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강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5486 추천 수 0 2012.05.31 00:39:15

제 25강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오늘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기적 문제에요. 성서에 나와 있는 초자연적 기적과 우리 신앙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가 꼭 이성적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문제를 짚도록 하겠고요. 둘째는 기도 문제입니다. 중보기도에 대한 건데요. 제가 관상기도에 대해 좀 부정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는데, 관상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충 설명을 해달라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오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실은 한 주제를 정하고 해도 말할 분량이 정확하게 결정되는 건 아니거든요. 얼마큼 펼치고 얼마큼 깊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기적 이야기 하나만 해도 한 시간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기적에 관해서 다루는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대강 제 서재를 둘러봤는데, 이사한 다음에 책장을 다 정리하지 못해서 눈에 들오지 않네요. 요즘 책 찾는 일이 점점 귀찮아져서요. 2007년 5월에 하양에서 이쪽 진량으로 교회를 옮겼으니까, 벌써 꽤 많이 지났거든요. 그때 제 연구실도 같이 옮겼습니다. 하양에서 있을 때는 나름대로 분류를 해놓았어요. 성서신학, 영성에 관한 것, 조직신학, 바르트, 몰트만 등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어서 제가 필요한 책을 손쉽게 골라낼 수 있었는데요. 이쪽으로 오면서 이삿짐센터에 맡겼는데, 그 때 많이 헝클어졌어요. 그래서 기적에 관한 책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못 찾고 왔거든요. 나중에 찾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쩌면 다비아 사이트 어느 메뉴에 들어가도 있을지도 몰라요. 검색창에서 추천도서를 치면 각 분야별로 괜찮은 책들을 올려놓았을 겁니다. 그건 아주 일부인데요. 제가 직접 읽고 확인된 것만 올려놓았으니, 그 책들은 안심하고 읽어도 될 겁니다.

 

성서에 나타난 기적 문제

질문하신 분이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저의 설명을 대체적으로는 따라갈 수 있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불기둥과 구름기둥 같은 것들은 그 당시에 화산폭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겠다고 말이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해석하기가 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두 가지를 들었는데요.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언젠가 이야기한 적도 있고, 제가 글로도 썼으니까 찾아보세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사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설명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의 보도가 사실은 자연적인 사건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게 제 관점인데요. 예를 들면 만나와 메추라기의 사건에서 메추라기는 그 당시의 철새들이고, 만나는 지금도 미디안 광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꽃 씨앗이라는 거죠. 그런 자연적 현상을 그 당시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이해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서 기자들이 잘못했다는 건가요? 그런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자연적 현상 앞에서, 일반적인 먹을거리를 앞에 놓고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흘려보낸 것을 유대인들은 광야생활을 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허락한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이 중요하다는 거죠. 영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경이로움,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시인이고 예술가이고 영성가이고 신비주의자입니다. 우리는 놓쳐버리고 사는 게 분명해요. 그러나 성서 기자들은 일상적이었던 만나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거예요. 그런 점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는 상당 분량의 성서 텍스트들은 자연적인 현상이었다고 본 거죠.

성서에는 일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기적들도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 같은 것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죠. 물론 지금 남해인가, 서해안에서는 만월이 될 때 바다가 갈라진다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홍해 사건은 갈대 바다, 늪지대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걸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큰 능력으로 갈랐다고 하는 것은 성서 기자의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제가 이 문제를 다 정리를 해서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이 두서가 없을 것 같은데, 이해해 주세요. 하여튼 성서에 나와 있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여러 유형이라는 점을 말하는 겁니다. 신약성서에도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이나 오병이어 사건이 나와요. 심지어 구약성서에는 태양과 달까지 멈춘 것처럼 말하는 부분도 있는데요. 기적의 유형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떨까요? 천사들이 등장한다거나 사탄이 나와서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한다고 하는 것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으로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저는 그런 것들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객관적인 팩트(사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떤 분들에게는 정통적인 해석과 다르기 때문에 불편하게 느끼는 겁니다.

한국 기독교의 정통주의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라고 불립니다.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 통칭되고 있어요. 그들의 성서해석이 바로 전통적인 성서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성서관이지만 달리 말하면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성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에 성서가 정말 초자연적 기적 그 자체를 말하려고 했던 거라면 그것이 아무리 오늘날의 자연과학적인 근거에서 볼 때 말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문제는 성서가 과연 그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차이가 있는 거죠. 성서가 정말 동정녀 탄생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성서가 과연 부활을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물론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동정녀 탄생과 부활에 대해 성서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 차이를 집어내지 않거든요. 둘 다 똑같은 종류의 기적 같은데, 왜 다를까요?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하는 신앙 교육이 심층적 깨우침이라기보다 암기 위주의 단순한 학습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교육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진리의 세계로 스스로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의 교육은 참된 교육이라고 볼 수 없죠. 일방적인 세뇌에 가깝습니다. 어떤 교리나 성서에 대해서 진리의 차원에서 서로 대화가 가능한 교육이 별로 없을 걸요? 그렇게 교회 안에서 주입식으로 학습 받은 모든 내용들이 저의 글과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겁니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합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주의의 정체가 뭔지를 조금 설명하겠어요. 저는 이 복음주의라는 말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복음주의자들인데, 편을 갈라서 스스로 복음주의자라는 용어를 독단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음이잖아요. 우리 의(義)가 아니라 예수의 의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 복음이고 은총이고 선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많은 그리스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편을 가르기 위한 준거로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은 거죠.

한국에서는 복음주의를 에큐메니컬과 대립해서 사용합니다. 한국교회사에 대해 길게 말할 시간은 없는데요. 하여튼 이 복음주의자들은 에큐메니컬을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자유주의도 아니고 근본주의도 아닌 복음주의라고 말해요. 말은 잘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도 복음주의자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나 그 교회 후임자인 오정현 목사님 등, 제가 설교비평을 했던 분들은 대다수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요즘 스스로를 근본주의자라고 하면서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이 무엇인지 확인해보려고 앞 시간에 잠시 책을 봤어요. 제가 손에 든 이 책을 아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라는 책입니다.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장로교출판사라고하면 통합측인가요? 기장측인가요? 이 책을 쓴 분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입니다. 아주 학구적이면서도 복음적인 열정도 많은 분이죠. 영국 분인데, 신학적으로 믿을 만한 분입니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저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일찍부터 출중한 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분이라면 정말 열려진 복음주의자로서 대화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여기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 복음주의는 성서가 최고의 권위가 있다고 인정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말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기독교인 치고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빼고는 다 인정합니다. 문제는 이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관건이겠죠. 복음주의는 인간의 문화보다는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는데, 이런 점에서는 신(新)정통주의와 흡사합니다. 신정통주의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등, 변증법적 신학을 했던 독일의 신학 운동을 말합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강조하던 문화와 종교성으로부터 성서의 권위로 돌아간 신학 운동이에요.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개혁자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신정통주의는 17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신학의 이론화, 즉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체계화 하고 이론화 한 정통주의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인 종교 개혁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신정통주의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죠.

두 번째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여기에서 크리스토센트리시즘(Christocentricism)이 나타나는데요. 바르트 신학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그리스도 중심주의, 기독론인 거죠. 저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도 차이가 없어요. 저도 설교는 그리스도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요. 복음주의의 특성이 크리스토센트리시즘이거든요. 그런데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윤리나 도덕적인 차원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론과는 거리가 멀어요. 예수 믿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게 뭐가 잘못이냐고요? 그게 잘못은 아니죠. 그러나 칭의론의 측면에서 볼 때, 윤리 도덕은 의로워지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업적이나 선이 중심이 아니거든요.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중에 읽어 보세요. 재미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성령의 주권입니다. 저도 성령론적 설교가 핵심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복음주의자죠. 여기에 은사주의가 나오는데 넘어가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차이가 나요. 계속 들어보세요.

네 번째 특징은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입니다. 개인의 회심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거예요. 저도 개인적 회심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개인의 어떤 심리적 불안감, 혹은 죄책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심이라는 사건을 개인적인 차원에 두기 보다는, 즉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회심의 관점보다는 세계관의 전환이라고 봅니다. 세계관의 전환이 회심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이 땅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거죠. 이 세상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종말에 재림하고 세계를 판단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고 온전한 생명이 드러나는 세계를 이룬다고 믿는 겁니다. 이런 세계관으로 변하는 거죠.

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전환이 회심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개인적인 회심을 요구하지 않았거든요. 세리들을 향해서, “너 그거 잘못했으니까 당장 때려치우고 똑바로 살아라.”라고 말한 게 아니라, “회개(메타노이아)하라. 돌아서라. 하나님의 통치가 문 앞에 와 있다.”라고 그 사람의 영적인 관심을 돌렸던 거예요. 회심이 그런 방식이라면 제가 동의합니다. 어떤 도덕적 회심, 개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식의 회심에는 동의하지 못해요. 저도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복음주의 교단에도 속해 있고, 거기서 공부도 했습니다. 제가 지금 복음주의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있는 한계들과 함께 그 단점들까지도 안고 가려는 차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맥그래스가 말하는 개인적 회심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맥그래스가 개인적 회심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다른 식으로도 말할 수 있을 거에요. 이것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갖고 말했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고, 설령 그가 정확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어느 부분에서는 부족한 것을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개인적 회심이라는 개념이 고정된 게 아니니까요. 제가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뭘 잘못했다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자기감정에 빠지는 그런 것으로 이해했는데요. 매일 교회에 오면 열린 예배다 뭐다 해서 울고불고 자기만족감에 빠지다가, 밖에 나가면 여전히 부동산 투기하고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것은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저는 세계관의 전환(paradigm shift)을 회심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창조론의 관점에서도 옳아요. 결국 기독교의 신앙에서는 한 인간의 결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강조하는 거죠.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의 결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의 결단이 무의미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과연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거냐고 과격하게 말한 거예요. 개개인의 결단보다도 엄청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에 우리가 직면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론적 완성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끌고 가는 방식 앞에서 우리가 놀라고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의미의 찬양(doxology)을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끊임없이 작아지는 무화의 경험을 하는 거죠. 이것은 순전히 우리 개인의 경험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연관되는 겁니다. 그런 신앙이 중요해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혹은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인격적 만남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고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과연 무엇을 인격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빼놓을 수 없어요. 그러나 여기에서 인격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가 모호합니다. 하나님은 인격(人格)적인 분이 아니에요. 인간과 같은 성품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신격(神格)입니다. 하나님 고유의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 잡을 수 없어요. 하나님 고유의 본성으로 이 세계를 통치하고 우리를 만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경험은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결코 한 가지 색깔로 말할 수 없어요. 햇빛이 그냥 보면 하나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가지 빛깔로 나눠진다고 하죠? 그러나 사실 햇빛이 일곱 가지는 아니잖아요. 하나하나 따지면 색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광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어떤 공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마음의 뜨거움, 결단, 자기 잘못에 대한 공개적 뉘우침, 평안, 사명감 등이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신앙적 결과라고 말하거든요. 그러나 이런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에만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죠. 사과를 하나 같이 먹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이걸 먹고 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사과 맛을 인격적으로 영접했기 때문에 앞으로 사과 장사를 하겠다, 여기에 목숨을 걸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도 있거든요.

강의 중간에 어떤 분이 댓글로 질문을 하셨군요.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누군가 회심을 ‘change of mind’라고 설교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어느 봄날의 눈뜸'으로 표현하던데, 어떻습니까?” 그건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걸 맞다 틀리다,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한다면 통일교 신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경험들의 표현이야 가지각색이니까 그 자체로는 우리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의 인격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가 아주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신천지교회에 간 사람들도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걸 통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니까요. 삶도 변화되고 우울했던 사람이 우울증에서도 벗어나고 말이죠. 저는 그런 것들도 기독교 안에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배제하고 개인적인 회심을 신앙의 중심으로 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머리만 굴리고 말만 잘하면 그만이지, 결단이나 교회에 대한 봉사도 없이 냉랭한 상태에 있어도 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주의의 다섯 번째 특징은 네 번째 특징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복음전도의 우선권입니다. CCC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사영리를 들고 전도하는 것을 긴급하게 생각합니다.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신앙생활을 해요. 맥그래스가 복음주의 선봉자로 빌리 그래함을 꼽더군요. 빌리 그래함은 복음전도에 우선권을 두고 있는 쪽입니다. 책을 읽다가 이 부분에 재미있는 게 있어서 잠깐 소개하려고 하는데요. 사실 이런 책을 찬찬히 같이 읽고 내용들을 해석하면서, 주변에 여러 가지 세계 신학이나 교회 운동, 선교 운동 등과 쭉 연결해서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빌리 그래함이 1954년에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니온신학대학에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해요. 그런데 유니온신학대학의 윤리학 교수로 있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빌리 그래함의 신학적 무지와 순진함에 대해서 냉소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와 형제지간이고 기독교 현실주의자예요. 하여튼 이 사람이 표현한 게 좀 재미있어요. 들어보세요. 니버가 말한 겁니다.

빌리 그래함은 사교성이 있고 겸손하며 매력 있는 젊은이로서 다소 불합리한 유형의 기독교 신앙과 상당히 정열적이고 선동적인 재능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폭넓은 사회문제에 전혀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의 메시지가 어떤 가치가 있다면 30여 년 전 전국을 매혹시킨 빌리 선데이의 메시지가 지니고 있었던 지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 정도의 진보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된다.

그 당시에 시사적인 상황을 잘 알면 더 재미있겠는데, 그 때 빌리 그래함이 좀 젊었나 봐요. 좀 냉소적으로 비판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빌리 선데이는 뭔가요? (윌리엄 에슬리(빌리) 선데이(William Ashley(Billy) Sunday, 1862-1935)는 프로야구 선수로 지내다가 기독교로 회심했으며,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복음 전도자였다. 녹취자 주) 도색 잡지인가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이 비판을 보고 맥그래스는 오히려 라인홀드 니버를 비판했어요. 그건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가지를 했는데, 정리를 해야겠네요. 복음전도의 우선권도 제가 다 설명을 안했군요. 이건 좋다고 봅니다. 이 책에서는 맥그래스가 빌리 그래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빌리 그래함이 부시의 백악관에 들어가서 이라크를 침략할 때 기도해 주지 않았나요? 무력으로라도 이라크의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발상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복음주의자들의 순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그런 점에서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여섯 번째 특징은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컬하다고 쭉 썼네요. 제가 여기에서 한 가지 짚으려고 했던 게 있습니다. 맥그래스가 복음주의의 매력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복음주의가 정통 기독교라는 말을 하면서 윌로우크릭교회를 대단히 좋은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 격으로 꼽고 있더군요. 이 교회의 예배당은 전통적인 교회 장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강단도 없고, 전통적인 성직자의 예복도 사용하지 않지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있다고 말이죠. 영국의 기독교 간행물인 <가이드포스트>는 1989년에 올해의 교회로 윌로우크릭교회를 선정하면서, 영원한 진리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소개하는 교회라고 전했어요. 제가 알고 있기로, 작년 말쯤에 윌로우크릭교회의 목사님이 자기가 행했던 목회와 예배 방식에 대해서 크게 반성하는 글을 썼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제목을 어느 분이 올려주셨습니다. “Reveal: where are you?”(2007년 말) 맥그래스는 복음주의를 너무 좋게만 말하려다 보니까 충분하게 검토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맥그래스는 훌륭한 신학자이자 복음주이자이고 영성 집필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뜻으로 소개한 겁니다.

제일 처음에 맥그래스가 제기한 세 가지 문제는 복음주의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 모두에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약간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이것은 다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것들은 좀 차이가 있어요. 개인적 회심, 복음전도, 공동체 말이에요. 저는 전혀 복음전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CCC나 빌리 그래함 방식의 전도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중 집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오는 방식의 전도가 과연 필요할까요? 그것보다는 오히려 간접선교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미시오 데이’(Missio Dei)의 개념이기도 한데요. 선교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고 있다는 뜻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하는 그 선교에 도구로서의 역할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전도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조금 소극적인가요?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의 차원이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자가 말한 것과 저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적한 것뿐입니다.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오늘 복음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갔는데요.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기적의 문제였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은 결국 기적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무엇을 가리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손가락처럼 말이죠. 그 기적은 바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통치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이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는 반면, 저는 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통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제가 복음전도와 개인적 회심에 대해 말하다가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맥그래스가 말한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 성령, 이 세 가지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넣어 두었으면 좋겠네요. 이런 점에서는 맥그래스는 칼 바르트와 같은 선상에 있는데, 어떤 때는 그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바르트가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바로 여기에서 갈라지더군요. 제가 왜 중간에 이 말을 하는가 하면요. 제가 아무래도 신정통주의자 같아요. 맥그래스가 말하는 복음주의를 따라가다 보니까, 상당 부분에서 그래요. 맥그래스가 라인홀드 니버에 대해서도 비판을 했잖아요? 니버도 신정통주의자거든요. 신정통주의의 핵심은 그거예요. 아주 기본적인 것을 바탕에 놓고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축소시켜요.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확대했습니다. 신앙에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가능성들을 많이 보았어요. 이것을 비판할 때 복음주의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의외로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더군요. 이게 좀 미묘합니다. 개인적 회심, 인격적 결단, 영접 같은 것들은 결국 인간론이거든요. 그러나 신정통주의는 그것마저 넘어서려고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아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닿고 있어요.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말이죠. 탕자를 자꾸만 회심시키려고 하잖아요? 결국 그건 인간의 문제거든요.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가능성 측면에서 인간을 부각시키려고 했다면, 이 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관점, 인간의 불가능성 측면에서 인간을 부각시키려고 해요.

옥한흠 목사님이 인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다 이런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겁니다.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거죠. 사랑의교회가 계속해서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자고 하는데,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자유주의적 발상입니다. 도덕적 주도권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가요? 그리고 율법과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처럼 여겼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강조점을 두다니요? 비록 복음주의라는 무늬를 가지기는 했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극과 극이 통하는 것 같아요. 지금 한국에 있는 많은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분들의 목회 형태를 다 싸잡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신학적 경향이 인간적이라는 거죠. 제자훈련이나 셀 조직 같은 것도 완전히 공산당에서 뭐 묶어서 하는 것처럼, 아주 조직적으로 인간을 관리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 아니냐고 말씀하는 분도 있긴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모든 게 다 가능합니다.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주도권, 하나님의 종말, 심판, 하나님의 구원에 몰입합니다. 19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유럽 기독교를 지배하고 있었어요. 이것에 대한 반발로 20세기 초에 신정통주의가 나타났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이전에 경건주의나 대각성 운동 등도 많이 있었어요. 이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1920년대에 메이천(Machen), 맥킨타이어(McIntyre)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고요. 이들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이 근본주의자들이 세계 문화를 부정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고수하니까, 이것을 비판하면서 세계 변화에 책임을 갖자고 사회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복음주의거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론적 착상이 복음주의자들에게도 묻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적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동정녀와 부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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