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기독교를 말한다 조회 수 4783 추천 수 0 2011.07.24 17:21:17

5장구약성서와 히브리즘

 

앞서 우리는 갈릴리 호수 부근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주마간산격으로 더듬어보았다. 이제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고찰함으로써 기독교 정신에 훨씬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인들의 고대사이며 신약성서는 예수 공동체의 역사다. 구약의 민족사가 신약의 보편사로 확장된 셈이다. 전혀 이질적일 것만 같은 유대인의 히브리즘과 기독교인의 유니버살리즘이 예수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우리는 이제 5장에서 대략적으로 기원전 10-3세기에 형성된 구약성서를 통해서 세계, 역사,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유를 배우고, 가능하다면 그것과 기독교와의 관계를 생각하게될 것이다.

 

히브리즘과 크리스챠니티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구약성서를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준 유대인들의 경전을 -그들은 그 경전에 근거해서 예수를 처형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어딘가 불쾌한 일이 아닐까? 고대교회부터(마르키온) 현대에(하르낙) 이르기까지 구약을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은 숙지지 않았다. 이들의 주장처럼 유대교와의 인연을 단칼에 끊어내고 제 갈길을 가야했을텐데 초대 기독교는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서 39권을 몽땅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물론 이럴만한 배경이 없는 건 아니다. 예수는 물론이고 원시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은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자연스럽게 접했으며 그것의 메시지에 익숙하게 살았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집권층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고발되어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지만 초대교회는 구약성서를 오히려 예수의 말씀,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빛 가운데서 훨씬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가 거의 한결 같이 구약을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결론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해 준다. 이들은 유대인의 구약성서가 예수사건을 보증해준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신들의 생활이나 종교습성 문제라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메시야의 정체성 문제라면 그럴 수 없다. 유대교인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의 메시야 개념이 전혀 다른 상태에서 유대인들의 경전을 우리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선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 아니면 2천년 전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의 구약성서 해석이 옳은가? 왜 이렇게 다른가? 그들의 독선인가, 우리의 오해인가? 그들이 틀리고, 우리가 옳은가? 아니면 둘 다 틀리거나 둘 다 옳은가?

우리는 어떤 고정 관념을 떨쳐내고 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가 늘 그랬던 것 처럼 구약성서를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알레고리칼하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유대교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 처럼 민족주의적, 혹은 정치적 메시야니즘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여기서 이 마찰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시각이 어느 정도 해결의 길잡이 노릇을 할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시오니즘에 근거해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지평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민족주의적 메시야니즘 안에서 살았으며, 또한 그런 범주 안에서 예수와 적대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행태가 그당시 그들의 입장에서는 유효하다. 반면에 예수는 민족주의적 히브리즘과는 달리 세계보편적 지평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는 민족적인 메니야니즘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해석의 패라다임이 달랐다는 말이 된다. 물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유대인의 입장이나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도 역시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를 이렇게도 설명해보자.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생존이 종교의 핵심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이다. 생존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투적이며 배타적이며 때로는 파괴적으로 행동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예수와 원시 기독교를 박해했으며, 더 오래 전에는 주변의 모든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들의 그런 태도를 우리가 비판할 수는 있어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전투적으로라도 민족의 생존을 지켜내는 것이 메시야적 사명과 연관되었다. 반면에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민족을 뛰어넘는 평화와 사랑의 기준에서 행동하고 살아간다. 예수는 죄인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전파할 수 있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다.

우리는 히브리즘과 크리스챠니티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서 한쪽 편이 다른 한쪽을 매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범주에서 각각 최선인 것을 단순하게 비교해서 한쪽을 부정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바라보면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뉴턴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현대 물리학도라 하더라도 뉴턴의 물리학적 기초를 건너뛰면 안되고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 처럼, 기독교인들도 역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구약성서를 배척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읽고 배워야만 한다. 히브리즘의 영적 곡간으로서 기독교인의 신앙을 풍성하게 하는 구약성서를 초대교회가 받아들인 것은 당연하고 잘된 선택이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서

 

기독교가 경전으로 선택한 구약성서는 과연 무슨 책일까? 왜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은, 모세오경 같은 경우는 이슬람교인들도 역시 받아들이고 있는데,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하나님이 흡사 인간 처럼 입을 갖고 있어서 말을 하거나 손이 있어서 글을 쓰는 게 아닌데도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언어)*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 창조사건도 역시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생했다. 요한복음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요한복음 1:1) 언급할 정도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나름대로 설명해야할 의무가 있다.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종교들은 언어보다도 어떤 직관이나 깨달음이 종교적 진리에 들어가는 동기가 되는 반면에 기독교는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요한복음이 언급하고 있듯이 세계창조가 언어와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모든 날짐승과 들짐승의 이름을 짓는대로 그것들의 이름이 결정되었다(창세기 2:19). 이는 곧 언어가 만물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언어존재론은 서양사상의 핵심으로 발전하여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우선 계시론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해보자. 기독교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를 통해서도 계시하지만 특별히 성서를 통해서 계시한다. 즉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다. 계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自己)계시*라 할 때 성서가 곧 하나님인 셈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 성서, 말씀, 언어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이 성서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야”라는 기독교인들의 언급은 곧 성서가 하나님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 곧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면서 그 성서를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이기는 하지만 계시자체라기 보다는 계시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그것이 담겨야할 질그릇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처럼, 계시자체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를 증거하는 성서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서는 기독교의 계시론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라 할 수 있다.

 

*기독교의 계시론은 자기계시 개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과 계시가 일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이 계시사건으로 존재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마찬가지 관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게 아니다.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간적으로(코스모스) 이해하지 않고 시간적으로(에온) 이해했다. 하나님은 옥황상제나 제우스 처럼 지구나 우주 공간 어느 곳에 위치한 채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계시사건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8장에서 언급되겠지만 하나님의 존재론은 인간의 인식론과 상관관계에 놓여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혹은 계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데에 있다. 곧 성서 영감론(靈感論)이다. 성서가 다른 문서들 처럼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감에 의했다는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예컨대 구약의 이사야서 같은 문서들은 이사야가 하나님에게 영적으로 감동되어 선포한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문서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신약의 고린도서 같은 서신들도 바울이 하나님에게 영적으로 감동되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이기 때문에 다른 일반 편지들과는 구별된다. 소위 성서영감론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인다. 하나는 근본주의적-보수적인 입장으로서 축자영감설이다. 이들은 성서의 일점일획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니까 완전무결, 완전무오 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전체영감설로서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낱말이나 문자 하나 하나 마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즉 성서기자의 마음을 전체적으로 감동시켰을 뿐이고 그 이외의 문제들은 성서기자의 책임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앞서의 축자영감설이 기계적 영감론이라고 한다면 이 전체영감설은 역동적 영감론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주장의 차이점은 성서기자의 역할에 모아진다.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아서 단순히 기계적인 역할만 감당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역동적으로 참여하는 역할을 감당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성서영감론 문제를 우리는 성서의 역사성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서가 역사를 초월하는가, 아니면 역사에 의존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성서가 역사를 초월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달되며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역시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의 학문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성서를 역사적 산물로 이해하고자 한다. 예컨대 구약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온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성서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를, 즉 ‘삶의 자리’를 해석할 수 있어야하는 것이다. 만약에 보수적인 입장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방법이 초월적이라고 한다면 성서를 이해하고 전파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 쓸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상의 차이도 생긴다. 성서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성서는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하는 반면에,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역사비평*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전자는 성서를 다른 고대문헌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전제하고 문헌비평을 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성서를 다른 고대문헌과 같은 지평에 놓고 역사비평을 가해야만 정당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이다. 이들 두 입장은 신학사에서 항상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런 갈등이 지금도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신학적 차이점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점차적으로 역사비평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대세가 잡혀가고 있다. 여기서는 성서의 이 두 견해에 대해서 직접 판단하기 보다는 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고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답해보고자 한다.

*성서의 역사비평문제를 간략하게 살피면 다음과 같다. 성서는 지금 처럼 고정된 책으로 묶여지기 전에 많은 구전과 문서자료들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삶의 자리’에 따라서 변화되어 왔다. 모세오경에서도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칭하는 자료(E)와 야웨라고 칭하는 자료(J), 그리고 제사장직에 있던 기자의 자료(P)가 뒤섞여 하나의 대서사시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과정을 면밀히 살피고 그러한 편집 과정에서 어떤 신학적 동기들이 작용했는지를 파악해 내자는 것이 역사비평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거룩하다고 해도, 아니 거룩한 문서이기 때문에 더욱 더 성서의 형태 변화 과정(양식사, Formgeschichte)을 진지하게 살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이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서는 태도가 아닌가 한다.

 

전승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소박한 기독교인들은 구약성서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구조와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바다 속에서 솟아나거나 어떤 고목나무 밑둥치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출현했다. 아주 오래 전으로 생각을 옮겨보기 바란다. 이미 태초에 구약성서가 있었을까? 아담과 이브가 구약성서를 읽었을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구약성서를 읽었을까? 아니면 훨씬 후대로 내려와서 에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혹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는 읽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서로 편집되기 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왕정국가의 모습을 다진 이후였다. 더구나 구약성서를 최종적으로 정경화한 시기는 놀랍게도 기원후 70년이다. 그 이전 까지는, 물론 예수님 당시를 포함해서, 아직 39권의 정경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 정경화까지의 역사적 과정은 대충 다음과 같다.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신명기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기술한 역사진술이다. 자신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찾아보려한 시도들이 구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로부터 싹트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색하게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전승과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본 결과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고유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이들은 출애굽 공동체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신명기사적 본문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수식과 서술이 출애굽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신명기 5:15, 8:14-16 참조).

 

*일반적으로 구약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구약의 신학적 경향은 신명기적 역사관에 기초해있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을 에집트로부터 구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할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되면 망하게 되리라는 명령이다. 이러한 주제가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데, 특히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후 가난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가 행한 설교라 할 신명기서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사실적 역사를 주로 다룬 전기 예언서에 많이 등장한다. (신명기 4장을 참조할 것).

 

신명기사관의 신학적 뿌리인 출애굽사건은 모든 구약사건들을 연결시켜주는 중심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과 홍해, 그리고 이와 관련된 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구름기둥과 불기둥 같은 이야기들을 조상 대대로 구전시켜왔다. 특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유월절 의식을 거행하면서 할아버지가 아들과 손자들에게 먼 옛날 조상들이 겪었던 이러한 사건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입과 입으로 오랜 세월을 걸쳐, 수백년 동안 전해지면서 점차적으로 분명한 민담 형태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생각할 때, 신약성서도 비슷하지만, 이 구전(口傳)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과 설화들은 누가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르고, 다만 일종의 민담설화 형식으로 구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나라에도 옛날부터 구전되어 내려오는 ‘해와 달이 된 남매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사건만 하더라도 그 사건을 누가 보고 기록해 놓은 문건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구전되었을 뿐이다. 노아홍수* 이야기도 홍수 사실을 신문기자가 보고 확인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전해내려 왔을 뿐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원역사(原歷史)라 일컬어지는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설화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명한 노아홍수다. 대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죽지만 노아와 아내, 세 아들, 세 자부들만 살아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유독 구약성서에만이 아니라 바벨론 신화에도 있다. 이런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구약성서가 어떤 객관적이고 확실한 사실을 단번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여러 민족, 여러 상황이 얽혀드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구전형식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구전 시기를 거치면서 이런 민담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관에 의해 특성화된다. 여기 저기 흩어졌던 비슷한 이야기들이 어느 학자나 예언자에 의해 특별한 형태의 이야기로 편집되고, 인간이 글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문자로 편집*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보충되는 부분도 있고 잘려나가는 부분도, 또한 중복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이야기를 보면, 흉년이 들어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잠시 피신했을 때 본토인들이 자기 아내를 탈취하기 위해 자기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일이 있다(창세기 12:10-20). 그런데 아주 신기하게도 아주 비슷한 이야기가 이삭 전승에도 등장한다. 이삭이 흉년이 들어 그랄 지역으로 피신했다가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장면이(창세기 26:6-11) 나온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 전승과 이삭 전승이 독립적으로 구전되다가 창세기의 최종편집자에 의해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삽입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도 그렇다. 같은 인간창조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남녀 구별 없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창세기 1:27), 다른 부분에서는 남자만 먼저 창조한 후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창세기 2:18-25)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전승되었다(참조: 폰 라드, 국제성서주석 창세기, 한국신학연구소).

 

*어떤 이들은 편집이라는 단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따지고 들것 같다.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인간이 편집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이런 분들에게는 성서를 해설하는 목사의 설교도 역시 매우 불경하게 들릴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의 삼중의미에서 -계시된 말씀, 쓰여진 말씀, 선포된 말씀- 말한대로 선포된 말씀인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하나님 말씀되게하는 중요한 사역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면 이런 설교행위는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그런 분들에게는 우리 말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고, 오직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된 성서원전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것이다. 성서 원전을 번역해 놓은 우리말 성서가 원래의 그 의미를 7,80% 정도만 전달할 뿐이라고 한다면, 그중에서는 오역에 가까운 내용들도 얼마든지 있을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 성서 학자들이 성서원전을 우리 말로 꾸준히 번역하는 것 처럼, 원래 성서형성 당시에도 학자들에 의해 여러 구전 및 문헌으로 전승된 각종 성서 자료들이 꾸준히 편집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 특히 학자와 예언자들의 영적 감각이 작용됨으로써 성서가 한 종교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의 고귀한 정신적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건이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문서화되고 편집과정을 거쳐 하나의 성서로 완성되어 보존된다. 이렇게 완성된 거룩한 문서들은 오늘 우리의 구약성서에 등재되어있는 39권 이외에도 제1 에스라서, 솔로몬의 지혜, 벤시라의 지혜, 유딧서, 토비아서, 바룩서, 마케베오서 등 부지기수다. 여러 종류의 문서들이 오랜 역사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밀려나기도 하다가 세월의 간격을 두고 세 부류의 문서들이 유대교의 경전으로 채택된다. 가장 먼저 정경의 자리에 오른 문서들은 소위 율법서로서 기원전 4백년 경이며, 다음으로 예언서가 기원적 2백년 경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문서가 기원후 70년 얌니야 종교회의 때 유대교의 정경*으로 공인받게 되었다.

 

*정경(正經, 케논)은 공식적으로 그 종교의 경전으로 인정받은 종교문서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경우를 볼 때 역사적으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많은 문서들이 있었는데 그것들 중에는 가치가 높은 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것들 중에 일정한 기준에 들어오는 것들만 선별해서 공식적인 경전으로 인정한 것이다. 구약성서에 들어온 경전을 정경이라 하고, 약간 가치가 떨어지는 경전을 외경, 그보다 못한 것들을 위경으로 분류한다.

 

어떤 사람은 모든 성경이 절대적이고 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인데 서로 다른 시기에 정경이 된 이유는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오늘 이미 완성되어버린 39권의 구약성서를 대하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된 것이 없는 상태였다. 지역에 따라서, 혹은 서기관이나 랍비 같은 종교적 지도자들의 성향에 따라서 서로 다른 문서들이 다양하게 읽혀지고 있었다. 그중에 어떤 것들은, 예컨대 모세오경 같은 문서들은 모세의 권위에 근거해서 일찌기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성문서는 역사적으로 매우 후기까지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구약성서가 39권으로 채택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늘까지 전래되고 있는 모든 구약성서는 (물론 신약성서도 똑같지만) 원본이 없고 사본 뿐이다. 서기관이 양피지에 일일이 베껴 쓴 필사본*이다. 그런데 사본에 따라서 한 두 구절이, 혹은 한 두 문단이 보태지거나 생략되고, 표현법이 달라지기도 하는 등, 각기의 여러 사본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우리말 성서에도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는 빠졌거나 다른 단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예컨대 마가복음 16장9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이 괄호로 묶여져서 어떤 사본에는 그것이 빠져있다고 난외주에 설명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아무리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된 성서원전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완벽하게 집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16:9-20) 포함된 사본이 옳은지 아니면 빠진 사본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다른 복음서, 혹은 다른 신약성서나 구약성서와 대조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본은 4세기 경의 사해사본이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우연한 사건이었다. 1947년 사해 부근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어떤 동굴에 들어갔다가 항아리에 담겨진 낡은 양피지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중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그것이 바로 기원전 100년 경의 구약성서 사본임이 밝혀졌다. 그후로 여러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연구결과로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서의 원전이라 할 930년 경의 마소라 본문이 그 당시의 사본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외의 사본들은 단편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해사본은 거의 모든 구약성서를 포함하고 있어서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 사본은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해사본 이외에 중요한 사본으로는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이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요약한다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역사과정을 통해서 경험된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신학적 보도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한 민족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자기알림으로서 유효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또한 예수와 직접 관계되는 내용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인간구원과 세계구원을 지향하는, 그리고 그것을 완성한 예수의 전체활동과 연관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를 초월해서 이상한 방법으로 출현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 역사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그 답은 명확하다. 성서 본문과 그것을 읽고 있는 사람의 상황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적 간격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성서를 많이 읽거나 외운다고 해서, 혹은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시각이라 할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서 해결된다. 이러한 진지한 노력이 없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세계 그 어느 나라 교회 보다도 성서에 대해서 지극한 열심을 보이면서도, -많은 교회에서 성서 다독대회나 성서 필사대회 같은 것들이 유행하다시피한다-, 성서말씀과 그 정신이 우리의 삶에서 올곧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서해석의 특징은 우선적으로 영해(靈解)다. 기도를 많이 하는 목사나 장로, 권사들이 성서를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영해라기 보다는 알레고리에 가깝다. 지나친 경우에는 임신한 여신도들이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 성서를 통해서 점을 치듯이 가르쳐주는 일도 있을 정도다. 영해는 거의가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의 적용으로서 본문말씀을 이현령비현령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도 약간 나은 경우가 소위 ‘큐티’라는 성경공부인데 이것도 사실은 거의가 성서말씀을 개인주의화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적지 않다. 이러한 접근들은 이미 어떤 방향이 설정되어 있고 그것에다가 말씀을 접합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성서해석은 진리에 대한 열려진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 인간, 역사, 시간, 문화, 기술, 예술 등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나, 아니면 최소한 세상살이나 인간도리를 상식적인 차원에서라도 이해할 수 있을 때 성서를 바르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

 

모세오경

 

이제 우리는 구약성서의 구조와 내용을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전체가 39권*으로 짜여져있는 구약성서는 각권의 성격상 세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가장 앞 부분에 속해 있으며 가장 먼저 정경으로 채택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한 데 묶어 모세오경이라고도 하고 토라(율법서)라고도 한다. 모세오경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사실성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다섯권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전통 때문이고, 율법서라고 하는 이유는 그 내용이 유대교의 핵심적 율법을(주로 레위기와 신명기)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 째 부분은 예언서인데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을 정복해 가는 과정,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 이르는 변화, 남북왕국의 분열과 왕국의 패망, 그리고 포로귀환에 걸친 일천년 정도의 역사를 제왕과 예언자의 갈등구조 가운데서 서술한 내용이다. 성문서라고 불리우는 세번 째 부분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특히 남왕국의 패망와 포로, 그 귀환에 이르는 혼란한 시기에 생성된 일종의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모세오경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현재 구약성서 39권을 성서의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모세오경에는 창조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족장 설화들, 애굽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 소상한 이야기, 모세를 중심으로 한 영광의 엑소더스, 광야생활에서 당한 위기와 에피소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지만 결국 그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모세의 광야설교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가 유대인 특유의 신앙에 터해서 대하소설 처럼 그려져 있다. 이 자리에서 이 내용을 모두 간추려낼 수는 없다. 그중에서 그 골격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을 네 단계로 정리하겠다. 창조(빛이 있으라), 족장(너의 고향을 떠나라), 출애굽(엑소더스), 광야생활(만나와 메추라기).

 

빛이 있으라

 

창세기 1-11장의 중심주제는 창조다. 사실적 역사라기 보다는 모든 역사의 근원이 된다해서 原역사(Urgeschichte)라 한다. 이 사건들은 이스라엘 민족사가 시작하기 이전의 보편적 세계이해를 설화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일종의 신학적 해석이며 고백이다. 이 원역사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창조사건,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 노아홍수, 바벨탑 이야기로 이어진다.

창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빛, 둘째 날- 하늘, 셋째 날- 육지와 식물, 넷째 날- 별, 다섯째 날- 날짐승과 어족, 여섯째 날- 들짐승과 인간. 하나님은 육일 만에 세상의 창조를 끝내고 칠일 째 안식하셨다.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창조 이야기에서 나오는 첫째 날, 둘째 날을 지금의 날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얼마의 기간이 걸렸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첫번 창조사건이 빛이었다는 점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창세기 1:3). 성서기자들은 왜 빛을 최초의 피조물로 생각했을까? 아직 우주물리학적 지식이 미개했던 고대인들이었지만 직관적으로만 생각해보아도 빛은 모든 생명과 존재의 근원일 수 밖에 없었다. 빛이 있어야만 식물이 자랄 수 있고 그래야만 인간은 그 식물을 먹고 살 수 있는게 아닌가. 만약 빛이 없다면 모든 생명의 연결고리가 깨어지고 만다. 그것만이 아니다. 요즘 처럼 전기불이 없던 고대시대에 빛이 없는 밤, 바로 그 밤이 지배하는 어둠의 공간은 모든 현상과 사물이 분별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비존재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온 우주에서 빛 보다 더 위대한 존재론적 사건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빛*을 창조의 첫 사건으로 설정한 성서기자의 판단은 옳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1억5천만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광속으로 8분여 걸리는 거리다. 이런 절묘한 거리로 인해서 지구는 생명체를 유지하는 데 가장 적당한 양의 태양 에너지를 받고 있다. 태양의 빛은 생명의 시초로부터 아메바나 공룡이나 원시인, 그리고 오늘 우리와 먼 후손에게도 역시 생명의 에너지 구실을 할 것이다. 그 태앙의 빛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늘어나면 지구의 생명도 역시 끝이다. 태양은 생명의 자궁인 셈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고목나무 둥치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에게 찾아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소? 무엇이든지 말하시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장 옆으로 좀 비켜 달라는 거요. 당신의 그림자 때문에 내가 햇빛을 받을 수 없소.” 이 일화가 뜻하는 것은 디오게니스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에게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이라기 보다는 디오게네스의 존재론적 근거가 빛이었다는 게 아닐른지.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먼저 빛을 창조했다는 성서기자의 직관은 신학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학적으로도, 인문학적으로도 역시 정당하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창세기 12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는 이스라엘 족장들 이야기다.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루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이 말씀대로 고향을 등지고 가나안으로 이민온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이 25장까지 그려져 있다. 아브라함은 100세 때에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 했다. 물론 앞서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들(이스마엘)을 얻은 일이 있었다. 어떻게 남자가 100살, 여자 90살인데 아기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후손을 가능한대로 많이 두는 것이야말로 자기 생존의 근거이며 목표였던 그 당시에 생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던 노부부가 아들을 낳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해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다. 순리대로 하자면 에서가 대를 이어가야했겠지만 야망이 많았던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탈취당한다. 족장들 중에서 인간적인 욕망과 한계를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인물로서 드라마틱한 설화를 쉴새 없이 쏟아낸 야곱은 열 두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야곱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 가나안 땅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호족행세를 하게 되었다. 야곱의 편애로 인해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다른 형제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다가 결국 에집트로 팔려간다. 요셉은 그곳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에집트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는 것을 기회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무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결국 70여명에 이르는 야곱의 대가족은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요셉 덕분으로 에집트의 고센이라는 곳에 정착해서 종족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족장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이미 그때부터 분명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이 바로 그것이다. 족장시대의 마지막도 역시 조상 대대로 살던 가나안을 떠나는 장면으로 채워지고 있듯이 그들은 항상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떠나는 민족이었다. 유목민으로서 늘 거처를 옮겨야했던 민족, 항상 디아스포라였던 그들, 어디서나 소수민족이요 난민의 설움을 받아야했던 그들은 그러한 불안정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희망했다. 사실 인간 자체가 도상의 존재는 아닐까? 아무리 확고한 자리를 구축했다 하더라도 7,80년을 버텨내기 힘든 것 아닌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숙명을 안고 이 세상에 왔을 뿐이다. 그걸 빨리 깨닫고 사는 사람, 그런 민족이야말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 처럼.

 

엑소더스

 

모세오경의 두번째 성서는 출애굽기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 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4백년 동안 터잡고 살던 에집트 땅을 또 다시 떠나야 했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대표하여 종교적인 문제로 광야까지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에집트의 왕 바로에게 요청하지만, 모세와 히브리 민족의 숨은 의도를 꿰뚫어본 바로는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모세가 강력한 영적 권위로 압박해 들어가도 태양 같은 신적 존엄성으로 무장한 바로가 굴복할 리 없었다. 모세와 바로 사이의 밀고 당기는 대결은 다음과 같은 아홉 번의 놀라운 재앙이 내려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피, 개구리, 티끌, 파리,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 드디어 에집트의 모든 장자와 짐승의 맏배가 죽는 열 번 째 재앙*이 임하자 바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세와 그 백성을 떠나보낸다. 그들은 홍해를 마른땅 처럼 건넜고, 추격해오던 바로의 군사들은 홍해바다에 수장되었다. 이것이 출애굽기 1-15장의 이야기다.

 

*모세를 통해 에집트 민족에게 내린 열번 째 재앙과 연관된 사건은 앞서 이 책 3장의 ‘밥상 공동체’ 항목에서 한번 언급된 문제지만 구약의 핵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역시 반기독교적, 비기독교적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현실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더 짚어두려고 한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서 에집트의 모든 맏아들이 죽는다는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라는 질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대적자들의 갓난 아이까지 죽일 수 있는 분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성서에 대한 엄청난 곡해다. 에집트 사람들 각 가정에 일어난 그런 사건을 하나님의 의도된 징벌로 이해한 유대인들의 역사해석을 오늘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세계역사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점에서는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식으로 이방민족의 이유 없는 고난과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 당시의 의학적 지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치명적인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벌어진 끔찍한 재해였는지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 사건을 자신들의 해방사건과 연결시켜서 구원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는데, 때에 따라서 그런 구원사적 해석이 옳을 수도 있고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다른 여자들과 함께 소고를 들고 춤추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애굽기 15:21).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의 정형화된 신앙이 잘 표현되어 있다. 에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느리고 느린 긴 행렬이었지만 바로의 군사들은 훈련된 기마병들이었다. 걸어가는 이들과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 이 둘 사이에 싸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하나님이 말과 말 탄자들을 바다에 던지셨다고 그들은 노래한다.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기마병들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어린 아이 보다 훨씬 무능력했다는 것이 성서기자들의 역사경험이며 해석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신앙으로 주변의 강력한 제국들 사이에서 생존의 터를 잡아갈 수 있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쳤을 때 홍해가 갈라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사실적인 이야기일까? 유대인들은 마른 땅 처럼 지나갔으며 그들을 뒤따라 오던 에집트의 기마병들은 모두 수장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사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당시의 일을 사실적으로 파악해낼 수 없고 다만 성서기자들의 신앙고백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홍해라는 낱말을 원어적인 의미에서 보면 갈대바다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즉 갈대 늪지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모세는 원래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쪽 지리에 익숙했을 것이다. 어쩌면 갈대 늪지대를 통과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런 방식으로도 활동하신다. 이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홍해를 실제로 갈라쳤든지, 아니면 갈대 늪을 헤쳐나왔든지 신앙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나와 메추라기

 

출애굽 이후 홍해를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권태로운 광야생활에 접어든다. 장정의 걸음으로 보름 정도 걸리는 거리라면 아무리 떼거리로 천천히 걷는다고 해도 두달, 아니면 세달 정도면 충분할텐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까지 자그만치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한다. 지리적 환경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이방족들의 위협으로 인해 농사는 커녕 사실 목축도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 그 많는 백성들이 광야에서 버틴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가장 먼저 만난 어려움은 역시 식수였으며, 그 다음으로 먹거리였다. 물과 음식은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인데 이것이 광야에서는 보장되지 않았다. 성서는 이런 인간생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시켜주셨다고 증언하다. 하나님은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기도 했고(출애굽기 15:22-26), 아침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다(출애굽기 16장).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다. 아마도 계절풍에 따라서 철새떼가 그들 진영으로 몰려들었거나(참조: 바클레이 성서주석), 혹은 이미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던 모세가 그런 먹거리가 많은 장소를 익히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어쨌든지 성서기자는 광야의 혹독한 시련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존을 책임진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신구약성서 전체를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하셨으며(마태복음 6:33), 초대교회 모든 신자들도 그런 생존조건*을 염려하지 않았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을 염려하지 말고 살아가라고 강권하는 성서의 주제는 오늘 현대인들도 귀담아들어야 할 구원론적 진술이다. 어떤 경우라도 생존보장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패턴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세계경영에 참여하거나 첨단의 경쟁력을 제고하는가에 있지 않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이해를 바꿔나가는 데 있다. 자기 가족을 위해 오직 하루 치의 만나만을 거두어가라는 명령을 불신하고 그 다음 날 치까지 쌓아둔 경우에 그 만나가 썩어버렸다는 만나사건은 인간사회가 어떻게 생존에 터한 사회구조를 꾸려가야할지 그 비젼을 적절하게 제시해준다 하겠다.

 

출애굽기 16장부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는 많은 이야기는 광야생활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에피소드, 전쟁, 율법 등에 관한 설명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광야생활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다. 신명기서 34장에 기록된대로 모세의 죽음으로 이제 광야생활이 종결되며, 아울러 모세오경도 대단원을 내린다.

 

예언서

 

구약성서의 두번 째 부분은 예언서다. 예언서는 그 성격상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분류된다. 전기 예언서는 왕정시대에 예언자들이 어떻게 활동했는가 하는 사실을 보도한다.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가 그것이다.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가 왕과 귀족, 백성들에게 선포한 설교다. 이것은 또한 분량의 다소에 따라 대예언서와 소예언서로 나눈다. 대예언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며, 소예언서는(일명 12소예언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이다.

전기예언서는 사실상 근 일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 중요한 연대기적 흐름은 다음과 같다. 가나안 입성,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앗시리아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BC 721`년),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BC 587년), 바벨론 포로, 포로귀환(BC 538년), 예루살렘 성전복구.

전기예언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 입성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끊임 없는 갈등과 투쟁을 벌여나가는데, 그때 활동한 이들이 바로 삼손, 기드온, 입다, 드보라 등과 같은 사사(판관)들이다. 사사들의 힘으로는 가나안 원주민들, 더 나아가 주변의 제국들과 경쟁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왕권이 성립되었다는 것은 상비군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초대왕 사울은 원래 겸손한 인물이었지만 절대권력을 잡게된 탓인지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도력을 상실한 채 아들 요나단과 같이 전쟁터에서 죽는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사울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다. 제2대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이스라엘을 명실상부한 왕정국가로 키운다. 이제부터 왕권이 대를 잇게 되어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러 여로보암 장군이 반역한다. 그는 중,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가 세운 이 나라를 북이스라엘이라고 한다.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의 작은 영토에 한정된 소왕국의 왕으로 전락했다. 이를 남유다라 칭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국력은 소진하게 되고 결국 주변의 제국들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는다. 이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들은 포로 귀환 이후로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편찬하는 등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여력을 다 쏟아부었지만,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제국에 의해 식민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예수 시대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 전기예언서에서 볼 수 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은 두 가지다. 첫째, 전반부에 진술되어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영토싸움이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가슴에 품고 저들 민족의 숙원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초입에 놓여 있는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초토화시킨 다음,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지배지역을 넓혀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서 처절한 싸움을,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부도덕한 싸움을 서슴치 않았다. 둘째, 왕정이 들어선 이후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과 예언자의 갈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왕권을 무한대로 확장시켜보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의 권력을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시키려는 예언자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한다. 성서는 참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소홀히 할 때 왕과 이스라엘 민족이 항상 시련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후기예언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의 설교모음이다. 예언자들의 사역은 앞으로의 일을 예언한다기 보다는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이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성문서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정경으로 채택된 성문서는 일종의 문학적 문서로서, 시편, 욥기, 잠언, 다니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룻기, 아가, 전도, 예레미야애가, 에스더를 가르킨다.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사건이나 농경풍습과 관련된 설화, 시, 격언, 소설이다.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약성서는 히브리즘의 영적 곡간이다. 비록 외면상으로는 배타적이고 쇼비니즘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부단히 인식해나갔다는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할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우기 기독교인들의 기독론적 신앙을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토양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경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레벨:14]햇빛처럼

2016.07.13 17:17:53
*.156.90.197

5장까지만 있고, 나머지는 없어서 서운합니다. 없을 리가 없을텐데..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7.13 22:18:59
*.164.153.48

예, 12장까지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한다>는 책이에요.

나중에 시간 나는 대로

나머지 내용을 여기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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