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강 성서해석의 문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008 추천 수 0 2012.05.31 00:36:12

제 23강

성서해석의 문제

 

오늘은 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낮에는 좀 더웠습니다. 오늘 대구샘터교회 교우들은 예배를 마치고 친교 식사를 한 뒤에 1시40분부터 교회 옆에 있는 숲을 단체로 산책했어요. 숲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면 과수원과 논밭이 나오는데, 그 샛길을 돌아서 저수지 끝을 가로질러 갔다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고 왔습니다. 약간 덥더군요. 겉옷도 벗고 와이셔츠만 입고 돌았습니다. 경치가 좋았어요. 복숭아 과수원을 지났는데 꽃들이 막 피려고 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팝콘이 터지는 것처럼 꽃들이 나온다고 표현하던데,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종류의 과일 꽃들이 이미 한창 피기도 했고 터지기도 했더라고요. 숲 속에 들어가니까 조그만 앵두나무 꽃이 있었어요.

여러분도 좋은 하루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이 순간이 우주의 시간 중에서 딱 한 번 주어진 겁니다. 겉으로만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비슷해요. 내년 봄이 되면 또 반복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같은 날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년의 4월 6일은 금년의 4월 6일과는 다릅니다. 날씨가 더 따뜻할 수도 있고 추울 수도 있고 비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은 날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물리학적으로 봐도 이건 아주 명확합니다. 지구가 45억 년 동안 쭉 진행되고 있으니까, 결국은 변하는 거 아니겠어요? 45억 년 후에 지구가 사라질 텐데, 나이를 먹어 늙어서 죽은 한 인간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끊임없이 늙고, 변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시간은 딱 한 번뿐입니다. 저는 오늘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끔씩 외계인들이 지구에 와서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새로울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가능하면 저도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이 지구를 경험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 정도를 말하려고 계획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요즘 숙제로 안고 있는 민중신학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늘 제 설교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나온 뒤에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제가 오늘 설교 본문으로 잡은 곳은 바로 그 다음이거든요. 오순절 성령강림부터 쭉 연관되는 이야기인 거죠. 그걸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로는, 시간이 되면 지금 우리가 신약성서를 공부하고 있으니까, 성서 형성과 역사의 신비(역사성)에 대해 짚어볼까 합니다. 이렇게 제목만 붙여도 아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민중신학에 대해

졸고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을 <기독교사상> 4월호에 기고했습니다. 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민중신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저의 실존적인 상황에서 나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속해 있는 교단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인데, 약칭 기성(基聖)이라고 합니다. 성결교는 기성과 예성(예수교 대한 성결교회)으로 나눕니다. 예성이 더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데 기성도 보수에 속합니다. 예장의 통합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기성과 예성이 갈라진 이유는 1960년 어간에 WCC에서 탈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아마 예장에서 통합과 합동이 갈라진 이유도 WCC 문제였을 겁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개하면서 제3세계 같은 곳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한국교회가 정서적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갈라졌어요.

저는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 학교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신학교를 갈 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갑니다. 그 학교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온건한지 전혀 모르고 가는 거죠. 자기가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가 추천하는 곳으로 그냥 갑니다. 제가 그때 성결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서울신학대학으로 간 거예요. 어쨌든 기성은 굉장히 보수적인 교단입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같이 활동하고 있는 목사들, 즉 대구 경북지역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목사들은 대개 좀 진보적이에요. KNCC의 인권위라고 있어요. KNCC는 WCC와 연관된 단체인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라고 합니다. 제가 거기 인권위에 속해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 목협이라는 단체도 있는데요.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의 약자입니다. 양쪽 모두 한국을 대표하는 진보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결교회 목사들 중에 이런 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거기에 들어갔느냐고요? 이런저런 연유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저의 신학적, 신앙적 정서에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들어가 활동하고 있어요. 제가 속한 교단의 뿌리는 보수적인 기성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진보적인 단체에서 활동을 했다는 말입니다.

진보적인 운동단체에 들어가 있으면 조금 실망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할까요? 이 진보 쪽에 있다는 분들이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당파성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당파성이요. 이걸 당파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계열이라고 할까요? 민주노동당에서 NL과 PD계열이 나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똘레랑스가 더 많아야 하지 않겠어요? 역사의 진보와 미래를 내다보고 일치를 내다본다면 작은 차이 정도는 극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극복하지 못하더라고요. 물론 보수적인 사람들은 더 할지도 모르죠. 한국교회에 교파가 백 몇 십 개로 갈라져 있는데, 갈라진 교파들이 거의 보수에 속해 있어요. 예장 합동측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나갑니다. 어쨌든지 제가 진보 쪽에 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인데요. 그래도 이런 문제는 극복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겁니다. 진보적이라면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로 문제들을 풀어 나가야 하는데 그런 정신들이 약하다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말만 진보지 그 중심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전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 L 목사라는 분이 있어요. 제가 잘 아는 분인데요. 한국에서도 알아주는 민주투사입니다. 지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무슨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지냈어요. 너무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진보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예를 든 거지,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런 것 자체가 결정적으로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분이 새마을금고 이사장을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새마을금고 여사무원들을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해서 인건비를 많이 절약했고, 그래서 지난 1년 동안 순수익을 많이 올렸다고 말입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 속이 좀 불편했습니다. 진보라면 늘 안에서든 밖에서든 인간의 정의, 평화,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해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거든요. 사회를 향해서는, 남을 향해서는 정의롭고 평화롭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돌려 인건비를 낮춘 것에 대해 자랑한다면 안과 밖이 다른 거잖아요. 그런 게 많습니다. 사회에서는 정의나 평화를 외치는 진보 인사이자 목사인 분들이 집에 들어가면 가부장적인 행동을 많이 하거든요. 사회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왜 집에 들어가면 아내에게 폭군처럼 굴까요. 그런 일들이 많아요. 그런 것 때문에 제가 그분들과 같이 연대를 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분들을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건 아니에요. ‘아, 그게 인간의 한계다. 그래도 좋은 뜻을 갖고 역사 진보를 위해 활동하면 좋겠지.’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중 메시아니즘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이라는 글은 저의 실존적 고백에서 나온 겁니다. 민중신학이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민중 메시아니즘이라고 하는 거예요. 민중 메시아니즘! 제 생각에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는 거죠.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그래요. 민중이 역사 진보의 주체가 과연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대한민국 민중들의 현주소거든요. 그러니까 민중은 결코 역사 진보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민중이든 그 반대의 개념으로 엘리트든 다 인간일 뿐이죠. 제가 보기에는 모두가 그냥 인간, 그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민중신학이 인간인 민중을 이상화함으로써 기독교의 메시아니즘을 세속화했다고 봅니다. 성서가 보는 인간, 즉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용서를 받아야 하고 스스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도그마가 훨씬 더 인간에 대한 바른 이해이자 아주 심층적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죄론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는 비관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본다는 면에서는 낙관론이기도 하죠. 비관론과 낙관론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인간만 본다면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아내기 힘들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민중신학을 비판한 겁니다. 왜 민중들에게 희망을 거냐고 말이죠. 민중을 의식한다거나 돕는다는 것은 그냥 목회, 하나님 나라 운동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민중신학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요.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붙이자면 민중 메시아니즘에 근거해야 논리가 성립됩니다. 민중이 주체적으로 메시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이게 과연 가능한가요? 제가 보기에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심층적인 인간이해라고 생각해요.

민중은 기회에 따라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부도덕한 대통령도 선택합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관계된 한두 가지 일만 보더라도 이 분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분이잖아요. 실증은 없어도 심증은 다 있는 거 아닙니까? 정치 이야기는 제가 할 필요가 없는데요. 그런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민중들에게 다 공범의식이 깔려 있는 겁니다. 그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또 졸부 근성도 있어요.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대중심리가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 민중들이 교회의 구성원들입니다. 제가 지금 세속적이고 물량적이고 이기적이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그런 사람들을 파렴치한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게 없어요. 다만 그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죠. 저를 포함한 이런 민중에게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나오기 힘듭니다.

민중신학과 구별되는 신학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있죠? 이게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홍정수 교수님인가요? 그분이 『베짜는 하나님』(조명문화사)을 썼는데요. 감리교신학대학은 종교다원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한국신학대학은 민중신학이 강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정통신학을 극복하자는 점에서는 양쪽 모두 비슷한 방향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이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홍정수 목사님 등이 보이는 태도와 근본적이고 보수적인 대중적 목사님들이 보이는 태도가 제가 보기엔 비슷합니다. 양쪽 다 포퓰리즘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홍정수 목사님 쪽에 있는 분들도 기독교의 정통신학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청중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닌가 하고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게 가능합니다. 민중들, 대중들, 종교 소비자가 중요합니다. 소비자가 왕입니다. 소비자 맞춤형의 기독교로 나가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겁니다. 이분들이 상당히 정통교회를 비판하지만, 그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 심리적 기제는 값싼 정통교회와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이런 방식으로 하면 열린 예배 같은 미국식의 값싼 실용주의 기독교가 얼마든지 수용될 수 있죠. 그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보수주의라고 해서 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니까요. 저는 일반적인 대중 교회를 말한 겁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극과 극 같은데, 사실 포퓰리즘이라는 점에서 똑같아요. 민중에게 눈높이를 맞추니까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걸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복음이 상품이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책도 상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담이지만 독일에서 나오는 신학 책들은 표지가 단순합니다. 단색으로 정말 촌스럽게 나옵니다. 아무래도 하나 보여드려야겠네요. 제가 번역한 판넨베르크 책인데요. 이렇게 생겼습니다. 문고판이죠. 몰트만의 책도 있는데요. 이 책 제목은 『하나님의 오심』이고, 부제는 그리스도론적 종말론이에요. 몰트만을 세계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이 『희망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입니다. 이 책은 그가 희망의 철학자인 블로흐의 책, 『희망의 원리』(열린책들)를 읽고 신학적 대안으로 쓴 거예요.

여러분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뭐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책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이에요. 마르크시즘도 종말론이거든요. 누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마르크시즘을 세속화된 기독교의 종말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향한 이야기들인데, 성서가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2천 년 동안 종말론이 중요하게 다뤄질 때도 있었고 약간 소홀히 다뤄질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종말론이 약화됩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탄탄한 체계를 가진 질서로서의 교회라면, 종말이 오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도스토예프스키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런 걸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종말론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도, 현실에서 교회가 막강해지면 종말론이 약화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종말론이 없잖아요. 있어 봐야 다미선교회가 이야기했던 휴거가 고작이죠. 그것은 시한부 종말론이기도 하고 신화적 종말론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종말론은 지금 한국교회에서 실종된 상태예요. 종말론이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이죠. 교회가 너무 강하니까요. 방금 제가 예로 든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동방정교회처럼, 재림한 예수를 쫓아 보내고 교회 자체가 재림한 예수처럼 교권을 행사하는 모습들이 한국교회에 정말 많습니다. 한국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착각이죠. 종말론은 우리가 많이 생각하고 공부해야 할 문제입니다. 신학자들이 그걸 붙들고 있어요.

대중적인 교회나 민중신학적인 교회나 양쪽 모두 그 바탕에는 민중 메시아니즘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민중신학에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그나마 그들이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양쪽 모두에게서 보이는 포퓰리즘이 문제인데요. 그래서 민중신학 동지들에게 민중을 이상화하지 말고 조금 내려놓고 기독교 정통신학, 기독교의 근본을 붙들자고 시간 있을 때마다 말합니다.

 

성서 주석

오늘 설교한 내용을 좀 짚어보겠습니다. 설교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고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베드로 설교가 나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할 때 『국제성서주석』(한국신학연구소)을 참고해요. 참고적으로 저의 설교 준비는 이런 단계를 거칩니다. 일단 교회력에 따라서 성서 본문을 찾아 읽어요. 그 다음 성서 주석을 한번 읽고 난 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어떤 전체적인 윤곽을 머릿속에 그린 다음 글을 써나가죠. 글을 쓰면서 윤곽이 바뀌기도 하고 다시 깊어지기도 합니다.

성서 주석은 설교 준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수십 년 동안 설교해온 사람이 무슨 성서 주석을 보느냐, 성서 본문만 봐도 딱 설교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성서 주석을 보지 않고도 설교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주석을 보지 않고 설교하면 더 쉽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예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죠. 제가 오늘은 강의 준비를 많이 하지 않았거든요. 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것들 중에 몇 가지를 정한 거예요. 그렇게 하면 듣는 사람과의 소통이 더 잘됩니다. 청중과 내가 만나는 지점에 들어가서 말이 곁길로 나가지 않고 거기에만 치중하면 되거든요. 설교도 그렇게 하면 사실은 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대중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아요. 아마 하더라도 한두 시간이면 끝날 겁니다. 저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설교할 수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몇 편만 하면 되잖아요.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감동적인 예화를 선택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만약 그게 번역이 돼서 신자들이 많이 안다면, 독일어 책이나 영어 책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몇 개 더 해도 되고, 동물의 세계도 좋죠. 과학 상식도 좋고요. 호기심 갈 만한 이야기를 몇 편 준비해놓고 설교하면 됩니다. 대중 설교자들이 아마 거의 그럴 거예요.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 늘 짚었던 거지만, 사실은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입담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게 젊은 목사들에게는 유혹이 되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한데요. 그렇게 해야만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 어떻게 합니까? 신자들은 설교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뻔하잖아요. 예수 잘 믿고 어떻게 하라는 건 다 아니까, 재미있게만 하라는 말이거든요. 이것도 일종의 포퓰리즘입니다. 그렇게 하면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니까 목사들이 자꾸 그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예배 방식도 점점 상품화가 되어가죠. 값싼 실용주의 쪽으로 자꾸 나가요. 목사의 영성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청중들의 책임도 아주 많습니다. 청중들을 그렇게 만든 책임이 목사에게 있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저도 목사로서 할 말은 없어요. 아무리 교회에서 바른 것을 전하더라도 청중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거든요. 결국 그 책임이 목사들에게 있기는 한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몇 몇 목사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한다고 해도 다시 주워 담기는 어렵습니다.

개신교는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로마가톨릭교회는 엎질러진 물까지는 아니에요. 거기는 전체가 하나의 큰 틀로 나가기 때문에 몇몇 신부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도 전체적으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체하면 되거든요.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면서 해결합니다. 이게 가톨릭을 흠잡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에요. 거기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다는 겁니다. 어쨌든 가톨릭은 시스템이 받쳐 주기 때문에 상처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데요. 개신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처음에 잘못한 것은 목사지만, 이미 전체가 그 방향으로 가 있기 때문에, 몇몇 사람이 새롭게 뭘 해보려고 해도 그런 사람만 골탕 먹지 실질적으로 잘 되기가 어렵습니다. 청중들이 원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요즘 제 설교를 동영상으로 올립니다. 다비아를 통해서 설교를 듣거나 읽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조심스럽게 합니다. 조심스럽다기보다 신경을 좀 쓰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면 오히려 설교가 쉬울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청중들에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강의는 청중들에게 하는 겁니다. 큰 방향만 잘 정해놓고 청중들과 호흡만 잘 맞추면 됩니다. 그러나 사실 설교는 청중을 향해서 하는 게 아니죠. 설교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성령이 하는 말을 듣고, 들은 것을 전달하는 겁니다. 시인들을 가끔 예로 들었는데요. 시인들이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시를 씁니까? 그렇게 하면 가짜 시인들이죠. 시인들은 시적인 영감에 충실합니다. 목사도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잖아요. 그 신탁이 설교를 말하는 겁니다. 신탁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청중들을 향해서 외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외침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 텍스트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해도 별 뾰족한 설교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 주석은 꼭 필요합니다. 성서 텍스트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제가 큐티식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듯이, 많은 경우에 성서 텍스트로 들어가는 작업은 하지 않고 적용에만 치중합니다. 제 말은 적용은 제발 그만 두자는 겁니다. 신자들을 성숙한 사람들로 믿고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좀 내버려두자는 거예요. 그리고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자는 거죠. 성서에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가 있거든요. 돌고래가 수영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 아름답죠. 설교자가 영적인 수영을 하고 있으면, 청중들이 그 모습을 보고 따라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죠. 어쨌든 성서 텍스트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수십 년을 설교하고 살았어도, 성서 텍스트 앞에 서면 아득합니다. 과연 성서 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하는 점이 어렵기 때문이죠. 대답이 뻔한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서 주석을 보는 겁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삶도 하나님께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그래야겠죠. 그게 영성입니다. 성령과의 소통 속에서 얻어지는 삶의 태도가 영성이거든요. 그런 태도를 일종의 구도라고 할 수 있죠. 또한 그것이 존재론적인 목회 태도이기도 하고요. 또 구원론적인 것이기도 하고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실 목사에게 청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어폐가 있어요. 목사가 청중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는데 청중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목사의 영적인 시각은 청중이 아니라 성령을 지향해야 하는 겁니다. 이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목사 스스로가 성령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에요. 이상하죠? 이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모르면서도 얼마든지 목사질 할 수 있어요. 여기 선생님들도 있을 텐데, 선생님들, 수학 선생님이면 모두 수학을 잘 아나요? 공식 몇 개 알고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제공할 뿐이죠. 물론 선생님에 따라 수준 차이가 있겠지만, 선생님이라고 해서 다 알고 하는 건 아닙니다. 사이비도 많아요. 잘 몰라도 아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이게 가능합니다. 정말 속된 표현으로 환장할 일이거든요. 신자들이 거기에 껌벅 넘어가요.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요. 성서가 말하는 몇 가지 용어들을 이야기하고 청중들의 심리나 정서에 강한 자극을 주면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목회를 하면 목사 자신이 영적으로 더 힘들어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챌 수 없어도 자기는 다 압니다. 평신도들은 설교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제 눈에는 다 보입니다. 저 사람은 설교를 알고 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말이죠. 제가 도사처럼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제가 도사여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에 보이는 거예요. 어느 정도의 수준도 안 되니까요. 그럼 설교자가 되려면 아주 고도의 신학이 필요한 거냐고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고도의 신학적 지식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자세만은 갖춰야 한다는 거죠.

 

헨헨의 사도행전 주석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고한 주석이 이겁니다. 사도행전인데요. 이 사도행전을 주석한 사람은 에른스트 헨헨(E. Haenchen)이요. 신학의 역사에서 사도행전을 주석한 책만도 수백 권입니다. 유명한 학자들이 쓴 책도 말할 수 없이 많죠. 그러나 설교 준비를 하면서 어떻게 그걸 다 읽을 수 있겠어요. 그럴 수는 없죠. 그래서 저는 주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국제성서주석』을 보는데, 저자가 여러 사람입니다. 그 중 사도행전은 두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어요. 두껍습니다. 두 권이 각각 580쪽이네요. 이런 책을 꼼꼼하게 읽는 것도 공부가 많이 됩니다. 제가 지금 읽어도 많이 배우거든요. 여기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읽어 드리려고 지금까지 뜸을 들였습니다. 오순절 사건에 대해 주석한 내용인데요. 읽어보겠습니다. 들어보세요.

 

누가의 오순절 사건 보도를 마치 그리스도교 선교의 시작을 사실 그대로 전달해주는 기록영화처럼 보려고 한다면, 누가의 이 보도는 오해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 보도에 함축되어 있는 본질적인 신학적인 진술에만 관심을 국한시켜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임재하여 그들을 다스리며 이끌어 나가는 성령은 그들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다. 그리고 그 성령은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초월한다는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대로 바람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면서 사람들이 방언을 했다는 이야기예요. 그러고 나서 곧 이어 베드로가 예루살렘 저잣거리에 나가 설교를 하는데요. 헨헨은 이런 것들을 초기 기독교 선교의 기록영화처럼 생각한다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보도를 오해하는 거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많은 경우에 설교자들은 이것을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런 보도를 사실인양 전제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될 수 있는 일처럼 강요하거든요. 그래서 바람 소리나 불을 보게 하고 방언을 하게 합니다. 저잣거리에 나가서 전도나 선교도 하게 하죠. 성서에 나와 있는 일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신앙을 요구하는 거죠.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이게 성서 텍스트를 오해하는 데서 생기는 가장 큰 문제들입니다. 사실 이것만이 아니에요. 구약으로 가면 더 많은 문제들이 있어요. 성서에 나온 것을 다 사실처럼 말하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세계관에서 모순이랄까, 혹은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듣는 말과 세상에 나가서 듣는 보편적인 진리가 상반되니까요. 물론 부분적으로는 상반될 수 있겠지만, 사실 전반적으로는 상반될 게 없거든요.

오늘 헨헨이 지적한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렸습니다. 성서의 내용은 기록영화가 아니라 신학적 진술이라는 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과연 2천 년 전에, 정확하게 기원후 80-85년 사이에 이미 유대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바울도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 이방 기독교가 세계 교회사에 주류로 등장합니다. 그 때는 지난 시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렇게 이방 기독교가 중심이 된 그 때에 누가라는 역사학자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까요? 바로 그 신학적 진술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평신도들도 신학 공부가 필요해요. 고도의 신학적 훈련이 아니라 신학적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 그 영성을 이해하고 배우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없이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만 받아들이고, 믿기 힘들어도 믿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 속에 빠지는 것을 사람들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에요. 이것은 심리학입니다. 오늘 여기 인용한 글에서도 나오죠. 성령은 우리의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을 심리 작용으로 안다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격적 존재예요.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신격입니다. 페르소나(persona)에요. 그분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생명의 힘, 진리의 힘, 종말론적인 힘이거든요. 그런데 자꾸만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령을 자기 내부에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리나 정서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요. 실컷 울면서 기도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죠? 그건 교회에 나와서 하지 않아도 가능해요. 제가 설교비평에서 다룬 분들이 서른여섯 분인데요, 정통 교회에서는 두 분이 질적으로 가장 나쁜 설교를 하더군요. 연세중앙교회의 윤석전 목사님과 부산 수영로교회의 정필도 목사님이었어요. 그분들의 설교는 폭력적입니다. 우리의 영성을 오히려 파괴하는 힘이 강해요. 성령과 악령은 제가 보기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제가 이렇게 실명을 거론하면서 경솔하게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다비아에서 오랫동안 대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해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하도 그런 설교를 듣고 속이 상해서 그래요. 그런 분들이 주관하는 집회에 자기가 담당하는 학생들을 끌고 탐방 다니는 전도사들을 보는 것도 기가 막혔고요.

신학적인 마인드는 전혀 없이 그냥 성경 말씀만 읽고는 믿어지지 않으니까,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 확신만 생기면 그만이죠. 여러분, 자기 확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억지로 믿을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은 죽을 때까지 불신 혹은 불안이 따라옵니다. 그걸 모조리 다 없애버리고 완전히 믿겠다고 하면, 광신이에요. 여러분 속에서 나오는 의심이나 회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의심되는 게 있으면 물어봐야 하잖아요? 그런 의심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내 운명을 맡긴다고 하는 기본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면 됩니다. 뒷일은 그분이 알아서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생명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있거든요. 죽을 때까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게 신학인데, 한국교회들은 그게 두려우니까, 아예 그쪽으로 발 디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성서형성과 역사의 신비는 다음에 하죠. 시간이 다 됐습니다.

 

국제성서주석

질문이 올라왔네요. 질문하신 분은 신학을 전공한 분 같군요. “『국제성서주석』을 읽어 보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읽으면 좋을까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칼 바르트의 책을 읽으면 손에 잡히나요? 아마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아마추어 6, 7급의 바둑을 두는 사람이 프로 기사가 두는 바둑을 보면 잘 이해를 못합니다. 옆에서 누가 다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합니다. 『국제성서주석』은 바둑으로 치면 최고수들의 바둑 시합입니다. 우리가 프로 기사의 수를 이해할 수 없으면 아무리 봐도 실력은 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려고 신학교에 가는 겁니다. 공부하는 거죠. 신학교를 잘 나왔으면, 성실하게 공부했으면, 그리고 좋은 선생을 만나서 그런 훈련을 충분히 받았으면, 역사비평 등 인문학적 훈련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게 되죠. 그런데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종말론을 이해하겠어요? 종말론이 이야기하는 이 세계에 대한 해석들을 전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신학 책을 읽으면 진짜 안 들어오는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신학 공부를 해야 해요. 그것도 꾸준하게 말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칼뱅 주석이 어떠냐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좋습니다. 바르트 주석도 마찬가지고요. 그 때는 아직까지 역사비평적인 성서 주석이 연구되기 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더 좋아요. 역사비평 이전의 작품들이니까요. 그들은 역사비평을 거치지 않아도 근원을 뚫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정말 좋은 책들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칼뱅과 바르트 책을 읽어도 놓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명제가 여기에도 해당되는 거죠. 거기에 이르는 뾰족한 길, 왕도는 따로 없습니다. 바둑도 5급, 4급, 순서대로 올라가듯이, 여기에도 비약은 없어요. 등산할 때도 마찬가지죠. 한꺼번에 정상은 못 올라갑니다. 어디 쯤 올라가면 그 다음이 보이죠. 차근차근 올라가야 하는 것과 똑같아요. 사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도 그렇고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와 같은 영성이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당장 생기겠어요? 아닙니다.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큼 그런 영성이 생기는 거예요. 설교 뒷부분에도 썼지만, 성만찬과 세례 같은 것은 생명과 죽음의 궁극적 문제거든요. 우리가 일상에서 이것을 이해하는 것만큼 세례 의미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틀림없어요.

한 주간도 잘 보내세요. 오늘은 마음이 가뿐합니다. 왜 그런지 알죠? 매주 월요일 포항 와이에서 하는 갈라디아서 성경공부를 지난주에 마쳤거든요. 이제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해방이에요. 대신 이제 다른 걸 좀 해야겠습니다. 제 설교집은 5월말 쯤 나올 겁니다. 열심히 교정보는 분들이 있어요. 또 몇 가지 책으로 내야할 원고들이 있어요.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그것들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오늘 편히 주무십시오. 행복하고 편안한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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