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기독교 신앙과 생명 경험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263 추천 수 0 2012.06.07 10:35:27

제 29강

기독교 신앙과 생명 경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금 동영상으로 소리도 잘 가고 화면도 잘 나오죠? <기독교사상> 5월호가 나왔습니다. 표지 인물은 장애인이면서 경희대학교 약대 겸임교수인 장우영 권사이십니다. 처음에 받아봤을 때는 탤런트인가, 하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신학기고가 하나 실렸는데요. 구로감리교회의 조수현 목사님이 쓴 글인데, 제목이 “신학은 민중신학이다”입니다. 부제로 ‘정용섭 박사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읽고서’라는 제목이 달려 있어요. 제가 지난달에 진보신학을 비판하면서 주로 민중신학을 다루었는데, 그걸 읽고 많이 섭섭했던 것 같아요. 여기에 그에 대한 반론을 실었습니다. 제가 한 번 훑어 봤어요. 제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를 해서 다시 반론을 쓸까 합니다.

진보신학, 혹은 민중신학이 한국 신학과 교회에 끼친 영향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영향력이 쇠퇴해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한국교회와 신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저를 운동권 목사라고 하는데요. 저도 이런 진보신학이나 진보운동 쪽에 있지만 그러면서 늘 한 구석에 불편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너무 민중 프레임에 빠져 있어서, 결국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신학, 하나님, 기독교 전통, 영성 등을 좀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비판적 성찰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론이 나오니까 더 계속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작년 12월에도 <한국설교학회>에서 발제한 두 편의 논문이 올라왔는데 그것도 주로 저에 대한 비판이었어요. 하나는 총신대학교 설교학 교수이신 류응렬 박사가 썼고, 다른 하나는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신 정인교 박사가 썼습니다. 두 분 모두 상당히 보수적이죠. 그러고 보니 저는 보수 쪽이나 진보 쪽이나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고 있네요. 지난 수년간에 걸쳐서 눈치 보지 않고, 대상이 누구든 전혀 개의치 않고, 소위 말해 구도정진의 자세로 설교비평을 했고, 그와 관계된 글들을 쓰다 보니까 좀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어떤 때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탓인지, 제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데, 나중에 한번 읽어 보세요.

<기독교사상> 표지에 광고가 실렸습니다. 뒤표지입니다. 『설교의 절망과 희망』, 정용섭의 설교비평 완결판이라고 광고가 나갔어요. 아마 한두 주일 안에 시중에 깔린 텐데요. 세 권으로 설교비평은 끝나게 됩니다. 어쨌든 지난 몇 년 동안 쓴 것들이 결실로 맺어져서 고생한 보람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인터넷이나 신문을 통해 들었겠지만, 박경리 선생님이 혼수상태라고 해요. 작년에 폐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는데요. 연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수술을 하지 않았고, 그 후유증으로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최초의 노벨 문학상이 나온다면 김지하나 고은보다 박경리 선생님이 더 유력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요.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실 것 같아요. 토지를 한 30년 동안 썼던가요? 『김약국의 딸들』 같은 단편 소설도 있고,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작가인데, 혼수상태라니 마음이 좀 아픕니다. 박경리 선생님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삶이 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할 테니까 제가 구구절절이 다 말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걸 보면서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말 그대로 선생님이죠. 글 쓰는 분으로서만이 아니라 그분의 가치관과 세계관 등이 존경받을 만한 분이니까요.

 

가르침과 깨우침의 한계

여러분은 어디에서 살아 있다는 경험을 합니까? 지금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서 대화하는 이 순간이 살아 있다는 경험일까요?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들이나 애인처럼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앉아서 차나 맥주 한 잔하면서, 신앙과 삶과 문학과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말하는 시간이 살아 있다는 경험일까요? 아니면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순간인가요? 여러분은 언제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까?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기는 합니다.

평소에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교육인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해서 어머니나 아버지를 통해 생각하도록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크면서도 늘 그런 생각과 질문을 놓치지 않거든요.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그런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청소년 시절에 그런 쪽으로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뭔가에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이 자기 맘대로 됩니까? 그러나 사람은 원래 거기에 눈을 뜨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우리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고요. 또 어떤 면에서는 종교와 상관없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이 뭔가를 생각하듯이, 근본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동물은 그런 생각을 안 하거든요. 주변에서 누가 죽더라도 그저 본능적으로 조금 느낄 뿐,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그냥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요. 죽음이 자연의 일부로, 그냥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자연 안에 있는 거죠.

그런데 인간은 자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힘든 거예요.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 파묻혀 있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등을 전혀 경험하지 않고 지나치게 될 겁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와 같은 거죠. 어머니 뱃속에 있어도 의식은 없는 겁니다. 실존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자기 실존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어머니와 하나가 되어 있는 거죠. 공서(共棲)적 합일입니다. 태아들은 어머니와 일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임신한 여자가 불안하면 아이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하죠? 그러나 태아 스스로는 그 불안을 실존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은 아마 그러한 상태일 겁니다. 동물들도 그렇고요. 그러나 우리는 자연에서 벗어나 있거든요. 실존(existence)한다는 말이 거기서 ‘어디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라고 하죠? 탈주라고도 할 수 있구요.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있어서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화하고 있습니다. 이게 동물과 인간의 차이겠죠. 이것은 인류학에서 기초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말하는 인간론, 즉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적인 존재이며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그게 다 세계관이에요. 제가 언제가 그렇게 말했죠? 기독교 신앙은 곧 세계관이라고요. 어떤 쪽으로 내가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내 운명을 던지는 거라고요. 불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무속인들도 마찬가지죠. 종교가 없더라도 나름대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는 일반 세상의 철학이나 학문과 상관없다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초월적이고 관념적이고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연역적인 성격도 있지만, 귀납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일반 학문의 인간 이해와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물론 서로 구별이 되기는 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공통의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 자연적이지 않은 부분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에서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어 거기에 바람(루아흐)을 불어 생명이 되게 했다는 것이 자연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자연과 달리 인간은 문화적이고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인데, 이게 영적인 것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구별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기의 실존이나 삶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통찰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현대로 올수록 이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런 사고가 막히는 이유는 뭘까요? 잘못된 교육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을 자연적으로 놓아두면 오히려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는 제가 루소의 교육론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냥 자연 상태로 내버려 두자는 거예요. 이미 우리 안에 영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대로 그냥 내버려두자는 거죠. 그래서인지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가끔 이야기를 하면, 서로 생각이 다른 걸 느끼겠더라고요. 그들은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아이들을 깨우치고 교육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더군요. 저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는 게 오히려 생명의 근원과 맞닿을 수 있는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와 비슷한 교육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장자의 책을 읽어보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고도의 음악 기술, 즉 창 같은 것들은 음악의 소리를 억압하는 거니까 가르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톨스토이는 어떨까요? 그분의 『예술론』(신원문화사)이라는 책을 옛날에 본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도 다 마찬가지지만 읽은 책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 버려요.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거든요. 그래도 저는 그게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이 다 남아 있을 수도 없고, 남아 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톨스토이나 장자 같은 사람들의 모든 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잖아요? 다만 그들이 어떻게 진리 혹은 생명 이해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을 알았으면 가능한 대로 다 잊어버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나오는 깨우침을 얻는 게 중요한 거죠. 조병화 시인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시를 쓰려고 하는 학생과 선생과의 대화인데요. 조병화 선생이 학생에게 한 말입니다. “시상이 떠오르면 잊어버려라. 다 버려라. 다 잊어버리고 나중에 다시 자네 내부에서 뭔가 나오면 그때 시를 써라.” 이럴 때 살아 있는 시가 된다는 뜻이겠죠.

저는 신앙도 그렇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너무 명료하게 다 정리해 갈 수는 없어요. 바람을 어떻게 우리가 딱 끊어서 잡아낼 수 있겠어요? 그렇게 거기에 매달리는 건 참다운 신앙 공부가 아닙니다. 제가 몇 번 예로 들었듯이 구구단을 외우는 게 수학 공부는 아니거든요. 성서로 말하자면,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 따라가고 복습하고 외울 정도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끝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소화된 이야기로 하나님에 대한 표상, 즉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다시 창조적으로 나와야 하는 거예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현실성(Reality of God)은 없고 우리의 생각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계시론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계시 방법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론의 문제이기도 해요.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 조금 곤란합니다. 제가 조금 위험한 말을 했나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이사야의 진술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말라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죠. 물론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은 오로지 이사야가 아주 고유하고 특별하게 경험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식론적인 한계가 있었어요. 그는 하나님의 일부를 경험한 겁니다. 일부라는 걸 잊지 마세요. 코끼리의 털 하나, 발톱 하나 정도를 경험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정직하고 아주 분명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의 보도를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이 말도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좀 조심스럽습니다. 다른 메타포로 설명한다면,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는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을 그려내는 그 퍼즐은 무한한 크기예요. 우리가 아무리 퍼즐을 맞춰도 마지막으로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으니까요.

톨스토이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로 왔군요. 톨스토이도 『예술론』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고급 예술 같은 것들이 사람을 잡는다고요. 발레 주인공이나 오페라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주인공 한 두 사람을 위해서 그 주위에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고 말이죠. 고급예술은 사치라고 했던가? 하여튼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육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이야기가 너무 나왔나요?

하여튼 성령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니까요. 따라서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들, 소위 말해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인데, 피교육자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자꾸 피교육자들의 인격과 세계관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휘젓고 뒤집어 놓지 말고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고 창조의 영입니다. 선생이라는 사람들은 그 영과 소통하는 역할만 좀 하자는 거예요. 저는 수학선생이나 음악선생도 가능하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반 학문도 그런데 신앙은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내일과 모레 이틀 동안 감리교회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설교학 강의를 할 텐데, 그때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 목사들이 청중들의 삶에 개입하지 말라고 말이죠. 한 영혼의 구원 문제는 생명의 문제거든요. 제가 오늘 생명 이야기를 하다가 옆으로 나갔는데요. 생명은 삶이고, 삶은 살아 있다는 경험입니다. 한 영혼의 구원, 삶, 생명과 같은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책임질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설교하는 사람, 목회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영혼에 대한 책임을 성령에게 맡겨야 합니다. 성령론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목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자꾸 신자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은 적용 중심의 편의주의 설교입니다.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는 결코 바람처럼 자유롭게 불어오는 영과의 만남이 힘든 거죠.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신자들의 모든 삶을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생명 경험의 근원

삶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살아갈 뿐이지 살아 있음을 확인하지는 않습니다. 왜 안 하는지를 앞에서 말한 거죠. 오늘의 교육, 문명, 문화가 이것을 막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처럼 저녁 먹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게 놔두면 그게 가능해요. 여기에도 저와 비슷한 연배에 있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어렸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저 어렸을 때 친구들과 같이 별을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과수원 근처에서 서리 같은 것도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 친구들과 대화한 내용도 기억이 나네요. 2천 년이 되면 우리가 몇 살일까, 하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대화의 기회가 전혀 없잖아요.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면 TV에 나오는 연예인을 보면서 혹은 인터넷에 들어가 그런 경험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상당한 부분은 막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져 가고요. 신앙생활에서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와 신앙을 연결하는 일들은 잘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업적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경험합니다. 아파트가 몇 평이고, 몇 채가 되고, 자기의 지위라든지 아니면 자식을 어떻게 키웠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많은 경우에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특별히 자식에게서 그걸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삶이 허무하다가도 아이들을 보면 힘도 나고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잖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갑니다. 우리가 가진 아파트, 저금통장, 지위, 자식들, 설교비평을 했던 책들, 예술 작품 다 마찬가지예요. 제가 오늘 설교조로 강의를 하네요. 미안합니다. 우리가 그런 걸 통해서 살아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쁜 건 아니지만 사실은 속는 겁니다. 그냥 지나가버리는 건데, 속는 거 아닌가요? 지금 우리가 다비아에서 활동을 하지만, 한 5백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다비아를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5백년 후에는 다 지나버리거든요. 우리가 지금은 이 안에 들어와서 진지하고 치열하게 뭔가를 하고 있는데, 시간과 함께 이것이 다 지나가버린다는 거죠. 바울이 그런 뜻에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하는데요. 그건 바울의 독특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홍수처럼 떠밀려 지나가고 있어요. 여기에서 이제 기독교 신앙이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 있음을 경험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겁니다. 이 대답은 여러분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경험하죠. 살아 있다는 것이 사실은 구원의 문제거든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생명인데, 우리는 죽음 이후의 생명까지 생각하니까요. 다 휩쓸려 사라지는, 잠정적으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명제가 기독교인들이 붙들고 있는 유일한 구명선입니다. 그것 하나에 우리가 매달려 있어요. 우리가 자주 들은 것이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왜 생명이냐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 전체와 연관이 되니까, 이런 말들은 자주 나눌 필요가 있어요. 또 우리가 늘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는 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것이 분명한지, 그렇다면 왜 그런 건지,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자기도 납득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목사에게서 그런 설교를 들었으니까 그런가 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우스운 게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걸 확신하나요? 열광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진리로서 인식하고 있냐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를 믿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를 믿어도 죽습니다. 또 예수를 믿어도 허무합니다. 외롭기도 하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없습니다. 불교 신자나 이단에 속한 사람과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지금 하는 말은 기독교의 교리 차원이 아니라 생명 경험의 차원에서 하는 겁니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경험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느끼는데요. 우리도 신앙적으로 희열을 느낄 수 있어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거나 대단한 게 없거든요. 실패하고 좌절하고 실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생명으로 믿나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나와 있듯이, 왜 그렇게 믿느냐는 겁니다.

 

기독교의 생명 경험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겠습니까? 5초만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칭의론만 해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게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실제적인 삶에서 누가 더 나은지 싸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러분은 의로워질 수 없어요. 조금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의롭다고 인정만 받는 거예요. 실체론적인 것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에서의 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정한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의 삶을 던진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의롭지 않죠. 의롭다고 인정만 받을 뿐이죠. 언제 의로워지나요? 이것은 종말론적 문제입니다. 생명이 온전하게 이루어졌을 때 의라는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의와 구원 같은 것들이 완성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생명을 온전하게 보지도 못하고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더 전개하려면 에덴동산이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문제나 이사야의 예언적 상상력에 나오는 묵시 문학들도 이야기해야 하는데요. 그것은 접어두고, 실질적인 차원에서 진화론적인 문제만 짚어 보겠습니다.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 조상이 있었습니다. 3백만 년 전이에요. 그 이전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 보세요. 그때 인류의 조상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3-4백만 년이 지났거든요. 지구의 45억년 역사에 비하면 이것도 긴 건 아니죠. 앞으로 천만년, 아니 3백만 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겁니다. 그 후손들도 호모사피엔스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걸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때 그들은 어떻게 생명을 경험하고 살까요? 지금이 한 과정이라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으로 생명이 완성될 것을 믿고 있고, 그때 가서야 생명이 무엇인지를,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은 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미래에 모든 것이 되겠거니 하고 끝나 버린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겠죠.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종말론적으로 생명이 완성되지만, 오늘의 삶에서도 부분적으로나마, 그리고 부실하게나마 생명을 경험합니다. 여기서 부실하다는 것은 인정하겠죠?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은 곳곳에 허점이 많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생명의 완성, 부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가 없어요. 순간적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삼층 천 같은 경험은 가능하겠죠. 그러나 그것도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두발을 딛고 살아야 하니까요. 허점이 많다는 것은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그게 현실이라는 거죠. 그러나 그런 현실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종말의 궁극적 생명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 완성된 생명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요. 감추어져 있으니까요. 그 새로운 영이 오늘 우리의 삶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개입해 있다고 믿는 게 기독교인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삶이 불완전하지만 소중한 거예요. 바로 미래에 완성될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게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신학 공부입니다. 그 신학 역시 완전한 대답을 제공하지는 못합니다.

종말론적인 완성, 그런 세계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모르는 방식이라는 말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부활을 하나님의 은폐된 궁극적 생명 세계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겁니다. 은폐성은 하나님과 생명을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 개념일 뿐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고요. 다 숨겨져 있으니까요. 물리의 세계나 생물의 세계도 은폐되어 있다가 나오는 거잖아요? 진리의 속성입니다. 진리는 드러나는 거예요. 거기에는 은폐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종말까지 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자기를 탈(脫)은폐하는 길을 걷게 되는데, 그게 바로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계시입니다. 계시는 끝난 게 아니라 계속 가야만 하는 거예요.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말하고, 이것은 계시가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지, 계시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종말까지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철학이나 일반 학문이 말하는 것들에 비해서 근거가 부족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세밀하게 포착해 내지 못하니까 독단적으로 말하고 끝내버리는 겁니다. 신학은 2천 년 동안 진리의 차원에서 철학을 도반으로 대했기 때문에 신학에는 치밀한 인식론, 존재론, 논리학 등이 다 섞여 있습니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기쁩니까? 신랑이 신부를 기다린다는 묵시문학적 표현이 복음서에도 나타나 있죠.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합니다. 그것은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다시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올림을 받은 거예요. 승천은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으로 올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공간적인 하늘로 올라갔다는 게 아니에요. 그 예수님은 이미 종말에 일어날 생명으로 올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해요. 그 영광이 바로 궁극적 생명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그 예수에게서 종말에 일어날 생명이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존재인 그분에게서 종말의 생명이 유일회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도 그런 생명으로 올림을 받는다고 믿는 거고요.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차치하고,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 있습니다. 이것을 상대화시키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른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리스도가 예수만이 아니라 여럿일 수 있다고 한다면, 마르크스나 전태일도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이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라는 사실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통하는 이야기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보편적 해석학에 근거해서 왜 예수가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자인지를 변증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나 혼자서 위로받고 심리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쪽으로 나가야 하고요.

제 말이 옆으로 나갈 것 같아서 길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믿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게 대해 나 몰라라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가 종말론적 세계의 완성자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모든 운명을 걸어두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하고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표현을 여러분은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계 전체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교회의 형태들, 다시 말해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목사, 장로, 당회, 여성안수 같은 것들이 어떤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구체적인 대안들이 모색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서로 간의 이해타산에 얽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우주론적 구원과 연관된 문제예요. 우리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종말에 완성될 놀라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상상력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결혼할 날짜를 받아 둔 신부처럼, 혹은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보초병처럼 그 때를 간절히 기다려야 해요.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 내주하심의 때를 기다리는 거죠.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영혼은 아주 거룩하고 어마어마한 주제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고 교회를 조직해야 하는지, 좀 심각하게 고민해야겠지요. 이러한 신학적 바탕 없이 교회가 잘 되기 위한 방식으로 교회를 꾸려나가다 보면 세속 단체와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일종의 NGO인 거죠. 흥사단이나 YMCA처럼 말이에요. 그것도 아니라면 동창회 같은 겁니다. 겉은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은 그런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니까요. 기독교가 그런 끼리 집단에 머물러 있다면 부끄러운 겁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된다는 루터의 말은 옳습니다. 우리가 유한하듯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교회의 형태들도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그런 것들도 계속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종말이니 창조니 하는 거시담론은 너무 멀리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밥 벌어 먹고 살아야 하고, 만날 싸워야 하는 거 다 압니다. 그렇게 싸우기도 하면서 사십시오. 그러나 다시 한걸음 앞으로 나가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경험을 어디서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세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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