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여성과 해방

여성신학 조회 수 4303 추천 수 88 2005.03.14 23:40:19
2장
여성과 해방(3월10일)
-기독교 구원론의 여성신학적 담론-


여성신학의 세 흐름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은 이미 세계교회와 신학 분야에서 1960,70년대의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에 이어서 1980년대부터는 아주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고 있다. 여성신학자들이 남성 신학자들에 비해서 양적으로 태부족이긴 하지만 한국 교회와 신학에서도 역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이슈로 등장한 바 있으며, 지금도 여성신학회*를 중심으로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적으로, 이미 1980년 4월호 기독교 사상에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의 부인 엘리자베트 몰트만-벤델의 글 “여성신학에 관한 고찰”이 게재된 바 있으며, 1984년 신학사상 47호에는 손승희의 글 “여성신학의 목표”가 게재된 바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선 다음에는 양적인 면에서도 여성신학은 큰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신학계에도 이미 ‘여성신학회’가 조직되어 이 여성신학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위에 소개된 세 아티클 이외에 중요한 아티클은 다음과 같다.
강남순, 21세기에 들어선 여성신학- 여성신학의 인식론적 지평과 쟁점, 그리고 그 성찰적 과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신학사상 115, 2001.
이경숙, 해방을 위한 성서해석과 대안적 예배의식을 모색하는 여성신학, 신학사상 111, 2000.
김애영, 생태여성신학과 지구화 문제, 한신논문집 제 16권 제1호, 1999.
      , 한국여성신학의 이야기 컨텍스트, 기독교 사상, 1996,7.
문영석, 생태여성신학, 사목 제246집, 한국찬주교 중앙협의회, 1999.
장일건, 다윗의 아내 미갈과 아바기일에 대한 여성신학적 조명, 신학사상 100, 1998.
강남순, 현대 여성신학 연구 1-5, 기상 1992,5-9.
구미정, 생태여성신학의 주요 관점들, 세계의 신학 34, 한국기독교연구소, 1997.
홍치모, 여성신학의 역사적 배경과 최근의 동향, 신학지남 1996 가을호.
최만자, 성에 대한 여성신학적 이해, 기상 1996,8.
최영실, 성서적 관점에서 본 한국여성신학, 기상 1992,2,3.

여성들의 고유한 시각으로 신학활동을 전개하겠다는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굳이 ‘여성신학회’라는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에 해서는 선득 납득이 안 간다. 일반 사회에서도 여학생회, 여교수회, 여의사회, 여변호사회 같은 조직이 있는 걸 보면 일종의 분파적 조직을 통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강화시켜나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분파적 조직의 밑바탕에는 결국 자신들의 행위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본인들이 신학자라고 한다면 여성이라는 점을 특화할 필요 없이, 비록 여성신학적 시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학 행위를 전개해 나가면 충분하다. 다른 차원에서, 여성신학회가 여성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그렇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비록 구조적으로 열악하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정정당당하게 투쟁하는 것이 소극적 정파주의에 기대는 것보다 오히려 미시적으로나 거시적으로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현재 여성신학자들의 위치가 오랜 역사의 왜곡을 통해서 개인 뚫고 나가기에는 지나치게 열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제도적인 안정장치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흡사 오늘날 국회도 여성할당제가 논의되고 있듯이 말이다. 또한 일정 크기 이상의 기업체는 장애인 노동자를 의무적으로 고용해야한다는 노동법이 있듯이 말이다.  

어쨌든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외국 여성신학자들은 가장 극단적인 메리 데일리(Mary Daly)로부터 시작해서 필리스 트리블(Philis Trible),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터(Reuther), 레티 러셀(Letty M. Russell), 엘리자베트 피오렌자(E. Fiorenza) 등이 있으며, 국내로는 손승희, 안상임, 강남순, 최만자, 박경미, 황혜숙, 그리고 젊은 구미정 등이 있다. 이들이 주로 여성신학적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각론적인 부분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체주의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 전통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여성신학적 토대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갱신주의자들이 있으며, 이런 해체와 갱신의 구도를 뛰어넘어 새로운 제3의 길을 찾는 생태주의자들이 있다. 이런 구분은 문학 영역에서도 대충 비슷하게 적용된다. 문학평론가 변지연의 설명을 들어보자.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 특히 고려해 보고자 하는 한 가지는, 이른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것이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될 인식의 넓이와 깊이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의 담론은 그 외연상의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적으로는 몹시 복잡한 지류들로 엉켜 있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건대, 시몬느 베이유식의 남녀 평등론, 즉 ‘여성=남성’의 관점에서 입각하여 정치적,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양성의 동등한 권리를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축들이 있는가 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굳이 계열화한다면 아마도 이쪽에 가까울 것이다-, 시수나 이리가레이 등의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성의 가치를 남성성의 그것보다 더욱 적극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후자의 견해에 입각한다면 시몬느 베이유의 그것은 ‘여성의 남성화’를 부추기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곧 여성성의 고유한 가치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기왕의 페미니즘 담론이 초래해 온 극단적 대립의식과 단지 양성의 계급적 위치만 서로 바뀌었을 뿐인 ‘여성 우위론’을 지양하고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 궁극적으로 양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에코 페미니즘’도 분주히 논의되고 있다. <변지연,, 상처를 딛고 앞으로 걸어가는 법 -공지영 글쓰기의 의미와 전망, 공지영,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작가론, 도서출판 이수, 2000, 324쪽>.

해체주의자들의 입장은 매우 명백하다. 구약과 신약으로부터 교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발전된 도그마와 교회 구조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적인 전통이 근본적으로 가부장질서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를 해체하고 새롭게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호칭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남성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탐탁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메리 데일리가 대표적인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극단적인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의 근본이 위태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부분적인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으로 용납되기는 힘들 것이다.
해체주의적 입장의 여성신학자들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개는 기독교 경전과 전통에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새롭게 해석하고, 오히려 여성 해방적인 역동성을 재발견하려는 갱신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여성신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도 좋다. 이들은 기독교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남자라는 사실, 예수의 열두 제자가 남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그들에게서 시작한 기독교의 도그마를 대체적으로 받아들인다. 다만 지난 2천년 동안 유럽의 남성 신학자들이 간과했던 여성해방적인 요소를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다시 찾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이런 작업이 상당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여성신학이 이런 관점에서 전개시켜나가야 할 내용은 적지 않을 것이다.
해체와 갱신을 함께 아우르면서 훨씬 여성신학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제 삼의 길은 에코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천년 동안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신학은 생명을 일구어내기보다는 오히려 정복하고 그 결과로 파괴시켰다는 현실 인식 가운데서 여성신학적 통찰을 통해서 신학을 생명 지향적 방향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자칫 여성 신학을 출산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에 치우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생태의 관점으로 여성신학의 자리를 잡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훨씬 역동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주의는 기독교의 근본을 허물게 된다는 자기모순이 있고, 갱신주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통 신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생태주의는 21세기의 시대정신과도 맞물려서 훨씬 광범위한 작업을 전개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위에서 제시한 분류 방식 안으로 모든 여성신학자들을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비록 세 유령으로 나누기는 했지만 한 유형과 다른 유형 사이의 경계선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성신학을 개관하는 일종의 기호로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참고적으로 이에 관한 윤철호의 견해를 여기 짤막하게 소개하겠다. 그는 여성신학을 1) 신정통주의적 유형의 페미니스트 해석학, 2) 개혁주의 유형의 페미니스트 해석학, 3) 급진주의 유형의 페미니스트 해석으로 구분한다(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한국 장로교 출판사, 2001, 407-406).
1) 신정통주의적 페미니스트에 속하는 학자로는 레티 러셀과 필리스 트리블인데, 이들은 매우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 페미니즘의 토대를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통을 거부하지 않고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2) 비판적 개혁주의 페미니트스에 속하는 학자로는 류터가 대표적인데, 이외에 피오렌자, 도로테 죌레, 샐리 맥패그(Sally McFague), 초기의 데일리 등이다. 윤철호는 신정통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성서주의자들(신정통주의적 페미니스트: 필자주)이 성서와 전통의 성차별주의적 요소를 가변적인 역사적 우유성의 형식으로 이해하고, 본래적이고 초역사적 계시의 현실로서의 케리그마 내용을 분리하여 후자 안에 담겨 있는 여성 해방적 의미에 더 집중적인 관심을 쏟는 데 반하여, 개혁주의 입장에 선 여성신학자들은 이러한 형식과 내용, 초역사적 계시와 역사적 경험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성서 안의 여성 해방적 요소와 성차별적 요소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이며, 전자는 여성해방을 위한 전거 내지는 자료로 삼으며 후자는 페미니스트 해석학적 비판을 통해 개혁되어야 할 전승으로 본다.”(418).
3) 급진적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학자들로는 메리 데일리, 아모니 글든버그(Naomi Goldenburg), 캐롤 크라이스트(Carol Christ), 멀린 스톤(Merlin Stone)이 있다. 이들은 위에서 필자가 ‘해체주의’라고 규정한 것처럼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철호의 이런 분류가 나름대로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기독교 전통을 수용해내려는 신정통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신정통주의는 기독교 전통의 여성 차별적 요소를 기독교의 본질이 훼손될 정도의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반면에 개혁주의는 그것을 기독교 전통의 구성요소로 간주하고 그것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하면 훨씬 세분화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로 묶는 게 바람직하다. 아울러 개혁주의라는 용어가 어떤 의도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만약 ‘개혁’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두었다면 기독교 전통의 여성 차별적 요소를 개혁한다는 점에서 이런 용어의 사용이 타당하지만,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했다면 독자들이 약간의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신정통주의는 곧 칼빈신학을 가리키는 개혁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신학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경험
이런 차이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성신학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걸어온 구체적 경험과 그런 숙명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신들의 인식론과 해석학적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흑인신학은 흑인의 경험에서, 해방신학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경험에서 신학의 자리를 발견하듯이 여성신학은 여성의 경험이 그렇게 작용한다. 만약 신학이 단지 선험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그 역사에서 시작되고 거기서 해석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남성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여성의 경험도 역시 신학의 구성요소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우리의 속담에 ‘과부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듯이 여성만의 고유한 경험이 배제된 신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위한 신학으로서의 그 진정성과 현실성이 부족할 것이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히브리인들의 구체적인 역사 경험에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상응한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유랑생활, 이집트의 이민, 또는 노예생활, 엑소더스와 40년 광야생활 및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영토분쟁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해나갔다. 그들의 고유한 삶의 경험, 또는 역사 경험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신앙을 형성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작 한 곳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살았다면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유목민으로서 안전한 정착지 없이 나그네처럼 유랑생활을 하는 삶의 경험들이 야훼 하나님을 역사의 진행과 더불어 기동하는 분으로, 즉 공간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차원에서 인식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반해서 비교적 일찍부터 문명, 문화를 꽃피었던 헬라인들은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 거주하고 아래 신들을 다스리고 적당하게 인간과 관계를 맺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철저하게 공간의 차원에서 인식되는 신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경험을 외면한다면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부분적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나사렛 예수 사건도 역시 우리에게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 신학의 자리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확인해준다. 예수가 시공을 초월해서 갑자기 이 세상에 나타난 분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등장하신 분이다. 예수가 살아온 그 삶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확연하게 재구성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아버지 요셉의 대를 이어 목수 활동을 하고 가족들과 함께 그 시대 안에서 살아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 예수는 다른 유대 청소년들과 거의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치고 철이 들 만한 나이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자기 정체성에 대한 예수의 인식*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우리가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기가 감당해야만 한 그 삶의 경험 없이 그런 인식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그의 가르침은 신선들의 선문답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온)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묵시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이 말은 곧 유대인의 역사경험이 예수의 사신(使信, Botschaft)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으로서(vere Deus, vere homo) 인간의 역사를 초월하신 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33년 동안의 삶이 우리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의 인간적인 차원을 매우 사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한편의 소설이 있다.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드나들며 마지막으로 내면적 갈등을 겪게 되는데, 그것이 소설의 제목으로 잡힌 최후의 유혹이다. 그 유혹의 내용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로 살면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런 소설을 놓고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점을 논할 필요는 없다. 단지 예수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아무런 갈등 없이 뛰어넘은 게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경험을 거치면서 예수에게 주어진 고유한 길을 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여성의 경험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더 나아가서 여성 차별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정통신학은 숙명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성서와 신학 전반에 걸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서보다 신학의 전통이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성서 기자들과 그 성서 전승에 참여한 이들이 거의 남자들이긴 했지만 성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고유한 현실성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에 그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자들은 훨씬 심각한 성차별적 역사구조 안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소위 ‘라틴신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 로마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런 전반적인 사태의 핵심에 놓여 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의 정치, 또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로마의 종교에는 여성들의 경험이 철저하게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여성의 경험에 근거해서 성서와 신학전통을 새롭게 조명하고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여성신학의 주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신학의 자리가 인간 삶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 경험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구체적인 경험만 신학의 참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여성신학 이전에 ‘며느리 신학’이라거나 ‘과부 신학’을, 또는 ‘고아신학’이나 ‘외국인 신학’*을 핵심 주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같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 숫자만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아니 그것의 근본적 역동성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그것 위에 있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경험을 신학의 대상으로 삼는 게 훨씬 바람직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즉 인간학은 나름대로의 신학적 도구로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인간의 경험을 치유하고 통전시킬 수 있는 근거라는 말이다. 물론 여성신학자들도 그들의 신학이 여성 자체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여성의 경험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진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남성의 경험이라는 한 부분에 절대적으로 제한 받았던 기독교 신학이 이제 인류의 반에 해당되는 여성의 경험을 담아내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옳은 말이다. 여성신학도 역시 하나님, 생명, 부활, 종말, 하나님 나라가 신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것의 인식론과 해석학에 여성의 경험이 철저하게 간과된 기독교 신학 전통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성의 경험을 단지 신학의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것인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말하기는 하지만 결국 여성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주제로 삼으려는 것인지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내려온 신학의 남성 중심의 일방적인 전통이 당연하거나 옳다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여성의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고유하고 독특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규정하는 준거로 자리 잡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가 그런 여성의 경험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물론의 남성의 경험이라는 것도 이와 똑같이 상대적인 것으로 머물러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서양신학의 관념주의 소산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처절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도 결국 신비의 방식으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서술이 곧 성서이며 기독교 교리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한 것뿐이다.

*신학의 유형을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지역적인 부분으로 분화시키게 된다면 우리는 인간의 경험에 등장하는 모든 불평등과 소외와 억압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 관점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 약간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동물애호가들 중에는 개나 고양이가 인간에 의해서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채식주의자들은 모든 동물이 인간에 의해서 학대받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육식을 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아직 그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다른 동물들을 먹거리로 삼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양이 신학’, 또는 ‘채식주의 신학’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것들은 세계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여성신학과 전혀 지평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옳은 말이긴 하지만 종말의 빛에 비추어볼 때 채식주의 신학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해방의 프락시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경험은 가부장제와 여성차별적 구조로 인해서 여성들이 겪은 고유한 삶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성신학은 여성해방의 프락시스를 또 하나의 특성으로 한다. 차별과 억압이라는 경험에서 요청되는 것은 당연히 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구약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명백하게 경험된 하나님의 구원 행위였던 것처럼 여성신학에서도 역시 여성의 해방이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구원 행위인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구원은 곧 해방과 동일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통 신학에서도 구원은 곧 죄에서의 해방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같은 해방을 말하기는 하지만 여성신학에서는 구조적이고 구체적인 해방의 프락시스가 핵심이지만 근본주의적 정통신학에서는 교의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해방이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관념성을 또 하나의 여성차별적 요인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실천’과 ‘관념’의 관계를 한 두 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 실천을 강조하면 관념이 약화되고, 관념을 강조하면 실천이 약화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지 여성신학이 여성의 고유한 경험에 근거해서 해방의 프락시스를 구현하려고 한다는 점은 성서와 기독교의 구원론과의 연관성에서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아마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의식하는 남성들도 있긴 하겠지만 여성이 아닌 한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남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여성 차별적 구조를 공고히 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키려는 노력도 없지 않았다. 이는 흡사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된 것과 비슷하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노동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현실적 요구로 아프리카 흑인을 물건처럼 매매한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비인간적으로 대우받는 노예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앞장서서 노예제도를 폐기하려는 움직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아브라함 링컨에 의해서 노예제도가 폐기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떤 거룩한 인간애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거의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에는 아주 결정적인 힘이 작용하기 전까지는 거의 인간적인 이해타산에 의해서, 홉스가 말한 대로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구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비인간적 구조의 폐기 내지 갱신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구원이라는 거시담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고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이 얼마나 심각한 구조적 불이익을 당해왔는지 세세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약간만 배려할 줄 아는 눈이 있다면, 그리고 역사의 현상을 선입견 없이 읽을 수 있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가부장적 요인으로 인한 여성차별적 구조를 쉽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독교 역사도 이런 여성차별적 인류의 역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런 역사를 고착화하는 데 기독교가 기여한 부분이 상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여성들에게 교회 안에서 잠잠 하라고 타이른 바울이나 여성에게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헬라, 로마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교부들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수녀와 결혼한 종교 개혁자 루터 같은 이들도 이런 여성차별적 언급을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교회의 역사와 여성차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따라서 여성들의 해방을 외치는 목소리에 다른 소리를 낼 여지는 없다. 특히 한국교회의 환경은 세계 교회와 비교할 때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교단에 따라서 여성들에게 성직을 부여하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교회의 정치가 완전히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교회의 실정*을 알만 하다. 이런 점에서 여성 해방의 프락시스는 여성신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모든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마땅한 과업이라 하겠다.

*2003년 11월 총신대학교 채플 시간에 그 교단의 총회장 되는 아무개 목사가 ‘기저귀’ 발언을 해서 문제가 심각해진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을 접하고 <말씀과 삶> 12월호에 아래와 같은 글을 게재한 적이 있는데, 그 글을 아래에 옮기겠다.
얼마 전 대구 대명교회 담임 목사이면서 예장 합동측 총회장이신 임 아무개 목사께서 신학대학교 수요일 예배 설교 시간에 여성 안수 건을 반대하는 요지의 설교를 하다가 ‘기저귀를 차고... ’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또는 교단적으로 여성의 목사 안수를 반대할 수는 있다. 그것은 개인과 교단의 신학적 고백에서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성서적이지 않을뿐더러 최소한의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총회장이라는 분이 사석에서도 꺼내기 민망한 말을 신학대학교 예배시간에 언급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 분의 성격이 평소에 경솔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에 휩싸여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신 것 같다. 사람이 살다보면 말의 실수는 하는 법이지만 총회장이라는 위치와 신학대학교 예배라는 자리를 감안한다면 도저히 용납되기 어려운 망언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하나는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발상이 비뚤어진 분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흡사 유대인을 향한 유럽 사람들의 혐오증처럼 그분도 역시 여성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평소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또는 거꾸로 남성우월주의에 빠져있든지 말이다.
이번에 일종의 해프닝처럼 벌어진 사건이지만 이것은 한국교회 전반에 깔려있는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여성 안수를 받아들이고 있는 교단에서도 여성 목사는 주로 보조적인 역할에 한정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의사들과 대학교 교수들 중에는 여성들이 제법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유독 교회에서만은 늘 종속적 위치에 남아있다는 이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서가 여성 안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성서문자주의자들의 주장은 접어두기로 하자. 이미 충분할 정도로 이 문제는 논의되었으며, 어떤 면에서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해결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훨씬 현실적인 어려움은 평신도들 스스로의 의식에 놓여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신자들 스스로 여성 목사보다는 남성 목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 성직자의 독점 현상이 너무 오래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여성 신자들의 무의식에 담임목사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고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여성들이 성직 세계에 진출해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낼 만큼의 시간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이제는 교회 안에서 남성 위주의 일방적 구조가 허물어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제 여성신학을 훨씬 발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여기서 두 가지 관점만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이런 현상에 대한 여성신학의 원인 분석이 얼마나 정당한가? 둘째, 여성신학의 현상분석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보충할만한 대안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과 여성차별주의
위에서 한 두 마디 지적한 것처럼 성서와 기독교 전통과 교회 안에 여성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신구약성서를 인용하면서 성서가 여성을 차별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렇게 잘못된 일이 아니며 놀랄 일도 아니다. 하나님을 남성 이미지의 아버지로 호칭한다거나, 또는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그런 요소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이외에도 우리는 성서 안에서 남녀 차별적인 요소를 수도 없이 찾아낼 수 있다. 이브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거나 여성의 달거리가 부정하다는 투의 성서 본문이 그런 것들이다. 교회의 역사에는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훨씬 심각한 수준으로 개입되었는데, 심지어 ‘마녀사냥’을 통해서 여성의 마성을 합리화하는 일도 있었다.
여성신학의 문제제기가 있기 전에도 이런 성차별적 요인들을 교회가 부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풀어보려는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회가 시민사회로 발전하면서 상당히 많은 여성 전문가 집단이 출현했지만 성직에서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아예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제직을 원천 봉쇄하고 있으면 성공회도 마찬가지고, 그 이외의 개신교 교파들도 부분적으로 허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활동은 지나칠 정도로 미비한 상태이다. 사태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신학 자체에 놓여 있는 여성차별적 구성요소와 신학 밖에 있는 요소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 자체의 성차별적 요소는 이미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접어두고, 밖의 요소만 한 마디 지적한다면, 신학도 역시 인류 발전사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역사 발전이 앞서 있다는 서구에서도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인류 역사가 여성차별적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신학도 그런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여성신학이 기독교 신학을 지나칠 정도로 몰아붙이는 행위는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독교의 구조와 자기 진술도 역시 시대적 맥락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여성차별적 성격을 약간이라도 변호하려고 한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여성 차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기독교 자체에서 찾는 것은 별로 정당하지 못하다. 사실 가부장제도와 여성차별 문제는 기독교 세계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 종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야만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 여성들은 차도르를 입고 다니고,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일부다처가 용인되고 있으며, 교육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슬람 교리 자체가 그런 것을 합리화하고 있을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도 역시 여성 차별은 기독교 세계에 못지 않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더 심각하다고 보아야 한다. 열녀문에 얽힌 사연들, 칠거지악으로 인해 벌어진 비인간적인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여성들에게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유럽과 북 아메리카의 여성들이 남성과 똑같은 권한을 누리고 있다는 이런 역사적 결과를 놓고 본다면 기독교가 여성들에 대해서 얼마나 진보적인 입장을 보였는지 확인된다.  
나는 여기서 여성 차별적인 요소의 다소(多少)에 따라서 종교의 우열을 논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기독교의 성차별의 문제점을 호도 하려는 생각도 없다. 다만 이런 여성 차별적인 문제는 종교의 본질에 속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부계사회의 발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역사 발전의 한 현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만약 고대 인류사에 잠시 있었던 모계제도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여성 차별적인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생존의 차원에서 부계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남성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생산성을 중심으로 사회가 움직이면 결국 남성 중심적인 체제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여성들은 가장 창조적인 생명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사회 특성상 사냥이나 농사, 또는 전쟁의 능력이 실제적인 생산성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남성중심의 사회는 어쩔 수 없는 인류의 운명이었다.
정치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인류 역사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왕정시대가 유지되었다. 만약 오늘의 잣대로 그 제도를 평가한다면 아주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악한 질서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인류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해체해버릴 수도 없다. 물론 그 왕정제도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간과해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씨족사회에서 부족국가로 발전하고, 그 부족국가가 왕정국가로 발전해나갈 수밖에 없는 그 시대적 당위가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무엘서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싸움에서 자신들도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요구에 담겨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지 않고 그대로 판관제도로 유지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 중심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는 없다. 생존의 방식으로 왕정제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역사를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엄격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 역사를 끊임없이 개혁하고 진보시켜야할 사명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왕정제도가 비록 인간의 삶을 왜곡시키는 요소로 짜여졌지만 나름대로 생존해보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정통신학이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자라왔으며, 따라서 여성에 대해 차별적인 구조를 안고 있는 게 역사적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가 왜곡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역사적 한계 안에서 생명의 단초이자 완성자인 야훼 하나님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변증해보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경주했다. 비록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거나 주로 남성 중심의 성직 제도가 고착화되었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의 여성 차별적 행태가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신비인 하나님과 그 계시를 언어와 종교적 상징으로 표상화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를 구원시킬 수 있는 심원한 깊이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 차별적 요소를 신학의 중심과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아니다.  

여성신학의 길은 어디에?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유가 어디에 있건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는 가부장적 요소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성 차별적 경향이 적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여성해방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고자하는 여성신학의 기본 오리엔테이션에 동의한다. 다만 이런 재해석과 도전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곡해함으로써 결국 기독교의 근본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빚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옥의 티’를 집는 차원에서 약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뿐이다.
기독교 전통에 대한 여성신학적 분석이 부분적으로 근본에서 빗겨있다는 이런 판단에서 이제 우리는 이 여성신학이 나가야 할 방향을 최소한이나마 제시해야만 한다. 지나간 역사에서 여성들의 운명이 아무리 가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구 위에서의 생존을 상위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적 한계였기 때문에 하나의 역사 과정으로 접어두어야만 한다. 여성신학이라는 특수성에 집착하기보다는 그런 신학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훨씬 근본적인 신학의 주제에 천착해야만 한다. 즉 기초신학에 충실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신학의 길이라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신학이 나름대로 기독교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흡사 해방신학이 신학의 역사참여에 일정 부분 공헌했듯이 여성신학이 기초신학에 충실함으로써 그런 공헌을 이루어 내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기초신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여성신학만이 아니라 그 이외의 모든 유행 신학은 신학의 역사와 인류사에서 파생되는 몇 가지 지엽적인 문제들을 신학의 근본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다. 예컨대 여성신학의 신학적 동기를 제공한 해방신학만 해도 그렇다. 해방신학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차원에서 왜곡된 인간 현실을 바르게 잡아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학 작업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그런 주제는 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시즘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산업혁명 이후로 자본이 축적됨으로써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의 현실은 당연히 해방의 구도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이런 민중의 현실을 외면하고 영육 이원론적인 시각에서 영적인 구원의 세계만을, 또는 도덕성 회복 문제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과학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가리켜 ‘민중의 아편’이라고까지 낮추어 부르게 된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이런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마르크시즘이 말하는 그런 계급 투쟁적 구도로 인간 구원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 해방이라는 이념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말하게 된 그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말이다. 신학자들이 자신들에게 부족한 사회과학적인 안목을 보충하기 위해서 마르크시즘을 흉내 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해방이 물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이런 마르크시즘은 자본의 힘을 축적해서 인간의 삶을 키우겠다는 자본주의의 이면에 불과하다. 한쪽은 자본을 적대시하고, 다른 한쪽은 자본을 숭배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양측 모두 인간의 해방과 구원을 물적 토대에서 찾아보겠다는 발상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이념들이다. 기독교는 물신적 자본주의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 자본의 마성을 넘어서겠다는 마르크시즘도 극복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해방이라는 그 언어가 함축하고 있는 구원론적 깊이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사회 분석과 혁명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어내겠다는 사회과학 프로그램으로서의 해방개념은 거부해야만 한다. 기독교 경전과 기독교의 역사는 마르크시즘이 말하는 그런 사회과학적 해방보다 훨씬 뿌리 깊은 해방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해방신학의 해방은 유행처럼 잠시 우리를 흥분시키지만 기독교 전통의 해방은 우리를 생명의 근거와 마주서게 한다.
참고적으로, 해방신학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또는 서로 영향을 받는 소위 ‘정치신학’도 역시 이런 유행신학의 한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정치신학자라 할 수 있는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역사를 변혁시켜 나가는 데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 무게를 두고 있다. 역사 변혁이라는 주제는 기독교 신학보다는 사회과학에서 다루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몰트만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마르크시즘의 도전을 받은 해방신학이 혁명과 계급투쟁을 신학의 도구로 삼은 것처럼 신학적 전통보다는 철학과 사회과학의 전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철학과 사회과학의 문제제기를 귀담아들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서쯤으로 접어두고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전승시켜온 하나님과 그 계시를 인식하는 데 진력해야만 한다.

기다림의 신학  
이제 이 글을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여성신학과 연관해서 우리는 어떤 신학적 성격을 이 마무리의 주제로 삼아야 할까? ‘기다림의 신학’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은 현실의 역사가 아무리 리얼(real)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너머의 현실을 중심 주제로 삼아야만 한다. 신학(神學)은 바로 그 어떤 지상의 사물과 개념으로도 완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그것을 형상화하는 순간에 우상 숭배가 되어 버리는, 그래서 신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신에 관한 학문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과 모순의 이 역사를 우리가 개혁하는 것을 우리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다면 결국 신학은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머물게 될지 모른다. 그런 이데올로기의 상대화가 곧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예수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과 희망이 곧 우리 기독교 신학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진정으로 변혁하는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론에 대한 여성신학적 담론의 가능성과 한계가 놓여 있다. 만약 여성신학이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된 새로운 생명을 해석하고 끌어내는 데 기여한다면 신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인류 역사에 드러난 왜곡된 역사 현상을 중심 주제로 삼고 그것을 바로 잡는 것에 머문다면 말 그대로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질지도 모르겠다. 결국 신학은 구원의 깊이를 얼마나 진지하게 열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기다림의 신학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나타낼지 모르겠다. 그런 역사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가는 이 세상이 정말 악마의 힘에 의해서 지배당할 것이라고, 그리고 교회는 장례식이나 집행하는 종교 기관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진보를 희망하는 신앙과 종말론적 신앙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현실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따라서 변혁시켜 나가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겨우 남녀평등이나 복지사회, 또는 지속 가능한 생태에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의 인간다운 삶, 인간과 자연의 일치, 창조적 노동구조 등,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가치들을 우리가 성취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혀 새로운 생명형식이 부활이다. 주님이 재림하는 종말에 우리 모두에게 들이닥칠 부활의 생명을 어떤 태도로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곧 기독교 신학의 근본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학은 역사변혁과 역사해석의 경계선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두 작업이 동시에 필요하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는 역사변혁 문제를 등한히 하다가 결국 마르크스에게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 반면에, 해방신학의 시대에는 지나치게 그쪽으로 경도된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학이 늘 이런 경계선에 어정쩡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역사해석, 즉 종말론적인 역사해석은 이미 그 안에 역사변혁을 담고 있는 신학활동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것이 아무리 진보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잠정성과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비판받아야 하고, 자극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역사해석에 일단 충실해야 할 것이다. 역사 변혁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결국은 그런 역사를 뛰어넘어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신약성서는 그런 미래를 가리켜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고 신화적 형식을 빌려 묘사하고 있는데, 깨어있는 의식으로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신학 운동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해방신학을 수용하는가, 않는가에 의해서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별로 차이가 없다. 진보적 경향의 교회는 정치참여를 통해서 역사를 변혁하기 원하는 반면에 보수적 경향의 교회는 복지활동을 통해서 역사를 변혁하려고 한다. 1980년대까지는 진보 경향의 교회들이 해방신학을 중심으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보수 경향의 교회들이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양자에게서 노출되는 약점은 그 어느 쪽도 하나님의 존재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진지하기보다는 인간의 노력과 성취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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