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인문학적 성서읽기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4730 추천 수 0 2011.05.03 13:25:18

제 03강

인문학적 성서읽기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강의를 누가 녹음해 준 걸 들어봤는데 발음이 좀 문제가 있더군요. 자꾸 엉키더라고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들의 연주는 그 음이 하나하나 잘 들려요. 빠지는 게 없죠. 반면에 못 치는 사람들의 연주는 뭉뚱그림 식으로 들려요. 잘하는 사람들은 수십 가지의 음이 하나도 튀지 않고 정확하게 나갑니다. 아나운서들도 보면 발음을 빨리하는데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잘하죠. 그런 훈련을 받아보지 않아서 강의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천천히 고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은 앞서는데 입이 따라가질 않아 발음이 뭉쳐요.

오늘은 한 시간 동안 질문을 받고 대답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들은 강의에 대해서도 좋고, 그 이외에 기독교 전반에 대해서도 좋습니다. 지금 질문이 없으면 미리 저에게 메일 등으로 주신 질문을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두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인문학적 성서 읽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여기에 대답할 자신이 좀 없어서 말이죠. 제가 나름으로 신학 전문가니까 대답은 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으니 좀 딱하게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라는 논문에서 설교자는 두 가지 경계 사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Sollen)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Unmöglichkeit) 사이에 있다고 말입니다. 계속해서 그 압박감이 있어요. 사실은 설교자 자신도 궁극적인 대답은 모릅니다. 이 땅의 삶에서는 계속 질문이 나오기 때문이죠. 이 질문에 얼마나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질문이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 깊은 질문이라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란?

제가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인문학을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을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 삶의 흔적들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죠. 인간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 역사가 되고 학문이 된 거죠. 가령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두고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그런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면서 그것을 심화하고 확대했습니다.

성서도 그렇습니다. 성서에는 인간 삶의 흔적이 아주 진하게 깊이 각인되어 있어요. 그것을 놓치면 우리는 성서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혹은 변죽만 울리는 식으로 공부하는 겁니다. 인문학적인 삶이 무엇인지, 시간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질문했는데, 이런 문제들은 기독교 신앙에서도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만 무조건 믿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인간이나 시간이나 역사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큰 착각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서에는 삶에 대한 인간의 사유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어요. 이 말은 성서가 순전히 인간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우리의 대답이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만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했고, 빛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했으니까 빛이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아닙니다. 거기에는 성서 기자들의 삶이 담겨 있어요. 하나님과 빛의 관계에 대한 성서 기자의 깊은 사유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머리를 굴렸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에서 나온 말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적 성서 읽기는 우리 삶의 근거들을 거기에 놓고 성서를 읽자는 겁니다. 그게 없이는 성서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을 수밖에 없어요. 자기모순에 빠져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여호수아가 아간을 죽일 때 연좌제를 적용해서 모든 가족을 죽인 것, 모세가 하루에 수천 명을 죽인 것,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 여리고와 아이 성의 어린 것들까지 다 죽인 것 등을 전부 실증적으로 보려고 한다면 성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제가 성서 기자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서 기자는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단일 수도 있는데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유대인들의 고유한 삶의 이해가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바라본 삶의 이해죠. 삶의 이해를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삶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이것이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성서 기자들이 진술을 삶의 차원에서 찬찬히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려는 공부가 인문학적 성서 읽기입니다.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성서 읽기는 교리 중심적이죠. 교리 중심의 성서 읽기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이 교리 안에도 삶에 대한 이해가 들어있는데, 그걸 놓치는 게 문제죠. 교리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가 교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이 교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많은 세계를 담고 있는지 제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들이 천편일률적이거나 침소봉대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도그마가 중요하기는 한데, 그것이 우리 삶과 어떤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놓치면 독단론으로 빠지고 맙니다. 구구단을 외우듯이 외우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 사도행전에 나오는데요. 그것도 외워버리고 말면 독단이 되는 거죠.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사도행전 기자가 왜 그런 진술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성서는 그 어떤 인문학 저서보다 훨썬 더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성서를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외에 큐티 식 성서 읽기가 있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나이브(naive)한 것이죠. 일종의 성서도구주의입니다. 성서의 주제를 끌어다가 자기 삶에 적용하는데 머물고 마니까요. 이게 한국교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는 성서 읽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습니까? 그거 보고 은혜를 받나요? 받을 수도 있겠죠. 어떤 사람은 성서해석 부분과 예화 중에서 성서해석은 별로 보지도 않고 예화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설교비평에서 자주 언급한 것인데, 도덕적인 설교는 설교의 중심을 보는 겁니다. 도덕적인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 윤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너머의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이 윤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해도, 그건 달이 아니라 손가락입니다. 그것을 통해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어요. 적용 중심의 큐티 식 성서 읽기는 성서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성서를 읽고 있는 자기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기가 기독교인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극단적으로 잘라 말한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신앙의 세계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랍니다. 정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 앞에서는 그게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개념이나 언어 진술은 어떤 연관성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제가 하는 말을 앞뒤는 다 잘라버리고, 정 목사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윤리적 삶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더라 하면 안 됩니다.

예언자들이 정의와 평화적인 삶의 변화와 행동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해요. 큐티 식 성서 읽기는, 성서가 존재론적으로 확보하고 담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메시아적 통치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성서를 하나의 율법이나 교리문답으로 축소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기쁘게 살 수 있는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답게 살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확대시킵니다. 그것도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게 더 필요하다는 거죠. 인문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존재론적 접근, 즉 우리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나 영성가들은 거기에 집중했어요. 하나님과 존재론적 관계를 맺는 일에 매진한 겁니다. 내가 어떻게 행위를 하느냐, 혹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상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뭘 한다고 해서 맺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뭘 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존재론적 깊이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한 게 칭의죠.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값싼 믿음지상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여러 이야기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데, 전달이 되고 있겠지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볼 때 믿음이 굉장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믿음이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험성이 믿음지상주의에 있어요. 믿음까지도 우리가 극복해야 합니다. 큐티 식 성서 읽기의 문제점을 말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요. 그게 전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니까 잘 이해하세요. 다비아에도 큐티가 나가고 있는데, 일반적인 큐티와는 좀 다르죠. 텍스트에 조금 더 실질적으로 다가가 보자는 시도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에 대해서

제가 받은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대학교 1학년에 다니던 딸아이가 사고로 제 곁을 떠났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나면 정말 안식을 누리는 것인가요?”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나면 안식을 누린다는 말은 일단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명제로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이 땅의 삶에 안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죠. 이 땅의 삶이 즐겁고 안식을 줬다면 죽음으로 안식을 얻는 게 아닐 겁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참된 쉼을 얻을 수 없다는 전제에서 이런 말이 나온 거예요.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그것으로 우리가 안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과 하나님의 평화는 어떤 것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영원한 쉼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게 불가능하기에 이 땅의 삶이 끝나야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거죠.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런 대답이 질문한 분이 기대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예, 아니요 식의 대답을 원하는데, 상대적인 개념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까 좀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냥 그렇게 믿으라고 해도 되는데요. 이 질문이 안고 있는 신앙의 전체적인 문제들을 정리해 보려고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영혼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인가 하는 이 하나의 질문만 갖고도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수백 가지의 질문들이 연결되어 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멀리까지 나가죠. 이런 연결을 잘 할 줄 아는 것이 신학적 능력입니다. 어떤 주제만 딱 집어서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주제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고 어떻게 흘러가며 어떻게 축소 혹은 확대되는지를 정확히 집어내는 것이 신학입니다.

1) 왜 이 땅에서는 안식이 없을까요? 이것은 기독교의 죄론과 연관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죠.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죽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어요. 모세도 하나님의 지나가는 등만 봤잖아요. 하여튼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식을 누릴 수 없는 겁니다. 죽으면 죄가 끊어지니까 그때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평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와 평안과 안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사실 모릅니다.

2) 그 다음으로 영혼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요? 이것도 알 수 없어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고 하는데요.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는 성서에 여러 가지로 나와 있어요. 구약과 신약이 다르고 신약 안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서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비유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만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죠. 이런 비유를 가지고 설교를 잘 못하면 신자들을 성서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실명으로 말씀드려도 이해를 바랍니다. 연세중앙교회의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문제가 많더군요. 그분이 지옥 불이나 아브라함의 품을 아주 강조합니다. 성서를 정말 그렇게 접근해도 되는 건지, 나중에 주님의 심판 앞에서 어떻게 대답하려고 하는 건지 말이죠. 그분 나름대로 진정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런 설교가 정말 바람직하지 않았어요. 하도 인상이 깊어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요. 그분이 설교하기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는 살아 있을 때 예수를 잘 믿었는데, 부자는 잘 믿지 않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성서를 왜곡합니까? 성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어요. 그런 식으로라도 신자들이 은혜만 받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한다면, 문선명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괜찮은 거죠.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삶 속에 있는 현실과 무책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어쨌든 간접적으로 이런 성서 본문을 통해 본다면, 우리는 죽자마자 나눠지는 것 같아요. 데살로니가서에 보면 마지막 때까지 다 잠을 자다가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다시 살아난다고 나오는데요. 구원 받을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심판 받을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영혼은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요?

영남신대의 최태영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우리의 몸은 부패하여 소멸되고 영혼은 몸에서 분리되어 하늘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기존의 개혁교회 전통은, 성경적인 관점이라기보다 헬라 철학적인 영혼불멸설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합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개인적 종말론에 있어서 다소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해가 나타나는데, 죽은 자의 부활은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죽을 때 전인의 부활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세의 몸과 부활체 사이에 물질적인 연속성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전혀 다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3) 그 영혼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냐고 물었는데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죠. 죽으면 천국에서 그 영혼을 만날 수 있냐고도 했는데요. 성서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만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나기는 만나는데, 우리는 항상 이 땅에서 경험하는 어떤 방식으로만 규정하려는 습관이 있죠. 우리가 지금 만난다고 하면 유학 갔던 아들을 만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러나 천국에서의 만남은 그런 만남이 아닐 겁니다. 절대적인 세계를 자꾸 우리 방식으로 형상화하게 되면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훼손하는 겁니다. 비유를 하나 들죠. 다른 데서도 이야기를 했는데요. 플라톤의 동굴 비유예요. 아는 이야기라도 양해하고 다시 한 번 들어주세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강하니까요.

일단의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추방을 당해 동굴로 쫓겨 들어갔습니다. 그 동굴에서는 발에 쇠사슬을 차고 살았는데,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통해 수대가 지났습니다. 그 후손들은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몇몇 신화만 남아 있었죠. 그들은 동굴의 축축하고 침침하고 횃불을 켜야 볼 수 있는 삶의 방식들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습니다. 발목에는 여전히 쇠사슬을 차고 말이죠. 장로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걸 막았어요. 그러다가 한 젊은 친구가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동굴 밖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거죠. 색깔을 보았고요. 나비가 날아다니는 걸 보았어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화려한 세계가 동굴 밖에 있었던 거예요. 이걸 모르고 살았나 싶어서 동굴 안으로 돌아와 자기 동족들에게 그걸 이야기했죠. 동굴 밖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취급했죠. 장로들은 죽이겠다고 위협까지 하고요. 어느 날 종교재판을 통해 결국 이 친구는 화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 동굴은 예전처럼 조용해졌어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플라톤이 자기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 사발을 마시고 죽는 아테네의 현실을 비꼬아 말한 것 같아요.

이것을 기독교의 새 하늘과 새 땅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동굴 밖의 세계는 가봐야 아는 겁니다. 동굴 안에 묶여 있는 한 동굴 밖의 세계는 어떤 상상력으로도 구체화할 수 없어요. 동굴 밖으로 나가야 해요.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에서 중요한 관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형상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와봐야 알 수 있어요.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범주와 경험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로 말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확실한 겁니다. 여기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 독단론으로, 혹은 불가지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건강한 기독교 신앙의 모습이 아니죠. 바르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존재 유비(analogia entis)는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세상과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존재 유비가 없다는 바르트의 진술은 굉장히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비슷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구체적인 것을 예로 들기는 힘듭니다. 그것은 사유로만 가능합니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다면 감조차 잡을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연필이 있다고 할 때, 있다는 여기에 관점을 두지 않고, 없는 세계, 바깥, 없음으로써 연필을 연필이게 하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게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인데요. 우리가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거죠.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잘 먹고 잘 사는 식으로 이 땅의 삶을 확장시키는 데 머물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신앙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가가 핵심입니다.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영성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이성을 주셨는데 논리적으로 생각해야죠. 영성은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지만, 논리성과 합리성으로 해명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학이에요. 천천히 신학의 바다 안으로 발을 담그고 허리를 적시면서 더 깊이 들어가 돌고래처럼 물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큰 신학자, 영성의 대가들, 성서 기자들, 예언자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질문한 분께 속 시원한 대답이 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요. 우리가 죽은 다음에 딸아이를 만날 수 있나, 없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아름답고 절대적인 곳이에요. 가족을 잃으면 슬픕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는 것보다 더 새로운 방식으로 더 근원적인 방식으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부활 생명이에요. 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은 상대적인 겁니다. 절대적인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단언할 수 없다는 거예요.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지만,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염려는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두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는?

제 강의 중에 질문을 주신 분이 있습니다.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죽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부활 생명에 우리의 온 운명을 걸어두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마지막 때에 우리가 기대할 수 없었던 부활 생명에 참여할 뿐 아니라 오늘의 삶에서 그 부활 신앙을 당겨 살 수 있습니다. 당겨서 산다는 게 뭘까요? 신학적 용어로 선취라고 하는데요. 쉽게 이야기를 해보면, 오늘 현재의 삶은 이 안에 들어와 있으면 잘 안 보입니다. 이 삶은 밖에 나가야 보여요. 우리가 어떤 일에 아등바등하면서 살고 있죠. 그러다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면 우리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물론 십 년이 지나도 반성을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어요. 하여튼 우리가 종말에 이루어질 생명을 목표로 둔다는 것은 현재의 삶을 이미 지나간 것처럼 성찰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냐고요? 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데, 종말론적인 눈을 가지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지금의 삶을 지나간 것처럼 성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힘을 빼게 되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열심히 하겠다고 힘을 주는 게 신앙이 아니에요. 모든 일에 힘을 뺍시다. 운동을 해도 힘을 빼야 하듯이 우리의 삶에도 힘을 뺐으면 해요. 삶에서 힘을 뺀다는 게 뭘까요? 하나님이 마지막에 이루실 부활의 희망을 알고 믿으며 자기의 삶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힘을 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서가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이게 참 풀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이 땅에는 악, 고통, 슬픔, 죽음 이런 것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결국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가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대답은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외에 또 하나의 창조 능력이 있는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원론으로 빠지게 되고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가 되니 그것도 성립될 수 없어요. 물론 천사가 타락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왜 하나님이 천사를 타락하도록 만들었는가, 천사가 의지가 있다면 왜 하나님은 선한 의지만 갖도록 만들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들이 계속 되죠. 결국 이런 문제는 종말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순간 우리의 선택에 따라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살아갈 때 기계적으로 따라 가는 것이냐,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에 내가 선택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기독교는 후자입니다.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끌어가죠. 그러면서 지나온 흔적을 볼 때 내 노력이 아니라 어떤 힘이 개입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칼뱅은 예정론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축복 받도록, 너는 저주 받도록 예정되었다고 말한다면 칼뱅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닫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쪽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선택해 갈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잘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죠. 그 정도로 밖에는 우리가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시간이 많이 지났군요. 마치겠습니다.


[레벨:18]은나라

2016.07.06 22:57:33
*.105.196.251

칼뱅에 대한 예정론이 왜 왜곡이에요?
교회에서 교리를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데..
그럼 정목사님은 칼뱅의 예정론을 어떻게 설명해주실 거예요?
창세전부터 택한자와 택함받지 못한자가 있다고 가르치는걸요. 물론 부르심의 때에 응답을 하구요.역사속에서 우리자유의지의 선택으로요.
제가 잘못 배운거라면 정목사님의 설명을 부탁드릴께요.
칼뱅의 예정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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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07.06 23:21:11
*.164.153.48

1) 칼빈 예정론은 칼빈 신학에서 큰 비중이 있는 게 아닌데,

    실제로 <기독교 강요> 후반부에서 부록 정도로 다루어지는데,

    한국교회에서는 그게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2) 칼빈 예정론은 구원의 신비를 신앙고백적으로 진술하는 것이지

    구원의 독점이나 배타성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3) 만약 이중예정이 문자 그대로 옳다면

     믿음 없음도 그 사람의 책임은 아닌 거지요.

     전도할 필요도 없는 거구요.  

4) 예정론과 자유의지는 상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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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기독교가 뭐꼬 제13강, 십자가와 부활(3) 2012-02-11 2742
198 기독교가 뭐꼬 제12강, 십자가와 부활(2) 2012-02-11 2871
197 기독교가 뭐꼬 제11강, 십자가와 부활(1) 2012-02-11 3937
196 기독교가 뭐꼬 제10강, 죽음에 대해서 2012-02-11 3362
195 기독교가 뭐꼬 제9강, 청교도 신학에 대해서 [2] 2012-02-11 3294
194 기독교가 뭐꼬 제8강, 칭의와 구원 [4] 2012-02-11 3604
193 기독교가 뭐꼬 제7강, 영성과 신학 2012-02-11 2859
192 기독교가 뭐꼬 제6강, 역사적 예수(3) [1] 2012-02-11 3133
191 신학입문 13장 21세기 한국교회와 신학 2011-11-16 3411
190 기독교해석학 10장 정치신학적 해석학 2011-08-06 3950
189 기독교를 말한다 5장,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2] 2011-07-24 4777
188 기독교가 뭐꼬 제5강, 역사적 예수(2) [2] 2011-05-03 4687
187 기독교가 뭐꼬 제4강, 역사적 예수(1) 2011-05-03 4926
» 기독교가 뭐꼬 제3강, 인문학적 성서읽기 [2] 2011-05-03 4730
185 기독교가 뭐꼬 제02강, 초대교회의 배경 2011-05-03 5128
184 기독교가 뭐꼬 제1강, 강의안내 [3] 2011-05-03 4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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