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실천신학

신학입문 조회 수 4806 추천 수 147 2004.11.10 13:11:04
10장
실천신학

1. 이론과 실천의 문제

일반적으로 신에 대한 로고스인 신학은 이론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지만 실천신학만큼은 실천에 토대를 두고 전개된다는 점에서 일단 구분된다. 예컨대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를 실천적으로 증명해낼 수는 없다. 종말론 문제도 역시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의 신학의 특징에 대해서도 역시 신약성서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러나 실천신학은 이런 여러 신학의 분과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론에 근거해서 그것이 어떻게 교회 현장에서, 또는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한다.
실천신학이 이렇게 이론신학과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실천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단 옳은 생각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실천신학에 속한다. 설교, 예배, 교육, 봉사, 상담, 장례 및 결혼 등등, 이런 것들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천에 속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 실천은 그 어떤 관념적인 이론이나 교회 밖을 향한 봉사활동 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비중이 크다. 어떤 점에서는 신학은 결국 이런 교회 실천이 원활하고 바르게 작동되도록 돕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론신학과 실천신학이 무조건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이론신학은 단지 사변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 구조 속에 갇혀 있지는 않는다. 비록 형이상학이나 역사학 등의 이론에 근거해서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해명하고 있지만 교회의 실천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이 다루고 있는 부분은 비록 이론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신학은 교회의 기능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처럼 교회의 현장과 그 실천을 전제하고 있다. 즉 생명의 영인 성령이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도 역시 따지고 보면 실천의 지평에 속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단지 사변이 아니라 인간 삶을 변화시키고 이끌어가는 역동성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천신학도 단순히 현장의 실천에서 요구되는 것에만 반응하는 분과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학의 전체 틀을 현장에 접목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생태적 위기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변혁시키고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현장의 필요성에서만이 아니라 2천년 신학의 전통에 담지 된 창조론과 종말론에 의해서 그 방향이 잡혀야 한다. 세례를 베푸는 경우에도 세례에 대한 신학적 토대가 충분하게 제시되었을 때만 교회 안에서 바르게 실천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실천신학은 교회를 운영하는 방법론에 한정시키지 않는 한 ‘조직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분과이다. ‘설교’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라고 본다면 당연히 조직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또는 ‘계시와 역사’의 관계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루돌프 보렌은 실천신학의 위치를 세리와 비교했다. “실천신학은 세리처럼 국경선(한계) 사이에 서 있다. 그리고 신학과 교회와 세계 사이에 왕래가 일어나도록 돕는다.”(개론서 22, 쉬레어, 신학이란 무엇인가, 재인용). 재미있는 비유이다. 실천신학은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관계를 소통시키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신학적인 이론이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현장인 교회에서 활성화될 수 있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 이론과 교회가 세계를 위해서 봉사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통의 역할을 실천신학이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천신학을 단지 교회의 실천에 대한 학문이라고만 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면서 신학의 생명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어떻게’와 ‘무엇을’의 변증법적 성격

일반적으로 실천신학은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또는 구원의 현실들을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에 기울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예컨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작업이 이런 실천신학의 과제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예전이 거의 무의미하게 허물어진 오늘날 이런 예배의 방식을 바르게 회복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예배 안에서 찬송을 어떻게 선정할 것이며, 성찬예식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하며, 헌금은 어떤 방식으로 드려야 하는지 등등, 많은 방법론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실천신학이 지나치게 ‘어떻게’에만 기울어지면 일종의 실용학문에 머문다는 문제가 있다. ‘어떻게’와 더불어서 ‘무엇을’의 관점이 실천신학에도 매우 중요하다. 즉 교회의 실천에 대한 본질과 목표를 정확하게 설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런 ‘무엇을’이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벌어지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가장 단적인 예가 한국의 목회자들이 거의 ‘상담학’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지 그것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함 공부인 조직신학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에 대한 관점을 ‘설교’ 문제에 한정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현재 한국교회의 설교에 내재한 결정적인 문제는 ‘내용’이 빈약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설교학 강의와 도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들을만한 내용이 없다. 아마 신자들이 목사의 설교에서 영적인 감동을 받는다는 사람은 별로 없거나 또는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데서만 만족을 찾을 것이다. 내용이 빈곤한 설교는 잔소리가 많아지거나, 공연한 예화가 자주 등장하거나 과도한 수사학으로 자기를 감추려고 할뿐이다. 결국 이런 설교의 특징은 한결같이 ‘어떻게’에만 매달림으로써 자초하게 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주제는 모든 설교자들이 똑같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전하는 기술에만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방법론은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제 설교는 ‘무엇을’에 다시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종말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리론적인 태도로 질문하고 그것을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전달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실천신학의 ‘어떻게’와 ‘무엇을’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맞물려 있다. 조직신학은 ‘어떻게’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지만 실천신학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모든 분과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분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를 좀더 근원인 영성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자.

3. 영성과 신학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신학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어떤 교회는 노골적으로 신학을 비난하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는 그렇게 딱 부러지게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외면적으로 지성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그저 교양이 있을 뿐이지 신학적이지 못하다. 신학은 단지 목사가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에 불과하지 실제 목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현장에 있는 목사들은 신학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아무리 책을 쓰거나 번역해 놓아도 목회자들이 읽지 않으니까 신학서적을 출판하는 회사 경영이 어렵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양서 출판이 더욱 곤란해진다. 이렇듯 한국 교회에서 신학이 푸대접을 받는 이유는 목사들이 목회를 경영의 차원에서 생각함으로써 원칙과 본질보다는 현장의 쓰임새에만 신경을 쓴다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신학이 별로 영적이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는 목회자와 신학자, 양쪽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우선 신학자의 책임은 아주 명확하다. 그들은 신학을 일종의 학문적 이론으로만 생각하지 그런 이론 뒤에 있는, 또는 그 깊이에 있는 보다 본질적인 실질을 놓치고 있다. 그들의 신학에 리얼리티가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가현설이나 에비온주의,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 등을 중심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 현대신학에서 이 기독론이 어떻게 확대 해석되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주장들을 소개하고 자기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런 논의들이 드러내고자 한 본질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이나 경험이 없다. 그러다 보니 결국 누가 어떻게 주장했다는 것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드러내려는 그 세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랑의 이론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공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사랑 자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신학이론이나 체계는 아무리 장황하고 화려해도 정보에 불과하다. 신학은 이런 신학 정보를 많이 확보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그 무게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신학은 죽은 학문이다.
이런 문제는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처럼 철저하게 이론적인 분과에만이 아니라 윤리학이나 실천신학처럼 실천적인 분과에도 역시 똑같이 적용된다. 즉 기독교 윤리학은 사회봉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거나, 실천신학은 기도를 많이 하게 하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상 그런 사회봉사나 기도와 같은 교회생활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 인간의 욕망일 가능성이 늘 있다는 인간학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실천적 분과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세계와 그 나라에 대한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생명에 대한 깊은 체험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곧 영성이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기본적으로 영성을 기초로 한다. 이런 영적 체험이 반드시 어떤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명의 힘으로 이 세계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게 자기를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인간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영이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신학을 단지 정보로서만 생각함으로써 결국 이런 하나님과 그 영을 놓치고 그저 인간 인식이나 실천에만 머물러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자들은 영성을 어떤 주술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인식론을 무시하고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이르게 하는 힘을 영성이라고 본다. 교회 안에서는 영적이라는 말과 비이성적이라는 말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가정 일이나 사회생활을 가능한대로 팽개치고 자나 깨나 기도와 찬송만 한다거나 신자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기도해주는 이들로 간주된다. 이런 사람들은 툭하면 기도해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심지어는 김 집사에게 무슨 귀신이 붙어있는 게 보인다고 까지 주장한다. 만약 교회가 이런 상태를 영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영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옳고 그름을 가장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영성의 토대는 바로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신학의 부재와 영성의 왜곡이라는 위기 가운데 빠져있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은 신학이 없는 상황에서, 또한 영성이 왜곡되어 있어도 여전히 교회가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위기를 별로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늘 교회만, 그것도 가시적인 교회만 자신들이 숙고해야할 절대적인 대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것보다 훨씬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하나님과 그의 영이 왜곡되어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신학적 바탕이 탄탄한 교회와 영적 리얼리티가 풍성한 신학이 조화를 이룰 날은 언제일까?

4. 실천신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실천신학은 신대원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목회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수의 ‘강의’로 진행되는 과목과 학생들의 연구발표 및 토론이 함께 병행되는 ‘세미나’로 구분된다. 강의를 통해서 실천신학의 기초를 대체적으로 세울 수는 있지만 세미나를 통해서 훨씬 심도 있게 훈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임상경험을 해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관한 전문서적을 충분히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배, 예전, 상담, 교육, 교회헌법, 상담 등등에 관한 읽기가 뒤따라야 한다.
영남신학대학교 학부와 신대원의 실천신학 과목은 다음과 같다.
목회상담학 세미나, 합창지휘법, 한국교회 예배사, 교회봉사학, 보육 및 사회복지실습, 예배와 설교, 디아코이나 세미나, 사회복지실천기술론, 영성훈련과 실제, 영적 설교, 목회실습, 목회와 상담, 목회와 경영, 교회행정, 경건훈련, 교회와 사회봉사, 예배와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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