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2강, 초대교회의 배경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5134 추천 수 0 2011.05.03 13:15:12

제 02강

초대교회의 배경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녕하세요. 우리는 “기독교가 뭐꼬” 공부를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기독교라는 공동체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 배경은 당연히 유대교입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가 어떤 관계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유대교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고 봐야겠지요. 오해는 마세요. 기독교가 유대교에 완전히 예속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처음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긴밀한 관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계가 멀어집니다. 거기에는 많은 역사적 사연들이 있어요.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이방 기독교가 점점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가 유대로부터 큰 압박을 받으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습니다. 그건 세월이 좀 흐른 뒤의 상황이구요. 처음에는 예루살렘 공동체만 있었으니까 유대교와의 관계가 예상 외로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초기 기독교, 즉 우리 신앙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유대교가 뭔지를 알아야겠죠. 당연한 말입니다. 유대교 전체를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연관된 부분만 개괄하는 식으로 살펴보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왜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요? 그 답은 그렇게 오묘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해요. 예수님이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이죠. 역사 안에서 살고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와 단절된 분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기독교의 시작이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배경 아래에서 자라나고 활동했기 때문에 우리가 유대교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예수님이 기독교의 시작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직접 기독교를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수님 없이는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구성원들을 보면 대체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여기에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기 선생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에 그들이 들락날락했다는 거예요. 기도 시간에 맞춰 거기에 갔다는 건 유대교의 기도 시간을 잘 지켰다는 뜻이고요.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의 신앙 형식은 유대교를 그대로 따랐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사람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 뿐 아니죠.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경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 역시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가 신구약을 정경으로 결정한 때는 기원후 397년에 있었던 카르타고 종교회의였어요. 4세기 후반이면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때거든요. 그럼에도 구약성서를 그대로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였어요.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일들을 볼 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참고적으로, 유대교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분파가 예루살렘 공동체였고요. 그 반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과격하게 투쟁을 했어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 공동체에 깊이 연관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힘이 없어지다가 1세기말에 가면 유명무실해져요. 반면 바울를 태두로 하는 이방 기독교는 강한 힘을 갖고 활성화가 되죠. 그런 상황에서 누가가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새로 썼는데,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실제로 바울과 예루살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로 사이가 나빴던 것 같은데, 누가는 이 관계를 가능한 우호적으로 보려고 노력한 것 같아요.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배척 받는다면 바울의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죠. 누가는 바울의 입지를 여러 가지 면에서 강화시키는 쪽으로 역사를 해석해낸 겁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제자들이 중요한 인물들로 부각되어 나오는데요. 정말 예수님이 그 정도로 제자들을 특별하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초기 기독교를 정확하게 이해라면 유대교의 배경과 토양을 어느 정도 알아야합니다. 단순히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역시 기독교가 유대교와 변증법적인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라는 테제와 기독교라는 안티테제가 융합의 방식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안식일이 그 예가 될 수 있겠죠.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기독교로 오면서 주일이 되었어요. 날짜는 달라졌지만 그 의미는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유대교의 묵시문학도 마찬가지죠. 이것은 기독교로 오면서 종말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게 되면 구약성서를 기독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가능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도그마(교리)인데,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과 기독론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려면 조직신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이 둘을 따로 따로 생각한다면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기독론에 치우친다면 타종교와 대화가 부정됩니다. 보편 구원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 성령론적 관점에서 보면 타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하죠. 이 말은 혼합적인 기독교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을 보편적인 지평으로 열어내자는 것입니다. 이 맥락을 놓치면 양극단, 즉 혼합주의나 독단론에 빠지게 되죠.

기독교는 그렇게 단순한, 안티 기독교 집단이 주장하듯이 우스운 종교가 아닙니다. 어떤 종교 천재가 머리를 굴려서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조직이나 사상이 아니에요. 기독교 2천 년의 역사에는 우주와 세계 전체에 대한 심각한 고민,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어요. 그 역사는 기독교에 자기 영혼과 온 몸을 던진 사람들의 역사적 결과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너무 지엽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늘 그리스도의 구속, 죽음, 부활에만 머물러 있어요. 다른 건 모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cism)적인 바르트(K. Barth)의 영향도 있지만, 한국교회가 바르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근본주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기독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고, 이 기독론이 창조론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들 사이의 긴장 관계를 풀어내려는 신학적인 노력들이 필요한 거죠. 이게 없으면 기독론은 십자가 전쟁을 합리화하는 교리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배경과 토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이유 뿐 아니에요. 지금까지 기독교의 많은 내용들이 구약성서와 많은 유대 문헌에서 나온 걸 보면 유대인들이 위대한 민족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세계 어느 민족이 유대인처럼 거룩한 문서를 전승시키고 보관했을까요? 중국에도 노자나 장자 같은 사람들의 문헌이 많이 있기는 하죠. 제가 고문서 학자가 아니라서 중국과 이스라엘의 고문서를 비교 연구할 수는 없지만, 중국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작은 나라잖아요. 그렇게 작은 나라가 엄청난 문서를 보존해왔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이스라엘은 인류 문명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들의 구약성서가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다른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예민하면 예민하다고 볼 수 있는 기독론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기독론이 더 풍부해집니다. 구약성서에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내세에 대한 생각도 구약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요.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생각이 들 겁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완전한 진리와 계시를 담고 있던 게 아니었는가, 성서는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다고 하는데, 왜 구약성서에는 내세에 대한 개념이 약하고 신약성서에는 부활과 종말에 근거한 내세 개념이 확장되었는가, 하고 말이죠.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끌어가는 역사의 능력이고, 역사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지요. 역사가 점점 진행되면서 우리가 본질적인 것들을 더 많이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사람 보다, 즉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나훔 같은 선지자들보다 우리가 훨씬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근원에 맞닿아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죠.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어요. 우리는 옛날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어쨌든 구약이 신약과 다른 점이 많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구약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서를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 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구약성서를 공부할 때 말하게 될 거예요.

생각난 김에 하나 짚고 가겠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경전으로 만들었으면 되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처음부터 완성된 게 아니었어요. 어쨌든지 초대교회 때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빼자고 했어요. 20세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어간에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2세기에 구약을 거부했던 것은(마르시온, 필자 주) 잘못이었지만 위대한 교회는 이 거부를 올바르게 거절하였다. 16세기에 구약을 그대로 간직했던 것은 종교개혁이 아직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구약을 프로테스탄트의 경전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교회적 마비의 결과이다. ... 여기서 구약 자체를 일소해버리는 것, 그리고 고백과 가르침 속에 있는 진리에 명예를 주는 것, 이것은 오늘날 -이제 너무나 늦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요구되는 위대한 행위이다.(에벨링의 ‘신학연구개론’ 39, 40에서 재인용. A.v. Harnack, Marcion. Das Evangelium von fremden Gott, 1921, 1924, Neudruck 1960, 217, 222)

그건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히틀러의 나치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인데요. 왜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미워했을까요? 아주 복잡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데, 다른 건 접어두고 신앙적인 문제만 보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거죠. 그게 타당한가요?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보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지금도 유대인과 우리의 관계는 아직 완전히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가 우리의 모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차이점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거든요.

 

유대인의 생존 투쟁

구약성서를 읽으면 당혹스런 사건들을 종종 만나죠.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도록 명령을 내리시고, 이방민족을 죽이라는 명령도 내립니다. 이런 걸 보고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 놓여 있어요. 그들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모세를 중심으로 탈출한 뒤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전세방을 전전하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았어요. 그 정도로 약소민족이었습니다. 그들 주변에는 계속해서 제국들이 일어났죠. 애굽, 아시리아, 바벨론을 비롯해서 페르시아, 로마 등, 제국들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계속 느끼며 살았어요. 따라서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의 생존투쟁이라는 지평에서 읽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서 그냥 버텨낸 거죠.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말했는데요. 구약성서를 읽는데 이게 중요합니다. 윤리적이냐 하는 본질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늘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구약성서 안에는 윤리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생존이었어요.

출애굽 공동체인 유대인들에게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싹쓸이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생존을 위한 다른 대안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잘 생각해보세요. 그들이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생존을 지켜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은 그 당시의 삶의 방식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내쫓고 억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형식이 그랬어요. 일종의 ‘제로섬게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그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그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정말 큰 일 나지 않겠어요? 성서는 어떤 면에서 아주 어려운 책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그들이 경험한 영성의 깊이에서 성서를 읽지 않으면, 성서는 안티기독교가 말하듯이 완전히 반(反)평화적이고 반인간적이며 아주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제국주의적 종교로 오해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약성서를 볼 때 인류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은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은 가치가 없는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질문이 생기죠? 구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일단 이렇게 생각하세요. 구약성서에 있는 모든 것들은 유대인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의 생존을 지켜주신다고 하는 믿음 안에서 구체적인 것들을 선택한 거죠. 그걸 무조건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엇을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굉장히 세밀하게 지켰습니다. 되새김질을 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만 먹을 수 있었죠. 그것이 그 시대에 그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요. 그 당시 중동 사람들은 피를 마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대의 길을 갔어요. 그 결과 상당히 독단적이고 배타적으로 자기들의 생존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생존을 지켜준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누구와 전쟁하고 누구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지 모두 자기들이 판단해야 했어요. 그 판단들 중에는 옳은 것도 있었고 틀린 것도 있었죠. 구약성서만 보더라도 유대인들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당했다고 하지만 자기들도 그랬어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적입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집 등기문서처럼 들이대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니까요. 아이 성, 여리고 성 등을 공격하는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을 작성한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산 아래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가시적인 하나님 형상 아래서 축제를 벌인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용서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중에 그 사건을 빌미로 해서 한 나절에 3천명 이상을 죽였어요. 일종의 내전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모세는 이렇게 일벌백계의 방식으로 대응해야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겠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겁니다. 모세는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죠. 하루 내전으로 3천명이나 죽였으니까요. 하나님이 용서하셨는데 자기가 그렇게 했어요. 여호수아가 아간을 죽인 이야기도 성서에 나오는데요. 그것도 여호수아 자신이 결정한 겁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묘사된 성서 구절이 있는데, 정말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판단입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위인들, 지도자들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나중에 다 판단을 받을 거예요. 모르긴 몰라도 모세나 여호수아는 훌륭한 사람으로 판단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기 때문이죠. 그 방식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강의 본 주제로 돌아가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구약성서를 생존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생존 문제 앞에서는 본질도 윤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라이브’(Alive)란 영화가 있어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산맥 깊은 곳에 조난당한 비행기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요. 구조 신호를 보냈지만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미 죽은 동료의 살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말하죠. 동료의 살을 칼로 얇게 썰어 비행기 동체에 붙였다가 마르면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죠. 하지만 동료의 살을 어떻게 먹느냐고 하면서 끝까지 먹지 않았던 사람은 죽었습니다. 여기서 누가 윤리적으로 옳다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존의 문제잖아요. 제가 너무 지나치게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이것들은 실제적인 신앙의 문제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은 상당히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더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 심판을 말합니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을 그 때 판단 받게 되죠. 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100%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반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른 히틀러에 대한 판단까지 종말로 유보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죠.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원칙적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선택과 투쟁의 성격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배타성입니다. 그들 주변의 나라들은 절충과 타협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먹는 것은 물론 혼인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어요.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함락된 기원후 70년 이후에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면서도 자기들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정체성을 전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나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았어요.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이렇게 배타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방식으로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생활하면서 고난을 많이 받았지만 생존해 있습니다. 유대인들보다 훨씬 막강했던 수많은 민족들은 주변 세계와 섞여 버렸어요. 이 문제는 인문학적으로 좀 더 검토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성서와 유대인들의 신앙 문제는 생존을 위한 배타성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한 삶의 방식이 반복되면서 규범, 규칙들을 만들어지고 구전되고 문서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결실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 그들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는 구약성서가 형성되는 고대 유대인들의 그것과는 다르죠. 생존을 위해서 본질이 약해져도 괜찮은 시대가 아니라 생존보다 본질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공격적인 서바이벌 게임의 방식으로, 제로섬 방식으로 나가면 정말 곤란하죠.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패러다임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고 성서적인 것도 아닙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존에 대한 근본으로 보고 약속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본질적으로 놓여 있는데요. 우리는 그걸 버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취한 공격적인 삶의 태도만을 그대로 갖고 왔어요.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 개신교 안에는 직접 팻말을 들고 떠들지는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그런 생각들이 상당히 많아요.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우리 부모는 어디로 갔을까, 불안해하는 거죠. 이런 모든 신앙 문제들은 결국 성서가, 특히 구약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평신도의 신학공부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하는 ‘기독교가 뭐꼬?’ 강의가 평신도 신학공부입니다. 이 강의를 듣는 분들이 여러 계층이라서 한쪽으로 포커스를 맞추기가 힘들지만,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기독교를 인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잘 오리엔테이션 해보자는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강의가 너무 쉬울 수 있고요.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들었던 교회의 성경공부와는 너무 달라서 낯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양쪽 모두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신학공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지나가겠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 해도, 그 중심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하면서 느낀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기독교를 잘 모른다는 거였어요. 여기서 모른다는 말을 좀 이해해 주세요. 다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변죽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거든요. 설교와 교회의 언어 형식이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만 늘어놓으면 얼마든지 기독교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칭의와 성화의 참된 의미를 몰라도 그 말들은 쓸 수 있잖아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만, 영접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면서 쓸 수 있어요. 개인적인 센티멘털리즘에 빠져 있는 것을 신앙체험이라고 오해하기도 하구요. 그게 무조건 잘못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큽니다. 여기 몇 십 년 동안 교회에 다닌 분도 있을 거고 목사님들이나 신학생들도 있을 거예요. 기독교에 대한 정보가 많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많은 정보만 수집하고 있을 뿐, 실제로 그 정보가 담아내고자 하는 콘텐츠를 맛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설교가, 그리고 우리의 삶이 늘 상투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안식일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타민족과 배타적으로 살게 된 대표적인 이유가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을 알면 율법을 다 아는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도대체 안식일이 뭘까요? 우리도 성수주일을 강조하는데요. 안식일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 전승이에요. 창조 전승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므로 모든 인간도 그 날에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조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에 묶여있는 게 아니에요. 야외에 나가 ‘참 아름다워라’ 하면서 찬양을 부른다고 창조 영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여기서 자연의 탈(脫)신성화가, 또는 탈주술화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민족들은 자연, 특히 태양을 숭배했어요. 그러나 유대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태양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만든 분에게 집중한 겁니다. 다른 하나는 출애굽 전승입니다. 출애굽 전승은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억하여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쉼과 자유, 창조와 해방, 이게 안식일의 핵심인 거죠.

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게 바로 그겁니다. 창조 사건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해방 사건이 크고 귀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 전체가 걸려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다른 일상은 멈추어야 합니다. 주일을 주일답게 지낸다는 것은 창조의 영성과 해방의 영성 속에 담긴 자유와 참다운 쉼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일마다 파김치가 되도록 교회 일을 하는 걸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주일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목사에게는 주일이 제일 힘들다고 하죠? 주일에 너무 많은 일에 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많이 해야만 신앙적인 업적을 이루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해에요. 복음은 뭐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거꾸로 하지 않음으로써 위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일로 계속해서 우리의 영성을 소진시키고 있어요. 많은 신자들이 주일날 교회에서 영혼이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탈진해버립니다. 그래도 이게 믿음이지 않은가,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네요. “유대인들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가 어떤 상관이 있나요?” 간단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우리는 그것을 근본으로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구약에는 안식일 뿐 아니라 안식년과 희년도 나와 있는데요. 희년은 구약성서에 문자로 남아 있었을 뿐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실행되기 힘들었어요. 그대로 되면 사회질서가 허물어지니까요. 안식년이나 희년은 이사야가 그 시대에 물질적 양극화로부터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자 했던 상상력의 산물이었죠. 예언자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에 놓고 가능하면 그런 정신을 살려나가야죠. 어떤 학자가 이런 제안을 했어요. 제3세계가 빌려간 것들을 다 탕감해주자고요. 안식일의 경우에도, 단 하루라도 모든 공장을 쉬게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노동과 자본,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쪽으로 나간다면 안식일을 오늘의 삶에서 새롭게 해석해내는 것이 되겠죠.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연관해서 왜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를 더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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