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하이데거 철학 맛보기 -9월23일-

조회 수 4113 추천 수 123 2004.09.22 18:43:40
3장: 하이데거 철학 맛보기  -9월23일-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검토한 하이데거의 철학사적 자리를 염두에 두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유를 신학적 관점으로 접근하기에 앞서 그의 철학을 일종의 ‘맛보기’ 차원에서 생각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 방법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존재와 시간> 1장, 12절을 흡사 우리가 성서 본문을 주석하듯이 직접 읽고 주석하는 것이다. 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참고적으로 하이데거의 연보를 잠시 살펴보자.

연보

1889                9월26일, 독일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인 메스키르히에서 술창고지기인 부친 프리  
                                드리히 하이데거와 모친 요한나 켐프의 외아들로 출생
1903-1909                        김나지움
1909-1911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가톨릭) 신학연구
1911-1913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정신과학, 자연과학 연구
1913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쉬나이더 리케르트 교수에게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Die
                                Lehre vom Urteil im Psychologismus).
1915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하빌리타찌온 통과(Die Kategorien-und Bedeutungslehre
                                des Duns Scotus).
1915-1918                        군복무
1917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
1922                토트나우베르크에 산장 연구실 건축
1923-1928                        마부르크 대학 교수
1927                Sein und Zeit 출간
1928                프라이부르크 대학, 후설 후임으로 교수 청빙
1929                7월24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취임 강연(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1933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1934                총장 사임
1936                4월2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횔더린과 시지음의 본질’ 강연
1939                여러 차례 ‘횔더린의 송가’, ‘마치 축제일에...’ 강연
1945-1951                        독일 점령군에 의해 강제 휴직
1946                릴케 사망 20주년 기념 ‘무엇을 위한 시인가?’ 강연
1947                ‘Der Feldweg’, ‘Aus der Erfahrung des Denkens’
1957                2월24일. ‘형이상학의 존재-신론적 구성틀’(Die onto-theologische Verfassung der
                                Metaphysik)이라는 강연을 토트나우베르크에서 행함
1959                하이델베르크 학술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기념 강연
1969                9월2-11일 토르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칸트: 신의 현존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
                                근거’(Kant: Über den einzig möglichen Beweisgrund vom Dasein Gottes) 강연
1976                5월26일(만 86세) 메르키르히에서 사망하여 5월28일 그곳 공원묘지에 안장됨
                (발터 비멜, 신상희 역, 하이데거, 284-287에서 발췌)

이 연보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하이데거의 활동 반경이 거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를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슈바르쯔발트(검은숲이라는 뜻) 지역에 있는 매우 작은 도시인 프라이부르크에서 후설의 후임으로 정교수 자리를 잡고 히틀러 집권 치하에서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해서 오랫동안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학문적 열정과 깊이라는 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그런데 그는 1930년대에 5년간 마부르크 대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존재와 시간>을 출판했으며, 루돌프 불트만과의 학문적 교류도 있었다. 마부르크의 네카 강 건너편에 ‘철학자의 길'이 있는 데 그게 아마 하이데거의 산책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1930년대에 횔덜린의 신에 대한 그를 여러 편 발표했다. 철학자가 시인의 시를 해석한다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데, 횔덜린에 대한 그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느꼈겠지만 시인과 철학자는 사유의 길에 서로 만난다. 횔덜린은 철학적인 시인이며, 하이데거는 시인 같은 철학자였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다른 한 세기가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대화가 가능했다. 나는 이런 대목에서 신학자는 시인이며 동시에 철학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예언자들이 그런 길을 걸었다.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예언을 읽어보라. 그들은 시인이며 역사가이며 철학자였다. 이 말은 곧 신학자가 근원에 대한 사유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존재문제의 필연성
이제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 앞부분을 따라 읽고 우리의 능력이 닿는 데 까지 해석하기로 하자. 하이데거의 텍스트 끝에 괄호로 묶어 쪽수를 넣었으며, 필자의 주석은 괄호가 없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에서 중심 주제였으면서도 실제로는 망각되었던 존재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펼쳐내기 위해서 그 필연성을 언급한다.  

제1장 존재문제의 필연성, 구조 및 우위
제1절 존재에 대한 물음을 명료하게 되풀이하는 필연성
현대가 비록 형이상학을 또다시 긍정하는 것을 진보인 줄 생각한다 하더라도 존재 문제는 오늘날에 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존재에 관련된 거인의 싸움’을(플라톤, 소피스테스) 재연시키려는 노력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된 물음은 결코 임의의 물음이 아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대해 숨 돌릴 틈도 없이 연구했지만 그 이래로 침묵하고 만 것은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탐구하기 위한 주제인 물음으로선 그렇다- 그들 두 사람이 획득한 결과는 갖가지 미로와 채색에 싸이면서 헤겔의 <논리학>에까지 일관돼 왔다. 그래서 예전에는 사고에 대한 최고의 노력 속에서 비록 단편적이고 초보적이기는 하나 현상으로부터 쟁취한 결과가 훨씬 이전부터 진부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23).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존재 문제는 오늘날 와서는 잊혀지고 말았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그 문제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치열한 노력이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지만 결국 오늘날에는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다. 과연 존재 문제는 잊혀진 것인가?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아직 분명하게 정리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명확한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우리가 앞으로 자주 언급하고 논의하게 될 ‘존재망각’이라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의 철학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우리의 궁금증을 그대로 묻어두고 긴 호흡으로 그의 진술을 따라가자.

그뿐이랴. 존재를 학문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마련된 그리스적 발단을 토대삼아 하나의 도그마가 조작되고 말았는데, 이 도그마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이 물음을 등한시해도 좋다고 인정했다. ‘존재’는 가장 보편적이며 가장 공허한 개념이라고들 한다. 그러한 개념은 그것을 정의하려고 하는 온갖 시도에 항거하는 것이다. 이 가장 보편적이며 정의 불가능한 개념은 또한 어떤 정의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온갖 사람들이 이 개념을 부단히 사용하고 있으며 그때마다 이 개념에 의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재빨리 이해한다. 이렇게 해서 숨겨진 것으로서 고대의 철학적 정신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어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 이제는 자명한 것이 되고 말았는데, 아직도 그 점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방법적인 과오를 범한다 하여 핀잔을 받을 지경인 것이다(23).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불필요한 것으로 선언하고 더 나아가 그런 물음을 등한시해도 좋다는 이 도그마에 의해서 존재는 인간의 사유에서, 즉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망각의 길을 가게 되었다. 질문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존재가 우리에게 너무나 확연한 대상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무리 질문해봐야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 문제가 도그마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전자와 연관된다. 즉 형이상학은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가운데서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또는 그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이는 곧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질문 자체를 무의미하거나 비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리로 이해되는 도그마는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담아내는 일종의 그릇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그릇의 꾸미고 보존하는 데만 신경을 쓰지 그 그릇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그릇과 그 내용물을 간단하게 구별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논리적 해명인 신학의 어려움이 있다. 구분되지는 않지만 동일시할 수는 없는 그런 도그마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또렷하게 인식하고 설명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힘들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다고 끊임없이 그 불필요함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갖가지 선입견에 대해 이 탐구는 시초에 있어서 상세하게 논고할 수는 없다. 그러한 갖가지 선입견은 고대 존재론 자체 속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고대 존재론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학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몇 가지의 존재론적인 근본 개념이 생겨난 토대에 관해서 여러 범주가 적절히 입증되어 있는가, 또 그러한 여러 범주가 완벽한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존재의 물음에 대해 미리 명료하게 대답해 두는 것이 그 해석의 길잡이가 되는 경우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갖가지 선입견에 대한 토의를 그것에 의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되풀이하는 필연성이 통찰될 정도에만 한정하기로 하자. 그러한 갖가지 선입견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24).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 문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된 선입견은 이미 고대 존재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여기서 존재의 의미를 계속해서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고대 존재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입견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존재의 이해 내용은 사람이 존재로서 포착하는 모든 것 속에 그때마다 이미 함께 포괄되어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그러나 존재의 보편성은 유개념(類槪念)으로서의 보편성은 아니다. 존재는 존재가 유개념과 종개념(種槪念)에 따라 개념적으로 분절돼 있는 한에서 존재자의 최고의 영계(靈界)를 한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즉 ‘존재는 유개념은 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존재의 보편성은 유개념에 합당한 모든 보편성을 ‘초월하고 있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명칭에 따르면 하나의 초월자이다. 사상(事象)을 포함한 각종 최고 유개념이 다양한 데 비해 이 같은 초월적 ‘보편적인 사물’은 통일성을 지녔으며, 이 통일성을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類比)의 통일’로(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보았다. 이 점을 폭로했다는 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존재론적인 문제설정에 완전히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문제를 원칙적으로 새로운 하나의 토대 위에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24).

하이데거는 고대존재론에 담긴 선입견의 첫 명제를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다’에 있다고 보면서 이를 유개념과 종개념의 구도 속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유개념과 종개념은 다음과 같다. 서로 대비되는 두 개념 사이에 상위에 속하는 것이 유개념이고, 하위에 속하는 것이 종개념이다. 동물과 인간이라는 두 개념을 비교한다면 동물은 유개념이고 인간은 종개념이다. 존재의 보편성을 유개념으로서의 보편성이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존재의 보편성이 종개념이라는 의미일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서 “존재는 유개념은 아니다”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곧 종개념이라는 말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록 유개념으로서의 존재의 보편성을 부정하긴 했지만 원래의 존재 문제를 정확하게 해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존재의 보편성은 당연히 유개념이 아니라 종개념에 자리를 잡는다. 즉 동물이라는 유에 존재의 보편성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에 그 보편성이 인정된다. 중세의 유개념과 종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나로서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세세하게 따라잡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정도로 하고, 다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를 보편 개념으로 보았던 고대 철학의 존재론이 존재를 잘못 보고 있으며, 유개념과 종개념으로 구분해서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도 약간 진일보했지만 결국은 존재 개념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만 일러두는 것으로 정리하자.  

그러나 이러한 범주적인 여러 연관성의 암흑을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밝혀주지 못했던 것이다. 존재론은 이 문제를, 특히 토머스 학파와 스코투스 학파가 지향한 방향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토론했던 것인데, 원칙적인 명료성에는 도달한 바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겔이 존재를 ‘무규정적(無規定的)인 직접적인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 규정을 그의 <논리학> 속에서 전개되는 온갖 범주적 설명의 근거로 삼았을 때, 그 역시 고대 존재론과 같은 방향에 대해 시선을 돌린 채였던 것이다. 다만 사상(事象)을 포함한 ‘여러 범주’가 다양한데 비해 존재가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미 설정된 문제였는데 헤겔이 이 존재의 통일성이라는 문제를 포기한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존재는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말할 경우, 이 말은 이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 가장 명료한 개념이어서 그 이상의 논고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존재라는 개념은 차라리 지극히 흐릿한 개념인 것이다.(24,25).

존재를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고대 철학의 인식론이 인류의 정신사를 통해서 꽤나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존재를 명확하게 해명해주지 못했다. 헤겔의 ‘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이라는 표현도 역시 고대 존재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한 우리는 결코 존재의 실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러 범주 개념으로 존재를 해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그런 인식과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그래서 흐릿하게만 나타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은, 엄격하게 말해서 그가 말하는 존재는 개념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의 노장(老莊)이 말하고 있는 도(道) 개념과 유사하다. 도의 세계에서는 진리라는 것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까마득하게 보일 뿐이지 손바닥에 명쾌하게 잡히는 게 아니다. ‘있음’보다도 ‘없음’, ‘높이’보다도 ‘깊이’에서 이 세상의 이치를 찾고 있는 이 도 개념은 우리가 아무리 파악하려고 노력해도 잡히지 않는 그런 세계로 표현된다. 전도서 기자와 욥기 기자가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이외의 모든 성서에 서술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한결같이 이런 성격을 갖고 있다. 종말이 되어야 진리가, 곧 하나님이 완전히 계시된다는 종말론에 의한다고 하더라도 이 역사에서의 모든 사건과 계시는 여전히 은폐성을 안고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을, 그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이든지, 노장의 도이든지 기독교의 하나님이든지, 그 모든 근원을 우리가 명쾌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존재라는 개념은 차라리 지극히 흐릿한 개념’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일리가 있다.

2. 존재라는 개념은 정의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점은 이 개념의 최고의 보편성으로부터 추론되었다(파스칼, 팡세와 소품집). 이것은 옳은 추론이었다. 정의는 최근류(最近類)와 종차(種差)에 의해 얻어진다라면 그런 것이다. 사실상 존재는 존재자로서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는 것이다. ‘존재에는 어떠한 성질도 덧붙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존재에 존재자가 귀착된다고 하듯 존재를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정의를 고차의 여러 개념으로부터 끌어내거나 저차의 여러 개념에 의해 서술하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존재는 어떠한 문제도 더는 제공할 수 없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존재는 존재자라고 하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한계 내에서 존재자를 규정하기 위한 정당한 양식도 -그 자체가 스스로의 기초를 고대존재론 속에 가지고 있는 전통적 논리학의 정의도- 존재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가 없다. 존재가 정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물음을 묻도록 촉구하는 것이다.(25).

존재에 대한 두 번째 선입견은 존재 개념을 정의내릴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앞 단락에서 비슷하게 말했듯이 존재는 인간의 개념 안에 들어온다기보다도 오히려 흐릿한 그 무엇이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말은 옳다. 그런데 문제는 서양철학이 존재에 대한 질문 자체를 봉쇄했다는 데에 있다. 비록 우리가 존재를 개념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에 대한 질문은 긴급하게 요청된다. 이 말을 우리 신학의 경우에 대입시킨다면 하나님에 대한 논의는 이미 일단락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논의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그분이 바로 우리의 모든 근거라는 점에서 여전히, 아니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설교 현장에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을까? 설교 현장을 신학적 담론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하는 설교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열려진 질문을 전제하지 않는 하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3.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모든 인식작용, 진술작용에 있어서 존재자에게 관련되는 모든 태도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모든 태도에 있어서 존재는 사용되고 있으며 또 이 어휘는 그 경우에 즉시 이해되고 있다. 누구나 ‘하늘은 푸르게 (있다)’든지 ‘나는 기뻐하고 (있다)’든지를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는 하나 이 같은 평균적인 이해의 용이성은 이해의 곤란을 논증할 뿐이다. 이 같은 평균적인 이해의 용이성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게로 관련되는 모든 태도이지만 존재 속에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아 프리오리(a prioiri)로 숨어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한다. 우리는 그때마다 이미 그 어떤 존재이해 내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인데, 그와 동시에 존재의 의미는 어둠으로 덮여 있다는 것, 이것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되풀이하는 원칙적인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명한 것’ 그것만이, 즉 ‘보통의 이성의 내밀한 판단’(칸트)이 분석론의 명료한 주제 ‘철학자들의 임무’가 되어야 하며 어디까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철학적인 근본개념의 범주 안에서, 뿐만 아니라 존재라는 개념에 관해서 자명성을 인용한다는 것은 의아스러운 방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각종 선입견을 고찰해 보며 동시에 분명해진 것은 존재를 묻는 물음에 대해서 해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물음 자체가 흐리멍덩해서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문제를 되풀이 한다는 것은 우선 첫째로 그 문제 설정을 충분히 완전하게 한다는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25,26).  

하이데거가 세 번째로 제시한 선입견은 존재를 자명한 개념으로 보는 태도이다. 그는 여기서 독일어 용법을 예로 든다. Der Himmel ist blau. 또는 Ich bin froh. Ich bin sicher. 이런 문장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로 독일어에서 sein은 ‘이다’, ‘있다’, ‘어떠어떠하다’ 등등의 여러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에게는 sein이 자명하고 당연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존재를 이렇게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의 관계 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결국 존재가 밝혀지지 않는다는 게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이런 선입견은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어는 존재론적인 특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는 그런 존재를 의식하면서 말을 한다.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고, 가족과 자동차가 있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현대 미시물리학에서도 물질, 또는 사물을 실체론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공간과 에너지로 여기듯이 이제 존재에 대한 자명한 개념은 그 토대를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혼란 속에서 존재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장 어떤 해답을 찾거나 개념화하기보다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충분하게 주제화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을 그는 2절에서 다루고 있다.

존재 질문의 구조
하이데거는 위에서 지금까지 서양 철학이 무관심하거나 또는 당연시하던 ‘존재’를 향해서 새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그 물음의 방식은 이전에 실행되던 범주화나 개념화가 아니라 그런 물음의 구조에 대한 것으로 진행된다. 즉 이 말은 “존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로 접근한다는 뜻이다.

제2절 존재에 대한 물음의 형식적 구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설정되어야 한다. 이 물음이 하나의 기초적인 물음일 뿐만 아니라 바로 기초적인 물음 그 자체라고 하면, 그 같은 발문(發問)은 적절한 전망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물음이라고 하는 것에는 무엇이 속해 있는가라는 점이 간단하게 논구(論究)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거기에서 이 존재 문제가 하나의 두드러진 물음으로 간취(看取)될 것이다.(26).

하이데거에 의하면 물음 자체가 곧 존재가 자기를 들어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존재가 어떤 실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존재가 없이는 물음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셈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나무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다. 무슨 색깔인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질문할 수 있다. 여기서 나무는 존재자일 뿐이지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현존재이다. 현존재로 하여금 존재자인 나무에 대해서 질문하게 하는 그것인 곧 존재가 자기 노출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자신을 없지만 대충 그런 뜻으로 새겨도 크게 잘못을 없을 것이다. 좀더 하이데거의 진술을 따라가 보자.  

묻는다는 일은 그 어느 것이건 하나의 탐구이다. 온갖 탐구는 탐구를 받는 자 편에서 선행적(先行的)으로 그 방향을 정하고 있게 마련이다. 묻는다는 일은 존재자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과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 그 존재자를 인식하면서 탐구하는 일이다. 인식하면서 탐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일’이 될 수 있는데, 이 근본적 탐구란 그 물음이 향해져 있는 바로 그것 자체로부터 방해물을 제거하면서 바로 그것 자체를 규정함을 말한다. 묻는다는 일은 무엇인가를 묻고 추궁한다는 의미이므로 그 물음에 있어서 ‘물음을 받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무엇을 묻고 추궁한다는 것은 통틀어 무슨 방법으로나 무엇인가를 단서삼아 물어본다는 것이다. 묻는다는 일에는 물음을 받는 사물 이외에 ‘물음을 받고 있는 자’가 속해 있다.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물음, 바꾸어 말하면 특히 이론적인 물음에 있어서는 물음을 받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어 개념으로 옮겨져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음을 받고 있는 것 속에는 본래적으로 지향되고 있는 것으로서 ‘물음을 받으며 확인을 받는 자’가 숨어 있어서, 이것에 도달했을 때 물음은 그 목적을 이루는 셈이다. 묻는다는 일 자체는 어떤 존재자가, 즉 묻는 자가 취할 태도로써 존재의 어떤 고유한 성격을 갖는다. 묻는다는 일은 그저 막연하게 물을 뿐이라는 식으로 수행되는 수도 있고, 명시적인 문제설정으로서 수행되는 수도 있다. 이 명시적인 문제설정에 특유한 것은 묻는 일이 물음 자체의 전술(前述)한 구성적(構成的)인 모든 성격 전체에 걸쳐서 미리부터 전망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우리는 존재 문제를 지금 말한 모든 구조계기(構造契期)에 착목(着目)하면서 논구해볼 필연성에 당면하게 되는 것이다. (26,27).

매우 까다롭게 진행되고 있는 하이데거의 논리를 따라가려면 우리의 인식론적 층을 다층적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는 물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단순하게 누가 무엇을 알기 위해서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제하면서도 그 물음 사건에 연관된 사태를 여러 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존재가 이 물음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이 바로 하이데거가 핵심적으로 해명해내려는 부분이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묻는다는 일에는 물음을 받는 사물 이외에 ‘물음을 받고 있는 자’가 속해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저 나무는 무슨 색깔인가, 하고 묻을 때 그 나무라는 사물만이 아니라 이런 물음을 받고 있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묻는 사람의 친구일 수도 있고 동생일 수도 있으며, 또는 시인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물음을 받고 있는 자라는 하이데거의 진술은 단지 그런 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어떤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게 곧 존재인 셈이다. 즉 우리가 저 나무는 상수리인가, 하고 질문할 때 그 나무가 중심 주제라기보다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무를 나무되게 한 그 존재가 이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늘 존재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탐구하는 일로서의 묻는 일은 탐구를 받는 사물 편에서 선행적으로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존재의 의미는 이미 그 어떤 방법에 의해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이미 그 어떤 존재양해내용(存在諒解內容)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앞서부터 암시하고 있었다. 그 존재양해내용 속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표면화하여 추궁하는 물음으로 인해 존재의 개념에 도달하려고 하는 경향이 생겨난다. 존재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인가 물을 때엔 이미 우리는 이 ‘있다’에 대해 그 어떤 양해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이 ‘있다’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가 개념적으로 확정짓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거기로부터 포착하고 확정해야 할 지평마저 식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평균적인 막연한 존재양해내용은 하나의 현사실이다. (27).

우리가 그것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존재양해내용(存在諒解內容)”은 무엇일까? 독일어 원서가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지만 앞에서 대략적으로 설명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종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같은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있다’고 동의한 가운데서 그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논의하게 된다. 하이데거가 볼 때 이게 너무나 막연한 생각이다. 흡사 우리가 “하나님이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우리가 존재에 대해서 서로 양해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그런 내용을 가리켜 ‘현사실’이라고 일컫는다. 하이데거는 그런 존재양해를 문제 삼고 있다. 아마 그가 후설의 현상학이 지향하고 있는 ‘엄밀한 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탓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양해된 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존재에 대해서는 보다 더 엄밀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양해 문제의 심각한 오류를 하이데거는 이어서 문제 삼고 있다.

이 같은 존재양해내용은 아직도 지극히 분명치 못하고 막연한 것이며 단순한 언어의 지적이 될 법도 한 것이지만, 그때마다 이미 뜻대로 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이 존재양해내용이 이같이 무규정적인 것은 하나의 적극적인 현상이기조차 한 것이어서, 이 적극적인 현상은 해명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존재의 의미에 관한 근본적 탐구는 이 같은 해명을 처음부터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평균적인 존재양해내용을 학문적으로 해석하기에 필요한 길잡이는 존재개념이 형성됨으로써 비로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개념의 명백성 및 명시적으로 존재를 양해하기 위한 이 개념에 귀속하는 양식의 명백성, 이러한 명백성에 의거해서 결정될 일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어둡게 가려지거나 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존재양해내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 다시 말해서 존재의미를 명시적으로 밝게 하는 것을 어둡게 하거나 또는 방해하거나 하는 것에는 어떤 종류의 것이 가능하며 필연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더욱이 이 평균적인 막연한 존재양해내용은 존재에 관한 전승적인 여러 가지 이론이나 견해로 인해 혼입되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뿐더러 그것은 이러한 갖가지 이론이야말로 세상에서 행세하는 양해내용의 원천이라는 점이, 그 경우에 은닉되고 있을 정도이다. (28).  

하이데거가 파악하고 있는 ‘존재양해내용’은 매우 막연한 것이면서도 그것이 적극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물론 그가 <존재와 시간>의 앞부분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약간 유보적인 자세로 간략하게 그 밑그림을 그릴 뿐이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앞으로 존재개념이 형성되는 것과 더불어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고대 존재론에 내재한 선입견을 지적한 바 있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의미가 드러나는 작업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렇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해명하려는 ‘존재’라는 것이 서양 철학사에서 다루어진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존재하는 것들의 토대와 본질을 밝혀보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서양 철학에서 다루어진 그런 존재와 하이데거가 해명하려는 존재가 전혀 다른 지평에 있다는 뜻이다. 이 차이를 우리가 따라잡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기존의 존재론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서로 교차하고 대립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틈새를 열고 들어가기 힘들다는 뜻이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하이데거 자신도 이 문제를 매우 소극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는 흡사 기독교를 독단론에 근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진리론적 차원에서 해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작은 차이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존재란 무엇이냐고 묻는 일에 있어서 탐구되고 있는 것은 설령 당면문제로서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완전히 미지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취되어야 할 이 물음에 있어서 물음을 받고 있는 것은 존재이다. 즉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바로 그것, 설령 존재자가 어떤 모양으로 논구되든 간에 존재자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그때마다 이미 양해되고 있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존재자인 것은 아니다. 존재문제를 양해할 경우의 철학적인 제일보는 ‘어떠한 우화도 이야기하지 않겠다’(플라톤, 소피스테스)는 점에 있다. 바꾸어 말해 마치 존재가 그 어떤 존재자일 수도 있는 성격을 가졌다는 듯이, 존재자의 유래를 더듬어 가지고는 다른 존재자에게로 환원함으로써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물음을 받고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는 이 존재를 제시하기 위한 어떤 고유의 양식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 제시양식은 존재자를 폭로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따라서 ‘물음을 받으며 확인을 받는 자’인 존재의 의미도 어떤 고유한 개념성을 요구할 것이겠지만, 이 개념성을 역시 존재자가 거기에서 자신의 의의에 합당한 규정성을 얻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다시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면서 존재에 대한 질문은 존재자에 대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보통 “저기에 은행나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결코 그런 방식으로 질문되지 않는다. 존재자인 은행나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그런 생물학적인 질문이나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포함한, 아니 질문을 야기하는 그 근원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은행나무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은행나무 아닌 것에 대한 질문이 곧 은행나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인리히 오트의 <사유와 존재> 뒷부분에 나오는 설명이지만, 하이데거에게 사물은 일종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단순한 그 무엇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모든 사물에 대해서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은 그것보다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전개된다. 물(物)은 밝혀줌의 지평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즉 물들의 세계는 존재의 한 차원이다. “물은 잔과 걸상, 오솔길과 쟁기 등이다. 그러나 물은 또한 그것의 방식에 따라 나무와 연못이고 냇물과 산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체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왜가리와 노루, 말과 황소이다. 물들은 그때마다 제재하면서 그들의 방식에 따라 물화하면서 거울과 혁대 쇠, 책과 그림, 왕관과 십자가이다.” 이제 물은 무의미한 사물로서가 아니라 사중자(Gevierte), 즉 땅과 하늘, 신성들과 사멸한 자들이 회집되는 장소로 역동화한다. 이에 반해 오늘의 기술 산업 시대는 물이 단순히 물로 멸절되고 만다. 산업기술로 제작되는 생산품은 더 이상 함축적으로 본질적인 의미의 물들이 아니다. 생산품은 ‘사중자를 회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계의 기술적 통달에 의해서 설정되고 제작되어 이런 통달에 봉사하는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맛보기’ 위해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중에서 앞부분에 속하는 몇 문단의 내용을 추적해보았다. 원래 이 책의 구성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1편과 2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3편까지 계획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완결되지 못했다. 하이데거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른 문헌을 통해서 그의 전체적인 철학적 구상을 분석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접어두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 우리가 검토한 부분만 갖고서도 그가 시도하는 의도가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본다. 즉 전통적인 철학은 하이데거가 말하려고 하는 <존재>의 지평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좀더 깊이 분석하고, 그렇게 망각된 존재를 해명해내려고 한다. 흡사 ‘보물찾기’ 같이 그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의 사유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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