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구약신학

신학입문 조회 수 5618 추천 수 145 2004.09.22 18:46:15

4장

구약신학

 

우리는 앞 시간에 신학과 하나님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이기 때문에 신학은 단지 ‘쓰인 계시’라 할 수 있는 성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인 전체 역사, 또는 우주론적 역사가 바로 신학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그 핵심이었다. 그렇지만 성서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독특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신학 작업에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을 전공할 사람이라면 신, 구약을 철저하게 공부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에 비해서 훨씬 적게 사용되는 현상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우선 표면적으로 볼 때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보다 읽기 및 이해가 어렵다. 기록된 시기가 크게는 1천5백년, 적게는 3, 4백년의 차이가 나고, 그 전승 과정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를 읽고 이해하려면 엄청난 수고를 기울어야 한다. 이런 주석 작업의 난점 때문만이 아니라 좀 더 내면적으로는 구약성서가 우리 기독교의 신앙에서 그 중심이라 할 기독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시각 때문에 설교자들이 구약성서를 설교의 본문으로 잡는 데 망설이게 된다. 만약 신약성서를 본문으로 택하는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명하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구약성서는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심층적으로 증언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신약성서의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설교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1. 기독교인이 구약을 읽어야만할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신학교 초년생들은 교회 생활에서 구약성서를 어느 정도 공부하긴 했겠지만 단순히 그 정보를 아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개중에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그런 정보도 갖고 있지 못한 학생들이 많겠지만 말이다. 어떤 학생들은 아브라함, 야곱과 요셉, 다니엘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약성서를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학생들은 전도서, 욥기, 예레미야 등을 읽으면서 ‘수면제’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어떤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학생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그런 설명을 듣지 못했으며, 본인들도 그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 질문은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그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여긴 그들의 생각이 바로 구약성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한 이유가 유대교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적대감 때문이지 구약성서 때문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런 개연성이 없지는 않지만 유대교 지도자들을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후안무치한 사람들로 몰아댈 필요는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서에 근거해서 예수님과 대립해 있었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은 “초기 기독교는 무엇 때문에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용인하고 만 것일까?”에 있다. 신약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의 단독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지만 구약의 정경화는 단지 유대교의 선택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었다. 교회의 머리인 예수가 유대교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은 역사적 사실이 명백한 상태에서 교회가 유대교의 그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답은 잠시 유보해두고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강조한 이들의 주장을 먼저 들어보자.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립을 강조하고 있는 학자들은 구약성서를 교회의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세기 어간에 베를린에서 교회사가로 활동한 하르낙의 말을 들어보자.

 

2세기에 구약을 거부했던 것은(마르시온, 필자 주) 잘못이었지만 위대한 교회는 이 거부를 올바르게 거절하였다. 16세기에 구약을 그대로 간직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직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구약을 프로테스탄트의 경전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교회적 마비의 결과이다. ... 여기서 구약 자체를 일소해버리는 것, 그리고 고백과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에 명예를 주는 것, 이것은 오늘날 -이제 너무나 늦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요구되는 위대한 행위이다. (에벨링의 ‘신학연구개론’ 39,40에서 재인용. A.v. Harnack, Marcion. Das Evangelium von fremden Gott, 1921, 1924, Neudruck 1960, 217, 222)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넘지 못할 분명한 간격이 놓여 있으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구원론에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 구약성서는 율법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복음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넘지 못한 틈이 있었던 것처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도 그런 틈이 개재하고 있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이가 과장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간과되는 것도 역시 문제이다. 수년 전 유대교의 성막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갑자기 높아진 적이 있었다. 많은 돈을 들여서 그런 건물의 모형을 꾸미고 신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교육을 강화시켰다. 어떤 공부라 하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런 성막과 성전을 알레고리칼 방식으로 우리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약화시키거나 훼손시키는 잘못이다. 건물로서의 성막과 성전은 그것이 아무리 유대교의 신비적 신앙의 차원을 확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더 이상 신앙적 실효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훨씬 능가하는 동일성이 구약과 신약 사이에,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구약성서를 읽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 유대교와의 대화를 간단없이 전개시켜나가야만 한다. 그 동일성을 세분할 수 있긴 하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신약의 내용은 구약을 배경으로 해야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스 유르겐 헤르미씨온(H.J. Hermission)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확실한 것을 제시해야 한다면 그것은 구약 없이는 말할 수 없으며, 양자의 것이 함께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헤닝 쉬레어, 신학이란 무엇인가, 142).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성서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성서는 신약성서 안에 감추어져 있다.” 어거스틴의 이런 진술도 역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통일성과 상호 보완성을 지시하는 것이다.

 

2. 구약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초기 기독교가 구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를 우리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에게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은 같은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위해서도 일단 풀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왜 유대교와 우리가 동일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사건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인가? 우리는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우리의 구약성서 해석은 무조건 옳고 그들의 해석은 무조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인가? 유대교 학자였던 마틴 부버는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그대로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예수 이후로 이 세계는 달라져야만 한 게 아닌가? 그의 질문은 정당하다.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고 한다면 이 세상이 훨씬 정의롭고 평화롭게 변화되었어야만 하는데, 사실 예수 이전이나 이후에 이 세상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폭력적이고 이유 없는 고난이 이어진다. 이렇게 나름대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약간 비틀린 대답을 제시한다. 예수에 의한 구원은 ‘은폐’되어 있다고 말이다. 구원의 은폐성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대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처럼 들릴 뿐이다.

구약성서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배운 메시아 상은 분명히 정치적인 이 세상의 새로운 질서였다. 유대백성들이 명실상부하게 모든 세계를 통치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런 정치적인 힘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실제로 정의와 평화가 혁신적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런 구도 속에서 “주는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반드시 그런 메시아 상만을 보이고 있지는 않다. 신약성서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이해되는 ‘고난 받는 종’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메시아 상이 발견되기도 했다. 어쨌든지 유대인들에게는 실증적인 승리를 담보한 메시아가 핵심인 반면에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은폐된 승리를 담보한 메시아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양측에게 동일한 부분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실이다. 구원자인 메시아가 도래함으로써 이 세상에 구원이 임한다는 기본적인 착상이 동일하다. 유대인들은 그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메시아가 이미(already) 오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메시아의 구원 사역은 은폐의 방식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아직(not yet)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다시 올 메시아를 기다린다. 결국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역시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양측이 같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메시아가 바로 역사에 이미 등장했던 예수였다는 사실을 변증해야 할 책임 있는데, 이를 위해서도 역시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서이다.

 

3. 구약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1) 본문읽기

 

구약공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본문을 독파하는 것이다.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해놓고 읽은 습관을 키우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인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개인적으로 많은 일에 쫓기기도 하지만 성서의 세계가 낯설기 때문이다. 만약 성서읽기를 능력적으로 실행하려면 인내심을 갖고 성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그 세계에 익숙해져야 한다. 만약 어린이들이 만화책이 빠지는 것처럼 우리가 성서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면 성서읽기는 쉽게 해결된다.

어떤 번역본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예배 때 사용되는 개역개정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약간 어려움이 있다. 본문 이해에 초점을 두려면 공동번역이 가장 좋다. 개역개정은 개역을 다시 개정한 번역인데, 전반적으로는 직역에 가깝다. 공동번역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공동으로 번역한 것인데, 의역에 무게를 두었다. 직역과 의역 중에서 어떤 것이 일방적으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능하다면 영어나 독일어 성서를 병행하면 금상첨화다. 궁극적으로는 히브리어 성서를 읽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히브리어를 배운 다음에도 쉽지 않은 문제다. 그렇지만 구약성서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읽기는 필수적이다.

 

2) 역사비평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주어진 거룩한 문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당연히 역사 비평 작업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그렇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열광주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식론적이고 해석학적인 토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역사비평은 필수적인 작업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비평작업으로 훼손시킬 수 있다거나 인간의 해석에 의존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실상부하게 하나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실체적 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사실적인 이유는 구약성서의 전승사적 성격 때문이다. 즉 구약성서는 어느 한 순간에 등장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 과정을 통해서 전승되었다는 말이다. 원래의 계시사건이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구전되면서 정형화된 다음, 그것이 어느 시기에 문서화한다. 이 문서도 역시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 결국 오늘의 구약성서는 이런 오랜 시기의 전승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문서이다. 예컨대 창세기만 하더라도 그 안에는 서로 상이한 성서 기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모세가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J, E. P 기자들이 각각 자기들의 문서를 전승시켰다. 그것이 일정한 시기에 모세의 이름으로 한곳으로 편집된 것이다. 예언서에 나오는 많은 사건이나 선포들도 역시 상당한 경우에 오랜 전승과정을 거쳐 왔다. 따라서 우리가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런 전승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서 무엇이 원래의 말씀이고 무엇이 추가된 것인가를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역사비평의 성서공부의 절대적인 원리는 아니며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아무리 역사비평을 완전하게 실행한다고 하더라도 2천5백 년 전의 문서를 완벽하게 풀어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며, 성령이 활동하심으로써 그런 전승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기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이다.

 

3) 구약전공과목

 

구약을 공부하기 위한 전공과목은 학교에 따라서 편차가 적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영남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대략적인 과목을 확인해보자.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 역사서, 성문서 세미나, 예언서 세미나, 구약석의 방법론, 레위기 연구, 구약신학,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 시문서, 창세기 연구, 히브리어, 율법서, 구약개론.

위에서 열거한 과목을 그 내용에 따라서 다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구약성서를 읽을 수 있는 히브리어 공부- 히브리어

둘째, 구약성서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공부- 성서고고학

셋째, 구약성서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공부- 구약석의 방법론

넷째, 구약성서의 내용에 대한 주석- 역사서, 창세기 연구

 

4. 성서와 기보(棋譜)

 

여기 조훈현과 이창호가 맞붙은 프로바둑 세계대회 기보(棋譜)가 있다고 하자.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모눈종이처럼 생긴 바둑판 위에 일련의 번호가 교차로 매겨진 검은색과 흰색의 돌들이 흩어져 있다. 바둑을 전혀 둘 줄 모르는 사람이 이 기보를 보았다면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른 부분에서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바둑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보는 낙서에 불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바둑의 세계는 그 세계를 아는 사람에게만 출입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10급쯤 되는 사람이 이 기보를 보았다면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이름만 듣고도 세계 최고수의 바둑이라는 것을 알아채긴 했겠지만 그 바둑의 묘미를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아무리 바둑을 좋아하고 하루 종일 그 기보를 들여다본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그 바둑의 세계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아마추어 5급 정도 되면 어느 정도 고수의 바둑이 만들어 가는 길(道)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스스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고, 다른 고수가 설명해주면 그때서야 ‘아하!’의 단계에 들어간다. 아마추어 유단자가 되면 조훈현과 이창호의 바둑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혼자서 열심히 연구하면 기보의 길을 거의 따라잡을 수 있긴 하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한계가 있다. 이렇듯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로서는 꽤 바둑의 조예가 깊다고 하더라도 프로 기사의 바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바둑의 세계는 어느 단계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열리기 때문이다.

왜 바둑의 세계는 일정한 단계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일까? 이 대답은 그 세계의 ‘은폐성’에 있다. 일련의 번호로 단조롭게 흩어져 있는 것 같은 바둑돌들은 그 안에 어떤 길을 숨기고 있다. 그 은폐된 길을 찾아내려면 조훈현이나 이창호 수준의 바둑의 세계에 들어가거나 최소한 근접해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프로 기사들이다.

필자는 성서가 프로 9단 기사가 둔 바둑의 기보이며, 따라서 설교가 바로 기보를 앞에 놓고 해설하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성서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전문적인 영역을 확보한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영적인 경험을 언어로 진술해놓았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세계에서 프로에 해당되는 성서 기자들의 진술을 읽고 그것을 청중들에게 해설하고 있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범하는 큰 착각은 자신들이 성서의 세계를 거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흡사 바둑 5급에 불과한 사람이 조훈현의 바둑 기보를 놓고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와 같다. 그가 아무리 언변이 좋아서 사람들에게 그럴듯하게 전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단지 흉내만 내는 것이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이비 행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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