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3장 계시와 역사(3월24일)

조직신학 조회 수 5979 추천 수 63 2005.03.23 23:39:55
3장
계시와 역사

우리는 앞에서 계시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루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이성에 반하지 않으며, 이는 곧 계시가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삼위일체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 행위와 동일시하는 이 보편적 인식론에 가장 접합한 용어는 바로 ‘역사’이다. 물론 이 역사도 불트만처럼 실존적 역사성으로 보는지, 바르트처럼 변증법적인 원역사로 보는지에, 또는 판넨베르크처럼 해석학적인 보편사로 보는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계시가 담지하고 있어야 할 보편적 진리의 지평을 확보하기 위한 개념으로서는 가장 접합한 용어이다.

계시와 자연
이제 우리는 ‘계시와 역사’의 문제를 자연, 실존, 말씀과의 논의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20세기의 변증법신학*이 이런 세 가지 주제로 계시개념을 신학적으로 심화했으며, 그것이 계시를 역사로 이해하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변증법 신학은 주로 독일어 사용권에서 1920대로부터 1930년 대 초에 활동했던 신학 운동이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칼 바르트,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게오르그 메르쯔, 트루나이젠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중간시대(Zwischen den Zeiten, 1923-1933)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사유와 경험, 그리고 문화와 철학과 종교성을 핵심 주제로 삼던 자유주의신학과 달리 하나님의 피안성과 그 절대성을 강조했다. 변증법 신학은 일정한 신학적 프로그램을 정립하거나 학파를 세우는 꾸려갔다기보다는 그들 앞에 있는 신학을 주석하고 교정하고 관점을 새롭게 세우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작업의 중심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확고한 신념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신학을 ‘말씀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말씀 앞에서 인간이 위기를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위기의 신학’이라고도 하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이 끝까지 같은 입장을 견지하지는 못했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각각의 특징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브룬너는 자연, 불트만은 실존, 바르트는 말씀에 강조점이 있다.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에 대한 반대 입장을 천명한 신학자들 중에서 현대신학의 현장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에밀 브룬너이다. 브룬너는 우선 쉴라이에르마허와 신개신교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바르트와 같은 입장이다. 그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1판(1918)을 적극적으로 옹호했지만, 1934년에 이르러 자신의 <은총과 자연>을 출판하면서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신학을 배척한다. 즉 그는 자연과 앎과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송두리째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상응하는 창조와 보존은총의 관점을 놓쳐버리는 바르트와 길을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브룬너가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통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구분할 때 브룬너는 자연을 일반 계시로 생각한다. 그는 롬 1:18-20, 2:14,15, 행 14:8 이하, 17:22 이하에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이나 성서의 전통과 다른 게 아니라 주장하다. “우리는 일반계시, 혹은 창조 안에 있는 계시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성서가 이를 착오 없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의 입장에서 가르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론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전통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E. Brunner, Revelation and Reason, 7).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계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를 배척할 수는 없다. 위에서 브룬너가 자신의 성서적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롬 1:18-20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창조물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브룬너와 바르트의 결정적인 대립점이 놓여 있다. 브룬너는 이런 자연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바르트는 칼빈의 입장에 기대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부정한다. 이것인 곧 그들 사이에 격렬하게 전개된 ‘접촉점’ 논쟁이었다. 과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접촉 가능성이 없는가, 아니면 부분적일지라도 남아있는가, 하는 점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절대타자’(totaliter aliter)로 보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접촉점을 인정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창조와 은총에 주도권을 둔다면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베스터만이 설명하는 브룬너의 입장에 귀를 기울여보자.

첫째, 하나님의 형상에서 형상적 의미와 질료적 의미를 구별해야만 한다. 형상적 의미는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것으로서 이는 인간의 인간됨이다. 그러나 질료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둘째,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다.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며, 모든 사역은 그의 주되심을 찬양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 된 세계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즉 성서가 증언하는 창조로부터의 찬양이다. 그러나 창조계시는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 인식에 충분하지 않으므로 올바른 자연적 하나님 인식을 오직 그리스도만 갖고 있다. 셋째, 하나님은 그의 보존하시는 은총 가운데서 타락한 창조일지라도 그것에 가까이 계신다. 넷째, 보존은총의 영역에 질서가 있다. 다섯째, 접촉점은 형상적 하나님의 형상이다.(Claus Westermann, Karl Barth Nein. Eine Kontroverse um die theologia naturalis. E. Brunner-Karl Barth(1934), in: EuTh. 47.Jg., 9-10, 1987, 387).

물론 칼 바르트는 브룬너의 이 자연계시를 ‘아니다’라고 비난한다. 브룬너가 타락한 인간에게도 파괴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바르트는 이렇게 수사학적 표현으로 질문한다. “물에 빠져 죽을 자가 건짐을 받은 후에 자기는 인간이지 쇠뭉치가 아니라고 자신의 구원받을 자격에 대해 주장해도 좋은 것일까?”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두 신학자의 논쟁에 더 이상 깊숙이 끼어들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런 접촉점 논쟁은 양자 사이에 접근 방식의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서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즉 바르트는 브룬너의 자연계시 주장을 인간의 자연적 인식론에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 반면에 브룬너는 계시의 자연적 성격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두 사람이 각자의 입장에서는 서로 옳은 말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계시 문제에 한해서 판단한다면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보다는 브룬너의 자연계시가, 즉 창조론적이고 은총론적 계시이해가 신학적인 점에서 우리에게 훨씬 풍요로운 사유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계시가 단지 자체적으로 충분한 게 아니라 그 토대에 그리스도 계시가 놓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창조와 자연의 이치에서 우리가 아무리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사건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만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 계시는 끊임없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그 내용을 심화해나가야만 한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재림이 물질적인 이 세상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특히 21세기의 중요한 화두라 할 생태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넓혀가야 한다는 말이다.

계시와 실존
브룬너가 자연계시 논쟁으로 바르트로부터 떨어져나갔다면 자유주의 신학의 값싼 낙관론을 대항하면서 바르트와 똑같이 변증법적 신학의 길로 들어섰던 불트만은 실존론적 성서해석으로 말씀객관주의를 신봉하던 바르트와 다른 길을 갔다.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소위 ‘탈신화화’ 논쟁의 핵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즉 그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 성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으려면 당연히 탈신화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탈신화화는 비록 그 말이 성서를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개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서를 진리의 차원에서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성서가 전승되고 기록된 시대가 신화의 시대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서의 내용에도 당연히 이런 신화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신화를 계몽된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신화적 표상으로 기록된 성서를 읽으면서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은 그런 신화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것이 그것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즉 성서의 실존적인 진실을 찾아내는 게 곧 탈신화화 작업인 셈이다. “신약의 선포가 타당성을 가지려면 그것을 탈신화화 하는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R. Bultmann, Neues Testament und Mytologie, in: Kerygma und Mythos 1, 22). 이런 점에서 불트만의 성서해석은 토대는 역사와 실존인 셈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계시는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사건, 그래서 전혀 다른 그 무엇으로서 역사로부터 고립된, 또한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역사는 역사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역사를 뜻하는 게 아니라 하이데거로부터 영향을 받은 실존적 역사, 즉 역사성이다. “그리스도는 케리그마 밖의 어느 곳에서도”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케리그마는 “일반적 진리나 무시간적 관념”을 선포하는 게 아니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아니다.”(Die Bedeutung des geschichtlichen Jesus fuer die Theologie des Paulus, in: GuV 1, 208). 그런데 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이 선포에 의해 케리그마로 받아들여질 때 발생한다. 이 현재적 케리그마가 바로 계시의 순간이며, “지금, 그리고 여기서” 사람과 만나는 케리그마가 곧 계시다.
불트만이 제시하고 있는 계시의 실존적 지평은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배척해도 좋을 만큼 만만한 게 아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이 그리스도 계시였든지 말씀 계시였든지, 인간과의 실존적 만남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트만의 주장처럼 반드시 케리그마로 선포되어야만 계시가 되는 것인지에 관한 논란은 우리의 인식론과 존재론 전반에 걸린 큰 담론에 속한다. 먹구름 때문에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이 논리가 정당하다면 실존 계시는 그 근거를 상실한다. 그러나 먹구름 위에서 태양이 빛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빛을 줄 수 없다면 실제로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 아닐까? 이 논리가 맞는다면 실존 계시는 설득력을 갖는다. 우리가 어느 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기는 힘들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존재론에 우위를 두는 기독교 신학의 정통을 따른다면 우리의 실존적 경험이 전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계시는, 또한 그 계시 사건은 현실적(wirklich)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실존적 경험에 중심을 둔 공간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에 중심을 둔 시간적 관점이라는 기독교의 전통적 세계 이해에 근거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실존 계시는 역사 계시로부터 끊임없이 세례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다만 실존 계시는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체화하고 적용해야 할 하나의 관점으로 실효성이 있다 하겠다.

계시와 말씀
자연계시와 실존계시를 거절하고 그리스도 일원론적 계시이해에 집중하고 있는 바르트의 입장을 우리는 ‘말씀계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 사건인 그리스도는 자연이나 실존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말씀은 계시 이전에 바르트이 모든 신학을 끌어가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주가 말씀하셨다.”(Dominus dixit)는 명제는 바르트 신학의 출발점이다. 이는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그러나 계시의 유일한 사건이다. 이것은 성서의 유일한 관심이며, 따라서 동시에 신학의 유일한 관심이다.(H. Zahrnt, The Question of God, New York 1969, 19). 바르트에게는 인간의 하나님 인식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사고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사고가 성서의 내용을 구성한다. 성서에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말씀하신 것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향한 길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증언되어 있다.(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28).  

물론 바르트의 이런 말씀 실증주의가 단순히 문자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성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삼중의 형태를 보인다. 첫째는 계시된 말씀, 둘째는 쓰인 말씀, 셋째는 선포된 말이다. 이런 말씀의 삼중적 형태는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교회의 선포에서 인정된 성서로부터, 혹은 성서에 기초한 교회의 선포로부터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쓰인 말씀을 우리는 선포를 완성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혹은 계시에 의해 완성된 선포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 증언된 계시를, 혹은 계시를 증언하는 성서를 이해함으로써 알 수 있다.(KD 1/1, 124).

말씀의 변증법적 삼중 형태를 통해서 바르트는 소박한 성서주의나 완고한 기계적 축자영감론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불트만처럼 역사적 실존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돌입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문자로서의 성서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그 성경의 본래적 사건인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것이 실존적으로 전달되는 현재적 선포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통해 그 역동적 의미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가 이렇게 삼중구조를 역설하고 있지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 안에 있다’는 사실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명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말씀의 삼중구조가 언급된다고 보아야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계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곧 ‘육신을 입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곧 계시이다.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놓여 있듯이 계시론의 중신에도 역시 그리스도가 놓여있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된 것, 그리고 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에서 발생한다. 영원한 말씀이 육신을 입음이,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사건의 현실성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자신의 자유를 증거한다.(KD 1/2, 1). 이런 점에서 그의 계시 이해는 그리스도 일원론적이라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런 계시론적 특성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자연신학을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다. 자연신학을 향한 바르트의 비판은 바르트 신학의 강점이면서, 동시에 그의 신학적 완고성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가 볼 때 자연신학은 구원의 가능성과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을 존재유비에서 찾아보려는 태도이다. 이런 존재유비(analogia entis)는 인간의 인식론적 사유를 통해서 하나님을 모색하는 인간학적 방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자연신학은 거짓신앙이며, 불신앙이다. 자연신학에서 하나님을 무엇이라 하든지 거기서 인식되는 것은 우상이기 때문에 자연신학은 “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에서만”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바르트가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술어로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주어로 언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

나는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우리의 상황을 성격 지우려 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sollen).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nicht können). 우리는 이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무능력을 알아야 하며, 그리고 이것으로서 하나님께 경위를 드려야 한다.(Das Wort Gottes 민 Aufgabe der Theologie, 199).

인간의 모든 문화와 이성활동과 역사를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 앞에 직면해야만 한다는 바르트의 계시론적 특성은 그리스도론적인 역동성을 부각시킬 수 있지만 결국 계시론을 편협하게 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를 국한시킴으로써 인간의 역사는 계시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이다. 물론 설교자들에게 한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충고한 바르트가 실제로 이 세상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냉전시대에도 사회주의를 가능한대로 적극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다만 아무리 선한 정치, 예술, 교육,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있어야 할 또 하나의 계시, 또 하나의 하나님 인식의 통로가 아니라는 점을 그는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근대주의 이후 서양문명이 걸어왔던 폭력과 야만의 길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원론적 계시를 배타적으로 증언한 바르트의 신학적 패러다임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신학이 늘 교의학적인 자기해명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그런 자기해명이 아무리 심층적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계 전체를 창조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하는 사실과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라는 사실을 인식론적으로 구분해서 볼 수는 있겠지만 이원론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보편적인 진리의 지평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해명해야 할 기독교 신학으로서는 하나님의 창조인 이 세계와 역사를 단순히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취급하는데 머물지 말고 통전적(integrity)으로 해석해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로서 존재하는 그 하나님의 행위가 곧 세계이며 역사이기 때문이다.

계시와 역사의 관계
이제 우리는 계시와 역사의 문제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끌어올린 신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전에 일반적인 관점에서 계시와 역사의 관계를 약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는 사건인 계시가 곧 성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옳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신자들에게 성서를 읽게 하고, 설교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사실에 대한 증언이 성서라는 차원에서 성서도 역시 계시라는 말이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과연 성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혹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을까? 만약 아전인수나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빠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성서에서 일치된 구원 사건과 계시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처럼 정치적인 해방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정의로운 나라로 만들기도 하고, 욥기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윤리를 뛰어넘는 존재의 거대한 힘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승된 이야기이니까 그렇다하더라도, 신약성서는 일목요연한 계시 사건이 진술되어 있을까?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뜻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즉 구원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신약성서는 더 이상의 논란이 개입될 수 없는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도 있고, 그런 믿음 없이 단지 가난하거나 소외당한 사람들이 구원받기도 하며, 육체적인 질병에서 치료되는 것을 구원이라고도 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현재적으로 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초월적이고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다. 예수 사건의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부활에 관해서도 신약성서가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복음서는 예수 부활의 현상만 서툰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며, 바울의 서신은(고전 15장) 철학적인 방식으로 논증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부활을 확신하고 있을 뿐이지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초기 기독교의 부활 경험에 진정성이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신약성서의 접근 방식이 실험실에서 어떤 과학적 사실을 증명해내는 방식이 아니라 앞서 경험하는 진리를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다양하게, 선취의 방식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훨씬 근원인 사실이 우리가 계시 사건을 역사적으로 다루어야만 할 이유이다. 그것은 계시의 해석학적 토대들이 여전히 그 실체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해석하려면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존재한다는 걸 전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호화 주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또는 최고의 복지가 마련된 세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이 추정해낼 수 있는 어떤 상대적인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계시를 해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실증적으로 언급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부활의 리얼리티인 ‘생명’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생명이라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인 현상인가, 심리학적인 현상인가, 노동의 해방인가, 영적인 자유인가? 무엇이 생명의 근원인가? 아무리 유전공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단지 생명 현상일 뿐이지 생명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생명 현상에 관한 아무리 풍부한 정보를 캐낸다고 하더라도 생명 자체에 접근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계시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려면 지금과 같은 형식의 세계가 끝나게 될 종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가 재림하고, 이 세계를 심판하시게 될 그 종말이 와야만 이 세계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고, 그것이 곧 계시의 완료라 할 수 있다. 이런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인식과 계시인식은 단지 기독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보편적으로도 정당하다. 어떤 한 사람의 최종적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인생의 마지막 대목을 보아야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서만 이 세상의 실체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종말론적인 계시 인식이 바로 역사적 인식인데, 이는 곧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그 전체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세계를 한 점(點)이 아니라 전체로 본다는 이런 종말론적인 역사인식에는 두 가지 관점에 놓여 있다. 하나는 계시의 역사화이다. 계시가 비록 역사의 한 시점에서 정지하거나 묶이지 않고 초월하고 있지만 전체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이런 역사가 아니라면 철저하게 역사에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곧 계시를 해명하는 작업과 다른 게 아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단지 우리가 우리의 주관으로 판단하는 그런 실증적인 역사가 아니라 일종의 카이로스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역사를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역사의 계시화이다. 우리가 비록 역사에 의존해서 살아가지만 이 역사는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 처리가능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전제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 계시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와 계시를 기계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변증법적 관계로 보아야 한다. 계시는 궁극적으로 예수의 부활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라 할 수 있다. 계시는 초월적이지만 역사는 내재적이다. 이 계시의 초월과 역사의 내재가 변증법적인 관계를 통해서 “역사로서의 계시”로 지양된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한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의 계시라 할 역사 전체를 해석하고, 변혁하며, 참여한다는 것이다.  
  
계시와 미래
그런데 우리가 세계와 역사를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신학적 토대가 있는 것일까? 바르트가 주장하는 역사의 원래성(Urgeschichte)은 역사 이전의 원형적 역사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불트만이 주장하는 역사의 실존성(Geschichtlichkeit)은 무시간적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태도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역사(Geschichte)가 실종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이런 결과는 어쩔 수 없다. 바르트의 원(原)역사는 늘 역사 이전의 궁극적인 것에 그 토대가 놓여 있고, 불트만의 실존적 역사는 인간의 실존적 순간에 그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이 그런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늘 상수로 작동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단지 이 세상의 실증적 역사를 강화하고 변혁해나가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신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에 의존하며, 또한 그런 하나님과 개개 기독교인들의 실존적 만남에서 신앙의 능력을 확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주장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었다기보다는 오늘의 시대에 기독교를 변증하는 작업에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들의 신학적 구도에 역사의 미래적 지평*이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역사이해는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더 나아가 그 미래로부터 현재의 현실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노력이다. 게오르그 피히트는 1968년 여름 남독일 방속의 한 연설에서 기술과학과 정치, 교육, 종교문제와 더불어 인간의 미래 문제를 다룬 적이 있다. “우리가 바라고 희망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미래와 관계된 것이며, 또 미래에 그 역할의 자리를 갖는다. 삶이란 미래의 선취(Vorwegnahme)로서 영위된다. 따라서 미래를 향하는 것과 미래를 예기(豫期)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피한 것이다.”(G. Picht,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용기, 5).

우리가 계시와 역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역사의 미래적 지평을 반드시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여야하는 이유는 역사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래는 곧 성서와 기독교가 기다리고 있는 종말로서, 그 종말로부터 이제 하나님의 전적인 새로움이 시작된다.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 잠정적이고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를 우리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에 있었던, 또는 사실적인 역사(history) 너머의 원역사에 머물거나 현재의 실존적인 역사성에 머물지 말고 이 역사가 가 당하야 할 미래의 지평을 담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에게 오직 않은 그 미래를 어떻게 우리의 신학적 사유에, 또는 우리의 역사 해석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한가, 아니면 단지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사유에 불과한 것인가?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학문과 신학과의 충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보편 학문은 문학이나 예술이 아닌 한 과거의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하지만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 혹은 하나님 경험에 근거해서 연역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때문에 이런 틈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비록 연역적으로 변증하지만 그것마저 보편적인 인식론에 근거해서 논증해나가기만 하면 이런 틈을 최소화할 수 있다.
역사의 미래적 지평을 신학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계시와 역사의 관계를 그 이전의 신학자들에 비해 훨씬 심화한 두 사람의 신학자를 통해서 계시, 미래, 역사의 상관성을 검토하려고 한다. 한 사람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이다.

약속으로서의 계시
1964년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을 신학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몰트만이 현대신학과 교회운동에 끼친 영향은, 특별히 제3세계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그는 변증법 신학 이후로 표류하던 신학의 흐름을 형이상학적 지평으로부터 역사적 지평으로 바꿈으로써 종말론을 단시 대우주의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으로 해석했다. 이 <희망의 신학>은 이 역사를 단지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기보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해서 오늘의 인간적 삶을 변혁, 갱신, 혁명으로 끌어들이는, 일종의 실천적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역사의 종말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지만 역사 자체를 계시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 전통에 확실하게 선 신학자로서 그 말씀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라고 생각한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역사의 미래인 종말이 비추는 희망의 불빛에 의해서 밝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방식으로, 또한 약속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한다.”(35)는 그의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 즉 종말론적인 약속이며, 역사는 그 약속이 성취되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역사가 신적인 진리를 자체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 부활의 약속 사건의 근거에서 하나님과 역사를 함께 생각하는 것은 세계나 역사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계를 신적-미래적으로 개방된 역사로서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82).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인 그의 약속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희망 안에 집중한다.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현실에 타협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고난 받고 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계와의 불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의 날카로운 가시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모든 현재의 삶 속에서 그를 냉혹하게 찌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우리와 현실 사이에 우호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에 만족할 수 없음은 억제할 수 없는 희망에서 발생한다. 희망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확실하게 성취될 때까지 인간을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게 한다.(17).

몰트만이 제시하고 있는 “약속으로서의 계시”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일단 김균진 교수가 요약한 대목을 여기 인용하겠다.
1) “약속으로서의 계시”는 인간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 있음을 뜻한다. 이 현실은 인간과 그의 세계 속에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발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하다.
2) “약속으로서의 계시”는 인간을 하나님의 미래와 결속시키며 역사의 의미를 열어준다. 그것은 세계사에 대한 의미나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 대한 의미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그 자신의 역사와 결속시키며, 약속된 미래로부터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3) “약속으로서의 계시”는 인간과 그의 세계를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로 향하게 한다. 이제 인간과 그 세계의 역사는 영원히 동일한 것의 윤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의 성취를 향한 변증법적 과정이다. 그것은 이 세계 자체 속에 있는 맹목적인 법칙들과 세력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4) 따라서 약속의 성취는 약속과 성취라는 일정한 도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예기할 수 없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약속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성취의 주체도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5) 역사가 약속의 성취를 향한 변증법적 과정이라면 이제 인간과 그의 세계는 결코 주어진 현재의 상태에 안주할 수 없다. 그들은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조직신학 1, 126).

이처럼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변증법 신학이 원역사, 또는 역사성으로 밀어놓았던 신학의 역사적 지평을 확실하게 견인해냈다. 그 역사는 초월적 세계로 넘겨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인 종말론적 희망이 구체화해야 현실로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약속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성취의 주체도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과 그 약속의 성취를 향해서 우리가 변증법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우리가 역사를 방기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성취에 주도권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이는 곧 우리의 대림절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기독교 신앙의 바른 순수가 아닐까? 몰트만에 의하면 결국 역사는 우리가 다루어야 할 또 하나의 대상이며 도구로 떨어질 개연성이 있는 셈이다.  

역사로서의 계시
역사를 신학 작업의 한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신학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신학자는 판넨베르크이다. 그의 역사신학적 구도는 그가 동료들과 함께 1961년에 펴낸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에 담겨 있지만 그 이전 1959년 1월5일 부퍼탈 신학교에서 행한 특강 “구원사건과 역사”(Heilsgeschehen und Geschichte)에 그 단초가 있다.

역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학적 질문과 대답은 오직 역사의 구조 안에서만 그 의미를 찾는다. ···  이러한 입장은 두 가지 신학으로부터 방어되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를 실존의 역사성으로 해체한 불트만과 고가르텐의 실존신학이며, 둘째는 마친 켈러에게서 시작하고 호프만과 바르트의 성육신 신학에서 원역사로 발전된 역사의 초자연적 내용이다. 이것도 역시 역사를 무시한다. 그들은 비평적 성서연구로부터 안전한 피난처인 초역사와 원역사로 도피할 뿐이다.(GsTh 1, 22).

역사를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으로 간주하는 판넨베르크는 기독교 하나님이 이 세계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만사를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일컫고 있다는 데서 기독교 신학의 계시 이해를 단순히 말씀과 신앙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확고한 자명성 위에서 논하려는 그의 기본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 자명성은 계시의 개념화를 통한 기독교 신학의 보편성을 회복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보편성은 보편사적 지평에서 논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역사로부터 그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왜 신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을 역사로 간주하며, 계시를 보편사적 지평에 설정하려는 것일까?
판넨베르크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진리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일종의 마술적인 신비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 역사의 현실로서 증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몰트만은 계시로서의 약속 개념이 역사를 해석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서 판넨베르크는 역사개념이 약속을 포함한 성서의 계시 표상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좀더 정확하게 따라가 보자. 아래의 내용은 <역사로서의 계시>에 게재된 판넨베르크의 논문 “계시론을 위한 교의학적 명제”(dogmatische Thesen zur Lehre von der Offenbarung)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간접성: 성서는 계시를 직접 진술하는 게 아니라 역사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라기보다는 간접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2) 계시에 대한 종말의 우선성: 계시는 시작이 아니라 계시하는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난다. 만약 계시가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한다면 이 역사의 중간 시기에는 아직 그가 완전히 계시된 게 아니다.
3) 역사계시의 보편성: 역사계시는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 열려있다. 신성의 특별한 현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역사가 보편적인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예수 그리스도 계시: 보편적 계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못했고,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운명에서 실현되었다. 이는 곧 예수에게 모든 사건의 마지막이 선취된 것이다.
5) 그리스도 사건과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의 역사: 그리스도 사건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한 역사와 결합되어 있다.
6) 이방인의 계시 표상과 예수의 운명: 이방인들의 비유대적 계시 표상은 하나님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자기를 종말론적으로 증명하는 보편성이 담겨 있다.
7) 말씀: 성서말씀은 약속, 예언, 보도로서의 계시와 연결된다. 즉 말씀은 그 자체로서 계시라 할 수는 없고 계시를 약속하고 예언하고 그것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판넨베르크가 전개하고 있는 ‘역사로서의 계시’는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견해라 할 수 있는 ‘말씀으로서의 계시’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하나님 사유, 즉 최고 존재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무신론적이고 세속적인 기독교 비판을 향해서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신학적 노력이다.

오늘 우리의 물음
우리는 앞에서 계시를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사실로부터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계시에 관한 우리의 질문은 곧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존재하는 ‘방식’이 곧 하나님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결국 우리가 아직 계시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앞서 한번 예로 든 바르트의 해명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계시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이 쓰인 계시이고, 설교가 선포된 계시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마저도 아직 명증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서 신학의 딜레마가, 혹은 여전히 우리에게 맡겨진 숙제가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와 예배의 설교를 신학의 중심에 놓고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은 단지 의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전제한다. 만약 그런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신앙하는 내용을 이 세상의 담론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학이 계시 문제를 일종의 비의적인 인식론과 열광주의에 안에 가둘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전체의 보편적인 진리 쪽으로 열어갈 것인지에 신학의 미래는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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