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교회사

신학입문 조회 수 4833 추천 수 164 2004.10.04 10:24:04

6장

교회사

 

 

역사실증과 역사해석

 

교회사는 말 그대로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분과다. 여기서는 먼저 ‘역사’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역사학인가, 아니면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역사학인가? 앞의 질문은 역사의 사실을 확보하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면 뒤의 질문은 그것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놓여 있다. 물론 이 두 질문은 그렇게 엄밀하게 구분될 수는 없다. 상호간에 침투되어 있다. 사실과 의미는 경우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름대로 충실할 경우에는 일치된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마틴 루터가 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종교재판을 받았을 때 프레드릭 선제후가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개신교의 출현에 미치는 의미는 일치된다. 이제 역사학자는 루터와 그 제국의회, 그리고 프레드릭의 역할을 사실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진리의 역사가 전개되는 의미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학의 해석학적 지평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에서 역사의 사실과 의미가 나름의 토대를 확보하고 있을 때 상호 결합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국 결정적인 부분은 그것이 오늘 오늘의 사람들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실증적 역사주의를 극복하는 학문의 태도로서 역사를 박물관의 미라처럼 죽어있는 사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생기(生起)로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엄밀한 역사는 가능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루터의 경우만 보도라도 그 사건에 연루된 모든 정황을 우리가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상상력을 빌려서 한 마디 한다면 프레드릭 선제후가 자기 아내와의 사소한 갈등으로 인해서 감정이 상했다면, 또는 감기가 들어서 몸의 컨디션이 나빴다면 그 사건이 어떤 길로 빠져들었을는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객관적 사실도 어떤 면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소한 일들의 개입으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쉐익스피어는 이런 우연성을 간혹 ‘요정’의 개입으로 표현했는데,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일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한 여자의 생명이 오가는 공판에서 정부(情婦)를 만날 것을 생각하는 판사의 모습이 묘사된다. 결국 우리는 역사를 한 부분으로 떼어놓고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전체 역사 연관이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오늘 강의의 마지막에 ‘역사와 종말’이라는 제목을 다루어보겠다.) 교회사도 역시 오늘 우리가 해석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늘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생기라고 보아야 한다.

 

 

교회사의 자리

이제 이런 교회사의 독특한 업무를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른 전문분과와의 관련성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교회사의 대상이라 할 교회의 역사 안에 교회와 신학의 모든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신학분과는 궁극적으로 교회사라 할 수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회사는 독립적이기보다는 모든 신학분과의 보조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교회사와 신약학

G. 에벨링은 교회사를 ‘신약성서의 해석역사’라고 불렀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물론 구약도 간접적으로 교회의 역사와 연관되지만 근본적으로는 기독교의 독특한 문서인 신약성서가 이런 교회의 역사에 연관된다. 신약성서의 해석역사가 바로 교회사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의 핵심은 ‘해석’이라는 단어에 있다.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는 지난 2천년 동안 신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기본 명제를 변증하고 해석하는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명제만은 아니지만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지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약성서의 고유한 신앙관을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해석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결국 신약성서의 해석역사라고 보아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신학과 교회사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신약신학은 구체적으로 주어진 27권의 정경과 몇 권의 외경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풀어나가는 분과라고 한다면 교회사는 그런 과정의 역사를 추적하는 분과이다.

 

2. 교회사와 교의학

사실상 교회사와 교의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세계 교회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모임에서 다루어진 문제는 결국 교의학적인 것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두 분과를 결합한 것이 바로 ‘교리사’, 또는 ‘신조사’이다. 교리와 신조 자체를 다루는 분과가 교의학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변화과정에 초점을 두는 분과는 교회사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교의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교회사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을 개념적으로 접근하면 교의학의 대상이 되고, 역사적으로 접근하면 교회사의 대상이 된다. 종말론도 역시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교의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회사의 대상이기도 하다.

교의학이 교회사적인 차원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곧 기독교의 도그마가 역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기독교 도그마는 어느 역사적 시간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체제이기 때문에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역사와 더불어서 새로운 지평으로 심화되어야 할 기독교의 도그마가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독단론 속에 빠져버리면 생명을 살리는 진리가 아니라 죽이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런 게 곧 역사의 신비이다. 어느 한 시기에는 생명의 알맹이를 담고 있지만 역사와 더불어서 새로운 내용이 담기지 않게 되면 그것은 그 순간에 진리의 성격을 잃는다. 예수님 당시의 ‘안식일’이나 바울 시대의 ‘할례’가 모든 그런 과정을 거쳤다. 비록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담는 그릇으로서 중요한 도그마였지만 그것이 절대화하는 순간에 생명이 떠났다. 이런 점에서 교회사는 교회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늘 생명력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3. 교회사와 실천신학

성서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시하고 방향을 모색하는 실천신학은 위에서 언급한 교의학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업무를 역사의 한 시점에서 완료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펼쳐나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이 있다. 예컨대 성만찬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입장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역사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그것은 교회사의 대상이지만 그것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면 실천신학이 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의 교리적 개념을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교의학의 대상이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일종의 신드롬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경배와 찬양> 유의 예배에 대한 교회사적 검토가 매우 아쉬운 실정이다. 기독교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유형의 집회가 각각의 특징을 살리는 것은 문화의 시의성에 민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까지 훼손될 정도로 시대 조류에만 영합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일 공동예배는 일반 전도집회나 찬양집회, 또는 기도회와 달리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돌려지는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배드리는 자들의 심리와 분위기가 훨씬 강하게 작동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예배가 지켜온, 또는 발전시켜온 예전의 전통을 바르게 되살려내는 작업이 시급하다. 이런 작업이 가열차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모든 예배는 형식적으로는 기독교적이겠지만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흡사 ‘뉴에이지’ 운동의 차원으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성령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의 영성에 도취해버리는 종교체험은 곧 뉴에이지 운동과 다른 게 아니다. 이런 작업은 물론 실천신학자들이 주로 감당해야겠지만 요즘의 분위기로 볼 때 그런 가능성보다는 교회사학자들이 나서야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사 연구의 진리론적 지평

에벨링은 자기의 저서에서 교회사의 신학적 전문성에 대해서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 교회사의 해석학적 관점이다. 그는 교회 역사의 기원과 지속, 통일성과 다양성, 통일성과 변화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해석의 범주에서 가장 적절하게 인지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아주 정밀하고 순수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에벨링이 말하는 대로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둘째, 교회사의 경험적 측면이 그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교회에 관한 추상적인 교의의 진술들이 교회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인 관찰로 중개되지 않는 한, 그러한 중개로부터 비판적인 검토에 내맡겨지지 않는 한, 교회에 관한 추상적인 교의적 진술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우리가 교회사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교회사를 꿰뚫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전승되어 온 신앙의 경험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교회사 공부는 어느 정도 역할을 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에벨링이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진리성’ 이다. 사실 교회사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이런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역사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에벨링의 말을 일단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용인된 진리의 확실성이 어떻게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추구와 결부되어 있는가는 교회사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삶과 역사가 계속하는 한 끝나지 않는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교회사에서 놀랄만한 예들이 보여지는 진리에 대한 억압과 또한 몇 세기 동안을 거쳐서 진리를 밝힌 힘, 둘 다를 발견하다. 진리 문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다룬 상대적으로 드문 상황 내에서 그때그때마다 신앙의 기본 문제들은 정확하게 표현되어졌고, 이후의 세대들이 그 문제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답변되어졌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고대 교회의 교의의 출현에서, 종교개혁의 기본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건들의 출현으로 인해 깊이가 제공되지 않았고 기준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따라서 우리 자신의 신학적인 답변에 대해서 도전받고 격려 받지 않았더라면 우리 자신의 문학적인 사고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상실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교회사 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진리가 증가해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앙의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 지식이 증가해왔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증가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측면들에서 현대의 신학자들에게는 필수적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신학적인 인식의 노력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과 상대성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겸손하게 진리에 대한 요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평을 폭넓게 확장함에 의해서 자신의 역사적 제한성과 조건지어진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대화를 위한 개방적이어야 하며, 자신의 신학적인 책임성에 대한 자각이 되어야 한다. 교회사를 다루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이것을 하도록 돕는다. 교회사는 가장 포괄적인 신학분야일 뿐만 아니라 진리와 역사가 상호 침투되는 방향에 의하여, 특별히 모든 신학 분야들을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취급을 하게 한다.(에벨링, 신학연구개론, 103)

 

 

연구 방법론

(헤닝 쉬레어 편, 신학이란 무엇인가, 181 이하 참조)

 

교회사라고 해서 일반 역사학과 다른 방법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는 점에서 특수하다고 볼 수 있기는 하지만 역사 자체는 교회사이거나 세속사이거나 관계없이 같은 방식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즉 역사를 인과론적으로 보는가, 진보적 차원으로 보는가,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보는가의 관점이 다를 뿐이지 교회사나 세속사 모두 동일한 움직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1. 연구 대상이라는 점에서 교회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연구될 수 있다.

첫째, 중요한 사건을 추적함으로써 역사의 본질을 파악한다. 물론 여기에는 연대기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어거스틴이 언제 마니교에서 회심했는지, 그가 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 시기는 언제인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 받은 ‘밀랑칙령’과 연관된 정치 사회적 정황은 어떠했는지 등등.

둘째, 역사적 문헌을 연구함으로써 숨어 있던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거나 새로운 의미를 들추어낸다. 교부들의 논문이나 편지들, 또는 수도승들의 기도문, 종교개혁자들의 논문이 그 좋은 대상이다. 현대 교회사에서도 예컨대 나치 치하에서 독일 교회가 어떤 문서를 남겼는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추적하는 것도 좋은 교회사 연구이다.

 

2. 신학생으로서 교회사를 공부하는 실천방안은 다음과 같다.

(루돌프 보렌 편, 신학연구총론)

1) 역사적 자료를 비평적으로 취급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법을 실례를 들어 배워야 한다. 또한 더불어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의 문제를 포착하는 방법, 여러 보조 수단의 바른 이용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자료를 올바로 읽을 수 있는 일이 학습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더욱이 라틴어를 배워야 한다.

2) 학생들이 들어야 할 강의는 주로 고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근대교회사, 현대교회사, 한국교회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에 신조사(信條史)나 에큐메니칼 운동 등도 역시 교회사 연구의 강의이다.

3) 학생들은 강의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중요한 교회사 도서를 읽어야 한다. 한국 신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한국어 판 교회사 도서는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자료를 확보해야 하며, 가능하면 외국어 독해 능력을 많이 갖도록 해야 한다.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프로테스탄트 사상’는 조직신학과 교리사공부에 도움을 많이 줄 것이다.

 

 

역사와 종말

 

판넨베르크는 이르기를, 역사는 가장 포괄적인 신학의 지평이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교회사가 아니라 보편사이다. 그렇지만 교회사도 역시 보편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신학의 중요한 지평임에 틀림없다. 이미 유대교로부터 역사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중요한 매개였다. 유대인들은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정확하게는 새로운 에온이 시작되는 때까지 흘러가는 직선의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기독교는 이들보다 훨씬 뚜렷한 종말론적 역사관으로 이 세상을 본다. 앞으로 교회사는 이런 보편사와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보편적 지평에서 펼쳐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 역사 공부에 대한 관점을 기초로 해서 우리의 역사의식을 검증한다는 의미로 ‘역사와 종말’이라는 주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오늘의 수업을 끝내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역사는 언젠가 끝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이렇게 계속될 것인가? 오늘 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만 생각하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다. 비록 50억년 후에 태양의 수명이 다 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혹성도 일찌감치 끝장이 나겠지만, 그 50억년이라는 시간이 우리 한 인간의 인생 시간에 비하면 거의 무한에 가깝기 때문에 종말은 우리의 체감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도 있다. 그 태양이 내일도 다시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느낌일 뿐이지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다. 오히려 내일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개연성이 훨씬 높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만 있으며, 역으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언젠가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억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다.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존재 근거도 끝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선 인간은 태양의 수명이 끝나기 이전에 자기 종족을 연장해나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요즘과 같이 자연과학의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를 생각한다면 1억 년쯤 후에는 우리 후손들이 우주 어느 곳인가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혹성을 발견해서 이주할 수 있으리라고 추정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TV화면으로 지구가 폭발하는 마지막 순간을 감상하다가, 그 별의 수명이 다하면 또 다시 다른 별을 찾는 방식으로 인간 종족이 영원하게 생존해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와 비슷한 다른 별을 발견하기 전에, 또는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기술이 발견되기 전에 지구와 그 생명체가 소멸될 수 있는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찾아온다든지, 혜성과의 충돌이라든지, 심지어는 핵전쟁 같은 방식으로도 지구와 인간의 문명은 아주 간단하게 해체된다. 어디 그것만이겠는가?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 악성 바이러스의 이상증식, 지구의 사막화, 연료 에너지의 고갈, 공기 구성비율의 파괴 등등. 이런 문제들은 사전에 예방이 가능한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가 전혀 손을 쓰지 못할 것도 많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구와 우주의 관계라는 것이 어느 순간 까지는 정상적인 것처럼 유지되다가도 그 순간을 넘어서기만 하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물이 99도이면 여전히 그대로 물이지만 100도가 되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미세한 차이에 의해서 우주와 지구의 생태적 균형이 유지되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와 기독교도 역시 이 세계의 역사와 종말 문제를 핵심 주제로 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이 그저 우연하게 생긴 게 아니라 어떤 의지가 작용해서 현상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그 창조의 순간으로부터 이 세계가 지금까지 지내왔으며, 종말 때까지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기독교적 종말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늘 잠정적이고 무상하지 결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영원하고 궁극적인 세계는 이 세계가 끝나고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역사의 종말은 곧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이를 가리켜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른다. 그 세계는 오늘의 이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이 역사가 단절되고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가, 아니면 이 역사와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인식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단지 오늘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것뿐인데, 이것이 끝나고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를 우리가 인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과 맛, 아카시아꽃 향기, 사회제도 같은 것으로 구성된 이 세계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를 생각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서는 이 세상의 이런 생명의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을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일컫고 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잠시 있다가 없어질 이런 생명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그런 궁극적 생명의 세계를, 즉 사랑 자체인 하나님과 늘 함께 있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죽음과 파멸의 그림자를 보긴 하지만 그것과 전혀 다른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확연하게는 보지 못한다.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며, 그러나 희망하며 산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와 역사를 절대화해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종말을 주술화해서도 안 된다. 역사와 종말의 변증적 역동성은 그 무엇보다도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의해서 해석되고 확보될 수 있는데, 이것의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졸저 <세상은 마술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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