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강, 성서 텍스트와 역사 문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768 추천 수 0 2012.02.17 23:38:34

제18강

성서 텍스트와 역사 문제

 

 

안녕하세요? 어느 새 봄이 성큼 다가왔네요. 기분 좋은 주일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사는 게 재미있나요? 이런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죠. 사는 게 뭔가 하는 질문이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어려운 질문이죠. 삶이 뭐냐는 것도 우리가 따라가기 힘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둘은 좀 다릅니다. 하나는 본질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에 관한 물음이니까요. 보기에 따라서는 둘로 나뉠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보통 신앙의 차원에서 보자면 본질주의자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냐를 아는 게 중요하지,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두 개가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 경험

이번 주간은 날씨가 계속 좋았어요. 정말 이 순간에 살아 있는 제 자신을 보면 신비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할 텐데요. 도대체 삶이 뭔가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사춘기 때부터 시작되죠. 나이가 어려도 그런 생각과 대화는 가능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사춘기에 들어서면 삶에 대해 더욱 본격적으로 질문하게 되죠. 나이가 들면서 그에 대한 생각도 성숙해지는데, 끝이 없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멈추면 이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근본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점심을 먹거나 이런 저런 일로 제가 하루에 한두 번은 밖에 왔다 갔다 하는데요.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운전을 하거나 걸어갈 때, 순간적으로 ‘이게 뭘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요. 우리가 삶에 좀 밀착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우리 삶이 겉돈다고 할까요? 착 붙어 있는 것과 떨어져 있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테니스를 예로 들어 볼까요. 테니스도 해보면 저 사람이 테니스공에 붙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공을 세게 친다고 해서 붙어 있는 게 아니거든요. 보통 테니스를 칠 때 공을 안고서 치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 몸의 중심과 테니스공이 맞는 순간, 그 임팩트 되는 순간에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요. 삶도 똑 같다고 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겉돌지 않고 삶에 딱 붙어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또 설교조로 나가는데요. 겉도는 삶이란 소유 지향적이고, 업적이나 성취에 몰두하는 율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생산해내는 어떤 성과물들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몰입하는 삶이죠. 그런 삶은 늘 흔들려요. 자기 성취가 많으면 즐겁고 성취가 없으면 흔들리는 겁니다. 바람에 뒹구는 겨와 같다고 할까요?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삶은 생명이거든요. 그렇다면 생명이 뭔지를 알아야겠죠. 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하여튼 삶에 가능한 대로 붙어 있는 겁니다. 생명과 일치하는 거예요. 그런 삶은 봄날에 내리는 햇살이나 아지랑이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생명의 현상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 버리니까요. 그렇게 되면 내가 대학교수로 살든 기업가로 살든 국회의원으로 살든 혹은 시장에서 좌판을 벌여 놓고 살든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면에서 모두 똑같으니까요. 우리가 볼 때는 그런 삶의 차이가 아주 큰 것 같지만 말이에요. 그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게 영성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생명과 밀착할 수 있을까요? 이것만 붙들 수 있다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죠. 하나님 경험은 생명 경험과 똑같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려면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생명에서부터 시작해서 성령론도 다뤄야할 테니까요. 성령이 생명의 영이잖아요. 하여튼 그런 하나님 경험을 하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다 그만 둔다고 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건 아주 분명해요. 제가 간혹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요. 제가 오늘 저녁에라도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하반신 마비가 된다면, 제 생애에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겁니다. 테니스도 못 치게 되고, 서울이나 다른 곳에 강의하러 다닐 때 불편한 게 많겠죠.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결정적으로 저를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어도 생명은 다른 방식을 통해서 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게 존재론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계속 제가 ‘존재’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요. 이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썼어요.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도 했고요. 바로 그겁니다. 존재는 사람이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없는 그런 세계, 그런 능력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존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거예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자인’(Sein)이 바로 그거죠. 영어의 비(Be) 동사에 해당하는데요. 하이데거는 ‘자인’(Sein)과 ‘자이엔데’(Seiende)를 구분합니다. ‘자이엔데’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물이라고 할 수 있고, ‘자인’은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우리가 2000년대라고 하는 이 시간에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게 큰 인연이죠.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정말 감당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으며, 어떻게 범주화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와 있어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 걸 우리는 다 놓치고 살아요. 제가 단순히 자연주의자들의 자연예찬론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영성과 자연 경험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쨌든 이 봄날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비가 내려도 좋아요. 바람이 불어도 좋아요. 봄에 황사가 일어도 좋습니다. 모두 얼마나 귀한 생명 경험입니까? 제가 다른 글에도 잠깐 썼지만, 황사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해요. 우리나라 산천이 다 산성화가 되었는데 이 황사로 인해서 알칼리성으로 많이 변한다고 합니다. 노약자는 황사를 주의해야겠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이 모든 삶을 순간순간 풍성하게 누렸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말이에요. 그런 상태가 되면 월급이 좀 작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거든요. 자기 집을 마련하지 않고 전세로만 산다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사실 먹고 사는 데는 돈이 많이 들지 않거든요. 지금 20대들이 88만원 세대다 뭐다 해서 야단들이지만, 하양만 하더라도 노동자들을 찾는 현수막이 많이 붙어 있어요. 핸드폰 부품을 만드는 일인 것 같던데, 그게 2차 산업인가요? 하여튼 일자리는 있는 거잖아요? 그런 곳에서 열심히 일하면 150만원은 받지 않겠어요. 욕심 부리지 않고 사교육 많이 시키지 않으면서 부부가 같이 일한다면 살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네요. 그렇다고 지금 우리 사회의 양극화나 경제구조를 그대로 수용하라는 뜻은 아니에요. 여러 걸림돌이 있더라도 우리가 존재론적인 생명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2008년의 봄을 쓰레기처럼 버리지 말자, 황홀하게 살아 보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질문이 올라왔네요. 두 질문 모두 성서 텍스트의 해석과 관련된 거군요. 첫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47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군인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성서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왜 제사장들이 예수님께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가요?”

이 질문은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유대교 지도자들의 책임 문제인데요. 제가 지난 시간에 유대교 지도자들, 즉 제사장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초기 기독교와 별로 대립적이지 않았는데, 복음서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내용들이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질문한 분은 마태복음 26장 47절을 인용하면서 거기에는 분명히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많은 군인들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 아마 제사장들이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 돈을 주고 고용한 사병들일 겁니다. 공식 군인들이 아니라 사병이라는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잡으러 온 건 분명합니다. 공관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으니까,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보충설명을 필요하긴 합니다.

예수님 이후에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유대교가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한 번 말했지만, 사도행전만 봐도 베드로와 요한이 정기적으로 성전에 드나들면서 기도하곤 했거든요. 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제사장들에게 돌렸다면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성전에 드나들 수 있었을까요? 또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에 대한 언급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빌라도와 더불어 제사장들에게도 비슷한 무게로 돌아간다면 사도신경에도 그것이 다뤄졌겠지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편지도 마찬가지에요.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초석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책임은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거든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거죠. 우리의 죄로 인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복음서가 전하는 제사장에 대한 직간접적인 책임 추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그것에 대한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또 공부해 볼 만하다는 거죠.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어요. 복음서들도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된 겁니다. 그렇다면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삶의 자리가 있었겠죠. 그게 중요합니다. 마가복음이 있었다면 마가의 신앙 공동체가 있었던 거예요.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을 질문한 것이 마가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나 바울의 편지도 다 마찬가지예요. 막연하게 그냥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기록한 게 아니에요. 구체적인 삶의 자리가 있었어요. 그 삶의 자리에서 생겨난 구체적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전승들이 묶여서 문서가 된 겁니다. 그게 성서예요. 복음서든 서신서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해 제사장들이 상당히 깊숙하게 관여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게 정말 역사적인 사실일까요? 아니면 복음서가 놓여 있었던 삶의 자리에서 나온 해석일까요? 제가 이 자리에서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두 번째 질문을 설명하면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성서해석의 문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시험 받은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내용은 역사적인 사실인가요?” 질문하신 분은 제가 지난 2월에 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시험 받은 본문으로 설교한 걸 읽어 봤나요? 다비아 사이트의 설교 읽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했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것은 공관복음서에 다 들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말하고요. 요한복음을 제4복음서라고 합니다. 공관이라는 말이 같은 방향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영어로 ‘시놉틱’(synoptic)이라고 하던가요? 하여튼 공관복음서에 시험 받은 이야기가 다 나오는데, 조금씩 차이는 있어요. 마가복음에는 40일 동안 계속 시험을 받았다고 나오지만 시험 받은 세 가지 내용은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계속 시험을 받은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시험을 받았다고 하고 세 가지 시험받은 내용이 나와요. 그런데 세 가지의 순서가 첫 번째는 마태와 누가가 같은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바뀌어서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아예 예수의 시험에 관해 침묵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왜 복음서마다 다르게 말하고 있고 또 요한복음은 그것을 생략까지 했을까요? 여러분이 늘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좋습니다. 성서를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어떤 사연들을 알기 위해서 말이죠.

이 시험이 정말 객관적인 사실이냐고 물었는데요. 정말 사탄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걸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심리적으로 어떤 유혹이 떠오른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일까요? 이 모든 것이 다 연관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들어보기 바랍니다. 이런 문제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 등장했다는 것은 악을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거든요. 악의 문제예요. 그래서 성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만화에서 보듯이 뿔 달린 어떤 모습의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께 음성학적으로 소리를 내서 말한 걸로 생각할 수 있어요. 초등학생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성서학자 중에 슈바이처(Eduard Schweiz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가 아닙니다. 제가 오늘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쓴 주석서를 보았어요. 이 사람이 쓴 마태복음 주석서인 『다스 에방겔리움 나흐 마태우스』(Das Evangelium nach Matthäus)를 조금 참고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 가지 시험은 첫 번째로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두 번째로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세 번째로 사탄 혹은 마귀에게 절하라는 거였어요. 슈바이처의 말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시험 가운데 세 번째 것이 제일 먼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시작되었다는 말이죠. 이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 것은 좀 특색이 있어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예수님이 스스로의 해결 능력을 보여야 하는 것인 반면, 세 번째는 사탄과의 대결입니다. 사탄에게 절하라는 것은 사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요. 이게 가장 처음으로 중요하게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주제로 부각되면서 앞선 전승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런 전승들이 나오고 이런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앞서 제가 말한 대로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그것을 요구했다는 뜻이에요. 삶의 자리가 있었던 거죠. 노파심으로 말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은 전혀 없는데, 초기 기독교의 삶의 자리가 그런 이야기를 요구한 것뿐인가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연대기적으로 쭉 정리되어 기록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거든요. 또한 여러 사람들의 소문으로 남아있기도 했고요. 그런 것들이 초기 기독교의 삶의 자리에서 어떤 것들은 조금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고, 어떤 것들은 약화되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좀 더 비현실적으로 나가기도 했어요. 그래서 좀 비현실적인 것들은 거의 외경으로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초능력을 행사했다는 전승도 있었거든요.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방대하게 흩어져 있었어요. 그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신빙성이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편집이 되었던 겁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가 처해 있던 삶의 자리였어요.

이 내용을 비유적으로 설명해볼게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같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정용섭 목사가 동영상이나 다비아나 오프 모임 등을 통해서 강의를 하다가, 어디론가 떠나게 되어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세월이 지나면서 다비안들이 정용섭 목사에 대해 기억하는 점들이 있을 거예요. 그 기억들은 다 다를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기록이라도 해놓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입으로 구전되는 가운데 어떤 것은 축소되고 확대되었던 거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필요에 따라 저에 대해 기억할 겁니다. 저와 관련된 일이라도 저 역시 객관적으로 기억을 못합니다. 이해하겠죠?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같습니다. 공관복음서가 같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다른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뭔지 알죠? 수난설화입니다. 수난설화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 일으키지 말고요. 이번 주간이 수난 주간이군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일주일 동안 겪었던 일들이나 십자가 처형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피가 많은 내용입니다. 그 외 다른 것들은 공관복음서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어떤 것들은 공통으로 들어 있는데, 어떤 것들은 한 복음서에만 들어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참고적으로 더 말한다면, 이런 자료가 있다고 가정해 보죠. 신약성서에서는 그것을 Q자료라고 하는데요. 어록자료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있었던 건 아니고, 있었다고 가정만 하는 거예요. Q자료는 독일어로 ‘크벨레’(Quelle)라고 합니다. ‘원천, 샘’이란 뜻이에요. 이런 자료가 있었는데, 마가복음 기자가 여기에 플러스 알파를 해서 마가복음을 썼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기자가 마가복음과 Q자료를 포함해서 마태복음을 썼고요. 누가복음도 마태복음과 비슷하게 자료를 공유하면서 썼습니다. 그렇게 세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부분을 Q자료라고 합니다. 학자들이 공통적인 부분들을 모아 보니까 어떤 내용들이 나오더라는 거죠. 초기 기독교에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촘촘히 잘 살펴봐야 성서 안에 나오는 전승들이 과연 초기 기독교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마태복음만의 고유한 것인지, 자기가 편집한 것인지를 분석할 수 있어요.

그런 분석을 역사비평이라고 합니다. 역사비평이 성서 해석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기초가 되는 작업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완성된 텍스트를 찾아가는 거죠.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관점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 그것만 따집니다. 또 사실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도 볼 수 있고,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잖아요. 이미 설명한 대로, 히스토리와 게쉬히테(Geschichte)가 있어요. 어떤 사건들은 실증적인 히스토리이지만, 그것을 기초로 한 더 포괄적이고 함축적이고 역동적인 역사 사건이 있거든요. 그런 관점이 없다면 우리는 텍스트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게 믿어야 하는 것이지, 학문적으로 따지고 들면 되겠냐고요? 오히려 이것이 더 신앙적인 거예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시간을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부르는데요. 연대기적이고 실증적인 시간 너머에서, 그 심층에서 흐르는 시간입니다. 이 카이로스를 이해하려면 역사를 더 깊이 있게 파야 하지 않겠어요? 무턱대고 믿는다면 카이로스가 뭔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즉흥적으로 말하는 중이라서 다소 앞뒤가 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말할게요. 성서를 볼 때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했는가를 문제 삼고, 어떤 사람은 저자의 편집 의도가 무엇인지를 문제 삼습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전자에 관심이 있어요.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했다는 그 전제에 집중합니다. 그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 보다는 저자의 의도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중요하지 왜 저자가 중요하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이 텍스트가 담아내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100% 다 담아낼 수 있다면 누가 그걸 믿지 않겠어요? 이 텍스트에 나온 것들은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거니까, 전부 예수님이 말한 것으로 믿을 수 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결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광신이라면 가능해요. 또 그걸 몰라도 구원받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요. 예수를 잘 못 믿어도, 최소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모든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세세하게 정확히 알아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 돼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살면 됩니다. 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기독교가 점점 세계로부터 위축됩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구원했는데, 이 모든 세계의 주요 이슈나 담론에 대해서 기독교가 점점 대답할 말이 없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가게 되면 세상과 대립하게 돼요. 좋은 뜻의 대립이 아니라 무모하게 싸우는 것이죠.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것이나, 진화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 등이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게 되면 결국 기독교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선교적 차원에서라도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해석해야 하는데요. 성서 해석에서는 저자의 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되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받아 적었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로봇 같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영혼이잖아요. 우리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한다면,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든 그 기록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든 모두 창조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건 가능한 일이거든요. 창조론에서 볼 때 이것이 더 실용적이에요. 만일 축자영감설을 믿는다면, 마태복음 끝부분에 나오는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세요. 그런데 꼭 그런 부분은 상징으로 해석하더라고요. 우리는 마태복음 기자가 처해 있던 삶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석하려고 하는 이 본문(마 4장)의 삶의 자리는 무엇일까요? 왜 사탄에게 절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대답했을까요? 그게 핵심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모두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쉐마 이스라엘’의 내용인데요. 이 성구들은 그 당시 유대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거의 암송하고 있던 겁니다. 그 말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는 거예요. 사탄에게 절하라고 하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3절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절하고 다만 그분만 섬기라고 대답했는데요. 왜 그게 마태 공동체에 중요한 이슈가 되었을까요? 그 점을 생각해 보세요. 그걸 이해하려면 우선 기원후 60-70년대 팔레스틴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맥락을 알아야 하는데요. 우리도 지금 FTA, 주한미군, 빈부양극화 같은 상황 속에 있고, 그 상황 속에서 목사의 설교가 어떤 특징을 갖게 되잖아요. 그런 맥락 말입니다. 성서에도 정치, 사회, 경제적인 상황들이 간접적으로 들어와 있어요. 그 맥락 속에서 성서가 기록된 겁니다.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학자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나 성서 신학자들이 그런 걸 연구해요. 이미 그런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설교비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건데요. 왜 많은 설교자들이 기초적인 성서 주석을 참고하지 않는 건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설교 시간이 성서를 주석하는 시간은 아니에요. 그래도 최소한 그 정도는 알고 설교를 준비해야죠. 설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최소한 성서 주석을 거쳐서 하는 말인지 아닌지가 너무 뻔히 보이거든요. 설교자들이 상당히 게을러요. 아마 신학 저서를 읽기가 좀 지루하기도 하고, 싫기도 하겠죠. 다들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그런 책들은 그쪽으로 머리가 열리지 않으면 읽히지가 않습니다. 신학적인 훈련이 목사님들에게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껴요. 신학생 때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결과이긴 합니다. 바르트의 책을 읽어내는 신학생들도 없을 걸요. 읽으면 졸릴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해요. 번역이 되어 있어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번역서 자체가 원서보다 더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질 못해요. 그런 상태에서 목회 현장에 나가서 임상 문제로만 씨름을 할 뿐이죠. 신자들은 뭘 원하나요? 자기 집에 와서 심방하고 기도해주길 원하죠. 신학적 사유들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에게는 신학적 영성이 필요합니다. 영성은 기본적으로 신학적이어야 하고요. 이 이야기는 그만 하죠. 하여튼 최소한의 훈련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학적 영성을 요구하지도 않는 시장바닥 같은 목회 현장에 들어가니, 목사님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신학적으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아요. 다시 말합니다. 이런 신학적인 이론 자체를 강단에서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적어도 설교자라면 이런 문제들을 통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텍스트를 통해서 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창조적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마태 공동체의 메시아니즘

제가 지금 슈바이처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있는 중인데요. 마태복음 공동체에서 요구되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메시아니즘에 대한 것이었어요. 이것은 사실 복음서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메시아니즘에 대해 생각해 봤나요? 오늘 샘터교회 설교 주제가 메시아니즘이었어요. 메시아는 구원자라는 뜻인데요. 예수가 메시아냐? 구원자라면서 왜 그렇게 시시하냐? 마태 공동체가 그런 도전을 받은 겁니다.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독립 열망이 특히 강했죠. 게다가 이스라엘의 메시아 상에 의하면, 구원자는 로마를 한 칼에 날려버리고 시오니즘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왕국을 설립하는 거였어요. 실질적인 측면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세계가 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 공동체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를 대라는 거죠. 그리고 앞서 제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했는데요. 특히 60년대에 열혈당원들이 무장봉기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한 30년 쯤 지났겠죠? 이즈음에 본격적으로 반로마 무력투쟁이 아주 뜨겁게 일어났어요. 그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고, 그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이런 질문들 앞에 직면했던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대답을 해야 했을까요? 우리도 나가서 독립투쟁을 하자고 해야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신명기 6장 13절의 말대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대답했던 겁니다. 좀 엉뚱한 대답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그 대답은 투쟁과 메시아니즘에 대한 지평을 옳긴 겁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가 그걸 놓치지 않았던 거죠. 이 세계의 변혁은 우리의 투쟁으로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만 섬겨라, 그분만 경배하라는 방식으로 대답한 거예요. 사탄에게 절하라는 요구를 거절한 예수님의 이 세 번째 대답은, 곧 마태공동체가 처했던 삶의 자리에서 그들이 제시한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악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력투쟁을 통해서라도 로마를 제거하는 것이 악을 제거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도 로마에 무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죠. 열심당원(zealot)들이 두세 명 있었거든요. 그들은 예수에게서 그런 기미나 가능성들을 엿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도 그 입장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어요. 예수에게서 악을 일소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보았는데, 아무리 같이 있어도 전혀 그럴 기미가 없는 거예요. 사랑이나 인내를 이야기하고 자꾸 다른 걸 말하니까, 결국 ‘당신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도 무기력하게 있겠느냐’ 라는 생각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지배 아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였어요. 악의 문제인데요. 이것도 조직신학에서 많이 다루는 문제입니다. 악, 사탄은 이게 뭐냐가 아닙니다. 그게 뭔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우리가 그림을 그리듯이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다시 말해 성서나 기독교는 악이나 사탄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잘 들으세요. 중요한 겁니다. 모든 죄의 열매들(악, 폭력, 살인, 수군대는 것 등)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일반 설교자들에게서, 좀 세련된 설교자들에게서 보이는 잘못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 설교자들은 우리가 죄의 열매들을 우리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걸 성화라고 하는데요. 칭의는 믿음의 문제이고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노력해서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조금 좋아지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각설하고 결론만 말한다면, 칭의를 순간적인 상태로 본다면 성화는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교회의 예전으로 보자면, 세례를 통해서 의로워지는 것이고 성만찬을 통해 그것을 지속하는 거죠. 성화는 당연히 우리의 삶에 따라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게 되면 오류에 빠집니다.

악이나 폭력이 모두 윤리적인 건데요. 이런 것들은 우리의 행위를 고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더 존재론적인 힘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기독교 윤리학과 논쟁할 문제인데요. 윤리학자들에게서 가끔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것들을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고 행위론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학이 심리학, 인간행동 발달에 대한 연구, 상담학 등 사회 과학적으로 접근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악을 존재론적으로 봅니다. 악의 근원이 존재론적인 차원에 놓여있다고 보는 거죠. 그게 사탄이나 뱀으로 상징화되는 거고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주제와 연관해서 말한다면, 사탄에게 절하라고 할 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는 예수의 대답에는 이 존재론적 근원인 사탄도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좀 모순처럼 들리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부도덕한 일들에는 존재론적인 힘이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 힘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 겁니다. 그게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거기에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있어요. 그건 천천히 더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악의 근원은 존재론적이지만 그것도 이미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의 원인도 하나님이냐? 하나님에 의해서 악이 존재하게 되느냐? 그건 아니고요. 악이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차원과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의미예요. 인간보다 더 우월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악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이미 악은 꺾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악은 이미 힘을 잃었어요. 이것을 전제로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의 악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미 승리를 담보한 거죠. 선취(先取)한 겁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신학적 사유이고 영성이에요. 여러분, 이런 신학 공부가 막연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과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참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우리가 세계 안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올곧게 좌고우면하지 않으면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게 없어서 시시때때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만 섬기라는 이것이, 무력을 통해서라도 로마로부터 유대가 독립해야 한다고 하는 요구와, 예수가 메시아인 증거를 대라고 하는 도전 앞에서 초기 기독교가 제시한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 섬기라는 이 말에 많은 의미가 들어있는 거죠. 도대체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말했는데, 다른 것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사탄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귀에 떠들었느냐 아니냐는 성서 읽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마태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신앙고백이라고 한다면, 실제로 예수님의 공생애와는 연관이 없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는 오늘 말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딱 끊어서 이거다 저거다 하지 마세요. 성서 텍스트의 고백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나온 거지만 예수님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맥락을 우리가 찾아 나서야죠. 그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아요. 신학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훈련들을 충분히 해야 설교가 가능해요. 그게 충분하지 않으면 목사는 약장사가 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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