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교정, 4월10일)

조회 수 5991 추천 수 157 2004.10.20 18:17:08
6장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

우리는 앞에서 고대 헬라 철학의 대표적인 두 사람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교부들 및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라서 간추리면서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줄여서 표현한다면 플라톤 철학은 기독교의 신론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제 기독교 신학과 연관된 고대 헬라 철학으로서는 마지막이라 할 스토아 철학은 주로 로고스 개념에 근거한 자연신학과 윤리학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면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제논(BC. 336-264)을 창시자로 하고, 크뤼십포스가 체계화했다고 하는 스토아학파의 특색으로부터 이 부분의 논의를 시작하자.

1. 스토아학파의 특색

‘스토아’라는 단어는 스토아 학자들이 강의했다고 알려진 아테네의 ‘채색강당’(스토아 포이키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논이 이런 학파를 세우게 된 이유는 에피쿠로스가 BC. 307(혹은 306)년에 아테네로 이주해서 자신의 학설을 전파한 사건에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일컫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인간 삶의 목표에 흥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또한 이 세계를 우연의 장으로 간주한 삶의 예술이었다. 흥미를 준다는 것 때문에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연성이 없지는 않지만 만약 생명의 에너지에 이런 흥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의 가르침이 그렇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식욕이나 성욕은 어떤 합리적인 논리에 의해서 해결된다기보다는 거의 무조건적인 충족에 의해서만 해결된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인간의 생명 지향에는 분명히 ‘흥미’가 담겨 있다. 어린아이들의 놀이도 역시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거의 절대적인 흥미에 의해서 견인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아무도 인간의 흥미와 쾌락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세계를 우연의 장으로 보는 관점도 역시 그것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우연까지도 역시 어떤 우주의 질서로 간주할 수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운명에 개입해 들어오는 우연성은 우리의 모든 판단력을 마비시키고도 남을 만큼 엄청나다.
에피쿠로스의 흥미와 우연 개념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제논은 인간은 ‘로고스’에 의해서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에피쿠로스가 인간을 자연적 본성이라는 관점으로 보았다면 제논은 이성에 의해서 스스로 제어하고 움직일 수 있는 합리주의적 관점으로 보았다. 전자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쾌락에 충실하고자 했자면 후자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윤리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요한복음에도 등장하고 있는 로고스야말로 스토아학파의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로고스(logos)는 뮈토스(mythos)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거치면서 사색의 결과로 얻어지는 사물의 근거, 수학적 술어인 비례, 사물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척도, 그 이외에도 사고능력, 이성, 인간정신, 언어, 설명 등으로 규정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헬라철학의 뜻보다는 기독교 고유의 개념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되었다. 어쨌든지 스토아 학자들은 로고스 개념을 통해서 세계 전체인 코스모스의 상관관계와 그 질서와 체계를 획득하려고 했다. 초기 헬레니즘의 정치적 혼란 시기에, 그리고 폴리스가 해체되는 시기에 모든 각각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현존을 획득하게 하려는 시도가 스토아학파의 로고스 개념에 담겨 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기본적인 사유의 틀이 스토아 철학 모든 부분에 관철되어 있는데, 특히 논리학, 물리학, 윤리학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세 부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로고스를 통해서 전체 연관성과 통일성을 확보하는 작업이었다.

1)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논리학)에서 로고스는 다음과 같이 작용한다. 개별 인식은 자기 자신만을 향할 경우에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없고 여러 지각을 통해서 동의를 획득해야만 한다. 하나의 인식이 독립적으로 진리를 이룰 수는 없고 다른 것들과의 조화가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영혼을 지배하는 로고스를 통할 때만 그 어떤 반박에도 흔들리는 않는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2) 스토아 철학자들은 코스모스가 로고스에 의해서 관리되는 체계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여기서 로고스는 개인들을 조화시켜서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참된 인식에 이르게 한다. 이들에게서 이 세계는 매우 조화로운 체계로 인식된다. 이런 체계의 이치(Physik)를 분명하게 깨닫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찾아나서는 것이야말로 현자들의 바른 삶의 자세이다. 이러한 조화, 체계, 코스모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힘이 바로 로고스이다. 인간도 이 로고스에 참여함으로써 “자기 본성 상 세계의 본질을 성취해 나가는 그 본질을 따르게 된다. 이 안에서 그러한 형태를 가진 세계의 본질을 얻게 된다.”
3) 위에서 이 세상의 이치와 질서를 체계 안에 다루는 분야를 물리학이라고 한다면 그런 물리학적 깨달음으로 인해서 이제 인간은 윤리적 통찰을 얻게 된다. 스토아 철학의 윤리적 원칙은 인간이, 에피쿠로스와는 다른 차원에서,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생활태도는 코스모스의 질서에 어울리게 되고, 인간의 현존을 관리하고 생명을 통일시키는 로고스에 어울리게 된다. 따라서 윤리적 과업은 로고스를 통해서 야기된 모든 개별자의 연관성을 통해서 생명의 단일성과 정체성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인식론과 일치하며 물리학과도 일치한다(110).

2. 기독교 신학과 스토아 철학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적이고 해석학적인 단초라 할 로고스 개념을 이미 요한복음이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본다는 사실에서 초기 기독교가 이 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이 우연한 게 아니라 완전한 조화 안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만큼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분명하게 증명해줄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와 대립되는 요소가 적지 않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는 플라톤 철학과는 같은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신적인 요소가 완전히 코스모스 안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그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론에서도 역시 스토아 철학자들은 영혼 불멸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에 비록 영혼불멸보다는 부활사상이 더 우선적인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멸설이 상당한 정도로 기독교 교리 안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기독교 신학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유물론적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이 세상이 주기적으로 불에 의해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난다는 영원 회귀설을 기독교의 부활 사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부활 사상은 유일회적인 회귀였기 때문에 결국 일치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신론과 인간론에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단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아 철학은 세부적인 항목에서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1) 로고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로고스 개념을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성서의 개념과 비슷한 철학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로고스는 단지 스토아 철학이 가리키고 있는 이 세상에 내재하는 궁극적인 원리라기보다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누스’ 개념과 상응하는 개념으로 해석되어 결국 세계를 초월하는 본질이 되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로고스는 헬라 철학의 전통에서 거의 세계 창조자로서의 신에 버금가는 능력으로 이해된 누스와 달리 창조자 하나님과는 구별되었다. 로고스는 창조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 세계에 현재한다.

2) 프뉴마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어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한 프뉴마(창 2:7, 히브리어 루아하의 헬라어 역)를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정리해 두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신의 프뉴마에 참여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어떻게 구분되는지 명쾌하게 해명하기 힘들다. 기독교 신학에서 인간의 영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오히려 창조의 힘으로서 이 세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인간의 영이 피조물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불멸의 속성을 지닌다. 요한복음이 “하나님은 영이시다”(4:24)고 언급하고 있으며, 바람의 본성과 영을 비슷하다고(요 3:8) 보았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이 영에 대한 구약성서의 표상과 고대 헬라의 프뉴마 표상, 그리고 스토아 철학의 프뉴마 표상을 아우르고 있다는 의미이다.
앞으로도 프뉴마 표상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 꾸준하게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신학적 테마이다.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인간을 분명히 영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영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영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은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노장이 말하는 도,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또는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과 이 프뉴마의 관계도 깊이 생각해볼만한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가 인식하고 진술하고 있는 프뉴마는 모든 것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적 프뉴마 개념과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근대 물리학의 장(場) 개념은 스토아 철학의 유물론적 프뉴마 개념을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이 장 개념은 분명한 작용 효과가 나타나는 모든 유한한 현상보다 장이 우선한다는 뜻이다. 즉 유물론적 작용보다 훨씬 큰 장이 그 안에서 작용한다는 말이다.

3) 섭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신들의 환희에 빠져있는 신들이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제논과 크뤼십포스는 이런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배척하고 플라톤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죽어야 할 모든 피조물”을 애지중지 돌보는데, 특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직 섭리(pronoia)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관심(epiméli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프로노이아는 크세노폰에 의해서 인간을 위해 창조된 우주의 질서와 연결되었다. 이제 제논과 크뤼십포스는 인간을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섭리 사상을 받아들여 체계적인 인간 중심적 스토아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섭리 사상은 기독교 신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성서의 증언과 이 섭리 사상이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아직 프로노이아가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로 발전되지 않았고, 대신 클레멘스의 편지에서 발견된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에서 이 프로노이아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섭리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서 이제 신정론(神正論, Theodizee)* 문제를 야기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필연(heimarmene)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악, 또한 무죄한 사람들의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기독교 신학이 제시한 대답은 악의 현실이 이 세상을 섭리하는 하나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독립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의 도덕적 악에 의한 결과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초월을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스토아 철학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신정론 문제는 기본적으로 “무죄한 자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의미한다. 간혹 “병원 24시”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데, 불의의 사고를 만난다거나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이유나 위로를 제시하기가 힘들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볼 때는 더하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의, 사랑, 전능과 같은 속성의 하나님 바로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런 숙명적 고난의 이유를 해명할 길이 막막하다. 의롭지 않든지, 아니면 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인간 세상의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무감정의 존재이어야만 이런 이유가 그나마 조금이라고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오트가 정리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답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욥의 대답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로 말하였습니다. ...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듣기만 했으나 이제는 내가 당신을 눈으로 봅니다.” 즉 이런 궁극적인 고난에 관한 질문에는 하나님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십자가 신학의 대답으로서 악과 고난이 일어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이런 논리로 집필된 책이다. 셋째는 부활신학의 입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무의미성이라는 무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넷째는 종말론적 대답으로서 마지막 날이 이르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윤리적 대답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서 끊임없이 고난과 악에 대항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들이 나름대로의 성서적, 신학적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대답이 악과 고난과 무의미성의 모든 근원적 문제를 완전하게 풀어줄 수 없다. 앞으로 계속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우리의 숙제라 할 수 있다.

4) 인식론
클레멘스는 헬라인들의 신앙관에 대해서 비판하기는 했지만 동의에 대한 스토아학설과 연관해서 결국 신앙이 하나님을 두려운 줄 알고 승인하는 것(신카타테시스)라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11:1에 근거하여 신앙을 일종의 선취적 승인이라고 진술했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 10:9,10). 이제 기독교 교리가 신앙적인 확증이 되려면 개인들의 판단(인식)이 경험과 연관해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이런 기독교 신학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스토아 철학과의 연관에서 발전한 셈이다. 즉 기독교는 독단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리와 설득에 근거해서 자신을 변증해야한다는 것이다.

5) 자연신학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조화와 질서를 정확하게 통찰함으로써 어떤 바른 사실을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론은 자연의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착상과 맞물려 있다. 즉 로고스의 활동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들에게 비슷하게 형성된 기본개념이 있다는 말이다. 일종의 ‘자연법 학설’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양심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에 충실하면 바른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인식의 토대로 보고 있는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자연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공통적인 근본개념(koinai ennoiai)이 있다는 통찰로부터 자연신학적 전통을 세웠다. 그 이전에 바울은 이방인들도 역시 “본성적으로 법대로 행한다.”(롬 2:14)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법의 요청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2:15)고 했다. 이런 생각은 구약성서의 율법적 권위가 자연법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그 토대를 확고하게 했다.
이런 자연신학은 인간론과 계시론, 구원론의 차원에서 현대신학의 논쟁점이 되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본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 사이에 벌어진 소위 ‘자연신학’ 논쟁이었다. 에밀 브룬너는 인간의 타락 이후 질료적(material) 형상(Imago)은 파괴되었지만 형상적(formal) 형상은 파괴되지 않았다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여전히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바르트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접촉점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브룬너의 입장은 자연신학으로, 바르트의 입장은 계시신학으로 구분하는데, 이런 논쟁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이외의 양심이나 자연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6) 양심
자연신학은 인간의 ‘양심’과 연결되어 있다. 스토아 철학은 경고하거나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로부터 모든 경험에 대한 의식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런 의식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에 대한 도덕적 태도를 제시해준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흔히 양심적으로 살기만 하면 된다는 말과 비슷하다. 양심에 대한 스토아 철학의 생각은 로마서 2:15, 13:5, 또는 고후 4:2, 딤전 1:5, 19, 3:9 등과 연결되어서 해명되었다. 과연 양심이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준거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로 이주해온 청교도들이 흑인 노예를 소유물로 생각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양심이라는 게 그 시대정신에 의해서 지배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7) 윤리학
스토아 철학이 주장하듯이 인간에게 양심에 따른 기본개념이 주어져 있다면 당연히 인간은 도덕 개념도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의 귀결은 결국 윤리의 문제로 넘어간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윤리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기원전 2세기의 파나이티오스는 윤리학을 책임론이라고 했는데, 이에 근거해서 키케로는 두 편의 논문을 집필했다. 이 논문이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키케로는 의무개념을 광의로 보아 이성적인 행위를 그 안에 포함시켰지만, 암브로시우스는 그것을 협의로 보아 ‘존귀’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는 다가올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당연히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답변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라서 기독교 신학과 스토아 철학의 연관성에 대해서 일곱 항목으로 검토했다. 스토아 철학은 이 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궁극적인 모습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피조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학은 세부적인 항목에서 스토아 철학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용한 부분도 많았다. 앞에서도 몇 번 강조한 바 있듯이 기독교 신학은 진리론적 토대에서 주변과의 열린 대화를 쉬지 않았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심화해나갔다. 이런 열린 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한 선취적 진리경험이 확고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의 종말론적 성격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능했다. 이런 확신이 없을 경우에 기독교는 자폐증 환자처럼 세계 개방성을 포기하고 자기 안으로만 숨어들어갈 것이다.

3. 기독교로부터 일탈한 근대의 스토아적 성격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로 하여금 이 세계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에 이르러 그런 스토아의 자연법적인 사상으로 인해서 이 세계는 기독교적인 세계 이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스토아 철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세상 학문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중성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자 하나님과 그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스토아 철학이 도움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등장으로 인해서 이 세계가 기독교와 결별할 수 있는 계기를 스토아 철학이 제공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해서 근대사상이 기독교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그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17세기 자연적 하나님 인식과 자연적 윤리가 스토아 철학의 자연법론에 의해서 강화됨으로써 근대 사상은 내부적으로 종파 논쟁에 휩싸이게 된 기독교 교리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근대 사상의 눈에 종파 논쟁에 진력하고 있는 기독교는 사회의 평화를 깨뜨리는 집단으로 비추었기 때문에 이제 근대 사상은 더 이상 기독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중심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헤르베르(Herbert von Cherbury, 1583-1648)이다. 그는 스토아 철학을 받아들여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종교적 기본 진리론을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리얼리티, 하나님을 섬겨야할 책임, 하나님을 섬기는 핵심이라 할 덕과 경건성의 연결, 모든 과오를 용서받아야 할 필연성, 죽음 이후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보답. 그는 이 다섯 가지 기본 진리를 보편적인 교회의 근본이라고 설명함으로써 뒷날 이신론과 합리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런 스토아 철학에 의해서 이제 윤리학은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에 대한 의존성에서 벗어나서 ‘자연이성의 자율’에 그 토대를 놓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없이 이미 자연적인 빛에 의해서 기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게 된 이유는 물론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 기독교가 종파 논쟁에 휩싸임으로써 이런 지성인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헤르베르는 이 스토아 철학에 근거해서 인간이 자기를 보존하고 전개하려는 자연적 본능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 자기 보존과 전개는 17세기가 끝나갈 무렵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통해서 유한한 만물에 해당되는 형이상학의 기본원리로 보편화되었다. 토마스 홉스(Th. Hobbes, 1588-1679)는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원리를 인간의 태도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간주했으며, 그것이 곧 사회 계약론의 기초라고 간주했다. “사회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처리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사회적 평화를 통해서 각기 개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정치의 통치 질서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124). 이 세상에 로고스로 작용하는 신의 섭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중세기 기독교의 자연법론과 달리 이제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평등과 자유라는 스토아적인 이념이 전면에 부각했다. 판넨베르크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자연적 상태와 같은 자유가 죄로 인해서 숙명적으로 상실된 게 아니라 개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개인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뿐이다. 이런 일은 국가 권력에 의해 보증된 시민의 자유가 사회 상태의 틀에서 교환되는 국가 권력에 직면해서 일어난다. 자기 보존의 원리는 근대 사회학과 윤리학을 종교적 전제들로부터 독립하도록 견인했는데, 이러한 견인의 보다 넓은 의미는 결코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 실존의 자유와 자기만족이라는 근대의 명제는 단순히 이성의 자율을 뛰어넘어 이미 바로 그곳에 길을 내고 있었다.(124)  

근대에 들어와서 스토아 철학에 의해서 강조된 인간의 이성적 자유과 평등은 종교적 전제와 전혀 상관없이, 또는 그런 것들과 반대로 독자적 길을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러한 절정을 19세기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서 발견한다. 인간을 계몽함으로써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역사낙관주의는 이제 공적인 영역에서 더 이상 교회의 목소리가 개입할 여지를 단절시키고 말았다. 결국 신학이 선택한 길은 개인의 종교 감정이나 윤리적 결단에 신학적 타당성을 제공하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시대사조의 어쩔 수 없는 압박감이 있기는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종파 싸움에 휘말렸다는 사실과 교부들의 신학적 전통인 보편사적 변증의 작업을 게을리 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사건은 ‘지동설’ 논쟁과 ‘진화론’ 논쟁이다. 과학자들의 명백한 세계 해명을 교권으로 억압함으로써 결국 교회는 진리논쟁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논의의 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렇게 근대 사상이 기독교로부터 일탈하게 된 원인의 철학사적 근원이 스토아 사상에 있었다는 게 바로 판넨베르크의 지적이다. 이 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윤리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세부 항목에서 기독교와의 대화가 전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교회 내외의 여러 요인들로 인해서 결국 근대와 기독교를 분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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