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강, 역사적 예수(3)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133 추천 수 0 2012.02.11 18:59:02

제06강

역사적 예수(3)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뭐꼬’라는 제목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름이 좀 거창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도 합니다. 이 제목에는 기독교가 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있고, 과연 우리가 기독교를 얼마나 알겠냐는 뜻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질문할 수 있을 뿐이지 모든 대답을 찾아낼 수는 없다는 그런 뜻도 담겨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거죠. 그 질문 속에 대답도 있고요. 그게 변증법인 것 같습니다. 뭘 알아야 질문하고, 질문을 정확하게 던져야 거기서 대답을 찾을 수 있겠죠.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대답에 가까이 간 겁니다. 기독교가 뭐꼬 하는 말에는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알아내서 그것을 소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까지 이것을 질문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우리는 지금 크게 ‘역사적 예수’라는 관점에서 예수가 누군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역사적 인물이었거든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연인이에요. 자연인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인가 하는 게 기독교 신앙이 변증해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자연인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이에요.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는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자연인, 유대의 한 남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일반인, 그 사람이 어떻게 특별한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아인가 하는 겁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끊임없이 그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지난 2천 년 동안에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는 여기에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에 당연한 거 아니냐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 거예요. 믿음이 있으니까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고 변증하는 것이 우리끼리만 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냥 우리끼리 믿고 사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런 공부도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냥 촌부들처럼 살면 되죠.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믿습니다, 하고 살아도 큰 문제는 없어요. 우리가 이렇게 공부를 하고 신학이 대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우리끼리만 아는 비의적(秘儀的)인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 전체에 보편적으로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질문은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해 성실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적 실존에서도 엄중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그냥 일반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의 본질은 비종교적입니다. 비종교화 개념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일단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기독교는 일반적인 종교와 다르다는 겁니다. 종교는 죽음이 두려워서 혹은 외로워서 어떤 절대자를 찾는 거잖아요? 기독교는 그런 것이 현상적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그와 다릅니다. 이 문제는 제가 이 정도로 말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겠지만, 우리가 여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요.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나약함이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절대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 역사적 인물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긴급하고 엄중한 신앙적 질문이며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 쉽게 피해버리고 말거든요. 그냥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포장을 하고 넘어가죠. 그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뭘 그렇게 따지냐 믿으면 되는 거지, 은혜로 다 넘어가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은혜로 모든 것을 다 해명해 나갈 수 있다면, 자기 설득이 가능하다면, 혹은 설득은 되지 않더라도 은혜라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다고 한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할 수 있어요. 은혜는 그런 점에서 아주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에요. 은혜중심주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서 엄중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죠. 교회가 뭐냐, 성만찬이 뭐냐는 질문도 그렇잖아요?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사실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엄중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다 회피하고 살아요. 매일 그렇게 고민에 휩싸여 살 수 있느냐, 좀 편안하게 소풍 나온 것처럼 사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고 말할 수 있겠죠. 옳습니다. 우리가 만날 심각하게 머리 싸매고 살자는 게 아니에요. 늘 그렇게 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늘 노는 식으로도 살 수는 없잖아요? 근본적으로 우리 바탕에 놓을 것은 놓아두고 그 다음에 준비가 되면 삶을 유희로 받아들이면서 존재를 가볍게 할 수 있겠죠. 자기를 무겁게 하지 않고 가볍게 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자기의 삶을 가볍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가 지금 역사적 예수를 생각하면서 하나의 화두와 같이 던져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는 왜 그리스도인가? 그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증거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좀 난감한데요. 증거야 성서에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할 수 있어요. 신약성서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좀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약성서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증언이니까요. 그러니까 아직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증거가 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성서 자체가 어떤 실증적인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예수를 기록한 거잖아요. 따라서 성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히 못 박는 아주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서는 증거가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이 무조건적으로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혹자는 믿음이 증거라고도 말할 겁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나 뭐가 납득이 되어야 믿을 게 아닙니까? 또 뭐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 사건의 유일회성

예,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건 신학적인 용어인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유일회적인 사건이라는 사실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메시아적 징표들과 사건들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밖에 없었던 사건이라는 거죠. 유일회적인 것인 것이라는 뜻이죠.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많은 사건과 일어난 현상들, 그 모든 것들은 반복된 것이 아니라 딱 한번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개념이라고 해도 꼼꼼히 이해하기만 하면 쉬워요. 이해하지 못하고 낱말 뜻으로만 알고 있으면 우리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한번뿐이라는 것은 반복이 안 된다는 말 아니겠어요? 그 말은 곧 우리가 이 세상에 경험하는 것들로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밖에 없던 것인데 어떻게 그 증거를 댈 수 있겠어요?

이것을 우리 지구에서 벌어지는 천체물리학적인 현상에 빗대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지구라는 것은 우주에서 하나뿐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자연과학 혹은 법칙이라고 말하고요. 열역학 1법칙, 2법칙 이런 거 있잖아요. 불가역의 원리라든지 질량불변의 법칙 같은 거 말이에요. 물리적인 사실과 수학공식들, 원소의 관계 등은 어느 정도 법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전체의 현상, 지구 전체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사건은 어떤 과학적 가설로도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한번뿐이니까요. 과학적인 규칙을 정하는 것은 실험을 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때 과학적인 근거를 갖게 되거든요. 약도 새로 개발되면 임상실험을 통해서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시판돼서 쓸 수 있는 것처럼요. 화학, 물리, 생물학, 유전공학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어떤 규칙을 찾아낼 수 있지만, 지구 전체에 대해서는 찾아낼 수 없어요.

기상예보를 예로 들어볼까요? 3일치까지는 인공위성으로 어느 정도 일기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좀 정확하지는 않죠. 게릴라성 폭우는 기상대가 내일 날씨라도 정확하게 맞추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의외의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아무리 용해도 3일 이후를 내다보기가 힘들다고 해요. 그런데 1년 후 오늘의 날씨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변수들이 있기 때문이죠.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소리를 듣더라도 일정한 주파수 안에 있는 것만 듣습니다. 높이 올라가거나 낮은 것은 듣지 못하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구 안에서 경험하는 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경험하는 거죠. 그 범주 너머에 있거나 다른 차원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몰라요. 그 모르는 것들이 다 이 지구 안에 연관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이 세계를 해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도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어 있어요.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현미경이 발달했다고 해도 더 무한하게 작아지는 세계를 볼 수는 없고, 아무리 망원경이 발달했다고 해도 무한하게 먼 세계를 볼 수는 없지요. 지금 우리가 망원경으로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수십만 년 전, 수억 년 전의 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은 없는 별이죠. 그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지 사실은 우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지구 안에서도 모릅니다. 사실은 그 자체가 요술 덩어리인데,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거의 규칙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학자들이 그것을 파악해가고 있는 거죠. 물리 현상도 마찬가지고요.

예수의 메시아 사건도, 즉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건도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 전체를 이해하려면 지구 바깥에서 차원을 달리하여 봐야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역사가 끝나는 종말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몇 번 인용했듯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금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말하잖아요? 아주 옛날 사람인데 사물에 대한 직관력이 참 놀랍죠? 지금 물리학적인 관점으로 봐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거울로 보는 것과 같아요.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이 세계 안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서 세계 자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좀 속된 표현이지만,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정글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는 증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아마 이런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기독교가 별로 확실한 종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또는 그래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증명하겠냐고 안타깝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대목을 말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간혹 예수를 믿으니까 사람이 변화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기보다 증거가 되지 않아요. 예수만 믿어야 사람이 변화 되나요? 절에 나가도 사람이 변화되고요. 어머니 아버지의 훈계로도 변화가 돼요. 변화는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 봐라, 성령이 활동하는 증거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죠. 교회만 부흥합니까? 신천지도 부흥하거든요. 이단들이 더 부흥을 잘해요.

예수의 메시아성의 종말론적 성격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댈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신학적인 변증이나 해명들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하는 진리 논쟁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도 완벽한 증명은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 증명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겁니다. 증명할 수 없어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증명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 사건 중에서 부활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부활은 모든 것을 결정짓는 요소인데 그것은 이 땅의 그 무엇으로도 증명해낼 수가 없어요. 부활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다시 사는 거 아니냐,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부활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우리는 자꾸만 기독교 신앙을 우리의 경험 안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그 안에서만 생각하려고 해요. 우리의 생각을 투사시키려고 하는 거죠. 우리가 아무리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잘 이해하려고 해도, 우리는 똑같은 반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끝나지 않는 논쟁에 휘말리고 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세계가 다 끝나봐야 이 세계가 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때 가서야 예수의 모든 사건이, 그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건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걸 어떻게 아냐,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하나도 없다고 하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어요. 이 문제에서 이런 방식으로 반론이 나온다면 그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의 논쟁은 소모적이기 때문에 무의미하거든요. 안티기독교와의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독단에 빠져서도 안 되고, 그 어떤 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려고 노력도 해야 하지만, 그런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만이 바른 길이다, 이것만 밝히면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논쟁을 한다면, 또 다른 똑같은 반론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오늘 중요한 점을 말했어요. 어떤 분들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를 이해하는데 기독교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이건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유일회적인 사건이었기에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해나갈 뿐입니다. 변증과 증명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난다고 하면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과학이나 생물학 등이 부분적인 범주 안에서 어떤 사실들을 밝혀 나가는 것처럼, 우주 전체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분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증명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주 부분적인 겁니다. 이런 것으로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완전히 증명해낼 수는 없지요. 우리가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보편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설명하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결단이 필요하거든요.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실존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거죠. 그 앞에는 어떤 선이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쪽으로 왔는데요. 완전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그 맥락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밝혀질 수 있습니다. 시작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선포와 행위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 투 데우’라고 합니다. 보통은 ‘바실레이아’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뒤에 ‘투 데우’까지 붙여요.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그가 무엇을 선포하고 무엇을 행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자꾸 예수님의 사건이라고 말하잖아요? 무엇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하더라도 신대원이나 신학석사(Th. M)과정의 한 학기 주제로 공부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처음 선포한 말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거였어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와 일치해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알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거예요.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통전적이고, 총체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협소한 차원으로만 이해를 하죠. 예수 믿고 가게 되는 천당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에요. 이런 신앙이 기독교 안에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고요. 저도 죽음 이후에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공간적으로만 이해하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대궐이나 호화 맨션쯤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많은 거죠.

요한계시록에도 그런 표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새 하늘, 새 땅 같은 표현들이 나오죠. 묵시 문학에 나오는 이런 말들이 뭐냐 하는 데는 많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새로운 세계와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부분에서 연결이 되고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나라가 온다는 점에서는 연관이 됩니다. 유대인의 역사 이해라고 할 수 있는 묵시 문학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온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그들에게는 그 세계가 지금의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거였어요. 이원론적으로 구분이 되는 거죠. 이 세상은 무조건 악하고 타락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이건 망해야 하는 거죠. 이원론적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나 다른 제국들에 의해서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어요? 이 땅에서는 아무 희망이 없었거든요. 하나님이 지배할 나라이기 때문에 이 땅과는 완전히 단절된 그러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말론,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교의 묵시 문학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 바탕에 깔려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과 완전히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 땅을 그렇게 악한 세상으로 보지 않아요. 물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그것이 변했거든요.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강조되는 것이 달랐습니다. 자기들이 처해있던 삶의 자리에서 어떤 때는 창조에 관심을 갖고 어떤 때는 타락에 관심을 가졌어요. 기독교 2천 년 역사도 마찬가지예요. 유대교가 창조론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이었지만 죽음 이후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이 없었거든요. 역사가 흐르고 나중에 묵시 문학적인 관점이 생기면서 새로운 세계의 삶으로 비약한다는 생각들이 유대인들에게 자리를 잡게 된 거죠. 구약에는 유대교의 깊은 사상들이 다 담겨 있지만 그것으로 다 끝난 게 아니라, 늘 변화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이 묵시 문학이 유대교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기독교는 그것을 그대로 흡수하지 않았어요. 기독교는 이 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있는 삶을 그렇게 무시하지 않았거든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할 때도 땅에 있는 것을 비유로 설명을 했거든요. 예수님이 생각한, 예수님이 선포한, 예수님의 행위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 나라가 과연 이 땅의 나라와 어느 정도로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공부가 더 필요합니다. 신학석사 논문으로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연구해야겠지요.

우리가 보기에 요한계시록에는 공간적인 차원의 천당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묘사들이 나와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그런 것에 근거해서, 교회에 충성하면 하늘나라에 가서 좋은 집에 들어가 황금 면류관을 쓴다고 가르칩니다. 하늘나라에는 상급에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개털모자라는 속설까지 나올 정도죠. 그 동기만은 그렇게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믿고 살아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더 이상 생각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깊이 생각하라고 억지로 강요하겠어요? 그게 되지가 않거든요. 그러나 지도자들이나 지성적인 기독교인 혹은 역사를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천당 가서 잘 살겠다는 그런 차원에 머물지 않고 역사 전체가 건강해지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또 한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기의 호구지책만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를 좁은 의미로 축소시키지 말고 더 큰, 아니 크다기보다는 더 심층적인 차원으로 끌고 나가야 합니다.

 

소유개념과 존재개념

이제 천당이라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시켜서 몇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려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나라든 천당이든 뭐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둘이 똑같이 사용되니까요. 제가 기독교 신앙을 개념으로 이해하라고 여러 번 말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인데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입니다. 소유와 존재가 뭐냐? 여러 번 나온 이야기인데요. 경우에 따라 조금씩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부분에서 이야기하면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소유라고 하면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의미합니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거, 많잖아요? 이 땅에 있는 것은 거의가 소유죠. 도구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연필은 소유하는 거잖아요. 내 손으로 다루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존재는 내가 처리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걸 존재론적이라고 하죠. 이 두 가지 개념은 아마 6개월의 강의가 끝날 때까지도 여러 번 이야기할 것 같아요.

이것은 신학 뿐 아니라 철학, 인문학과도 연관되는 문제들인데, 이런 것들이 넓어지는 게 공부예요. 기독교 신앙을 정보의 차원에서 많이 아는 것은 둘째 문제이고요. 그보다는 그 개념 안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어떤 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할 수가 있고 자기 생각이 깊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성령과 나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에요. 그걸 경험해 봤나요? 거기에서 창조적인 학문, 예술, 신학, 신앙이 나옵니다. 창조적으로 되는 거예요. 나우웬(Nouwen) 같은 영성가들을 비롯해서 제가 전공한 판넨베르크나, 융엘(Jüngel) 같은 학자들은 그 전에 많은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그 세계가 존재론적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존재론의 세계는 하나님이니까요. 그것은 닫히지가 않죠. 우리가 이용해서 써먹는 게 아닙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스스로 운행하는 어떤 힘입니다. 하나님이 무소불위하고 전지전능하다는 말들은 사실 여기에 다 연관되는 거죠.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런 용어로 말하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빨리 포착해야 합니다.

소유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니까, 천국에는 집이 있어야 하고 먹을 게 많아야 하고 멋있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복지시설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만일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그 정도라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초라하겠어요? 그런 거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나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게 계속 반복되면 또 지루한 거예요. 그걸 이 땅에서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자꾸 그런 걸 원해요. 아무리 귀한 것도 소유해버리면 일종의 매너리즘이라 할까요? 그냥 거기에 떨어져버립니다. 귀부인들이 귀한 보석을 손에 끼고 목에 차면서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남이 봐주니까 우쭐한 거죠. 혼자 거울보고 히죽 히죽 웃고 지낼 수 있겠어요? 그러면 약간 정신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일단 소유와 도구의 대상이 되면 우리가 만족할 수 없게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그런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죠. 그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멉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을 때 그 소리는 존재론적으로 작동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 CD를 샀다고 해서 음악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은 들을 귀와 음악과 존재론적으로 일치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체제냐 운동이냐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체제나 질서가 아니라 변화와 운동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도 다 변화와 운동이에요. 사실은 변화와 운동이라는 말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겁니다. 다만 그 성격을 이야기할 뿐이죠. 어떤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딱 움켜 쥘 수 없다는 말이에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요? 절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가 조직할 수도 있고 해체할 수도 있는 도구예요. 체제를 만들고 그 안에 온갖 이벤트와 프로그램을 갖추는 것으로도 교회는 가능합니다. 물론 보이는 교회도 중요해요.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거죠. 교회는 존재론적인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손가락 자체가 달은 아니니까요. 교회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해야 하는데, 자꾸 나를 보라고 하면서 달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오는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어요. 교회가 좋은 뜻으로 세계 복음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소유의 대상일 겁니다. 교회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거죠. 교회 확장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궁극적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가 확장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인데, 우리가 담아낼 수 없고 우리가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그러한 세계인데, 보이는 교회가 작아진다고 해서 그 나라가 축소되겠어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자유 속으로 좀 들어가 보세요. 전혀 새로운 세계의 희망들이 여러분 앞에 펼쳐질 것이고 거기에서 진리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이 더 깊어질 겁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절대화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루살렘 성전마저도 허물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으니까요. 물론 다른 해석학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예루살렘 성전도 안식일마저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에 사로잡힌 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로잡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하나가 된 거죠. 그래서 그분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일어난 겁니다. 그걸 말하기 위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귀신이 나갔다든지, 병이 나았다든지,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든지, 그런 것들을 말한 겁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말한 거죠. 이것이 우리가 처음에 질문한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성서 기자,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끌어왔어요. 끌어왔다기보다는 그 관점으로 예수의 공생애 동안 일어난 일들을 재해석한 거죠. 그런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됩니다. 아까 제가 경계선을 이야기했는데요. 그게 아주 미묘합니다. 똑같은 현상도 경계선 밖에 있으면 그냥 넘어가게 되지만,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받아들이게 되거든요. 그럼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계속 모르고 있다가 들어와야만 안다는 말인가, 왜 어떤 사람은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는 것인가 하고 물을 수 있는데요. 이런 질문은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딱 잘라 말하기 힘듭니다.

 

하나님 나라와 팔복

하나님 나라를 팔복과 연관해서 좀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대표적인 팔복을 잠깐 짚으면요. 팔복 가운데 첫 번째는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라고 되어 있고 마지막 여덟 번째도 천국이 주제예요.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어 있는 거죠. 팔복에서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요. 여기에서 판넨베르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예수가 복을 선포한 이들은 예수를 믿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이를 가리킨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 어떻게 된다.’라고 말한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고 말했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오늘날에는 그런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노숙자들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제3세계의 민중들을 가리킬까요? 이 세상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부를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다른 데 희망을 걸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만을 희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팔복의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의 정치와 유대의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를 향한 거부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를 이데올로기로 하는데요. 로마는 로마의 평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유대의 종교는 업적주의거든요. 사실 로마와 유대교가 같은 걸 이야기합니다. 형식만 다르지 내용은 같아요. 이런 것에 반동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 그쪽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는 것, 이것이 ‘메타노이아’, 회심입니다. 전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조건 회심한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게 아닌 거죠. 하나님의 나라가 뭔지 알아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면서 내가 옛날에 잘못한 걸 모두 회개한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거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다 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할 만한 일들에 모든 무게를 두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을 일단 염두에 두세요. 그래서 제가 설교비평을 할 때 도덕적인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다 아는 거라서 그런 거예요. 도대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에서, 특별히 케리그마에 천착해야 될 주일 공동예배 설교에서 대학교의 교양학부 교수들이 할 만한 이야기나 결혼식 주례자들이 할 만한 말들을 뭐하려고 하는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도 하고 생각도 해야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말하는지, 신약은 뭐라고 하는지, 교회사에서도 어거스틴이나 루터 같은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20세기 초반에 스위스에서 있었던 종교사회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핵심으로 잡았던 거예요. 그 종교사회주의나 볼셰비키 혁명이 말하는 평등한 세계나,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가 말하는 미래가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런 것들을 좀 생각해야겠지요.

 

제자 선택

그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선포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했습니다. 그게 별거냐고 물을 수도 있을 거예요. 별게 아닐 수도 있고 별거일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질문하면 예수님이 과연 제자들을 선택했는가 하는 질문도 가능합니다. 물론 복음서에 제자 선택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딱 열두 명을 정해서 중요한 인물들로 생각했겠는가 하는 질문들이 있는데, 그건 아주 타당한 질문입니다. 제가 앞서 말했듯이, 복음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한 진술들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사실로 적용시키면 충분하지 않은 겁니다. 하여튼 제자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만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70명이든 300명이든 학자들마다 좀 다릅니다. 그렇게 예수를 추종한 1세대 사람들을 사도라고 하는데요. 사도들이 큰 역할을 했든 못했든 간에 그 1세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직접적으로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예수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사도들이거든요. 사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를 아는 겁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잘못 알고 오해했다면 지금 우리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아는 거예요. 그것이 사도성입니다. 사도성은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나온 교회의 네 가지 본질(거룩성, 단일성, 보편성, 사도성)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를 통한 신앙, 즉 그 간접적인 신앙을 우리가 갖고 있는 거죠.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내용이 옳은가 그른가는 둘째 치고, 그 사도성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사도들이 기록한 게 아닌 다른 문서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변죽을 울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제가 미국 신학의 한 흐름인 ‘예수 세미나’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제1문서들보다도 다른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예수를 오해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뭔가를 사도들이 쓴 문서 안에서 찾아야지요. 그렇다면 성서가 제일 텍스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온 신학적 문서들은 예수를 바르게 아는데 아주 중요한 문헌들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도신경이거든요.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을 요약한 겁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신앙 고백들이 많았어요. 초대교회의 여러 신앙 고백들은 전승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죠.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 16:16)도 베드로 개인의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초대교회 전체의 신앙 고백에 가깝습니다. 로마교회의 세례문답, 니케아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4세기 로마교회의 고백문에는 예수가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시고 지옥에 내려갔다고 하는 문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 이런 말이 나오나요?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음부’라는 말이 빠져 있는데,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는 이 말이 있을 거예요. 이 지옥에 내려갔다는 표현이 만인구원론의 근거가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었다고 해도, 그래서 설령 지옥에 갔다고 해도, 다시 거기서 예수를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거죠. 그래서 만인구원, 즉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면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한 형벌에 빠지게 된다면 모순이죠.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겠다고 말한다면, 이건 또 코미디입니다. 이미 진리를 알았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니케아 신조에 대해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군요. “샘터교회 예배에 사도신경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암송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약간 오해가 있었군요. 샘터교회에서도 평소에는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다만 매달 첫 주일에 한 번씩 하는 성찬예식이 있을 경우에 니케아 신조를 고백합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이게 다 중요하거든요. 내용도 비슷하고요. 『공동예배서』(한국장로교출판사)가 그것을 권면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두 개 다 중요해요. 사도신경은 전 세계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거니까 기본으로 하고 있고요.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니케아 신조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공동예배서가 제시해준 거죠. 개신교를 비롯해서 예전(liturgy) 예배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드리는 예배가 거기에 모인 그 사람들만의 예배가 아니라 2천 년 동안 내려온 기독교 전체의 예배와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단절된 게 아니라 모두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차원에서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등 예전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샘터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우리만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즉 성자들과 성도들과의 교제도 되는 거예요. 성자와 성도, 모두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성도들과 이 시간 공동의 예배를 드린다는 차원에서 예전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수고했습니다.


[레벨:12]삶의 과제

2012.02.18 01:03:17
*.14.216.182

목사님, 감사합니다.

저번에 '기꼬' 등록을 부탁드리고,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아

혹 잊어버리신 것을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졌다가 오늘에서야 확인을 했습니다.

오늘 내용이 저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저에게는 생소한 용어들도 많고 특히 기존에 알고 있는 용어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먼저, 이 글을 통해 얻은 저의 첫번째 생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모르는 지를 아는 만큼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즉 단순하게 예수님을 알 때는 '예수는 과연 그리스도인가? '라는 질문만 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경험하게 되면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일을 통해서 (등등) 예수는 그리스도일 수 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늘 마음에 한 구석에 남아있든, '다른 이에게 (저에게도 동일하게)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을 어렴풋이 본 같습니다. 비록 종말에 이르러야 알 수 있겠지만.

 

목사님의 글에서 제가 본 길은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도들의 신앙고백 (글)에서

예수님의 생애, 가르침, 부활 등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와 완전히 일치함을

성령의 조명 아래서 끊임없이 찾고 알리는 것'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라는 현실성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신앙적으로나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하여,

그 깊이가 짧고 때로는 곡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것만으로  기쁩니다.

많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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