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레티 M. 러셀의 여성신학적 착상

여성신학 조회 수 5401 추천 수 144 2005.03.29 23:03:21
6장
레티 M. 러셀의 여성신학적 착상
-기독교 전통과의 대화에 서서-

“해방!”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서 끊임없이 외쳐지는 표어이다. 이것은 또한 온 지구상의 도처에 사는 수많은 여성과 남성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말이다. 이 해방이란 용어는 어떠한 언어로 표현하든지 혹은 어떠한 논쟁을 벌이든지 간에 공허한 표어는 아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절규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절구이며 압제로부터의 울부짖음이며 이제 시작이라고 외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함성이다.(라티 M. 러셀, 안상임 역, 여성해방의 신학, 15쪽)

위의 인용은 러셀의 저서 <여성해방의 신학>의 서론에 제시된 첫 패러그래프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펼치고 있는 여성신학적 착상이 기본적으로 해방신학과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숙명적인 관계는 비단 러셀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만 여성 해방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신학적 스텐스가 구별될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 우리는 러셀의 신학적 스텐스가 전체 여성신학의 스펙트럼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게 될 것이다.  
여러 여성 신학자들 중에 러셀(Lety M. Lussell)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여성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전통을 우선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러셀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 여성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요소는 기독교의 핵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훨씬 근본적인 전통은 ‘해방’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이 담지하고 있는 구원론적 힘이 명실상부하게 열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러셀을 ‘신정통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녀가 말씀신학을 역사적 지평에서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는 몰트만의 정치신학과 그 연관 선상에 있는 해방신학을 여성신학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옳다고 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몰트만과 그의 부인인 몰트만-벤델은 러셀의 주저 <여성해방의 신학>의 ‘머리말’에서 러셀의 여성신학과 정치신학 및 해방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러셀이 말하는 해방은 역할을 반대고 뒤바꾸는 또 다른 압제자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해방은 우리 특정 그룹이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모든 인류의 반대파들과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해방운동은 하나하나가 비인간적인 삶에 대항하여 새로운 방향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조직신학적인 방식으로 여성신학의 토대를 해명하고 있다. “자유를 위한 외침은 우주적인 것이다. 바울이 모든 만물이 종이 되어 신음하는 것을 크리스천들의 희망과 관련시켜 말한 이후(롬 8장), 크리스천의 참된 구원은 이 자유를 위한 절규로서 부르짖게 되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의 삶 전체에 해방을 주셨다.”(여성해방, 머리말에서).
손승희의 설명에 따르면 러셀의 여성신학은 서구의 다른 여성신학자들과 달리 성차별이라는 현실에 대한 비판보다는 미래에 성취되어야 할 남녀관계를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여성신학의 이해, 84). 즉 여성의 독특한 경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의 자유와 해방전통에 근거해서 신학작업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전통에 가장 근접해 있는 학자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이렇게 기독교 전통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여성신학을 전개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의 신학적 경향이 그렇기도 하겠지만 조직신학에 대한 투철한 공부로 인해서 기독교의 근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 스스로 <여성해방의 신학> 결론 부분에서 피력하고 있지만 인간의 모든 설계와 계획은 완성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로, 더 정확하게는 종말론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에 신학의 잠정성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신학의 잠정성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 전통을 손쉽게 폐기하거나 현재의 작은 경험을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전통이 신성불가침이라거나 완전하다는 뜻을 결코 아니다. 다만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 전승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전통과 현재가 ‘지평융해’의 해석학적 토대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는 점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러셀은 곧 이런 신학의 역사적 과정에 명백한 거점을 두고 있다.

여성해방의 신학
이제 <여성해방의 신학>를 개괄적으로 검토하고, 특히 마지막 장 “대화 속에서의 친교”를 중심으로 류터의 신학적 착상에 접근해보려고 한다.  
그의 책은 제1장 “자유를 향한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시고, 역사 안에서 그 자유를 상실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자유의 세계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이런 자유의 길을 함께 간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며, 이런 신앙에 근거해서 바울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을 재촉한다. 러셀은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이미 똑같이 자유를 향하는 도상에 있다. 성령의 첫 열매에 대한 경험만 가지고 이 해방운동을 했다. 자유를 향한 여러 가지 다른 길이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또한 내 자신에게까지도 어떤 뚜렷한 계획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세계의 모든 우리 형제자매들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일치된 신음에 대해 바울의 잊을 수 없는 설명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적인 열망의 교향악에 참여하여 자유롭게 되기를 결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56).

여성신학이 기본적으로 자유를 향한 운동에 자리한다는 러셀의 주장은 여성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소위 ‘예수 세미나’ 계통의 신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바울의 신학적 고백을 러셀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러셀은 바울의 신학을 복음의 헬라화라기보다는 인류 보편의 자유를 위한 우주론적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도 러셀의 신학은 다른 여성신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에 비해서 전통과의 대화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다.

대화를 열어가려는 러셀의 생각은 이제 2장 “인간해방과 신학”에서 자유와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로 이어진다. “많은 의견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목표는 공통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그들 상호간에 존경하고 일치하여 함께 노력하기를 원했다.”(58쪽). 러셀에 따르면 여성신학이 포함된 해방신학은 최소한 세 가지 공통적 관점에서 세계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한다. 첫째, 해방에 관한 성서적 약속은 해방신학의 중요한 공통적 관점이다. 둘째, 세계를 역사로 접근한다는 사실이 해방신학의 공통적 관점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된 역사는 세계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성취되는 사건의 연속이다. “역사로서 세계를 보는 견해는 한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까지 변화해가는 과정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68쪽). 셋째, 해방신학은 구원을 사회적 사건으로 본다.
러셀이 제시한 해방신학의 세 가지 공통적 관점은 해방신학자들의 대화에 필요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창조자이며, 종말론적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학이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다. 그러나 그런 관점이 기독교 신학의 모든 것이라거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의되어야 한다. 성서는 해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적 창조능력과 종말론적 영광을 언급한다. 세계가 역사라는 것은 구원 사건의 연속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단절도 포함한다. 종말론은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을 통한 역사의 단절을 의미한다. 구원은 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개인적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은폐의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이 열어가는 사건이지 우리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러셀의 입장을 근본적으로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라 보완하려는 것뿐이었다. 아마 러셀 스스로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다만 해방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적 경향에 포함된 여러 목소리들이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을 여기서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3장은 “쓸모 있는 과거에 대한 추구”인데, 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러셀은 해방신학적 인식을 통해서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유익한, 또는 타당한 전통을 분별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쓸모 있는 과거를 소중하게 기억하고, 그것이 제시하고 있는 미래의 약속을 간직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볼 때 일단 이런 과거를 분간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유용한 과거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용한 미래, 유용한 역사, 유용한 언어를 주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전통 속에 그들이 서야 할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서 하나님의 전통의 역동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 시대의 이단은 성서 전통과 교회 전통을 다시 연구하는 이들이 아니다. 압제받는 사람들의 절규를 듣지 않고 모든 사람의 해방을 위해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교회가 이단이다.(124,125).

필자는 쓸모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러셀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한다면 다음과 같다. 성서 텍스트는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옥석을 구분하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더구나 쓸모없는 전통이라고 폐기했던 요소에서 훨씬 심층적인 가치가 숨어 있을 개연성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그동안 전통 신학이 간과했던 성서전통의 가치를 풀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정도로 진행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구원과 의식화”라는 제목을 단 4장은 해방신학에 내재하고 있는 구원의 지평을 여러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사실 어떤 운동이든지 사람의 의식이 변하지 않으면 계속 유지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여성신학도 기본적으로 구원의 다층성에 대한 의식화가 필요할 것이다. 여성들이 단지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인식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를 잡기 힘들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여러 차원을 충분히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의식화는 단지 기독교 전통만의 문제도 아니고 현재의 경험만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한 신학자의 의식 속에서 해방신학적 해석학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참된 의식화가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5장 “성육신과 인간화”는 여성 신학자들에게 가장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정도 성이라는 속성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 사건은 바로 그 성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 곧 예수라고 할 때 그 예수의 남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예수를 여성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실제로 어떤 이는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잘록한 모습으로 예수를 그렸다고 한다. 간혹 흑인 예수, 또는 한복 입은 예수 형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러셀은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성육신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예수에게서 유일한 참 인격의 계시를 발견하고자 한다. “예수의 삶은 사랑, 연민, 그리고 여성들의 문화적인 특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성육신 자체이신 예수로 인해서 여성의 참 인간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뜻이다.
러셀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대결의식을 고취하는, 그래서 기독교의 전통을 가부장적인 것으로 일소에 부치는 여성 신학자들과는 달리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공동’의 협력에 근거한 인간화에 두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또한 무분별한 평등이 아니라 협력과 조화의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결국 신학적 인간론에서 중요한 문제는 남녀가 더불어서 온전한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생명의 지평을 여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새 인간성은 하나님을 위한, 남을 위한 삶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표현은 남성과 여성이 동역자의 새 형태를 향하여 노력함으로써 진실한 인간성의 표현이 되도록 ‘지금’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187,189).

대화 속에서의 친교
5장에서 러셀이 진술하고 있는 남녀의 조화, 협력, 나아가서 함께 이루어 가는 참된 인간성은 이제 6장에서 다루게 될 “대화 속에서의 친교”에서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담긴다. 그의 논리에서 볼 때 이는 매우 자연스럽다.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협력은 서로 열린 대화에서 시작되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참된 일치, 친교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친교와 일치보다 더 성숙한 인간성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공동체는 물론 교회이다. 교회 공동체를 모든 신학의 토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러셀은 ‘탈기독교 공동체’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데일리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으며, 그리고 ‘여성 에클레시아’를 주장하는 피오렌자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입장이다. 러셀에게 교회는 한편으로 당연히 끌어안아야할 공동체이며, 다른 한편으로 크게 비판받고 수정되어야 할 공동이다. 일종의 애증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해방신학은 교회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천신학은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 양성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들이 하나님의 행동에 비추어서 세계의 사건들을 고찰하려고 할 때, 그들은 신앙과 증언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신학 그 자체는 신천에 실패했고 진리는 좀 더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위로부터 전해 받았다.”는 계급 조직을 사용했다. (191).

어쨌든지 러셀은 참된 대화의 장이 보장됨으로써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이 현존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지향함으로써 여성 신학의 바람직한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개방된 교회론은 우선 ‘세계를 향한 개방’이라는 성격을 취한다.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담을 쌓고 단절되는 게 아니라 모든 세계를 향해서 열린 자세를 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종교적인 집회, 예배소, 회당, 혹은 폐쇄적이거나 신성시된 종파가 아니라 압제받는 무리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행동에 동참하는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었다.”(195). 여기서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는 말은 곧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뜻이다. 타종교와의 관계도 역시 이런 개방성은 전제되어야 한다. 간혹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 기독교의 배타적 구원론에 근거해서 타종교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적대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태도는 근본적으로 성서적이지도 않고 신학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신론적이며 성령론적인 신앙고백도 우리 신앙의 구성적 요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타종교와의 열린 대화는 필연적인 작업이다.
러셀이 주장하는 이런 개방성은 교의학적인 차원에서 ‘종말론’과 연관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인식하는 모든 사물과 형태,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미래’로 열려 있다는 말이다. 인류의 미래에 진정한 ‘샬롬’이 구축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잠정적인 것으로 남겨두고 그 미래가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를 좀 더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마치 미래가 이미 여기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200). 이런 개방성을 우리의 삶과 신앙의 밑바닥에 둔다면 상반된 집단 사이의 대화는 가능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열린 대화를 통해서 참된 코이노니아를 획득해 나갈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이다.
러셀은 이런 대화를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류 역사만 생각한다면, 그리고 현실만 본다면 불가능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는 현실성을 인식하고 통찰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대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길에 대해서 러셀이 몇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요소들이다. 억압하는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 사이에 열린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 각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신학적이기보다는 일반 상담학이나 대화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끝으로 러셀은 이 대화의 실천 문제를 교회의 직제와 연관해서 대안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남성 성직자 중심으로 꾸려진 목회를 여성과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틀로 갱신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교회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ecclesia semper reformanda) 종교개혁의 교회론에 근거해서 볼 때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생존하기 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어떤 형식으로의 변화이며 개혁인가, 하는 것은 모든 교회가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유형만으로 고집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 대화와 일치가 촉진되는 방향으로 목회의 틀이 교정되어야 한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이런 점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유형이 우리의 미래를 발전시키든지 그들은 새 인간성의 상징을 나타내 주는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자유의 실천으로서 교제와 대화의 계속적인 과정으로 이끌어 주는 봉사를 나타낸 준다.”(223).

지금까지 우리는 러셀의 <여성 해방의 신학>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적 착상을 검토했다. 그녀는 자유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대화에서 그 대답을 제시했다. 여성이 참된 인간성을 찾기 위한 자유의 길이 상대 남성을 극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과의 열린 대화에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같은 여성 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을 만큼 전통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보인다. 다른 여성 신학자들은 여성과 여성의 경험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삼는데 반해서 러셀은 자유, 해방, 미래, 코이노니아 같은 성서 개념을 중심 주제로 삼는다. 따라서 보기에 따라서 러셀을 굳이 여성 신학자로 분류하지 말고 말씀 신학자로 분류해도 괜찮을 것 같다. 여성 신학이 아무리 고유한 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신학으로 남아 있으려면 최소한 러셀처럼 기독교 전통과의 학문적 투쟁을 통해서 그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울 것 같다. 그 이유는 기독교 전통 안에는 우리의 해방신학적 특성을 훨씬 강력하게 전개시킬 수 있는 단초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난 역사에서 니체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지평으로 유연하게 발전해왔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학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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