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 출애굽 전승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979 추천 수 0 2012.05.29 10:42:59

제 19강

출애굽 전승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고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족장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기록되어 있어요. 이들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문자가 있기 전에는 언어가 있었겠죠. 너무 당연한 얘기인데요. 어린아이들도 문자를 배우기 전에 엄마에게서 언어를 배웁니다. 이 언어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사건에 대한 경험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 텍스트로 존재하기 이전에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는 거죠. 출애굽이든,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나 하란을 떠난 이야기든,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그대로 내려올 수는 없잖아요. 역사 과정을 통해서 가미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면서 변형됩니다. 해석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사건은 언어를 통해서 내려옵니다. 이게 역사죠. 5천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그것과 우리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들이 사라집니다. 단지 그것에 대한 해명만이 남아 있게 되죠. 사건이 생긴 다음에는 언어가 되어 내려옵니다. 내려오면서 모든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변형이 돼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게 있는데요. 어떤 사건은 역사에 따라서 그 해석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사건의 내용도 조금씩 변하게 되겠죠.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에 이르게 되면 문자, 텍스트가 됩니다. 텍스트가 되고 나면 변하지 않아요. 문자가 경전이 되는 거죠. 구약성서가 완료된 다음에 텍스트로 굳어진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사건입니다. 이 사건까지 가려면 텍스트와 사건 사이에 뭐가 있었는지를 역추적 해야 하거든요. 이 과정까지를 설화라고 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을 해도 이해를 바랍니다. 공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두 가지 모두 필요한데요. 하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이고요. 다른 하나는 정확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는 방법입니다. 전자는 좀 세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개념 파악이거든요. 성서도 개념이고 부활도 어떤 면에서는 개념이에요. 불확실하다는 차원에서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확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차원에서 개념이라고 하는 거예요. 개념은 생각이 넓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부활에 대한 생각들이 열립니다. 부활은 고정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기 때문이죠. 계시 자체가 다 그렇습니다. 절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이 사실은 텍스트에도 해당되는데요. 그런 점에서 텍스트도 완료되거나 고정되지 않은 겁니다. 무슨 소리냐, 아브라함이 뭐했고 뭐했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건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도 개념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부활을 얼마만큼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부활의 의미가 훨씬 그 심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개념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이것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더 깊이 안다는 말입니다. 수학도 역시 개념입니다. 숫자의 개념 속으로 들어가는 게 참된 수학 공부예요. 음악도 그래요. 제 큰 딸이 바이올린을 하는데, 그 아이에게도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세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세계나 개념이나 다 통하는 이야기예요.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부활절 설교를 했는데요. 설교하는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설교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활에 대한 개념은 생명과 연관되니까, 생명을 이해해야 하고요. 생명은 시간과 연관되니까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또 이것은 영에 대한 문제와도 연관이 되거든요. 이와 같이 전반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과 유치원 아이들처럼 부활을 마술 같은 걸로 생각하는 사람과는 분명히 많은 차이가 납니다. 전반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부활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할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신학이든 하나님 이해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이런 사람의 삶에 대해 설명하는 구약 텍스트는,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본 사람이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라,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그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한참 후대에 와서 어떤 성서 기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편집한 겁니다. 전승된 이야기들이기에 설화인 거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전승과 설화는 비슷합니다. 설화라고 하면 신화처럼 근거가 없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느낌이 많을 텐데, 그냥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사건들

지난 시간에 엑서더스 이야기를 하다가 놓친 부분을 말하겠습니다. 엑서더스에 열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요. 특별히 마지막에 있었던 재앙, 이집트 백성들의 장자와 짐승의 맏배가 모두 떼죽음 당했다는 거 있잖아요? 여러분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홉 가지 재앙이 내렸는데도 바로가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마지막 재앙으로 이집트 전역에 죽음의 천사를 보냈어요. 죽음의 천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네요. 죽음을 가지고 오는데 어떻게 그냥 천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냥 성서적 표현으로는 천사가 맞겠죠. 적군과 싸울 때 싸울 힘을 주는 게 천사라고 한다면, 천사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천사는 과연 무엇일까요? 천사와 대립하는 것을 악마라고 할 수 있는데요. 천사나 악마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선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 혹은 악한 것들을 성서가 현상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악이 우연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야기하는 더 근원적인 존재가 있다는 거죠. 존재론적으로 그게 있다는 관점입니다. 선한 일들도 그것을 끌어가는 힘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성서 기자는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겁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일단 이게 성서가 보는 관점, 세계관입니다. 이걸 누가 옳다 혹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다시 돌아와서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의 천사가 가지 않았다고 해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랐던 집은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고, 그게 없었던 집은 장자가 죽고 짐승의 맏배가 떼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파라오가 깜짝 놀라서 두 손을 들고 모세를 내보내줬다는 거예요. 이게 뭘까요? 정말 사실일까요? 이런 것들을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만 접근하면 좀 곤란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위해서,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인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과연 하나님이 그렇게 했을까요? 파라오를 죽이는 거라면 또 모르죠. 파라오의 마음이 완강하다고 했던가요? 여기에서 이런 표현도 재미있는데요. 파라오가 아홉 가지 재앙을 받고, 모세의 요청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서는 것을, 출애굽기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를 완강하게 한 거라고 말합니다. 묘한 뉘앙스가 있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했다면 그 책임이 파라오에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여기에서 출애굽기 기자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 책임은 파라오에게 있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걸 성서 기자는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역사에 대한 일원론적 시각인 겁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겁니다. 천사든 악마든 모두 다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요. 지배 아래 있지만 악의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게 아니라 악마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거예요. 모순처럼 들리죠? 하나님의 통치 아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책임이라고 하니까요. 이건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종말에 가서요. 왜 그런지는 우리도 잘 몰라요. 다만 성서 기자들과 또 그것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2천 년 동안 해명해온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이 두 가지 명제, 즉 “악마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그러나 “악의 책임은 악마에게, 악을 행한 사람에게 있다.”가 양립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처럼 보이지만, 둘 다 옳은 뜻입니다. 이런 명제들이 많아요. 각각의 명제는 옳은데 서로 합쳐 놓으면 모순이 되는 명제 말입니다. 그러나 모순 속에서 이 세상의 신비를 볼 수 있어요.

신비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 자체가 신비인데요. 다 해명이 되지 않으니까요. 세상은 제가 자주 쓰는 용어입니다. 세상 앞에 서게 되면 아득해져요. 성서를 봐도 아득해지고요. 장자나 맏배가 죽는다는 이 사실은 대단히 불합리한 이야기인데, 왜 성서 기자들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부도덕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썼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아득해집니다.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런 게 한두 가지겠어요?

모순 된 명제들이 기독교 안에 있다는 말을 예로 들다가 옆으로 나갔는데요. “하나님은 유일신이다.”라는 명제도 옳고, “인간 예수도 하나님이다.”라는 명제도 옳습니다. 그런데 둘이 합쳐 놓으면 모순이에요. 이 모순을 해명하기 위한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이 삼위일체입니다. 이것은 신비죠. 하나님 존재의 신비요. 기독교는 잘 설명할 수 없고 모순이 되면 다 신비라고 말하나, 이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막연하게 해명이 안 되니까 신비라고 하고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두 가지 모두 엄연한 진리인데, 그 사이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통로가 아직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비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애굽의 맏아들을 모두 죽였다는 이야기에서처럼 적을 모두 죽인다는 이야기가 구약성서에 여러 번 나오는데요.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도 이방인들을 싹쓸이하듯이 죽이거든요. 여호수아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인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한 걸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이 되지 않은 것을 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 말은 성서가 억지를 부린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죠. 그 안에 어떤 진리를 보는 눈이 있다는 거예요. 세계를 해석하는 고유한 성서의 눈 말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성서에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역사로만 밀어붙인다면, 패권주의나 제국주의적인 생각밖에 나올 수 없어요.

엑서더스에 있었던 장자의 죽음이야기로 돌아가죠. 일단 장자가 죽은 것이 정말 사실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죽음의 천사를 보내서 죽인 게 사실일까요? 강의안에도 기록했지만, 이것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전염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위생 상태가 취약했으니까요. 유럽에서도 중세에 페스트 같은 것이 있었잖아요.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먹을거리도 가려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고지방질 음식은 안 먹었죠. 그렇게 사는 게 건강위생에 좋았거든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같은 전염병에 노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죽지 않고 이집트 사람들은 죽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은 약하지 않습니까? 그걸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고 해석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 사건들을 나중에 성서를 쓰는 일정한 역사관에 의해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거죠. 후대의 해석이에요. 이스라엘의 역사관은 신명기사관입니다. 신명기사관은 하나님의 뜻대로 잘 따르면 복을 받고 뜻대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하는 건데요. 권선징악과 비슷하긴 해도, 그건 아니에요. 권선징악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은 아주 치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은 다른 민족과 구별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과연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여러분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출애굽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설화예요. 전승입니다. 후대의 해석이죠.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출애굽 공동체라고 말하는데요. 출애굽이 하나님의 뜻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는 거예요. 자기들의 뿌리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확보해야 하니까요. 소수 민족으로 고센에서 살다가 나온 이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사명을 주신 바로 그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당연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일제시대 때 해방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많은 목사들이 설교했을 거 아니에요. 친일 인사들은 다른 말을 했겠지만,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분명히 그런 설교를 했을 거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도 그런 해석이 가미된 거예요. 애굽 탈출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거기서 벌어졌던 수많은 이야기들, 열 가지 재앙을 비롯한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들이 흐름을 타고 정리된 겁니다.

 

계시와 해석

여기에서 좀 혼란스러운 점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성서는 인간이 후대에 하나님을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구약성서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권위가 손상되는 게 아니냐고요? 예,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사람이 이 계시의 문제를 세 가지 차원이라고 설명했어요. 사건으로서의 계시, 쓰인 계시, 선포된 계시로요. 쓰인 계시는 성서, 선포된 계시는 설교,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원래 계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성서 하나죠. 이것을 바로 계시와 직결 시킬 수는 없습니다. 계시는 상당히 폭이 넓기 때문이죠. 사건이기도 하고 그것이 문자로도 기록되었고 그것이 선포된 것, 이 모든 것을 다 계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여튼 성서를 굳이 계시라고 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해석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가 문제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해석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우리가 바르게 해석을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게 바르게 드러나는 것이고 잘못 해석하면 드러나지 못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늘 우리의 해석에 의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또는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도 아니에요. 이 계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는데, 의존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예요.

구약성서의 기자들이 바로 그 일을 감당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해도 틀린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쓰인 계시만이 단독으로 계시가 아니라 성서 말씀보다 우선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 있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자는 거예요. 그게 뭐냐는 거죠. 성서는 그 많은 원래의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해석 자체가 다 옳은 것은 아니에요. 우리와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앞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이 자기들을 인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지금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거죠. 성서 기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몽땅 다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옳았던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자기 뜻을 알렸느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이에요. 그 사실을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겁니다.

여호수아 사건에서도 아간을 죽이는데요. 아간만 죽이는 게 아니라 그 자식들도 다 죽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까요? 아간이 여리고성에 들어가서 몇 벌의 외투를 개인적으로 착복했고, 그 일로 재판을 받고 나서 결국 죽게 되는데요. 아간만 죽였다고 하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가족들을 모두 다 죽이고 돌을 던져서 아골 골짜기를 만들었다는 게 정상적인 건가요? 이게 하나의 전설로 그렇게 내려오는데요. 과연 여호수아가 판단을 잘한 걸까요?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서 질문 있으면 하세요.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분쯤 남았는데요. 시간 관계상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보충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달걀을 먹었어요. 우리 교회는 달걀을 시장에서 산 게 아니라 농장에서 가져왔어요. 유정란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병아리로 부화되는 계란을 먹었으니까 우리가 부활을 제대로 기념한 것 같습니다. 달걀을 먹는 전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것부터 이야기할까요? 오늘 제 설교 제목이 ‘부활의 오늘과 내일’이었습니다. 오늘은 뭐냐? 부활의 실체를 얻지 못한 상태죠. 즉, 아직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도 그 확신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건 예수와 더불어 죽고 하나님을 향해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세례를 통해서 이미 부활했지만 부활의 실체는 아닌 거죠.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은폐성인데요. 부활의 오늘은 숨어 있는 생명입니다. 그 은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설교에서 조금 설명을 했어요. 아마도 현재 드러난 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은 나뭇가지를 예로 들었는데요. 나뭇가지가 있고 여기서 잎사귀가 난단 말입니다. 그런데 잎사귀가 나오기 전에 나뭇가지를 아무리 잘라서 실험을 해보아도 잎은 없어요. 잎이 나오기 전에는, 이것이 있기는 있는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죠. 잎이 숨어 있어요. 실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냐는 질문이 이어지는데요. 오늘은 제가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부활의 상태만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니까 그 정도로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부활의 내일은 뭐냐? 예수님은 이미 부활의 실체가 된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해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부활의 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론적인 걸로 언어가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데요. 지금 어떤 부활 생명의 개념, 세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실제로 믿고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죽기 전까지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부활은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 속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의 경험만 갖고는 설명할 수 없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그건 좀 비겁하다, 자꾸만 이 세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토대가 탄탄하지 못한 거 아니냐, 그건 변명하려는 거 아니냐고 따질지 모르겠군요. 그와 비슷하게 기독교 정통 신앙이 상당히 관념적이라서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비판하고요. 저는 그런 비판들이 기독교 신앙을 전혀 모르고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뭐가 과연 실체냐? 무엇이 정말 참된 리얼리티(reality)냐 하는 게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리얼리티가 되는 건 아니죠. 하나님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방식의 참된 리얼리티니까요.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현실, 정말 참된 것, 이런 것들을 자꾸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럼 확인하지 않고 어떻게 신앙을 확실히 알 수 있을까요? 그 이야기는 이 시간에는 그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폐성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폐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자궁 속에 들어있는 아이를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 떠 있거든요. 어머니의 영양분을 탯줄을 통해서만 받아요. 아기의 생명 방식은 그겁니다. 철저히 어머니에게만 의존해 있어요. 그 아이에게 어머니 밖의 세계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됩니다. 설명이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어요. 우리도 흡사 그런 정도로 세상을 이해하고 삽니다. 그건 분명한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도는 어머니 뱃속의 아이와 똑같은 수준이에요.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우리가 모르니까요. 빛이 왜 있는지, 사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자꾸만 겉으로 드러난 것들, 존재하는 것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요. 하이데거는 없음으로서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백 년만 지나도 우리가 이 땅에 있었는지조차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쯤 되면 우리의 몸은 지구의 원소로 다 변해 있겠죠. 그래서 허무하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의 부활 생명이 숨겨져 있다는 거예요. 내일은 종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입니다. 그날이 오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때에 가서야 뭔지를 알아요. 제가 자주 인용했던 바울의 말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압니다. 그때까지는 모든 확실성들이 유보됩니다. 오늘 제가 설명한 골로새서 3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활이죠) 우리가 영광중에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게 뭘까요?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생명이 뭔지, 하나님이 누군지, 총체적으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숨만 쉬고 있을 뿐이죠. 그 태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굉장히 화려하게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생명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느 순간에 지구가 반쪽이 날 수도 있고, 불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빙하기가 오면 얼음덩이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럼 모든 생명이 죽겠죠. 그 정도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주 토대가 약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나 마찬가지예요.

기독교 신앙은 모든 것들의 궁극적 실체가 종말에 드러나며, 예수님이 오는 그 때가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맞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독교인들이니까 우리가 당연히 맞다고 전제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요. 이게 우리가 이해하고 믿는 세계관인 거죠. 신앙은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고 종말에 모든 것이 드러나지만, 2천 년 전 예수에게서 부활의 리얼리티, 생명의 리얼리티가 미리 일어났다고 하는 세계관인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우리의 모든 운명을 건 겁니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판단할 문제예요. 그것은 계속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학자들이나 과학자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이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라고 하세요. 우리는 다만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바를 꾸준하게 구도 정진하는 자세로 알아나가면 됩니다.

우리가 믿고 변증하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종말에 드러난다는 말이 불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증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도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니까요. 지난 목요일 저녁에 말했듯이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도 모른다니까요.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도 모르고 무엇이 왜 있고 없는지도 모릅니다. 지구에 왜 현재와 같은 생명 현상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그렇게 확실하다고 하는 자연과학도 사실은 정말 작은 것을 정직하게 해명해 보려는 노력들입니다. 정말 소중한 거예요. 그러나 그런 자연과학도 코끼리의 꼬리털 하나를 붙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종말에 드러난다고 하는 말도 터무니없는 게 아니죠. 다만 이런 것들이 왜 근거가 있는지를 자연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찾아내야 합니다. 이건 신학자들의 몫이죠. 교회 현장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독교 삶에서 드러나도록 해야 하고요.

지금 제가 부활에 관해서 보충설명을 하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확실한 것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최소한의 방향만을 말했어요. 사실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뭐냐, 종말은 뭐냐,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현재 우리의 부활이 은폐되었다고 하는데 칭의와는 어떤 연관이 있느냐 하는 문제들이 전반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제가 다 말한다고 해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일부만 말합니다. 나뭇가지에 매화꽃이 어느 순간에 확 피듯이 현재는 은폐되어 있지만 종말에 가면 생명의 실체가 드러나고, 우리는 그 때를 희망하며 삽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성취하는 것들에 모든 승부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이원론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에요. 오늘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잠정적입니다. 잠정성, 이것이 전제됩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니에요. 그러나 설령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고 있는 것도 잠정적입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거예요. 대한민국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자들은 민족주의 안에 빠질 수가 없어요. 남성과 여성도 계속되는 게 아니죠. 나중에 어쩌면 인간이 다 중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절대적이지 않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거든요. 이렇게 잠정적인 것들에 생명을 걸고 그게 내 삶을 보장해줄 것처럼 사는 것은 어리석다는 이야기입니다.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이에요. 우리가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 이야기이고,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잠정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입니다.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도 그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잠정적이지 않은 게 뭐냐고요? 그게 바로 영생, 부활, 하나님 나라, 천당인 거죠.

이런 말은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는 게 아닙니다. 성서와 2천 년 기독교 신앙은 명백한, 리얼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리얼리티의 차원이 좀 다른 거죠. 우리는 종말론적이고 창조론적이고 생명 지향적이고 칭의론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겁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진화론과 맞서 싸울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진화론은 부분적으로 이 세상의 생명 현상을 바르게 설명해주는 거니까,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리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자연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있어요. 확실합니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심판자이며 그에게서 마지막에 일어나게 될 참된 생명이 선취되었다는 믿음으로, 무상하지 않고 잠정적이지 않은 생명의 알갱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고 물을 수 있겠죠.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구는 황금 면류관을 쓰고 누구는 개털 모자를 쓰는 것처럼 거기에도 상급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겁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는 세속주의, 출세 지상주의, 조금 더 나가 복지활동 등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활은, 즉 하나님의 나라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밖으로 나오듯이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생명으로 변화하는 거예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옷을 갈아입는 거죠. 그래도 막막하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고 하면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줄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세상과 생명의 세계가 신비롭죠. 막연한 신비가 아니라 굉장히 확실한 신비니까 안심하세요. 새롭게 한 주를 시작하는데 부활의 기쁨도 많이 누리세요. 하나님께 내 생명을 맡기고요. 그때 우리가 그냥 공기처럼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하나님이 준비한 평화와 기쁨과 생명일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온전한 신뢰가 필요하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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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2.05.29 10:44:34
*.185.31.7

19강이 두 개가 됐습니다.

<기독교가 뭐꼬>를 출판사에 넘기면서

1강을 뺐기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이 부분부터 교정된 내용입니다.

시간이 되는대로 앞 부분도 교정한 걸로 교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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