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기독교 윤리학

신학입문 조회 수 4956 추천 수 157 2004.11.04 09:11:56

9장

기독교 윤리학

 

 

기독교 윤리의 이중성

반사회적인 일에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한국 사회에 부도덕한 일들이 다른 나라 못지않게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 기독교 신앙이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나가는 데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중의 하나라고 본다. 하나는 한국의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윤리와는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의 경우는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

우선 윤리 부분과 연관해서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어 있다는 지적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기복(祈福)적인 관심에만 머물러 있거나 또는 신앙을 교양의 수준에서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복신앙은 주로 지적 수준이 낮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며, 교양으로서의 신앙 형태는 비교적 지성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지만, 윤리의식이 모자라거나 파손되었다는 점에서는 이들 양자가 똑같다. 예수님을 믿고 (거의 세속적인 차원에서) 복을 받겠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삶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킨다는 뜻인데 이런 상태에서는 이웃과 사회를 돌아볼 여유는 가능하지 않다. 윤리는 기본적으로 이웃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건강하게 회복되면 기독교인의 윤리성이 확보될까? 물론 상대적으로 좋아질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선 완전한 신앙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무리 바른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죄는 죽어야 끝장난다.”는 마틴 루터의 말은 인간이 자기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물론 자기를 제어하는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어느 정도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시 멈추어 있을 뿐이지 기회가 오기만 하면 아주 간단히 우리를 갖고 논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을 윤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칸트가 기독교 신앙을 이런 ‘윤리’의 범주 안에서만 타당한 것으로 언급했지만, 그리고 그 이후로 리츨의 윤리신학이나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 같은 신학 사조에서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관계를 강조했지만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적인 길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규범과 윤리적 규범을 철저하게 수행함으로써 스스로 의로움을 획득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던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윤리적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을 우리가 칭찬하고 존경하듯이 바리새인들도 그런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윤리적 모범생들보다는 오히려 죄인들,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훨씬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는 윤리적으로 자기를 성취해서 자기 만족감에 싸여있는 사람보다는 그런 윤리적 모범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태도가, 성서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하는데, 그런 태도가 훨씬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남에게 본보기가 되는 윤리적 지평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신앙의 지평과 연관된다. 결국 기독교 신앙과 윤리적 행위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윤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상당한 부분에서 윤리적 요청과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역시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보살펴야 할 우리의 책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에 나와 기도하기 전에 이웃과의 불화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소위 황금률이라고 일컬어지는 “당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시오”라는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궁극적으로 ‘원수사랑’의 차원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윤리의 철저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위대한 기독교 교부나 스승들은 철저하게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수준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건강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는 대개 윤리적 실천도 함께 따랐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관계를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신앙의 본질은 아니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비유 ‘나무와 열매’에 따르면 나무 자체는 신앙이고 열매는 윤리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윤리의 존재론적 근거이고 윤리는 신앙의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 신앙의 존재론과 윤리의 인식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이중적이며 동시에 상호적이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존재론의 우위성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늘 제한적이고 가변적이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청교도적 기준으로 오늘 기독교인의 윤리를 재단할 수 없지만,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은 오늘 21세기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하다.

 

개인과 사회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인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개체로서의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데 사회구조 가운데서는 부도덕하게 생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두 관계는 인간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 보라. 히틀러 시대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시키는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인 친위대 장교가 있었다. 그는 가정에서 자상한 남편이며 아버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격자였다.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하고 아침 출근길에 자식들과 아내에게 키스로 사랑을 표현하는 그 사람이 유대인 인종청소에 발 벗고 나서서 자기의 딸만한 유대 여자 아이도 예외 없이 가스실로 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한 인격체 안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가 공존한다는 것이 이 친위대 장교 한 사람의 인격적 결함 때문인가? 그의 왜곡된 가치관이 그런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게 틀림없지만 나치스의 제삼제국 이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게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한다고 해도 사회가 악하면 역시 그런 악한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윤리 문제를 생각할 때 더욱 결정적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곧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윤리적 한계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개인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고결한 윤리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시대정신 자체가 부도덕하면 결국 개인도 역시 부도덕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1) 로마시대에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면 패전국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거나 성적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게 정의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가혹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약탈했다. 그 덕분으로 호사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고, 그것에 기초해서 로마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로마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얼마나 많은 가족이, 민족유산이 파괴되었는가를 말이다. 승전의 노획물로 희희낙락했던 로마의 귀족들은 어떤 점에서 모두가 부도덕한 사람들이다.

2) 북아메리카에 이민을 갔다가 그곳의 인디언을 축출하고 나라를 세운 미국 사람들의 경우도 시대적인 악을 대표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채 인디안들을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다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이 시대정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실증이다.

3) 또 하나의 다른 예를 우리의 분단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민족은 분단체제로 인해서 왜곡된 역사를 살았다. 남북한 양쪽이 한결같이 상대방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지냈다. 쌍방 간에 일어난 파괴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자체 체제 안에서도 분단이 유발한 비인간적인 행태는 하나 둘이 아니다. 북한의 숙청작업이 단적인 예다. 물론 남한에서도 국가보안법으로 인해서 수많은 양민들이 국가의 이름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심지어는 죽었다. 이들에게 부당하게 간첩혐의를 씌운 검찰이나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한 법관들은 자신들이 법을 수호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단체제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인간을 파괴하는 데 앞장 선 일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건에 동조하거나 침묵한 우리 모두는 총체적으로 도덕성을 잃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 개체가 시대정신을 뚫고 나가기에는 너무나 무력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떤 절대윤리를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인간에게 윤리라는 것이 어울리는 말이겠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 허무주의가 바로 기독교 윤리의 토대는 결코 아니다. 비록 도덕주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도덕적 행위는 구약과 신앙이 제시해주고 있는 신앙적 태도와 직결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순전한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성만찬적 사귐과 나눔이며, 정의로운 사회실현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다스림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기독교 신앙의 영속적 지평이다. 따라서 이제 기독교적 윤리의 준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성서는 기독교 윤리의 전범인가?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은 성서가 기독교 윤리의 전범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윤리가 규범적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이유도 이런 전이해 때문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의 율법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규범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예컨대 율법의 유약이라 할 십계명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명령들은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옵션이 아니라 개신교 윤리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임마누엘 칸트의 윤리적 특징에서처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일종의 당위이며 절대규범이다.

규범적 성격이 강한 성서의 지침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갈고 닦여진 최소한의 규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갖는다. 예컨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도적질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어느 한 두 사람의 머리에서 번개처럼 스치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유대인의 삶에 농축된 삶의 지혜이며 질서다. 그들은 이런 지침대로 살아가기만 한다면 건강한 사회를 넉넉히 유지해나갈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성서를 기독교인의 윤리적 전점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유대인과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고유한 정신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점에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규범적 규정들은 일반적으로 그 시대의 특별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학적 과정 없이 현대인들에게 무조건적인 것으로 적용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윤리적 규범들을 생각해보라. 구약시대 때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악성피부병은 매우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어서 나병이 아니라 그와 비슷하기만 해도 공동체와 격리되어야만 했다(레 13장 창조). 간통하는 남자나 여자,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남자와 그 여자, 며느리와 동침하는 남자와 그 여자, 동성애자들, 근친상간자들, 짐승과 관계하는 자들, 무당이나 박수무당은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했다(레 20장 참조).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폭행한 사람, 인신매매범도 죽어야만 했다(출 21장 참조). 이러한 규범들은 그 당시의 세계관에 의한 것들이다.

한편으로 구약성서는 오늘 우리의 윤리적 관점에서 벗어난 내용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정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고귀한 윤리적 가치들도 넘쳐난다.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었을 때는 이자를 받지 말고, 옷을 전당잡았을 때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들은(출 22장 참조)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배려하려는 유대인들의 숭고한 정신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눈에 호불호 간에 이러한 율법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지 초역사적으로, 초문화적으로 모든 인간 행위를 규정하는 전범이라고 할 수 없다.

구약성서는 그렇다 치고 신약성서는 좀 다르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신약성서 시대가 구약보다는 우리와 가깝기도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초대교회의 윤리 규정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와는 어느 정도 구별될 수 있긴 하지만 근본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복음 중의 복음이라 일컬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보라. 친구를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고, 오른 눈이 실족케 하면 그 눈을 빼어버려야 하며, 누가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원하는 자가 있으며 겉옷까지도 주고, 무엇을 빌려 달라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다(마 5:21-42 참조). 이 모든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원수사랑으로 집중된다(마 5:44). 이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그렇지 않으면 신자가 될 수 없는 절대 규범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별로 없다. 이 말씀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귀해도, 하나님 나를 지향하는 이들이 취해야 할 윤리적, 신앙적 삶의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행동지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도짓을 하기 위해서 칼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아무에게도 거절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이유 불문하고 칼을 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기독교적인 윤리인가?

성서가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를 규정하는 유일한 전범이 아니라면 어디서 윤리적 근거를 찾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현재 처해 있는 정황에 대한 해석이 이에 대한 답변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독교 윤리가 단순히 상황론에 빠져들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자신의 상황에서 스스로 책임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종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연관 문제이다. 성서라는 텍스트가 그것을 읽고 있는 신자들의 구체적인 콘텍스트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찾는 게 바로 기독교 윤리의 근거이며 목표이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라. 실제로 뺨을 얻어맞는다면 다른 편의 뺨은 고사하고 맞받아 싸우는 게 통상적이다. 왼 뺨까지 돌려대야만 윤리적인 행동이고 그런 폭력을 제압하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성서는 윤리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이 새겨야할 삶의 방향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절대규범이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고민과 번민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성서 말씀을 문자적으로 실천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사실은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마다 실존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또한 아무리 신앙적 체험을 뜨겁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기독교인의 행위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는 자로서 매 사건에 직면하여 책임적인 자세를 견지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말씀은 기독교 윤리의 이러한 과정적 성격을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위에서 밝혔다. 특히 기독교 윤리라고 해서 단순히 성서대로만, 혹은 뜨거운 신앙체험으로만 살면 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삶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기독교 윤리의 지향성에 근거해서 몇 가지 실질적인 윤리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인간 본질로서의 성

기독교인들은 성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보이는지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고대 엣세네파적인 전통, 중세의 수도원적인 전통,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에 치중한 신비주의 전통에 기초해서 육체적인 즐거움을 탐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한다. 죄의식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늘 불안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의 사제나 수녀, 혹은 수도자들은 대개 성과 단절되어 살아가는데, 그 이유도 역시 육체적 쾌락을 낮추어보고 반대로 정신적인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런 금욕적 전통은 기독교만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소위 고등종교라 일컬어지는 종교들의 일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금욕적이다. 절에서는 원칙적으로 육식을 금하고, 요리할 때도 독한 양념을 쓰지 않으며, 많은 고승들은 생식을 한다. 승려들은 일반적으로 여름과 겨울에 각각 세 달씩 혹독한 하안거(夏安居)와 동안거(冬安居)를 훈련을 받는다. 이슬람권 여자들은 지금도 남성들의 성적 충동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노출을 제한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자신의 생리적 욕구를 일정 부분 유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다른 동물들이야 배가 고프면 무조건 먹어야 하고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해야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식욕과 성욕을 억제함으로써 영적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금욕적 생활태도가 인간의 인간됨을 유지시켜왔으며, 많은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상당한 문명이 패망하게 된 이유는 무절제하게 먹고 소비하고 성적 쾌락을 탐닉한 데 있다는 게 역사가들의 진단이다.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는 동성애가 거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고고학의 발굴로 잘 알려진 폼페이도 역시 이러한 쾌락적 삶이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는 오늘의 라스베가스 못지않은, 오히려 훨씬 더한 환락의 도시였다. 달려진 바로는 매일 아침마다 로마 광장에 버려진 사생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에 여아들을 데려다가 다시 매춘부로 키우는 이들도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자기 딸과 매춘관계를 맺을 개연성도 있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매일 연회에 참가하는 것을 주업으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신약성서에 거론되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1천 명 가량의 여(女)사제들은 거룩한 매춘부였다고 한다. 낮에는 신전에서 사제 역할을 하지만 밤에는 고린도 거리에 나서서 몸을 팔았다고 한다. 이런 게 바로 인간 문명이다.

종교는 이러한 세속의 쾌락적 열정에 맞서 철저한 금욕과 고행을 실행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했다. 기독교 역시 로마 제국의 끝 간 데 모르는 성욕중심적, 남근중심적 윤리관과 맞서 투쟁함으로써 인류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 남자들의 무분별한 성도착적 행실에 실망해서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를 선택한 로마 귀족 여성들이 많았다. 이러한 기독교의 금욕적 성윤리는 가나안 문화를 극복한 유대교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서 종교의 금욕적인 가르침이 아무리 강력하게 선포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성욕은 조금도 억제 되지 않았다. 중국의 성문화도 대담했고, 기독교가 1천년 동안 도덕적 기준으로 행세해온 유럽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물론 이슬람문화권에서는 상당히 통제되었다고 생각하지 몰라도 그것은 외면적으로 억제되었을 뿐이지 그것 사람들의 성충동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도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인 성행위가 자행되어 왔고, 그것은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옛날보다 지금이 더 지나치지도 않고, 그 반대도 아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성은 인간의 본질이고,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은 성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만 하는 걸까? 성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예컨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나 배꼽티를 입을 수 없다거나, 결혼 전 순결을 지켜야만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기준을 확정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다. 동성애는 정상적인 성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죄라거나 피임을 통한 산아제한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반하기 때문에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공유산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하다거나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에만 가하다거나 아니면 태아가 2개월까지는 괜찮다고 말할 수도 없다. 만약에 어린 소녀가 성폭행을 당해서 임신했을 경우에 무조건 출산을 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적절하게 의료적 방법으로 유산시켜야 하는지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신학적, 생리적, 사회적 담론들이 종합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은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주제는 졸저 <기독교를 말한다> 247-257쪽을 참조할 것.

금욕과 쾌락, 청빈과 소유, 유기론적 생명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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