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조직신학 1

신학입문 조회 수 4943 추천 수 158 2004.10.12 23:48:23

7장

조직신학1

 

 

몰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이라는 분야를 그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교의학을 ‘신학대전’이라고 불렀으며,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고 불렀고, 맬랑히톤은 단순하게 ‘기초 신학논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에 이르러서 ‘교의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신학’이라는 말과 전혀 별개의 것은 아니다. 몰트만의 설명에 따르면 조직신학(교의학)은 신학 자체와 똑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면 그것이 곧 조직신학에 대한 설명인 셈이다.

신학(神學), 즉 신에 대한 학문이란 무엇인가? 신은 단지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은 늘 보편적인 신성에 대해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학(Logos)도 역시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 방법론이 보편적이어야 한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조직신학이야말로 신학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서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직신학의 애매성

 

신학의 여러 분과 중에서 조직신학은 약간 독특한 성격이 있다. 예컨대 신약신학은 신약성서라는 분명한 대상을 다루고 있으며, 구약신학은 구약성서를 대상으로 다루고, 교회사는 교회의 역사를, 실천신학은 교회의 신앙적 실천을 다루지만 조직신학은 손에 잡히는 대상이 없다. 물론 사도신경을 비롯해서 교회의 역사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신조를 그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런 역사적 문서를 다루는 것은 오히려 교회사의 역할에 가깝다. 사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는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조직신학이 놓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루어야 할 대상이 명백하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세례문답에 대한 해명이 곧 조직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세례문답을 해명하기 위한 재료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종말, 구원 등의 문제를 단지 성서만을 인용해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서에만 의존하게 되면 그것은 곧 성서신학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직신학이 신학과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도 신학생들과 목사들에게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 과목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석사와 박사 과정에도 조직신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다른 전공분야는 어느 정도의 과정을 거치면 눈에 들어오지만 조직신학은 상당한 훈련을 거쳐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설교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서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에 근거해야하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조직신학보다는 차라리 성서신학이나 심리학에 치우치게 된다. 설교자들이 조직신학에 대한 성찰 없이 설교 행위에 들어가기 때문에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진단한 바 있다.

 

조직신학적 반성 없이 주석으로부터 직접 설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해석학의 질문들은 단지 미학적 판단을 통해서만 견인될 뿐이다. 결국 설교자들은 자신이 어떤 고유한 판단 형성의 난제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짐짓 보여주기 위해서 근본주의에 치우쳐버리지 않으려다가 시대정신의 다변적인 유행에 휩쓸려 버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일반적으로 선포되는 기독교 설교가 조직신학적 과업에 대한 노력을 다시 게을리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현상이다. (정용섭 역, 신학과 철학, 한들출판사, 14).

 

이런 현상에는 그럴 말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원래 신학이 요즘처럼 여러 분과로 나누어진 것은 그렇게 오래지 않는다. 단지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었을 뿐이다.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 성서학이나 역사학이 자기들 나름대로의 전공분야로 독립되면서 조직신학은 연구 자료로 삼을 그 대상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그저 성서를 바탕으로 해서 기독교를 설명하면 됐지만 이제는 성서신학분야가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조직신학의 자리가 확보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지 현대신학의 이러한 현상을 되돌릴 수는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올바른 것도 아니다. 조직신학의 고유한 자리를 확보해 나가면서 다른 분과와의 협조를 통해서 신학을 심화시켜나가면 충분하다.

 

조직신학의 대상

 

도대체 조직신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해서 신학활동을 하는 분야인가? 성서신학처럼 뚜렷한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신학도 역시 자신이 다루어야 할 재료가 있다. 크게 보자면 하나는 성서이며, 다른 하나는 2천년 기독교 역사이다. 즉 성서신학과 교회사를 기초로 해서 기독교의 교리를 해명해나가는 작업이 곧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다.

 

1) 성서신학과 조직신학

성서신학은 성서라는 문서를 정확하게 해명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의 주제를 명백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은 그런 작업을 바탕으로 해서 성서가 담아내지 못하는 더 큰 신앙의 세계를 조직화한다. 성서는 기독교 교리를 일관되게 접근한 문서가 아니라 아주 다양한 시대와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영적인 세계를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성서만으로 모든 영적인 세계를 담아낼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성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성서신학은 이런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에 대해서 충분하게 서술할 수 없다. 조직신학은 성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인식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풀어내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해명할 자격이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약성서 자체가 영적인 권위를 담보하고 있지만 교회가 역사적으로 그것을 해석하면서 체계화시킨 사유의 틀에 근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조직신학은 성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기독교의 체계를 세운 게 아니라 성서가 그 시대에 해석된 성과이기 때문에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늘 이런 조직신학적 사유를 밑바탕에 두어야 한다. 신약학과 조직신학은 흡사 해석학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처럼 상호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의 신학계에서는 이 두 분야가 거의 관련성 없이 진행되고 있다. 신약학은 역사 전체를 통해서 기독교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고 확장되었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본문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면, 조직신학은 성서에 담긴 그 고유한 세계를 무시하고 교의학적인 체계를 세우는 데만 신경을 쓴다.

 

2) 교회사와 조직신학

교회사는 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그 사실과 의미를 파악하는 분과라고 한다면, 조직신학은 교회사의 작업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나가는 분과라 할 수 있다. 교회사는 그것이 아무리 엄밀한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고 하더라도 이미 드러난 사실을 확인하거나 연관성을 파악하는 정도이지만 조직신학은 일종의 ‘해석학’ 작업을 통해서 은폐된 세계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 따라서 교회사는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규정한다면 조직신학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시적으로 엮는다.

조직신학이 성서나 교회의 역사와 맺는 관계를 조금 더 설명해보자. 하나의 우화를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동네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호랑이를 보기 위해서 밤낮으로 산을 돌아다녔다. 김 아무개는 한밤중에 호랑이를 만났는데, 아무 것도 못보고 쟁반 크기의 불덩이 두 개만 보았다. 아마 호랑이의 눈인 것 같다. 그 사람은 호랑이를 불덩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 아무개는 목이 말라 개울에 물을 마시는데 호랑이가 자기의 등을 타고 넘으면서 내는 바람소리만 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바람소리라고 말했다. 몇 달 후에 박 아무개는 산 속에서 잠깐 졸다가 ‘어흥’하는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깼다. 그래서는 그는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천둥소리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씩 각색되기도 하고 잊혀지기도 했다. 먼 훗날 이 사건을 놓고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나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경험을 서술한 문서에 집중해서 호랑이를 그려보려고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이런 경험의 역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전되어 나왔는지를 연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은 동물학에 근거를 두고 이들의 경험과 그 발전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서 호랑이의 진면목을 찾아보려고 한다. 첫 사람은 성서신학자이며, 둘째는 역사학자, 세 번째는 조직신학자이다.(주, 이 우화는 2장 신학과 하나님 말씀에 나오는 것을 다시 각색한 것이다.)

 

조직신학과 진리론

 

이렇듯 조직신학이 성서신학과 교회의 역사를 토대로 삼기는 하지만 그런 자료가 담아내지 못한 어떤 세계를 분석하고 체계화한다는 것은 곧 조직신학이 진리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서신학과 교회사는 단지 교회 내부의 자료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파악한다면, 조직신학은 교회 범주를 넘어서는 진리론적 성격을 갖는다. 이 말은 곧 조직신학의 인식론적 체계는 다분히 보편사적 지평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좀더 풀어보도록 하자.

우리는 기독교를 진리와 동일시하지만 그게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다. 진리는 말 그대로 참된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독교를 진리 자체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진리는 은폐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둘째, 교회의 역사에는 진리가 아닌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셋째,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 예수가 진리이다. 넷째, 진리인 예수 사건은 종말론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첫 번째 요소로 말했듯이 예수의 진리는 여전히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조직신학은 기독교 안의 진리론적인 시각을 통해서 기독교가 왜 진리인지를 보편사적 지평에서 풀어내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 보편사적이라는 말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역사가 아니라 전체이며 하나의 역사를 그 토대로 삼는다는 뜻이다. 특별히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지평까지 이 보편사에 포함되기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에 대해서 개방적인 입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조직신학과 교의학

지금까지 조직신학이 성서신학이나 교회사와 어떤 점에 구별되는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에 조직신학이라는 단어를 좀더 정확하게 규명해야할 차례가 되었다. 기독교 교리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조직신학이라고 하지만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교의학이라고 불러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직신학은 교의학과 윤리학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냥 조직신학과 윤리학으로 구분하는 게 한국 신학계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조직신학과 교의학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일반적으로 교의학은 주로 교회의 Dogma에 대한 해명을 말하면, 조직신학은 그 교의의 System에 대한 해명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바르트는 자기의 조직신학을 ‘교회 교의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는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기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교의를 해명하는 게 곧 신학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교회와 신학의 관계를 가장 밀접하게 설정한 신학자이다.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말 그대로 ‘조직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두 사람의 조직신학이 교의학과 조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구별될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를 시작하는 방식에서도 역시 구별된다. 바르트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해명하는 것으로 교회교의학을 시작하는 반면에 판넨베르크는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조직신학을 시작한다.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하자.

신학의 역사에서 “교의학”이라는 명칭은 16세기부터 등장한다. 멜랑히톤은 1550년에 성서의 교의적 내용을 역사적 자료와 구분해서 교의적으로 특징화 했으며, 요한 게르하르트는 1610년 말씀의 내용을 도그마티카와 히스토리카로 나누었다. 테오로기아 도그마티카라는 명칭은 요한 아틀링이 1635년에 역사신학과 대칭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일년 전에 게오르크 칼릭스트와 함께 교의학을 윤리학과 구분했다. 이에 따라서 17세기 중반 이후로는 테오로기아 도그마티카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저서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교의학은 말씀과 신조의 내용을 집약하고 연관시키는 과업을 갖는다.

18세기 초 이래로 기독교 교리를 집약하고 연관시키는 과업에서 “조직신학” 개념이 확산되었다. 1727년 요한 프란쯔 부데우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그 자료를 포괄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부데우스의 경우에 이 신학적 제시는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그러나 그 내용을 개체적으로 제공하고, 증명하고, 강화시켜야 한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조직신학은 교의학과의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이미 2세기의 영지주의에서, 그리고 기독교 호교론자들에게서, 리옹의 이레네우스같은 반영지주의 교부들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어쨌든지 에벨링은 이렇게 교의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조직신학”이라는 개념은 “교의학”이라는 명칭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태를 포착한다. 교의학이라는 명칭이 신앙의 교리에 대한 연관된 서술에 한정되는 반면에, 따라서 우선 도덕적 행위에 관한 교리로서의 윤리학과 구별되는 반면에 조직신학은 신학적 방법론에서 현재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의 진리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따라서 실천신학도 역시 조직신학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실천신학이 단순한 실용적인 합목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교회적 삶의 현실성과 관련해서 기독교적인 진리에 적합한 것에 관해 묻는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이런 과정에서 실천신학은 진리의 물음을 전반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여기서 교의학과 조직신학의 관계에 대한 에벨링의 설명을 들어보자. (신학연구개론, 156,157).

 

사람들이 교의학이라는 말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 대신 조직신학에 관해서 말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교의학적인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나 부적당하며 성급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신학’이라는 명칭이 물론 중요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조직신학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조직개념이 신학에로 들어왔던 17세기에 있다. 확실히 ‘교의학’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연상들에 반대해서 ‘완결된’ 조직의 표상에 반대해서 유사한 고려들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축소화와는 대조적으로 조직의 이념에 포함되어 있는 방법론적 요구는 포기될 수 없다. 즉 이 요구란 진술들의 진리를, 진술들 상호간의 연관을 설명함에 의해서, 또한 진술들의 타당성에 대해 중요할 수 있는 모든 다른 진술들과의 연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입증하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적 양식과 해석학적 측면에 대한 조직적인 것의 관점은 진리의 물음과 분리되지 않고 결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신학’이라는 개념은 ‘교의학’이라는 명칭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태를 포착한다. 교의학이라는 명칭이 신앙의 교리에 대한 연관된 서술에 한정되는 반면에, 따라서 우선 도덕적 행위에 관한 교리로서의 윤리학과는 구별되는 반면에, ‘조직신학’이라는 표현은 신학의 방법론적인 타당성을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입증하려는 포괄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신학이 오직 단순한 실용적인 합목적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적 삶의 현실성과 관련해서 기독교적인 진리에 적합한 것에 과해서 묻는다면 조직신학적인 차원에서 고려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실천신학은 진리의 물음을 전반적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직신학과 교의학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거의 동일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학교의 커리큘럼 상으로는 주로 조직신학이라는 말로 통일되어 있다. 일단 학생들은 조직신학과 교의학이 똑같은 분과에 대한 다른 명칭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조직신학의 핵심 문제

 

1) 구조

교의학이 다루어야 할 교의의 구조는 창조로부터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 사건을 거쳐 교회의 예전 문제와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신앙의 양식을 포괄한다. 푈만의 “교의학”을 기초로 해서 그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시, 성서, 신앙, 하나님, 창조, 인간, 죄, 그리스도, 은총, 구원의 수단, 교회, 종말. 물론 성만찬이나 세례같은 문제들도 역시 교의학적 주제가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이런 교의학적 주제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으며 그것이 본래적으로 의미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교의학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신학전반에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사실 설교행위에서도 이런 교의학적 주제가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못하면 속된 말로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조직신학의 몇 항목에 대해서는 다음 중에 다루게 될 것이다.

 

2) 절차와 방법

교의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우선적으로 성서로부터 그 증거를 끌어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해석학적 문제가 따라다닌다. 성서 본문이 모든 교의적 사안을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는 아니기 때문에, 또한 성서 자체가 양식사적, 편집사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런 해석학적 과정이 정당하게 전개되려면 늘 진리론적 질문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교의 전승과 오늘의 철학적 사유가 교의학적 방법에서 그 토대에 놓여야 한다.

 

3) 주제의 내부적 논리

교의학적 주제는 개별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쩌면 훨씬 본질적으로 상호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내부적 논리에 근거해서 교의가 조명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심층적 차원에 가려지고 말 것이다. 예컨대 창조론은 창조의 성서적 원리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 창조의 완성이 해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론은 곧 죄론이면서 동시에 구원론이기도 하다. 에벨링은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즉 해방시키는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으로서 성령에 관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은 하나님에 관한 말로서 전개되어야 하고,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말은 인간에 관한 말이 되며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관여하는 현실성이 된다.”

 

참고 도서 소개

개론서

1) 칼 바르트, 복음주의 신학입문

2) 헬무트 골비처, 신학의 연대성

3) 게르하르트 에벨링, 기독교 신앙의 본질

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교의학

1) 홀스트 G. 푈만, 교의학

2) 하인리히 오트, 신학해제

3) 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5) 칼 바르트, 교회 교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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