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2장: 계시에 대해서, 3월17일

조직신학 조회 수 6093 추천 수 97 2005.03.16 18:02:15
2장
계시에 대해서

기독교의 체계를 배우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견은 분분할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중요하니까 ‘신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고,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성서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며, 신학 일반에 관한 개론적인 해명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판넨베르크 같은 학자는 ‘진리론’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독단론이 아니라 진리론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조직신학의 논의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1장에서 읽은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짧은 서신은 이런 전반적인 문제가 안고 있는 형편의 흔적을 거칠게 다룬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직신학을 ‘계시론’으로부터 검토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계시론 자체가 바로 신론과 성서론과 인간론과 인식론 등, 조직신학의 전반적인 주제들과 연관될 정도로 핵심적인 교리라는 사실과 아울러 한국 교회 안에서 이 계시가 상당한 정도로 오해되는 실정이라는 사실에 있다.

계시가 오해될 위험성
우리의 교회 현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계시’라는 용어는 충분히 해석되지 않으면 오해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든다면 간혹 “내가 어젯밤 기도하는 중에 계시를 받았어.” 하는 말에서 우리는 계시가 얼마나 생각 없이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일반 사람들이 따라잡기 힘든, 즉 자기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깨우칠 수 있는 어떤 신적인 사건을 계시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점쟁이가 다른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히듯이 하나님이 어떤 개인에게 특별한 사건의 결과를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하기까지 한다. 물론 계시를 이렇게 생각할만한 단서가 성서 안에 없는 건 아니다. 하늘에 맞닿아있는 사다리를 꿈에서 본 야곱의 사건이나 요셉이 이집트 감옥에서 고위 관료들의 꿈을 해석해준 사건은 분명히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에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서에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들 이야기,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를 시작하면서 본 환상(행 10장), 바울도 자기에게 임한 계시에 관해 여러 번 진술했으며(고후 12:7, 갈 2:2), 특히 요한계시록의 묵시문학적 진술들이 그런 유의 것들이다. 이런 일련의 진술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계시로 이해하게 만드는 전거들로 받아들여진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엄밀한 차원에서는 문제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앞으로 우리가 자세하게 다루게 되겠지만 이런 계시이해에 의하면 계시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인간학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대상으로(계시의 도구화) 전락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개인적 신앙경험은 이런 현상을 훨씬 노골적으로 강화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주관주의적 신앙체험을 절대화함으로써 계시가 거의 개인의 실존 사건처럼 이해된다는 말이다. ‘주관주의적’ 신앙체험이라는 말은 신앙의 초점을 하나님, 그의 계시에 두는 게 아니라 인간의 주관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후로 사유하는 주관은 사유의 대상을 자기의 사유 안에 끌어들여서 거의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했다. 이런 방식을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라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이런 주관주의적 신앙은 개인주의적 경건생활과 과도한 간증 중심의 신앙체계로 나타난다. 신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신앙하는 개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개체, 혹은 주체의 주관적 경험과 감정과 결단을 신앙의 중심에 놓게 된다면 결국 그 주체보다 위대한 하나님은 겨우 인간의 주관적 경험 안으로 축소될 뿐이다. 비유적으로 설명해보자. 간혹 여고생과 유부남이 어느 폭포에서 동반 자살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가 있다. 이들의 유서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결국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삶을 창조적으로 이끌어내는 참된 사랑의 세계에 들어갔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주관적 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랑을 왜곡하게 된 것이다. 종교에서도 이런 주관적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벌어지는 오해와 왜곡은 매우 심각하다. 사이비 이단들의 주관적 신앙이 우리에 비해서 훨씬 열정적이고 강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신앙의 근본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포착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종교생활에 개입되어 있는 문제는 그들이 신앙하는 대상을 중심에 두지 못하고 신앙하는 주체인 자신들에게 중심을 두었다는 데에 있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도 계시를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하게 되면 하나님의 행위인 계시의 리얼리티를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신앙경험이 계시를 이해하는 게 결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도대체 우리가 계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계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에 해당되는데, 우리가 기독교를 참되게 알려면 신학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신학은 단지 교회의 실천과 대별되는 일종의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신학이 이론이기는 하지만 이 이론은 이런 이론이 가능하게 되는 훨씬 근본적인 세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수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수영을 배우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그저 동네 아이들과 함께 호수나 바닷가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울 수도 있고, 정식으로 수영 코치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양자가 모두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수영의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늘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양자 모두에게 해당된다. 물론 수영이 이론만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론이 물과의 관계를 저절로 알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미 수영에 관한 깊은 세계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세워놓은 수영 이론은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부이다. 기독교 신앙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한 이론적 체계라 할 신학이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늘 평신도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안에 신학무용론이 지배하고 있다는 건 큰 비극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단지 신앙의 체험이며 실천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신앙의 체험과 결단과 실천의 옳고 그름을 따짐으로써 경우에 따라서 그것을 약화하는 신학 이론을 신앙의 방해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지 않더라도 당장은 무언가 신앙의 열정을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신앙의 황폐화에 이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단지 이론, 관념, 논리에만 한정시킨다면 그것도 역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허물게 되겠지만, 바른 신학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신앙을 바르게 끌어가고 성숙시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착각이 있다. 기독교 영성은 신앙의 강화가 아니라 신앙의 심화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는데 믿음은 본질적으로 강화의 문제가 아니라 심화의 문제이다. 강화는 자기의 의지와 결단의 차원이지만 심화는 하나님의 행위라 할 성령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산을 옮길 정도의 믿음도 역시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은 신앙의 심화라 할 영성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교회는 신학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계시에 관한 신학적 해명인 계시론은 단지 인간의 인식론적 이론에 불과한 게 아니라 계시의 리얼리티에 관한 역사적 이해를 체계화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조금 더 우리의 일상적인 신앙생활과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계시론은 계시 사건 자체에 대한 영적인 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개인의 체험을 접어두고 우선 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과연 신학적인 근거에서 계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
‘계시’(啓示, Offenbarung, revelation)라는 단어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나타난다는 뜻이다. 흡사 중동의 여성들이 덮어쓰고 있던 차도르를 벗어내는 행위와 비슷하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는 우선 그 계시자의 은폐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계시는 바로 은폐와 노출의 변증법적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에게 계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은폐의 속성까지 완전히 벗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것의 실체가 낱낱이 실증적으로 제 모습을 보일 종말에 이르기까지 은폐와 노출은 계속된다는 뜻이다.
글뢰게의 설명에 따르면 “계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개념이나 신학적인 개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 단어는 한편으로는 후기 그리스 철학에,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적 묵시문학에 기인하다.”(G. Gloege, “Christliche Offenbarung, dogmatisch”, RGG, 4권, 1606). 그렇지만 기독교 신학과 신앙이 계시개념을 결정적인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계시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 안에서 특별한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타종교와 구별하는 토대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이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한 자기 인식과 진술로 구별되지만 모든 신학이 계시론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는 그 토대가 동일하다.
기독교 신학이 계시론적으로 구성되는 이유는 우선 신학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 성격에 있다. 하나님이 다만 인간의 역사지평에 내재적으로만 머문다면 굳이 계시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역 속에 있는 긴간과 그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하나님의 자기 알림, 즉 계시로만 가능하다는 기초적인 신앙고백 위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리히터(L. Richter)가 설명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무한한 근원이며 인간세계 속에 유한한 형태로 자기를 알리는 분이다.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으로 포착해낼 수 없는 무한한 근원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초월적 성격을 가리킨다. 계시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일단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는 개념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잠시 검토할 것이다.  
‘초월’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떤 범주나 경계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컨대 남북한에 각각 살고 있는 사람들은 휴전선이라는 경계에 묶여 있지만 철새들은 자유롭다. 보통 사람들은 성적 욕망에 의존적이지만 높은 경지의 정신 훈련을 쌓은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벗어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초월해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범주와 한계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은 우리가 탐구하고 사색해서 검증해낼 수 있는 그런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이런 점에서 야훼 하나님에 관한 출애굽기의 진술은 정당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that I am.). 스스로 있다는 말은 존재의 근거가 자기 외부에 놓여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는 달리 자기 내부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린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단지 존재하는 것(Seiende)이라 할 이 세상의 사물과 달리 존재(Sein)와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철저하게 이 세상이라는 조건에 근거 설정되어 있다.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다르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마저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완전히 의존해서 존재할 뿐이다. 성서는 하나님이 이런 세상 의존성과 전혀 상관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의 형태를 따라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하고 경고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출 20:4,5). 성서가 이런 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이렇게 우상을 섬길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과의 관계에서 인간에게 내재한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필자의 생각에 그 속성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즉 불가시적 능력을 신뢰하기 못하고 끊임없이 가시적인 능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로 구성된 인간에게 불안한 일이다. 물론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이 민감하게 작용한다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훨씬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겠지만 대개의 삶이 거의 물질적인 토대에 의해서 작동되는 일반적인 삶에서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힘만 확실한 것으로 믿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를 스스로 생산해보려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만약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이 철저하게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즉 생명의 궁극적인 차원이 초월적이라고 한다면 인간으로서는 그 생명 현상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그 하나님을 물질적인 차원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인간 스스로 생명의 창조와 유지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런 일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성취의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성서가 이런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와 자기 성취의 열망에 근거한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초월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인 셈이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자유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진술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는 루돌프 오터의 책 <Das Heilige>에서 말하는 ‘누멘’의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흡사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인간의 실존과 미래에 대한 거대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음악 자체가 아니라 음악 경험을 음악적으로 기호화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의 모든 신앙 경험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경험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경험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 즉 죽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있는 한 우리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대면은 아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존재하는데 반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역사 내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계시는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과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 행위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틈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틈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이지,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관해 1934년에 있었던 브룬너와 칼 바르트 사이의 접촉점 논쟁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계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양측의 근본적인 질적인 차이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단지 강조한다기보다는 이런 상황은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을 언급할 때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론적 노력을 통해서 초월적인 하나님이 완전하게 해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신학 작업을 전개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신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을 놓치지 않으려면, 이는 곧 우리의 작업이 철학이나 물리학과 구별되는 점인데,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건이라 할 ‘계시’에 그 토대를 놓아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
우리가 이 ‘계시’ 문제를 본격적인 신학적 담론으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분명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둘째,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하는가? 앞의 질문은 계시의 내용이며, 위의 질문은 계시의 방식이다. 우리가 해명해야 할 이 계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범주화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계시의 지평에서는 계시의 내용과 수단이 일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내용과 방법이라는 구도로 간단히 해결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와 유용성을 위해서 일단 이런 구도로 접근해야만 한다. 우선 계시의 ‘내용’이다.
계시의 내용에 관한 가장 간단하고 원칙적인 대답은 “그리스도 계시”이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 자체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의하면 더 이상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늘 그리스도 일원론에 빠지는 게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으로 확장되고 심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학적인 차원에서 훨씬 근본적인 것에 관해 질문해야만 한다. 이 질문은 다시 이렇게 세분화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 ‘자체’인가? 우리는 즉흥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린다거나 아니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게 곧 계시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는 곧 계시자와 계시를 구분하는 관점이다. 물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계시 이해에 따르면 계시자와 계시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의 설명을 일단 도식적으로 살펴보자.

“성부”                        “성자”                        “성령”
계시자(Offenbarer)        계시(Offenbarung)                계시의 능력(Offenbarsein)
은혜(Verhüllung)        드러남(Enthüllung)                전달(Mitteilung)
자유(Freiheit)                형태(Gestalt)                역사성(Geschichtlichkeit)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계시 구도에서 계시의 다층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삼위일체론적 구도가 계시의 본질에 담보되어야 할 근본적인 일치를 훼손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곧 계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라는 말이다. 비록 삼위일론적 구조에서 계시자와 계시가 구분된다고 하더라도 그 두 주체는 삼위일체론적 신비 안에서 하나로 소통된다는 점에서 결국 계시는 계시자인 하나님이 다른 그 무엇을 계시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신론과 계시론이 결합되어 있는 이 신학용어를 소화하기만 해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부분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용어는 주로 헤겔 이후로 바르트에 의해서 신론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에 의해서 이제 “기독교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라는 명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계시의 동일화를 뜻한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곧 계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어느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자기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구조에서는 하나님과 계시가 분리된다. 그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의 존재라는 말을 충분히 소화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하지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분리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를 서열화하기도 한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인 개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공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과 공간적 개념의 하나님의 나라를 분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성서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인 의미로 말씀하지 않으며, 기독교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역사적인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함으로써 공간적인 의미가 강조된 시대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직 신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할 때 잠시 등장했던 주장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이 아니라 통치로 믿는다. 왕의 통치가 어떤 공간적 영역 안에서 실효성이 있듯이 통치 개념도 역시 공간적인 것을 배경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신학에서는 그런 공간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행위를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늘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예컨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비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격적인 대상물로 여긴다. 이런 생각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면 신인동형동성론으로 발전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자체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다. 흡사 바람처럼, 사랑처럼 실체*가 아니라 어떤 힘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와 통치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계의 비밀로서(융엘) 존재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의 가장 궁극적인 리얼리티를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변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실체론’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운동론’이다. 고대 헬라 철학자와 연결해서 설명한다면 실체론의 대표자는 데모크리투스이며, 운동론의 대표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여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책상은 실체인가, 아니면 운동, 또는 과정인가? 우리의 감각에는 무언가 변하지 않는 실체(원소)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라진다는 점에서 실체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이 두 주장이 쌍벽을 이루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실체론이 훨씬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제 물리학이나 철학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다. 심지어는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마저도 빛의 속도라는 범주 안에서만 그 절대성을 유지할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실체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불변의 속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 변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실체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존재양식을 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시가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계시를 완전하게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듯 계시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로서 자기를 알리는 분이라고 한다면 종말이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으니까 하나님도 아직 온전하게 자기를 알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별히 그의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그 계시가 선취(先取)적으로 발생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숙제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어떻게 참된 궁극적 계시인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그냥 믿는 게 아니라 믿을 만 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인간들의 세계 경험과 그 해석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종말과 계시는 이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시의 인식 가능성
우리는 위에서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사건이 곧 기독교의 ‘계시’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정리한 셈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그 계시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따른다.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허공을 울리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을 향한 것이라면 우리가 그 계시를 인식해야만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계시 인식이 당위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게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건 하나님의 계시가 그만큼 불완전하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잠정적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예컨대 5백 년 전만 하더라도 천동설이 가장 확실한 우주론적 인식이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 앞으로 소위 ‘지동설’이라는 우주관도 다른 우주관에 의해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인식론적 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심층적이라는 사실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우리가 <세계내존재>라는 사실이 우리의 인식론적 잠정성을 확증한다.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의 세계 이외에는 우리가 도저히 경험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는 게 바로 <세계내존재>라는 우리의 숙명인 셈이다. 거울이 없다면 자기 얼굴을 자기 볼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는 일단 여기서 접어두어야 한다.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스스로의 인식 능력이 아니라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전제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결과는 우리의 능력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으로서 우리는 계시를 인식해야만 하며,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 계시와 인식의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의 신앙과 신학 행위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곧 우리의 인식은 ‘믿음’인가, 아니면 ‘이성’인가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성은 계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계시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인식 가능한 하나님의 행위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특히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변증법적 신학이 자유주의신학에 대응하여 주장하려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적 인식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와 이에 대한 인간의 믿음만을 이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일단 이런 주장을 옳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이성을 낙관적인 능력으로 간주하고 이성에 의한 역사발전을 내다보았던 근대주의*가 인류에게 참된 행복과 미래를 보장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성만능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이성 중심의 역사 낙관론은 결구 1,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으며, 과학과 물적인 토대를 확장시켰지만 그에 못지않은 인간성 파괴를 불러왔다. 이렇게 이성을 도구적으로 신뢰하였던 근대주의와 그것에 근거한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신학에서 계시의 바람직한 인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근대주의의 특징은 계몽, 자율, 윤리, 역사, 낙관론 같은 개념에 있지만 특히 ‘이성’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주의 이전에 인간은 정치의 군주와 종교의 교황에 의해서 완전하게 지배받았다. 이런 지배라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유의 차원에까지 철저하게 작동되었다. 그러나 이제 근대주의에 이르러 인간은 그런 외적인 권위에 종속당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 판단은 곧 이성적 작업이다. 이런 이성 중심의 새로운 판단 기준은 “코기토 에르고 숨” 명제로 알려진 데카르트와 비판 철학자로 알려진 칸트에 의해서 서양 역사에서 뚜렷한 자리를 잡았다. 서양 문명과 친구처럼 지내온 기독교는 이런 사조의 영향을 받아서 철저하게 인간의 자유과 이성을 근거로 하는 신앙의 틀을 확보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근대주의의 이성 낙관론에 영향을 받게 된 이유는 과거에 교회가 행한 결정적인 오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의 발전이 크게 작용했다. 교회의 과오는 그 교회의 권위를 상대화했으며, 역사비평은 성서의 권위를 상대화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권위였던 교회와 성서의 권위가 상대화함으로써 결국 아래로부터의 권위, 즉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권위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계시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조건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기독교의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적 인식의 한계 밖에 초월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자기를 계시한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과 상관없는 존재라는 비판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있다는 무신론적 비판이 가능하다. 비록 계시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이성적 활동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전달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과 이성은 계시 인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태도라 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인 믿음과 이성이 기본적으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원적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계시 인식에서 믿음이냐, 또는 이성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접근은 기독교 신앙을 광신으로 만들지, 아니면 불가지론으로 만들지 모르겠다. 오히려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서 그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으며, 이성은 신앙을 통해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푈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믿음은 항상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믿음(fides qua, fides quea)이며, 근거이면서 동시에 내용이고, 신뢰이면서 동시에 통찰일 뿐만 아니라, 당신에 대한 신앙이면서 동시에 사실에 대한 신앙(Duglaube, Daßglaube)이다.(Abriß der Dogmatik, 87).

주관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독특하게 경험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도 함께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인리히 오트는 이성을 ‘듣고 깨닫는 이성’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성 자체는 우리에게 알려진 현상이 아니며 의지할 만한 현상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발생하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 즉 신앙의 하나님 인식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Die Antwort des Glaubens, 78 이하).

계시의 진리론적 지평
우리가 믿음과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은 계시 사건이 단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계시를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남자가 자기 가족들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자기 생각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고 하더라도,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전혀 근거 없는 사건은 아니다. 계시를 철저하게 비의적이고 독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기독교 역사 자주 등장했던 사이비 이단들이다. 그들은 40일 금식기도 끝에 갑자기 무슨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서 해석도 계시를 받아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의도와 과학의 원리 안에 가둘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돈의 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론적 지평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진리와 교회의 진리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말하면 진리는 하나다. 만약에 세상의 주장과 교회의 주장이 실제로 상반된다면 둘 중의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다. 양측의 주장이 진리이면서도 서로 상반된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진리의 기준을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여러 진리가 있는 것 같다. 자연과학의 진리, 철학적 진리, 사회과학적 진리, 종교적 진리, 더 나아가서 정치적인 진리, 경제적 진리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서로 충돌*한다고 해서 진리가 여럿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진리라고 한다면 종교적으로도 역시 진리이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의 진리와 밖의 진리가 형식적으로 구분될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진리는 결국 보편적이라는 말이다.

*미션 스쿨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예로 들어보자. 학교 당국은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예배에 참석할 것을 강요할 것이며, 해당 학생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게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양쪽 모두 진리인가, 아니면 모두 진리가 아닌가? 이런 문제의 토대는 단순히 서로의 의견이 상충되고 있는 그런 현상보다는 훨씬 심층적인 것에 놓여 있다. 전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예배에 참석하게 하는 걸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이런 갈등은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심각하게 내분을 겪고 있는 서울의 광성교회 사태도 역시 같은 문제이다.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담임목사 입장과 원로목사 입장이 더불어서 진리라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진리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인간적인 욕망과 독선에 의해서 상대방을 재단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거짓이라는 말인가? 서로 반쯤만 진리라는 말인가? 여기서 핵심은 이런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런 현상에 이르게 된 훨씬 근본적인 중심에 관계해 있다.

일종의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기독교 진리를 보편적인 진리론에 근거해서 분석하고 접근하는 일은 비신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 교리와 세계 이해를 배타적 권위에 근거한 계시의 칼로 재단했다. 이런 자기 권위적 진리론은 최소한 계몽의 시대를 거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다. 물론 기독교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서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진리론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에서 보더라도 모든 세계는 이런 진리의 빛으로 조명 받아야만 한다. 몰트만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어떤 보편타당한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선포는 모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성서의 적나라한 실증성과 교회가 선포하는 계시의 주장으로서는 불충분하다. 이것들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진술이 제멋대로 꾸민 것 같은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서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계시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조건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만 한다. 또한 하나님에 관한 기독교 진술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증명될 수 있고 필연적인 것이라 믿겨질 수 있는 해석학적 장소를 찾아야 한다.(신학의 미래 1, 11).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어떻게 참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혹은 변증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교회가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증명하려면, 기독교 계시가 보편적인 진리이해와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런 노력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계시의 진리론적 지평’이다.    


[레벨:7]流水不爭先

2018.12.28 18:40:08
*.172.97.215

글 자체가 명문입니다

몽땅 외우고 싶지만 분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 건강하십시요

목사님이 남기실 글이 너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8.12.28 21:52:20
*.182.156.135

'명문'이라 하시니, 음 

대충 주워들은 풍월로

읽는 이들의 귀에 민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글을 쓰는 수준입니다.

이렇게 한해 갑니다.

평화!



[레벨:15]은성맘

2018.12.29 04:26:20
*.165.46.3

일반 평신도는 그냥 평신도 그 이상이길 원치않는 보편적 한국교회의 실상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정리하여 올려주시는 글들이 목마른 성도들에겐 정말 소중합니다.


지난 한해동안도 영적갈등과 답답함속을 오갈때마다 이 소중한 공간속에서 위로받고

또 바른곳을 볼수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8.12.29 16:56:06
*.182.156.135

은성맘 님, 금년 한 해 다비아를 자주 방문해주시고

애독해주신 걸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하나님의 현존이 은성맘 님의 삶에 더 또렷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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