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신학의 철학적 착상과 그 영향(교정, 4월27일)

조회 수 3838 추천 수 162 2004.11.04 09:13:09
7장
신학의 철학적 착상과 그 영향


기독교 신학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제논) 철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우리가 충분히 논의한 바가 있다. 처음부터 완전한 진리라고 볼 수 있는 기독교가 이런 헬라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여기서 한 마디 짚어야 할 것 같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 사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독단이 아니라 보편적 지평에서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독단적이라는 말은 닫힌 논의 구조라고 한다면 보편적이라는 말은 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 문제를 끊임없이 열린 자세로 논의했다는 말이다. 예수가 메시아이며 재림할 주라는 사실을 무조건 선포하면 충분하지 더 이상의 열려진 논의가 왜 필요한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의 종말론적 사태와 연결되어 있다. 종말이 이르기 전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과 현상, 그리고 모든 가치와 이론들은 잠정적인 성격 안에 들어 있다. 기독교 교리의 잠정성을 전제한다면 기독교가 자신의 교리를 독단이 아니라 보편적 지평에서 해명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진리(알레테이아)란 무엇인가?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진리는 참된 이치이다. 문제는 참되다는 사실을 판단하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제한적 인식론이 연루되어 있다. 진리가 전체 역사와 연관되는 참된 이치라고 할 때 인간은 아주 짧은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진리를 인식하기는 숙명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만 짚다. 기독교는 이런 인간의 제한적 인식론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진리의 준거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첩경인 셈이다. 하이덱거는 진리가 탈은폐의 속성이라고 했다. 이것은 진리의 존재론적 성격을 지적한 진술이다. 필자가 보기에 하이덱거의 이런 진리이해는 기독교의 계시개념을 철학적으로 지양한 게 아닐까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요한복음의 진술이 기독교의 진리론에서 핵심이다.

이렇듯 헬라 철학과의 보편적인 대화를 마다하지 않은 기독교 신학은 그들에게서 여러 인식론적 방식을 배웠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 신학의 독특한 사유를 통해서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서로 다른 전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서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한국의 창과 서양의 아리아가 전혀 다른 발성법에 따른 노래이지만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그런 음악 경험을 나눌 수 있다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과 같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신학이 철학에 끼친 중요한 주제는 다섯 항목이다.

1. 세계 우연성(Kontingenz)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헬라 사상과 히브리 사상은 이 세상을 보는 틀이 서로 달랐다. 헬라인들은 이 세상을 영원 회귀하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코스모스라고 보았으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시간에 의해서 제한받는다는 뜻에서 ‘에온’이라고 보았다. 고대 물리학은 오늘 우리의 물리학적 정보에 비해서 미개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직관을 통해서 이렇게 각각 다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현대 물리적 관점에서 일단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유한한 별이라는 점에서 히브리인들의 시간적 세계 이해가 옳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우주 전체가 무한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그리고 수많은 별들이 생성과 소멸의 순환 안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공간적 세계 이해도 역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단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신학의 시간적 세계 이해가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세계 이해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창조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유일회적일 수밖에 없다. 창조의 하나님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고유한 창조의 의미를 새겨두는, 그야말로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창조의 유일회성을 구원의 유일회성과 한 묶음으로 처리했다.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르는 그 과정의 시간 사건마저 유일회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죽었으며, 그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최종적으로 물리쳤다. 이처럼 우리는 부활한 뒤에 주님과 함께 하고, 더 이상 죽지 않을 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반복되는 게 아니라 유일회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런 사상의 단초가 곧 창조 신앙이다.
유일회적이라는 이 통찰은 자연스럽게 이 세계의 우연성 개념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 우연성이라는 용어가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기계적인 필연성의 산물로 보는 것을 극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우연성 개념이 13세기 말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서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연한 것에 대한 견해가 개입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의 대립적인 의미에서 질료를 설명하면서, 이런 저런 규정을 채용할 수 있는, 그래서 우연한 것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현실적인 것(형상)이 가능한 것(질료)보다 상위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늘 무언가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언급된다. 이 가능성은 경우에 따라 늘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한 것은 사실상 우연한 것들과 일치한다.”(129). 이와 달리 우연한 것은 없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있는 것들의 실존적 사실성을 통해서 단순히 추상적으로 가능한 것들과 구별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구별을 완성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성과 가능성의 개념이 축소되고 말았다.
둔스 스코투스는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우연성 개념을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자유롭게 행위 하는 원인만이 우연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볼 때 우연이 있다는 사실은 만물의 제일 원인자가 자연의 필연성에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우연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즉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자기의 뜻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제일 원인자가 자신의 본질적 필연성에서 모든 것을 생산한다면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둔스 스코투스의 이런 논리에 의해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달리 사물의 가능성이 그 현존보다 앞서게 되었다. 그 현존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세계는 실제적인 모습으로 되기 전에 이미 존재할 수 있었다.”(130).
이제 우연성 개념은 질료의 불규정성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의지와 자유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로 새겨지게 되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특징은 더 이상 필연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이다. 창조적인 하나님의 자유는 자연의 필연성이 제기하는 강요로부터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적인 현실성은 우연하며, 그 현존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의지에 기인하고 있다.
피조된 모든 현실성이 우연하다는 이 사상은 현대에 들어와서 당연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17세기 이후로 자연법적 질서 안으로 이 우연성 개념이 퇴각한 적이 있지만, 이제 20세기의 자연과학에서 사건의 우연성 전망이 훨씬 강력하게 부각되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세계를 일종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는 기계적인 자연과학관이 근본적으로 허물어졌다. 시간의 속성이 불가역적이라는 점에서도 역시 모든 개체 사건이 반복되는 데도 불구하고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일회적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율에 의한 규칙적인 과정의 시작과 끝만 우연한 게 아니라 사물의 규칙성에 상관없이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토대에 우연성이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규칙적인 반복성의 등장은 우연한 소여성이라 할 수 있다.”(131). 이런 물리학적 우연성 개념은 자연 질서의 신빙성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배치에 기인한다는 성서의 진술(창 8:22)과 맥을 같이 한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 홍수 이후에 인간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보도한다. 하나님은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개인(Individualität)

후기 헬레니즘에서 개인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강조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개인에 대한 평가는 그 한계가 분명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설을 통해서 인간이 이 땅에 있는 삶을 뛰어넘어 영원성에 참여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플라톤의 영혼은 분명하지 못한 여러 재생 표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육체를 갖고 개체 실존으로 살아가는 그 인격체와는 일치될 수 없었다. 모든 생명체가 윤회한다는 불교의 생명관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살아가는 개인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또 하나의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이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개체 인격이라는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사상은 이미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를 통해서 어느 정도 토대가 잡혀 있었다. 예수는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별 인간을 찾아오시어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공되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한다고 선포했다(눅 15:4-32). 이렇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의 종말론적인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구원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주어지는 무상하지 않은 생명을 가리킨다(막 12:26 이하). 기독교의 구원 사신(使信, Botschaft)은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으로 하여금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한다. 그 인간은 몸과 영혼이 하나로 이루어진 존재다. 이런 사상과 상응해서 초기 기독교 신학은 영혼을 몸과 영혼으로 창조된 인간의 구성 요소로 파악했으며, 이렇게 규정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생각을 몸의 부활과 연결시켰다. 이제 영원성에 참여함으로써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플라톤적인 표상이 개인에게 적용된 것이다. 즉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인과 연결된 것이다. 이 현존이 지금은 여전히 구체적인 몸으로 살아가지만 앞으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어 영원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개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 현존에 영원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러한 개체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개체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라는 구약성서의 가르침과 맞물려 있다. 모든 개체 인간에게는 아무에게도 침해당할 수 없는 고유한 인격이 담보되어 있다. 이 인격은 무엇일까? 이성인가, 사랑인가, 덕인가, 또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영적인 것인가? 또한 어떻게 인간의 인격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길 수 있을까? 인간의 인격은 우리가 충분히 검토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논의가 담겨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런 논의는 끝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일단 기독교가 인격을 자유로 생각했다는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보자.

기독교 사상에서 인격성은 인격을 규정하는 상관개념을 손상하지 않은 채 늘 자유라고 생각되었다. 타자와, 특히 고유한 인격의 신적인 근원과 자유롭게 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유사상과의 이러한 연결은 기독교 사상에서 이성적인 본질이 자유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소급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로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역시 자유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을 가리켜 “자유로운 의지로 인간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창조행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인격의 구성이 손상 받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현존을 구성하는 사태에서 자유롭게 이런 혹은 저런 입장을 취할 수 있다.(138)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와 예수의 아들 관계에 참여함으로써 확고해질 수 있었다. 이로써 이제 인류사에서 취약했던 의지의 자유는 튼튼한 토대에 설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 기독교 인간 이해의 독특성이 확인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피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인 자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예수와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구도 속에서 일치하지만 여전히 예수 인격이 고유한 자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에 대한 논리적 토대라 할 수 있다.

3. 역사로서의 세계(die Welt als Geschichte)

기독교 이전의 고대인들이 시간을 우주적 순환이라는 의미에서만 경험한 반면에 구약성서는 시간을 미래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이고 불회귀적인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주장이 간혹 비판받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는 틀린 주장이 아니다.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역사의 의미는 유대인들에게 최초로 발생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인간 행위의 결과가 최우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행위의 개념,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명제가 최우선이었다. 하나님의 행동은 피조물의 행동과 인간의 행동도 포함하며 관통한다. 피조물의 행동은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도구이다. 성서의 역사 이해는 인간의 행위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해는 늘 거듭해서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이 역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건을 연결시켜서 보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앞에서 첫 항목으로 제시한 우연성이 바로 하나님이 사건에서 활동하는 표현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그들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했는데, 그것이 곧 역사개념으로 발전하게 된 단초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 이해도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선택 행위에 대한 신앙에서 발전했다.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선택은 유대민족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세계민족을 목표로 한다(갈 3:15-29). 로마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버림받는다는 것은 곧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한 사건이다. 이레네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바울의 진술을(고후 4:4)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된 인간의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역사를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역사라고 보았다. 인류가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어거스틴의 사상은 인류의 보편사적 이념의 근원인데, 이런 사상의 뿌리는 훨씬 오래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역사 개념을 파악한 유대교와 기독교에 반해서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발원하는 근대 역사철학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를 역사의 주체로 부각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인류는 역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는 행위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역사적 단일성의 근거인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사상을 해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세속적 역사 개념에도 기독교 역사개념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인류의 보편사 주제는 기독교를 통해서 철학 사상에, 그리고 역사 서술에도 중재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개척된 세계와 인간의 현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의한 결과였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부각된 주제에서와 같이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역사관에도 역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유효하다. 기독교적 근원이 잊혀져 있던 그곳에서 여전히 그 증거가 계속해서 작용했다고 말이다.(146)

4. 무한자 개념(Unendliche)

헬라 철학자들도 나름으로 무한에 관한 개념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자가 무규정성이라는 의미에서 질료적 속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플라톤도 마찬가지로 존재자의 생성이 무규정성에 대한 한계설정의 기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신성은 어떤 한계를 지닌 원리로 이해되었다. 이들의 복잡한 논의는 접어두고 판넨베르크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에 관한 진술을 따라가자.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시켰다. 신적인 본질의 무한성은 그레고리우스 때문에 기독교 신론의 기초가 되었다. 신적인 본질의 무한성은 우리 인간의 인식이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완료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이며, 또한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의 토대가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개념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제일 원인으로서 원인 없이 존재하지만, 아버지에 의해서 증명된, 즉 아버지에 의해서 야기된 아들은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인 본질일 수 없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한정 없는 완전성과 유일무이성의 특징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나의 무한자보다 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근대 초기에 하나님의 무한성 개념은 세계로 전가되었다. 게오르그 칸토의 집합론을 통해서 실제적인 무한한 것, 혹은 무한 개념이 수학적으로 도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을 유일하게 무한하다고 보는 사상은 데카르트를 통해서 철학적 신학의 토대가 놓인 이후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헤겔이 참으로 무한한 것에 대한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이런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헤겔이 말하는 무한자는 그 앞에 아무런 대립도 찾아볼 수 없는, 따라서 유한한 것과 대립해 있는 그 존재를 말한다.
우리가 무한이라는 용어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 무한 개념을 우리의 인식에 담기는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을 사유하는 우리가 실제로 유한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한하게 존재하는 것들의 범주 안에서만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존재를 확실하게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인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실존을 가리켜 ‘세계내존재’라고 규정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 개념에 의하면 이렇게 무한에 대한 사유 자체도 역시 유한한 존재자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이기 때문에 결국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된다.

5. 성육신 신앙(Inkanationsglauben)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라고 설명하는데, 그것이 곧 성육신 신앙이다. 질료적 한계가 없는 신이 이런 질료의 한계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 이론은 우리가 사물을 중심으로 한 이 세상의 질서에 묶여 있는 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는 “vere Deus, vere homo”가 핵심인데, 어떻게 한 인격체 안에 신과 인간이 하나의 본질을 이룰 수 있는가? 아마 우리는 존재의 신비를 전제하지 않는 한 이 성육신 신앙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육신 신앙은 기독교가 타종교와 구별되는, 그리고 다른 철학과 구별되는 가장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 항목을 다룰 때 확인한 바이지만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에 삼위일체론이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상은 없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만큼 성육신 신앙은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인 셈이다. 중세기에 기독교 신학은 이 성육신을 초자연적 계시의 영역으로 유보함으로써 결국 철학적 논의로부터 밀려났다. 헤겔의 종교철학에 이르러서 이제 계시, 성육신, 화해 같은 기독교의 기본 개념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판넨베르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헤겔에게서 성육신, 혹은 하나님의 인간됨이라는 사실은 조직적 기능을 획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됨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참된 무한자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것과 대립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만 무한한 게 아니라, 그는 유한한 범위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현재함으로써 실제로 무한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성육신 한다는 것은, 그래서 이것이 인류를 위한 성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참된 무한자에 대한 사상이 단지 논리적인 생각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꾸로 기독교 성육신 신앙은 정말 무한한 것에 대한 철학적 사상에 종교적 토대를 놓는다. 이런 사상은 기독교의 성육신 신앙에 포함된 그 진리만을 개념화하는 것이다.(149)

여기서 성육신 사상이 말하고 있는 핵심은 절대와 인간의 화해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만이 아니라 절대와 인간의 화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근대주의가 이런 화해를 외면하고 자기 스스로의 절대화를 주창함으로써 결국 생명을 상실하게 되었다. 헤겔은 참된 자유는 절대와의 화해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이 화해는 자기의 유한한 현존을 절대화하는 망상으로, 그리고 자기의 자유의지로부터 나오는 자기실현의 노력을 절대화하는 망상으로 유한성과 그것으로 인한 귀결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게 한다.”(150)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참된 자유가 하나님과의 화해에 연유한다는 이 사실은 헤겔의 역사철학에 앞서 기독교 신학의 성과라고 한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말로 자유로워질 것이다.”(요 8:36), 또는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 3:17)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의 자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에 토대하고 있다. 마틴 루터가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즉 신앙이 그리스도와 연결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그 토대가 잡힌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를 모든 인간적 권위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불빛에서 이웃을 섬기도록 자유롭게 한다. 헤겔은 종교개혁의 이런 자유개념이 근대자유 사상의 기초라고 보았다. 근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유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파토스는 여전히 종교적 근원에서 생명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연법적 자유사상에서는 이런 기독교적 근원이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주제는 여전히 기독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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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3장: 하이데거 철학 맛보기 -9월23일- 2004-09-22 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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