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칭의와 구원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614 추천 수 0 2012.02.11 19:02:43

제08강

칭의와 구원

 

 

오늘의 주제는 칭의(稱義)와 구원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전반에 관계된 것입니다. 아주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런 공부는 눈높이를 심화시키거나 승화시킨다고 해도 좋고요. 관점을 다르게 갖는, 즉 깊이 있는 관점을 갖는 훈련이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바꾼다면 안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들이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통하게 됩니다. 나름의 관점을 갖게 되니까요. 정용섭이라는 사람의 어떤 관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아주 고유한 것이거든요. 저와 비슷한 삶의 경험이 있거나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저와 상당히 유사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똑같은 거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만의 고유한 안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저는 제 관점으로 말하게 되거든요. 제가 여러분에게 다른 주제로 강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같은 관점의 어떤 것을 배우게 되는 겁니다. 제 관점이 100% 옳기 때문이 아니라, 제 관점이 옳든 그르든 깊이가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이 정용섭이라는 인격(personality)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제가 신학교에서 하는 수업이든, 오늘처럼 특강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든, 제게서 여러분이 배우는 것은 저의 관점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선생들에게서 배워야 될 지식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 선생 자체가 아는 것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이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더구나 아는 게 있다고 해도 그걸 완벽하게 아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것은 많이 알고 어떤 것은 조금 알고 있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선생이 되려면 어떤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확보한 학자들은 정말 학자가 되고 과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관점을 갖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여러분도 경험을 했을 텐데요. 여러분이 설교를 들을 때 설교자의 관점이 없는 걸 많이 봤죠? 이때는 이런 말을 하고 저때는 저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맨 날 왔다 갔다 하죠. 부분적으로 보면 맞는 것 같은데, 넓게 보면 흔들리고 중심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강의 내용들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세요. 여러분은 강의 내용 자체보다는 제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배우도록 해야 하고, 그걸 토대로 여러분 나름대로의 고유한 시각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 행위의 구원론적 성격

칭의 문제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핵심이기도 하고, 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게 된,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핵심이기도 하고,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핵심이기도 합니다. 즉 이 주제는 초기 기독교 때부터 기독교 2천 년 동안 쭉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 주제가 다시 강조되고 해석되고 심화되었어요.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오늘의 주제는 칭의와 구원의 관계인데요. 주로 칭의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구원(soteriology)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습니다. 한마디만 힌트를 주고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구원론을 저학년 신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 간접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기독교는 사회의 모든 행위들과 구원론적인 면에서 경쟁하고 있다.” 경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의 행위 자체가 구원론적이라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전제로 하잖아요. 병든 사람들에게 행하는 의료행위들을 볼까요? 그 행위로 사람의 병을 낫게 하거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원론입니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거니까요. 그런 것뿐만 아니라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굴에서 살다가 쾌적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불편한 데서 자유로워지는 거죠.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들이 단체로 응원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도 일종의 구원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데서 강의를 하다가 받은 질문인데요.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도 결국은 알코올이나 마약을 하는 그 순간에는 구원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거였어요. 알코올에 완전히 취해 있을 때, 아니 중독까지는 아니더라도 술에 취하는 경험은 구원 경험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성령에 취하는 것과 술에 취하는 것은 증상이 비슷해요. 기독교 신자들이 술에 취해보지 못해서 구원을 너무 멀리만 생각하는 겁니다. 혹시 지금 이 말을 듣고, 정용섭 목사가 술에 취하는 게 구원에 가까이 가는 것과 같다고 그러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겠죠?

술에 취하면 자아가 없어져요. 우리에게서 문제는 자기 자신이거든요. 나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다는 겁니다.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까, 내 자식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식의 집착 말이에요. 궁극적으로는 내 생명이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좌절까지도 자기에 대한 집념이거든요. 판넨베르크는 자기에 대한 집중을 죄라고 했고, 어거스틴은 교만(휘브리스)이라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 즉 자기애(自己愛)라고 이야기했어요.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자기’ 중심성입니다. 교회는 구원공동체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자기가 아주 작아지는 경험, 하나님의 통치가 온통 자기를 빛처럼 감싸는 경험, 이게 필요하거든요.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리얼리티예요. 우리가 구원의 궁극적 현실과 맞닿는 것은 죽음 이후에 죽음과 삶 전체를 아우르는, 아직까지 숨어있는 그 모든 생명의 세계가 완전히 드러나야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를 실증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았어요. 비유로 말했어요. 예수님마저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말, 하나님 나라, 구원은 우리가 죽어야만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세계인 거죠.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작아져야 하는데, 이게 이론으로만 끝나는 게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삶과 신앙에 성육신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 신앙의 실체를 맛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암시, 혹은 자기최면이라고 할까요? 자기 세뇌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든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믿어지는 거 같거든요.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없어요. 믿는다는 말은 있지만, 교회 안에서 믿는다고는 하지만, 복음에 대한 말들은 인플레이션처럼 차고 넘치지만, 능력은 떨어지는 거죠. 바울도 이런 말을 했잖아요.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놓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실질적인 능력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가 이 세상과 경쟁하고 있다는 의미를 두 가지로 이야기했는데요. 첫 번째는 일반적인 모든 인간의 행위 자체가 구원 지향적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이비 구원론에 가깝죠. 임시적으로 우리의 아쉬운 점을 보충해주는 겁니다. 좋은 집에 산다거나 지루하니까 재미있는 프로그램 본다거나 자식들을 좋은 대학 보낸다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하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그 순간에만 땜질하는 식으로 지나가는 것이죠. 강의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구원의 문제가 세상과 경쟁 관계에 있다고 말할 때 여기에는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도 포함된 것이며, 인간의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구원론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쟁하고 있다고 표현한 겁니다.

이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이 구원이 미완료,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미 시작했지만 완료되지 않았다는 거죠. 그 말은 이미 시작한 그것마저도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제가 쓰는 이 신학 용어들을 자주 들어보지 못했거나, 들어봤더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강의가 끝나갈 즈음이면 이런 용어들에 익숙해질 겁니다. 이런 용어들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거고요.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종말까지 이 세상과 혹은 다른 종교와 구원론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과연 구원의 리얼리티를 잘 담지하고 있고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열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아주 심각한 질문이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것에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운동성

우리 주변에는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의 개혁은 행동주의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아요. 예를 들면 교회가 재정을 투명하게 쓰지 않았으니 투명하게 하겠다, 세습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니까 세습을 하지 말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걸로는 교회가 개혁되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신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잘못했다고 지적해 봤자 자기 방어기제만 작동된다는 말입니다. 저놈들이 나를 비판하는데 어떻게 방어하지, 이렇게 된다는 거죠. 목사나 신자나 모두 그쪽으로만 머리를 돌려요. 따라서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학논쟁이었습니다. 신학이에요. 그러나 대개의 혁명 또는 운동은 행동주의로 떨어져 버리거든요. ‘의를 위해서 실천하자.’ 좋죠. 실천적인 것 좋습니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에게서 시작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사실은 행동주의가 아니라 학문이었습니다. 경제학자잖아요? 경제적인 논리를 제시했던 거예요.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망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자는 거였습니다. 의식을 변화시켜서 운동으로 나아갔던 것이죠. 이렇게 운동과 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혁명은 책상에서 시작합니다. 지금 저나 여러분 모두 책상에 앉아 있어요.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이슈를 내걸고 파이팅도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의식의 변화가 앞서야 하지 않는가, 그 일에 대구성서아카데미가 일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기대와 의식의 변화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운동으로 나가는 거죠. 그러나 운동으로 나가지 못하고 만날 머리만 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 죽은 운동이 될 텐데요. 의식이 죽지 않고 어떻게 생명력 있는 운동으로 연결되는가가 중요합니다. 머리만 크고 실제적인 실천은 하나도 없다면 우스운 꼴이 되겠지요. 대구성서아카데미, 즉 다비아 운동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실천보다도 의식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시작되었고요. 그런 사람들이 다비아에 들락날락 하는 것 같습니다. 자칫 지적 유희로 머물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의식을 깬다고 하는 점에서 그런 역할만 해도 괜찮기는 합니다만, 가능하다면 운동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의식과 운동과의 관계를 알겠죠?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억지로 하면 모두 힘듭니다. 앞서가는 사람이나 끌려오는 사람이나 모두 힘들어요.

보통 어떤 역사적인 시점을 ‘카이로스’라고 하는데요. 그 정확한 지점에서 어떻게 그것이 발화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루터는 그것을 정확하게 잘 포착한 사람 같아요.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종교를 개혁해야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았어요. 그저 단순하게 신학적인 논제들을 끄집어냈을 뿐이거든요. 자기가 학자였으니까요. 이런 문제가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신학 토론을 하자는 아주 단순한 목표였는데, 이것이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개혁의 물꼬를 틀었던 것입니다. 물꼬를 틀었을 뿐만 아니라 광야의 마른 숲에 불을 지른 역할을 했던 거죠. 개혁은 한 사람의 정확한 통찰력과 신학적 깊이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을 운동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적 계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거 없이는 대개 사람만 희생됩니다. 혁명가들은 대개 희생을 당했죠.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 없습니다. 종교 개혁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신학공부

오늘 다루고 있는 칭의와 구원의 관계만 보더라도 신학 공부를 해야 할 게 많죠? 아주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최소한 정직하게 대답해 보자는 겁니다. 교회에서 쓰는 많은 용어들이 그저 그렇게 한 번 듣고 지나가 버릴 것이 아니잖아요? 신자들이 무작정 ‘믿습니다.’라고 앵무새처럼 되뇌게 하지 말고, 구원의 현실 안으로 직접 영적인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목사들이 도와주자는 거예요. 다른 데 너무 많은 욕심 부리지 말고요. 목사는 신자 하나하나가 영성 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할 뿐, 신자들이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영성 생활을 하는지는 성령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애착심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신자들한테 너무 많이 쏟아냅니다.

어젯밤인가? CTS방송에 광림교회가 나오더군요. 설교하는 분이 김선도 목사님의드님인가요? 부목사인가요? 카메라에 비치는 파이프 오르간이 대단하더라고요. 회중석도 연주회 홀 같고요. 그분이 담임목사가 맞습니까? 교회 세습을 하신 분인가요? 저는 시골에 있다 보니 그런 정보에 어둡기도 하고, 관심도 없어서 몰랐습니다. 어쨌든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던데요. 설교를 들으니 자기도 뭘 모르면서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설교비평을 오래 하다 보니 말을 함부로 쏟아 내는 것 같기는 한데, 이해하고 들어주세요. 그분이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설교는 하는데 소화되지 않는 말들이 나와요. 그거 알겠죠?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그걸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알고 하는 말인지 앵무새처럼 되뇌는 말인지 분간하지 못해요. 제가 보기에 그분은 자신도 소화하지 못하는, 하늘이나 천국, 구원 같은 단어들을 약장사처럼 마구 쏟아놓고 있었습니다. 이런 단어에는 단어 하나하나에 우주처럼 무거운 의미들이 담겨 있어요. 그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인격적으로만 목회를 하더라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평신도들도 신앙이 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 좀 하자는 겁니다. 딱 한번 사는 거잖아요? 짧은 인생이기에 소중하고요. 더구나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거는 일이잖아요. 현재 뿐 아니라 우리의 죽음까지도 다 거는 일인데 말이죠. 정말 그걸 인정한다면 우리 모두가 신학자가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신앙의 근본 속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칭의, 의로울 수 없는 인간

다시 구원과 칭의의 문제로 돌아가죠. 칭의는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즉 실체론적 의미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아무리 변화되어도 우리는 의롭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의를 우리는 이룰 수 없어요. 왜 이룰 수 없는가? 사람은 의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했으니까요. 의라고 하는 문제를 교양을 지키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감옥에 안 가면 된다고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더 근원적인 깊이, 심층적인 지평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즉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도 갈라디아서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면 괜찮지요. 바울이 말하는 율법적인 삶, 즉 율법을 100% 실행할 수 있다면 의로운 사람이겠죠.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율법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의로워질 수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과 삶에서 유대교에 충실했던 사람에게서 나온 아주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의 말로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어요. 의인은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되니까 이걸 예로 드는 겁니다. 우리는 간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처럼요. 그러나 여자를 보고 혹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주님의 말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문제가 더 본질이라는 거죠. 겉으로 드러난 행위, 도덕적으로 잘 포장된 행위들이 율법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에 대해서 비판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목사님에 대해서 잘 한다고 박수는 못 칠망정 왜 흠집을 내려고 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흠집을 내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아홉 개가 맞는다고 해도 한두 개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제가 보는 제자훈련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비슷한 노력들입니다. 하면 할수록 좋은 거예요. 율법적으로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자 훈련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제자답게 살자고 하는 거잖아요. 박영선 목사님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창피하게 말이지, 의로워지는 것은 이제 끝났으니까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성화해야 한다.” 고 말씀하거든요. 두 분 다 훌륭한 목사님들입니다. 그러나 칭의론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게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니에요. 중심이 아닌 걸 갖고 자꾸만 힘을 주게 되면 거기에서 문제가 벌어지죠. 두 분 다 하소연하잖아요? 그렇게 평생 외쳐봐야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고 말이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안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뿐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결코 그건 아니죠.

이 맥락, 이 작은 차이의 긴장을 사람들이 자꾸만 놓칩니다. 우리는 늘 존재론적으로 들어가야 해요. 의식의 문제라고 했죠. 의식과 존재는 다른 말입니다만, 아까와 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또 막히네요. 존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또 길어지잖아요. 지난번에도 한번 말했지만, 이 단어도(다른 단어들도 그런데요) 한두 번 들어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서도 그 단어를 주워듣고 저런 경우에서도 듣다 보면, 그게 쌓이고 쌓여서 그 의미가 확 잡힐 때가 있어요. 억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다 안다고 해서 존재론적인 힘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전혀 다른 어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지성, 이성, 오감 등을 통해 활동하는 그 힘이 무엇일까요? 참 신기합니다. 그것을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이고 창조의 영이고 부활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니까요. 성령이면 성령이지 무슨 영이냐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성령도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매일묵상에서 썼듯이 은폐된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존재라는 단어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존재의 차원에 놓이는 거다.’라는 이 말 한마디만 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막히면, 즉 이 말이 오해되고 있으면, 또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면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알쏭달쏭하단 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언어라는 것이 그런 면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요. 우리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대전제를 갖고서, 여기에 몰입해야 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영어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실에 몰입하고 천착해야 하는 거죠. 우리가 기본적인 존재론적인 신앙의 토대 속으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잘 들으세요. 우리 중에는 그건 됐으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걸 말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주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 사실 속으로 더 들어가야 해요. 그건 아마 우리가 죽을 때가 되더라도 잘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받아야겠죠.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표현도 다 개념적인 것입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신앙적인 용어들을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실용적인 용어로 이해하고 있어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신학 공부의 일차적인 핵심입니다. 그게 잘 안 돼요. 자꾸만 따로 놀아요. 그러니까 웬만큼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도 신학 책을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나 목사님들이 신학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읽어봐야 재미가 없어서 그래요. 왜 재미가 없을까요? 모르니까요. 바르트의 신학 책을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바르트가 헛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런 걸 알려면 아주 기초적으로 언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철학, 역사, 문학이 다 연관되어 있거든요. 한국에서 신학교에 가는 사람들은 밑 공부가, 기초가 너무 없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냥 뜨거움만 갖고 가요. 심지어는 다른 욕망으로도 가고요. 또는 믿음이 좋으니까 신학교에 간다는 식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떨까요? 그런 방식으로라도 하나님이 쓰겠다고 하면 쓰는 거죠. 그건 그분만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행위니까요. 우리가 설교를 잘한다고 한국교회가 개혁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한국교회가 깨지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만, 또 그건 그분에게 맡겨야 하는 거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으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기독교 신앙이 보편적인 진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거든요. 말이 조금 더 옆으로 나갔는데요. 좋은 신학재원들을 잘 뽑아야 합니다. 신학교에 아무나 보내지 말고요. 그걸 분간하기가 참 쉽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학적인 인재인지 말이죠. 하여튼 신학 책을 읽지 못하는 신학생들과 목사님들이 문제입니다. 그게 재미없으니까 다른 쪽으로 한 눈을 팔 수 밖에 없죠.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들을 고쳐서 될 게 아니라 이렇게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칭의론에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신앙 태도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존재론적으로 의로워질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게 아니에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핵심이죠. 그런데 믿음으로 의로워졌으니까 이제 우리가 도덕적인 주도권을 확보하며 살자는 식의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게 기독교의 선전구호로 나오거든요. 이게 굉장히 고상한 것 같지만 이건 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신앙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존재론적 관계인데, 이것은 그냥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믿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믿지도 못하면서 믿는다고 말만 하는데요. 복음과 믿음이 말로만 남아있지 능력으로 들어가지 못하잖아요?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세례를 받아서 되는 일인가요? 장로가 되면 되는 일인가요? 교회에서 봉사하면 되는 일인가요? 아니면 선교사로 간다고 되는 일인가요? 선교사나 목사가 된다고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선교사나 목사의 일들이 다 자기 밥벌이가 될 수도 있고요. 그 뿐 아니라 신앙 자체가 업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겠죠? 율법인 거예요. 내가 이만큼 해서 어떻게 되겠다고 하는 선의의 욕망 때문에 목사도 되고 목자도 되고 선교사도 되는 겁니다. 아마 그런 방식으로 순교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희생을 한다고 해도, 혹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는데요. 무엇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죠. 사랑은 우리의 낭만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도와주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활동할지 알지 못해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그냥 좋은 뜻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자매님, 형제님 사랑합니다.’ 하는 용어들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안 쓰는 것보다 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능력도 없이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사랑은 그 스스로가 자기 길을 갑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랑의 능력, 하나님의 존재론, 하나님 나라의 존재론, 즉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를 관통하면 우리는 그저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게 없이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저 내가 세례를 받는 등의 몇 가지 형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칭의는 끝났으니까 성화하자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 맥락을 이해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리가 바로 율법이 됩니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다 우리가 해야 될 바른 규범(norm)인 것이죠. 이 규범들은 역사가 오래 진행되면서 경험의 축적으로 나온 공통분모들입니다. 좋은 것들이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오게 될 하나의 귀결입니다. 결과(consequence)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칭의론적인 관계(존재론적 관계)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행위의 문제(윤리적인 문제), 이 두 가지에 똑같은 무게를 두면 안 되는 겁니다. 칭의가 상수이고, 행위는 변수입니다.

 

바울의 칭의론

제가 지금 포항 YMCA에서 갈라디아서 공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고 연구하면서 저도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그냥 짤막하게 할게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베드로는 아주 위대한 제자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그를 책망했어요.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할 때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들어왔는데,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해서 자리를 피했거든요. 그걸 본 바울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한바탕했다는 거예요. 그로 인해 안디옥교회에서 신앙논쟁이 벌어진 거죠. 베드로는 유대 기독교의 입장에 섰고 바울은 철저하게 그것을 반대한 입장에 섰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똑같은 것 같지만 굉장히 달랐습니다. 거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거든요.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주류들은 유대 기독교였어요. 유대 기독교와 좀 상반되는 쪽이 이방 기독교였죠. 유대 기독교 안에서도 온건파가 있었고 강경파가 있었는데요. 즉, 비둘기파와 매파가 있었는데 베드로와 야고보는 온건파였습니다. 주류였죠. 온건파들은 유대교의 거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의 이름은 별로 잘 안 나옵니다. 물론 처음에는 바울도 이쪽에 포함되어 있었죠.

이걸 정리해 보면 유대교가 한편에 있고 유대교 안에 유대 기독교가 있고 거기로부터 나온 것이 이방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였죠. 나사렛 예수를 따르지만 유대교라고 할 수 있었어요. 바울은 처음에 여기에 속해 있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서 돌아선 거죠. 유대교인으로서 유대 기독교인을 비판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유대 기독교란 것은 지금처럼 역사 안에서 내려온 이방 기독교가 아니라 그냥 유대교였습니다. 그 안에서 파가 좀 다른 거였죠. 바울이 회심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바울이 이쪽에 있다가 저쪽으로 확 바뀐 게 아니었어요. 파가 좀 달라서 공격했을 뿐이었어요. 하여튼 바울은 이방 기독교를 끌고 가는 주축이 되었는데요. 갈라디아서는 이방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던 신학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같은 이런 사람들은 처음엔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어요. 사도행전 15장에 나와 있듯이, 네 가지만 금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타협을 보았는데, 갈라디아서 뒤쪽에 보면 안디옥교회의 논쟁을 통해서 베드로와 이런 사람들이 유대 기독교 쪽으로, 즉 보수적인 쪽으로 선회합니다. 바울의 이방 기독교는, 이들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 기독교가 보수적으로 변하니까 점점 더 멀리 나오게 돼요.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가 더 이상 접촉점을 찾지 못하고 벌어지게 된 거죠. 그러다가 유대 기독교는 역사 안에서 소멸되고 이방 기독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예수님의 동생이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이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힘들을 갖고 있지 않았나요? 성서에도 그렇게 나오는데요. 그 사이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기에 이방 기독교가 역사 안에 남게 되었는지는 시간이 없어서 길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냥 한 마디만 한다면, 1세기 중반의 유대전쟁과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겁니다.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네요. 이런 맥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인데요. 바울은 율법으로는 우리가 결코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 사실을, 즉 율법과 믿음 이 두 가지가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신앙(justification by faith)을, 오직 예수를 통한 예수에 의한 칭의를 말한 것입니다. 반면 유대 기독교는 율법, 토라, 할례와 같이 가는 쪽으로 나갔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단절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헬라 지역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했고 계속 그쪽으로 나가게 되었어요. 바울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칭의였습니다. 그것이 구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초반에 말한 구원 문제와 연관해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올 텐데 그때 좀 보충하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그것을 지금 완전하게 설명하기도 힘들거든요. 다만 구원의 문제와 칭의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만 강조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칭의라는 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인정을 받는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실제로 의로워지지도 않았으면서 의로워졌다고 인정받는다니,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다니, 그거 말장난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게 말장난일까요? 그게 말장난처럼 느껴지니까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 말은 옳은 걸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칭의론에 모든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그럴까요? 그걸 어떻게 더 설명을 해야 할까요? 법정 스님이 암자에 들어가 구도정진을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바에야 결식자들을 위해서 밥이라도 한 끼 주지, 아니면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든가, 암자에 들어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붙들고 씨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계의 신비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칭의, 다시 말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은 자칫하면 말장난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여기에 우리 전체 혹은 기독교 전체의 무게를 담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승부수를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일이 칭의이기 때문이죠. 그 증거를 대는 것이 신학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우리는 그런 과정 속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다음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인 율법시대의 구원과 신약시대의 구원은 다른가요?” 원칙적으로 구원이 어떻게 다른 게 있겠습니까? 구원은 하나입니다. 구원 그 자체는 하나인데, 나타나는 현상이 여러 가지겠죠. 출애굽도 하나님의 구원 경험이었고 개인의 병이 낫는 거라든지, 절망한 가운데서 희망을 얻는 거라든지, 그런 식의 구원 현상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구원 자체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입니다.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아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가 뭐냐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레벨:18]은나라

2016.07.07 15:36:58
*.164.89.102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관계안으로 들어가야한다는 말씀을 따라 글을 쭈욱 읽는데..

이해가 어렵네요. 예수를 믿는 믿음도 절대성이 아니고, 율법행함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인 윤리추구도 아니고..

답답하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님이 의롭다고 칭해준것이지.. 의로워진 건 아니라는 말씀은 알겠어요.

왜냐면, 종말에 가서야 완전해지니까 우리의 의도 그때가 되면 완전하게 의롭게 되겠죠.

그치만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은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로워졌고, 신앙생활을 통해서 의로워지며, 종말에 가서 의로워진다..로  배웠기에..믿음으로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 지는것이 아닌가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로 깊이 들어감이 대체 뭘까요?

혹시 존재론적인 관계로의 깊이 들어감이..우리 일상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7.07 21:58:03
*.164.153.48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관계라...,

여기선 존재론과 인식론이 문제가 됩니다.

이렇게 '...론'이 들어가면 골치 아파지지요?

그걸 빼고 말하는 게 좋긴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외의 것들이 다 뒤로 물러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외의 것들이라서

그것을 뒤로 물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꾸로 그외의 것들을 찾게 됩니다.

그게 믿음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고, 선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게 없으면 도대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들어가면

그 이외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들어가기가 어려워서 문제지만요.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에게 온 거에요.

둘째와 아버지의 관계가 존재론적인 거지요.

큰 아들은 좀 달라요.

왜 그런지는 아실 거구요.

존재론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거와 일상에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거는

좀 다른 이야기에요.

이렇게 말하는 게 낫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삶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직면하듯이!


[레벨:18]은나라

2016.07.07 23:54:50
*.105.196.251

정목사님, 글을 다시 읽어보니..

우리 신앙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즉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이나 행위로 되는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은..

이것을 칭의와 연결해서 볼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어서나, 우리의 열심과 윤리적인 선한 삶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수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믿을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하신말씀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것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삶의 태도" 는 하나님과 존재론적인 관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이해가 잘못된 것일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7.08 21:54:31
*.164.153.48

잘못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은나라 님 덕분으로

내 글이 어느 부분에서 어떤 이유로 독자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지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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