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강 성령에 대해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232 추천 수 0 2012.06.14 10:40:57

제 33강

성령에 대해

 

한국교회에서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금년에는 공교롭게도 어버이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이 겹쳤습니다. 5월이 될 때마다 설교 문제로 곤혹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은, 왜 가정 문제를 설교의 주제로 삼을까 하는 겁니다. 어린이주일이 되면 어린이를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를 하고요. 어버이주일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이야기, 부부끼리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 그런 것들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방식으로 끌고 가야 할 문제들인데, 그런 것들을 설교의 주제로 삼는다는 게 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기본적인 소양이 갖춰진 사람이라면 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일이거든요. 주일 공동 예배는 케리그마에 집중해야 하는데, 교양과 상식에 관한 뻔한 이야기들만 하게 되니까 너무 아쉬워요. 설교가 나이브해진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취향이 가벼움이라는 말인데, 대중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하기는 해요. 어떤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모양만 조금 바꾸는 대중주의적 설교들이 어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어버이주일이어서 설교 시간에 그 내용을 한마디 언급할까 하다가 그냥 성령강림에 대한 이야기만 했어요.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니까요. 사실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중요하지 않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더 뿌리가 되는 게 있고 뿌리에서 조금 올라오는 게 있다는 차원에서 보면, 성령강림은 그 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거든요. 설교에서는 성령이 누구냐 하는 성령의 현실성에 대한 문제를 짚었습니다. 제가 현실성이란 말을 설교에서는 쓰지 않았지만, 바로 그걸 말하려고 했어요. 거룩한 영의 현실성(reality of Holy Spirit)은 우리가 초기 기독교의 원초적 신앙과 일치할 수 있는 디딤돌이거든요.

어떤 질문으로 시작해야 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합니다. 성령이 뭘까요? 성령을 경험했습니까? 경험했다면 어떤 근거가 있는 걸까요? 성령은 보이지 않잖아요. 우리가 들은풍월은 있어요. 아마 가장 일반적인 성령 경험은 기도하는 중에 일어나는 뜨거운 체험, 다시 말해 방언의 은사나 아픈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경험하는 일일 겁니다.

우선 성령에 대한 책을 한두 권 소개할까 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은 딱 정해져 있어서 그것만 외우면 되는 게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역사만큼의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고 또 앞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만큼의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해주는 책이 지금 여러분께 보여드리는 책인데요. 『생명의 영』(대한기독교서회)이라고, 그 유명한 몰트만이 쓴 책입니다. 생명의 영은 곧 성령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데어 가이스트 데스 레벤스』(Der Geist des Lebens)이고, 부제가 붙어 있는데 『아이네 간즈하이틀리헤 프뉴마톨로기』(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전적이고 전체적인 성령론인데, 번역은 총체적 성령론으로 되어 있네요.

몰트만이 말하는 성령론이 성령에 대한 기독교의 총체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몰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성령에 관한 것들을 짚고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합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런 책들도 같이 읽고 토론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겠지요. 그냥 큰 제목만 몇 개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부에서는 성령의 경험들이 나옵니다. 하나님 경험, 역사 경험, 삼위일체, 영성 경험 등에 대해서 쭉 나오는데요. 여러분은 성령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2부에서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라고 되어 있는데, 설교 제목 같네요. 해방신학을 도입해서 이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꽤 깁니다. 성화의 문제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신비 경험도 있습니다. 3부는 성령의 사귐과 인격입니다. 제가 지금 이 책의 내용을 말하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그렇게 간단하게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뜨거운 경험이 아니라, 기독교 2천 년 역사 전체, 생명 전체, 어쩌면 우주 전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겁니다.

 

에벨링의 성령론

그 다음으로 소개할 책은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의 『신앙의 본질』(대한기독교서회)입니다. 거기에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신앙의 용기”라는 제목으로 성령을 다루고 있는데, 재미있습니다. 에벨링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이해와 용기의 차원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고, 알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이해의 영인데요. 그걸 에벨링은 자신의 독특한 시각으로 용기라고 말해요. 단순히 용감하다 혹은 씩씩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 전체를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무(無)로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용기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제가 잠시 여러분께 읽어 주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에벨링이 인용한 루터의 글인데, 재미있어요. 루터가 그의 전집 중 5권 어딘가에서 신앙의 사건은 용기라는 차원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에게 기대를 거는 자로서 사람이 도달할 곳이 있다면 자신의 무(없어짐, 없음) 외에 또 다른 곳을 생각할 수 있을까? 무로 사라질 자가 그가 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무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무로 돌아가는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피조물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만물을 한 손에 쥔 하나님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말대로 그는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있다. 그러니 세계를 뚫고 떨어지라. 그때 너의 떨어질 곳은 어디인가? 역시 하나님의 손과 손 안이 아니겠는가?

 

에벨링이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은 신앙의 용기 문제를 말하려고 한 겁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무(無)가 된다는 게 맞는데요. 그러나 그 무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걸 말하고 있어요. 그런 것은 용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죠. 이것은 술김에 시비를 거는 만용이 아니라 존재와 무, 무와 존재의 차원까지도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뛰어드는 삶을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천당 간다는 말들을 정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복지를 극대화 하는 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개념으로 천당을 생각한다면, 그건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이 연장되거나 더 풍요로워지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무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도 하나님께 우리의 실존을 맡기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에벨링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에 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짚고 있습니다. 그걸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자기 이해에서 생존의 표지였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한 고린도전서 2장 12절 이하에도 성령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는 거예요. 이 말이 나왔으니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도 나와 있고, 그 외에도 여러 번 성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게 뭘까요?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훈련으로 극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차원일까요? 도대체 성령을 받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나와요. 그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바람과 불의 혀 같은 것들이 방 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오순절이라고 하거든요. 유월절에서 50일이 지난 후가 오순절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절기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의 농사 절기와도 연관이 돼요. 유월절에 예수님이 체포를 당해 돌아가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유대교로 보면 유월절이고 우리로 보면 부활절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50일 이후를 유대교는 오순절로, 기독교는 성령강림절로 지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다음 40일 동안 지상에 있다가 승천한 후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졌잖아요? 그렇게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를 계산하면 10일 정도 차이가 나요. 이런 숫자는 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에게 특별히 임했다는 말은 아주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존재했었어요. 구약 시대에는 창조 때부터 활동했습니다. 그 뒤로는 이스라엘의 전쟁이라든지 여러 가지 역사 과정에서 성령이 활동했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생명 사건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폭넓다기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죠. 바로 생명의 영이니까요. 오순절에 딱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생명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을 끌어가는 영이 있었으니까요. 이 영을 구약에서는 ‘루아흐’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프뉴마’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바람, 숨, 영 등의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요. 고대인들의 생명 이해였던 거죠.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고 말했을까요? 제가 이 시간에 다 설명할 만큼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냥 생각해 보세요. 이 문제를 특히 사도행전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사도행전이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가 아니니까요.

사도행전에 대해 참고적으로 하나만 짚는다면, 사도행전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기 위한 누가의 초기 기독교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모든 사건들을 초기 기독교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터무니없는 이야기란 말은 아니에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 성령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부활은 바로 승천이에요. 이것이 곧 성령 사건이죠. 그런데 고대인들이 굳이 날짜를 구분한 것은 궁극적인 어떤 것을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구약에 근거해 해석하는 과정에서 3일 후의 부활이나 40일이라는 숫자,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예언한다고 하는 요엘서의 내용들이 다 연결되었던 거예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특별한 부활 현현은 은폐된 생명 사건이었어요.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이 중요하지요. 이 예수님의 생명 사건이 곧 승천과 연관되는 문제들이고, 생명의 영인 성령의 임재로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람과 불같은 것으로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말은 실질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도 다 종교적인 메타포거든요. 그 당시는 이런 방식으로 궁극적인 어떤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제가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주 어린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어머니의 살 냄새를 맡으며 어떤 궁극적인 것을 경험하잖아요? 어머니를 느끼죠. 그러나 그것이 어머니 자체는 아니에요. 그래도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를 경험합니다.

제가 좀 전에 고대인들이 생각한 루아흐와 프뉴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모두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건 좀 틀린 거죠. 바람은 공기의 이동인데, 이걸 어떻게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에요. 오늘의 방식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이 영은 바람이 아니라 물리학에서 인정하는 장에 가까울 겁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장이론(場理論, Field Theory)이요. 사람은 그 시대의 세계관으로 생명의 궁극적 신비나 능력 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성령은 그들의 생존과 관계된 문제였어요.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나요? 언제 어떤 경우에 성령이 내게 임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냥 질문으로 끝낼게요. 이에 대해 에벨링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부분만 조금 읽어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자에게 기독교가 지닌 새로운 것을 묻는다면 그는 새 교훈을 지적하지 않고 성령의 새로운 현실성을 가리킬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는 이미 말세에 임하게 될 영의 은사를 말한 바 있다.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에서 영이 온다는 것과 종말론의 결합은 더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자신을 마지막 때의 공동체로, 이 공동체 실존을 영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이해한 것은 이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바울도 여기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에 의하면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관계는 죽이는 문자에 대해 살리는 영의 관계와 같다.(고후 3:6)

 

둘째, 성령 경험과 기독교 신앙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약 전체를 꿰뚫고 있는 사상입니다.

셋째, 신자는 누구나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한 자로 성령에 참여한다는 신앙고백과, 성령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를 나눠주고 영적 감동을 일으킨다고 본 초기교회의 경험 배후를 구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에 참여한다는 것과 은사를 받는 것의 배후를 구별해야 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 말은 영에서 오는 광신의 위험성을 뜻합니다. 바울도 은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문제가 있다고 말하죠. 질서 있는 은사를 말하고 있으니까요. 초기 기독교에도 이미 광신의 위험성이 있었다고 지적해요.

넷째, 성령은 인간의 생래적 구성요소도 아니고, 그리고 인간 자신의 소유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번역이 직역이라 좀 그렇군요. 성령은 인간이 소유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뭘까요? 성령은 인간에게 통용되는 인격이라기보다 위격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페르소나’는 그냥 인격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지만 삼위일체의 관점에서는 위격이라고 하는 게 좋아요. 우리가 그 성령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령에게 소유당하는 거죠.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이용해서 점을 친다거나 뭘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이 주도하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의 문제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성을 극복해야 해요. 기독교 신앙에 주관성이 너무 강합니다. 전부 ‘나’ 중심이잖아요.

지난주일 설교에 누가 댓글을 달았는데요. 사람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이 병을 고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아주 본질적인 믿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한 게 아니냐, 따라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거예요. 성서, 특별히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님의 진술 자체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의 눈입니다. 복음서 기자의 눈, 영적인 눈 말이에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에서는 이 사람의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이걸 혼동해요.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거야. 예수님이 믿음을 보고 어떻게 해준다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늘 믿음을 강조합니다. 제가 믿음 일원론, 혹은 믿음 만능론의 위험성에 대해서 여러 번 지적을 했는데요. 물론 믿음이란 말이 성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설교자들도 성서의 어느 부분에서든 믿음을 끌어다가, 즉 아브라함의 믿음, 다니엘의 믿음, 누구의 믿음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약간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성서로부터 청중에게로 이르는 어떤 길을 내는 것이 설교에요. 성서를 주석한다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을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설교하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 어떤 필터가 필요합니다. 필터를 통해서 무언가 걸러져야지요. 성서 텍스트가 청중에게 도달할 때까지 그것을 풀고 걸러내는 게 필요해요. 그게 조직신학의 역할이에요. 믿음이라는 걸 교의학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 어떤 한 텍스트에서 거론된 믿음이 아전인수나 침소봉대로 전달되지 않고 적절하게 정리되어 청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겁니다. 이 작업이 우리에게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이런 차원에서 제가 큐티(QT)식 성서 읽기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평신도들이 조직신학적 훈련을 충분하게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서 본문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에 치중하니까요. 성서해석은 신학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힘든 일이에요. 그쪽으로 전문가라 할 목사들도 잘 안 되는 일인데, 그런 준비조차 없는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어요? 그러니 성서를 읽으면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마음에 맞는 것만 보는 거예요.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거죠.

 

성령과 교회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몰트만 책이네요. 제가 주로 현대 신학자로는 판넨베르크, 몰트만, 에벨링, 융엘 같은 사람들의 책들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그 쪽 책들이 많아요. 몰트만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책을 아주 재미있게 씁니다. 책이 아주 쉬워요. 몰트만이 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한국신학연구소)라는 책은 교회론입니다. 아까 제가 보여드린 『생명의 영』(대한기독교서회)은 직접적으로 성령론이고, 이 책은 교회론인데요. 사실은 성령론적인 교회론이에요. 그만큼 성령론이 중요합니다. 종말도 사실 성령의 문제거든요. 요엘서가 말한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아까 에벨링의 책에서 그가 말한 대로, 초기 기독교가 자기들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이해한 것은 바로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정체성을 그 관점에서 이해했던 거예요. 초기 기독교는 요엘서와 에스겔서가 말하는 성령이 자신들의 존재를 결정짓는 데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생존의 문제였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몰두했던 성령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설교조로 듣는 정도에 머물러 있어요. 심지어는 부흥회 스타일로 말이죠. 매일 박수치면서 하는 거 있잖아요? 저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 꽤나 그런 데 쫓아다녔어요.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하고 있으니까 참석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또 주변에서 그렇게 하면 따라 하지 않을 수도 없고요.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라고 찬송하면서 빠른 박자로 손뼉치고, 앞에서는 북도 치죠. 그럼 대개 감정적으로 흥분하게 됩니다. 그렇게 대여섯 곡 부르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성령을 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들은풍월로만 알고 있는 것은 몇 군데 나와 있는 성서 본문을 날 것으로 먹는 겁니다. 이 표현이 딱 맞네요. 날 것, 날고기, 삼겹살이나 쇠고기를 생으로 먹는 거랑 같습니다. 날고기도 분명 고기는 고기죠. 성서 본문 하나하나에는 어떤 깊은 영적인 체험이 들어 있어요. 사실은 그것으로 요리를 해야 합니다. 요리가 아까 말한 필터링이에요. 그런데 일반 신자들은 요리나 필터링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버립니다. 보통 청교도적인 영성이나 경건주의 영성 안에서 다 해결해 버리죠. 그건 요리가 아니에요. 모든 성서를 볼 때마다 이미 그 시각으로만 봐요. 다 은혜로운 거죠. 사실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만족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 은혜 주관성을 극복해야 하는데, 어려운 것 같아요.

이제 정리가 좀 되었지요? 성령에 대한 문제도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에벨링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정 목사가 그렇다고 하니까 소유가 아닌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이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소유가 아니면 뭘까요? 존재겠죠. 존재. 그런 점에서 성령을 인격자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하니까요. 불고 싶으면 붑니다. 이걸 여러분이 하루 빨리 눈치 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유대로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믿음을 강조하는데요.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했거든요. 믿음이 무익하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없다는 겁니다. 상관없다는 표현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분이에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도 그분이 원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아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의로움을 얻는데 믿음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요. 우리가 복음의 차원에서 믿음이라고 할 때 늘 상대적으로 말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죠? 율법입니다. 율법과 상대적 의미에서 믿음인 거죠. 우리가 어떤 노력이나 업적 등을 통해서 하나님께 점수를 얻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의존할 때 우리가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제가 아까 믿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겁니다. 믿음뿐 아니라 성서 안에 있는 많은 내용들이 우리의 삶에 직접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날고기, 생고기예요. 구워 먹어야죠. 그 날고기를 굽고 요리한 것이 지난 2천 년 동안의 신학의 역사예요. 신학의 역사, 즉 조직신학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오직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간구해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이니까요. 하나님은 소유할 수 없잖아요. 여러분의 믿음, 여러 가지 노력들을 조금 내려놓고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통치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져 보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멍청히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운행하는가, 어떻게 창조하고 어떻게 완성하시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부활의 사건을 일으켜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었는가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을 깊이 알게 되면 그 다음엔 우리가 저절로 행동하게 돼요.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만큼 행동합니다. 에벨링이 뒤에도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중에 이 책을 읽어보세요.

 

필리오케

아까 잠시 이야기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성령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또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말해요. 어떻게 보면 성령 만능론처럼 성령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성령을 강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과연 그들이 경험한 그 성령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요. 그것을 한두 마디로 끝내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어 성령은 누구에게서 왔는가 하는 질문도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거치면서 그 유명한 문구가 나온 거예요. ‘필리오케’(Filioque)라고 하죠. 이 말은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인데요. 처음에는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으로 이해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필리오케’가 문서 안에 들어갔습니다. 성령을 규정하는 문장 안에 원래는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말만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리고 아들로부터’(필리오케)라는 말이 살짝 들어간 거죠. 성령에 대한 이해가 심화 발전된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요. 이 두 가지만 놓고 볼 때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초대 교부들이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는 것은, 성령을 창조의 영으로 이해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 창조니까요. 창조하는 하나님의 사역은 다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로부터’라는 말이 들어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도 성령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했다는 거죠. 부활도 사실 성령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영의 문제가 아버지와 아들에 다 연관된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반드시 고상한 신학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2천 년 기독교 역사가 성령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했었던 그 맥락을 무시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내가 경험한 성령이 과연 말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부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금 더 나아가 이것이 교회 공동체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태도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성령이 과연 무엇인지 대해서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소개한 책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영 체험에서도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만 짚겠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 차원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자유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성령을 지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관되는 걸까요? 자유는 우리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까지 할 수 있는 어떤 힘이거든요. 자유는 미래의 힘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건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고요. 그와 동시에 지난 역사가 다 그분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성령의 역사를, 교회의 역사를 우리가 충분하게 공부해야 하는 거예요. 미래의 자유와 과거의 역사를 성령의 현재로 살아가는 우리가 잘 생각하고 소통시켜야겠죠. 성령의 자유가 미래로 열려져 있고 성령이 활동한 역사가 과거에 있으며 오늘 여기에 우리 신자는 성령의 현재를 삶으로 누리는 것으로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겠네요. 시간이 다 되었죠. 질문 있으면 하세요.

시간이 있으면 제가 몇 가지를 더 다루려고 했는데, 안되겠습니다. 그 중에 간단하게 성령과 악령에 대해서만 언급할게요. 뭐가 성령이고 뭐가 악령일까요? 악령도 모양은 예쁩니다. 제가 언젠가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동전의 양면 같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성령에 이끌려 창조와 사랑의 역동성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에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노력들을 나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할 때가 있잖아요? 그 때는 우리가 악령에 끌려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좀 분별하자는 겁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하자는 거죠.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영분별의 은사가 있어야 하는데요. 누가 할 수 있을까요? 평생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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