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영성과 신학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2867 추천 수 0 2012.02.11 19:01:03

제07강

영성과 신학

 

 

 

태양계와 하나님 인식

제가 들고 있는 탁구공이 보입니까? 이걸 태양이라고 할 때 지구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요? 좁쌀은 너무 작은 것 같고 쌀알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굉장히 큰 차이가 나죠. 태양은 엄청나게 크고 지구는 엄청나게 작네요. 그리고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숫자로 나타내면 1억 5천만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태양 빛으로는 9분 정도 걸린다고 해요. 지구를 쌀 한 알로 축소시켜 봤을 때 1억 5천만km가 떨어져 있다고 하면, 이 길이가 얼마나 될까요? 태양의 지름은 지구의 109배라고 하거든요. 제가 시작하기 전에 계산을 좀 해봤습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약 12m 정도 돼요. 그냥 넉넉잡고 1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죠. 생각해 보세요. 쌀알 크기로 10m 떨어져 있다고 하면 굉장히 멀지 않습니까? 지구의 지름으로 1만 2천 번을 해야 태양에 가게 되네요. 제가 설교를 하면서 예로 들었는데, 태양이 사방팔방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10m 떨어진 곳에서 지구가 받는 에너지의 양은 태양 전체가 발산하는 에너지의 몇 %가 될까요? 수천만 분의 1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지구에 오는 그 작은 부분도 우리가 다 사용하고 있지 못하죠. 굉장히 머니까요. 이게 태양이라고 생각할 때 10m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태양에 붙어 있는 행성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인데, 명왕성은 태양계 안에서 행성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이 넣었다 뺐다 하는 것 같아요. 그게 행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서 그렇다고 하네요. 자격심사를 하다가 몇 년 전에 뺐다고 해요. 모르죠. 나중에 또 들어올는지요. 하여튼 지구가 10m 쯤 떨어져 있다면 천왕성이나 명왕성은 최소 100m는 떨어져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100m 떨어져 있는데 태양이 붙들고 있는 거예요. 햇빛이 그렇게 가는데 아마 해왕성에서는 태양이 아주 작게 보일 겁니다. 우리가 다른 별을 보듯이요. 그보다야 크게 보이겠지만 작게 보일 거고 어두울 겁니다. 햇빛이 거기까지 가려면 몇 달 걸리지 않겠습니까? 이 태양계라는 평범한 별들의 관계도 굉장히 놀라워요. 이게 도대체 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에게서 우주에 대한 설명을 듣잖아요? 그런데 우주를 그릴 때 선생님들이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태양을 그리고 옆에 좀 떨어져서 지구도 그리는데, 그렇게 그린 그림을 보면 태양과 지구가 크기든 거리든 별로 차이가 없어요. 이걸 아주 실감나게 아이들에게 가르쳐줘야 머릿속에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데, 태양이나 별의 이야기를 남의 말 하듯 하니까 설명을 들어도 뭔지 모르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까? 가끔 신학대학에서도 저학년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합니다. 태양과 별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고요. 그러면 의외의 대답이 많이 나옵니다. 태양은 빛을 발하고 별은 반사시킨다고요. 초등학생과 비슷하게 대답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많이 말해요. 그러니까 대학생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태양과 우주의 관계에 대해서 최소한의 상식도 없다는 거죠. 정확하게 알고 있는 대학생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아마도 어렸을 때 공부가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들어가지 않고 산만하게 정보 차원에서 흩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원소를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선생님이 물 분자를 그릴 때 동그라미 안에 H 자가 들어간 작은 동그라미 두 개와 O 자가 들어간 작은 동그라미 한 개를 넣습니다. 학생들은 물 분자 속에 원소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죠. 어떤 원소를 그릴 때도 핵과 전자가 몇 개인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춥니다. 원소를 그렇게 이해하면 곤란하죠. 모든 원소의 질량을 가지고 있는 핵도 원소라는 공간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미미한 거죠. 이걸 그렇게 비교하더라고요. 큰 고딕식 성당이 있는데 성당 안에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를 펼치면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나온다, 큰 성당 안에 있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가 원소의 핵이라고요. 그러니까 그렇게 고딕식 건물에 비교해서 본다면, 원소의 질량, 즉 그 모든 무게를 다 갖고 있는 핵은 실제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다른 데는 모두 빈 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잘 모르는 물리학을 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 상식적인 건데요. 상식적인 것마저 젊은 학생들에게는 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죠.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그림을 그릴 때 머릿속에 확실한 개념이 있어야 아이들이 오해하지 않게 그리는데, 선생님들도 자기가 배운 대로 그리고 점을 찍으니까요. 우주에 대한 것도 그렇고 작은 원소나 분자에 대해서도 그렇죠.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하나님에 대해서도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잘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는 거죠. 사실 하나님을 딱딱 집어서 알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런데 어렴풋하다는 그 사실조차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탁구공만 한 태양의 크기와 쌀알만 한 지구의 관계를 머릿속에 어느 정도 넣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것처럼요. 그 거리도 엄청나게 먼데, 우리는 매일 태양이 빛나고 있으니까 가깝게 느끼는 거죠. 태양은 우리에게 정말 생존의 절대적인 조건인데도, 남의 것처럼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서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돈을 벌어서 먹고 살까, 혹은 친구와 어떻게 지낼까 하는 사소한 일들에 모든 영적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나 친구와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더 근원적인 토대, 우주론적인 토대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서로 순환되는 겁니다. 내가 태양의 아들로서 실질적으로 태양 에너지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둔다면 일상에서도 우리가 기본 토대는 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오해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중요한 건데, 사람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자꾸 생각하거든요. 태양의 거리가 1억 5천만km가 떨어져 있다는 것과 태양에서 또 하나의 태양까지 가는데 2-3광년이 걸린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가 먹고 사는데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사실을 꼭 알아야만 우리가 의미 있게 산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우주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삶에 바탕이 된다면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서도 영적인 혹은 생명의 역동성을 풍부하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개념을 착실하게 잡아나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든 설교든 많은 경우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이건 틀림없습니다. 그 대신 뭐에 관심이 있는지 대답이 나오죠. 사람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입니다. 자기 연민 아니면 이웃을 향한 공감(sympathy)이나 연대(solidarity)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거, 이게 우리의 모습인 거죠. 제가 앞에서 말한 것과 연관시킨다면 우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도, 인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도 잘 살 수 있어요. 오늘 주식 투자를 해서 얼마를 벌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지에 파묻혀 삽니다. 이런 것에 몰두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인정을 받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실제로 우리 삶에 나타나는 효용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어도 신앙생활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국교회 강단에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없을수록 설교의 파급력이 더 크다는 겁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요. 비극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죠? 일단 그런 걸 들으면 골치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주 이야기를 모르면 어떠냐 하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몰라도 신자들은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들끼리 뭐가 되거든요. 교회에서 학생회나 성가대에 봉사하면서, 또는 목장 관리를 하면서 얼마든지 신앙생활 할 수 있어요. 기독교 신앙이 거의 실존적인 차원으로 떨어진 거죠. 이것은 오늘 제가 한 설교의 주제이기도 한데요. 설교 본문은 베드로후서 1장이었어요. 사실 설교 시간에는 그걸 다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거기에 다른 배경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설교 시간에는 가능하면 꼭 필요한 부분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이 활동했는지, 그리고 그걸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중심으로 말합니다. 설교를 처음부터 다 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할게요.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권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뒤나미스’(dunamiV)라고 하고, 강림은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합니다. 신약성서는 왜 헬라어로 기록되었을까요? 성서 기자들은 대개 유대인들이었을 텐데요. 답은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를 받아볼 사람들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히브리어는 죽은 언어였습니다. 대신 아람어를 썼어요. 그 지역에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거든요. 구약 성서에도 계속 나오고 있고 세계 역사에도 나오는 내용들인데요. 팔레스타인 히브리인들은 제국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인들이 독립 국가를 유지한 적은 별로 없었어요. 기껏해야 다윗과 솔로몬 시대였어요. 별로 떳떳한 역사는 아니죠. 그러니 자기 나라의 말과 문화를 잘 보존할 만한 위치가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히브리어는 제사장이나 전문적인 종교인들의 학문 활동이나 종교 활동으로 남겨졌을 뿐 실제 언어로는 다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썼지만 바깥 지역에는 헬라어로 지배된 시대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성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성서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까 제가 공부 시간에 선생님들이 원소나 우주에 대한 설명을 주먹구구식으로 해서 학생들에게 개념을 심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했던 것처럼, 많은 경우에 교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주먹구구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 창조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죽어 있는 정보에 불과합니다. 죽어 있는 정보에 머무는 지식이란 말이죠. 잘 모르는 선생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치면 오히려 학생들에게서 배움이나 앎에 대한 욕구를 사라지게 하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그런 게 많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관심을 두고 거기에 집중하는 교회, 설교, 성경공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냐 하는 거였어요. 말이라는 게 참 그러네요. 어떤 흐름을 놓치지 말고 쭉 가야 하는데 말이죠. 일부러 그런 게 아니거든요. 실타래를 푸는 것처럼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버리면서 풀어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에 그게 딱 끊기니까 다시 자리를 찾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신학 무용론의 폐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에게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습니다. 제가 아까 태양을 설명하려고 탁구공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이런 것을 아는 게 우리의 일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깊이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신학적이라는 용어를 쓰기가 조심스러운데요. 일반 성도들은 신학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아서 그래요. 신학은 말하자면 어떤 궁극적 현실(ultimate reality)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적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말한 것처럼 ‘궁극적 현실’ 같은 말을 하면 일반 신자들은 굉장히 거리감을 느끼거든요. 이런 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 사람의 사유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즘 철학이 한국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문학자들의 책임입니다.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적으로 살지를 않았거든요. 좀 배고파도 근본적인 진리를 향해 나가야 하는데, 인문학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그들이 요구한 게 돈이었다는 거죠. 정부 예산을 많이 따내자는 식이었어요. 정말 그렇게 해서 인문학이 살까요? 아무 도움도 못 받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겠지만,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프로젝트 하나 따내면 서로 연관된 사람들끼리 나눠 먹기식으로 하잖아요. 신학도 인문학이라서 하는 말입니다. 국가에서 몇 천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두면 그걸 배분해야 하는데, 그것도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어떤 프로젝트를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거든요. 감 잡을 수 있겠죠. 힘 있는 사람들이나 끗발 있는 쪽으로 가요. 이게 잘 사용되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인문학자들이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정말 쓸데없는 곳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국교회가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요. 목사나 신학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하니까 듣는 사람도 골치가 아픈 거예요. 신자들에게 와 닿지가 않으니까요. 제가 거기에 고민이 많습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가 바로 그런 작업을 하자는 건데요. 여전히 제가 하는 말들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실 제가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들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걸 전달하는데 표현이 부족하기도 하고 아직도 공부가 받쳐주지 못해서 그래요.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세계 전체에 대해 해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신학도 결국 그쪽으로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거든요. 얼마나 그것을 잘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겠죠.

『소피의 세계』(현암사)란 책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입니다. 중학생 딸에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예요. 딱딱한 철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합니다. 어른이 읽어도 좋아요. 저는 수년 전에 읽었는데요. 제 딸들에게도 꼭 읽으라고 주었는데, 작은 딸만 읽더군요. 이야기 형식은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철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딸의 아버지는 군인 출신으로 멀리 가 있습니다. 멀리서 편지를 쓰는 거죠. 구체적인 건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마지막 장면에 그 소설 속의 이야기와 현실의 이야기가 뒤섞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제가 정확하게 표현을 못하겠어요. 그 때 읽고 받은 느낌만 갖고 이야기할 테니 제가 틀리게 말해도 이해해 주세요. 어떤 아이가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데 다리가 가렵다고 느낍니다. 그게 소설 안에 나온 어떤 이야기가 현실 안으로 투입되는 장면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할 거면 확인하고 왔어야 하는데,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현실과 초현실이요. 우리는 이게 딱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그걸 풀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역사 초월적 존재죠. 그런 분이 어떻게 역사 안으로 들어와 있을까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부활 승천해서 생명이 은폐된 세계로 갔는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초현실이 어떻게 현실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런 걸 잘 생각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 신학이고요. 이런 것들을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아주 주술적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현실에 묶이게 되죠.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 초현실로 들어가는 일들을 우리는 잘 하지 못합니다.

강의에서 제가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요. 어떤 부분은 좀 정리가 된 것 같고 어떤 부분들은 정리가 덜 된 것처럼 들릴 겁니다.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고 해도 정리가 안 된 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흐트러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기도 해요. 그게 흔들리지 않고 꾸준하게 추동력을 갖고 있으면 뛰어난 영성가가 되는 거죠. 제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해서요. 그러나 나름대로는 어떤 방향을 갖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이야기를 꾸준히 들어보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잘 듣다가 한두 주 안 들으면 연결이 잘 안 됩니다. 제가 나름대로 일관성을 갖고 이야기는 하는데 매번 구슬을 꿰듯이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하나 토막처럼 말하지만 나름대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랍니다. 다 설명을 하지 못하거든요. 우리가 종말론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도, 어떻게 미래를 당겨서 사는 것인가, 아주 초현실적인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현실적인 리얼리티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제가 리얼리티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고 사용할 겁니다.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궁극적인 어떤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을 그릇에 담아서 여러분에게 줄 수 없기 때문에 언어 안에 개념적으로 담아내는 거예요. 리얼리티도 철학이나 인문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인데요. 결정된 건 아닙니다. 앞으로 정말 더 뛰어난 학자가 나와서 더 풀어내고 심화시키면 그게 역사입니다. 언어 속에 개념을 담는 거죠. 신학도 마찬가지예요. 삼위일체나 칭의 등에 대해서 언어로 더 많은 것을 풀어낼 수 있으면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겁니다. 바르트(K. Barth), 몰트만(J. Moltmann), 오트(H. Ott) 같은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종말도 그렇고 창조도 그렇고, 모든 언어들 속에 기독교가 담아내려고 했던 세계들이 현실과 초현실의 신비적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고, 그것을 끌어가는 힘이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현실 너머에 있는,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확실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다시 말해 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숙한지 다 인정하죠? 그런데 거기에만 판단의 기준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서 기자들은 그걸 뛰어넘었던 거예요. 그걸 계시라고도 하고 신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비, 현실과 초현실 사이에서 운행하고 활동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조금씩 넓혀 가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우주과학에 대해서 아주 유치하게 알다가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아주 리얼하게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세계를 새롭게 보게 되죠.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통치이고, 여기에 우리가 깊숙이 들어가야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안합니다. 답답할 정도로 안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모르고 재미가 없으니까 듣는 사람도 재미가 없죠. 그저 자기 일, 자기 재미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하면 상을 주는 방식으로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이자 메시아적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작동된다면 비극이죠. 많은 사람들이 유럽교회는 점점 썰렁해지는데, 우리나라는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요. 큰 착각입니다. 왜곡이기도 하고요. 철없는 아이들이 천방지축으로 행동하거나 졸부들이 돈 쓸 줄 몰라서 거들먹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유럽교회가 겉으로는 죽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 기독교적인 사상이 배어 있습니다. 무조건 제가 그쪽을 추켜세우려는 것은 아니고요. 문제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전인수 격으로 우리의 신앙 행태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몇 개 있다고 하고,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보낸다고 하는 게 얼마나 우습냐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공부를 잘 했으면 합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한다면, 가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무신론적인 책이 소개되기도 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는데요. 『만들어진 신』(김영사), 『예수 퍼즐』 같은 책을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책을 읽을 시간이 있으면 기독교 서적을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크리스챤다이제스트),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한들), 바르트의 책들도 많거든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이라도 읽으세요. 이게 건강한 책읽기예요. 전혀 신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종교 현상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두고요. 우리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 아퀴나스 같은 신학의 거인들이 있잖아요. 신비주의 영성가들도 대단하고요.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깊이 들어가야 그런 책들을 읽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진리론적 토대 위에 서있다는 확신을 가져도 됩니다. 불안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진화론이나 자연과학적인 어떤 것이 나온다고 해도 쓸데없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 옳은 것은 인정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고유한 신앙 경험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바깥 세계로 나아가고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

 

세례와 성찬에 대해

강의와 직접 관계된 건 아니지만, 질문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세례와 성찬식의 관계에 대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만 성찬식에 참여하는데,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성서적이냐는 질문입니다. 간단히 대답하겠습니다. 초기 기독교 이후 성찬식이 어떻게 시대마다 행해졌는지도 궁금하다고 합니다. 제가 섬기는 샘터교회의 성찬 예식에는 어린아이까지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법에 나와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찬 예식을 함부로 준비 없이 먹고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어요. 성서가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찬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건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오랜 전통 가운데 자리 잡게 된 거죠. 초대교회에도 성찬식이 있었어요.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데요. 교회에 와서 먹고 마시는 일이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성찬 예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애찬식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식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행하는 성찬식은 기독교 신앙에 들어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죠. 애찬식은 참석 대상의 범위를 확대해서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두 개 모두 성찬 예식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문제가 벌어졌는가 하면, 밥을 같이 먹는 애찬식이었어요. 부자들은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가져와서 자기들끼리만 먹었던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들은 좀 따돌리고요. 집에서 형편없는 것을 조금 가져왔는데 부자들이 가져온 좋은 것들을 먹으려니 눈치도 보였겠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나온 것 같아요. 먹고 취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나와 먹고 마시는 게 목적이냐는 충고도 했으니까요.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교회는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성찬 예식에 참여하도록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요. 교회에 따라서 열어 놓은 데도 있고 닫아 놓은 데도 있습니다. 교회 형편에 따라 좀 다르겠죠.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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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기독교를 말한다 5장, 구약성서와 히브리즘 [2] 2011-07-24 4788
188 기독교가 뭐꼬 제5강, 역사적 예수(2) [2] 2011-05-03 4714
187 기독교가 뭐꼬 제4강, 역사적 예수(1) 2011-05-03 4932
186 기독교가 뭐꼬 제3강, 인문학적 성서읽기 [2] 2011-05-03 4735
185 기독교가 뭐꼬 제02강, 초대교회의 배경 2011-05-03 5133
184 기독교가 뭐꼬 제1강, 강의안내 [3] 2011-05-03 4960
183 기독교가 뭐꼬 머리말 2011-05-03 4881
182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역자후기 2011-01-31 6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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