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21세기 한국교회와 신학

신학입문 조회 수 3411 추천 수 0 2011.11.16 15:18:03

13장

21세기의 한국교회와 신학

 

이제 긴 여정을 거쳐 결국 21세기의 한국교회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과연 21세기에 한국교회는 어찌될 것인가? 그냥 ‘한국교회’가 아니라 ‘21세기의 한국교회’를 말한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일까? 새로운 밀레니엄이라 해서 전 인류가 요란스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시간이 그런 규정에 담겨질 턱이 없으며, 더구나 21세기가 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도 없다. 먹고 배설하고 번식하고, 즐기고 고민하고 얽매이고 자유롭게 살다가, 그리고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가상공간에 들어가 아무리 멋진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는 이런 인간 삶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앞으로 50년 안에 화성으로 여행을 다니는 세상이 되어도 역시 그렇다. 21세기가 유별나기 때문이 아니라 항상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기(豫期)하는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신앙이라는 점에서 21세기라는 일종의 기호를 통해 한국 기독교를 전망하고, 나아가서 희망하는 작업은 이 책의 갈무리로서 적절하다고 본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있는가?

앞장에서 한국교회가 어떤 사회, 정치적 국면에서 어떤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고 출발했는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일백 여 년 동안의 한국교회사를 몽땅 추려낼 것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21세기 한국교회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 6.25 남북전쟁 이후 50년을 10년 단위로 일단 정리해 볼 필요는 있다.

50년대는 이 나라가 겨우 생존에 급급하던 때였기 대문에 교회도 역시 근근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특징이라고 한다면 일제치하와 6.25 한국전쟁, 그리고 절대빈곤의 구도 속에 놓여있던 까닭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는 열광적이며 묵시론적인 성격을 띠었다. 현실에서 절망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세지향적일 수밖에 없으며 초월적 구원론으로 흘러든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의 비뚤어진 현상이 바로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 운동과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이다.

60년대는 교단분열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다. 1959년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예장)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으며, 1961년에는 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로 여러 교파가 이합집산식으로 분열과 재통합을 거듭했다. 이 분열의 단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였다. 1954년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2차 총회와 1961년 뉴 델리에서 모인 3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가 핵심 주제였다. 당연히 교회의 사회참여가 적극적으로 논의되었으며, 제삼세계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결국 WCC는 우익 독재에 저항하는 좌익계를 지원함으로써 용공성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 이래로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앙적으로 옹호하던 한국교회는 친 WCC와 반 WCC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로 인한 상처, 그리고 세계교회사적 흐름을 따라보려는 노력으로 60년대는 나름대로 교회 일치운동과 토착화 신학이 활성화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은 선교의 주체를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옮겨놓았다. 사람들을 단순히 교회로 불러모아 세례를 베푸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일을 선교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피식민국가의 독립투쟁, 각종 인권운동 등이 이런 것이다. 60년대에 새롭게 제기된 신학작업인 해방신학, 정치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하나님 선교 개념과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 선교 개념에 영향을 받아 70년대에 도시산업선교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70년대는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기점으로 기독교의 대형집회가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런 과시적 집회 때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의 발전 탓이기도 하지만, 7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80년대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전도, 교육, 기도원 운동, 성경공부가 붐을 이루었다.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소위 큐티(Quiet time) 성서공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이런 종류의 집회가 모이기도 하고, 이에 토대를 둔 정기간행물의 숫자가 적지 않다. 그야말로 7, 80년대는 한국교회의 황금기라 불릴만하다.

90년대에 들어와서 교회성장이 약간 주춤하면서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했고, 98년도에는 IMF의 여파로 교회도 적지 않게 곤란을 겪었으며, 심지어는 부도사태에 빠지는 교회가 나올 정도였다. 세계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세계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2천년 기독교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현상*으로 인정한다. 이미 오랜 역사의 여타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우리나라에서 개신교만 하더라도 선교 1백여 년 만에 남한 인구의 20%를 신자화 했으니까 놀랄만한 일이다. 다만 남북분단 이전에는 북한도 남한 못지않은 기독교세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주체사상이 50년 이상 북한주민을 종교와 격리시킨 까닭에 이제는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남한의 이런 선교결과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겠지만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럴 수밖에 없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급격한 도시화와 이농현상으로 인해서 정신적 고향을 갈구하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되었다. 7, 80년대의 군사독재도 역시 기독교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철권정치의 횡포 가운데서 정치적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국민들이 그나마 교회를 통해 위로를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급격한 경제발전과 빈부 격차로 인해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있던 국민들이 명분상이나마 평등과 사랑을 외치는 교회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 이외에도 원래 기복적인 관심이 많았던 한민족에게 교회의 축복선언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들리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성장과 교회성장의 속성은 여러 점에서 닮은꼴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가 놀랄 정도로 쾌속 성장했다는 점이 우선 비슷하다. 한국경제가 관주도, 수출드라이브, 저임금 정책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처럼, 한국교회도 가부장적 목사상, 성장지상주의, 자학적이라 할 정도로 강요된 신자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성장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경제나 교회가 공히 군사독재의 덕을 보았다는 점이다. 경제는 군사독재와의 정경유착에 의해서 각종 혜택을 챙길 수 있었으며, 교회는 군사독재에 대해 침묵으로 동조함으로써 일종의 도피처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양측이 모두 사회변혁의 역사적 경험 없이 부지불식간에 덩치만 커진 까닭인지 졸부근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자체 안에 상당한 거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흡사 일란성 쌍둥이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필자가 한국교회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게 아니냐고 반박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진지하게 새겨들어 볼만한 인문학자의 고언을 소개한다. 그는 전주에 있는 한일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영민이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는 글 말미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시라.”(한겨레21, 1999년 4월 15일자).

 

솔직하게 묻자. 21세기에 한국교회의 미래는 있는가? 어떤 형태로든지 교회는 존재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나 구원론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될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질문은 그게 아니라 “21세기에 한국교회는 어떤 미래를 지향해야하는가?”다. 어떤 형태의 교회가 되어야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교회의 존재는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에 달려있지만 교회의 본질은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어떤 미래’냐 하는 질문이 우선한다. 어쩌면 이 두 질문, 즉 교회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질문은 다른 층위에 속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상호적인 관계를 갖기 때문에 어느 쪽의 대답이든지 다른 쪽의 대답을 전제하고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원칙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듯 하다.

 

복음, 세상 안인가, 밖인가?

대표적인 미국의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는 문화와 종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본질이라고. 문화는 종교의 옷이고 종교는 문화의 몸이라고. 굳이 그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독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상과 역사의 총체적 개념이라 할 문화와의 관계를 우선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실천방향의 가닥을 잡아나갈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상하게도 문화에 대해서 매우 양 극단적인, 혹은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문화(세상)와 복음(교회)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 복음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주장이다. 우선 이 말은 원칙적인 면에서, 그리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옳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 질서를 뛰어넘는 은총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은총의 질서는 길게 부연할 필요도 없이 2천년 기독교의 오염된 역사 가운데서도 교회의 본질을 지탱해온 하나님의 능력이며,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으로 용서가 실행되면서도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질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인 복음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밀알로, 에너지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세상 밖에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의 세상 초월성이 왜곡되는 경우에는 세상 질서에도 훨씬 못 미치는 광신의 무질서를 생산한다. 사랑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며 용서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말하자면 삶과 존재의 무게를 벗어버리기 위한 일종의 현실 도피적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고뇌하고 좌절하며 무의미에 빠지기도 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원초적 구호에 매료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복음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떨어져 웃음거리가 된다.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는 세상문화를 적대시하거나 아니면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능한대로 세상 문제와 상관없이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문제는 속된 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세계를 바라보는 교회가 관여할 문제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독재자가 나오건 말건, 노동자가 소외된 건 말건,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상관없이 그저 기도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은혜로 합시다.”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비민주적이고, 그것도 모자라 비상식적인 행태를 합리화 하는 이유도 이런 생각에 기초한 당연한 귀결이다. 설교의 내용도 역시 무조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 전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것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별로 없고, 무슨 말을 하든지, 때로는 억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세상의 힘을 동경하고 세상문화의 멋을 좇으려고 짝사랑하듯이 애를 쓴다. 이는 교회가 세상문화에 대한 향수와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증거다. 예컨대 한국교회가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을 정도로 교회당 건축에 집착하는 행위를 볼 수 있다. 어느 교회나 가릴 것 없이 어떤 타당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교회의 체면이나 종교적 업적 때문에 별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도 교회당 건축을 과도하게 밀고 나간다. 세상의 건물에 밀리지 않는 거대한 교회당 건물을 짓는 행위가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해서 거의 평생토록 그런 일에 매달린다. 어디 그런 것만인가? 나름대로 수준이 높다고 생각되는 교회의 프로그램도 역시 거의 자기현시, 자기과시에 집중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의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는 감동적인 음악이나 연극을 감상하려면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 전문적인 공연장을 찾는다면서 한국교회가 신앙의 신비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프로그램에 급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한국교회의 보여주기 콤플렉스는 목사의 학위취득에서 극치를 달린다. 목사가 평생토록 학문에 정진하고 있다면야 더 바랄나위가 없겠지만, 박사학위를 돈으로 산다거나 아니면 거의 형식적인 과정만 거치고 학위를 받는 일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보면 세속문화에 대한 동경이 얼마나 집요한지 알만 하다.

복음이 세상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 질문 자체에 답변이 들어 있다. 복음은 세상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복음이 문화적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세상 안에 있으며, 복음이 문화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세상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예리하게 적용시켜나갈 수 있다면 교회는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다.

복음을 그 본질로 삼고 있는 교회는 일단 복음을 세상의 문화와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을 말할 때도 세상의 구원론적 행위들과 대화해야지 무조건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 독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믿음이 사랑과 희망의 틀로 연결되어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이 옳다면 실제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과 고난을 나누고 이 시절을 인내해 나가며, 서로 간 희망의 느낌과 언어를 나누어야한다. 이런 점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도록 인문학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세상문화 밖에 터하면서 그것을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꿰뚫어보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의 자본주의적 힘의 질서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훼손시키고 있는지, 기술왕국적 메시야니즘*이 어떻게 인간성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근대주의가 자연을 정복하고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인간중심적 복지사회를 확대시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술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우리와 같은 기술도상국만이 아니라 선진기술사회, 혹은 그것을 따라잡기에 몸부림치는 삼류국가 안에서 구원론처럼 외쳐지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는 인간기술이 모든 인간노동력을 대신하게 되고, 더 나아가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한,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될지 모른다는 구상도 일각에서 설계되고 있으며, 그것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의 조짐이 보인다. 만약 자본과 기술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가 바로 궁극적 구원의 순간이 될 것인가? 나는 그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자본과 기술이 인간과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과정에서 더 많은 문제들을 생산해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본제적, 기술왕국적 이데올로기와 맞서서 투쟁해야한다.

 

결국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화현상이 구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방식이 아니면 복음을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에 21세기의 한국 기독교는 세상문화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사랑하는 작업을 열렬히 펼쳐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과 문화는 변증법적 관계다. 복음은 문화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문화는 복음의 정신에 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근거해서 이제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가 한국이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구원론적 상수로 붙잡아야할 구체적인 주제를 몇 대목만이라도 간추려보자. 그 초보는 타종교 문제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연전에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신학대학 교수들을 출교시킬 정도로 타종교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한국교회 앞에서 섣불리 타종교 문제를 다시 끌어낸다는 것은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서는 결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짐짓 거창하게 21세기 한국교회 운운 하면서 이 문제를 지나쳐 버린다는 것 또한 직무유기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의 흔적만이라도 내보여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배타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지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인에 의한 훼불사건이 마흔 건이 넘는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급기야 98년 6월 26일에는 장로교 교인 한 사람이 제주시에 있는 조계종 산하의 원명선원에 들어가 불상 750기와 삼존불을 훼손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타종교에 대한 이러한 적대감은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신앙적으로 형제라 할 수 있는 가톨릭까지 그 대상으로 삼는다. 간혹 유서 깊은 성당건물이 기독교인에 의해 방화되는 일이 있다. 대단한 적개심이다. 이런 사건을 바라보는 기독교신자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일반 신자들은 아마 그런 폭력적인 방식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근본주의적인 신앙인들은 내색은 않아도 속으로는 통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유대교와 달리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받는다는 보편주의에 근거하고 있는데도,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타종교와 이교도들을 멸절시키고자 한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가나안의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을 찍어버린 기드온이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느부갓네살 황제의 신상에 절하지 않은 다니엘 같은 이들의 영웅적 행위가 예찬되는 구약성서에 비해 신약성서는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또한 기독교 스스로 종교적인 이유로 끔찍한 박해를 받아 그런 입장을 알만 한대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럽역사에서 스스로 가혹한 박해자의 자리에 섰다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슬람교도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을 (1096-1291) 치렀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흡사 원수지간처럼 싸웠다(30년 전쟁, 1618-1648). 어디 그뿐인가?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경쟁적으로 펼친 침략(식민지)전쟁에서 기독교는 그들을 선교한다는 미명하에 황제와 국왕의 군대가 저지른 만행을 묵과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종교와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곳에 기독교를 심었다. 물론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거의 이런 시각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타종교를 불온시하고 때로는 조롱거리로 여긴다.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에 대해서 거의 신경증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배타적 구원이해와 선교열정에 있다.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말라.”(출애굽기 20:3)는 말씀이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는 말씀 등에 근거해서 다른 종교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 적그리스도로 생각한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성서의 구원론은 투쟁적이고 독점적이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타종교를 타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자신들의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생존보다는 본질이 중요한 시대다. 오늘에도 여전히 그런 배타적 종교 패러다임을 적용시킨다는 것은 신앙의 근본을 도그마로 이해하는 탓이리라. 그렇다고 여기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기독교의 기초명제를 해체하자거나 종교다원적으로 해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본질을, 그 근본을 허물지 말자는 말이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이름에 어떤 주술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역사적 실존인 인격체로서의 예수와 그의 가르침, 그의 행위 전반을 진리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를 믿고 그의 부활을 희망하는 삶이 바로 믿음이다. 이렇게 믿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에 의하면 구원은 예수와 그의 행위에 자신의 삶을 의존시키며 이에 근거해서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희망하며, 불안한 시대 가운데서도 평안을 유지하게된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쓴 편지에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 5:22,23)라고 했다. 이것이 곧 구원받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현상이다. 예수와 그의 운명 전체를 믿는 자에게는 이런 모습으로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굳이 칼 라너의 ‘익명의 신앙인’을 들추지 않더라도 사랑, 희락, 화평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누가 독단적으로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구원이 교회 안에만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곧 성령의 활동을 억제하는 꼴이 된다.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그분만이 메시야라고 믿는 것과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교회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누가 구원받느냐 하는 것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구원과 형벌을 선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닐까 모르겠다. ‘누가 하늘을 독점할 수 있는가’라는 고진하 목사의 말대로 (기독교 사상, 98년 8월호) 구원의 능력과 신비를 우리의 말재주로 재단하지 말고 하나님께 위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혹은 타종교에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물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또한 진리이기도 하지만, 타종교의 구원문제는 이런 명제와 지평을 달리한다. 기독교인이 주력해야 할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성령의 열매 처럼 사랑, 희락, 화평의 세계를 가열차게 넓혀가는 것뿐이고, 타종교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말이다. 또한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이미 결정되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열려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교회 조직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정작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구원의 현실성들을 열어가고 있는 고등한 타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하고 자연을 소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서가 대적하고 있는 오늘의 적그리스도다.

 

남북통일은 구원이다.

 

한국교회는 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북한을 향한 적대적이고 전투적인 자세를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만시지탄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그 이전까지 북한을 향해 보인 적대감은 두 가지 원인에 기초한다. 하나는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부정한다고 보았다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가 유물론적 세계관에 토대를 둔 이념이기 때문에 관념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는 종교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남한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당수의 세력이 북한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월남인사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50년 가까이 북한을 적그리스도 집단으로 취급했다. 물론 KNCC(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일단의 교회가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했지만 대개의 교회는 소위 레드 컴플렉스에 사로잡혀서 반공투쟁의 선봉에 섰다. 아마 한국에서 반통일 집단을 꼽으라고 한다면 90년 대 이전의 한국교회가 앞순위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1990년 어간에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로 한국교회는 북한에 대해서 상당히 유연한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의약품, 먹거리, 돼지 등 많은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했다. 그동안 북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보수적 교회들도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질적 도움도 도움이지만 적대감의 감소는 21세기 통일 한국을 위해서 긍정적 조짐이다.

한국교회가 점진적으로나마 남북문제를 유연하게 접근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간의 완고함에 대한 반성이며 회개일까? 우선은 자신감의 발로다. 소련연방 해체, 동구라파 공산정권의 붕괴로 인해서 북한을 더 이상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다른 한 요인은 북한의 계속되는 식량난 문제가 한국 교회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게 분명하다. 세 번째는 교회의 선교전략과 관계된다. 국내외 선교가 한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제 교회 에너지를 통일문제로 집중하려는 전략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가 명실상부한 통일지향적 공동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국면이 전화되면 언제라도 적대적 자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적이고 국내외 정치역학적 관계에 대한 다층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남북분단과 통일문제를 섣불리 논한다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접어두기로 하고, 다만 신학자적 양심에서 최소한이나마 언급할 필요는 있다고 보아 한 두 마디 지적코자 한다.

우선은 북한을 순전히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남한 체제가 우월하다는 점을 정치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정부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로 획득한 자신감의 발로인지, 정부나 메스컴이 앞 다투어 북한의 수해와 식량난 문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그 결과로 이 문제가 민족적인 차원에서 도와야겠다는 시민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이에 걸맞게 교회도 적극적으로 북한돕기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과거의 남북한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지지만, 형제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돕는 것은 어찌되었든지 희망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동정심이라든지, 아니면 “꼴좋다. 그래 주체사상을 찾다가 쪽박을 찼구나.”라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제까지의 결과로 놓고 본다면 실패에 가까운 실험이긴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일단 인정하고 그들이 시련의 기간을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민족의 수천 년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시행착오는 사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서로 간 민족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틀을 잡아나가야 한다.

또한 교회의 입장에서 특별히 중요한 문제는 남북문제를 지나치게 선교 전략적 차원에 접근하지 말아야겠다는 점이다. 많은 교단들이 통일 이후 신의주, 평양, 개성 등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지금부터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다. 만약 북한에도 지금의 남한교회 처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으로 갈가리 찢겨진 교파교회가 난립하게 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죄다. 교회 일각에서 이런 현상을 막고 하나의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 어떤 기구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있긴 하지만, 흡사 기업 확장처럼 경쟁적으로 세계 선교활동을 펼쳐 졸부근성이라는 소리를 들은 과거의 선교행태를 돌이켜볼 때 요원한 일이다. 아마 통일이 되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곧 여러 교파와 교단, 그리고 개 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설립할 게 불을 보듯 분명하다.

교회는 통일을 교회확장의 기회로 이용하지 말고 통일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이해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통일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구원이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서 남북통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남북통일을 위해 교회의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남북통일이 주이고 교회가 종이지 그 역은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해나가기 위해서 무엇이 주이고 무엇이 종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21세기는 한국교회가 남북통일을 구원론의 머릿글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21세기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과제로 삼아야 할 또 하나의 주제는 삼천리 반도 땅이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는 사실과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다고 말씀했으며(마태복음 5:45), 바울도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로새서 1:16)이 모두 그로 말미암는다고 증언했다. 요한은 급기야 ‘새 하늘과 새 땅’(요한계시록 21장)이라고 하나님의 전권적 역사를 강조하고 있는데도 오늘 기독교인들은 생태 문제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껏 해야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시고 싶다든가, 유기농산물을 먹고 싶다든가,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정도다. 지금까지 생태계 파괴는 결국 인간의 쾌적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친 결과인데도 여전히 그런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한 발자국도 비켜나지 못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생태계 접근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대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이 명제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편리한 삶만을 위해 지구를 소비하는 행위는 죄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 생명의 영적 매카니즘을 끊어내면 안 된다. 오히려 풍성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럴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 있는 그대로 놓아두어야한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의 문명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공인 것처럼 지구를 혹사시켜왔으며 아직도 그런 작업에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그런 삶이 구원인 것처럼.

지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의미를 새겨야한다. 이 세상은 거룩하다는 사실을. 창세기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창세기 1:4,10, 18 외). 하나님이 보기에 좋다는 것은 거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지구에 속해있는 모든 존재들은 좋고 거룩하다. 나무, 새, 토끼, 고릴라는 거룩하다. 강과 산, 사막과 고원이 모두 거룩하다. 진딧물, 박테리아, 곰팡이도 역시 거룩하다. 땅도 거룩하며, 인간의 몸을 병들게 하는 온갖 세균도 역시 거룩하다. 생각해보라.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생물체가 썩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 지구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지구는 음과 양, 살림과 죽임의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생명의 역학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는 생명의 땅*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은 너무나도 명쾌하지 않은가. 편리하고 쾌적하고 건강하고, 더구나 오래 살겠다고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은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오만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유달리 각별하다. 원칙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거나, 곤충이 발에 밟힐까 해서 짚신을 만들더라도 바닥을 성기게 하고, 뜨거운 물을 마당에 직접 버리지 않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전통이 유명무실하지만.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에스키모인들과 북아메리카의 인디안, 그리고 우리의 전통이라할 샤머니즘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생명사상과 소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도 비록 샤머니즘이 숙명주의적 세계관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을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몰아간다는 한계가 있지만, 생명사상이라는 점에서는 관심을 기울여봄직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티베트에서 실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은 죽은 자를 들판에 내놓아 새들이 쪼아먹게 하는 장례다. 상당히 미개하고 끔찍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명의 유기적 순환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장례법이다. 지금 우리 식대로 해서 시체를 땅에 묻어 박테리아가 먹든, 아니면 그들 식으로 들판에 놓아 새가 먹든 결국 똑같이 먹히는 것이라면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타종교에 비해서 기독교가 생태문제에서 무관심한 듯 보이는 이유는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28)는 말씀을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한 탓이다. 결국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근대주의적 주객도식* 패러다임을 아무 비판 없이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받아들인 것도 그 이유다. 21세 한국 기독교는 이제 동양의 유기론적, 우주론적 패라다임을 성서해석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기초해서 인간과 자연을 통합시키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살고 우리 후손이 살아야할,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야할 삼천리금수강산을 말 그대로 비단과 수로 아름답게 가꾸어야하겠다. 이게 바로 땅의 구원이다.

 

*유럽정신은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헬라인들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생각해서 세계를 대상으로 간주하고 분석했으며, 히브리인들도 역시 하나님을 객관적 실체로 이해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인간은 당연히 세계를 대상으로 여긴다. 역사철학을 집대성한 헤겔의 경우에도 역시 테제와 안티테제가 대립된다. 이런 주와 객의 변증법적 발전이 바로 인간 역사라고 한다. 이를 主-客-도식(Subjekt-Objekt-Schema)이라 말하는데, 이런 패러다임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이 이용할 대상이며 소모품이며 도구가 될 뿐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노자나 장자 같은 이들의 무위자연적 사고를 통해서 서구의 주객도식을 극복함으로써 땅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구원론적 지평

 

한국교회가 21세기에 세계구원을 역동적으로 증언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신학적, 신앙적, 실천적 교회개혁은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요소들만이 아니다. 교회일치, 교역자 재교육, 평신도 교육, 교회구조개혁 같은 문제들이 거론되어야 한다.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들을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이 모든 문제들이 토대를 두어야 할 기독교의 구원론적 지평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구원론의 지평을 심화확대하는 작업이 앞에서 이미 언급된 모든 교회의 실천 프로그램을 결정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세계구원을 선포하는 교회가 지향해야할 구원의 자리매김이다.

첫째, 교회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선 영성의 회복이다. 아무리 물질적인 기초가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영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인간의 삶이 빈곤해지거나 황폐화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 속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늘 경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90년대에 들어와서 영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강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 이런 구도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보인다. 신자들의 열심이 줄어들고 따라서 교회의 성장이 주춤해지니까 7,80년대의 고속 성장신화에 대한 향수 때문에 너두나두 영성을 입버릇처럼 되뇌이고 있을 뿐이다. 사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이 영성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것인 양 요란한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더구나 한국교회가 오순절적 열광주의를 영성으로 생각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령충만은 창조, 평화, 정의, 사랑, 희망, 자유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절망, 불의, 무의미, 비인간화, 소외를 대항해서 투쟁하겠다는 확고부동한 결단이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에너지이지 밤새도록 박수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느끼게 되는 자기초월적 엑스타시가 아니다. 물신적, 바알숭배적, 폭력적 세계에서 영적 가치를 확보해가는 일이 교회가 일차적으로 추구해야할 구원론적 지평이다.

둘째, 교회의 영성은 실제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난다. 아무리 교회가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아무리 진리론적 근거를 갖는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구제와 봉사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공허하다. 교회의 재정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사용되어야 하며,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일에 앞장서게 된다면 기독교의 구원은 현실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랑의 실천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영적 능력인 사랑은 구제와 봉사의 실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인 오늘의 인간 삶에서 구원을 드러내고 실현해나가기 위해서 교회는 당연히 정치적으로 투쟁해야한다. 생각해보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다운 교육을 받아야 하고, 사회복지가 보장되어야 하고, 인간다운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절대빈곤으로 부터 벗어나야 하고, 자연과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모든 일들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지. 정치가 구원은 아니지만 구원은 정치적이다.

 

*한스 큉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책에서 현대의 기술사회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대안적으로 ‘기술극복의 공동체’(die meta-technologische-Gesellschaft)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술발전이 올바른 궤도에 오르고 인간실존이 발전강박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질 기술극복의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갖고 보다 사람다운 노동형태, 보다 긴밀한 자연관계, 보다 균형 있는 사회구조를, 더 나아가 그야말로 삶을 삶답게 만들면서도 금전적 가치로 물량화될 수 없는 인간가치인 비물질적 욕구도 충족시킬 길을 모색해야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순전히 정신적이며 심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정치적인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위에서 진술된 세 차원은 독립적인 항목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영성회복은 사랑의 구체적 행위를 낳게 되며, 이 사랑의 행위는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실행된다. 영성에 근거하지 않는 봉사는 아무리 고귀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공허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봉사가 없는 정치적 투쟁은 권력지향적 욕심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영성, 봉사, 정치적 실행은 삼위일체론적 관계를 갖는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영적 기초를 확보한다.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이 세계의 정치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변화시킨다. 그렇다고 역할분담이 이렇게 도식적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사랑이기도 하고 정치적 능력이기도 하며, 아들이 영적 현실을 드러내주거나 십자가로 인한 정치적 변혁을 담보하기도 한다. 또한 성령이 온 우주에 영성을 일구어내며 사랑의 봉사를 견인해가기도 한다. 교회는 이런 삼위일체론적 구도에서 세계구원에 동참하는 공동체다.

이제는 이 글쓰기를 마쳐야겠다. 마무리로 삼아야할 화두는 역사와 신비다. 교회는 세계역사와 단단하게 연대해야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신비에 대한 환상을 붙들어야한다. 역사는 현실이며 신비는 꿈이다. 역사는 아래로부터, 신비는 위로부터 온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신비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말한다. 기독교적으로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며 신비는 예수의 부활이다.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로서 구원의 세계를 열어간다. 현실 없는 꿈은 몽상이며, 꿈 없는 현실은 허무다. 교회는 역사에 두 발을 딛고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 환상에 근거해서 2천 년 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주, 이 글은 졸저 <기독교를 말한다> 12장 “21세기 한국교회, 그 전망과 희망”을 부분적으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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