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강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292 추천 수 0 2012.06.19 23:00:33

제 40강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

오늘 샘터교회의 설교 본문은 사라와 하갈, 아브라함과 하갈의 관계에 얽힌 이야기였습니다. 잠깐 그 이야기부터 풀어갔으면 좋겠어요. 설교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가 오늘 강의 내용인 윤리와 연관이 있어서 이 두 관계를 설명해 볼까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저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은 종말까지 계속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열어갑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상당히 막막하고 답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끝도 없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거니까요. 사실 신학이라는 게 이런 점에서 보면 승산 없는 게임입니다. 신학만 그럴까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결국은 승부를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밖에 안돼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하겠어요? 부분적으로 어떤 흔적만 겨우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 실제를 붙잡기는 불가능하거든요. 여러분이 그걸 전제로 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뿐 아니라 이 삶 자체도 그래요. 우리는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고 18년 된 혈루증이 나은 여자라고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붙잡을 수 없어요.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저 흔적만 말할 수 있을 뿐이죠. 그런 점에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신기하기도 한 겁니다. 늘 새로워지니까요. 제가 뒤에 말해야 할 것을 미리 당겨서 하고 있네요.

본문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정확히 다섯 사람이 나온다고 봐야겠네요. 아브라함, 하갈, 사라, 이스마엘, 이삭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삭이 젖을 떼고 이유식을 할 때쯤 벌어진 에피소드예요. 이 성서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세 살 때 보통 젖을 뗀다고 하는데요. 이삭이 그 때 쯤에 이스마엘과 노는 것을 사라가 봤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다고 번역된 것 같아요. 그런데 공동번역에는 같이 논다고 되어 있네요. 어쨌든 본문의 앞뒤 문맥을 볼 때 이삭이 세 살이라면 이스마엘은 열일곱 살이 되었을 겁니다. 그 때 사라가 자기 아들과 이스마엘이 서로 놀고 있는 걸, 혹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는 걸 봤다고 하는데요. 이미 열일곱 살이나 된 아이가 세 살짜리를 놀리겠습니까? 이미 집안 사정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하갈이 사라의 몸종이었으니까 이스마엘도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겠죠. 홍길동의 위치인가요? 그러니 그렇게 이삭을 심하게 놀리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하여튼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사라가 이스마엘과 이삭이 서로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빴다고 합니다.

이 본문을 잘 읽어야 하는데요. 성서 기자들은 생략을 잘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그냥 지나가요. 이렇게 저렇게 편집을 하는 거죠. 그걸 잘 뜯어보면 성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되는데, 이게 중요합니다. 제가 언젠가 말했죠. 복음서든 다른 본문이든 다 마찬가지인데요. 성서 기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한 말씀들이 복음서에 많이 나오는데, 성서 기자가 왜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인식했을까 하는 거죠. 예수님이 말한 실증적 사실을 우리가 파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뭔가를 말했고 그 말들이 구전되어 내려온 것을 성서 기자가 잡아채서 예수님의 생애 안에 넣고 글을 썼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기자가 중요한 거죠. 하갈과 사라,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성서 기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요.

사라가 볼 때는 자기 아들이 이스마엘과 놀고 있는 게 기분이 나빴고, 이스마엘이 자기 아들과 똑같이 상속자가 되는 게 불만이어서,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그 모자를 내쫓아버리도록 하잖아요? 이것만 보면 사라가 굉장히 못됐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도 괴로워했다고 해요. 아내의 말에 넘어간 건지 아브라함 자신도 그런 판단이 들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쫓아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쫓을 당시에 이미 아브라함은 제법 재산을 불린 상태였어요. 아브라함은 재테크에 능했던 사람 같아요. 아브라함처럼 구약에 나오는 많은 부자들, 혹은 정치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야욕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을 너무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해요.

요셉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는 거, 알죠? 이집트에 들어가서 꿈을 해몽하다가 출세해서 국무총리까지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많은 다른 사정들이 있었을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건 잘한 일이기도 하지만 과연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냉정하게 살펴야 하거든요. 요셉은 이집트에 7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 매점매석을 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폭리를 취하는 장사를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당시에 자영농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농노가 되었잖아요? 이 모든 것이 요셉을 통해서 된 거예요. 이런 경제 정책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요셉을 이상화하지 말라는 거예요. 요셉의 꿈, 이런 걸 신자들에게 설교한다는 건 성서를 견강부회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성서 기자는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니까요. 위인과 일반 소시민들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도 않아요. 물론 보기에 따라서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또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지만, 시운이 맞아서 영웅이 나오거든요.

또 솔로몬 왕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건 설교에서 몇 번 다뤘으니까 설명하지 않을게요. 성서 기자가 솔로몬 전승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냈는지 잘 보세요. 여러분은 아마 솔로몬이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지혜를 구한 내용을 보면 그가 괜찮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는 어머니 밧세바와 나단의 계략에 의해서 어부지리로 왕의 자리를 얻었는데요. 간단하게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꿈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꿈을 꿨다는 거예요. 이 꿈은 개꿈일 가능성도 많고,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많아요. 무의식의 발로가 꿈이잖아요. 솔로몬은 자기 왕권의 도덕성이나 정당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고 민중들을 설득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이집트 문명이나 잉카 문명의 어떤 문서에도 비슷하게 나오거든요. 자신의 왕권을 민중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 구조가 비슷해요. 그러니까 솔로문의 꿈에 너무 큰 비중을 두지 마세요. 정치가들의 정략적인 자기 해명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둘째는 이 지혜라는 게 성서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야기예요.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 때 했던 한 이야기를 아시죠?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지혜로워진다고 했어요. 지혜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의 탐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해석이 100%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조직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성서신학에 대해서 많이 부족한데요. 구약 학자들이 엉뚱한 해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겁니다. 지식이 많다거나 권력을 쥐었다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들을 하나님의 축복과 일치시켜서 성서를 보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재테크에 밝았어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 갔잖아요?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함께 말이죠. 그는 하란에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는 더 많이 벌었고요. 성실해서 돈을 벌었을 수도 있지만, 남을 속였을지도 모릅니다. 성실과 기만과 운,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맞아 떨어졌겠죠. 아브라함은 부자였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면서 약간의 음식만 주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어요. 길을 가다가 먹을 수 있는 떡 덩이 얼마와 물 한 부대라고 말이죠. 성서 기자가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행간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주 매정한 인간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줄여서 해야겠네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죠. 사라는 아브라함 정도는 아니더라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로서 큰 손색이 없습니다. 사라하면 우리에게 늘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고요.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는 행동을 보세요. 왜 성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했는지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성서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밑천 떼 주고, 먼 길 가면서 타라고 낙타도 줄 것 같아요. 하갈과 이스마엘이 브엘세바에서 물도 다 떨어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데, 그 때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줍니다. 아마 이 사실을 말하고 싶었나봅니다.

저는 인간의 행위, 다시 말해 윤리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윤리 허무주의라고 할까요? 윤리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나이브한 도덕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근거한 실천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진보적인 목사님들과 연계해서 같이 활동도 하고 있고요. 지금 촛불시위도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동의하면서 활동하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저는 우리가 전향적으로 이 역사를 개혁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궁극적인 사실 앞에서 인간 행위를 보자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전제해야 하니까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가능하겠냐는 거예요.

 

인간 행위의 잠정성

제가 38강 ‘하나님 나라 윤리’에서 판넨베르크의 글을 인용하면서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의 특징이 인간 행위의 잠정성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행위의 잠정성! 우리가 하는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볼 때 잠정적이라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냐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잠정적이라고 봐요.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기독교인들의 세계 인식입니다. 어느 것도 여기에서 제외되는 건 없어요. 율법도 잠정적이거든요. 율법도 사실은 윤리 문제이고, 실정법을 포함한 불문법까지 포함해서 그 모든 것들을 잠정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국가도 잠정적이죠. 기독교인은 애국자가 될 수는 있지만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죠. 심지어 교회도 잠정적이에요. 더 나아가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교리도 여전히 잠정적입니다. 물론 율법이나 국가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잠정적인 거죠.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롭다고 인정하심,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 섭리, 하나님이 종말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 인식의 논리적인 해명이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말에 자기를 완전히 계시할 하나님을 완전히 인식할 수 없죠. 그러니 어떻게 그 인식에 기초한 논리적 해명인 교리가 완전할 수 있겠어요?

이게 신학적인 표현이라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좀 직접적으로 말해 볼까요? 삼위일체를 예로 들기는 좀 그런데, 이 교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신학개념이니까 이걸로 설명할게요. 과연 삼위일체 개념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해명한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이게 최선인 거죠. 그러나 삼위일체 개념이 하나님을 정말 명실상부하게 아주 실증적으로 해명한 것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우리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본질이 동일하고 위격이 삼위로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우리가 손에 딱 잡을 수는 없는 거죠. 그 모든 것은 나중에 하나님이 온전하게 자기를 드러낼 때,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테니까, 그때 가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잠정성을 늘 염두에 두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말이냐? 절대 그런 뜻은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잠정적이긴 하지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인식과 실천과 치열한 노력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거기에 참여합니다. 그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 우리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해요.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우리가 분명히 두 발을 딛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고요.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식이 늘 잠정적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겁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부분적이고 잠정적이라고 해도 그게 하나님과 온전하게 소통하는 겁니다. 너무 확신에 차 있으면 열광적으로 돼버리고요. 너무 인식론적 한계에만 치중하면 불가지론이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돼요. 여기에 긴밀한 긴장관계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알면서도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소통과 경험들이 필요한 거죠.

 

인식론적 한계 문제

이런 의미에서 윤리의 불가능성을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행위가 위선적일 때가 많다는 겁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다수가 위선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정말 우리가 선에 돌입해서 선을 행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의식하거든요. 예수님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요. 이 말은 자기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게 선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를 잘 돌리잖아요. 선인지 아닌지 딱 골라내서, ‘내가 이 정도 하면 인격적인 사람이고, 기독교인으로서 이 정도하면 되겠지.’라고 하는 게 많잖아요. 저도 목사로 살지만 그렇더라고요. 여기에서 잘 벗어나지가 않더군요. 아마 여기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게 과장이기는 하지만 거의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거예요. 정말 성령과 일치가 되어 살았다고 하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나 테레사 수녀라도, 혹은 이름 없이 살았던 많은 사람들도 결국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어쩌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특이한 경우고요. 그런 경우는 완전한 엑스터시(ecstasy)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거의 자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경지, 예를 들면 바보 천치가 되든지 마약중독자가 되든지 하는 방식으로 영과 소통해야 하는데, 과연 그게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삶이냐에 대해서는 제가 확신이 없어요. 중세 신비주의자들 중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해요. 그러기 위해서 자학과 금욕 속에 빠지거든요. 다리를 잘라낼 정도로 자기 육체를 학대하면서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려고 한 거죠. 여성 신비주의자들 중에서는 폐결핵 환자의 침이나 가래를 먹는 방식으로 자기를 없애려는 신비 경험도 했다고 해요. 그렇게 극단적으로 하지 않는 한, 평상시에 인간은 늘 머리를 굴립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위선에 빠질 때가 많죠. 이 말은 기본적으로 곧 우리가 이타적일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이타적인 삶, 완전한 이타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게 윤리적으로 살기 힘들다는 겁니다.

둘째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선한 의지로 행위를 했어도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이렇게 분완전합니다. 좋은 뜻으로 일을 했어도 그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거든요. 이런 점에서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거죠. 잠정적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기독교인들이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을 만나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자칫 제 얘기가 윤리적인 행위가 필요 없다고 전달될까봐 조심스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저는 윤리적인 행위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라는 게 과연 윤리적일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이런 점에서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는 노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무위, 어떤 것을 억지로 하지 않지만, 무불위, 하지 못함이 없다는 뜻이에요. 저는 이 말을 듣고 성령론적인 윤리와 딱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실제로 윤리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윤리적이라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니까, 위선에 가깝거든요. 그러면서 사람들을 자꾸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해요. 예를 들면 삼강오륜 같은 거요. 이게 바로 율법입니다. 토라나 십계명과 같아요. 이런 것들은 오랫동안 인간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를 가장 가치 있게 끌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일종의 인류 문명의 열매들이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많이 발전한 겁니다. 그것이 법이죠. 옛날에는 법전이라고 했고요. 함무라비 법전이나 로마법, 구약의 십계명 등이 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법, 규범, 그러니까 위(爲)죠.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동서양에 따라 내용에는 좀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틀이 있어야 인간다워지고 사회가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가 보기에는 그런 틀 자체가 우습다는 거죠. 그게 정말 인간을 살리는 거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노자와 장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살 수 있는가 하면, 그건 또 불가능한 거죠. 이건 어떤 지평에 있어서 진리예요.

바울의 말도 그런 점에서 연관이 됩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건데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움을 받는다는 율법 신앙에서 믿음으로 나가니까요. 행위가 아니죠.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무위이무불위 개념과 통합니다. 그러니까 공자의 가르침은 구약의 율법과 통하고 노자나 장자는 오히려 바울의 가르침과 통해요. 따라서 윤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틀, 규범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영이니까요. 성령을 생각할 때 꼭 자유를 생각하세요. 결국 기독교의 윤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는 차원이라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차원인 겁니다. 궁극적인 어떤 사태 앞에서 우리가 하는 행위의 잠정성을 말하는 거예요. 전달이 되었나요? 기독교의 윤리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윤리적 근거를 놓아야 합니다. 이게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잘 정리가 되지를 않네요. 그러나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정리를 해야겠군요. 우리 행위의 잠정성, 즉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가 좋은 일을 하더라도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이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기독교의 윤리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토대에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와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거지,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이 세상을 개량함으로써 참된 선을 생산해 낼 수 있겠냐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 개량해내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려야 해요.

춘향전을 예로 들어 볼게요. 사랑을 나눴던 남자가 서울로 과거를 본다고 떠났고, 남원에 남아 있던 춘향이는 사또의 수청을 들라는 명을 거절했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모든 문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었어요. 뭐로 해결됐나요? ‘암행어사 출두’로 해결되었죠. 제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혹은 예수님이 온다는 것이 이런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사랑했던 남자가 암행어사로 출현하면서 춘향이가 살아가던 모든 질곡과 한계들이 일시에 해결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개입하는 것으로만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이걸 종말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의 재림이라고도 하죠. 또 다른 단어도 생각나나요? 심판이 생각난다고요. 좋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단어들을 너무 낯설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독교 신앙은 늘 낯설게 생각하기는 해야 하는데, 제가 낯설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세상은 종말을 맞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밤에라도 예수님이 재림할 수 있어요. 내일부터라도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것들을 어린아이들이 읽는 동화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재림, 종말, 심판 같은 것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건지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생각을 하라는 거죠. 이런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저절로 우리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을 정확히 뚫어볼 때 생각할 수 있게 돼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때를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카이로스라는 개념이 이에 해당되겠죠. 카이로스는 의미 있는, 해석된 성숙한 시간인데요. 이와 연관해서 다른 단어 생각나는 사람 있어요? 없군요. 맞추면 제가 특별 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다행이네요. ‘파루시아’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때를 우리가 기다리며 사는데요. 우리가 이 부분을 어떻게 리얼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러지 말고 리얼하게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그게 정말 리얼하게 내 운명과 삶 전체를 끌어가는 영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느냐는 거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좀 더 설명해야겠네요. 이것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두 번 설명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저도 다 모르기 때문에 그냥 단편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있어요. 아버지는 이 세상을 종말론적으로 완성하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가 바로 종말인데요. 그게 언제일까요? 어떻게 완성될까요? 세계의 완성이 정말 뭘까요? 생명의 완성이 뭘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실까요? 지금 우리는 생명 속에 있습니다. 흡사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듯이 우리가 생명이라는 바다 속에 들어가 있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서 헤엄치고 있는데 아직은 여기가 완성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죽을 수밖에 없고 먹어야 되고 그립고 아프기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지금의 창조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사건이 하나님 나라라는 거죠. 아버지는 창조자니까 종말론적이라고 하면, 늘 궁극적, 혹은 성취, 혹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쪽으로 이 종말론의 개념을 풍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런 차원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려면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알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것을 완성해가실지에 대한 설레는 기다림을 가져야 합니다. 그냥 이게 좋다는 게 아니라요.

그 다음에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분이에요. 재림은 그만두고 심판에 대해서 좀 말하죠. 심판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옥황상제를 생각하나요? 또는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을 생각하나요? 제발 그런 건 내려놓으세요. 심판이 뭡니까? 이것은 진리가 드러나는 거예요. 진리, 생명의 알맹이, 가짜 생명이 아니라 진짜 생명이 드러나는 것, 그게 심판이죠. 우리가 심판을 받았다,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세계로부터 거부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을 고대인들이 심판이나 지옥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이죠. 아들의 재림과 심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에요.

그 다음에 영이 있어요. 성령은 우리로 뭘 깨닫게 합니다. 진리를 알게 해요. 그런 차원에서 성령은 종말론적 리얼리티를 알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표현이 정확한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근본 뜻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모든 것의 실체를 본다고 합니다. 잠정적이지 않는, 목마르지 않는, 자기의 안과 밖이 혼란스럽지 않는, 정말 일체가 되는 어떤 생명과 직면하게 되는 거죠. 그게 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부분적이지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고, 2천 년 기독교 역사 동안 신학이 해명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로 존재하고, 나라는 통치이고, 통치는 힘이에요. 생명의 힘이에요. 하나님은 저기 하늘에 따로 있고 그가 이 세상을 통치해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통치가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과 세상이 일치가 되는 거죠. 세계가 곧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해야겠네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와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 나라는 그분이 와봐야 알게 됩니다. 이상하네요. 제가 아까는 이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고 보니까 너무 시시한 것 같네요. 그런데 아는 것과 실질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다르거든요.

오늘 이야기를 이제 정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는 희망 속에서 오늘을 살면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의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 진리와 생명이 드러나는 심판, 아주 궁극적 실체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을 안고 오늘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만나고 투쟁하고 기다리며 사는 겁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빠지지도 마세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안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요즘 촛불정국이 계속되고 있어요. 여러분,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은 감당하고요. 또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서 영성이 필요하니까 그 부분들도 놓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일주일 동안 잘 지내고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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