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신학과 과학(교정)

신학입문 조회 수 4749 추천 수 151 2004.11.24 17:36:11

12

신학과 과학

 

 

호킹과 신

 

20109월 즈음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리어나드 믈로디노프와의 공저 <위대한 설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서 신 존재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된 적이 있다. “뭔가 흥분될 만한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우주가 지속되기 위해 신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미국 ABC 방송 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은 신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그 방송은 호킹이 오랫동안의 우주연구와 새로운 발견을 통해서 결국 우주 창조에 신을 필요하지 않다는 믿음에 이른 것이라고 해설을 곁들였다.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라고 말했다. 하나는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고 더욱 큰 전체의 일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열망하지만 성취되지 않는 윤리질서나 생활방식의 권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일종의 종교성이고, 후자는 윤리성이다. 이런 언급을 신학적인 전통에 비추어 보면, 종교성은 쉴라이어마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고, 후자는 칸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호킹이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과학자다. 과학자는 기본적으로 신학자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물리적 원리들을 찾는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추적하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과학의 세계에서 뛰어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가 하는 일은 바로 신을 증명하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일부 과학자가 과학의 힘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호킹의 발언을 불안하게 보는 이들이 많다. 어떤 학자가 신을 부정한다고 해서 신이 부정되거나 인정한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정하는 그 작업이 궁극적으로 긍정하는 일이 될 것이고, 거꾸로 인정하는 그 작업이 때로는 부정하는 일도 된다. 그러니 우리 신학도들은 몇몇 학자들의 발언으로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호킹이 1988년의 저서 <시간의 역사>에서는 신을 전제하다가 이번 <위대한 설계>에서는 신을 부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호킹이 신을 긍정하거나 부정한 건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신학자는 아니다. 그는 우주 물리학에서는 전문가이지만 신학에서는 비전문가다. 이것이 문제다. 물리학의 전문가는 물리학에 대해서만 말하면 된다. 비전문적인 부분까지 언급하면 자기도 모르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물리학과 신학에 대한 앎에서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한쪽의 앎으로 다른 쪽을 재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도 안티-기독교 사이트는 기독교의 비합리성, 반과학성,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는 글로 도배 되다시피 한다. 수년 전 인도네시아에 덮친 쓰나미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 김 아무개 목사의 설교를 기준으로 기독교 전체를 매도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 현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근거로 기독교를 재단하는 것은 오류다.

호킹이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 문제는 자기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주장은 신 없이 세계의 기원과 원리를 완벽하게 해명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과학을 통해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곧 완전한 무에서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으로 유신론적인 신은 해체될 수 있지만 성서의 창조 신앙, 또는 성서의 하나님 신앙이 해체될 수는 없다. 신학은 유무신론 논쟁을 벗어난 지 오래 된다. 교회 내외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유신론적이고 인격적인 신 개념을 넘어섰다. 호킹이 부정하고 있는 그런 신은 이미 신학에서도 부정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구닥다리신 표상에 근거해서 우주 해명에서 신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흘러간 노래를 다시 부르는 것은 아닐는지.

사족- 스티븐 호킹이 아직까지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과학과 신학

 

과학과 신학 사이의 논점을 보다 명확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창조와 진화에 대한 문제는 1859년에 다윈이 쓴 <종의 기원>에 의해서 격렬한 논쟁의 주제가 된 다음에 지금까지 150년 가까이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창조론자들은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진화론자들은 자연의 진화 질서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양측 사이에는 흡사 기차 레일처럼 그 어디에도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창조, 진화 논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제로섬 게임)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창조과학회에 속한 이들처럼 근본주의적인 창조론자들이 아니라면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창조과학회도 역시 종 사이의 진화를 반대하는 것이지 부분적인 진화 현상 자체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진화론자들 중에서도 창조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진화의 과정을 창조 행위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근에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노아의 방주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어키의 아라랏 산을 탐사하기 위해서 자원자를 모집했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창조과학회가 이런 탐사 작업을 전개한 적이 있다. 노아 방주의 파편이라며 나무토막을 그 증거물로 내놓기도 했다. 창조과학회 회원들은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해달라는 여호수아의 기도가 성취된 증거를 약간의 우주 물리학적 증빙을 통해서 사실이라고 강변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 자체가 과학적으로도 모호하거나 일방적인 것이겠지만 설령 과학적 타당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신앙적으로 바른 태도가 될 수는 없다. 특히 모든 문제를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의 정서적 경향 때문에 이런 근본주의적 행태가 상당 부분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아무리 굳은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한 기독교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성서를 통해서 과학을 재단하는 그들의 일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객관적인 과학 사실을 논증하는 문서가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대한 영적인 체험의 진술이다.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태도를 가르치고 있지 창조의 구체적인 방식을 논증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서와 기독교의 2천년 역사에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았다. 성서 기자들은 과학자들이라기보다는 역사가이며 신학자들이라는 점에서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 구조의 우주관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지동설주의자들을 비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역시 신학자들은 과학에 대한 섣부른 판정을 조심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과 종교(신학)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자연과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을 맹목적인 신앙으로 압박을 가하던 기독교가 근대주의 이후로 더 이상 그런 권위가 먹혀들지 않게 되자 이 세상 학문과의 사이에 담을 쌓아버리고 개인의 주관적 실존에만 신앙의 중심을 두게 되었는데, 이것도 역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분명히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과학자와 신학자는 분명히 다른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과 신학은 같은 길을 간다. 과학은 이 세상의 물리적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궁극적인 내용에 접근하는 것이며,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에서 이해된 도그마에 근거해서 오늘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 모든 것의 근원자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진화론만 해도 그렇다. 생물학자들은 그 진화의 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그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래의 힘을 찾아갈 수 있다. 물질의 근원을 해명해나가는 물리학도 역시 원자와 그것보다 작은 소립자의 세계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훨씬 타당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우리 신학자들은 그들의 도움으로 그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이 세상에 훨씬 명쾌하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학과 신학이 늘 이렇게 상부상조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지 않는 과학자들은 이 과학의 원리를 절대화함으로써 인격적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것이 어떤 원리와 사실을 밝혀내는 그 순간에 그것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과학을 통해서 절대 생명의 근원자라 할 하나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 신학자들은 공연히 잘 알지도 못하는 과학 행위 자체를 놓고 그들과의 부질없는 논쟁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과학적 노력에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우리의 역할을 제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역할은 소극적인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면에서 신학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하나의 진리로 집중시키는 적극적인 과업이다.

 

세계의 양면성

 

우리가 자연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해서 해명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과 아울러 자연과학이기 때문이다. 원래 헬라 시대에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구분이 없었으며, 그런 전통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활동하던 17세기까지 유효하며, 오늘도 역시 과학철학을 통해서 과학과 철학의 경계선이 모호해진 상태이다. 그러나 헬라와 중세기에 이해되던 과학과 철학의 관계는 오늘의 관계와 분명히 다르다. 중세기까지는 그들의 작업 자체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때에 비해 월등히 전문화한 오늘에는 서로의 영역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구분된다. 다만 이런 전문화한 지식이 배타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를 간학문성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런데 자칫 신학이 과학의 세계까지 자신의 도그마로 재단하려고 한다면 결국 이 두 학문의 접촉점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이런 문제는 어느 정도 설명되었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이런 창조론에 근거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어야 할 이 세계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검토는 자연과학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영적인(철학적) 직관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직면해서 살고 있는, 그 안에 살고 있는, 그렇게 던져져 있는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가리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런 현상의 궁극적 토대는 무엇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과 강과 숲과 도시가 너무나 익숙한 대상이기 때문에 거기서 평안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약간만 시야를 다르게 하면 이 세계는 놀랍도록 황홀하기도 하고 충격적으로 불안하기도 하다.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유일한 보고이기 때문에 황홀하지만, 그 생명의 토대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점에서 불안하기도 하다. 이 세계는 일종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일단 우리의 세계를 지구에 한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자. 만약 다른 별에 살고 있던 어떤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했다고 하자. 그의 눈에, 그에게 눈이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지구는 어떻게 보일까?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지구의 어른들은 모두가 고정 관념 가운데서 실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다고 설파되고 있다. 어느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사물의 참모습을 직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시각이 고착화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마 외계인에게 이 지구는 놀라운 세계로 보일 것이다. 생명 현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찬란한 색은 지구에서만 가능하다.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깊은 숲 속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명체로 가득한 이 지구가 얼마라 경이롭게 보이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생명 현상이 지구 자체에 확실한 토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어느 것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결정적으로 지구는 태양에 의해서만 생명을 생산해낼 수 있다. 태양으로부터 아주 절묘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에는 이런 생명이 등장하고 보존될 수 있다. 만약 태양 빛의 10%만 줄어들거나 늘어난다면 이 지구는 전혀 다른 별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앞으로 태양의 수명이 끝나게 될 45억년 후가 되면 지구도 역시 생명 없는 별이 되든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단지 그때까지만 생명을 생산할 수 있다. 어쩌면 그때까지 갈 필요도 없이 빙하기가 되면 이 생명 현상에 또 다른 결정적인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렇게 화려하고 풍요로운 생명 현상의 토대가 자기 자신에게 놓여 있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은 이 지구의 한계를 드러내 준다.

 

세계의 거시적 차원

 

우리의 관심을 좀더 넓은 곳으로 확대해보자. 지구만이 아니라 태양계까지 확대시켜보자. 은하계를 비롯해서 우주 전체에까지 시야를 넓혀보자. 그 우주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있는가? 언제 시작했고 언제 끝나는가? 시작하기 이전은 무엇이고 끝난 다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궁극적인 의문점을 완전하게 풀어낼 길은 없다. 오늘의 첨단 우주 물리학이 우주여행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것을 풀어낼 길은 아주 요원하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양에 가장 가까운 별이 2,3광년 거리에 있다고 하는데, 어느 세월에 그 별을 탐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구의 형제들인 금성과 목성을 알기도 힘든 마당에 말이다. 1광년의 거리는 60×60×24×365×300,000km이다. 9468억 키로 미터다. 우주 탐험이라는 것은 모래 한 알로 사막 전체를 해명하려는 작업보다 훨씬 힘들다. 그러나 언젠가 먼 미래에, 광속에 가까운 비행체를 만들어서 그런 연구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주의 비밀이 벗겨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광속의 비행체를 만들 수 없는 가장 근본 이유는 무한에 가까운 질량의 물질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에너지가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광속을 현실화시키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필요하다. 예컨대 현재의 비행기 소재로는 아무리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더라도 초속 30만 키로 미터를 낼 수는 없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을 정복했다지만,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데도 그런 표현을 쓰는 게 우습지만, 그 이후로 30여 년이 흘렀어도 지구와 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달에 대한 몇 가지 지질학적 정보를 얻었을 뿐이지 지구와 달의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앞으로 백만 년 후에 가장 가까운 별을 여행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우주를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의 미시적 차원

 

그런 거시(巨視)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어쩌면 미시 물리의 세계를 아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른다. 우주는 너무 멀어서 힘들고, 미시(微視)계는 너무 작아서 힘들다. 소립자의 세계가 약간씩 벗겨지고 있지만 그것으로 물질의 세계가 완전히 드러났다고 믿는 물리학자는 없다. 작은 세계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는 것만큼 우리에게 드러날 뿐이다. 우주가 무한히 큰 것처럼 미시 세계도 역시 무한히 작다. 무한한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현재 우리의 지식에 비하면 무한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과학의 작업이라는 것은 그것이 활발하면 할수록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뿐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욱 많아지는 세계다. 거시든지 미시든지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과학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과학이 존재자의 근원을 완전히 밝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할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세계와 자연, 그리고 그것을 현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존재는 인간의 활동인 과학을 근본적으로 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미 구약성서 기자들도 이런 세계에 대한 무지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주변의 다른 종교들처럼 자연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신의 피조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연의 광대함 앞에서 그들은 놀라워했고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놀라움으로 이어졌다. 태양, 바다, 화산, 지진, 홍수, 전염병 앞에서 성서 시대의 고대인들이 어떤 두려움을 가졌을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모든 세계의 존재가 얼마나 신비한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신비의 힘이 바로 하나님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신앙을 키워나갔다. 비록 오늘의 과학이 이런 자연 위력을 상당 부분이 설명해주었지만 고대인들이나 우리가 가릴 것 없이 여전히 이 세계와 그 존재의 신비 앞에서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철학, 과학, 신학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이런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우연하게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나? 아니면 어떤 인격체의 의지에 의해서 이렇게 되었나? 철학자들은 이런 세계의 보편적 근거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려고 애를 쓰는 이들이다. 동양 철학자들은 일단 접어두고 서양 철학자들만 잠시 살펴보아도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말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이 연원하고 있는 그 어떤 실체가 있다는 의미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또는 반복적으로, 혹은 우연하게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는 이 세계가 바로 이데아에 의존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편 탈레스 같은 이들은 만유의 본질을 물이라고 했으며, 헤라클레토스는 불이라고 -이는 곧 변화와 생성이라는 뜻인데- 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원소라고 했다. 헬라 철학자들은 물, , , 공기 등,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설명해보려고 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철학자들도 역시 그렇다. 중세기를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을 비롯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로크 같은 이들의 경험론도 역시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밝혀보려는 철학사와의 연관 선상에서 이제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칸트의 선험적 이성이나 헤겔의 절대 정신도 역시 이 세계 현상 앞에서 겪게 되는 인간의 당혹감을 나름대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생물학과 물리학은 전문가가 아닌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물질과 생명의 세계를 풀어나가고 있다. 유전공학, 양자역학, 장이론 등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태 앞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런 세계를 외면할 수는 없다. 이런 철학과 과학을 종교적 권위로 재단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별 탈이 없었지만 계몽주의 이후로 교회는 이 세상의 문화 앞에서 발언권을 대폭 빼앗겨버렸다. 이런 결과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 하나님이 철학과 과학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들과 더불어서 신학이 감당해야 할 고유한 작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미 앞의 강의에서 철학과 과학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는 점은 확인된 것이니까 접어두고, 신학이 감당해야 할 보다 근원적인 대목을 짚는 것으로 오늘의 강의를 끝내자. 그것은 곧 철학과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런 학문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사태에 주목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을 표상(表象)적 사유라고 했으며, 과학을 계량(計量)적 사유라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철학은 이 세상을 객관적 대상으로 놓고 그것을 본질을 파악하고 있으며, 과학은 그 세상을 수치로 객관화하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이 일단 매우 엄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작업만으로는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인 사태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게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즉 철학과 과학만으로는 존재 망각의 사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이 세계가 우리의 표상적 사유와 계량적 사유에 의해서 밝혀지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면 우리의 모든 철학과 과학 작업은 근원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원적 사유를 통해서 우리가 존재의 밝힘 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런 시원적 사유는 이 세상을 객관화하고 인간의 주관적으로 표상하고 계량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말건냄에 응대하는 것이다. 이를 기독교 신학의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계의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과 과학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엄밀한 학문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 세계를 인간이 주체로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존재 역운에 귀를 기울인다면 철학과 과학은 진리에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철학과 과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라는 목표를 상실하지 않도록 동기 부여해야 한다. 이런 동기화 작업은 배타적 독단론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론에 근거를 둘 때 실효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28일,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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