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 신학, 철학 (교정) -2004.9.2(목)-

조회 수 4263 추천 수 193 2004.08.30 23:56:37
1. 교회, 신학, 철학 -2004.9.2(목)-

1. 교회, 신학, 철학 -2004.9.2(목)-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질문

이번 학기에 본 강의를 신청한 사람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으며, 특히 앞으로 교회에서 목회자로 살아갈 사람들이다. 이렇듯 교회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은 교회 공동체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유야 각 사람에게 다양하겠지만 가장 핵심적으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익숙함’에, 또는 ‘낯익음’에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흡사 지난 50년간의 우리 남한 사회에 ‘레드 콤플렉스’가 가장 강고한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고 있었듯이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집단을 무조건 당연하거나 정당한 것으로 보고, 그와 반대되는 집단을 부정한다. 그런 태도가 심리적으로 그 사람에게 평안한 상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요소로 작동되기도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 너무 깊숙하게 들어와 있어서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사유와 행위도 역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무조건 비판해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옹호와 비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될 때까지의 과정의 정당성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벌어질 수 있는, 아니 이미 벌어졌을지도 모를 이런 사태를 검증해보기 위해서 이제 교회와 연관된 몇 가지 주제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교회는 반드시 역사 안에 등장해야만 했을까? 이 질문이 매우 어설프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과 연관된 전반적인 사태를 들여다본다면 그 역사의 신비와 오묘함 앞에서 존재의 아득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물도 현실 세계에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필연과 우연의 힘들이 개입하기 마련인 것처럼 인류의 상당 부분에 해당된 지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교회 현상의 등장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그 모든 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해버린다면 아주 간단할지 모르겠지만 진리의 깊이를 내다보려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의 출현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많은 사람들은 주로 마태복음 16:13-20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의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의 설립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본문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본문만으로 교회의 등장을 절대화할 수는 없다. 원래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가시적인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교회 운운하는 말씀은 후기 교회 공동체에 의해서 편집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교회를 염두에 두셨다고 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그런 시도를 하셨을 것이며, 마태복음처럼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교회 설립을 명령하셨을 것이다. 왜 예수님이 교회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셨을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있었지 교회 조직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는 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그야말로 ‘운동’의 성격이지 조직은 아니다. 물론 운동은 조직을 통해서 활성화될 수 있긴 하지만 조직이 없더라도 운동은 가능하다. 예컨대 사랑은 조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어떤 세계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교회 설립을 반대하셨다는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이 조직으로서의 교회 설립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셨다는 증거를 성서에서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반대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 안에 등장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출현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으로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 생기(生起)는 우리 인간의 계획이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만약 우리가 역사가라고 한다면 교회가 출현하게 된 여러 객관적인 전거들을 수집하고 분석해야겠지만 우리는 신학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객관적인 역사 현상 내부에서 작동하는 힘을 주목해야만 한다. 역사적 전거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어느 정도 객관성이 담보될 수 있지만 그 내부의 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인식되고 증명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작업은 매우 어려운 사유의 길을 감당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교회 설립을 의도했거나 최소한 제자들에게 그것을 기대했다는 증거 없이 우리는 이 역사에 등장한 교회를 신학의 주제로 삼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 말은 별로 명확하지 않는 교회의 존재 근거를 오늘 어떻게 확보해내는가에 따라서 교회 현상은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도 있고, 혹은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의 근거는 끊임없이 위협 당했다. 십자군 전쟁처럼 타종교와의 무력 투쟁보다는 교회 내부에 놓여 있는 위협이 더 큰 문제였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서 불이 당겨진 종교개혁은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존재 근거가 매우 취약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엄청난 물적 토대와 사회 시설과 온갖 교리로 무장한 교회였지만 그것 자체로만은 아무런 정당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종교 개혁의 물결은 계속되었으며, 그런 것은 오늘과 내일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말은 교회의 존재 근거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존재 근거가 없는 공동체인 교회는 밖으로부터 그런 것을 확보해야만 한다.
교회 외부에 있는 교회의 존재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교회의 존재 근거다. 이런 정도의 교회론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평신도라도 하더라도 알만 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내용의 깊이까지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2천년 전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유대의 한 남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해명만으로 끝나지 않는 인격이며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가 전했던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성격이 무엇인지, 그 종말론적 구원이 어떻게 성만찬에 현재하게 되는지, 더 근본적으로는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많은 질문과 대결해야만 한다. 만약 이런 질문들과의 대결 없이 단지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는 것만을 목회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일이 될지도 모른다. 평생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마지막 심판 때 “나는 너를 모른다”는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존재 근거와 본질에 대해서 부단히 성찰해야만 한다.

논리적 성찰로서의 신학

이렇듯 자신의 목회 행위에 대한 논리적 성찰이 곧 신학이다. 따라서 신학은 목회 행위에서 건너뛰어도 괜찮은 작업이 아니라 필연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이 신학이 거의 부정되거나 아니면 경원시되고 있다. 그런 경향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신학대학교에서 소정의 신학과정을 밟고 목사가 된 다음에는 거의 신학에 관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것이다. 왜 이런 사태에 이르렀을까? 그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나는 두 가지로 줄여서 정리하겠다.
1. 여기서 신학 교육이 신학적 사유의 토대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신대원에서 3년 동안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또는 학부에서도 신학을 전공한 학생일 경우에 7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더라도 목회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이 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목회자들이 신학적인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거나 그런 글을 읽지 않는다는 현상만이 아니라 성서의 지평을 오늘 우리 삶의 지평과 연결시켜야 할 설교 행위에서 아무런 창조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설교자가 텍스트로 삼는 성서의 세계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있으며, 오늘의 삶은 그것과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예컨대 ‘종말론’에 관한 여러 신학적인 정보를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늘의 역사를 해석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현대의 자연과학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또는 그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끌어가야 할 방향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서의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한 설교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우선 영적 고갈이다. 말씀을 아무리 읽고 묵상하더라도 어린이 주일학교 시절부터 들었던 그 수준에서 한걸음도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빈곤한 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영적 한계를 느끼는 목사들은 설교를 윤리적 차원이나 사회봉사의 차원에서 풀어간다. 이런 고민도 없는 목회자들은 대중들이 원하는 욕망에 주파수를 맞춘다. 그게 돈이었든지, 가족이었든지, 교회이었든 상관없이 대중들의 욕망을 무조건 따라간다.
2. 한국 목회자들이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한국의 목회가 신학 없이 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대체로 심방, 교회관리, 예배인도, 심지어는 교회당 건축 같은 일에 집중되고 있는 목회 행위는 신학적 사유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요소들도 엄격한 신학적 성찰을 거쳐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작업 없이 얼마든지 작동될 수 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신학적 성찰이 없어야만 목회 현장이 훨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실정이다. 만약 ‘지성전’이라는 주제가 제기되었다고 하자. 목사나 당회원들이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엄정하게 반성하려는 자세를 취한다면 단지 기업논리에 불과한 그런 제도를 실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어디 지성전이라는 특별한 하나의 사안에만 해당되겠는가? 교회에서 거의 강요하다시피 하는 각종 헌금이나 교파분리, 개교회주의, 지나치게 세분화한 직분 제도 등등, 기독교의 본질에 합당하지 않은 요소들이 번성함으로써 결국 신학적 사유 없는 목회가 가능하게 된 토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토양은 신학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목사와 신학적이지 않은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신자 일반이 확대재생산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신학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그래야만 훨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이런 한국교회의 풍토를 좀더 엄격한 기준으로 분석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성서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심에 기독교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하나님이 중심으로 작동하는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거꾸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중들이, 그리고 그 대중들에게 영합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사이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그 모든 내용들은 ‘우상숭배’였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구약성서 모든 곳에서 가장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우상숭배가 그들의 역사에서 반복된 이유는 우상숭배와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구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쉽지 않았다기보다는 야훼 하나님 신앙이 아주 간단히 왜곡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우상숭배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였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에 유혹 당했을 까닭이 없다.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만한 내용으로 접근하는 가르침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흡사 지금의 교회가 ‘기복신앙’에 기울어 있듯이 말이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들의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뿐이라는 이런 분석은 한국교회의 큰 줄기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개인들의 신앙에도 설득력이 있다. 사회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하게 살아온 기독교인들 중에서 실제로 삶의 가치와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 나라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이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적인 진리에 마음을 열어두지 않고 자기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는 비교적 신앙적인 언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사회 안에서는 전형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 제법 많다. 평판 좋은 권사이면서 동시에 못된 시어머니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인격 수양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희망이 분명하다고 해도 때로는 이기적일 수도 있고 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삶의 방향성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곧 회심(메타노이아)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의와 자유와 기쁨이 비록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서 흔들릴 때가 순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삶에 풍요로워져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도 교회 현장과 신자들의 삶은 성서와 거리가 멀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목회 현장의 신학 부재 현상에 근거한다.

신학적 사유의 통로인 철학

여기서 좀더 솔직하게 질문하자. 목회 행위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신학에 우리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직접적인 대답은 우리가 신학을 ‘모른다’는 것이다. 바둑의 길을 모르면 바둑이 재미없듯이 신학을 모르면 신학에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읽었고, 현대신학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고 있으니까 신학을 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정보와 신학적 사유를 구분해야만 한다. 조치훈 씨가 둔 바둑의 기보 몇 편을 달달 외웠다고 해서 바둑의 길이 보이는 게 아닌 것처럼 몇 년 동안 신학에 관한 역사와 정보를 습득했다고 해서 신학을 아는 게 결코 아니다. 만약 신학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목회 현장에서 공연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영성을 고갈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대목은 말로 설명하기가 좀 어렵다. 칼 바르트, 위르겐 몰트만,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하인리히 오트, 에버하르트 융엘 등, 여러 신학자들의 책을 읽고 충분히 소화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작업 자체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학적 사유의 핵심이 아니다. 그 신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언급하려고 하는 하나님은 그런 신학 이론에 완전히 담기는 게 아니라 흡사 가을바람이 우리를 스쳐지나가듯이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여전히 신학적 체계 안에 담길 수 없는 그 하나님과 그 나라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는 것이 곧 신학적 사유의 단초이다. 도를 얻기 위해서 토굴이나 암자에서 화두를 붙들고 수행하다가 갑자기 돈오(頓悟)의 세계에 들어가듯이 신학도 역시 행위와 언어의 세계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생명의 세계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내가 어떤 초월적 신비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의 방식이든지 직관의 방식이든지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런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능하는 분야가 곧 철학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사유하려면 반드시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의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아마 어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학적 인식 안에서 해결하려는 철학은 신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그것을 인식하려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사유의 통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미 교부 시대부터 플라톤의 이데아 이념이 하나님을 형이상학적 구도에서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되었듯이 기독교 신학은 지난 2천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이런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기독교 신학의 전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개의 신학대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 이는 주로 미국 신학대학교의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디오게네스 알렌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신학생들이 철학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신학대학들이 다소 있기는 하다. 이러한 요청에 부응하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히 영어권의 지역에서 그들은 오히려 오늘날의 철학 분야가 신학으로부터 점차로 멀어져서 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로 강화되기 이전에 더욱 많은 시간을 철학 공부에 할애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달음질치고 있다. 대부분의 신학대학들에서는 교수와 교육 자원에 드는 많은 비용으로 인해 정규적인 체제에서 많은 학생들이 철학에 대한 광범위한 공부를 하기 위한 기회가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학대학원의 학생들 중에 신학대학이나 학부과정에서 하나 이상의 철학 과목을 이수한 학생은 소수이며 대부분은 거의 택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학생들이 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주 좌절하게 되는 것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꼭 필요한 선행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은 철학적인 지식이 실제로 주요한 교리 형성 체계와 신학적 저작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을 깨달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그들은 철학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결과적으로 의미심장하고 실효성 있는 신학하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채 그들 나름의 길로 내닫고 있다. (디오게네스 알렌, 정재현 역,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대한기독교서회, 4, 부분적으로 고쳐 적었음).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점거해보자. 신학의 토대가 바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가 창조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이 세상에 초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창조 행위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내재) 우리는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현실성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바로 철학이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물, 흙, 공기, 불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또는 이데아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이성에 의해서 성립된 것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해보려고도 했다. 그 어떤 주장도 결정적인 대답이 되기는 힘들지만 이 세상을 나름대로 설명해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은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다.
물론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런 철학적 사유 과정을 통해서 어떤 진리를 깨달아야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즉 복음은 고상한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철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을 통해서만 신학적 사유가 가능하고, 그 안에서만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없는 대다수의 민중들은 기독교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한 복음을 철학적으로 덧칠하는 것은 오히려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은총으로 구원받을 뿐이라는 종교개혁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대어 자연신학을 주장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 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옳은 주장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건데 신학과 철학을 혼동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론에 기대어 있으며, 철학은 오히려 이 세계의 존재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대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신학에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즉 이 세상에 대한 대답을 하나님에게서 제시하는 우리 기독교의 사유과정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론에 합당하지에 대한 검증을 철학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진리에 대한 선택은 우리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지만 그것의 타당성 여부는 철학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철학적 검토의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한 마디만 짚도록 하자. 앞에서 신학을 신학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고 했듯이 여기서 철학 공부라는 것도 단지 몇몇 철학자들의 해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세계로 돌입하는 것이다. 오랜 역사의 철학에 대한 구체적인 공부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철학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곧 철학적인 반성을 할줄 아는 사람이다. 즉 전혀 철학 공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음, 삶, 시간, 역사, 존재, 무, 시간, 공간, 우주, 종말 등등, 소위 형이상학적 질문을 실질적으로 머리와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성서와 신학도 역시 그 기초에는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사람만이 신학의 세계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신학과 철학의 근본적 사유 방식을 검토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변증해야 할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신학적 사유의 깊이를 심화하려고 한다. 이런 공부는 경우에 따라서 거의 진척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흡사 손으로 구름을 잡듯이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사유의 세계가 바로 그런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에 가느다란 햇살을 느낄 것이며, 점차 사유의 시야가 훤히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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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독교해석학 1장, 해석학과 성서 [17] 2004-06-30 8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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