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교회란 무엇인가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6042 추천 수 0 2012.06.07 10:26:00

제 26강

교회란 무엇인가

 

반갑습니다. 며칠 전 저녁쯤 집에서 차를 세우는 중에 이상한 걸 경험했습니다. 아파트에 보면 주차할 수 있도록 선이 그어져 있잖아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고 좀 어스름한 분위기가 돌 때였습니다. 두 대의 차 사이에 자리가 비어 있어서 조심스럽게 몰고 들어갔어요. 딱 세워 놓고 옆을 봤죠. 차 간격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요. 그런데 살짝 보니까, 왼쪽에 있던 차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라고요. 그래서 차 주인이 차를 뺀다고 생각하고는 내가 잘 맞춰야겠다고 보고 있는데, 그 안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러다가 사고 나겠다 싶어서, 제가 빨리 내려서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앞으로 돌리니까 내 차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는 거였습니다. 엉뚱한 경험도 하네요. 우리가 가끔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고서 출발할 때 경험하는 건데요. 이걸 착시라고 하나요? 정말 저는 깜빡 속았습니다. 정말 옆에 있는 차가 뒤로 빠지는 줄 알았거든요.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바로 제가 차를 세우면서 경험했던 그런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이 부정확하기 때문이죠. 이 세상이 의미가 없다거나 무질서하다거나 별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 생명, 경이로움의 크기에 비해서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너무 하잘 것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이 세계와 생명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칭의의 현실성

요즘 제가 다비아 사이트에 ‘주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갈지는 모르겠어요. 가는 만큼 가다가 그치겠죠. 지금은 칭의와 구원의 현실성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주는 그리스도라는 명제를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어떤 관계에서 과연 그리스도냐 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짚고 있는 부분은 죄 문제인데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학의 아주 기초적인 내용처럼 보이겠지만 제대로 생각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신학생들도 신학적 사유를 맛보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신학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죠. 신학을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지를 못해요.

저도 신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들은풍월은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신학적인 사유를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설교하고 학생들을 지도했어요. 그래도 교회는 잘 됩니다. 신학적 사유 없이도 목회가 가능한 풍토가 전부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신학 없이 목회를 해도 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자기가 가는 길이 본질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조명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다행입니다. 목회의 노하우(knowhow)만 알고 있어도 목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독교 영성의 심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주는 그리스도라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최근 며칠 동안 이야기하고 있고, 또 앞으로 며칠 동안 더 말하고 싶은 핵심은 칭의의 현실성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법적인 의미라고 이미 말했고요. 그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고유한 구원 이해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칭의에 대해서 단지 정보로만 알고 그것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칭의론의 현실성이 부족한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칭의론의 현실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현실, 칭의의 현실, 하나님의 현실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이것을 말로만 해서는 전달에 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 말을 해야죠. 하나님의 현실을 화두로 붙들고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낱말 뜻으로만 알아요. 그러나 낱말 뜻만 아는 것과 그 개념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개념, 지평, 세계, 현실, 그런 말들은 서로 통하는 단어들이에요.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표현할 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 지평, 개념, 현실과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풍부해져야만 하나님의 현실성이 와 닿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아무리 듣는다고 해도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음악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그냥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설명한다면, 언어가 말을 한다고 하는 그 세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현실 등이 우리의 온 영혼에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칭의, 구원, 종말, 사랑, 하나님의 나라, 회심과 같은 것들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아주 리얼하게 와 닿게 되는 겁니다.

좀 전에 말한 것과 다시 연결하면, 하나님의 현실은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를 아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실제로는 내 차가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는 옆 차가 뒤로 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고 말했는데요. 이 세계가 그만큼 오묘하고 경이롭다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말을 해도 초등학생들에게는 이런 게 이해가 안 될 겁니다. 자기들이 알고 경험한 것 밖에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어린아이일 때는 대개 어머니의 세계만큼만 압니다. 아니면 초등학교 선생님의 눈높이 밖에는 세계가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인간, 세계 등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면서 점점 새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데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게 될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연관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인데, 우린 선택을 잘 받은 겁니다. 여러분 절대 후회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타종교를 백안시 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폐쇄적이고 퇴행적이고 자폐적인 자기 독단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향해 열린 것입니다.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이 연관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겠어요? 지난 2천 년 동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 길을 많이 걸어갔고요. 그런 흔적들이 기독교 안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위대한 신학가들, 영성가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철부지가 아니라 철이 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런 공부의 일환으로 우리가 ‘기독교가 뭐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부로 기독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문만 여는 거예요. 이것은 정말 기독교의 개론(introduction)입니다. 아주 초보적인 거죠. 그러나 조금만 더 가면 신학적인 어떤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건 또 나중에 해야겠죠. 개론이라고 해서 너무 우습게보지 말고 기독교 신학 전체와 연관되어 있으니까 이 공부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교회의 본질을 말합니다.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승리의 교회이고 영광의 교회이죠.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했고 종말론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미 기독교 신앙은 종말에 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어요. 하나님은 역사 전체, 창조와 종말, 알파와 오메가니까요. 알파와 오메가란 말도 많이 들었지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요. 이 말도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과 끝, 이것 전체를 놓고 기독교 신앙을 끌어간다고 하는 관점이에요. 처음부터 종말까지 역사 전체가 하나님이니까요. 이미 마지막에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난주 제 설교의 주제도 그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승리한 겁니다.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면서도, 아직은 역사 안에서 잠정적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승리가 아닌 패배와 같은 것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시각은 이미 종말에 승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놓입니다. 그 시각은 당연히 있어야 하며, 그것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전체 세계이자, 승리의 교회이며, 영적인 교회의 본질을 뜻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실제로 우리가 꾸려 나가고 있는 역사 안의 공동체, 여전히 고통과 모순을 갖고 있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은 신자들의 구체적인 모임을 가리킵니다. 승리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본질은 불변하고 영구적이지만, 교회의 형태는 가변적이고 한정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승리한 교회라고 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무슨 교회일까요?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현재 보이는 교회는 투쟁하는 교회로서 아직 승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정적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늘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에클레시아 셈퍼 레포만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즉 항상 개혁하는 교회를 외쳤습니다. 아무리 본질적이고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실의 교회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불가시적 교회가, 인식론적으로는 가시적 교회가 교회의 토대이고 기초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교회가 존재의 차원이라면 보이는 교회는 인식의 차원이라는 거죠. 이 두 요소는 구별되면서 상호 연관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인 규정입니다. 교회의 형태(보이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보이지 않는 교회)을 드러내며,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형태를 규정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들을 다루는 게 아니라 교회의 형태, 즉 보이는 교회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형태에 대해서 말할 때 교회의 본질을 연결해서 생각하기는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예배 공동체

교회의 형태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종교행위와 의식의 문제로서 예배와 관련된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교회의 조직입니다. 목사, 장로 같은 것들 말이에요. 종교행위로는 여기에 나온 대로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등을 다루겠습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질문한 관상기도도 이 항목을 다룰 때 짚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조직으로는 목사, 장로, 당회, 여성안수만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종교행위에 대한 부분입니다.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등등입니다. 오늘은 상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군요.

예배는 긴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경건한 행위입니다. 영어로 워십(Worship)이라고 하는데요. ‘워스’(Worth)라는 단어에 추상 명사로 만드는 ‘십’(ship)이 붙었습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바친다는 뜻이죠. 독일어로는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예배학 시간에 나오는 내용들인데, 다 말하지 않고 간단한 방향만 설명할게요. 우리의 예배는 유대 교회의 회당 전승과 예수님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성만찬 전승이 하나로 집결된 종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회당 전승에 해당하는 것은 성서 읽기, 찬양, 기도 등이고, 성만찬 전승에 해당하는 것은 떡과 포도주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우리의 구원, 형제애의 회복 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들어와 있는 거죠. 이런 전통에서 본다면 기독교 예배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설교와 성만찬이죠. 개신교는 주로 설교에 초점이 있고 로마가톨릭은 성만찬에 초점이 있는데요. 사실 두 개 다 본질적으로 중요합니다. 둘 다 계시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인 거죠. 설교는 보통 들리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만찬은 뭘까요? 보이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자 자기 노출이니까, 설교와 성만찬이 기독교 예배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개신교에서도 성만찬을 예배 때마다 행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샘터교회에서는 지금 한 달에 한 번 성찬식을 하고 있는데요. 아쉽기는 하지만 과도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매주 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격주로 해도 좋고요. 설교와 성만찬, 이 두 가지가 교회 예배의 핵심입니다.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으로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예배에서 잘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doxology) 것은 최고의 가치를 모두 묶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경건한 행위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에요.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드러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이런 설명이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걸 깊이 이해하는 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드러내는 예배가 되려면, 어떠한 예배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해 2천 년 동안 반성한 결과가 예전입니다. 여러분이 로마가톨릭의 미사라든지 루터교나 성공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면, 예전이 살아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개신교회의 자유로운 예배에 익숙한 사람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를 보면 너무 형식적이고 권위적이고 정적이라는 생각을 할 텐데요. 그건 큰 오해입니다. 개신교 예배나 가톨릭 예배 모두 장단점이 있어요. 우리가 속한 개신교에서 반성해야 할 점들을 말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기보다도 사람이 아주 중요합니다. 개신교는 예배의 주체가 사람, 청중이에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청중들의 은혜를 추구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들 말하죠? 그거 별로 좋은 말이 아닙니다. 예배는 은혜 받기 위해서 참석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참석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냐고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할 때 제사와 예배를 비교해서 말했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은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가 감동을 받으려고 참여하는 게 아닙니다. 죽은 조상들에게 예를 바치는 거예요. 그래서 일정한 형식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이 예배에도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그 형식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종교적 메타포, 혹은 상징들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자칫하면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명분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을 수 있어요. 예배를 드릴 때 온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영혼이 집중되던가요? 그게 잘 안 됩니다. 그건 훈련되지 않으면 안 돼요. 좀이 쑤셔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한국교회에 열린 예배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이것이 예배를 죽이는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예배에 한번 가보세요. 제가 온누리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몇 번 들어가 보고 참관기를 <기독교 사상>에 게재 했습니다. 열린 예배는 앞에서 가운도 입지 않은 성가대원들이 예배 시작 전에 몇 십분 동안 감미로운 복음 찬송을 반복적으로 부르면서, ‘열린 음악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더군요.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예전과 연출에는 차이가 있어요. 제가 그 예배를 연출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예배 요소에 사람들의 심리를 사로잡기 위한 동기들이 다분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형식적이더라도 예전적 예배로 돌아가는 게 결국 은혜를 받는 거라고 보는 거예요. 은혜가 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갈팡질팡 하는 건데요. 사람들은 대개 은혜를 심리 작용으로 생각합니다. 아주 상쾌한 노래를 들으면 즐겁잖아요. 그걸 은혜라고 생각해요. 교회에 가서 실컷 개그맨 같은 농담이나 듣고 스트레스를 풀고 와서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큰 함정이죠. 일반 사람들은 그 함정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교회 지도자들이 그 쪽으로 몰아가기도 하고, 우리 자신도 찰나적이고 육감적이고 감각적이고 감수성을 자극하는 세속 문화에 깊숙이 물들어 있으니까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TV 드라마에 빠져 버리고, 저녁에도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 빠져 사니까요. 통속적이란 말을 무조건 나쁜 뜻으로 쓰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치정에 얽혀 있는 드라마에 빠져 살던 사람이 교회에 와서 어떻게 예전적인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늘 딴 생각을 하는 거죠. 결국 그런 사람들을 묶어내기 위해서 나온 하나의 방식이 열린 예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데 정신 팔지 않고 몰입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일시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감각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결국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지루하니까요.

지금은 은퇴했는데,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였던 정진홍 교수님이 온누리교회의 열린 예배에 참석하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 방송국에서 작은 음악회 같은 것들을 하고 그럴 때였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세련되지 못한 열린 음악회 수준이라고, 흉내는 내려고 무던히 애를 쓴 것 같다고, 그러나 교회에 가서 그런 연극이나 연주를 보고 왔다는 느낌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교회에 안 가고, 전문적인 연극을 보든지 음악회에 가겠다고 하더군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배가 우리에게 이벤트가 됨으로써 많은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조금 지루한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2천 년 기독교 역사가 구성하고 제시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가장 바람직한 예배의 모습이니까요. 개인의 심리적 영성에 머물지 말고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영성으로 들어가자는 겁니다. 예배에서 저는 그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배에 대해서 좀 더 말할 것이 있는데, 간단하게 정리해야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예배에 대해서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 의무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로 의무로 생각하는지는 제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성수주일을 입에 달고 살죠. 그러나 예배는 의무가 아닙니다. 둘째는 예배를 주술화하는 겁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복을 받을 것처럼 말하죠. 그래서인지 한국교회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숫자가 참 많습니다. 의무이기도 하고 참여하면 복을 받기도 하고 은혜를 받기도 하는 차원에서 수십 종류의 예배가 개발된 것 같아요. 그런 예배들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예배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배를 남발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번만 예배를 드리더라도,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돌린다는 자세로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오늘은 기도 문제까지 설명해야겠군요. 기도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을 겁니다. 성서에도 보면 기도의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고,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고요. 초기 기독교 역시 기도 공동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2천 년 동안 계속해서 많은 영성가들, 교회 지도자들,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를 했어요. 칼 바르트도 신학의 첫 기본적인 행동은 기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기도가 없이 어떻게 신학,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공부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가 『복음주의 신학입문』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에 관한한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오라 에트 라보라’(Ora et Labora). 이러한 법칙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다.” 기도하고 일하라! 이것은 제가 보기에 수도원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표어가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노동, 이 두 가지를 다 했습니다.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의 『사랑과 노동』(한국신학연구소)도 우리에게 좋은 신앙의 통찰력을 줍니다.

제가 강의를 진행하면서 간혹 책을 소개합니다. 일반 평신도들도 신학 책을 좀 읽어야 해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한국 기독교 출판 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은 정말 의미 없는 책들이거든요. 『게으름』 같은 책들 말이에요. 규장에서 나오는 책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닌데, 너무 쉽게 읽고 던져버릴 수밖에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책들을 냅니다. 다비아는 평신도 신학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동의하는 여러분도 신학 책 좀 읽어야 합니다. 도로테 죌레의 책들을 같이 읽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요. 모르겠습니다. 다비아 오프 모임이 서울에서 매달 한 번씩 모이는데요. 다른 지역에서도 같이 모여서 이런 책도 읽고 논의도 하면 참 좋겠어요. 이게 쉬운 일은 아니죠.

수도원에서 하는 일들이 신학에서도 똑같습니다. 칼 바르트의 『복음주의 신학입문』은 정말 좋은 책입니다. 읽어보세요. 그런데 생각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졸릴 겁니다. 신학생들도 이런 책들은 읽기 힘들어해요. 이게 문제입니다. 신학생들이 신학 책을 읽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요.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싫어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음대에 다니면서도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걸 듣는 게 지루한, 숙제를 하기 위해서 억지로 듣고 리포트를 내는 것에 불과한 이런 현실이 신학교에도 사실은 많습니다. 그게 누구의 책임인지 모르겠어요. 한국의 전반적인 인문학의 난맥상이 신학에도 미친 건지, 아니면 신학만의 문제인지 말이죠. 하여튼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바르트의 말을 조금 더 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세요. “신학이 하늘을 향해서 난 문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하늘이라는 단어, 이게 메타포죠. 바르트가 이 단어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지, 또 그것과 상반된 개념이 무엇인지, 과연 하늘로 난 문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면, 바르트의 책은 심심하고 지루한 설교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다른 사람과 똑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일상에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구별됩니다. 자기를 절대화하지도 않습니다. 기도는 자기가 한없이 낮아질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수요일에 샘터교회에서 하는 시편공부 모임이 생각나네요. 수요일마다 어거스틴의 기도 한 편을 읽고 제가 해석을 합니다. 그 시간이 15분 정도 걸리고요. 그 다음에 시편을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가고 있어요. 그걸 한 30분 정도 합니다. 어제는 시편 7편을 했어요. 그 때 공부한 내용이 기억나는데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당하는 일들에 대해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할 때만 기도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확인하고 설득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거죠.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게 참 어려워요. 이게 교회에 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상하게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교만해져요. 예수님의 비유에도 정확하게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는 부분 말이에요. 우리의 기도가 어떤지는 다 알고 있죠?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하고요. 뭐가 잘 되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는 기도들을 해요. 겉으로는 아주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바리새인의 기도와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 이상하게도 그 자체가 업적이 되어 버려요. 나는 열심히 뭘 좀 했다, 비전을 가졌고, 열심히 헌신해서 인도에 교회를 세웠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해서 다른 교회를 도와주었다는 식으로 업적이 되고 맙니다. 이건 교양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 겉으로는 굉장히 겸손한 것 같은데, 속에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을 말하는 거예요.

이것이 기독교의 죄론과 연결됩니다. 저는 죄의 경향성, 죄의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으로부터 떼어 낼 수가 없다고 봐요. 도를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교양 강좌를 많이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금욕이나 자학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상하게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게 자기의 의가 되어 버립니다. 죄가 뭔지 아시죠? 성서가 말하는 죄는 자기에 대한 집중, 자기 의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나는 아무것도 간구할 게 없다.’고 하면서, 입 딱 다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마디만 했어요. ‘키리에 엘레이송’이죠. 우리는 이 비유를 수없이 읽고 듣고 설교를 하면서도 다시 바리새인의 기도로 돌아갑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래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열심히 뭔가 하기는 했는데 우리의 영성은 늘 제자리예요.

 

기도, 낮춤의 영성

기도는 우리의 실존이 완전히 흙처럼 되어, 흙처럼 아주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임하게 해달라는 호소입니다. 어디에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만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떤 영적인 세계로 우리가 뛰어 들어가는 거죠. 그럴 때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그럼 영적으로 아주 깊은 경지에 도달해야만 기도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어요. 일상적인 기도를 하더라도 그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걸 여실히 알아야 합니다. 밥 한 그릇을 놓고 기도할 때도 이것이 내가 노력해서 얻는 마땅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분의 전적인 배타적 은총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절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거죠. 밥 한 그릇을 놓고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지만, 이것은 우주론적 사건인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일상이 심화되는 것이고, 아주 작은 개체에 불과한 우리가 전우주적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자신의 이해타산에서 점점 벗어나 성령에 의존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이 기독교인의 성숙이기도 하고, 바울의 가르침대로 한 과정으로서의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가능한 겁니다. 사실은 노력마저도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력 자체가 믿음의 문제니까요. 하나님과의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신앙적 노력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신뢰 문제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주고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신비주의자들, 영성가들, 올바른 신학자들, 성실한 목회자들, 성령과 늘 소통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거든요. 기도는 그런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시간이 거의 되었는데요. 정작 기도에 대해서 해야 할 말들을 많이 못했습니다. 헌금과 성만찬도 설명해야 하는데, 시간이 좀 부족하네요. 주일 저녁에 보충을 하는 거니까 그걸로 어느 정도 위로를 삼아야겠습니다. 시간이 없더라도 흔히들 잘못하는 기도에 대해 하나는 짚어야겠네요. 기도는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하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이 기도를 해서 누구를 깨우치겠다는 식으로요. 장로님들이 그런 기도를 많이 하거든요.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그런 거 많이 해요. 심지어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어린이들을 앞에 놓고 기도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어린 학생들이 예배드릴 때 떠들지 않게 해주시고”라고 하는데, 이거는 기도가 아니죠. 훈계예요. 이런 식의 기도가 일반 어른들을 대상으로도 많이 나타나거든요. 저는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를 드릴 때는 가능한 대로, 제가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성문 기도, 즉 글로 써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자유로운 기도가 많아서 기도가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어요. 자기 하소연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누굴 책망하기도 하고, 은근히 기도로 평소에 싫어했던 사람을 치기도 해요. 목사님들이 설교 시간에 누구를 치듯이 말이죠. 그래서 기도를 배우자는 겁니다. 우리가 좋은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거예요.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를 읽고 외우는 게 제일 좋은 공부거든요. 영적으로 성숙했던 분들의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작업이 한국교회에 시급하다고 봅니다.

관상기도에 대해 대답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곤란하고, 아무래도 다음 주일 저녁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다비아 신학단상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2004년 9월 15일에 쓴 글이 있습니다. 기도 문제만 하더라도 말할 게 많아요. 사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준다고 했으니까 성령의 문제와도 연결되고요. 그리고 가장 모범적인 기도는 주기도문이 아니겠습니까?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바람직한 기도를 할 수 있겠죠. 기도 문제만 하더라도 모든 신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총체적인 문제인 거죠.

한국교회에서는 기도라고 하면 무조건 통성기도도 하고, 밤새 철야기도를 하면서, 손들고 자기 하소연도 하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게 기도일까요? 자기 확신은 가능하겠죠. 때에 따라서는 그런 것도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중심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서없는 강의를 경청해 줘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경청했는지 안 했는지는 제가 보지 못했으니까 모르지만 그렇게 했을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편안하게 주무세요. 주말 잘 보내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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