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1, 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3월3일)

조직신학 조회 수 7936 추천 수 126 2005.02.11 23:18:03
신학이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2004년2학기 말에 두 명의 신학생이 각각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dabia.kehc.org)에 질문한 것은 한데 묶어 대답한 내용이다. 아마 신학생이라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의문을 끝없이 갖게 될 것이고, 나름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 앞에서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는 단순히 ‘믿음’으로 해결하라든가, 또는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충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신학 공부를 어느 정도 해결한 학생들도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신학적인, 혹은 신앙적인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숙하게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학과정에서 신학적 사유를 충분하게 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 학기 동안 조직신학(1)을 공부하게 될 학생들이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이 대답을 신중하게 따라서 읽고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신학의 길잡이는 주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송 재왕, 이 동균 군에게!

신학생들의 문제
송 군은 지난 가을 학기에 내게서 <신학과 철학>을, 이 군은 <신학입문>이라는 수업을 들었네. 송 군은 작년 가을 학기에 이미 <신학입문>을 들은 적도 있지? <신학입문>은 신학 초년생들에게 신학 전반에 대한 개론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최소한 7년 이상 신학을 공부할 사람들에게 신학의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과목보다 중요하다네. 독일 신학대학교에서도 이런 과목은 대개 원로급 교수들이 맡고 있다네. 다른 학문도 그렇지만 신학도 역시 그 토대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지.
그런 신학 초년생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지. 한 부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위해 들어온 3,40대 학생들이 있네. 앞에 속한 학생들은, 대학생인 내 큰 딸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바처럼 본질에 대한 사유(思惟)가 전혀 없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신학생이 되었지만 신학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대충 시간을 보내고 있지. 인생살이의 경험이 제법 많은 뒤에 속한 학생들은 신학에 대해서 어린 학생들에 비해 훨씬 진지하긴 하지만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인 근본주의에 지나치게 오랫동안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학을 향해 전투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네. 어린 학생들은 생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이고, 나이 든 학생들은 본질적이지 않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걸세.
신학생들이 어떻게 바른 신학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네. 왜냐하면 이 물음은 겉으로 보면 신학 방법론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네. 어떻게(how)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곧 신학이 무엇(what)인가 하는 물음과 다를 게 하나도 없네. 신학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 과정이 곧 신학 하기의 방법이니까 이 두 물음은 내용적으로 결탁해 있는 걸세. 신학(神學, theos-logos)이라는 터미놀로지에 근거해서 가장 소박한 차원에서 이 물음에 대답한다면 신(神)과 로고스(logos)의 리얼리티와 의미, 그리고 그것의 상호관계를 심층적으로 인식하고 해명해나가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신학 공부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네. 그 개념을 이렇게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직면해야 할 문제들이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네. 그 중간을 생략한 채 결론을 말한다면 결국 우리는 ‘신비’와 만나게 된다네. 로고스(언어, 이성)를 말하는 신학이 결국 신비로 들어간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하고 그의 나타남을 기다려야 할 하나님은 우리의 그 어떤 사유나 언어로도 범주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라네. 그 이유를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한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계내존재’(in der Welt Sein)이기 때문이네. 물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가 물 밖의 인간을 규정할 수 없듯이 신을 해명하는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이라는 실존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신학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게 그렇지는 않네. 신학은 하나님이 왜 신비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가장 궁극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네. 아마 자네들은 내 말을 실감하기 어려울 걸세. 이 문제는 일단 10년쯤 뒤로 미루어 두게.
자네들이 질문한 것들에 대해 대답을 주려다가 내 글이 곁길로 흘러든 것 같네. 그러나 관계없는 것은 아니지. 결국 우리가 공부해야 할 것은 부분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사안이라기보다는 신학 하는 전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자네들의 질문과 내가 위에서 개론적으로 설명한 내용들이 깊은 연관이 있다네.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 자네들의 질문을 좀 직접적으로 다루어보세.
송 군의 질문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공경’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 군의 질문은 기독교의 몇 가지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들을 새로운 진리의 수호자처럼 선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 소종파에 대한 것이었네. 송 군은 여기 홈페이지와 메일과 인쇄물을 통해서 세 번에 걸쳐 궁금증을 토로했고, 이 군은 홈페이지에 매우 절절한 마음을 담아서 질문했네. 이 군이 질문한 하나님의 교회는 아마 안식일 교회, 여호와의 증인, 지방교회, 구원파 등등, 여러 사이비를 총망라한 어떤 소종파 같이 보이네. 어쨌든지 두 사람의 질문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 속내는 ‘붕어빵’처럼 닮은꼴이네. 송 군은 가톨릭을 비판한 것이고, 이 군은 우리 개신교의 비판 앞에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었네. 두 사람 모두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혹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네. 송 군은 가톨릭을 공격하느라 마음이 뒤숭숭하고, 이 군은 공격을 받아서 열을 받고 있을 뿐이지 사실 별 것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뿐이네.

역사 해석학
여보게들, 역사를 보게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를 비롯해서 기독교도 역시 역사적 종교라네. ‘역사적’이라는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네. 일차적으로는 기독교는 하늘에서 한 순간에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과정에서 출현했다는 말이지. 일단 자네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겠네. 교회가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나?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교회를 설립할 의지가 있었을까? 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십자가로 처형당하게 한 장본인인 예루살렘 성전을 여전히 드나들고 있었을까?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교회의 출현은 매우 우연한 역사 과정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이네. 이 역사 안에는, 예컨대 바울 같은 한 인물의 운명과 실존적 신앙경험 같은 것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갈등과 신학 논쟁, 이단논쟁, 더 나아가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정치역학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네. 그 과정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적인 전통과 헬라의 철학, 로마의 많은 정치, 문화, 예술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전통에는 예수의 부활을 기린다는 근본적인 차원이 있지만 동시에 태양신을 섬기는 로마 문명의 영향도 있다네. 성탄절(12월25일)의 유래도 역시 이와 연관된다네. 참고적으로 그리스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1월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그 이외에 약간 다른 날짜를 고집하는 종파도 몇 더 있다네. 우리는 지금 기독교 안에서 순수하게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을 완전하게 구별하기는 힘들다네. 성서에도 역시 바빌로니아 설화나 헬라 철학이 다소간 개입해 있는 실정이네. 마리아 문제도 역시 이런 역사 과정에 속한다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게. 기독교가 정수된 물처럼 완벽하게 순수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담지한 공동체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가 똑같이 여러 한계를 가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나? 예수님이 배고프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독교가 역사의 과정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교와 로마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는 그런 문화의 옷을 입고 본질을 바르게 지켜나가기만 하면, 그것이 곧 ‘ecclesia semper reformanda’(늘 개혁하는 에클레시아)라는 종교개혁의 모토인데,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 부족할 게 하나도 없다네.

종말론적 공동체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위에서 ‘역사적’ 공동체라는 말의 첫 의미를 설명했는데, 바로 이것 ‘종말론적’이라는 말이 ‘역사적’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라네. 앞의 의미는 그 구체적인 역사 과정에 초점을 둔 것이며, 뒤의 의미는 역사의 끝부분에 초점을 둔 것이라네. 즉 기독교가 역사적이라는 말은 그 역사의 과정에 뿌리를 둘 뿐만 아니라 역사의 끝에 미리 도달해 있다는 뜻이네. 이게 자네들에게 좀 까다로운 신학개념일 테니까, 너무 딱딱한 음식을 먹으면 체할지 모르니까 내가 길게 끌지는 않겠네. 모르는 것은 일단 접어놓고 앞으로 나가는 게 놓은 책읽기이듯이 신학에서도 아쉽지만 자기가 소화할 수 있는 개념만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게 지혜롭다네.
요즘이 ‘대강절’이니까 한 마디는 덧붙여야겠네. 기독교는 자신들이 인간과 세계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네. 물론 이런 재림신앙이 탈(脫)역사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고 한국교회의 설교 현장에서는 그런 방향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실제로는 이 재림신앙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혁명론이라 할 수 있다네. 인간의 정치, 경제적 프로그램을 무효화하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철저한 변화가 어디 있겠나? 특기 기독교는 이런 종말론적인 미래가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서 선취되었다고 믿는다네. 여기에 바로 기독교 신학이 풀어야 할 과제가, 혹은 딜레마가 놓여 있다네. 과연 역사는 이미 2천년 전에 역사 안에 돌입했으며, 또한 종말에 이 역사 안으로 다시 올 그 예수가 역사를 완성하는 자인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은 풀어야 할 신학의 과업이 얼마나 중차대하며 심각한지 알겠나? 여전히 물리학과 생물학의 세계가 새롭게 열려지고 있는 이 긴박한 역사 과정에서 나사렛 예수가 모든 생명의 토대라는 사실을 해명하기는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네. 어거스틴과 오리게네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융엘과 판넨베르크 등등, 쟁쟁한 신학자들이 펼친 작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대목이 계속 주어진다네. 흡사 끝없는 양파껍질처럼 벗기고 벗겨도 여전히 껍질 안을 모르는 생명의 세계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신비로운 능력을 포착하고 해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네.
이런 작업을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를 문자에 매달리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읽어야 하며, 이 역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생명현상에 대해서 예민한 영적 촉수(觸鬚)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네. 이런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면 안식일, 성탄절, 마리아, 성서 안의 오류, 교회의 비본질적인 요소를 극복할 수 있다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 그리고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일단 자네들은 좌고우면 하지 말고 신학의 정통을 공부하게나. ‘foundamental theology’(근본신학)에 충실해야하네. 잘 듣게. ‘근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근본신학’, 또는 ‘정통신학’이라네.
송 군, 마리아가 우상숭배 같다고 했지?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그런 작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가톨릭의 기본 교리는 아니네. 그들은 마리아를 숭배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그를 잉태하고 출산한 마리아까지 공경하게 된 것일세. 물론 이 문제는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여러 신앙적 갈등 가운데서 가장 첨예한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게 아니라면 관용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아마 동정녀 탄생을 주장하는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우리가 마리아 공경을 비판하는 잣대로 우리를 본다면 그런 모습들이 적지 않게 드러날 걸세.
이 군, 사이비 이단들이 제기하는 기독교의 모순과 한계 중에서는 그들이 옳게 지적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다네. 더구나 그런 것들은 송 군이 가톨릭의 마리아 공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듯이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또는 종교문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예쁜 여선생님들은 변소에도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한다네. 사이비 종파의 기독교 비판은 거의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그렇다고 해서 늘 우리를 합리화하는 게 능사라는 말은 아니고, 그들의 주장은 거의 신학적으로 논쟁할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네.
송 군과 이 군, 자네들의 질문에 대해서 충분한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만 그쳐야겠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신학도로서 바람직하다고 보네. 그런 정도의 열정을 갖고 이번 겨울 방학에 좋은 책을 많이 읽게나. 세 권만 소개하겠네.

1. 게르하르트 에벨링, 허혁 역, 신앙의 본질
2.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정용섭 역, 사도신경해설
3. 에티엔느 트로크메, 유상현 역, 초기 기독교의 형성
                                2004년 12월17일        하양에서 정용섭

    <위의 글은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 이루어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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