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엘리자베쓰 쉬슬러 피오렌자
-여성 에클레시아를 꿈꾸며-


위에서 다룬 데일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다룰 피오렌자(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역시 가톨릭 여성 신약학자다. 독일 출신이긴 하지만 활동 무대는 미국이다. 피오렌자의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 신학적 재건>을 번역한 김애영에 의하면 피오렌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하버드 대학 신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다. 메리 데일리는 가톨릭, 개신교를 불문하고 가장 극단적인 여성신학자인 반면에 피오렌자는 비교적 기독교 전통을 안고 가려는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 온건하기는 하지만, 성서 해석에서 성서자체 보다는 여성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류터나 러셀보다 과격한 편에 속한다. 피오렌자가 제시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비판적 해석학 모델을 통해서 그의 기본적인 구상을 살펴보자. 그녀는 이 여성 신학적 비판 해석학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의심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suspition), 선포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proclamation), 기억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rememberence),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a hermeneutics of creatualization).

의심의 해석학

피오렌자가 굳이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명칭을 여성 신학적 해석학의 첫 번째 요소로 붙이긴 했지만 이 용어가 반드시 여성신학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학문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전통을 좋은 뜻이든 부정적인 뜻이든 의심한다는 점에서 의심의 해석학이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자연과학도 역시 기존의 이론에 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의심의 해석학이 없었다면 인간의 역사 발전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이런 의심에 대한 의심의 눈길이 없지 않다. 특히 보수적인 입장이 강한 사람들은 전통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이라는 말을 불온하게 생각한다. 물론 기독교 자체를 파괴하기 위한 의심이라고 한다면, 흡사 지난 7,80년대에 우리 남한 사람들이 간첩을 신고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의심하던 것처럼 의심을 위한 의심이라고한다면 무의한 일이 되겠지만, 합리적 이성으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판단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런 작업이 여성신학의 입장에서는 매우 절실하다고 보겠다. 2천년 동안 순전히 남자, 특히 유럽의 남자들에 의해서 전개된 기독교 신학을 향해서 여성들이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즉 의심의 해석학은 성서가 남성 중심적이고 더 나아가서 가부장적인 토대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피오렌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 본문의 페미니스트 성격과 해방적 진리를 전제하지 않고, 그것(혹은 의심의 해석학)은 모든 성서의 본문이 문법적으로 남성적인 언어로 기술되었으며, 가부장제적 문화, 종교, 사회 안에 깃들여 있으며, 그리고 오랫동안 남성들에 의해 정경화되고, 해석되고, 선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에 의존한다. 의심할 바 없이 성서는 남성의 책이다. (Fiorenza, A Feminist Critical Interpretation, p. 23.).

피오렌자는 이 의심의 해석학을 예수님의 비유를 인용해서 재치 있게 설명하고 있다.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이 그것을 찾을 때까지 모든 마음을 동전에 집중했듯이 여성신학은 성서 안에서 여성의 해방경험을 탐색하는 작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서 안에 있는 그런 경험을 가리켜 그녀는 “힘을 부여하는 동전(empowering Coin)”이라고 일컬었다.
피오렌자 같은 여성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에 따라서, 성서가 형성된 당시의 가부장적인 질서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여성에 대한 성서신학적 연구는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부분에 대한 국내외 연구논문을 참조하려면 <기독교 사상>이나 <신학사상>을 보면 된다. 특히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한 <여성해방을 위한 성서연구>(김윤옥 편)는 우리에게 성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선포의 해석학
피오렌자가 “선포의 해석학”을 주창하는 이유는 의심의 눈초리로 성서 안에서 발견한 여성 해방적 요소들을 단지 학문적 성과로만 남겨두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선포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페미니스트 해석학의 선포하는 기능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 부분은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된 복음의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해석학에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에서도 역시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제 새롭게 발견된 사실들을 현장에 선포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철호의 설명에 따르면 선포의 해석학에는 이중의 가치 판단이 작동된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본문 안의 남성 중심적 기술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그리고 하나님 공동체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긍정하는 대안적 전통과 본문을 모색한다. 전자의 가치판단은 의심의 해석학과 연관된다고 한다면, 후자의 가치판단은 선포의 해석학에 해당된다. 즉 성서의 여성 해방적 능력이 실제로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윤철호의 직접 설명을 조금 따라가 보자.

그러므로 선포의 해석학은, 성차별적이거나 남성 중심적인 것으로 판명된 모든 본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교회에서 사용되는 성구집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반면에, 가부장제적 상황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와 통전성에 대한 해방적 비전을 기술하고 있는 본문들은, 예배와 가르침에 있어서 그들의 적절한 자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비판적인 페미니스트 해석은 특수한 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성서 본문의 억압적이거나 해방적인 영향력을 보기 위한 (성서본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신학적 평가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기독교 인식론과 해석학, 459f.).

오늘 한국교회에 여성신학이 실제로 선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는 못하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이원성이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자기의 삶과 일치하는 것보다는 이원론적으로 나눔으로써 결국 신앙이 삶의 역동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부분적으로 여성신학의 목소리가 외쳐진다고 하더라도 이미 가부장적인 신앙체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혁명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한 시대가 지나가야만 패러다임 쉬프트가 가능하다는 토마스 쿤의 지적처럼 여성신학이 교회 안에서 선포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패배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이런 선포의 해석학이 현실화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만 교회의 진정한 변화가 역사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기억의 해석학
피오렌자가 제시하는 기억의 해석학은 단순히 성서의 여성 해방적 근거를 찾아내는 것에 머무는 게 아니라 성서에서 여성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차원까지 이르는 과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피오렌자는 단지 성서를 성서의 전통에서 개혁해 내는 러셀이나 류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여성의 해방 경험에 근거해서 성서 자체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손승희의 설명을 들어보자.

바로 성서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여성들의 경험, 곧 성서의 역사 안에서 힘을 모아 투쟁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을 기억하며 발굴해내는 일이 여기에 요청된다. 이것은 남성 중심적 본문이나 가부장제 중심의 전통을 성서에서 제거해버리는 작업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본문과 전통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앞서간 자매들의 고난과 소망의 경험들을 기억하는 일이다.(여성신학의 이해, 108).

김호경은 “전쟁, 여자 그리고 침묵”(기독교 사상, 2004년 2월호, 92-99)에서 사사기 19:1-21:25을 중심으로 조연으로 등장하는 한 ‘레위인의 첩’ 이야기를 풀었다. 김호경에 의하면 “한 남자가 첩을 취하고 그 여자가 집을 나간 매우 사사로워 보이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쟁이라는 대서사시로 변모하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21장25절을 통해서 이 전체 이야기는 이스라엘에 왕정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도구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결국 레위인을 위한 해피엔딩의 구조로 꾸며졌지만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첩의 죽음은 그 어디에서도 기억되지 않고,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가 정의로 행세한다. 김호경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 레위인의 첩을 다시 무대의 중심으로 올려놓는 시각으로 이 성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우리를 해석한다.”고 생각하는 김호경은 그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고 진술한다.
레위인의 첩은 말 한마디 없이 죽어갔지만 그녀의 죽음은 이미 정의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레위인이 일으킨 전쟁은 빛나는 승리로 끝났지만, 이야기는 이미 그 전쟁의 불의를 폭로한다. 다만 우리가 묻지 않았기에 부당한 희생과 명목 없는 전쟁의 실체가 드러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의 이면에는 구조적 불평등의 폐해 속에서 입막 벙긋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치고 있다.(98쪽).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담긴 해방적인 사건들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 새롭게 재구성해낼 수 있는 ‘기억의 해석학’은 여성신학에서 매우 진지하게 수행해야 할 작업임에 틀림없다.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
피오렌자가 구상하는 여성신학의 해석학적 구성의 네 번째 요소는 미래지향적 차원을 가리킨다. 의심을 통해서 성서에서 여성 해방적 자료를 발견하고 그것을 선포하고, 더 나아가 성서에 드러난 여성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머물지 말고 미래를 새롭게 건설해 나가자는 요청이다. 여성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상상력과 예술성과 직관을 개발해서 성서의 새로운 역사를 실현해나가는 작업이다. 윤철호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성서 본문에 대한 이러한 페미니즘적인 창조적 현실화는 이야기들을 항상 새로운 형상과 상징 속에서 다시 이야기하려고 시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창조적 현실화의 해석학은 옛날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서의 신앙공동체 안의 여성을 위한 예수의 중요성과 성서의 하나님을 다시 명명하려고 한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러한 일이 오직 성서본문의 억압적인 또는 능력을 부여하는 부분들을 분명히 규정하는 비판적인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463,f.).
창조적 실현의 해석학은 앞에서 제시된 세 가지 해석학을 총괄하는, 또는 구체화하는, 또는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여성의 고유한 경험이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접목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지금 한 두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단지 과거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작업이나 그것의 재구성에 머물지 않고 내일을 내다보며 무엇인가를 준비한다는 것은 훨씬 포괄적인 학문작업과 또 어떤 점에서는 정략적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기독교가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른 국가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가부장적 질서에 묶여 있는 한국교회가 앞으로 50년 후에 이루어야 할 교회형태를 실현해내기 위해서 무슨 일부터 시작해야하는가? 이 문제는 어쩌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것처럼 당위만 있지 현실성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남녀평등의 구조로 바꾸기를 기다리는 게 훨씬 지혜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회 내외적인 변화를 기다리면서 페미니즘적 기독교 영성을 심화해나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부장주의와 제국주의
우리는 피오렌자가 제시하고 있는 이런 페미니즘적인 비판적 해석학의 구상을 타당한 시도라고 인정해야만 한다. 성서와 그 역사가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 차별적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날카롭게 비판하고 의심해야만 한다. 그런 의심의 해석 없이 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의 역사적 한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된다. 성서를 단지 여성의 분노와 적대심으로 의심한다기보다는 성서의 가부장적 한계를 직시함으로써 그 성서가 명시적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여성 해방적 요소를 다시 발견하려는 피오렌자의 신학 작업은 여성신학만이 아니라 신학 일반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피오렌자가 성서해석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여성의 경험’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인 토대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시비 걸듯이 약간의 토를 달 수 있다. 즉 이미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성서에서 여성 해방적인 힘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한다면 결국 남성과의 경쟁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그것이다. 즉 여성과 남성의 문제는 더불어서 참된 생명의 세계로 나가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허물어지 않으면 안 될 제국주의적 폭력은 아니라고 볼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제국주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스스로 교정해나갈 수 없는 일종의 본질에 속하지만 가부장제는 인류사에 잠시 등장했던, 인류가 진화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작동되었던 일종의 ‘필요악’일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제국주의적 질서를 깨고 참된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신앙고백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오늘의 여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질서와 싸워야 할 것이다. 이런 투쟁이 여성신학자들에게는 성서와 신학을 재구성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성서의 하나님이 왜곡되고 고착화한 질서를 허물고 해방지향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삶 안에서 성찰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악한 현실을 바꾸어나가도록 힘을 써야 할 것이다. 다만 성서에 표현되어 있는 가부장적 질서는 그 시대적 한계였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말이다. 즉 제국주의적 요소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지만 가부장적 요소는 이미 거의 제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신학의 핵심 주제로 삼기에는 어딘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서의 주제는 인간의 욕망과 정치, 경제의 악한 힘으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가에 있었지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적 요소의 가치판단은 결코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그렇다고 해서 여성신학의 이러한 문제 제기를 부당하다거나, 또는 오늘의 사회가 이런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 요인을 완전히 해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성서에서 여성 차별적 요소를 찾아내고 그것의 문제점을 밝히며, 그것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건 반드시 신학적으로 필요한 작업이긴 하지만 그런 분석에 근거해서 성서의 내용과 신학의 내용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데까지 나가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재구성인 자칫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내재해 있는 신앙의 본질까지 훼손시킬 개연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에클레시아
이제 피오렌자의 페미니즘 신학 구상이 열매를 맺는 대목을 검토하자. 그녀가 성서를 여성 신학적 비판 해석학에 근거해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이런 실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피오렌자는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 신학적 재건>의 후론에서 ‘페미니스트 성서적 영성을 향하여 : 여성들의 에클레시아’를 꿈꾸고 있다.
우선 피오렌자는 ‘에클레시아’ 개념으로부터 자신의 구상을 전개한다.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용어, 즉 에클레시아는 종교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시민-정치적 개념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시민들 자신의 영적-정치적 문제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모이는 그들의 실제적인 집회를 의미한다. 가부장적 교회에 있어서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신학적-종교적 문제들을 또 그들 자신의 사람들, 즉 여성들의 문제들을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성들의 에클레시아는 오늘의 현실이 말하듯이 그만큼 미래적 희망이다.”(418). 그녀의 마음에 불타는 여성 에클레시아는 남자됨의 우상 숭배적 예배를 거부하고 여성의 인간적 실존과 언어로 신적 표상을 표현하는 공동체이다. 그런 공동체는 지배와 전쟁, 소유와 욕망을 부추긴 지난 2천 년 동안의 남성 중심의 교회를 극복하고 진정한 생명 지향적 공동체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성 에클레시아 운동에 대한 두 가지 부정적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피오렌자는 의식하고 있다. 첫째, 여성들의 교회가 교회의 충만성을 갖지 못한다. 비록 여성만으로 구성된 교회에 어떤 한계가 없을 수 없으나 그것은 남성 중심의 교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 수도사들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가부장적 구조와 계보를 제거함으로써 여성들의 공동체를 여성의 에클레시아로 변혁시켜나가는 일은 매우 창조적인 작업이다. 둘째, 여성 에클레시아는 ‘전도된 성차별주의’이다. 이런 반대는 남성들과의 상호성을 강조하는데, 이런 반대의 약점은 현재 교회의 가부장적 억압과 권력의 문제를 충분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오렌자에 따르면 현재의 남성 중심적 교회의 폐해는 여성 에클레시아가 불러올 문제에 비해 훨씬 심각하기 때문에 여성 에클레시아는 상대적인 우월성을 확보하고 있다.
피오렌자는 이렇듯 독특한 여성 에클레시아를 주장하면서도 그동안 출산과 양육의 문제를 가진 여성에 대해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런 운동은 이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양육과 사회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피오렌자는 여성의 몸이 페미니스트 영성에서 중심적 역할을 감당한다고 주장한다. “육체적 존재는 여성들의 에클레시아로서의 우리의 영적 형성에 대하여 손해이거나 주변적이지 않고 그 형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며 중추적이다. 영혼 혹은 정신 혹은 가장 내면적인 자아가 아니라 육체가 우리의 존재인 교회를 위한 표상이며 모델이다. 여성들의 육체가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불임 당하고, 훼손당하고, 매춘 당하고, 남성적 목적들에 이용당하는 한 어떻게 우리는 성만찬적 빵에 참여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425). 몸의 자유를 상실한 여자들이 참된 성만찬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여성 에클레시아는 필연적이라는 뜻이다.

열린 미래
필자는 피오렌자의 여성 에클레시아 구상에 대해서 참신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대안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만약 정통 교회가 가부장적 질서에 찌들어 있어서 도저히 개혁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성들만의 에클레시아보다는 여전히 남성과 함께 이루어 가는 교회가 훨씬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흑인들이 흑인들만의 에클레시아를 조직할 수 있고, 외국인 노동자가 외국인 노동자들만으로 에클레시아를 조직할 수도 있지만 여성 에클레시아는 그런 소수자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일단 교회의 구성원은 여성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구조적 문제로 인해서 여성의 문제가 현안으로 다루어지지 못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만의 에클레시아를 조직하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보다는 기성 교회 안에서 투쟁하는 데서 파생되는 어려움이 가벼울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여성들만의 에클레시아가 참된 생명 지향적 공동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분명한가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기대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여성도 역시 인간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들의 역량이 확보된다면 그 안에서도 역시 지금의 가부장적 교회에 나타나는 문제들이 불거지게 될 것이다. 대학생들의 경우에도 남학생들만 후배들에게 난폭한 게 아니라 여학생들도 역시 후배들에게 난폭하게 대한다. 소위 ‘군기’를 잡는다고 같은 여학생이 후배 여학생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일이 허다하다. 아마 이런 현상은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천 년 동안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인 교회의 상처를 변호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그런 구조가 인류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변화된 이 세계 속에서 교회는 훨씬 적극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모색해야만 한다. 즉 가부장제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는 게 아니라 남성과 기득권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과거 지향적 집단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아래와 같은 존 캅의 진단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이제까지 논의한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미 상당히 사라져버렸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가부장제의 종말이 시작된 것을 목격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부장제의 노골적인 모습들이 종말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주 최근까지도 당연시되었던 것들이 상당히 깊은 수준에서 의문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결혼제도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 이상 전혀 명백하지가 않다. 사회의 기본 단위, 곧 어린 자녀를 둔 이성애 부부를 생각해 보더라도, 남녀가 배우자 관계에서 뚜렷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더 이상 분명하지 않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 중에서 어떤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고, 어떤 것이 바뀔 수 있으며 바뀌어야 하는지도 더 이상 분명하지 않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여성이 뚜렷한 기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성 역할 변화와 함께 여성의 공헌과 남성의 공헌 사이의 구분이 없어질 것인지, 도대체가 더 이상 분명하지 않다. <존 캅, 구미정 역, 교회 다시 살리기, 한국기독교 연구소, 2001,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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