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강 기도에 대해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812 추천 수 0 2012.06.07 10:31:06

제 27강

기도에 대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노래 중에서 두 곡을 선물로 여러분에게 들려 드렸습니다. 요즘 제가 그걸 듣고 있어요. 그분들의 노래 파일을 구한다는 저의 글을 보고 어떤 분이 파일을 보내 줘서 잘 듣고 있습니다. DVD도 있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오늘이 4월 20일이군요. 우리 주변에 색깔들이 바뀌는 걸 보면 마술의 세계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경이로움 혹은 신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보고 참 아름답다, 괜찮다고 느끼는 것과 그 사태 속으로 두 발을 딛고 들어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거든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단순히 자기의 주관적인 느낌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정확히 뚫어보면서 자기와 일치되는 경험이라고 할까요? 그게 영의 성육신, 신앙의 일체감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세계를 그렇게 경험하는데요.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과는 좀 다르지만, 현상적으로는 비슷합니다. 그 경험이 자연주의자의 넉넉함과 신비주의적 통찰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창조론과 기독론, 부활론과 종말론에 연관될 수 있는지 그 맥락을 잘 찾아가면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한국교회가 신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죠. 심지어는 그게 필요 없다고까지 생각해요. 그게 없어야 오히려 믿음이 더 공고해진다고 주장이죠. 이건 착각 중에서도 정말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주관적인 확신이거든요. 믿고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는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늘 종속변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에서도 이런 부분을 말하게 될 텐데요. ‘우리’가 사유하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분의 계시를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나’, 또는 ‘우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체마저도 하나님의 통치, 성령의 인도하심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수영과 비슷합니다. 내가 막 억지로 물에 뜨려고 발버둥 치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물에 가라앉아요. 물에다 완전히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사유하는 나는 남아 있지만, 그 사유마저도 진리의 영에게 온전하게 의존하는 겁니다. 제가 기독교의 신비주의적 영성에서 상당한 경지에 이룬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해하기 좋도록 설명하기는 어려운데요. 그래서 어렴풋하게만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요즘만 좋은 계절은 아니죠. 사시사철이 늘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좋은 계절이 있는 지구 안에 던져져 있어요. 그 속에서 나 자신이 먼지처럼 작아지지만 동시에 우주처럼 확대되고 있어요. 우리가 작아질수록 우주론적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발을 내딛는 거니까요. 여기에 긴장이 있고 변증법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변증법은 부정과 긍정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간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부정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우주적인 생명의 깊이로 확대된다고 하는 것에 기독교의 영성이 있는 거죠. 요즘 이렇게 색깔이 변하는 놀라운 세계를 보면서, 우리가 최소한 자연주의자들만큼이라도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기독교 신앙은 일단 상식을 넘어서는 겁니다. 상식을 넘어선다는 것은 상식들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에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을 말할 때 모더니즘(modernism)을 이해한 다음에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 없이 해체주의나 다원주의로 빠지게 된다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제가 신학단상에 마르틴 루터와 뮌처(Müntzer)의 농민 혁명을 배경으로 글을 썼습니다. 거기에서도 짚은 내용이지만,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쪽의 사람들이 고상하기도 하고 인격적이기도 하고 자연주의적인 성향도 많습니다. 여기에는 목회자도 있고 신학자도 있어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도 늘 경험했던 거지만, 완고하고 근본적인 입장에 있는 설교자들이나, 아주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설교자들이나 모두 성서와 진리의 객관성이 부족합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청중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만이 진리더라고요. 진리 상대주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들이 진보 쪽이나 보수 쪽이나 다 마찬가지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제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려면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 이해, 주객도식까지 일단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근대가 사유하는 주체와 사유되는 대상을 구별하려고 했고, 객관적 진리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음악이든 미술이든 그것을 추구했던 겁니다. 물론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그걸 바탕에 두고 있는 거잖아요. 모더니즘은 그런 방향으로 끌어가는 존재론적인 힘들을 전제로 했던 거예요. 기독교 신앙은 그것보다 훨씬 더 존재론적입니다. 청중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런데 한국교회는 진보적인 입장이든 보수적인 입장이든 양쪽 모두 포퓰리즘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 약간 다를 뿐 실체는 같아요.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청중들이, 민중들이 뭐라고 하는가에 대해서 절대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는가에 집중한다는 게 맞겠죠. 기독교 신앙은 진리의 영인 성령에, 즉 진리의 객관성에 중심으로 둡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인격적으로(배타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바람처럼 움직인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데요. 앞에서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인격적’이라는 말을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이 창조될 때의 ‘루아흐’나, 신약의 ‘프뉴마’ 등을 우리는 인격적인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인간과 똑같이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와 대립된다는 뜻입니다. 그 신, 그 하나님, 그 영은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는 독립적으로 그분의 구원 섭리를 이끌어 나간다는 말이에요. 그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는 그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떻게 진리의 영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객관적인 진리를 전제로 하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런 것들이 다 상대화 되고 맙니다. 민중들이 원하는 게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기독교의 근본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이 세상의 여러 철학 사조와 대화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 신앙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것도 없이 그냥 사회과학 쪽으로 떨어지거나 심리학 쪽으로 떨어져서 기독교를 말한다는 것은 기본 토대가 잘못된 거죠.

다른 이야기가 많았네요. 요즘 계절이 좋아서 그랬어요.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늘 좋죠.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이 세계 안에 우리가 피투된 존재로, 피조물로, 질그릇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고, 우리가 어떻게 우주 생명과 연관이 있는지를 세세하게 촘촘히 알아가는 것이 신앙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공부가 전제되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게 되면 결국 인간론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제게 가끔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담도 있고 다른 부탁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일일이 제가 다 대답하지는 못하지만, 가능하면 대답하려고 노력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남자 분에게서 메일을 받았어요. 이런 호소입니다. 자기 아내가 다비아를 들락거리고 나서부터 교회 구역장이나 그 밖에 교회에서 맡은 일들을 소홀히 한다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던 자기 아내가 교회에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거지요.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해서도 요즘은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면서 조언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인데요. 다비아가 공연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핑계거리를 주는 해방구가 될까봐 염려도 됩니다. 그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그 부부의 신앙생활이 어떤지, 만약 그 신앙생활이 잘못된 거라면 다비아를 통해서 바르게 알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했어요. 이런저런 일들이 다비아를 통해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를 모토로 하는 다비아 운동을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런 문제가 일어날 때 참 난감하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곤혹스럽기도 합니다.

 

기도를 배우자

지난 목요일에 우리가 교회의 본질과 형태를 다루면서 기도까지 말했습니다. 기도를 배우자고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요.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드리는 기도들이 너무 자유로운 기도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자유롭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행해지다 보니까 근본이 흔들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죠. 기도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하기보다는 일정한 형식의 성문 기도를 드리는 게 좋고요. 가능하면 우리보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드렸던 기도문을 많이 읽고, 더 나아가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는 마치 신앙의 시(詩)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시인이 되면 좋은데요.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들을 많이 읽고 외워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기도문들을 많이 읽고 외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를 쓰듯이 고상한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께 아주 정제된 언어로만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진솔하고 자기 영성이 담겨 있는 기도를 자신의 일상적인 말로 드리는 기도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는 어떤 기도형식의 매너리즘에 묶여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에도 모두 형식들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좋은 기도문을 읽고 외우고 배워야 한다는 말은 우리의 기도를 좋게 꾸며서 드리자는 게 아니라 강요된 기도의 형식에서 벗어나서 시인이 시를 쓰듯이 우리의 영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자는 겁니다. 시인은 남의 시를 읽기는 하지만, 표절은 안하잖아요? 그 시인만의 고유한 특성들이 시에 나타납니다. 그게 창조성이거든요. 미술이든 음악이든 다 그래요. 물론 좀 흉내내보기는 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세계에 들어가면 흉내도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흉내를 내거나 표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고,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성령의 존재론적 힘에 의존하게 되면, 성령은 정말 자유로운 영이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말을 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베토벤은 자기가 작곡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소리를 그대로 악보로 그려낸 겁니다. 그냥 그 소리를 따라 적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베토벤의 영혼 속에 울려났던 그 소리는 베토벤의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힘이었던 거죠. 제가 존재론적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요. 그 단어가 어떤 개념인지는 여기저기서 말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달이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스스로의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데요. 그런 개념을 이해하려면 노장(老莊) 유의 글이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회종교학 혹은 사회심리학 같은 책이 도움이 되고, 하이데거의 책도 좋습니다. 많은 시인들의 시들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공부를 통해서 어떤 세계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깨우침은 아주 점진적인 것 같아요. 꾸준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닫혀졌던 세계가 조금씩 열리는 거죠. 수십 겹으로 막혀 있는 커튼들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겁니다. 한 장을 벗겨내면 조금 밝아지고 또 한 장을 벗겨내면 또 조금 밝아지는 거예요. 그게 수백 수천 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한 장만 벗겨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열 장 스무 장을 벗겨내면 조금 밝아졌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많은 경우에는 한 장도 벗겨내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하나를 벗겨내고 뭐를 깨달았다고 해도, 그게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걸 더 벗겨내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요. 벗겨내고 알아간다는 게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거든요. 사람은 주어진 틀 안에서만 살아가면 아주 편하다고 생각해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죠. 스스로 성령과의 영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자유로운 것 같지만 위험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는 성령에 대해 아주 많은 말을 하기 때문에 성령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깨달음은 우리가 막무가내로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진리의 영인 그분과의 소통에서 가능합니다. 이런 말도 좀 추상적이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조건 기도하거나 신앙생활에 매달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아이들도 매일 주어진 방식에만 매달린다면 철부지가 되고 말잖아요. 사춘기를 지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세계관이 넓어지면서 세계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새로운 시각이 열립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계속 철부지로 살아갈 수 있어요. 마마보이처럼 살아도 사는 거니까요. 자기 엄마와 아들은 굉장히 친합니다. 자기들은 거기서 소속감을 느끼고 만족해해요.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으니까 둘은 즐겁죠. 신앙생활도 그와 흡사한 경우가 많아요. 목사님들이 그런 쪽으로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를 의타적으로 만들어야 속된 표현으로 관리하기가 좋거든요. 서로 독립적인 주체적 사유, 여기서 주체적이라는 말은 스스로 성령과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런 사유를 하게 되면 신자 관리가 좀 어렵죠. 성령 충만이라는 말들이 교회에 난무하지만, 실제로 한국교회에는 성령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기도를 배우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제가 지난 목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충분하게 전하지 못해서 다비아의 신학단상에 나온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라는 글을 참조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읽어 보기를 바라고요. 그 글에서 한 가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절대타자’라는 말인데요.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할 대상은 절대타자입니다. 절대타자는 20세기 중반까지 개신교 신학을 대표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어른인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라틴어로는 ‘토탈리터 알리터’(totaliter aliter)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데어 간즈 안데레’(der ganz Andere)라고 합니다. 바르트가 이 용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바르트 혼자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한 인간의 가능성과 낙관론적인 역사 이해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불연속적이고 접촉점이 없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브룬너와 바르트의 논쟁에서도 많이 나와요. 19세기는 이성과 낙관의 세상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의 특징이죠. 인간을 잘 교육시키면 괜찮은 인간이 되니까, 이 세계가 휴머니즘이 가득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에게는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서 그가 내세운 신학 용어가 절대타자예요. 하나님은 완전한 절대타자라는 개념이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바르트가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걸 알았겠어요? 이미 기독교 역사 안에 전승된 신학 개념이었습니다.

제가 다른 데로 나가지 않고 기도 문제에 집중하겠습니다. 우리가 인간이어서 절대타자인 하나님과의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말과 생각을 전할 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될까요?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 전체로 존재하거든요.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다는 거죠. 우리는 시간을 전체로서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 전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7-80년 산다고 해도 순간순간 사는 것이지, 전체를 동시적으로는 살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니까 하나로 사는 거죠. 굳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가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신학단상에서 조금 짚었습니다.

기도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필요가 없고요. 참고로 두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설교집 『믿음의 기쁨』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부분을 인용할게요. 그는 이 설교집에서 기도에 관해 두 편의 설교를 했는데요. 하나는 시편 143편을 중심으로 한 “기도”라는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디모데전서 2장 1-6절을 본문으로 한 “기도에 대하여”라는 설교입니다. 그럼 먼저 짧은 설교인 시편 143편을 보겠습니다. 1960년 5월 9일, 부퍼탈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때 행했던 짧은 설교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군요. 그 소주제 세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예, 소원을 비는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그 한 가지 하고요. 둘째,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항은 본문에 따르면 시편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죠. 모두 그걸 경험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침묵한다는 것은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대답한다는 거예요.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어둡습니다. 대답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분명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직접적인 신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기다립니다. 하나님에게서 직접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환청일 가능성이 많아요. 많은 게 아니라 대다수가 환청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응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떻게 응답 받을 수 있을까요? 판넨베르크는 바로 하나님의 영,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한 부분만 더 보겠습니다. 이 설교를 다 읽을 필요는 없고, 마지막 부분만 보겠습니다. 앞에 했던 설교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이 설교는 1973년 부활절 후 다섯째 주일에 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에요.

 

올바른 간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자기 소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기도는 역시 중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합니다. 즉 자기만의 빵과 용서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본문은 이것을 간구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기도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에서는 판넨베르크가 성령론의 차원에서 기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그 뜻을 실천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소원이라는 우리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훨씬 더 많은 감사와 희망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초월하게 만드는 영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맺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일상에 있는 사소한 것들을 감사하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필요를 모든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신이 우리의 모든 필요가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 우리의 모든 필요는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모든 기도의 시작과 목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오순절에 임하는 성령을 간구하는 것에 집중됩니다.

 

관상기도에 대해

관상기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관상기도를 잠깐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요. 그 항목을 쓴 은명교회의 그 목사님은 신비주의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분입니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책도 번역했는데요. 그분은 마주 대한다는 뜻의 관상(contemplation)기도를 세 가지로 말하더군요. 첫 번째는 마음의 평정, 두 번째는 고요의 기도, 소리치지 않고 고요하게 하는 묵상기도이고, 세 번째는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황홀경이라고 하면 너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아마도 이 마지막 단계가 관상기도의 목표인 것 같아요. 모든 것들이 무아의 지경까지 올라가는 황홀경 말이에요. 이게 바울이 말한 삼층 천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이 기도에는 언어도 필요 없고, 자세도 필요 없어요. 기도문 같은 건 더 필요 없을 거고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영과 온전하게 일치가 되는 그런 상태, 완전히 초월적인 황홀경을 말하고 있어요. 이런 관상기도는 역사가 깊을 겁니다. 그건 제가 잘 모르니까 덮어둘게요. 그런 기도는 기본적으로 기도원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그 쪽으로 기도 훈련이 잘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좀 많기는 합니다.

관상기도에 대해 두 가지만 말하자면, 하나는 이게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하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더군요. 복잡한 걸 다 잊고 고요한 곳에서 황홀경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영적 현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요. 오히려 뉴에이지 쪽으로 깊은 명상 속에 들어가면 이런 가능성이 열릴 것 같아요. 오늘 우리 교회에 대학 교수 한 분이 국선도 사범 자격증을 땄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국선도를 했는데, 수년 동안 하다 보니 상당한 경지에 올라간 거죠. 이야기를 좀 들어 보니, 속에 있는 오장육부를 운동시켜서 모든 신체가 완전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운동이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정신적이기도 해요. 가만히 앉아서 속으로 움직이거든요. 그런데 중간 중간에 한 1-2분씩 완전한 자기 몰아의 경험을 한답니다. 그러면 정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해요. 관상기도에서 경험하는 이 황홀경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이게 자칫하면 마인드 컨트롤에 불과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걸 막기 위해서라도 신학 공부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자꾸 신학 공부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녀서 미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 대학에 가야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성서가 말하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구원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 자기 마음을 다스려서 황홀경에 빠진다면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문선명 같은 사람들도 그런 황홀경에 많이 빠졌을 거예요. 소위 도사라는 사람들도 그렇거든요. 기독교 영성의 경지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황홀경을 영성의 최고 극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게 철저히 성서적이어야 하거든요. 성서는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담아낸 것이고, 그것을 해석한 것이 신학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같이 공부해야만 우리가 단순히 인간의 마음을 평정하게 만들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근본적인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게 잘 구분이 안 돼요. 뉴에이지적인 신앙은 잠재의식을 계발해내는 것인데, 상당히 과학적이에요. 이런 것과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기독교 TV를 보는데요. 며칠 전에 보니 특별 강연이다 뭐다 해서 온갖 종류의 설교와 강연들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찬조금을 받고 하는 거겠죠. 그러나 그런 식으로 기독교 방송이 굴러간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건강을 생각할 때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겠죠. ‘웃음과 기독교’든가, ‘기독교 신앙과 웃음’이든가, 하여튼 그런 주제로 설교를 하더군요. 사라가 아기를 갖게 된다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게 가소로운 웃음일 수도 있고 피식하는 웃음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정말 웃게 되었다, 그러니 웃자, 웃으면서 승리하고 웃으면서 병 낫자고 하더라고요. 수백 명의 신자들이 거기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거든요. 아주 변죽을 울리는 건데, 그런 식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니까요. 이런 관상기도도 아주 세심한 신학적 영성을 토대로 하지 않으면, 자칫 잘못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성령과 악령의 차이는 종이 한 장입니다. 순간적으로 바뀌어요. 천사와 악마는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존재론적인 힘이니까요. 그게 성령의 모습을 할 때도 있고 악령의 모습을 할 때도 있는데, 이걸 구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나우웬의 글인가요? 그걸 구분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악령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요? 자기의 심리나 욕망을 축소하고 기독교의 2천 년 역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기독교 영성도 개인 영성이 아니라 역사가 더 중요해요. 2천 년 역사 속에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신앙의 흔적들이 다 녹아 있거든요. 그들도 부분적으로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바른 길로 흘러왔습니다. 또 그렇게 흘러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신앙의 세계 안에 있는 거고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보다도 우리 개인의 영성, 개인의 경험 등을 더 강조합니다. 그래서 간증도 많고요. 순식간에 악한 영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좀 산만했네요.

하여튼 이런 차이를 구분하기가 힘들다는 거예요. 게다가 성령의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부 자체가 조금 지루하거든요. 이건 정말 공부니까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령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작용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고 어떻게 되었다는 식의 말만 하는데, 그건 결국 자기 연민에 떨어지고 말거든요. 자기 연민이 강할수록, 그걸 많이 자극할수록 신자들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어떻게 비교할까요? 문학 작품으로 설명해 보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천천히 깊이 읽는 것과 TV에 나오는 드라마 속의 치정 관계나 삼각관계를 보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재미있어요? 물을 필요도 없죠. 우리는 통속적인 것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통속적인 것은 검증된 진리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의 반응에 불과해요. 거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삶이 성숙해질 수 없죠. 조금 힘들어도 셰익스피어나 괴테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꼭 서양 사람만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의 고전도 마찬가지예요. 성령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뭐라고 했는지, 루터가 뭐라고 했는지, 현대 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지 들어야죠. 현대 신학자들의 책은 정말 영적인 책이거든요. 그런 책들은 자기 심리에 떨어지지 않고 역사 전체를 내다보면서 성서에 근거한 성령의 활동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교회가 그쪽으로 나가야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텐데, 교회 자체가 그걸 외면하고 있으니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예전예배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2천 년 동안 기독교가 그런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게 녹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의 개신교가 중구난방(衆口難防)식으로 드리는 열린 예배보다는 예전 예배가 훨씬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예전 예배를 형식적이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열린 예배를 드리면서 도취하고 심취하죠. 오빠 부대들이 음악성이 없는 가수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환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건 포퓰리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기도문 중에 괜찮은 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미처 준비를 못했어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려고 했는데 잊었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나 여러 글에서 모아놓은 책인데, 성한용 선생님이 엮어서 만든 『성 어거스틴의 기도』(대한기독교서회)입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어요.

이제 기도 문제를 정리해야겠군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관상기도가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나의 감정적 발현, 심리적 카타르시스, 내 소원의 하소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 섬기려는 우리의 신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통치와 계시가 무엇인지, 생명의 깊이가 무엇인지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우리의 신앙 전반과 연관된 것입니다. 관상기도와 연관해서 그 위험성을 염두에 두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독교는 인간 내면의 어떤 발현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가능성들을 발현시켜서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다른 학문이 하는 거예요. 그건 그들이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건 좋은 일이에요. 상담도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심리치료도 필요하니까요. 아니면 사회복지를 향상시켜서 비인간적인 삶을 사회구조적으로 개혁해 나가는 작업들도 필요합니다. 그런 일들은 세상 학문과 사회 운동이 잘 하도록 우리가 도와주거나 그 방향을 제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건데요. 하나님입니다. 성령이죠. 진리의 영입니다.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로 오는 겁니다. 이걸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말론적 긴박성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 속에서 각자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내면적 삶이나 외면적 삶을 개량해서 구원을 이룬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량은 좋은 겁니다. 민주화, 복지 활동, 휴머니즘, 그리고 우리의 실존적 내면의 통전성을 회복하는 것 모두가 개량해 나가는 것이죠. 더 나아가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 불치병의 치료들도 다 개량입니다. 다 필요한 것들이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개량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역사 패배주의가 아니라 훨씬 더 역동적인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성서가 많은 부분에서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데요. 좀 전에 말한 걸 다시 인용한다면, 인간은 피조물로서 던져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접촉점이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타자인 하나님처럼 시간을 전체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절대적인 생명을 생산해낼 수 없어요. 이것은 단순한 느낌이나 기독교 신앙의 독단론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이고 철학적인 근거를 들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기적에 관해

기적과 관련된 책들을 소개해 달라는 분이 있는데요. 다비아에 보면 추천도서 꼭지글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책 중의 하나는 『성경은 무엇을 기적이라 부르는가?』(알폰스 봐이저, 분도)에요. 지금 소개하는 책은 거기에 없을 겁니다. 『이적』(풀러, 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건데요. 진연섭 씨가 번역한 자그만 책입니다. 여러분, 신학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가장 오래된 학문입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고 자기 비판적인 학문이에요.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조그만 상식을 가지고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참 경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티기독교나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이적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가 여기서 한 부분을 읽으려고 하는데 들어보세요.

 

예수는 이적들을 행했는가? 보수적인 변호가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이적을 행할 수 있다. 예수는 화육한 하나님이었다. 그는 이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많은 3단 논법처럼 이 주장은 본말을 전도한다. 이 주장은 결론이 있어야 할 선험적 가정에 의존한다. 예수가 화육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 예수의 역사와 대면한 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단이지 우리가 이 역사에 접근하기 전에 이루어진 가정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겁니다. 이 저자는 우리가 최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해요.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하다 아니다 하는 식의 선험적 선언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기적은 자연적으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의 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 기적이 무조건 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전승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기적의 배후를 어느 정도까지 소급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 자신에게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그 전승들을 연구하는 거예요. 일일이 우리가 전승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해석이에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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