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5장 십자가와 부활

조직신학 조회 수 5897 추천 수 57 2005.04.06 18:17:28
5장
십자가와 부활

예수의 공생애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짧게 잡으면 1년 여, 늘려 잡으면 3년 정도로 추정되는 그의 활동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비록 출생에 관한 몇 설화와 소년 시절의 한 전승이 있기는 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이 공생애 이전의 삶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이후의 사건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공생애 이후에 발생한 그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삼등분된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십자가 처형, 부활과 현현이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이 분명히 구분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연속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생애의 활동에 의한 결과로 그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십자가 처형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이르게 되었다. 거꾸로 본다면 그의 부활로 인해서 그의 십자가는 단지 인간적인 실패로 끝나지 않고 승리의 초석이 될 수 있었으며, 이런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그의 공적 활동은 구원론적 빛을 담게 되었다. 예수의 운명에서 발생했던 이 세 사건은 예수를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해명하는 변증법적 토대라 할 수 있다. 5장에서는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실체와 의미를 추적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한다. 우선 예수와 십자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예수와 십자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까지가 바로 예수의 ‘수난설화’에 해당된다. 이 수난설화의 정점은 십자가 처형이다. 예수는 목요일 밤에 체포당하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다. 예수가 처형당하신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구원론에서 중심이다. 이미 신약성서가 구약에 근거해서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를 충실하게 해명하고 있으며, 2천년 신학의 역사도 역시 이런 작업에 충실했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선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이다. 죄는 반드시 피와 죽음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이다. 죄가 용서받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 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을 때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의 장막이 갈라졌다는 보도가 바로 이런 신학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나름으로 대답을 찾고자 한다. 첫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둘째, 인류를 구원하는데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만약 복음서를 진지한 자세로 읽는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능한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유혹에 불과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는 왜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피하려고 했을까? 예수도 인간이셨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억울하게 죽어야 할 경우에, 또는 국가와 어떤 이념을 위해서 죽어야 할 때 과감하게 나서는 사람들은 제법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서는 예수님의 그런 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 속사정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만약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가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려고 했다는 뜻은 아니다. 도살장의 어린양처럼 그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한 죽음의 길을 가셨다는 게 성서와 신학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이 기본적으로는 옳지만 우리는 이렇게 교리화한 가르침 이전에 십자가 처형의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도그마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 혹은 개념을 심층적으로 풀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형해화의 길을 가기 때문에 비록 귀찮거나 불안하다고 하더라도 근본에 대해서 계속 질문해야만 한다.
다시 질문하자. 예수가 반드시 십자가에 처형당해야만 인류가 구원받는 것일까?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의 결과로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의 운명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된 것, 또는 그렇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만약 역사를 그렇게 결정론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기독교의 신앙을 강화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화할 수는 없다. 이미 신약성서 기자들이 예수의 십자가가 그 당시에 무슨 의미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2천년 전 그 당시에는 실제로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이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다고 예측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한 예수의 말을 듣고 뜯어 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는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복음서에 예수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몇 번 예고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진술은 훨씬 많은 역사비평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연히 예수가 죽음을 의식하셨을 테지만 그런 구체적인 언급은 훨씬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마저 십자가 처형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다면 예수가 당하신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손상당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예수가 그 당시에 태어나셨기 때문에, 즉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으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미 예수의 순종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건으로 지양된 이후에는 그 십자가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다. ‘불가역의 원리’라는 물리학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역사가 실행된 다음에는 그 이외의 구원의 길은 가능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십자가를 어떤 마술적인 힘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 십자가는 예수라는 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결과이지 십자가가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이런 근본적인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를 단지 교리적으로만 안다면 십자가 사건은 독단적인 교리로 남거나 아니면 종교적 감상주의의 대상으로 떨어질 것이다.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는, 혹은 그것의 영적인 의미는 앞으로도 더 많은 논의를 통해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급해야 한 그 구원의 리얼리티가 이미 닫힌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 명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의미이겠지만 좀 더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의 십자가 이후로 이 세상의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한 인생의 처절한 실패인 십자가가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이제 인간의 성취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은 결코 십자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성취, 목회적인 성취도 결국 구원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의 근본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목회에서 실패하는 목사야말로,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 전제되지만, 하나님의 구원에 가깝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자기 성취에 집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구원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점에서 목회를 철저하게 패배해도 왜 괜찮은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런 주장은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별 볼일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위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분명한 신학적 고백이다. 그렇다고 일부러 실패할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실패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필요할 것이다.(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참조).

십자가 사건의 구원론적인 의미를 우리가 실질적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계적인 효과보다는 그것의 변증법적인 성격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화해, 승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열, 실패를 통한 것이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십자가를 자신의 사명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 외친 외마디에서, 소위 ‘가상칠언’ 중의 한 대목에서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36). 거기 섰던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고 한다. 엘로힘의 ‘엘’과 임마누엘의 ‘엘’, 또는 엘샤다이의 ‘엘’은 모든 고대 근동지역에서 거룩하고 능력 있는 신에 대한 명칭으로 불려지던 것이다. 그들은 좋은 뜻의 이 단어를 자식들의 이름에도 붙여주곤 했을 것이다.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의 죽음의 상태에 빠진 예수가 약간 흐린 발음으로 내쏟은 이 호소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의 도움을 받으려 한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의 이  절규를 아주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는 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런 나약한 소리를 질렀을까?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하나님 만세!’를 외치다가 죽는 게 누가 보기에도 훨씬 떳떳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 앞에서 이러한 하소연을, 또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든지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면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회의하게 마련이지만, 예수가 그런 십자가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렇게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이 있긴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토로했다는 사실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두려움 운운 하는 이들이 있는데, 별로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죽음 자체는 비록 두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 상당히 많은 유대의 민족주의자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민족의 독립을 외쳤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억울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만약 예수가 죽음의 고통 때문에 ‘엘리, 엘리’하고 외쳤다면 그런 애국자나 철학자들보다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당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류가 하나님에게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그런 책임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감상적인 차원으로, 너무나 도식적인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태도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구약성서가 예언한 것이며,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라고 믿지만 이것을 지나차게 기계적인 역사진행으로 몰아가면 십자가 사건의 보다 심원한 의미를 손상하게 된다. 만약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여긴다면 자체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받아야 하는가? 사랑과 전능의 하나님이 시간을 질질 끌지 말고, 또한 굳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지 말고 직접 인류를 구원하면 되지 않는가? 십자가 사건이 빼도 박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예수의 숙명이었다고 한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십자가 사건을 통한 인류 구원은 감상적 차원이 아니며, 또한 인간 예수가 감당해야만 했던 운명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진 것으로서 구원사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한 역사적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듯 역사는 고정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 열린 길을 간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역사적 책임이 크다. 역사를 구원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멸망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켄터베리의 안셀름이 <Cur Deus homo>에서 소위 ‘배상만족설’을 제기한 이후로 매우 오랫동안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안셀름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배상해야만 한다는 논리에 근거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곧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울 정도의 보상을 제공하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만약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은 채 죄를 용서한다면 그 죄는 처벌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무질서하게 된다. 이런 무질서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참된 인간이며 하나님인 예수가 그것을 배상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이론은 신학적으로 약간씩 수정되면서 현대까지 지속되고 있다. 바르트의 배타적 배상만족설은 “우리 없이 - 우리를 위해”에 관심을 가졌다면 도로테 죌레는 그와 반대로 포괄적 대리를 주장했다. 이 대리이론은 인간이 실존적 참여를 윤리적 귀결에 이르기까지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로 인해서 신인협동설에 빠질 우려도 있다.(푈판, 277).  

셋째, ‘엘리, 엘리’라는 예수님의 절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遺棄)가 오히려 구원의 단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의 외침에 담긴 핵심적인 의미이다. 아마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말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종교적으로 정화된 의미의 십자가가 아니라 2천년 전 그 당시의 의미로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러한 버림받음의 사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구원의 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는 오히려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가 가르치고 행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들이 거리끼는 사건이며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모든 것의 좌절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이 십자가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역사의 반전에 기대어 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서 모든 이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판넨베르크는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이제 인간의 비참한 실패도 더 이상 실패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다. 말하자면 인간 자신에게는 실패와 성공을 가늠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 바로 이 십자가 사건이 담지하고 있는 신학적 의미이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상하게도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성공신화가 득세하고 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소위 ‘청부론’이 불거지기 까지 했다. 기독교인들도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적으로 건강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명분만 있지, 실제로는 물질만능주의적 시대정신과 결탁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경구인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지 말라”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늘 이런 시대정신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은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이런 문제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명이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출세했다든지, 망했다는 우리의 판단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숨겨진 방식으로 자신의 구원 행위를 펼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이 세상에 지금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소연 하는 예수보다 더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가난하든 병들었든 외롭든 상관없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늘로부터의 구원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로 인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교회도 여전히 그것을 놓치고 허둥대며 쓸데없는 것에 힘을 소진하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도 새싹 돋듯 일어나는 생명과 구원의 기쁨이 가상칠언 첫 말씀에 들어 있는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활의 현실성
복음서와 사도신경을 비롯해서 모든 기독교의 문헌과 고백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 그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났다고 증언한다. 만약 예수에게서 부활사건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활 현상이 전혀 없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예수의 경구들과 그의 모범적인 삶만으로도 기독교라는 한 종교가 역사 안에 등장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역사를 가정해서 볼 수 없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활이 없는 한 기독교도 없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거나 혁명을 일으키거나 심리적으로 위로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전혀 다른 방식의 성취를 희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부활의 실체와 그 의미는 무엇인가?
간혹 3월 하순경에 부활절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4월에 부활절이 들어있다.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아울러서 기독교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이 부활절을 하나의 절기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예수님이 직접 부활했건 하지 않았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부활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그저 하나의 절기로서만 지킬 뿐이다. 여기에는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이해가 깔려 있다.
하나는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젊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토대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주술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의 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도 누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고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서 베스트셀러까지 되는 실정이니까 인간이 다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거의 숙명적인 것이라 할 만 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마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말하려는 근본 의미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격하시키는 태도이다. 불트만 신학의 특징이라 할 실존주의 신학은 예수 부활의 역사성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으며 단지 제자들의 실존적 경험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오늘의 적지 않은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장에 솔깃해 할 것이다. 실증적 과학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신화적 사건이기 때문에 단지 실존적 경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즉 부활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극진한 사랑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이다.
부활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아니면 실존적 경험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려는 이러한 두 가지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고 성서가 원래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 부활에 대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구약의 묵시문학적 언급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아울러 오늘의 일반적인 생명연구도 가능한대로 복합적으로 다루어 가면 좋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지면 형편상 복음서와 바울 서신만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은 어떤 명백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자신들도 예상할 수 없었던 현상에 대한 솔직하고 산만한, 그래서 비논리적인 진술 형식을 띄고 있다. 예수의 시체가 안장된 아리마데 요셉의 가족묘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사실적인 묘사가 없다. 마술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자들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다면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을 텐데 예수 부활 보도에는 그런 설명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들 앞에 현상으로 다시 나타난 예수는 보통 인간처럼 말도 하고 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흡사 혼령처럼 문을 닫아두었는데도 어느 사이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부활한 예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났고, 어떤 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했고, 바울의 보도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 앞에, 그리고 자기에게도 나타났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에 대한 신약성서의 보도는 어떤 일관성을 보이지 않고, 단지 죽었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 두 가지 사실에만 집중되고 있다. 한 걸음 나가서 이 부활한 예수는 결국 승천 사건으로 다시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 안에서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3일 동안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으며, 다시 나타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지내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이 된다.
바울은 그 유명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부활 문제를 매우 수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을 여러 증인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확증한 후에, 우리도 역시 그렇게 부활한다는 점을 증언한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이 구절에서 핵심은 “변화”와 “입는다”에 있다. 즉 우리의 부활은 결국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변화한 분의 능력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부활은 곧 우리가 이 땅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생명 양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썩기 때문에 이런 것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 형식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한 답변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은 늘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 문제를 소극적 방식으로 이렇게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썩지 않는 생명이라고 말이다. 그런 썩지 않는 생명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덧입혀진다고 말이다.

육체의 부활에 관한 질문
(이 대목은 오트의 ‘신학해제’ 239-242를 요약했다.)
예수가 예수 부활 문제를 생각할 때, 특히 단지 혼령의 상태가 아니라 몸으로의 부활 문제를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핵심에 있다. 죽은 예수를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보았다는 사실은 역사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일까? 예수의 부활이 육체적인 게 아니라 환상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을 순수 역사적 관점에서 확실하게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특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자연주의적 교리를 내세우는 경우에는 더 심하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교리를 정하는 것은 역사가가 할 일이 아니라 형이상학자가 할 일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빈 무덤의 전설’이 나중에 생긴 것이어서 바울이 아직 이 전설을 알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예수의 무덤이 실제로 빈 것으로 발견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순수하게 역사학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완전히 다른 해결책, 즉 의미에 대한 질문의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질문은 이런 식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육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육체성을 논박할 때 보다 인정한 때 더 할 말이 많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육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에 ‘실존론적 증가분’이 덧붙여질 것인가?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자. 비록 이것이 이론의 여지없이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종류의 사실 앞에 마주 서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기록에 남길 수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은 아마 자연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서 의학이 놀랄 만큼 발전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사건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기록할 수 있는’ 육체성은 아무 것도 새것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런 육체성은 부활절의 본래적인 의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나사로 부활이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부활과는 전혀 다르다. 예수의 부활은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일반적인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오트는 이 육체적 부활의 사상에 두 가지 배경이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1)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지상적 예수와 동일한 분으로 다시 인식되었다. 부활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동일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런 동일성을 전제할 때만 부활이 죽음의 한계를 뚫고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다.
2) 부활절은 이제부터 타당하게 될 진리의 단순한 문서화와 진술이 아니다. 이 사건은 순전히 선언만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한 분과 현재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을 뜻한다. 신약의 부활절 보도에 의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 제자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며 사귈 때 표현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의식 속에서 부활절 이후의 공동체가 올리어진 주님과 더불어 소통한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부활절이라는 결국 하나님의 ‘거동’에 대한 무시간적 암호가 되는 게 아닐까?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만나시는 양식과 방식을 나타내는 무시간적인 암호가 아닌가? 이러한 해석에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라든지, 그의 부활 같은 일회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필요 없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는 요구와 대결하게 만드시는 분이 곧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실존론적 의미이다. 즉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과 대결되어 있는 우리의 실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관한 논의이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언급할 수 없다. 이 이상의 것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야기를 벌여놓는 일은, 이를테면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가 다시 살린 하나님 아버지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신학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신화론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부활의 신학적인 착상과 신화론적인 호기심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부활사건을 단순히 우리의 지상적 생명이 연장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한국 교회 강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요청은 매우 시급한 형편이다. 매번 부활절 때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목청만 높일 뿐이지 그것의 신학적 심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지 않는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거의 신화의 수준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참고적으로서 여기서 이제 부활의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해보자.(이신건, 조직신학 입문 127).
1) 부활사건은 예수의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입증한 사건이며,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며,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백이다. 2) 부활은 돌입해오는 종말의 표징, 하나님 나라의 시초이며 완성을 향한 질주이다. 3) 부활은 죽음의 극복, 부정의 부정,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것의 극복, 하나님의 부정의 부정, 심판과 저주의 극복이다. 4) 부활은 증인들이 선교를 위한 파송과 소명을 가능케 한 체험이다. 이 체험이 없으면 기독교가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5) 부활은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우리와 우리 세계의 주로 입증한 사건, 예수를 통치자로 높인 사건이다. 6) 부활은 예수의 들어올림, 하나님의 권세에 참여하는 고백만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며,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미리 앞당긴 사건이다. 7) 부활은 예수의 시체가 단순히 소생하거나 지상적 생명으로 복귀한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변화이다. 여기서는 현재의 몸과 다른 게 나타난다기보다는 이 몸의 변화라는 사실이 중요하다.(풸만, 판넨베르크, 카스퍼, 빌켄스, 몰트만, 보른캄, 큄멜).

나는 부활하는가?
이제 필자는 부활의 신학적 착상에 근거해서 ‘부활’을 실존론적인 차원에서 다시 정리하는 것으로 이 강의를 끝내려고 한다.
성탄절의 절기는 기독교의 종단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부활절만은 모든 종파가 일치하고 있다는 건 그 부활 사건이 유대교의 유월절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훨씬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탄절은 기독교의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에, 즉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 태양력 중심의 로마 절기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부활절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과 더불어 구성적인 요소였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탄절은 없어도 기독교가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지만, 부활절이 없으면 기독교 역시 없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4).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없으면 기독교가 허물어진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기초가 허물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부활’은 단지 신앙생활의 장식용품 정도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년 한번, 부활절을 맞아서 부활에 관한 설교를 듣는 게 우리와 관계된 부활신앙의 모든 것인 형편이다. 부활절 자체도 우리에게는 어떤 요란스러운 부활절 행사로 각인될 뿐이지 부활 사건의 깊이로 들어가거나 그것 자체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기독교를 지탱시키는 이 부활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서 주변적인 요소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핵심적으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명분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는 게 우선적인 이유이다. 현대인들이 받아온 자연과학적 교육과 물질 중심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부활을 거부한다. 단지 사도신경의 문장으로만 부활을 고백할 뿐이지 실제로는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부활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절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훨씬 강하게 기울어져 있다. 거꾸로 여전히 열광적인 형태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는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활에 관한 그들의 믿음과 확신은 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인식론까지 완전히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한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나 지나치게 열광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나 그 무의식 깊은 곳에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불안이 부활절의 ‘이벤트’로 나타난다.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 전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에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하고, 목요일에는 세족식과 성찬식을 거행하고, 교회에 따라서 칸타타를 중심으로 음악예배를 드린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기능을 감당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행사의 내면에는 부활 사건에 관한 진정한 관심과 참여라기보다는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을 강화하려는 ‘행사’에 머물러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흡사 부모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님을 향한 마음은 별로 없고 그저 자기들끼리 많이 먹고 노는 데 모든 열정을 쏟는 후손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부활 사건에 영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와 자신들의 신앙적 열정에 빠지는 태도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진리와 생명의 영이 주체로 작용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럴듯하게 보인 신자들의 인간적 욕망이, 혹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가 주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우리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설교행위와 연관해서 일단 이렇게 설명해보자. 우리는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당한다. 성서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믿음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협박까지 받는다. 이런 방식의 설교가 곧 인간의 열정에 치우친 설교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진리와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믿을 수 없는 사실까지 믿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아울러 믿을 수 없는데도 믿는다는 광신의 영만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부활 문제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진리와 생명의 영이 끌어가는 설교일까?
그 대답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부활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설교이어야 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부활을 믿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믿어야 할 부활 사건 자체가 중요하게 해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부활의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선동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며, 더 나아가 그의 해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 바로 믿음의 길을 가게 된다. 결국 여기서의 핵심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사람에게 놓는가, 아니면 성령에게 놓는가에 있다. 성령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쉬지 않는다. 즉 한번 믿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세계 이해가 심화하는 과정에서 그 부활의 리얼리티를 훨씬 깊이 알기 위해서 끊임없는 사유 활동을 전개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걸고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정말 부활하는가?” 이 질문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어느 정도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부활처럼 우리가 부활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결국 예수에게 일어났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물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지 대답해야겠지만 그건 또 하나의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하자. 과연 예수의 부활은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간혹 ‘달걀’을 비유로 들거나, 봄에 피어나는 새싹을 비유로 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비유로 이 숙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는 없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병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죽어야 하며, 봄의 새싹도 가을이 되면 결국 죽어야 한다면 그런 현상은 예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예수의 부활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성서의 증언들을 면밀하게 살펴야 하고, 존재와 생명에 관한 철학의 도움도 받아야 하겠지만 결정적으로는 성서와 철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작업의 역사는 2천년 기독교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그 양도 풍부하다. 여기서 이런 역사를 모두 검토하기는 힘드니까 필자의 신학적 직관에 한정해서 몇 대목으로 그 윤곽만 잡으려고 한다.

1) 예수의 부활은 죽었다가 단순히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가 일목요연하지 않은 이유는 부활의 예수가 우리의 인식방식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생명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2)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다.”(고전 15:13)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 예수의 부활을 변증하려는 신학자와 설교자라고 한다면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 가능성을 탐색해내야만 한다. 과연 이런 작업이 가능할까?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보편적인 부활을 용납할 수 있을까?
3) 따라서 기독교는 한 사람의 운명이 출생과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의 삶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인 영역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 영적인 영역은 막연하게 아니라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식하고 있던 그런 세계이다. 그 영역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궁극적 현실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해명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4)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린다면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 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다르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우리가 그 신비의 힘을 여실히 인식하고 경험하게 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 그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 미래의 궁극적 생명의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궁극적 세계이다.
6) 그런데 그 궁극적 생명은 아직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7) 다만 역사적 예수에게서 부활이 선취되었다.
8) 예수에게 선취된 그 궁극적 생명은 곧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다. 여기서 죽은 자는 무엇인가? 죽은 자는 사물에 불과하다. 이런 사물과 생명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모든 생명을 사물로 돌려놓는 죽음이 예수에게서 극복되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사물로 돌아가지 않는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약속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런 몇 가지 화두를 전제하고 다시 “나는 정말 부활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삶의 재현이나 연장을 부활로 생각한다면 아무도 그런 것을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도 역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부활이 불확실하다거나, 하나님의 존재여부가 불확실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절대적인 세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현재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들은 늘 잠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의 빛 안에서만 그 세계를 언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종말을 맞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 종말의 빛은 이미 그곳에서 이곳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다. 그 빛을 의식하는 영적인 사람들은 부활의 희망 안에서 현재의 수고를 넉넉하게 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레벨:1]맑은보배

2007.10.08 23:45:05
*.82.45.99

첫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일까?
둘째, 인류를 구원하는데 십자가 처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저도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니 눈에 띄는 (의문이 생기는)부분이 있었지요..

고린도 전서 2 장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정하신 것이라니?
그런데 그 지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지혜라니?
인류의 구원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읽게 되었죠.

<그렇다면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예수는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할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물론 복음서에 예수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몇 번 예고하신 적이 있지만 그런 진술은 훨씬 많은 역사비평이 필요한 대목들이다. 당연히 예수가 죽음을 의식하셨을 테지만 그런 구체적인 언급은 훨씬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마저 십자가 처형을 통한 인류의 구원을 정확하게 몰랐다면 예수가 당하신 십자가 처형의 의미는 손상당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몰랐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의 순종이다.....중략 .... 그 십자가는 예수라는 분의 철저한 순종에 의한 결과이지 십자가가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원래의 목표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고린도전서2장에 있는 제가 지금 올린 구절에서 보아도 되나요?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
이들이 이 지혜를 몰랐기에, 그 분이 그리스도(영광의 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이 지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는지?)
그것을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지 않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이 사람들에게 달린 것이 되나요?
이 사실을 예수님도 아셨을까요?

목사님이 하신 이 말씀이 여기에도 해당될 수 있겠나요?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진 것으로서 구원사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한 역사적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듯 역사는 고정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 열린 길을 간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역사적 책임이 크다. 역사를 구원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멸망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죽이기로 결안하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을 알고 하신 말씀일까요?

(마16: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

또한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나 (히브리서5장 7절에서의 죽음 앞에 기도)를 볼 때 예수님은 당신이 죽으실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하셨듯이 이미 섭리 안에 있는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계셨고, 그 분이 순종하였기에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겠지요.

<후대에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싶어요,,

질문이 제대로 된건지 모르겠네요
목사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혹시 어딘가에 제가 알고 싶은 것이 올려졌다면 가르쳐주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10.08 23:50:18
*.181.51.23

맑은보배 님,
좋은 질문인데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거라
오늘은 대답하기 힘들겠군요.
이번 주에도 힘들구요.
아무래도 제가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 중에 대답해 보겠습니다.
지금 제가 대답을 피하려고
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부디 알아주시옵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11.11 23:15:21
*.181.51.23

맑은보배 님,
위의 질문을 받아놓고 벌써 한달이 후딱 갔군요.
제가 기억은 하고 있었는데,
답할 기회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늘 다시 위의 질문을 읽어보았어요.
성서를 깊이, 그리고 넓게 알고 있군요.
신학적 사유도 만만치 않아보이구요.
위의 질문이 방대해서 제가 일일이 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인용한 성구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두 가지만 말씀드릴께요.
1. 맑은보배 님의 논리는 크게 잘못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풀어가는데 필요한 성구를
전체적으로 짚어낸 것 같습니다.
다만 모든 성구가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는 더 검토해봐야겠지요.
2.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후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가능성이 높다는 말에 대해서.
이미 맑은보배 님이 윤곽은 잡으신 것 같은데요.
예수 사건은 모든 게 후대의 해석이랍니다.
예수의 공생애, 십자가, 부활은 그것이 일어난 그 순간에는
사람들이 무엇인지 몰랐지요.
나중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억에 의해서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됨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어있는 사실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사건이라는 거지요.
만약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잘못 받아들였다면
그 사건은 전혀 다르게 자리를 잡았겠지요.
참고적으로,
오늘도 예수의 십자가는 여전히 숨겨져 있는 구원의 길입니다.
왜 십자가가 인류 구원의 길인지는
여전히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현실도 역시 열려져 있습니다.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론적 지평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종말의 빛에서만 예수 사건은
참된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만이 아니라
이런 역사 과정에 있는 오늘 우리의 신학적인 책임도 막중한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신앙, 신학적 태도에 따라서
기독교의 미래가 달라지니까요.
좋은 주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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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조직신학 &lt;조직신학&gt; 3장 계시와 역사(3월24일) 2005-03-23 5979
54 여성신학 4장:엘리자베쓰 쉬쓸러 피오렌자의 여성신학적 착상 2005-03-22 5116
53 여성신학 3장: 메리 데일리의 여성신학적 착상 2005-03-22 6818
52 조직신학 &lt;조직신학&gt; 2장: 계시에 대해서, 3월17일 [4] [2] 2005-03-16 6096
51 여성신학 2장: 여성과 해방 2005-03-14 4307
50 조직신학 조직신학1, 1장. 신학이란 무엇인가?(3월3일) 2005-02-11 7935
49 조직신학 조직신학1, 강의계획서 [1] 2005-02-11 7891
48 여성신학 1장: 신학적 사유를 위한 몇 가지 제언 [5] 2005-02-11 4348
47 여성신학 강의 안내 [1] 2005-02-11 4713
46 신학입문 12장 신학과 과학(교정) 2004-11-24 4747
45 10장 인간학적 철학과 신학(교정, 5월27일) 2004-11-24 4186
44 10장 신학의 세계 지평 2004-11-23 3955
43 9장 헤겔철학과 신학(교정, 5월20일) 2004-11-17 4897
42 9장 언어의 세계와 신학의 세계, 11월18일 2004-11-16 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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