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메리 데일리의 여성신학적 착상

여성신학 조회 수 6818 추천 수 142 2005.03.22 22:58:50
3장
메리 데일리의 여성신학적 착상
-탈기독교 페미니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같은 여성신학 계열에 속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기본적으로 구별되기 때문 여성 신학자들을 한 묶음으로 처리하기는 어렵다. 앞의 강의에서도 기독교 전통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해체주의자들로부터 그 전통에서 여성 해방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내려는 개혁주의자, 또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문제에 접근하는 생태주의자들로 구별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훨씬 다층적인 여성신학의 흐름을 만날 수 있다. 이제 각각의 신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신학적 특성을 풀어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순서는 일단 가장 과격한 가톨릭 신학자인 데일리와 피오렌자로부터 상대적으로 온건한 류터와 러셀로 넘어가자. 그 이외에도 크라이스트, 트리블, 죌레, 몰트만, 특히 한국 여성신학자들의 입장은 별도로 다루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 앞의 네 명 신학자와 함께 더불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이 네 명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여성신학의 특징을 개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우선 데일리다.
여성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진보적인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1968년 <교회와 제2의 성>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기독교 신학 안에서 만이 아니라 미국 지성사회 안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한 황혜숙에 의하면 데일리는 스위스의 프리부르(Fribourg)에서 가톨릭 신학과 철학 두 부분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라고 한다. 그녀는 <교회와 제2의 성>의 집필 동기를 제2판의 ‘1975년 출판에 부치는 자서전적 서문’이라는 글을 통해서 아주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곧 1965년 9월 로마 가톨릭 교회의 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가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인용하는 그녀의 직접 진술은 데일리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여성신학자들의 마음속에 또렷이 각인될만한 자극적인, 그러면서도 매우 설득력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달 동안 방문했던 로마에서의 매일 매일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특히 어느 하루는 아주 중요했다. 나는 기자 신분증을 빌려서 주요한 회의 중의 하나를 보러 성 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언론인들에게 지정된 구역에 앉아서 나는 멀리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무리를 보았다. 크림슨 빨간색의 노인 남성들이었다. 대성당의 또 다른 구역에 ‘청중들’이 있었다. 소수의 가톨릭 여성 집단이었는데, 대다수가 머리에 베일을 쓰고 길고 검은색 옷을 입은 수녀들이었다. 거만하게 보이는 화려한 색깔의 ‘교회의 왕자들’의 복장과 초라하고 자기 격하적 태도와 침울한 의상을 입은 소수의 여성들의 대조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이었다. 신부의 손에서 성체를 받기 위하여 베일을 쓴 수녀들이 제단의 통로로 밀려가는 것은 기이한 소풍에서 땅바닥에 기어가는 개미의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회고해 보니 그것은 개미 해독(害毒)적 소풍이었을 것이다.). 연설문들이 회의에서 읽혀졌으나 모두 남성의 목소리들이었고, 연로한 빨간 옷의 남자들이 푸념하는 소리였다. 소수의 여성들, 수녀들은 유순하게 앉아서 연설문을 읽는 사람이나 그들이나 둘 다 알아듣지 못하였을 라틴어로 문서들이 읽혀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 후에 기자들의 질문을 받자, 그 여성 ‘청중들’은 거기에 참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것에 대한 고마움을 반복해서 표현하였다. 비록 한 둘의 예외가 있었으나, 그들은 대부분 어떤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나는 비록 그 장면의 완전한 의미를 즉시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여러 겹의 의미들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와 타고 있었다. 필리니(Fellini, 이태리의 풍자적 영화들을 만들기로 유명한 영화감독- 옮긴이) 영화도 이 가톨릭주의의 비의도적 자기 풍자보다 더 잘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철저하게 여성이 배제된 로마 가톨릭의 이런 종교 현상에 심각한 분노를 느낀 데일리는 프리부르에서 이 문제를 <교회와 제2의 성>이라는 제목으로 집필을 시작하다가 결국은 미국으로 돌아와 끝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서 그녀는 자신이 근무하던 보스턴 칼리지에서 해직 당했으며* 이의 부당성을 제기한 학생들과 매스컴의 도움으로 오히려 교수로 승진하고 종신 교수직을 보장받게 되었다. 보스턴 칼리지는 가톨릭 예수회 소속 대학으로서 데일리의 이 책으로 인해서 큰 충격을 받고 그녀를 축출하려고 했지만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데일리를 일약 여성신학의 태두로 만들어놓은 이 책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검토해보자.

*요즘(2004년)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진행 중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신학자의 한 사람인 강남순 교수가 2004년도에 ‘초빙교수’ 직에서 해직되었다. 그 이유는 인사위원회의 발표와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쪽에 따라서 다르게 발표되었다. 학교 측이 내세우는 명분은 자신들의 인사 규정에 따른 객관적 판단이었다고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쪽에서는 성차별에 의한 불법이라는 것이다. 즉 강 교수의 남편이 감신대의 현직 교수로 재직 중이기 때문에 부부가 같은 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는 게 적당하지 않다는 실제적인 이유가 곧 여성 차별적이라는 뜻이다. 강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 인권위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측 향해서 강 교수 문제를 시정하라는 권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1장 교회에 반대하는 소송

데일리는 제1장을 “기독교 이념은 여성 억압에 적지 않게 기여해왔다”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경구를 표제로 삼고 그녀의 책 <제2의 성>을 중심으로 교회에 일종의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제2의 성은 교회를 이렇게 비판한다.
첫째, 기독교는 여성 억압의 도구가 되어 왔다. “교회는 여성 해방을 돕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조처들에 대해서 두드러지게 적의를 가졌다.” 보부아르는 교회의 여성 억압을 속임수라는 가면이라고 보았다. “여성을 위해서는 종교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를 영구화할 여성들, ‘진정한 여성들’이 있어야 한다.”
둘째, 교회는 교리를 통해서 암시적으로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열등하다는 사고를 전달한다. 고대 이방인의 종교에서는 어머니 여신이 숭배되었는데,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것에 반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두려운 존재였다. 여성은 모성애 안에서 변화되고 예속되어야 한다.” 이 예속은 그녀에게 맡겨진 종속적인 역할을 수용함으로써만 칭송 받는 하나님의 동정녀 어머니 숭배에서 상징적으로 성취되었다.
셋째, 기독교의 도덕적인 교리는 여성을 비하한다. 특히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 안에 접목됨으로써 여성 혐오적 도덕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육체를 저주하는 종교 안에서 여성은 가장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 된다.” 보부아르에 의하면 중세 시대 이후로 여성의 육체는 모욕적인 사실로 간주되었다. 이 관점은 곧 모성을 불결한 것으로 보는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출산 이후의 정결의식은 이런 전통의 부산물이다.
넷째, 교회의 계급 구조는 여성을 배제시킴으로써 여성으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하며 심리적인 혼란 상태를 야기한다. 모든 신자들이 순전히 남자 성직자들로만 구성된 사제들에게 미사 때마다 고해성사를 드리는 것이 어린 소녀들에게 구체적인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다섯째, 여성들은 종교를 통해서 초월에 이를 수 있다. 앞에서 종교를 통한 여성의 억압이 다루어졌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라 할 수 있는 초월이 언급된다. 보부아르는 여기서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신비주의자들의 초월은 자기 학대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신경증적이고 , 감정적이고, 자아도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성녀 안젤라는 나환자들의 손과 발을 씻긴 물을 마셨다고 하며, 마가렛 메리 알라코크는 병자가 토한 것을 혀로 닦아 내거나 설사 환자의 배설물을 입안에 넣었다고 한다. 보부아르는 이런 전형적인 여성신비가들 보다 훨씬 지성적인 초월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가리킨다. 그녀를 자기의 성적 정체성을 완전히 초월한 여성 신비가로서 십자가의 성 요한과 같은 대열에 들어가야 할 사람으로 제시한다. “마침내 모든 인간이 성 구별을 넘어서 힘겹게 도달하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영광 안에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을 때 여성은 그녀의 역사와 문제들과 의심과 희망을 인간의 것으로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과 일 안에서 그녀의 개인적인 자아 뿐 아니라 모든 현실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생활에 금욕적이고 자학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게 아니다. 다른 것은 접어둔다 하더라도 이런 현상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몸과 영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기본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인간의 몸과 영혼을 학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금욕과 자학이 결국 영혼을 순결하게 지키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고 강조하겠지만, 그리고 눈이 죄를 범할 경우에 그것을 빼어버리고서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낫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언급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몸과 영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죄의 존재론적 경향을 경고하는 것이지 몸과 영의 구분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윤리에도 연결된다. 간혹 어떤 설교자들은 기독교인의 행위를 극단적인 자기희생으로 강조한다. 예컨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나, 또는 변비에 걸린 행려병자들의 항문을 입으로 빨아 해결했다는 가가와 도요히꼬(이재철 목사의 설교테이프 중에서) 같은 이야기들은 결코 기독교인들의 윤리 일반으로 제시될 수 없다. 물론 그런 극단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그런 행위들이 가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런 것에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놓이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자기 의가 아니라 예수의 의에 자리한다.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며, 이런 점에서 우리의 의는 칭의이다.  

데일리는 보부아르의 교회 비판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근거해서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을 거부할만한 도덕적 힘이 교회에 없다는 것이다. “보부아르가 제시한 대로 여성이 착취되어 왔으며, 남성과 여성의 고정된 이미지들이 그녀를 더욱 착취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그녀의 작업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통찰의 깊이를 정당하게 거부할 명분은 없다.”(데일리, 44).

2장 역사: 모순들의 기록

데일리는 2장에서 교회 역사에 드러난 여성 차별적 모순들을 집어내고 있다. 신구약성서 안에 여성 비하적인 진술은 굳이 데일리의 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명확하다. 물론 여성 차별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인간 해방과 구원을 제시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성서 안에 들어있는 두 요소의 결합, 즉 여성 차별적 요소와 비차별적 요소의 모순을 우리가 이제 구분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일리는 바울의 진술에 나타나는 언어적 모순과 양면성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집중한 바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과정의 결과라고 판단하면서, “후대의 통찰에서 혜택을 얻은 우리가 그 기원의 사회학적인 요소들과, 필연적으로 기독교 메시지와 관련된 생명 지향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들을 구별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62)고 생각한다.  
이어서 데일리는 교부시대의 여성관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터툴리안은 여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자신이 이브*인 것을 알고 있는가? 너는 악마의 입구이다. 너는 얼마나 쉽게 하느님의 형상인 남자를 파괴했는가? 네가 우리에게 들여온 죽음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아들까지도 죽어야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부차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안에서 발견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의 시작이요 끝이지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모든 피조물의 시작과 끝인 것과 같다.” 이런 언급들을 모아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몇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 뛰어난 여성 종교 지도자들이 출현하기는 했지만 교회에 의해서 억압당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부분적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개혁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여성 사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여성 차별적 2천년의 역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브가 뱀의 유혹은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자인 아담을 유혹했다는 타락설화는 기독교가 여성을 억압하는 결정적인 성서적 전거로 인용되곤 한다. 이런 텍스트를 해석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맥락은 이런 텍스트에 의해서 여성차별적인 신학과 교회질서가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여성차별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이런 텍스트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타락설화는 여성의 숙명적인 마성을 지시한다기보다는 이 타락설화가 형성된 ‘삶의 자리’가 그만큼 그 시대에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 어느 교수에게서 들은 우스갯소리 한 토막을 소개한다. 우리나라 말에 ‘여편네’는 어원적으로 ‘옆에 있네’라는 말에서 왔다. 여자의 소재로 사용된 아담의 갈비뼈는 바로 아담의 ‘옆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내를 ‘여편네’라고 부르는 것은 한글이나 성서에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3장 변화의 바람들

데일리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서 가톨릭교회 안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고 진단했다. 1963년 4월11일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교황 요한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인간 존엄성에 대해서 점점 더 인식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물질적인 도구로서 대우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가정에서 그리고 공적 생활의 양면에서 인간에게 합당한 권리들을 요구할 것이다.(n.41)
그리하여 많은 인간존재들(여성들-역주) 안에서 수천년간 지속되어 왔던 열등의식이 사라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남성들-역주)은 사회, 경제적 특권들, 성적이며 정치적인 입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우월감이 약해지고 희미해질 것이다.(n.43)
인간준재들은 그들이 선호하는 삶의 형태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에게 평등한 권리와 의무로서 가정을 만들 권리와, 사제직이나 수도자의 생활에 대한 성소를 따를 권리가 있다.(n.15)

비록 교황 요한 23세가 여성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데일리에 따르면 한계가 있다고 한다. 즉 요한 23세는 여성이 남성과 실제로 평등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황의 공의회 진술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공의회 직후에 나타난 많은 청원 운동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미사에서 성체를 받기 위해 제대 난간에 접근할 수 없었던 한 여 기자의 청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성에게 할당된 열등한 역할을 반대하는 스위스 변호사 게르트루트 하인첼만 박사의 청원, 미사 시에 사제가 말하는 “Orate fratres”(형제들이여, 기도합시다)를 “Orate fratres et sorores”(형제 자매들이며, 기도합시다)로 바꾸자는 제의에 대해 여성은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릴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주교의 입장을 반박하는 독일 여성신학자 요제파 뮌히의 청원 등등이 그런 것들이다.
많은 여성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여성의 사제권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독일의 젊은 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네덜란드 여성인 고바르트 할케 박사, 네덜란드 예수회원인 하예 반 데르 메에르, 그리고 페루 리마 대학의 예수회 신학교수인 호세 이디고라스 등이다. 한편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보수적 반동의 물결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은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데일리는 생각한다.
필자는 가톨릭교회에서 이런 여성 신학적 청원과 주장들이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했지만 약간의 수정이 있었을 뿐이지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단적인 예는 아마 여성 사제서품의 불가능일 것이다. 다른 부분이 아무리 진보적으로 발전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이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이 근본적인 한계 앞에서 가톨릭교회의 남성중심의 신앙과 체제는 극복될 수는 없다.

4장 받침대를 파는 상인들

데일리는 4장에서 현대 문화가 여성을 여성성에 묶어두는 데 한 몫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여성 이미지를 성 대상물로 축소하는 광고업자들의 신화와, 소녀들에게 경직되고 역할 결정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증진시키는 교육가들의 이론과, 여성들의 노력을 ‘남근 선망적’ 인간으로 분류하는 교조적 프로이트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행복한 주부 영웅’만을 칭송하는 여성 잡지사 편집자의 효과적인 철학 등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훨씬 심각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인형만 갖고 놀고, 남자아이들은 모형 자동차를 갖고 논다. 여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여성다운 인간으로 길들어져간다는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성 문화가 무의식으로 이런 여성차별을 바탕에 깔고 있다. 티브이 광고에 출연한 요염한 여성의 “남편의 사랑도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멘트는 결국 사랑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기보다는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런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성형수술 세계 1위라는 명예(?)를 한국이 차지하고 있다. 아무 치장을 하지 않아도 젊은 자체로 아름다운 여대생들이 방학 때만 되면 성형외과를 찾는다고 한다. 아마 여대생들의 화장 습관도 우리가 세계 1위일지 모른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여성을 상품화하는 이 시대의 결과물들이다.

5장 성 편견의 악마: 귀신 쫓기의 실천

메리 데일리는 여성 불평등의 문제가 구조화한 데에는 반여성주의 다음과 같은 시각이 톡톡히 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즉 반여성주의 학자들은 여성 스스로 ‘여성문제’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성들 대다수가 이론적으로나 사회 현실적으로 종속적인 인간 범주로 격하된 데 대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착취에 반대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 저하의 기회가 없었고, 종속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인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178쪽).
데일리에 의하면 이런 설명들은 부분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반여성주의자들의 설명에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억압된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심층적인 심리기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여성, 흑인, 독일에서의 유대인들, 이들은 자신들이 손상된 존재라는 사실을 정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악마적 왜곡이다. 성 편견이 우리 사회의 심층에 작용하고 있는 집단적 심리기제라는 것이다. 이런 악마를 내쫓지 않는다면 성 왜곡은 치료될 수 없다.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에 기대서 20세기 미국문화가 미녀선발 대회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미녀를 신화화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여성상은 성모 마리아 상과 반대되는 현상이지만 실제로 로마 가톨릭 안에는 여전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영원한 여성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미녀뿐만 아니라 영원한 여성이라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원한 여성상은 여성을 소극적이고 의존적으로 만들며, 남자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잠재력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어떻게 이런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가?
데일리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제시한대로 문제의식을 가진 여성들, 그리고 창조적인 활동과 독립을 습득한 여성들이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들어 높임으로써, 여성 이미지를 변화시킬 책임을 갖는다. 예컨대 인디라 간디가 인도에서 소녀들의 자아 이미지에 큰 영향을 준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박세리 같은 골프 선수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 분야보다는 정치, 사회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여성들이 나오는 게 훨씬 효과적인 건 사실이다.

6장 문제의 신학적 뿌리들: 요청되는 급진적 수술

귀신 축출의 몇 가지 차원을 데일리는 우선 여성 차별의 신학적 뿌리를 제거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남성중심주의ㅡ 신학의 가르침들을 유지시키고 영속시키는 기본 교리의 개념들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우선 데일리는 남성 중심의 하나님 사유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늘 높은 곳에서 살고 있으면서 ‘수염을 단 노인’으로 표상한다. 물론 지적인 사람들이 이런 표상을 극복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상상력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남자라고 말하는 신학자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남성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 내재화했다는 건 분명하다.
그 이외에도 남성중심의 기독교 세계관, 원죄론 등등에 대해서도 데일리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런 내용들은 이미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그의 입장을 요약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직접 들어보자.

인간성과 사회관계성의 역동성을 진화 관점에서 급진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적 인류학을 발전시키려는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맥락에서 남성과 여성관계의 신학이 발전되어야 한다. 그 신학은 ‘본성’에 기초하고 일회적으로 정의되는 성 계급제도의 관념을 양성 모두를 소외시키는 것으로서 거부한다. 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신학은 양성간의 관계들이 진화하고 그 형태들이 다양한 역사적 시기와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중략> 그것들은 성 역할들에 따르는 이전의 집착을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추상적 이론들로는 완벽하게 밝히거나 포용할 수 없는 구체적인 현실의 모호성을 시인할 만큼 정직할 것이다.(208쪽).

데일리에 의하면 신학의 여성혐오주의를 근절하고 역동적이고 해방 신학적인 인류학을 발전시키는 데 거침돌이 되는 요인들이 우리 사회에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들인데,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발해서 제거시키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다.

7장 동반자 관계를 향하여: 몇 가지 온당한 제안들

일단 데일리는 다음과 같은 성구를 표제로 삼고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구체적인 이슈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그의 모상대로 창조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창 1:27).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없으며, 노예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도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갈 3:29).
여성 사제*를 거부하는 교회의 논리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녀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한스 큉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여성들을 교회 성직으로 서품하는 것에 관하여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그것에 반대하는 교리적 또는 성서적인 이유들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요인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은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인 조건들에 달려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문화적 환경의 문제이다.”(224).

*철학자 움베르트 에코와 추기경 마리아 마르티니 사이의 대화를 묶은 책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가톨릭교회의 여성 사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에코는 성서의 가르침이나 오늘 이 시대의 새로운 요청으로 볼 때 로마 가톨릭에서 여성 사제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티니는 대충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에코의 모든 주장이 정당하고, 본인도 여성 사제의 불허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교회는 역사를 기계적인 발전이 아니라 신비의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여성 사제 문제를 급하게 처리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에코가 볼 때 그런 역사의 신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때가 충분히 지났지만 마르티니의 생각에 따르면 아직 그 때(카이로스)가 이르지 않았다. 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얼마나 보편타당한 논리에 근거해서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개신교에서 여성 목사들이 나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서 로마가톨릭교회보다 남녀평등이 훨씬 정상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일단 외형상 숫자에서도 여성들이 전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며, 그나만 여성 목사들의 활동은 거의 남성 목사들의 보조 역할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여성이 담임 목사로 시무하는 교회가 아주 드물 뿐만 아니라 그나만 중대형 교회는 전무한 실정이다. 여기에는 기득권자들이 남성 목사들의 횡포도 작용하겠지만 교인 비율의 6,70%가 넘는 여성 평신도의 무신경도 한몫 단단히 한다. 그들은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 목사를 담임 목사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오랜 시간 남성 목사들만을 중심으로 담임 목사 제도가 실행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그래도 여성 신자들의 책임을 완전히 지우기는 힘들다. 이는 바로 한국의 여성 일반에게 나타나는 남아선호사상과도 맥이 닿는 현상이다.

결론 제2의 성과 초월의 씨앗들

데일리는 여성차별주의의 책임을 무조건 교회에 돌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가부장적 요인들이 인류 진화의 단계에서 어쩔 수 없었던 생존의 기술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부장적, 여성차별적 구조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일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기독교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부담스러운 짐으로서 거부했다. 이것에 대한 생명 긍정적인 대안은 고대의 유산을 넘어서 이미 우리 안에 그 씨앗들이 있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라고 우리를 부르는 해방적인 힘에 대답하는 것이다.  ... 우리는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희망의 신학을 택한다. 그것은 전자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현존하지만 항상 숨어 계신다. 그리고 그 현존에서 나오는 사명은 우리의 활동에 초월의 차원을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252).

1965년 2차 바티칸공의회 참석한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교회와 제2의 성>을 쓴 메리 데일리는 첫판이 나온 지 17년 만에 1985년 제3판을 출판했는데, 이때는 이미 교회를 떠난 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떠남을 이렇게 표현한다. “만일 떠나게 하는 이 힘이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영적인 힘들의 실현이라면 이 떠남은 살아있는 신앙의 도약 이후의 도약을 포함한다. 나는 살아있는 신앙은 여성들에게 가부장적 종교를 벗어나도록 추진하는 반면에, 죽은 상징들에 눈먼 신앙은 여성들을 그 여성 학살적이며, 영을 죽이는 미로 안에서 길을 잃게 하고/붙들리게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확신하고 있다.”(331). 이제 그녀는 ‘탈(脫)기독교적 여성주의’에 근거해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녀로서는 전혀 다른 신앙적, 신학적 패러다임의 시작인 셈이다.

탈기독교가 유일한 길?

필자는 데일리의 기독교 분석과 도전과 독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특히 ‘남편의 그늘’에 기대서 정신적으로 나태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국 여성들에게는 그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람들은 늘 그 시대에서는 일반적으로 반역자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데일리도 역시 그런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정확하게 그녀의 책을 이해했다면 그녀는 스스로 ‘마녀’가 되려고 작심한 것이다. 이런 마녀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 기독교의 역사를 오늘 재현함으로써 기독교의 여성 차별적 음모를 노출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기희생적 행위는 영적 초월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보수적이라는 말을 들을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여기서 그녀의 선택만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비록 교회 전통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여성의 인간됨(Menschwürdigkeit)을 상실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적 논리로 완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늘 영적인 감수성을 닫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한다. 예컨대 인도나 파키스탄의 가난한 민중들도 우주와의 합일이라는 새로운 영적 경지를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극단적인 예로 아메리카에서 노예로 살던 흑인들 중에서도 역시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비인간적이고 불의한 사회 질서를 옹호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생명의 힘은 반드시 우리가 의도하거나 실천하는 방식 안에 갇히는 게 아니라 예상 밖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오직 회심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이런 차원에 적합하다. 이제 교회 변혁의 한계 때문에 교회를 떠남으로서 창조적인 교회 공동체와 사회를 끌어내고 싶은 사람은 그런 길을 택할 것이며, 여전히 교회 전통 안에서 그런 길을 가고 싶은 사람은 그 안에 머물 것이다. 어느 쪽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한 것인지는 훗날 판단될 것이다.

*부패한 교회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구원의 징표들을 유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교회력에 따른 ‘성무일과’와 세례와 성만찬이 집행된다면 성령 스스로 이런 통로를 통해서 신자들과의 영적인 만남을 끌어내신다는 말이다. 거꾸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투철하게 우리를 개혁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영이 자동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우리는 끊임없이 개혁적인 태도를 유지해야하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 개혁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족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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