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조직신학 2

신학입문 조회 수 4258 추천 수 145 2004.10.20 00:34:58

8장

조직신학 2

 

 

우리는 이제 <조직신학 2>에서 조직신학적(교의학적) 주제 중에서 몇 항목을 구체적으로 다루어보려고 한다. 물론 훗날 전공과목으로 배울 때는 훨씬 자세하고 포괄적으로 접근하겠지만 일단 여기서는 그 핵심에 접근하는 사유의 흔적이라도 따라 잡으려고 한다. 푈판의 <교의학>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들이다. 계시, 성서, 신앙, 하나님, 창조, 인간, 죄, 그리스도, 은총, 구원, 교회, 종말. 하인리히 오트는 <신학해제>에서 좀더 세분하여 50개 항목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골격에서는 푈만이 다루고 있는 대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이런 항목을 매우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길을 걸어왔으며, 지금도 그런 길을 가고 있다. 만약 앞으로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이나, 설교의 신학적 토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조직신학의 여러 항목들을 세목별로 충분하게 공부할 뿐만 아니라 항목 사이의 연결 고리도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조직신학적 해명이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관한 완벽하고 최종적인 대답이 아니라는 점을, 즉 신학의 잠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신학의 종말론적 지평이 우리 신학 공부의 초석이라는 뜻이다. 아래에 제시된 몇 항목은 지난 2년간 <말씀과 삶>에 게재했던 것들 중에서 뽑아낸 것이다.

 

구원

-구원론-

 

교회에 나간다거나 예수를 믿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전도할 때도 대개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한다. 그런데 구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즉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곧 구원이지 뭐 다른 게 있겠느냐는 식이다. 이 말이 모범답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교리문답식의 대답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 그것이 타당하게 인정될만한 내용을 담아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기독교의 교리는 결국 형해(形骸)화되고 말 것이다.

우리들은 대개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기준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인지 구원문제도 역시 늘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구원 받으셨나요?” 흡사 월드컵 입장권을 예매하듯이 구원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구원문제가 배타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과 못 받은 사람으로 구분된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죄인과 의인을 구분하듯이 말이다.

기독교적 구원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일단 그것의 존재론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게 좋을 듯싶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나만 사랑할 줄 알고 남은 사랑할 줄 모르나?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 인간을 통치하는 존재 자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사랑을 소유하거나, 더더구나 독점할 수 없다. 구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그래서 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우리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그 세계를 향해서 마음을 돌릴 뿐이지 소유하는 게 아니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모든 것을 소유의 문제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세상을 지나치게 주관과 객관의 대립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반드시 그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명구를 남긴 데카르트 이후로 서양 사상은 주관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강조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자연을 철저하게 대상화함으로써 결국 주관과 객관의 대립관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대립적인 관계로 인해서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고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곧 모더니즘의 근본적 성격인데, 어찌된 일인지 신앙의 세계까지 지배하고 말았다. 구원을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구원을 소유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경쟁구도이다. 백화점에서 한정된 숫자의 물건을 특별 할인 판매하는 경우에 고객들은 체면이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남보다 앞줄에 서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기독교의 구원도 자칫하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서 그 본질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지불되어야 할 인간 업적에 대한 강조이다. 상품을 획득하려면 돈을 지불해야하듯이 구원을 받으려면 무언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소유 지향적 구원론에 개입될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종교적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셋째는 구원 사건의 수행(修行) 성격이 약화된다. 일단 돈을 주고 고급 승용차를 구매한 다음에는 이미 자기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진리)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자기정진은 불필요하고, 단지 종교형식에만 매달릴 가능성이 있다. 본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고 비본질에만 정성을 쏟는다는 말이다. 흡사 사이비 음악가가 음악 자체에 대한 관심은 버려두고, 단지 자기 음악을 상품으로 만드는 일에만 마음을 두듯이 말이다.

구원을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있다. 교회 공동체도 역시 서로 간에 공연한 경쟁심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가장 좋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것은 기꺼이 포기하고 그것 자체에만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마13:44-46).

 

계시

-계시론-

 

간혹 “내가 어젯밤 기도하는 중에 계시를 받았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면 위험성이 많다. 크게 두 가지 관점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경험에서 언급되는 계시는 흡사 점쟁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듯이 무언가 비의적인 성격이 아주 농후하다.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사건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보려고만 한다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다. 따라서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자기에게만 특별하게 알려주는 어떤 비밀로 생각하는 한 이런 계시는 잘못된 것이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위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인데, 계시를 어떤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성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들이 많이 등장해서 그 비밀을 선포했다. 그들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계시를 소유한 게 아니라 계시가 그들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계시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사로잡힐 뿐이다.

이런 사태를 확실하게 규정해줄 수 있는 신학 용어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이다. 신론과 계시론이 결합되어 있는 이 신학용어를 소화하기만 해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부분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용어는 주로 헤겔 이후로 바르트에 의해서 신론의 중심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기독교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다.” 이 말은 곧 하나님과 계시의 동일화를 뜻한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곧 계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충분히 소화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옥황상제처럼 어느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자기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구조에서는 하나님과 계시가 구분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런 세계의 존재방식 안에 들어와 있게 된다. 이런 사유방식이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계시로서 존재한다. 계시가 곧 하나님의 존재다.

이 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일하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하나님은 원래 따로 존재하고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펼쳐나가는 나라도 따로 있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실체론적 존재론 안에 가두어 버리는 격이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서, 즉 그의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늘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예컨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비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격적인 대상물로 여긴다. 이런 생각이 비약되면 신인동형동성론으로 발전된다. 하나님 자체인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다. 흡사 바람처럼, 사랑처럼 실체가 아니라 어떤 힘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와 통치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세계의 비밀로서(융엘) 존재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오자. 계시는 곧 하나님의 자기 알림이다. 계시가 곧 하나님이다. 계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함부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말자. 구약시대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고 보게 되는 경우는 우리가 죽든지, 아니면 이 우주의 종말이 오는 때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듯 계시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로서 자기를 알리는 분이라는 점에서 아직은 은폐된 분이다. 아직은 종말이 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특별히 그의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일어날 그 계시가 선취적으로 발생했다고 우리는 믿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숙제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어떻게 참된 궁극적 계시인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그냥 믿는 게 아니라 믿을 만 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당연히 인간들의 세계 경험과 그 해석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만 한다. 종말과 계시는 이 세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폐성

-신론-

 

우리가 하나님을 꽃이나 새, 또는 안개처럼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 텐데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확인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다. 아주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이런 답답증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있었다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과 평화의 마음에 휩싸이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경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믿음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다. 아마 이 문제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야, 또는 종말이 온 다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한가? 그 답이 곧 하나님의 은폐성(Deus absconditus)이다.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지만 동시에 은폐되어 있는 분이다. 성경을 구구절절이 꿰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모든 물리학, 철학에 관한 학문에 능통하더라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 성서도 역시 하나님을 완전하게 밝히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런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증언되며, 이 거룩한 분을 직접 본 자는 죽는다고 까지 했다. 즉 못볼 것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건이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앞에 이렇듯 명백한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생명도 역시 그 궁극적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 여기 민들레꽃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햇빛과 물과 탄소를 결합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분을 생산한다. 우리의 모든 먹을거리가 그런 기본적인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기초 단위는 햇빛이라는 말일까? 아니면 탄소, 또는 물인가? 그 모든 것인가? 그 중에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생명공학자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설명은 현상에 대한 추상적 접근에 불과하지 근본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못된다. 오늘의 첨단 과학이 생명의 기원에 상당히 접근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명현상에 대한 아무리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무식한 셈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생명을 말하려면 그것 이전에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해명해야만 한다. 하이데거가 질문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 범주 안에서만 통용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오히려 존재하지 않음으로서 무엇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존재(Sein)이다. 이 존재는 존재하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우리의 감각범주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절대적인 것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이나 명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여전히 은폐의 방식으로 노출되는 힘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물질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원자를 기초로 한 어떤 물질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물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빈 공간과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핵과 전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는 입자가 아니라 너무나 작아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핵과 그것보다 더 미세한 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의 핵은 원자를 대형 교회당으로 확대했을 때 그 안에 있는 찬송가 악보의 작은 보표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공간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핵마저도 역시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물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것, 즉 물질 자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 존재, 물질의 은폐와 연관된 하나님의 은폐는 그렇게 어둠으로만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계시마저도 역시 완전한 노출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을 취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에서 자기를 은폐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게 바로 신학이며 설교다. 바로 이 예수 사건에 이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토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종말이 이미(schon) 선취(先取)적으로 발생했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아직은 완료되지 않은(noch nicht) 상태라고 믿는다.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으로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해석하고 구원론적 지평을 제시하는 중이다.

 

부활

-기독론-

 

간혹 3월 하순경에 부활절이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4월에 부활절이 들어있다. 추수감사절, 성탄절과 아울러서 기독교의 3대 절기의 하나인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이 부활절을 하나의 절기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예수님이 직접 부활했건 하지 않았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부활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이 그저 하나의 절기로서만 지킬 뿐이다. 여기에는 부활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이해가 깔려 있다.

하나는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고, 늙지 않고 젊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토대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주술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은 죽기 이전의 본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간혹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도 누가 죽어서 천당에 갔다고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서 베스트셀러까지 되는 실정이니까 인간이 다시 살고 싶다는 욕망은 거의 숙명적인 것이라 할 만 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마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그것이 말하려는 근본 의미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단순히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격하시키는 태도이다. 불트만 신학의 특징이라 할 실존주의 신학은 예수 부활의 역사성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으며 단지 제자들의 실존적 경험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오늘의 적지 않은 지성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주장에 솔깃해 할 것이다. 실증적 과학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신화적 사건이기 때문에 단지 실존적 경험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즉 부활 사건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극진한 사랑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이다.

부활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거나 아니면 실존적 경험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려는 이러한 두 가지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고 성서가 원래 말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를 위해서 부활에 대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구약의 묵시문학적 언급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아울러 오늘의 일반적인 생명연구도 가능한대로 복합적으로 다루어 가면 좋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지면 형편상 복음서와 바울 서신만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자.

복음서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의 부활사건은 어떤 명백한 논리적 구조가 아니라 자신들도 예상할 수 없었던 현상에 대한 솔직하고 산만한, 그래서 비논리적인 진술 형식을 띄고 있다. 예수의 시체가 안장된 아리마데 요셉의 가족묘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사실적인 묘사가 없다. 마술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제자들의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다면 그럴듯한 설명이 있었을텐데 예수 부활 보도에는 그런 설명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들 앞에 현상으로 다시 나타난 예수는 보통 인간처럼 말도 하고 먹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흡사 혼령처럼 문을 닫아두었는데도 어느 사이에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 부활한 예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났고, 어떤 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했고, 바울의 보도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 앞에, 그리고 자기에게도 나타났다.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에 대한 신약성서의 보도는 어떤 일관성을 보이지 않고, 단지 죽었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 두 가지 사실에만 집중되고 있다. 한 걸음 나가서 이 부활한 예수는 결국 승천 사건으로 다시 그들에게서 사라진다. 그러니까 예수는 역사 안에서 3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3일 동안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으며, 다시 나타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지내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이 된다.

바울은 그 유명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부활 문제를 매우 수려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을 여러 증인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확증한 후에, 우리도 역시 그렇게 부활한다는 점을 증언한다.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이 구절에서 핵심은 “변화”와 “입는다”에 있다. 즉 우리의 부활은 결국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변화한 분의 능력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부활은 곧 우리가 이 땅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생명 양식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썩기 때문에 이런 것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 형식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한 답변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은 늘 시간과 공간이라는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 문제를 소극적 방식으로 이렇게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썩지 않는 생명이라고 말이다. 그런 썩지 않는 생명이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덧입혀진다고 말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

 

교의학적인 차원에서의 교회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니케아 신조- 사도성, 단일성, 보편성, 거룩성

2) 삼위일체론적 본질-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 피조물

3) 보이는 교회(전투 중의 교회, not yet)와 보이지 않는 교회(승리한 교회, already)

4)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

 

위의 정의를 전제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교회는 지난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종말론적 공동체로 인식해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런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 만약 오늘의 교회가 이런 전통적 교회론에 자신을 끊임없이 반성시켜나가기만 한다면 교회의 영적인 건강은 회복되고 그렇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이 말에는 우선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의미가 새겨져 있다. 왜냐하면 종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그리고 역동적으로 작동시키는 일에 온갖 수고를 아끼고 있지 않지만 이런 간절한 수고와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역시 종말이 오기 전인 이 중간시기의 ‘잠시’에만 해당될 뿐이다. 물론 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물도, 조직도, 이념도 종말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목적으로 할 수는 없다. 예컨대 인간 문명 이후로 가장 절대적인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국가도 역시 종말론적인 힘이 없다. 많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약간만 들여다보면 인간의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한 국가 조직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은 곧 국가는 결코 절대화될 수 없으며, 오히려 종말론적인 힘에 의해 지배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현실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자리를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 능력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요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온갖 추문들은 교회가 자신을 목적으로 해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이 사회가 교회와 신자들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교회가 자기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목적으로 삼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약간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자신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여긴다면 우선 자기를 상대화시키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우습게 여기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지켜온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추월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는 종말론적 우선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워내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말은 곧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방식을 세상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간혹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또는 교묘한 술책으로 교회당을 지었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런 행태는 하나님 나라에 기대어 존재근거를 갖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삼은 교회의 모습에 불과하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초석으로 삼는 교회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자기와 자기 조직을 절대화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는 태도이다.

위에서 말한 부분이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의 내면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외면적인 관점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변화시켜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주기도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내용이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이 종말론적 지평에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인간과 자연이 일치되는 세상, 인간 삶의 무의미성이 극복되는 세상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현재 남북의 분단체제가 극복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교회에 앉아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복 받고 잘살게 되는 것만을 기도한다면 종말론적인 의미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종말론적인 미래는 이런 사회개혁이나 발전으로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지사회가 도래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다. 자칫 그런 복지 시스템이 하나님 나라를 끌어올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그런 프로그램의 개발을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더 크게 훼손시킨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인식에 담겨 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킬 수 없는 그 미래의 세상을 향한 열린 자세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구체적인 땅의 삶에 제한 받으면서도 그것과 전혀 다른 종말론적인 삶으로 열려져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독특한 긴장이 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절대 사이에서, 즉 인간의 역사와 하나님의 종말 사이에서 어떻게 생명의 리얼리티를 확보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근본에 대한 질문을 열어둠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 그것이 곧 종말론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 앞에서 우리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선교적 몫이다.

위의 항목 이외에도 공부해야 할 조직신학 항목은 많다. 칭의론, 종말론, 인간론, 죄론, 성서론, 은사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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