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예수의 승천과 재림

조직신학 조회 수 5668 추천 수 96 2005.04.13 18:01:40
6장
예수의 승천과 재림

예수의 승천설화!
예수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사도신경의 진술에 의하면 예수의 승천과 재림이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중에서 일단 승천 전승*에 한정해서 본다면, 신약성서에는 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승천기사를 지나가는 투로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승천보다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가복음은 이 예수승천 기사를 결론으로 삼고 있다.

*원래 승천전승은 예수의 부활과 한 묶음으로 다루어야 도그마이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곧 그가 하늘로 승천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라면 부활한 예수가 승천하기 전에 40일 동안 지상에서 생활하셨지만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보도라기보다는 예수의 부활현현의 확실성을 위한 서술이다. 비록 승천이 부활에 연루되고 있지만 부활의 신화적 표상이라 할 ‘하늘’ 개념을 정확하게 해명함으로써 부활의 근본적인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재림과 연결해서 검토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다.

원래 누가복음과 하나의 책이었던 사도행전이 이 승천기사를 가장 자세하게 다룬다(행 1:6-11).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는데 마침내 구름에 싸여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셨다.”(9).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흡사 예수의 빈 무덤을 연상시키듯 흰옷 입은 사람 둘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너희는 여기에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11).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단지 승천 사실만 단순하게 암시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은 매우 조심스러운 대목인데도 불구하고 흡사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승천사건을 왜 이런 방식으로 보도하는 것일까?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묘사한 것뿐이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성서에 기록된 것은 묘사된 그대로 믿는 게 가장 바람직한 믿음이라는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지 우리는 참으로 난감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난감한 이유는 자칫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것과 다른 대답을 했다가는 그들이 시험에 들릴지 모르기 때문이고, 답답한 이유는 성서의 전승사에 관해서 아무리 바른 대답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사실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바람직한 믿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서의 실체를 전혀 모르는 광신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성서의 실체라는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증언일 뿐이지 계시 자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비록 우리가 성서를 계시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바르트가 말한 대로 ‘쓰인’ 계시일 뿐이지 계시 사건 전체는 결코 아니다. 성서론과 계시론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여기서 길게 끌고 갈 수 없으니까 접어두자. 이 승천설화를 설명하다보면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에게 전해진 모든 문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이지만 이 승천설화에 관해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하나는 그것의 사실 여부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의 가치 여부이다. 전자는 이 보도가 객관적인 사실(fact)인가에 관한 질문이고, 후자는 그것이 진리론적 토대가 있는 사건(event)인간에 관한 질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두 가지 질문이 구분될 수도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고, 또한 그 대답이 일치할 수도 있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이어야만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사실은 아니지만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성서 텍스트에 접근할 때는 이런 해석학적 지평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과연 예수는 구름에 휩싸여 승천하셨다는 이 보도는 진술된 그대로 사실일까? 우리는 이런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성서가 나름의 “삶의 자리”인 고대인들의 우주관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서가 그 당시의 우주관을 뛰어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다 해서 성서의 권위가 깎이는 건 결코 아니다. 성서는 어떤 객관적인 과학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 너머의 영적인 현실을 전하려는 목표로 저술되었기 때문에 비록 그 당시의 유치한 우주관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고대의 우주관으로 진술되고 있는 그 고대 텍스트를 읽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그들에게 인식된, 다르게 말해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해석해 내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성서 텍스트에 숙명적으로 내재해있는 고대인들의 세계 이해방식인 ‘신화’를 구별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늘, 땅, 지하라는 삼층의 우주관에 의해서 작동되던 고대인들은 자연을 주술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주술적 이해가 오랜 전승을 통해서 굳어진 이야기를 우리는 신화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단군신화를 비롯해서 모든 민족의 삶에는 이런 신화들이 분명한 자리를 잡고 있다. 성서도 역시 그런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법 담고 있다. 물론 축자영감설*에 절대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성서의 모든 보도는 역사적 사실이지 그 어느 한 구석에도 신화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이 잘 갖추어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이런 부분에서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일종의 극단적 원리주의에 불과한 축자영감설이 한국에는 주류 행세를 한다는 게 한국교회의 비정상적인 현실이다. 그들은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엄격하게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타협한다. 만약 축자영감설을 순수하게 따른다면 안식교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고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전통을 고집하면서 여전히 성서를 문자의 차원에서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구약의 율법을 부분적으로만 지키면서 노아홍수 같은 보도는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태도는 성서 해석의 편의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결국 축자영감설이라는 게 어떤 신학적 토대를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성서 해석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겠다는 안이한 착상에 불과하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축자영감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역사의 실존적 불안을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고 도피한다는 데에 있다.

예수가 승천했다는 사도신경과 신약성서의 보도는 당연히 하늘을 이 땅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던 고대인들의 우주관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표현을 우리가 시편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듯이 고대인들은 하늘을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있는 공간으로 여겼다. 승천하던 예수를 구름이 휩쌌다는 묘사는 그런 승천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서의 예수승천 보도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비록 그 당시의 신화적인 표상*으로 예수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들이 그것을 통해서 무언가 영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설명해보려고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들이 인식하고 설명해보려고 애를 썼던 그 영적인 세계는 바로 하나님이며, 그의 통치다. 따라서 그들은 앞으로 이 세계를 심판할 예수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생각한 하늘로 올라갔다고 이해하고, 그렇게 표현했다는 건 당연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잘한 일이다. 이 승천보도의 핵심은 이제 예수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던 그런 생명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형식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이다. 비록 하늘이라는 그 당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핵심에는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오늘 2천 년 전과 전혀 다른 우주관과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신화적 표상의 승천보도에서 그것의 신학적인 핵심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지 단지 신화적으로 따라가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여기서 오늘의 많은 설교자들과 신자들이 혼선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신학적 성서읽기와 신화적 성서읽기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거의 모든 설교자들과 신자들이 무조건 ‘믿음’이라는 자세로 성서의 신화적인 보도를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는 게 과연 신학적으로 정직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하늘은 어디인가?
사도신경과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승천 보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주기도와 연관된다. 이 주기도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며, 이 땅의 일들은 하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이 기도의 ‘하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 승천과 아울러 재림의 의미도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만이 아니라 자주 하늘과 연관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요 6:38,40).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만에 구름을 타고 승천했으며,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는 그 모양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믿었다. 이미 바울이 빌립보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가르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땅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이런 초월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로마 정권의 억압이나 현실적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국의 흑인 노예들도 역시 이런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하늘을 향한 초월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속적인 세력에 대한 관심과 그런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서 최소한 18세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도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해왔다. 이러한 모순이나 딜레마를 극복하고 교정하기 위해서, 또한 우리의 신앙이 바른 자리에 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셨으며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하늘”이 무엇인지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하늘은 곧 우주의 공간을 뜻하는 것일까? 초보적인 우주 물리학을 알고 있기만 하더라도 하늘은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2광년 거리에 놓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고, 기껏해야 빅뱅 당시 생긴 흑암물질과 별빛뿐이다. 지금 인류의 우주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지 축소되고 있는지,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그 시작과 끝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곳에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지구와 다른 종류의 생명체의 가능성을 점치고 있기는 하지만, 태양처럼 위성을 갖고 있는 항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우주 공간에 생명체가 있을 개연성은 거의 무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 현상이 없는 곳을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런 우주 공간을 성서가 말하는 하늘, 혹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결코 없다. 우리의 휴거가 우주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미선교회’ 사람들처럼 우리 정통 교회 안에도 하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없진 않다.
둘째, 성서의 하늘이 우주 공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마음속을 가리키는 걸까? 언젠가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하늘나라는 바로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하다.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인간과 인간의 참된 만남, 또는 동료성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도 약간 지식인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이렇듯 실존적인 의미에서 하늘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하늘나라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면 우리는 신학보다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이 훨씬 하늘나라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제공한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셋째, 지상천국이 성서가 말하는 하늘일까? 안식교인이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대표되는 이런 지상천국론자들의 주장은 하늘을 이원론적으로 간주하는 정통 교회의 입장보다는 훨씬 그럴듯해 보인다. 이 땅에 다시 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해보면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이 지상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입장의 내면을 들어가 보면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아니라 민중신학이나 생태신학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땅에 민중들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설이나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지상천국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어도 그와 비슷한 구도가 담겨 있다.
이미 2천 년 전에 언급된 말씀인데도 하늘이 무엇인지 여전히 확정되지 않은 탓에 교회 안에서 이 개념은 제 멋대로 해석되었다. 그 어떤 해석학적인 설명 없이 막연하게 땅과 대별되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언급되고 적용되었을 뿐이다. 흔히 일컬어지듯이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또는 “영혼 구원을 받으세요.”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무언가 불확실한 것을 추상적으로 잡으려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즉 하늘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오늘의 삶과 역사 앞에서 무책임하게 살아가도록 부추기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관점을 보인 기독교는 계몽주의 이후로 주로 자연과학자들과 휴머니스트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신은 죽었다는 유명한 명제로 그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땅에 충실하라고 외쳤으며, “도덕 계보학”에서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죄의식에 기초한 도덕심을 떨쳐버려야만 인간의 삶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니체는 기독교의 하늘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생명을 강조함으로써 반 기독교적 운동에 선봉자가 된 것이다. 그 이외에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기독교의 하늘이 인간의 삶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가혹한 비판과 독설을 던진 사람들이 많다. 신이란 인간의 투사일 뿐이라고 말한 포이에르바흐, 어린애로 남는 자들의 환상이며 따라서 집단적 히스테리라고 말한 프로이트,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 등이 그렇다. 그들의 주장이 비록 기독교를 부분적으로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우리의 신앙에 현상하고 있는 비실질적 흔적을, 즉 하늘에 대한 이원론적 추상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늘이 매우 불확실하다면, 니체 같은 이들이 말하는 땅은 확실한가? 인간이 이 땅에서 초인적 힘을 발휘해서 달성한 결과는 구체적이며 영원한 가치가 있나? 하늘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땅을 경작해서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었나? 인간의 계몽과 진보는, 특히 현대의 생산성은 외면상 풍요로운 생명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이전의 시대에 비해서 털끝만큼도 나아지지 못했다. 하나님에게서 해방된 인간은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정치 이념이었든, 자본주의였든, 세계 혁명이었든 상관없이 인간이 만든 것은 결국 인간은 노예로 삼는다.
이 땅에서 우리 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의 삶을 지탱해왔으며, 온갖 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기 때문에 이 땅이 아름다워 보이고, 또 어떤 면에서 아직 이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나 당위가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리 절대적인 삶을 경작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절대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앞서 말한 지상천국이 현실화되었다고 하자. 인간이 이 땅에서 이런 방식으로 영원히 산다고 하자. 병도 없고 굶주림도 없이, 억압과 미움도 없이 천년만년 살 수 있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가? 기독교의 하늘이 공허하다면, 인간의 땅도 역시 황폐하다.
과연 하늘은 이 땅에 있는 인간의 삶을 경시하는 종교적 기만이며, 인간의 오디프스 콤플렉스가 반영된 것이며, 인간적인 투사에 불과한 것인가? 물론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의심받을만한 일을 적지 않게 행했다. 신앙적으로는 하늘을 기다리라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은 매우 영악하게 땅의 질서만을 따라가게 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모습은 철저하게 초월적이면서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다. 이러한 양극단의 모습이 기독교 비판자들에게는 위선이며 자기학대로 비쳤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기독교 비판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일단 정당하지만, 동시에 그들도 역시 인간 구원과 성취 문제에서 결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와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 기독교 역사에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제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은폐성
우리가 하나님을 꽃이나 새, 또는 안개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다. 아주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이런 답답증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과 평화의 마음에 휩싸이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 문제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야, 또는 종말이 온 다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가? 그 답이 곧 하나님의 은폐성(Deus absconditus)이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은폐되어 있는 분이다. 성경을 구구절절이 꿰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학, 철학에 관한 학문에 능통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증언되며, 이 거룩한 분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고 까지 했다. 즉 못 볼 것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렇듯 명백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생명도 역시 그 궁극적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 여기 민들레꽃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햇빛과 물과 탄소를 결합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을 생산한다. 우리의 모든 먹을거리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기초 단위는 햇빛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탄소, 또는 물인가? 그 모든 것인가? 그 중에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생명공학자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 불과하지 근본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못된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 생명의 기원에 상당히 접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현상에 대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무식한 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생명을 말하려면 그것 이전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해명해야만 한다. 하이덱거가 질문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존재(Sein)이다.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우리의 감각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절대적인 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명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힘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물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원자를 기초로 한 어떤 물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는 입자가 아니라 너무나 작아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핵과 그것보다 더 미세한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의 핵은 원자를 대형 교회당으로 확대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찬송가 악보의 작은 보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핵마저도 역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물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즉 물질 자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 존재, 물질의 은폐와 연관된 하나님의 은폐는 그렇게 어둠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계시마저도 역시 완전한 노출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을 취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에서 자기를 은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바로 신학이며 설교다. 바로 이 예수 사건에 이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종말이 이미(schon)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noch nicht) 상태라고 믿는다.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으로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하고 구원론적 지평을 제시하는 중이다.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씨앗과 꽃의 관계가 이와 같다. 씨앗에는 꽃의 세계가 드러나 있는 게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숨어 있다. 그러나 씨앗이 없으면 꽃도 없기 때문에 이 두 관계는 계시와 은폐를 동시에 갖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생명인 부활(영광)의 세계
근본적인 면에서 하늘은 니체나 프로이트, 혹은 포이에르바흐가 비판하듯이 인간 삶을 왜곡시키고 소외시키는 요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추상적인 데 묶어두지 않고 참된 리얼리티와 연결시키는 하나님의 힘이다. 또한 하늘은 이 땅과 대립적인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땅은 현실이고 하늘은 관념이지만 결국은 동일하다. 땅은 생명의 질료이며, 하늘은 생명의 형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 두 세계가 온전한 생명을 이루어낸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하늘로부터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킨다고 보았다. 예수님에게 임했던 영광의 몸은 바로 부활을 가리킨다. 영광이라는 독일어(Verherrlichung)에는 주(Herr)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영광은 왕 같은 통치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셨다는 의미에서 부활은 그가 영광의 세계로 높임을 받았다는 뜻이다.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도 결국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왕처럼 살아가는 때이다. 그때를 가리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한다.

*일시적인 것이 ‘영적인’ 몸으로 변형하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극단적이어서 어느것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변형은 현재 우리의 지상적 몸과 맞닿게 되며, 우리의 현재적 현전과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재적 몸 대신에 무언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만들어쟈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단지 신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극단적 변형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유일한 보도를 접했을 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 그가 경험한 하나의 현실성은 모든 지상적 생명과 완전히 다른 종류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없다.(사도신경해설, 134).  

우리 기독교가 생각하는 종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일어난다고 본다. 우리가 영광을 생산해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그런 부활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믿음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생명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가 세밀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다만 소극적인 면에서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변화는 현재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이 몸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부활한 예수님은 죽기 이전의 인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제자들과 대화를 했고, 식사를 함께 했다. 즉 영광의 몸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현재의 몸과 아무 상관도 없는 혼령이나, 혹은 기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둘째, 영광의 몸은 현재의 몸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을 덧입는다. 비록 현재의 몸과 깊은 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다. 예컨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된다고 할 때 그 나비는 애벌레 상태의 그 몸으로부터 변화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몸이 되었다는 것과 비슷하다. 애벌레의 상태에서는 나비의 세계를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 사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비와 밑에서 올려다보는 애벌레의 관계가 서로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인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덧입게 될 부활과 생명의 세계도 역시 현재 우리의 삶과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이다.
궁극적 생명 형식인 이 영광의 몸은 오늘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이 생명을 선취했다고 믿는다. 즉 예수 사건에서 이미 하늘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이 사실을 증언하는 공동체다. 예수 부활에서 어떻게 궁극적인 생명이 완성되었는지 설명해야한다. 특히 우리는 은폐된 생명인 하늘을 우리의 삶에 현실화시키고, 이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변증해나가야 한다.

재림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다시 이 역사 속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에서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약간 색깔을 달리할 뿐이지 신이 인간 사회에 온다거나 이미 왔다고 가르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재림신앙은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생전에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앙적 현안으로 자리를 잡았던 이 재림의 실체는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구름에 싸여 승천한 예수는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신화적 표상의 승천 보도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생명 인식을 가리키는 것처럼 재림에 관한 신화적 표상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구름에 싸여 재림한다는 말을 사실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예수의 재림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주장과 상반된다. 구름에 싸인 승천과 재림 표상은 기본적으로 묵시문학적 인자(人子) 사상과 연관된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원래 예수는 인자를 자기와 다른 인격체로 구별하고 있었는데(눅 12:8) 부활절 이후 공동체가 도래할 인자를 예수와 동일시함으로서(마 10:32) 이제 곧 예수가 인자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하늘로부터 발생한 예수의 현현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 게 틀림없는 인자 상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서 예수와 인자 사이에 그 어떤 틈도 개입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구나 세상 심판을 하나님 통치의 궁극적 건설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사도신경해설, 155).  
예수의 승천이 은폐된 하나님의 생명과 연관된 사건이라는 사실과 연관해서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재림은 곧 그 은폐의 생명 사건이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현재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듯이 예수의 재림은 곧 생명의 완성이 성취되는 때이며, 그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생명 형식과 내용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우리가 며칠만 굶으면 생명의 위기에 빠진다거나 온갖 질병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삶의 조건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고독하고, 어떤 영적인 만족이 없다는 실존적인 현실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운명은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취약하고 부분적이고 잠정적인지에 관한 분명한 실증이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러한 생명 조건 자체를 통해서 어떤 영원한 생명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종교적인 경험이라는 것도 역시 완전한 세계와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완성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류는 문명을 꽃피우고 있지만 그런 노력들이 실체적으로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실성이 없다. 이런 문제는 앞에서 ‘구원론’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암시를 했기 때문에 여기는 더 이상의 논의를 접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미 초기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현상에 담지된 잠정성을 뚫어보고 그것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찾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의 재림으로 생명이 완성된다는 말은 결국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역사가 단절되는 시점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의미이다. 비록 신약성서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재림 표상은 이 세계, 이 우주가 인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힘의 개입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기독교 교회력의 시작이 바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역사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림신앙과 진보사관에 기초를 둔 세속문명과 충돌한다. 과연 현재의 역사와 종말 이후의 역사는 연속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절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인가? 물론 근본적으로 우리는 단절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이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절이면서도 연속성을 상실하지 않는 이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아직 명백하게 해명할 수 없는 이 재림 문제는 부활, 종말, 창조와 큰 틀에서 연관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종말론’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역사를 단절한다는 이 재림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자.

*요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는 ‘과거사진상’, 또는 ‘역사청산’이라는 문제가 역사 단절 및 연속성의 변증법적 관련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해방 이후 60년 동안 방치해 둔 친일문제를 매듭짓는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 역사의 단절이기도 하지만 나름으로 연속이기도 하다. 친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 단절이지만 한민족이라는 틀에서 보면 여전히 연속이다. 이처럼 예수의 재림은 그때까지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단절이지만 인류와 우주라는 큰 틀에서 보면 연속이기도 하다. 즉 변화된다는 점에서는 단절이지만 재림 이전의 역사가 없으면 재림도 없다는 의미에서는 연속이다. 다른 방식이 없어서 이런 비유로 설명했지만 재림이 역사를 어떻게 해결하게 될지 여전히 우리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분명하다.  

심판
역사의 단절이든 연속이든 예수의 재림이 우주론적 역사에서 결정적인 준거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이다. 결정적인 준거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재림과 최후의 심판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킨다. 사도신경도 이것을 명시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이 최후의 심판마저 매우 신화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흡사 옥황상제가 어떤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던지거나, 또는 영원한 천당으로 보낸다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런 방식으로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는 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신화적 표상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어떤 ‘심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행위가 어떤 기준에 따라서, 그 기준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어쨌든지 심판받는다는 사실은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이미 복음서가 설명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분명하게 들어 있다. 특히 수난설화에서 중요한 대목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지막 때에 관한 여러 비유가 그런 가르침들이다. 마지막 때에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 그런데 이 심판의 핵심은 의와 불의의 기준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르침들은 최후의 심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이지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재단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통치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일치시켰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 이 심판의 통치가 곧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안으로 들어다는 것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권선징악의 방식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행사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는 길인 셈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라는 이름에 마술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에 들어가는 것만이 바로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이 기본적으로, 원칙적으로 옳지만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에 관해서 충분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경우에 따라서 형식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신의 욕망에 빠져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모든 인간을, 그리고 그 인간과 더불어 전체 피조물을(롬 8:21 이하)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중재하는 일을,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과 아들 관계로 이끌어가는 일을 완성한다.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의 지상적 현존에서 이미 현실적이었던 그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루터가 언급한대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실행된다고, 복음을 듣는 자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신경해설, 161).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예수의 재림 및 심판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마태복음에는 그 유명한 ‘최후의 심판’에 관한 비유가 있다(25:31-46).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구원받은 이유는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것이며, 주님을 모른 체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된 이유도 역시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행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사실 이런 비유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양쪽의 행동을 번갈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지 제외될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종교의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의존해서 살아가겠다는 의미이지 그것의 마술적인 힘에 의지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국 믿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무엇인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그 안에 들어가려는 치열한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 어떤 결정적인 대답을 찾을 수는 없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나름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세리나 죄인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잘못된 믿음은 최후의 심판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방식으로 진술되고 있는 예수의 승천과 재림은 결국 생명의 완성에 관한 질문이며 해명이다. 인간이 어떻게 생명을 얻고 완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의 재림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의 완성되는 때라는 해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승천과 재림을 무조건 신화적인 구도로 받아들인다면 열광주의자로 남을 것이며,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면 그는 허무주의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광신도 아니고 냉소도 아닌 참된 기독교적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승천과 재림을 생명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해석해나간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 앞에 직면해 있는 이 생명현상의 은폐성, 그 신비 앞에서 놀라움과 희망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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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 선

2014.08.01 12:29:07
*.224.3.13

생명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탄생 삶 부활이라는 세 단계를 통해서 완성해가셨다는 의미인가요?

우리의 삶에서는 부활이라는 요소가 없으니 우리는 그 부활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신지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4.08.01 23:21:59
*.94.91.64

예, 기독교 신앙에서 생명의 완성은 총체적인 사건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삼위일체론적이라고 해야겠지요.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의 완성,

아들을 통한 죄와 죽음의 극복,

성령을 통한 생명의 충일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서

생명을 완성해 나가는 겁니다.

이런 신학적 표현이 확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각각의 내용에 많은 전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5]:-) 선

2014.08.02 15:12:10
*.224.3.13

꾸준히 공부해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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