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강 광야 이야기와 예언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591 추천 수 0 2012.05.29 10:46:14

제 20강

광야 이야기와 예언서

 

물과 생명

저는 요즘 아파트 베란다에서 봄볕을 쬐면서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겨울에는 화초에 물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주는데요. 요즘은 이틀에 한 번 주기도 하고, 어떤 화초는 매일 아침마다 주기도 합니다. 화초마다 좀 다르더군요. 제가 거기에 맞춰서 물을 주고 있어요. 물을 줄 때마다 너무 신기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 조리 있잖아요? 물 조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볼수록 신기한 거예요. 다른 돌멩이나 모래 같은 것들은 물 조리에 넣고 아무리 뿌려도 물처럼 멋진 모습을 연출하지 못하잖아요. 그건 물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질이거든요. 어떻게 지구에 물이 있게 됐을지, 참으로 신기합니다. 제가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물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물리학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H2O라는 분자 기호는 말할 수 있겠죠. 물은 지구의 특별한 현상입니다. 그런 원소가 있다는 자체도 그렇고, 그 원소들이 그렇게 결합해서 물이 된다는 것도 그래요. 결합하는 그 현상 자체가 정말 놀랍습니다.

물을 줄 때 잎사귀들을 보게 됩니다. 큰 나무가 심겨진 화분의 잎사귀들은 다 잎이 크고 초록색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잎사귀마다 다 다르더군요. 어느 날은 큰 잎사귀가 화분 밑에 약간 마른 채로 두 세장이 떨어져 있었어요. 물을 주다가 물 조리를 옆에 내려놓고 그걸 보니까, 그 마른 낙엽에는 물이 젖지를 않더라고요. 신기하던데요. 여러분도 매번 느끼겠지만, 저는 그게 참 새롭게 느껴져요. 정말 보석 같더군요. 다이아몬드나 루비 같은 것만 보석이 아니라, 물도 보석 중에 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다 동의할 거예요. 일반적인 보석은 없어도 우리가 사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 물은 없으면 안 됩니다. 생명 메커니즘의 가장 밑바탕에 물이 있으니까요. 태양 없이 물만 있어도 원시 생명, 초보적인 생명은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물이 모든 생명의 토대입니다.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은 물이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좀 오버한다는 말을 듣더라도, 한마디 더 할게요. 제가 죽은 다음에 물이 된다고 해도 큰 아쉬움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이 평화인 것 같아요. 좀 엉뚱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부활절을 지냈는데요. 여러분도 부활 생명에 대해 생각했을 겁니다. 다음 세계에서 우리가 다 물이 되는 게 우리 미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된다고 해도 크게 잘못 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물과 비교되는 게 기분이 나쁘겠지요. 우리가 훨씬 탁월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것은 창조론과도 연관되는데요. 과연 인간이 다른 존재, 생명체는 접어두고 생명이 없는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고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이나, 인간에게만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나 책임을 주었다는 말로 그런 증거를 삼을 수는 있겠죠. 지금 제가 이런 내용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건 아니에요. 아침마다 물 조리로 물을 주다가 느끼는 바가 있어서 자연적 영성의 차원에서 말한 겁니다. 부활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 나라에 간다, 속되게 말해서 천당에 간다는 말들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연속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천당도 복지 사회가 되는 거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게 복지잖아요? 모두가 잘사는 거 말이에요. 모든 국민이 생명 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무상 교육을 받으며 정의롭게 살게 되면 복지 사회라고 할 수 있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당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세계, 그걸 복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도 복지가 극대화된 곳인가요?

부활도 사실은 실증적으로 결정된 게 아닙니다. 그 안으로 우리가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우리에게 열려지는 거죠. 세계와 우리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말을 가끔 했는데요. 그것을 낱말 뜻으로는 이해했을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이해하기는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 의미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들어왔을 겁니다. 제가 영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람들을 가르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배움에서는 배우는 사람의 눈높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비약이라는 것은 없어요. 자기가 들을 수 있을 만큼만 듣게 됩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자꾸 실증적으로만 이야기를 하니까, 계속 잘못된 그림만을 머릿속에 그리는 거예요. 부활은 생명의 궁극적 실체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부활을 계량하거나 범주화하거나 실증적으로 말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부활에 관해서 말을 안 하려고 합니다. 이게 문제예요. 부활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이 그래요.

부활이나 하나님 나라, 혹은 삼위일체 등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양극단인데요. 하나는 이런 것들을 인간학적인 구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으로 그려내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요. 그게 극단으로 가면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us)으로 빠지게 됩니다.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아시지요? 어떤 분들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과 부자가 지옥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사실적인 것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망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는 자기 무의식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대인 거죠.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알려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당연한 반응이 아니라, 자기 투사에 불과합니다. 많은 신자들은 대개 거기에 매력을 느껴요. 설교도 그런 방향으로 해주길 원해요.

또 다른 하나는 아예 이런 것을 언급조차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 혹은 우리가 부활한다는 말만 하지, 부활의 리얼리티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거예요. 이미 2천 년 동안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흐름들과 역사적 발자취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거죠. 이것도 극단이긴 한데, 양극단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둘 다 문제예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죠. 우리가 무슨 정답을 찾으려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게 하나의 과정인 거지요. 그런 과정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우리가 바르게 진리론적으로 상응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물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물이 된다면 어떨까요? 그런 시(詩)가 있어요. 우리 다시 물이 되어 만나리. 우리가 다시 물이 된다면 정말 속상할까요? 제가 지금 일반적인 자연주의적 이야기와 신학적인 이야기를 섞어서 하는 바람에 혼란스런 사람들도 있을 텐데, 여러분이 잘 구분해서 듣기 바랍니다. 우리가 물이 된다고 하면, 지금의 관점만 가지고는 그게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인격도 없고 하나님 찬양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시인들은 이미 물이 흘러가면서 소리를 내는 걸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인간이 하는 이 방식만이 하나님과 최고로 가깝게 소통하고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물이 되어보지 못했으니까 물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모를 뿐이죠. 우리는 지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우리도 피조물이고 물과 돌도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절대화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이나 우리의 설계도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겁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거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계시하시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우리의 영적 시각을 맞춰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컴퓨터 앞에 차 한 잔이 있습니까? 저는 오늘 준비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차 한 잔 마시는 걸, 보석을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액체로 된 보석을 마신다는 겁니다. 이건 자기만족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실질적으로 그래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실 다 부자인 거죠. 물은 지천에 널려 있잖아요. 얼마나 넉넉합니까? 우리가 다 부자라는 넉넉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살아도 됩니다. 지금 돈도 못 벌고 배도 고프고 애들 교육도 못 시켜서 힘들다고요? 그건 다른 문제예요. 우리가 조금씩만 노력한다면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된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것으로 충만한 기쁨이 가능합니다.

 

영적 스트레칭

다른 얘기 하나 더 할게요. 두세 주일 전에 제가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어깨가 좀 아파서요.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데 팔을 들 때 좀 불편했어요. 테니스를 치기에도 불편했습니다. 밤에 자다가 아픈 쪽 어깨로 돌아눕다 보면 통증이 심하더군요. 이 증상이 상당히 오래 됐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해요. 그 의사 선생이 하는 말은 테니스를 치다가 어느 부분이 다쳤을 텐데 그것 때문에 팔 근육을 쓰지 않는 바람에 그 부분이 더 굳었다는 겁니다. 오른쪽 어깨의 움직이는 반경이 점점 줄어드는 겁니다. 굳어지면서 근육이 점점 경직돼요. 그러다가 다른 근육도 점점 굳어지고요. 이게 악순환이 된다고 해서, 약을 받아먹었습니다. 지금은 병원에 안 갑니다.

이번에 아주 중요한 걸 배웠습니다. 아프다고 근육을 쓰지 않으면 더 나빠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파도 써야 된다는 거죠. 의사 선생의 말을 듣기 전에는 팔이 아프니까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상황이 더 나빠진 겁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식적인 선에서 내 생각대로 했다가 그런 결과가 나온 거예요. 여기에서 신앙적으로 아주 좋은 걸 배웠습니다. 영적인 스트레칭이 필요하다고요. 아파도 참고 해야 합니다. 아프긴 해도 그 다음엔 조금 더 좋아져요. 이번 근육 통증 때문에 이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는 이런 상태입니다. 근육을 안 써요. 영적인 어떤 부분을 안 씁니다. 아프니까 안 쓰는 거예요. 매번 쓰는 것만 계속 쓰고 있어요. 결국 전체적으로 유연성을 잃게 되고, 건강을 잃게 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풀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잘 쓰지 않던 것들을 영적인 스트레칭을 통해 풀어야 합니다. 영적인 스트레칭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교회 생활에서는 영적인, 혹은 신학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요. 교회 생활이 얼마나 편한지 알고 있죠? 인격적으로 잘하면 대우도 받고, 얼마든지 모범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장로도 되고요. 성경 말씀도 읽고 큐티도 하고 말이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영적인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야 해요. 그게 신학입니다. 영적인 스트레칭은 바로 신학이에요. 창조, 종말, 무죄한 자의 고난 같은 것들을 신자들은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언제 그것까지 다 생각하나, 바쁜데 그냥 교회나 열심히 다니고 성경 말씀 열심히 읽고 복 받고 성실하게 살면 되지, 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든지 혹은 신 존재 증명이라든지 칭의와 성화같은 주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거죠.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라고 합시다. 그러다 보면 쓰지 않는 근육이 굳어 버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날이 갈수록 굳습니다. 그런 식으로 평생 신앙 생활해 보세요. 죽을 때쯤 되면 아무 생각도 안 남을 겁니다. 그냥 교회 생활을 수십 년 동안 반복했던 매너리즘에 빠져서 자기암시 같은 것만 남을 거예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멀쩡해 보일 거예요.

 

만나와 메추라기

우리가 지난번에 모세오경을 말하면서 세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창조의 첫 사건인 빛에 대해서, 고향을 떠나는 족장들에 대해서, 엑서더스에 대해서요. 오늘은 광야에서 있었던 만나와 메추라기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저간의 사정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이니까요. 광야는 자연적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만을 위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성서 텍스트와 세계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좀 부족한 생각입니다. 만나는 지금도 있습니다. 만나는 어떤 식물에서 나오는 진액이 밤 동안에 굳은 거라고 합니다. 그게 햇빛이 나면 녹아버리고요. 지금도 미디안 광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거예요.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살았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면 만나가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백성들을 끌고 다녔던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만나가 있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물로 받았다는 겁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사실이고 중요한 거예요. 똑같은 자연적 현상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아까 제가 물 이야기를 했는데요. 물이 보석이에요. 오늘 저녁에 샤워하면서 물이 여러분의 몸으로 흘러가는 걸 느껴보세요. 황홀합니다. 그걸 어디에서 느낄 수 있겠어요? 지구에서만 가능한 거예요. 우리는 그런 걸 다 놓쳐버리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거든요. 머릿속이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차서 소중한 것들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로 들어올 틈이 없어요.

우리도 어렸을 때 심심풀이로 아카시아 꽃 같은 것 따먹고 했잖아요. 진달래꽃도 먹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 생활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게 참 놀라운 영성이에요. 가난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거죠. 먹을 게 많은 사람에게는 만나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을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주 실질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가난해야만 주변에 있는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다가옵니다. 외로운 사람만이 사람의 정을 깊이 느끼게 되는 거예요. 가난하다고 다 그러냐, 추해지기도 하더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이 시간에 더 길게 말하지는 않겠어요. 거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 년 동안 생존의 위기를 경험했어요. 생존이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만나를 정말 달게, 맛있게 먹은 겁니다. 참고로 히브리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만 먹고 산 것은 아닙니다. 광야를 오가는 대상들에게서 먹을 것도 좀 샀겠죠. 이집트를 탈출할 때 보석들을 많이 가져왔거든요. 그래도 그런 것만 갖고는 살아가기가 힘들었을 거예요. 광야에서 야생 토끼를 비롯해서 여러 들짐승도 잡아먹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만나가 굉장히 중요한 먹을 거리였다는 거예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만나는 그날 자기 식구들의 몫만 갖고 가야지, 내일 것까지 준비해 두면 썩었다고 해요. 실제로 만나는 보관을 못한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햇빛에 닿으면 그냥 녹아버리거든요. 바로 그 한 날의 먹을거리였어요. 놀라운 영적 통찰입니다. 생존에 딱 맞부딪쳐서 살았던 거예요. 정말 일용할 양식이니까요. 이 경험이 하나님 경험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생존의 경계선으로 가서 사는 것 말이에요.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생존은 먹을 것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의미, 절망, 허무 등,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실존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완전히 무와 유, 없는 상태와 있는 상태의 그 경계선에 늘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면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서 있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어라,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불교 개념이에요. 기독교 신앙에도 그런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면한다는 것은 끝자락에 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런 상황에 있을 때 하나님이 생존을 보장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존의 토대로 경험했던 거죠. 그것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늘 그 방향으로 나간 건 아니고, 국력을 키우거나 부강해지려고 애를 쓰다가 그런 긴장감을 놓칠 때도 많았습니다. 우상숭배로 기울어지는 거지요. 우상숭배는 뭐를 쌓아두는 겁니다. 풍년이 들어 창고에 많이 쌓아 놓고 놀고먹자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이나 아세라는 그걸 보장해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생존만 지켜줘요.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런 대목에서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을 떠올릴 텐데요. 하나님이 축복한다는 많은 약속들 말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한다는 약속도 과연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강의는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더 생각해 보세요.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례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의미예요. 원칙적으로 보면 주일 예배마다 성만찬을 해야 합니다. 죽음과 삶의 확인, 세례의 반복입니다. 피에로가 줄타기를 하듯이, 우리는 늘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겁니다. 그게 잘 안될 거예요. 우리에게는 든든한 게 많으니까요. 통장도 있고, 주식도 있고, 집도 있고, 자식도 있잖아요. 게다가 사회가 제공하는 복지 혜택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 게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런 한계가 우리에게 있기는 하지만, 다시 내버려 두고 그 경계선으로 들어가 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늘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영성이에요. 그런 영성을 가지면 세계가 새롭게 보입니다. 물이 정말 보석으로 보여요. 그렇게 살면 남편이나 아내가 새롭게 보일 겁니다. 쉽지는 않지만요.

잠시 동영상 화면의 문자로 질문이 들어왔군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구름기둥으로 인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구름기둥이 뭐냐는 질문입니다. 구름기둥은 화산 폭발이에요. 밤에는 불이고 낮에는 구름이죠. 그럼 아무 것도 아니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자연 현상을 기준으로 광야에서 나아갈 방향을 정했던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기준으로 삼은 거예요. 그런 눈이 중요합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과 유일회적인 지구 안에서의 생명 현상을 생각하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게 다른 것처럼, 화산 폭발을 보고 우리의 갈 방향을 하나님이 인도해 준다고 생각한 것은 영성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광야에서 생존 조건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생존에 대한 확신, 즉 하나님이 나의 생존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가져도 된다는 점입니다. 생존은 삶의 경계선, 가장 밑바닥이라고 했어요. 거기에 가 있으면 다른 것들은 사소해 보입니다. 그러한 영성에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대답입니다. 만약 무슨 갑작스런 사고로 제 다리 하나가 잘린다면 상당히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것 없이도 얼마든지 생존의 경계선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장애인들의 아픔을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요. 장애인에 대한 아픔을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예를 들다 보니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생명 창조와 그 경계선에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약속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인 약속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걱정은 우리가 밑바닥에, 생존의 경계선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생존에 관한 겁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존도 지켜야 합니다. 이건 아마도 복지 차원일 텐데요.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를 ‘나와 너’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로 끌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윤리적 책임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자연적인 것이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영적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예언서

구약의 두 번째 단락은 예언서입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가 있고, 후기 예언서에는 대예언서와 소예언서가 있습니다. 전기 예언서는 왕정시대에 예언자들이 어떻게 활동했는가 하는 사실을 보도하는데,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여기에 해당해요. 이 안에 가나안 땅 정복과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 등의 역사가 다 담겨 있어요.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가 왕과 귀족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는 분량에서 차이가 나는데요. 대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인데, 모두 길어요. 소예언서는 열두 권으로 된 예언서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죠.

전기 예언서는 사실상 1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요한 연대기적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나안 입성, 사사시대, 통일왕국, 분열왕국, 북이스라엘 멸망(BC 721년), 남유다 예루살렘 멸망(BC 587년), 바벨론 포로, 포로의 귀환(BC 538년),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 간 것은 한 번이 아니라 두 세 번에 걸쳐서 일어났어요. 귀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복구한 뒤로는 역사가 흐지부지하게 됩니다. 그 뒤의 이스라엘 역사를 신구약 중간기라고 하는데요. 거기에 해당하는 역사는 별로 없습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부터 계속해서 식민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히브리어를 쓰지 못했던 겁니다. 제국들의 흡수 정책에 따라 언어를 잃게 되었던 거죠. 우리나라도 일제시대가 오래 지속 되었다면 우리나라 말을 완전히 잃어 버렸을지도 몰라요. 이스라엘은 그 기간이 수백 년의 세월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팔레스틴 안에도 순수하게 이스라엘 사람만 살았던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습니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니까 그냥 넘어갑시다.

다시 정리합니다. 전기 예언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어요. 하도 많이 들어서 잘 아실 겁니다. 잘 모르면 강의안을 읽어보세요. 여기에서는 결론 부분만 말할게요. 전기 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반부에 진술되어 있는 이스라엘 역사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영토 싸움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영토 싸움을 하고 있어요. 참 기구한 운명의 민족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사십 년을 지난 뒤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시작한 싸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구약성서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냥 읽으면 정말 기독교나 구약성서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트집 잡힐 만한,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하나님이 전쟁의 신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나 아이 성 사람들을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해석학적 토대 없이 읽는다면, 구약성서는 잔인한 신의 싸움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텍스트 해석이 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죠. 그런 면에서 김용옥 선생도 조금 경솔합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 주는 건 고맙지만,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성서 해석을 한다는 게 보기가 좋지 않아요. 주석서 등 필요한 책들을 천만 원어치나 사서 1년 동안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신학이라는 게 1년 정도 바짝 공부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워낙 명석한 분이기 때문에 귀를 기울일만한 것도 많겠지만, 허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 내용이 대해서는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 시대의 영토 싸움이라는 것은 제로섬(zero-sum) 게임이거든요. 전무냐, 전체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윤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그 당시의 보편적인 윤리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전쟁터에서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마당에 무슨 윤리가 개입될 수 있겠습니까? 굳이 말을 붙이자면 성서는 메타 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했던 겁니다. 독보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이 살았던 삶이 다 고상했던 게 아니에요.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방식 중에 우리가 배우지 말아야 할 게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서 어떤 것을 이해하고 선택했을 뿐이에요. 그 선택이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는 거죠. 여리고 성을 침략한 것은 제가 보기엔 잘못된 선택인데,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한 겁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왕정이 들어선 이후로 조금 안정이 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과 예언자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영토를 중심으로 한 일곱 부족과의 갈등이라고 한다면, 왕정이 들어선 다음에는 왕과 예언자들의 갈등이라는 거예요. 왕정이 들어섰다는 말은 상비군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사들에게는 상비군이 없었습니다.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사무엘이 있습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종교권과 왕권의 알력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알 거예요. 우여곡절 끝이 왕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은 당연히 힘을 키우려고 했고요.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지요. 왕권을 무한대로 확장해 보려는 왕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하고자 하는 예언자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합니다. 그것을 통해 성서는 참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소홀히 할 때 국가가 시련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어요. 역사를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앞서 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했고,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들의 설교를 모은 거라고 했는데요. 보통 예언서라고 하면 예언을 기록한 거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역사학자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예언자들은 지나간 역사를 보고 오늘의 삶을 비판하며 앞으로 나갈 길을 제시해줬으니까요. 물론 그들은 훌륭한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예언자들만이 갖는 영적 경험 말이에요. 역사 안에서 일어난 경험입니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설교를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또 다른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렸어요. 예언자들은 설교를 하고요. 오늘날의 목사는 이 두 가지 전통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도 안 된 제가 이 두 가지를 다 하려고 하니까 힘듭니다. 옛날에는 예언자가 설교를 하고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만 하면 됐습니다. 이 제사장 쪽에는 왕족들이 많았습니다.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 흔적들이 있어요.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경험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신탁(oracle)이라고 합니다. 신이 자기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싶을 때, 신이 그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그가 그 뜻을 듣는 사건을 신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으로부터 신의 뜻이 인간에게 온다는 게 가능할까요? 신이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헤르메스가 나옵니다. 헤르메스의 역할은 제우스의 심부름꾼이었어요. 제우스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거죠. 그래서 해석학을 허뮤니틱스(hermeneutics)라고 합니다. 예언자들이 바로 헤르메스와 같은 역할을 했어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말로 번역, 해석, 통역하는 거죠. 과연 그게 뭐였을까요? 아모스 같은 사람들은 어느 날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주셨다고 외치면서 예언자로 나섰습니다. 그 당시로 돌아가 보세요. 같이 양을 치고 농사를 짓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내 말을 들어라.’ 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겠어요?

그 당시 예언자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대중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았던 거예요. 여러분은 그 당시의 예언자들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선포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의 대중 설교자들처럼 말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예언자들끼리 각축을 벌였어요. 수많은 예언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에 나타났습니다. 특히 시대가 어려울 때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언자들이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누가 사이비다, 누가 어떻다는 식으로 그 당시에도 설교비평을 하듯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청중들의 귀에 솔깃한 말만 골라서 전하는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둘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설교가 정말 하나님의 신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왜냐하면 대중들은 그것을 구분할 만한 영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거짓 예언자들은 많았습니다. 예레미야와 대립하던 하나냐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예언을 했습니다. 하나냐는 정말 자신이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게 아니면서도 그럴 듯하게 교언영색으로 대중들과 자신을 속였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좀 좋게 본다면 정말 자기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은 것처럼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르고서도 그럴 수 있어요. 동기는 순수한 거죠. 그러나 참된 예언자인 예레미야의 눈에는 그런 것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일반 사람들이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저는 민중의 의식을 깨워서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래서 민중 메시야니즘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순진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성문서

구약의 마지막 대목은 성(聖)문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로 바벨론 포로 전후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종교적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욥기, 잠언, 다니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룻기, 아가, 전도, 예레미야애가 등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사건이나 농경풍습과 관련된 설화, 시, 격언, 소설이 들어있습니다. 소설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지도 모르겠군요. 욥기는 종교적 형식으로 기록된 픽션입니다. 시간 상 이것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구약성서는 헤브라이즘의 영적 곡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부단히 인식해나갔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정신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독론적 신앙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토양이라는 점에서 구약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구약을 경전으로 삼은 것은 잘한 선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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