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강 신약성서에 대해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841 추천 수 0 2012.05.29 10:49:36

제 22강

신약성서에 대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요즘 한국은 전형적인 봄날입니다. 사이버 강의실에는 다른 나라에 있는 분들도 들어오시기 때문에 한국이라고 했어요. 공기 알맹이들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오늘 좋은 봄날을 보냈는지요? 우리는 오늘 신약성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런 공부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일단 강의 내용이 너무 일반적인 거라서 많은 분들이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을 것 같았어요. 알고 있는 이야기를 또 들으면 지루하잖아요. 그게 가장 큰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배운다고 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선생 자격이 없는 건데요. 뭘 가르쳐야겠다는 에너지가 강하게 솟아 나와야 하는데, 제게는 그게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지못해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그 내용 속으로 들어가면 재미도 있지만, 어쨌든 그래요.

 

교회 개척

한국에는 개척교회가 많습니다만 정착하는 교회는 드믑니다. 80-90년대만 하더라도 신자들이 작은 교회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된 대형교회를 찾아갑니다. 마치 시장 보는 분들이 동네 작은 슈퍼보다는 대형 마트를 찾아가는 거와 비슷합니다. 결국 작은 슈퍼나 작은 교회는 생존하기가 힘듭니다. 목회자의 영성이 이런 풍토에서는 견뎌내기 힘듭니다. 교회 개척도 어렵지만 기성 교회에 들어가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속된 표현으로 줄을 잘 타야 합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줄 잘 서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학생일 때나 졸업 후 전도사일 때나 일단 큰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지금 제가 세속적으로 말씀드리는 거니까 이해하고 들으세요. 일단 안면을 많이 터야 합니다. 교권도 있고 목회적 영향력도 있는 목사님 밑에 가서 잘 보여야 해요. 그 목사님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신학교 시절도 그래야 하지만, 졸업한 다음에 전도사나 초년병 목사가 되면 그 때 더 좋은 교회를 가야 합니다. 좋은 교회라는 말이 좀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능력 있는 교회, 서울에 잘 나가는 교회에서 학생회나 청년회를 맡는 거예요. 자신이 맡은 그 부서를 일단 부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고 그 근방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도 주목하게 되죠. 담임 목사도 그 부목사를 키워주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개입되어 있어요. 담임 목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려면 자기를 따라주는 젊은 목사들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합니다. 젊은 목사가 학생회나 청년회를 부흥시키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아요. 저도 전도사나 부목사로 있을 때 큰 교회에 좀 있었거든요. 잘했습니다.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지도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교회 프로그램 중에 재미있는 걸 운영하면서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잘 해주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그 부서가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청년회도 열정을 쏟는 만큼 성과가 나오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성과를 보이면 능력을 인정받고요. 담임목사가 키워주려고 합니다. 서로 인간관계를 잘 맺고 있다가 어느 교회에 자리가 비게 되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고, 어느 큰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할 때 파송할 목사로 뽑히게 되면, 부목사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거든요.

당신도 그렇게 하면 되지, 왜 시골에 내려가서 빌빌대고 있냐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사람이 산다는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를 이뤄내야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굉장히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사실 목사는 어디 있든지 다 똑같습니다. 존재론적으로는 목회를 크게 하든가 작게 하든가 마찬가지예요.

각자의 능력대로 교회를 키워서 인정받는 방식으로 교회가 작동되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개교회주의, 자본주의적 착상이거든요. 교회는 단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단일성 회복이 한국교회의 미래인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는 전혀 현실성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설명하겠어요. 교회의 단일성이란 말은 가톨릭교회처럼 최소한 그 안에 있는 교회들을 모두 하나로 생각하는 겁니다. 약간 다른 관점으로는 그게 보편성이기도 하죠. 그 전체가 다 하나의 교회니까요. 교구, 노회, 총회 같은 것들을 하나의 교회로 생각하고 가는 겁니다. 교회 개척을 어디에 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개교회가 정하는 게 아니라 총회 차원에서 하게 되고요.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목사들의 사례비 같은 것도 큰 틀에서 결정될 수 있거든요. 이런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정말 잘 되어 있습니다. 정말 본받아야 해요. 그런데 개신교가 그 길로 갈 수 있을까요? 똑같이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방향은 비슷하게 가야 하는데, 지금은 너무 거리가 멉니다.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그 바탕에 놓여야겠지요.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신학적인 문제예요. 교회의 본질이 뭔지, 어떻게 그냥 알 수 있겠어요? 모르죠. 한국교회 교인들의 특징은 개교회 안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한 교회에 평생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죠. 모두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걸 말하는 거예요.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그 교회에서 쫓아내도 나가지를 않아요. 아름다운 것 같지만 보기에 따라서 비극적인 현실이에요. 평생 동안 한 교회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기분에 따라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기는 게 좋다는 말은 아니에요. 사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일 뿐이지 자기 교회라는 게 없는 거잖아요.

자기 교회라는 확신은 교회가 뭔가에 대한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냥 종교적인 친목단체로만 생각하는 거죠.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중요하지만, 유럽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독일에는 입학식도 없고 졸업식도 없어요. 박사학위를 받아도 졸업식을 거창하게 하지 않습니다. 박사 모자나 가운도 없이 그냥 사무실에 가서 증서 하나 주고받는 정도예요. 제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동창회도 아마 없을 겁니다. 유럽의 다른 나라는 모르고 독일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한국에는 그런 의식이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심지어는 초등학교 반창회도 한다는군요.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데도 그런 걸 내걸더군요. 하양에서도 그런 모임들을 자주 봅니다. 띠 동갑들끼리 하는 친목 모임도 있어요. 교회도 그런 정서가 상당히 강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교회가 뭔지에 대한 이해가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허전하니까 그렇게라도 마음을 붙이고 살겠다는 건 이해가 돼요.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들 교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진량에 있는 한 교회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재미있으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샘터교회 예배처소 겸 대구성서아카데미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를 봉황 삼주아파트 단지라고 합니다. 굉장히 커요. 초등학교도 새로 하나 짓고 있어요. 거의 완공 단계에 들어가고 있고 두세 달 후면 학생들이 다닐 것 같아요. 아주 예쁜 초등학교가 들어섭니다. 이 아파트 단지 입구에 언덕길이 있는데, 그 초입에 교회당이 건축 중에 있습니다. 그걸 한 몇 주 전에야 발견했습니다. 전에는 몰랐어요. 첨탑도 있고 아주 예쁘게 짓고 있더군요. 크지도 않고 아담한 게 위치도 좋고요. 숲은 아니지만 나무도 좀 있고, 참 마음에 드는 교회당이었어요. 말하고 싶은 건 이 첨탑에 붙인 교회 이름입니다. 교회 이름이 뭐냐 하면, ‘우리들교회’예요. 진량 읍내에 있다가 이쪽으로 옮겼다는군요. 처음에는 진량교회라고 한 것 같은데 여기로 옮기면서 ‘우리들교회’로 이름을 바꾼 거예요. 교회당 앞 설렁탕집 사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교회 이름을 ‘우리들교회'라고 지었을까요? 신기했습니다.

아마 ‘우리들교회' 같은 교회 이름은 온 세계에 한국 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이런 거 말고도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이름이 많습니다. 사랑의교회도 사실 제가 보기엔 교회 이름으로는 마땅하지 않아요. 지역 이름을 따는 것은 괜찮아요. 상주교회, 봉황교회, 진량교회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우리들교회는 처음 봤습니다. 물론 좋은 뜻으로 보면 이 교회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 지역민들 전체의 교회이고, 우리 모두의 교회라는 뜻을 담고 있는 거겠죠. 그러나 그런 의미보다도 자신들의 소유의 대상으로서 교회를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비평을 하다 보니 이런 것마저도 비판적으로 보네요. 죄송합니다. 교회가 뭐냐는 생각을 하다가 교회 이름까지 생각하게 되었네요. 언제 쯤 우리는 우리들교회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향하게 될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집입니다. 교회 이름마저 우리들교회라고 짓는 것을 보면,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그 교회가 우리 교회라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거창한 신학적 논리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 능력이 있으면 됩니다. 신학은 어떻게 보면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지, 우리 머리로 하나님을 밝혀내자는 게 아니거든요. 이런 점에서 신학자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가짜 신학자들은 풍월만 읊겠죠. 그러나 어거스틴, 오리겐, 루터, 칼뱅, 바르트, 몰트만, 융엘, 오트 같은 신학자들은 영성가입니다. 분명히 영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어요. 우리에게는 그러한 신학적 토대가 너무 부실합니다. 한국교회가 정서적으로 신학 무용론에 빠져있고, 신학 폐기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우리가 교회의 미래를 향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교회에 대해 조금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목사 생활을 그만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지금 당장 목회를 그만 두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못될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한국 개신교가 우리의 영혼을, 인생 전체를 던질 만한 공동체인가 하는 겁니다. 그런 확신이 들지 않으면 참 불안하거든요. 쓸데 없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공부를 시작하죠.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차이점은 뭘까요? 그걸 저는 구원의 보편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은 유대인의 배타적 구원을 말한다면 신약은 모든 인류의 보편적 구원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 차이를 한두 가지 더 말한다면, 구약은 주로 의로움에 대해 다뤘고, 신약은 사랑, 혹은 은총에 대해 다뤘다고 할 수 있어요. 의와 은총이 늘 대립되는 건 물론 아닙니다. 의마저도 은총일 수 있어요. 사랑이 의로움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완전히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틀로 보자면 그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구약성서가 유대인이라는 민족에게 집중한다면, 신약성서는 인류 전체를 지향합니다. 구약성서는 특수성이라는 성격이, 신약성서는 보편성이라는 성격이 강한 거지요.

좀더 설명하겠어요. 구약의 구원이 주로 정치 경제적인 차원이 강하다고 한다면, 신약은 정치 경제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이건 기본적으로 메시아니즘의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론이 정치 경제와 관련이 있다면 기독교의 메시아니즘은 그걸 넘어서는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메시야니즘의 토대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손에 딱 잡히지는 않아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정치 경제 문제와 완전히 다른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것의 의가 정치 경제적으로 실현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마땅히 그런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차원은 아닙니다. 정치 경제의 문제는 일종의 복지 향상 아니겠어요? 정치나 경제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차원으로 올라가자는 거죠. 휴머니즘이에요. 이런 것들은 제가 보기에는 늘 상대적입니다.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고요.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러한 복지 향상, 휴머니즘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라는 거예요. 이게 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복지와 휴머니즘을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해도 거기에서 우리의 삶이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 말할 필요조차 없죠.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이 한 말은 옳습니다. 어거스틴은 “당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든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했거든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반면 복지와 휴머니즘은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가야 할 괜찮은 나라이고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시는 겁니다. 말장난하지 마라, 하나님이 준다고 해도 결국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어요. 노력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노력을 하면서도 노력 자체를 끊임없이 상대화해야 한다는 거죠. 여기에는 결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노력을 통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 노력을 최소한으로 상대화하고 하나님이 이루는 것에 우리의 영적인 초점을 놓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기독교의 신앙을 기다림이라고 생각해요. 재림 신앙이죠. 생명이나 온전한 구원 등은 성서나 신학이 말하고 있는 방향에서 본다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들입니다.

구약성서는 주로 의로움, 유대민족, 그들이 살았던 삶의 특수성들, 그리고 정치 경제적인 해방, 시오니즘,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세계 지배가 특징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제국주의군요. 유대적인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라는 게 모두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자기에게 두는 거 아니겠어요? 미국이 하는 일들이 다 그렇잖아요? 그걸 선전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교묘하게 하기도 하고, 힘으로 하기도 하고요. 자기의 세계관을 온 세계에 확산하려고 하는 걸 제국주의라고 한다면, 유대 민족들도 사실은 그 바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뭘 이룬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걸 기다립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온다고 믿었잖아요? 임박한 종말론을 받아들였죠. 종말론도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실현된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등으로요. 종말의 성격을 그런 식으로 해명한 거예요. 이러한 신학적 성찰이 없으면 기독교 신학은 죽은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정서나 심리가 아니에요. 저는 젊은 목사님들에게 상담 목회나 교육 목회 같은 거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건 다 정신과학, 심리과학이거든요. 기독교는 심리나 정신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에 대해 말해야 하거든요. 상담을 한다는 게 마음을 읽는다는 거 아니겠어요? 대중 설교자들의 능력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대중들의 심리를 잘 읽어요. 필요한 걸 딱딱 제공하는 거죠. 그게 설득력을 얻습니다. 한편으로는 거기에 대중들이 속는 거죠.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걸 생각하기 싫어해요. 자기 마음에 드는 걸 옳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지역감정도, 정치인들이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가에 무게를 두어야죠.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 보고자 하는 시민단체, 시민운동, 진보적인 운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성인으로서 역사 안에서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에요. 저도 그런 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게 기독교의 구원론으로 대체되면 곤란하다는 거죠.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다른 차원의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말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신약성서의 형성 과정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는 완전히 다른 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하기로 하죠. 신약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생각해 보세요. 구약성서를 공부할 때 이미 말했지만, 신약성서도 구전된 이야기라는 걸 잘 기억해 두세요. 입으로 전달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고서 제자들이 ‘우리 주님은 메시아니까 잘 적어뒀다가 후대 사람들이 이걸 보고 예수를 잘 믿게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게 아닙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어요. 모르면서 그냥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지낸 거예요. 그러다 실망해서 떠나기도 하고 남기도 한 거죠.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부터 토대가 탄탄한 게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다음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뒤에 부활 현현이 일어났어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승천 이야기들이 서로 맞물리게 되었습니다.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사건이에요. 예수님에게 일어난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현상적으로 나타났는데, 부활 현현이라고 합니다. 부활체로서 현현했다는 현상, 즉 만질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그런 현상, 그게 뭘까요? 저도 그게 알고 싶어요. 여러분도 그렇죠? 물론 그것에 대해 우리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확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활 현현을 직면한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이 복음서에 그대로 묻어나요. 그런 점에서 신약성서는 어떤 사실을 아주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학문적 문서가 아닙니다. 어떤 구원의 현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시적인 고백이자 표현이에요. 예수 부활이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떠한 현상을 경험했던 거죠.

그런데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냥 죽었다 살아난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거예요. 사실 예수님이 생물학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게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나타나지도 않았고요.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나타난 부활 현현이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시쳇말로 지금 우리가 귀신을 봤다고 하는 것보다 더한 거죠. 귀신은 그냥 두렵기만 한데, 예수님의 부활 현현은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과는 다른 생명의 궁극적 현실과의 만남이거든요. 생명의 궁극적 현실 같은 개념들을 일반 신자들은 골치 아파서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목사들도 잘 모르고, 또 그것을 해명할 생각도 하지 않죠. 기독교의 신앙 경험의 모든 것을 반드시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생명의 궁극적 현실이라는 게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생명의 궁극적 현실이라는 게 얼마나 신비롭고 놀라우며 중층적이고 종말론적인지, 그 두려움과 당혹감 속으로 일단 들어가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런 경험이 담긴 설교를 보기가 힘듭니다. 전부 예수 믿고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뿐입니다. 만날 뭐 하자는 말만 있어요. 왜 그렇게 사람 이야기는 많이 하는지, 미칠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요. 왜 그렇게 예수 믿고 이렇게 되었고 저렇게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는지, 세상살이를 조금 알고 철이 난 사람들이라면 교회에 붙어 있지를 못합니다. 저 같아도 뛰쳐나갈 것 같아요.

성서는 생물학, 물리학, 역사학 같은 것들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생명의 궁극적 현실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이자 호소예요. 자기들이 그것을 논리적으로는 해석하지 못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두서가 없더라도 말한 것입니다. 놀라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거죠. 그것을 우리가 다는 모르더라도 좀 알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싶어 하는 게 영성이에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니까요. 진리를 알게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성령에 감동받는 것이 영성이지 않습니까? 성령과의 소통과 교제 가운데 일어나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영성이라고 하는데요. 예수의 부활, 재림, 종말, 칭의, 천지 창조, 하나님의 통치, 나라 같은 이 모든 것들을 정말 알고 싶어 하는 영적인 상태는 성령이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반대죠. 그런 걸 알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 대신 뭘 알고 싶어 하나요? 믿는다는 것에 대한 자기 확신이요. 정말 큰 착각입니다. 까놓고 보면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은 뒷방 늙은이처럼 가만히 있으면 돼요. 우리만 재미있으면 그만이죠. 종교 놀이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잘하면 교회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건 신학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행위는 신학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을 죽이고 추상화한다면서, 믿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요. 무식하니까 용감한 거지요. 제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안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여태까지 들은 설교들이나 교회 가르침 속에서 생명의 깊이를 열어주는 것은 거의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판넨베르크의 설교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저로 하여금 어떤 곳으로 가도록 만들어요. 『믿음의 기쁨』(Freude des Glaubens, 2001)이라는 설교집을 한번 읽어 보세요. 저 혼자 신나서 좋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기억과 구전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부활, 승천, 생명의 깊이에 들어간 그분이 제자들에게 현현한 거죠. 그걸 경험한 사람들이 그 부활의 빛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눈이 밝아져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조금씩 알게 된 거죠. 아주 천천히 기독교의 정체성이 자리 잡게 된 겁니다. 어느 날 순식간에 조직이 만들어지고 체계가 잡힌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유월절 전 날에 잡혔다가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을 경험하고 갑자기 오순절을 경험한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그와 비슷하게 연대기가 나오고 있지만, 그것은 추정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다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로 남아 있는 게 아니죠. 구전(口傳)이에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기간은 상당히 길었습니다. 구전이라는 말은 그것이 다 기억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곁에서 사무관처럼 따라다니며 기록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기억이 뭔지 알죠? 모든 게 일일이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기억은 필요한 것만 생각나는 겁니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특별한 부분만 기억을 해요. 사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복음서에 보면 이야기가 다른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것이 전승이 되고 문서로 기록되면서 편집도 되거든요. 최종 편집자를 성서 기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가진 신학적 바탕에 의해서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신약성서의 형성이 결정적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들의 신앙에 의해서, 그들의 기억에 의해서,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거죠. 예수님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사도들에게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요. 예수님은 성서가 기록될 것이라고 예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성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산물입니다. 이 표현도 중요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역사죠. 삶의 자리가 있었다는 말이에요. 초기 기독교에서는 구전되고 전승되고 편집된 역사적 문서들이 많이 생성되었습니다. 많은 분량의 복음서와 서신들이 기록되면서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읽히기도 하고 다른 평가를 받으면서 혼란이 생기게 되죠.

학자들이 그걸 정리했습니다. 마르키온은 구약을 빼자고 주장했던 사람인데요. 이 사람은 140년경에 10편의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만으로 인스트루멘툼(instrumentum)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종의 정경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영향을 미치던 교회에서는 이 성서를 사용한 거죠. 신기하죠? 왜 마르키온은 네 복음서 중에 누가복음만을 정경으로 인정한 걸까요? 타티아노스(Tatianos)라는 사람은 160년경에 네 복음서의 차이점을 조화시킨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었는데, 이게 나중에 시리아역으로 번역되면서 그 지역의 표준 정경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무라토리단편(the Muratorian Fragment)이라고 알려진 정경이 있었는데요. 무라토리가 뭐하던 사람이죠?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제가 많은 걸 잊어버렸습니다. 하여튼 이 사람이 네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등 13편을 포함한 22편의 신약성서와, 지금의 정경에는 들어 있지 않은 베드로계시록, 헤르마스 목회서신 등을 정경으로 사용했습니다. 2세기 중엽에는 페시트라고 불리는 신약성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오늘의 신약성서가 망라되어 있고요. 2세기 후반의 라틴어역 성서인 베투스 라티나는 무라토리단편과 거의 일치하는 것들을 경전으로 갖고 있었어요. 이렇게 지역마다 사용하는 성서가 서로 달랐습니다. 그게 이상하다고요? 이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랬어요.

그래서 전체 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나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397년에 카르타고 종교회의를 열었습니다. 유명한 회의에요. 이때는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어 있었어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 있었고, 390년경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국교로 인정되죠. 이때는 로마의 강력한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단일한 성경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카르타고 종교회의가 가능했던 것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였기 때문이죠. 이때 27권의 신약문서가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정경의 기준

27권을 결정하는 기준은 두 가지였어요. 내부적인 기준으로는 그 문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고요. 외부적인 기준으로는 그 저자가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거였어요. 이 기준에 들어온 것만 신약성서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물론 복음서를 보면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마가와 누가는 사도가 아니었어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속사도였기에 인정을 받았던 겁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서 거론 되는 아주 중요한 문서들은 정경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바울행전, 헤르마스의 목자, 베드로계시록, 바나바 편지, 디다케, 베드로복음, 도마복음, 맛디아 어록, 안드레행전, 클레멘스 서신, 이그나티우스 서신, 폴리카르포스 서신 등은 그 당시에 중요한 것들이었어요. 그런데 정경 목록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신약 성서의 형성과정을 볼 때 어느 정도 영적인 가치가 있는 외경들은 오늘도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또 신약성서 27권 안에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배타적 권위가 있는 것일까요?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 397년의 결정(제3차 카르타고 종교회의)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27권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조심스런 이야기라서 제가 뭐라 말하기가 어려운데요. 마르틴 루터는 여러분도 잘 아는 대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다고 말했어요. 로마가톨릭교회에는 외경 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어쨌든 27권을 그냥 유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우리가 읽을 때 너무 폐쇄적이거나 문자적인 자세는 벗어나야 하죠. 또 하나님의 영이 성서에만 의존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서를 뛰어 넘으니까요. 폭넓은 진리론적인 자세로 신약성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서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을 비판적 성서 읽기라고 할 수 있는데, 좀 더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역사비평입니다. 역사 비평적 성서읽기. 이게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는 안 되고 있습니다. 대신 신화적 성서읽기를 하고 있어요. 성서 안의 신화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어제도 기독교 TV를 보니까 장 아무개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더라고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말하더군요. 왜 그런 걸 가지고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거 말고 성경 이야기만 해도 재미있게 부흥회를 끌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이야기를 해서 기독교 설교가 보편적 토대를 잃게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원숭이가 인간이 되어가는 걸 봤느냐고 청중들에게 질문을 하더군요. 진화론이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게 아니잖아요?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면서 성서를 해석하겠다고 나서면, 참 말리기 힘듭니다.

신화적 성서읽기가 신자들에게 먹히는 이유는 신자들이 하나님이나 성서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알고 있다는 자기에 대한 관심만 있어요. 신앙이 자꾸 자기 연민으로 빠지는 거예요. 제가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자기 연민을 자극하는 목사들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기 연민에 잘 빠져요. 그게 좋다면 할 수 없죠. 옆에서 말려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여튼 저는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자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성서의 권위를 끌어내리자는 게 아니라, 성서의 실체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자는 거죠. 그럴 때만이 우리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영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명실상부한 성령론적 성서해석이죠.

오늘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못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로 바울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쓴 바울과 기독교의 관계는 관심 있게 다뤄볼 분야라고 생각해요. 갈라디아서를 석 달 공부하면서 그 차이를 많이 알게 되었거든요. 바울이 기독교가 형성되는데 끼친 영향, 그와 대립해 있었던 예수님의 사도들, 바울과 사도들의 관계 등은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공부하려고 해요. 복음서가 하나면 되지 왜 네 편이나 되는 건지에 대해, 사도행전은 역사서가 아니라 해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한 마디씩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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