 지금까지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간의 쾌적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인데도 여전히 그런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비켜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생태계 접근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이 명제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편리한 삶만을 위해 지구를 소비하는 행위는 죄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 생명의 영적 메커니즘을 끊어내면 안 된다. 오히려 풍성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럴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한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공인 것처럼 지구를 혹사시켜왔으며 아직도 그런 작업에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그런 삶이 구원인 것처럼.

지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의미를 새겨야한다. 이 세상은 거룩하다는 사실을. 창세기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창세기 1:4,10, 18 외). 하나님이 보기에 좋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뜻이다. 이 지구에 속해있는 모든 존재들은 좋고 거룩하다. 나무, 새, 토끼, 고릴라는 거룩하다. 강과 산, 사막과 고원이 모두 거룩하다. 진딧물, 박테리아, 곰팡이도 역시 거룩하다. 땅도 거룩하며,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 온갖 세균도 역시 거룩하다. 생각해보라.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생물체가 썩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 지구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지구는 음과 양, 살림과 죽임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생명의 역학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생명의 땅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은 너무나도 명쾌하지 않은가. 편리하고 쾌적하고 건강하고, 더구나 오래 살겠다고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은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오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유달리 각별하다. 원칙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거나, 곤충이 발에 밟힐까 해서 짚신을 만들더라도 바닥을 성기게 하고, 뜨거운 물을 마당에 직접 버리지 않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전통이 유명무실하지만.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에스키모인들과 북아메리카의 인디안, 그리고 우리의 전통이라할 샤머니즘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생명사상과 소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도 비록 샤머니즘이 숙명주의적 세계관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을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몰아간다는 한계가 있지만, 생명사상이라는 점에서는 관심을 기울여봄직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티베트에서 실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은 죽은 자를 들판에 내놓아 새들이 쪼아먹게 하는 장례다. 상당히 미개하고 끔찍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의 유기적 순환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장례법이다. 지금 우리 식대로 해서 시체를 땅에 묻어 박테리아가 먹든, 아니면 그들 식으로 들판에 놓아 새가 먹든 결국 똑같이 먹히는 것이라면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타종교에 비해서 기독교가 생태문제에서 무관심한 듯 보이는 이유는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28)는 말씀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한 탓이다. 결국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근대주의적 주객도식 패러다임을 아무 비판 없이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받아들인 것도 그 이유다. 21세 한국 기독교는 이제 동양의 유기론적, 우주론적 패러다임을 성서해석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기초해서 인간과 자연을 통합시키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이 살아야할,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야할 삼천리금수강산을 말 그대로 비단과 수로 아름답게 가꾸어야하겠다. 이게 바로 땅의 구원이다.

유럽정신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헬라인들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생각해서 세계를 대상으로 간주하고 분석했으며, 히브리인들도 역시 하나님을 객관적 실체로 이해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인간은 당연히 세계를 대상으로 여긴다. 역사철학을 집대성한 헤겔의 경우에도 역시 테제와 안티테제가 대립된다. 이런 주와 객의 변증법적 발전이 바로 인간 역사라고 한다. 이를 主-客-도식(Subjekt-Objekt-Schema)이라 말하는데, 이런 패러다임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며 소모품이며 도구가 될 뿐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노자나 장자 같은 이들의 무위자연적 사고를 통해서 서구의 주객도식을 극복함으로써 땅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구원론적 지평

마지막으로 교회의 구원론적 지평에 대한 세 가지 관점입니다. 첫째는 영성의 회복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어떻게 기계화 되어 있는지 주술화 되어 있는지, 도구화 되어 있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둘째는 프락시스, 즉 봉사고요. 셋째는 정치성입니다. 교회가 정치권력을 잡자는 게 아니라 영적인 능력과 사랑과 구제와 봉사와 실천 등이 정치적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복지 같은 거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이명박 정부로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가 더 급격화 되고 사교육이 더 극심해졌죠. 교육 문제가 정치적이잖아요. 공교육을 강화하자고 한국교회가 똑바로 소리를 내야 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단 말이죠. 답답하니까 그만 두겠습니다. 인간 노동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알지도 못하고요. 더 기독교는 점점 구원의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연 문제도 다 정치적인 문제잖아요. 대운하를 하겠다고 하는데, 이걸 막으려면 정치적인 연대가 필요하거든요.

‘기독교가 뭐고’ 강의의 마무리로 삼아야할 화두는 ‘역사’와 ‘신비’입니다. 교회는 세계 역사와 단단히 연대해야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신비에 대한 환상을 붙들어야 합니다. 역사는 현실이며 신비는 꿈입니다. 역사는 아래로부터, 신비는 위로부터 옵니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신비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말합니다. 기독교적으로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며 신비는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로서 구원의 세계를 열어갑니다. 현실 없는 꿈은 몽상이며, 꿈 없는 현실은 허무입니다. 교회는 역사에 두 발을 딛고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가슴에 담아야합니다. 그 환상에 근거해서 2천 년 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돌아오는 주일 저녁에는 마지막 순서로 쫑파티를 해야겠는데, 어떻게 할까요? 사이버에서는 곤란하니까, 여러분이 각자 컴퓨터 앞에 먹을거리를 갖다 놓고 먹으면서 책거리를 하겠습니다. 마지막 시간으로 다음 주일 저녁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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