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강

종교개혁의 세 가지 신학명제

 

 

종교개혁의 배경

지난 시간에 교회역사를 말씀드리면서 1517년의 종교개혁 사건을 언급했어요. 종교개혁의 신학 자체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제시한 핵심적인 신학의 세 가지 주제를 설명하겠습니다.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총),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서)입니다. 이 세 가지를 엄격하게 다루려면 순서를 다시 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냥 전체적인 흐름만 따라가려고 합니다. 루터나 칼뱅, 어거스틴, 안셀름 같은 대가들의 신학은 많은 것을 담고 있어요. 우리가 따라가질 못할 뿐이죠. 제가 자주 예로 드는 바둑만 해도 그래요. 수 하나에도 생각할 것이 정말 많거든요. 우리가 몰라서 그냥 지나가는 거죠.

1517년에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들어 있는 대자보를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에 붙였습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게 돼요. 루터의 개혁 과정을 보면 단순히 신학적이고 실증적인 요소만 있었던 게 아니라, 독일인들의 반이탈리아 정서도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결탁되어 있었다는 거죠.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만으로는 이런 것들이 성공하기 힘듭니다. 글쎄요. 이런 말이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런 방식으로 흘러왔어요. 그런 정치의 흐름까지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겠죠. 마르틴 루터보다 앞선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외쳤지만 다 실패하거든요. 정치적인 힘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시대가 받쳐 주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희생만 당할 뿐 성공하지 못합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하는 말도 있듯이,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서로 딱 맞아 떨어질 때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겠죠. 그 해가 바로 1517년입니다.

비텐베르크는 조그만 도시예요.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인데, 로마에서 볼 때는 오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볼 때 갈릴 리가 오지인 것처럼 말입니다. 16세기는 로마가 종교적으로 헤게모니를 잡고 있을 때였죠. 따라서 교황이 보기에는 비텐베르크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성당의 몇몇 사제 중의 하나로 일하던 사람이 대자보 형식으로 95개 조항의 신학적 명제를 내걸었다는 건 아주 가소로운 일이었어요. 만약에 교황청에서 마르틴 루터의 시도를 그냥 모른 척하고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지나갔다면, 오늘과 같은 개신교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는 말대로, 교황청에서 이 사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 같아요. 물론 지나간 역사에 대해 만약이라는 가정을 둔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하여튼 교황청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마르틴 루터를 종교재판에 붙였어요. 보름스 제국회의가 열리는 곳에서 종교재판을 열었습니다. 보름스(Worms)를 영어로 하면 ‘웜스’라고 읽죠. 마르틴 루터는 자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학자적인 양심으로 자기가 속해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몇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해 보려고 한 거죠. 이런 논지를 갖고 한번 신학 토론을 해보자고 한 겁니다.

그 때 마침 금속 활자가 발명되었어요. 그 덕분에 95개의 조항이 활자로 찍혀서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만약 금속 활자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 거예요. 종교개혁이 나름대로 성공한 이유는 신학적 배경이 탄탄했었고 여러 가지 사회적 배경들이 잘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독일의 기업가들, 부르주아 계급들이 막 발흥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어요. 돈과 힘 있는 상인들이 많이 나와서 발언권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이 루터를 지지했어요. 또 다른 배경으로는 독일이 이탈리아와 관계가 나빴습니다. 독일에서 거둔 헌금을 다 로마로 갖고 가는 걸 독일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반로마, 반이탈리아 정서가 만연해 있었어요. 이런 것들이 다 얼기설기 엮여서 독일을 중심으로 지지 세력이 형성되었던 거죠. 그 안에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 노선이 있었던 거고요.

루터의 신학적 노선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솔라 피데는 의로움의 문제예요. 의로워지는 게 오직 믿음으로인가, 아니면 우리의 행위도 필요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솔라 그라티아는 구원의 문제예요.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가, 아니면 인간의 업적도 필요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삶의 기준이 오직 성서냐 아니면 교회냐 하는 거예요. 양자택일 식으로 제목을 붙이는 건 좀 선동적인 건데, 강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거니까 이해해주세요.

 

솔라 피데

-믿음인가 행위인가-

왜 그 당시에 의의 문제를 생각했을까요? 의는 오늘 제가 전한 설교 본문인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하고, 포항에서 강의하는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또 구약성서 전체가 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왜 성서 기자들이 의로움의 문제에 집착했을까요? 의라고 하면 불의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의롭지 못한 세상, 왜 세상이 불의하냐고들 하잖아요? 앞서 연역적이다, 귀납적이다 라는 말도 나왔지만,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연역적인 것 같아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명제로부터 죽죽 나오니까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귀납적입니다. 세상이 불의하다는 걸 뚫어보잖아요. 도대체 왜 이렇게 살해나 강도가 많은가? 이런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다가 결국 의로 연결되었던 겁니다. 죄로 인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귀납적인 결론을 얻었던 거예요. 이것은 죄로부터 왔고 죄를 하나님과의 분리로 생각하면서, 훨씬 더 종교적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죄는 몇 가지의 불의를 행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현상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불의하게 된 근원이 뭐냐 하는 쪽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고요. 죄가 어떻게 발생했느냐? 그 죄의 원인을 인간에게 돌리기는 좀 어렵죠. 인간을 하나님이 지었으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결국 하나님의 책임이 아닐까요? 인간의 꼴이 우스운데, 그 인간을 만든 게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책임이 맞잖아요. 우리가 지능을 가진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 로봇이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일을 한다면 그걸 만든 과학자에게 책임이 있듯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누가 등장합니까? 사탄, 마귀, 뱀 등이 등장하는 거죠. 그들의 꼬임에 빠져서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과 대립하는 근원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맞서 대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강력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귀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습니다. 욥기에 봐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거든요. 그 부분을 설명하기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나 악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런 방식이 아니면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사탄 혹은 마귀의 꾐에 빠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잘 생각하세요. 제가 이런 설명을 하면서도 여러분이 이 설명을 자꾸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릴까봐 조심스러운데요. 여러분이 에덴동산에서 뱀이 유혹하는 내용을 실질적인 그림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면, 그건 성서가 말하는 근원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고대인들은 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뿐이고, 그걸 통해서 죄의 근원적인 뿌리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뱀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죠.

제자리로 돌아가서요. 의의 문제는 성서 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의로움으로 들어가는 거야말로 불의로 인해 분리된 하나님과의 원상회복이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지려고 한 거죠. 이러저러한 6백여 가지의 계명들을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의로워지기 위해서 믿음이면 되는 건지, 아니면 행위도 따라야 하는 건지 하는 문제가 바로 루터에게서 생긴 거죠.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진다는 게 사실은 손에 확 잡히지 않습니다. 제가 좀 전에 기독교 신앙은 실증이 아니라고 했는데요.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믿음을 자꾸 실증이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기독교인다운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여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엊그제 ‘뉴스엔조이’에 실린 글에서 이런 내용을 봤어요. 기독교가 세상을 좀 감동시켜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 말이 좀 그럴듯하긴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조금 모범적으로 해서 그들을 감동시키자는 거 아니겠어요? 그건 행위를 강조하는 거죠. 행위 강조는 교회 안팎에서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세련된 교회는 교양적인 설교를 하게 되는 거고요. 그런 요구는 끊임없이 기독교 2천 년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작은 부분, 즉 변죽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중심은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귀결이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게 힘든 겁니다. 믿음만이라고 하는 게 자칫하면 공염불이 되고 관념적이 되고 말장난이 될 공산이 크거든요. 따라서 그 믿음이 말장난으로 떨어지지 않고 솔라 피데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것을 인식하고 뛰어 들어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능력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칭찬받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론적 변화를 뜻합니다.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게 가장 힘들어요.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 변화는 참 어렵습니다. 그게 잘 안되니까 사람들이 행위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옥한흠 목사님이나 박영선 목사님도 기독인답게 사는 데 관심을 갖자고 말하는데요. 이것은 필요한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말이기도 합니다. 결국 율법의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죠. 이미 그분들의 논리 속에는 칭의론, 즉 ‘솔라 피데’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전제가 들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이것은 평생 동안 믿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끝나지 않는 종말론적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용어들이 역사 이해나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죠? 솔라 피데,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종말론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게 신학적 사유입니다. 신대원이나 신학석사를 졸업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을 못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옥한흠 목사님이나 박영선 목사님처럼 훌륭한 분들이 잘 가다가 조금 뒤뚱거리는 것은 신학적 토대가 충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제가 훌륭한 설교자요 목회자인 분들께 이러쿵저러쿵 한다는 게 우습긴 합니다만, 신학적 토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뿐이니 이해하세요. 그분들에게는 칭의, 성만찬, 교회, 창조, 종말, 에큐메니컬 운동 같은 것들을 종합적으로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이것은 비단 그분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신학교 전체의 문제인 것 같아요. 신학생들이 신학적 사유를 배우지 못하고 있어요. 가르치는 사람들도 못한다고 봐야겠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정보를 얻어다가 알려주는 것뿐이지, 자기 속에서 소화된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그러니 많은 신학 정보를 나열해서 알려주기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신학적인 사유를 배울 수 없는 거죠.

이 솔라 피데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지평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서 실제로 당장 의로워지는 게 아닙니다. 종말에 가능한 겁니다. 의의 문제는 실질적인 게 아니라 법적인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의롭다고 인정될 뿐이지 실증적인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실증적인 것을 요구하거든요. 실증적인 것, 포지티브한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방식으로만 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신앙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의 문제에서 루터가 솔라 피데를 강조한 것은 일종의 신앙의 화두와 같은 겁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실증적으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희망을 갖는다는 거죠. 이것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문제이고, 그 기다림의 문제가 바로 종말론적인 문제거든요. 그걸 좀 더 생각해야겠군요.

신학은 한 두 과목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을 꾸준하게 붙잡고 나가야 할 힘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 칭의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말에는 지금 당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남아 있을 겁니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행위로 나가든지, 교회를 확장시키든지 하면서 가시적으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런 걸 통해서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주관에 빠져 버리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정말 믿음의 어떤 사태 속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해요.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은 다 자기 주관성에 매여 있습니다. 결국 솔라 피데가 말하고자 하는 종말론적 지평에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는 조급증에 의해서 벌어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현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냥 희망만 갖고 기다리라는 건가요? 그게 아니죠. 종말에 일어나게 될 의로움이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았잖아요? 지금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요? 그러나 종말은 지금의 생명 형식과는 완전히 다른 거예요. 물 안에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이거든요. 알에 있다가 새가 되는 것처럼, 혹은 번데기로 있다가 누에나 나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거죠.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해도, 이건 결코 실질적인 게 아닙니다. 약속이고 미래적인 거죠. 그렇다면 지금은 맹탕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죠.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약속이고 미래이고 기다림이기도 하지만, 그 기다림이 현재 우리의 삶에 실존적으로 선취된 겁니다. 다시 말해 종말에 일어나게 될 의로움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 맥락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능력은 선교사가 되고 교회를 세우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능력과 상관없이 자기만족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건 자기만 압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성령만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이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완전한 판단은 어렵습니다. 사람이 간사하기도 하고 자기도 자신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착각하거나 자기최면에 걸리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의, 하나님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하는 상태인 의는 순전히 종말론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오늘 우리의 삶을 통치하고 지배합니다. 그게 능력이거든요.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자유와 평화입니다. 그런 것들은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해야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는 말이 있죠. 그것이야말로 능력입니다.

제가 정말 설명을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포괄적이고 역학적이고 심층적인지 좀 이해할 수 있겠죠? 솔라 피데라는 주제 하나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제가 하지 못한 이야기도 얼마나 많은데요. 사실은 믿음을 다루면서 인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믿음이란 게 인간 이해와도 연결되니까요. 인간론에도 심리학적인 인간 이해, 사회학적인 인간 이해 등 많이 있잖아요? 또한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도 말할 수 있죠. 여기까지만 해야겠네요.

 

솔라 그라티아

-은총인가 업적인가-

솔라 그라티아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의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의로워지면 하나님과 일치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곧 구원입니다. 모두 연관되는 문제예요. 그런 점에서 업적과 행위도 연관이 됩니다. 루터는 오직 은총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로마가톨릭은 은총과 함께 인간의 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어요. 가톨릭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최근에는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구원 문제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소식통을 통해서 알아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99년 10월 31일 로마가톨릭 측의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교황청 교회일치위원장)과 독일의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크라우저 감독은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예배에서,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사랑’에 의해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이 공동선언문은 각자의 전통을 수호하면서도 서로의 신앙적 지평을 넓힘으로써 일치의 틀을 마련한 것이죠. 그동안 루터교회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와 소요리문답서만을, 로마가톨릭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앙적 기초로 주장했었거든요. 이제 이 공동선언으로 인해서 지난 500년간의 종교적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초보는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모임은기독교의 미래를 위해서 좋았던 거 같아요. 한국교회도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라 스크립투라

-성서인가 교회인가-

사실 솔라 스크립투라와 교회의 문제는 로마가톨릭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무조건 우리가 다 옳은 게 아니에요. 성서가 우리 삶의 기준이라고들 말하는데요. 사실 성서를 결정한 공동체는 교회거든요. 교회가 먼저 있었느냐, 아니면 성서가 먼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뻔합니다. 교회가 먼저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게 성서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회가 더 상위개념인 거죠. 그러니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물론 우리 쪽에서도 할 말은 있어요. 역사적으로는 교회가 먼저 있었겠지만 더욱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성서가 먼저 있었다고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가르침 등이 성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서가 먼저 있었던 거예요.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성서가 더 상위다, 아니 교회가 더 상위다 하는 식의 정당성을 나름대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개신교가 로마가톨릭을 비판하거든요. 가톨릭은 교황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을 섬기는 우상 숭배 집단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사실 속으로 더 들어가서 따진다면 개신교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가톨릭에는 교황 하나지만, 개신교에는 수천, 수만의 우상이 있어요. 오직 성서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우리 개신교가 성서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까? 교회 전통, 법, 불문율, 습관 등,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로마가톨릭을 보고 우상 숭배 집단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어요? 사실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활과 빈 무덤에 대해

올라온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실증적이고 영적이며 신기한 생명 사건이라고 한다면, 왜 복음서에는 빈 무덤이 보도되고 있는 건가요? 빈 무덤은 부활의 사실과 모순되는 게 아닐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생각이 그 쪽으로 열리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강의를 들어도 꼭 말한 것만 생각하고 다른 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은 진도가 좀 늦는데 비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강의를 잘 따라오는 거라고 할 수 있죠. 사물에 대한 통찰이나 직관이 그런 쪽으로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런 질문은 저도 대답하기가 좀 힘든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제가 거리낌 없이 대답해 보겠습니다.

빈 무덤이 있었다고 하는 복음서의 보도는 어느 정도의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걸까요?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여기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우리가 가서 무덤을 직접 열어보고 시체가 없는 걸 확인했다는 방식의 역사적 사실은 아니거든요.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게 마가복음이니까 마가복음을 예로 들게요. 여인들이 안식일 후 첫날에 예수님의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빛나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그 때 무덤의 돌문이 열려져 있었다고 해요. 그런 내용들은 전설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는데 굳이 돌문이 열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부활 직후에 제자들을 만났을 때도 방문이 잠겨 있었지만 들어왔으니까요. 돌문이 열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활 현현은 가능했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돌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혹은 여성들이 올 줄 알고 미리 그들을 위해서 준비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기는 좀 힘들지 않습니까? 무덤 안에서 여자들은 천사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예수께서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왜 갈릴리였을까요? 여기에는 갈릴리 전승과 예루살렘 전승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요. 예수님의 부활 현현이 갈릴리에서 먼저 있었는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먼저 있었는가 하는 신학적인 논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갈릴리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 간의 어떤 알력이 개입된 게 아니냐는 말들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런 성서의 진술들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예수 부활의 확실성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이 빈 무덤을 확인했느냐 못했느냐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거예요. 깜빡 하고 잊어버리기 전에 짚어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서 무덤에 갔다고 했는데, 그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 날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삼일 만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어떤 주석에 보면 새벽 시간에 여성들이 향유를 준비한 것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안식일에는 향유를 살 수 없었을 테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이라고 하더라도 새벽에 물품을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전에 미리 준비된 거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논리적으로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예수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해서 성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핵심과는 무관한 겁니다. 성서 기자들에게 확실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 현현이었어요. 그렇다면 이제 역으로 가야겠죠.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면 무덤이 비어 있어야 하는 상황을 요구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것이 전설의 형식을 띠면서 빈 무덤 설화가 초기 기독교 안에 전승되어 왔고 결국에는 복음서에 들어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 신앙과 그 근본들이 너무 불확실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어떤 관점에서 보면 토대가 부실한 건 사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십자가 처형 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굴한 모습 등을 볼 때, 복음서에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히 보도되고 있는 빈 무덤이나 부활과 같은 것들이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훨씬 후대에 부활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한,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로 들어오게 된 거죠. 이 대목에서 제 말이 좀 막히는 것 같은데요. 정확한 용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이것은 흡사 동정녀 마리아의 사건과 비슷합니다. 사실 동정녀라는 게 중요했던 건 아니거든요. 그러나 가현설에 대한 반론으로서 여자의 몸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확실성을 말하기 위해서 동정녀가 들어왔던 거죠.

제가 연역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했는데, 사실 이것은 연역적이 아니라 오히려 귀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현현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역으로 찾아 올라가는 거니까요. 마리아라는 여성의 몸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놀라운 사건을 그리스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변증하기 위해서 동정녀가 들어왔듯이, 빈 무덤도 그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담보하는 토대로 도입되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꾸며서 한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거기까지는 말하기가 힘듭니다.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한 건 아니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다음에 무덤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예수님을 아리마대 요셉이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잖아요? 그것도 얼마나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고민이 많습니다. 사실 로마법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무덤에 안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이 총독을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특별한 사건인 거죠. 과연 그게 가능했을까요? 로마 총독이 법에 어긋나는데도 굳이 예외를 인정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 많이 돌아다녔고, 그런 것들을 복음서 기자들이 정리하는 과정에서 복음서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거죠.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본문이 초기 기독교 안에 이미 형성된 내용인지 아니면 성서 기자의 이야기인지를 세심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신경에 ‘빈 무덤’이라는 낱말이 나오나요?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굉장히 중요한 초기 기독교의 신조(creed)입니다. 그들의 신앙을 끌어갔던 핵심들이 담겨 있는 거니까요. 여기에 보면 핵심은 이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요. 장사했다는 말은 죽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죠. 빈 무덤에 대한 건 없어요. 그렇다면 빈 무덤 관한 것은 설화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제가 설교비평 글에서 설화나 신화라는 용어를 썼다가 류응렬 교수로부터 위험한 신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성서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서 안에 여러 문학 장르들이 있으니까, 그걸 구분하자는 거예요. 복음서 안에 여러 가지 설화들이 복잡하게, 때와 필요에 따라서 첨삭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거죠. 그 사실을 전제로 하고 빈 무덤을 읽어야 합니다.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이 부분과 관련해 중요한 점을 짚자면, 부활은 죽었다가 그냥 사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되는 거예요. 부활은 창조입니다.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하잖아요? 무로부터의 창조, 즉 크레아티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라는 말이에요. 이걸 좀 외워 두세요.

방금 질문이 들어왔는데요. 동정녀 탄생은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는 바인데 이걸 설화로 봐야하나요? 예, 그렇죠. 설화라는 걸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본질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어요. 다시 돌아갈게요.

부활은 기본적으로 창조의 문제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창조죠. 지금 살고 있는 모습으로 복귀되는 게 아닙니다. 부활 이후에도 지금의 몸으로 살기 원하세요? 부활을 이런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부활은 무로부터의 창조와 똑같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느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건 절대적인 사항이 아니며, 부활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 조건으로서, 그 당시의 글쓰기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말하면,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무덤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가서 경배도 하고 성지 순례도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무덤이 의미가 없어요. 기독교는 무덤 이후를 말하기 때문이죠. 무덤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새 생명을 기대하니까요. 그 세상이 어떤 거냐? 거기에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고, 또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다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걸로 넘겨야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참지 못해요.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계시라고 우리가 입으로 말은 해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기독교 신앙의 맥락 속으로 신자들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확인하고 싶어 해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아주 실증적인 걸 요구해요. 실증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노력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청부론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경제적인 실증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복주의도 마찬가지고요.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실증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에 하나님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무능력하다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자는 거죠. 설교조로 말한다면 그래요. 하나님 스스로 존재론적으로 통치하도록 맡겨두고 우리는 거기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 문제와 빈 무덤의 문제는 이런 정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설명이 얼마나 적합한지, 여러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기독교 신앙의 정보들을 자세하게 많이 가르치겠다는 걸 강의의 목표로 삼지 않았어요. 다만 어떤 신학적인 영성을 전하려고 한 겁니다. 사유하는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오늘 부활과 빈 무덤의 관계를 딱 부러지게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또한 여러분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신학적 영성의 맥락 안으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21 기독교가 뭐꼬 제33강 성령에 대해 2012-06-14 4243
220 기독교가 뭐꼬 제32강 삼위일체 하나님 2012-06-14 4637
219 기독교가 뭐꼬 제31강 하나님에 대한 물음 2012-06-14 3545
218 기독교가 뭐꼬 제30강 교회는 예배 공동체다 2012-06-07 3801
217 기독교가 뭐꼬 제29강 기독교 신앙과 생명 경험 2012-06-07 4278
216 기독교가 뭐꼬 제28강 헌금에 대해 2012-06-07 4713
215 기독교가 뭐꼬 제27강 기도에 대해 2012-06-07 3831
214 기독교가 뭐꼬 제26강 교회란 무엇인가 2012-06-07 6055
213 기독교가 뭐꼬 제25강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2012-05-31 5487
212 기독교가 뭐꼬 제24강 신약성서의 구조 2012-05-31 2826
211 기독교가 뭐꼬 제23강 성서해석의 문제 2012-05-31 3012
210 기독교가 뭐꼬 제22강 신약성서에 대해 2012-05-29 2841
209 기독교가 뭐꼬 제21강 기독교 신앙과 현실성 문제 2012-05-29 2920
208 기독교가 뭐꼬 제20강 광야 이야기와 예언서 2012-05-29 2596
207 기독교가 뭐꼬 제19강 출애굽 전승 [1] 2012-05-29 2980
206 여성신학 여성신학 전체 강의안 file 2012-03-14 2628
205 기독교가 뭐꼬 제19강, 모세오경 2012-02-17 3312
204 기독교가 뭐꼬 제18강, 성서 텍스트와 역사 문제 2012-02-17 2768
203 기독교가 뭐꼬 제17강, 성서란 무엇인가? 2012-02-17 3506
» 기독교가 뭐꼬 제16강, 종교개혁의 세 가지 신학명제 2012-02-17 367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