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강, 청교도 신학에 대해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297 추천 수 0 2012.02.11 19:04:26


제09강

청교도 신학 대해서

 

 

안녕하세요. 오늘은 수강생들이 질문한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앞서 나온 질문 중에서도 시간이 되면 대답하겠다고 말한 것들이 많았는데,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쪽지가 많아서 지나가면 잊어버려요. 미안합니다. 그럼 시작하죠.

 

청교도 신학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즘에는 기도문에서 십자가, 보혈, 속죄, 대속, 구원이라는 말들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말들은 소위 복음주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주제들인 것 같은데, 그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해서 좀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다비아에서도 이런 말들은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주제들을 매일의 삶에서 어떻게 묵상해야 할까요? 우리의 삶에서 이런 것들은 어떻게 자리매김이 되어야 할까요?”

이 질문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신앙적인 것 같군요. 동영상 화면에 키워드를 쓸 테니 보십시오.십자가, 보혈, 속죄, 대속, 구원. 복음주의 신앙 노선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는 십자가, 대속, 보혈, 구원 등이 대구성서아카데미(약칭 다비아)에서 조금 약화된 것이 아니냐,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일상의 영성에서 역동적으로 끌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인데요. 질문한 분은 십자가, 대속, 보혈, 속죄, 구원이라는 단어들을 언급하면서, 다비아에서도 이와 같은 원초적인 신앙의 내용들을 좀 소홀하게 다루는 것 같다고 했는데, 다비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정말 다비아에서 그런 걸 소홀하게 다루었던 걸까요? 아니면 실제로 다비아에서는 그런 단어들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데, 해석의 차이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낀 걸까요? 이건 참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말한 십자가, 대속, 구원 같은 것 말고도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들은 많습니다. 창조, 종말, 하나님 나라, 복음 등이 다 그런 거죠. 십자가, 속죄, 대속, 구원 등은 주로 기독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모두 기독론(christology)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요. 신론 중에 삼위일체만 하더라도 아들 하나님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그걸 더 강조하게 되면 신앙을 편식하는 게 돼요. 이 질문에서 복음주의 신앙이 언급되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청교도 신앙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복음주의나 에큐메니컬 같은 용어들은 대강 뭉뚱그려 사용되는 경향이 있어요.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정확한 게 아닙니다. 사실 개신교는 다 복음주의입니다. 복음주의가 아닌 게 없어요. 복음주의를 영어로는 ‘이반젤리컬’(evangelical)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독일어로 말한다면 ‘에방겔리쉬’(evangelisch)입니다. 개신교가 루터에게서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에 반대 되는 게 있는데 ‘카톨리쉬’(katholisch)입니다. 독일의 대학에서는 신학부를 두 개로 나누는데요. 독일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가톨릭과 대별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우리처럼 보수적인 입장에서 사회문제보다는 개인구원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영성이나 구원에 집중한다는 관점으로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정착을 했으니까, 그렇게 쓴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주로 청교도 신앙 계열에 있는 로이드존스(LIoyd-Jones)라든지 존 스토트(John Stott)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걸 거예요.

그러한 청교도 중심의 신앙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다 맥락이 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한 번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청교도 신앙이 개인의 내면적인 영성을 확고하게 하고 윤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역동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로이드존스의 설교를 보면서도 느꼈던 건데, 세상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적인 관점으로, 선악의 대립 구조로 봅니다. 악을 대단히 실증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더라고요. 그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악의 문제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자칫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은총의 영성보다는 죄와 악의 실체가 더 강하게 전달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어요. 그게 뭐가 잘못이냐, 인간이 당연히 죄를 짓고 잘못했으며 죄가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현상적으로도 옳아요.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도 많이 나오니까요. 악마나 사탄을 성서 기자들이 언급했다는 것은 악의 존재 근원을 염두에 뒀다는 걸 의미하거든요. 그러나 기독교와 성서는 악의 문제를 그렇게 나이브하게 다루지 않고 래디컬(radical)하게 다룹니다. 다시 말해 악은 우리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아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힘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청교도 쪽에서 죄와 대속을 강조하는 게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어떤 교리의 가르침이든지 독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악을 전체적인 기독교 조직의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악마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악마는 이미 패배한 존재입니다. 악마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에요. 악마의 역할도 여전히 하나님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악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거기에서 두려움이 생겨나요. 물론 인간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말살하는 죄나 폭력의 존재론적인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더 우월하다고 하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되죠. 기독교 성서에서는 이원론이, 선과 악이 대립하고 있는데요. 기본적으로는 대립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승리했거든요. 좀 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로 악의 존재가 거꾸러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여전히 악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악의 문제는 신정론과 연관되는데, 지금 제가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여기에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니까요.

이러한 청교도 신앙을 우리가 복음주의 신앙이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한 마디만 더 한다면요. 이 청교도 신앙을 근본적으로 매도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호도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부분만 강조했어요. 편식하면 왜곡되거든요. 유럽교회의 역사를 볼 때 청교도 이전 시대는 정통주의 시대였습니다. 17세기의 유럽교회는 종교 개혁 신앙을 굉장히 신학적으로 이론화했어요. 종교 개혁 신앙이 다시 가톨릭과 같은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으니까, 그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개인의 문제 쪽으로 많이 들어가게 된 거죠. 그래서 부흥운동, 각성운동, 회개운동, 도덕재무장운동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도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이거든요. 전체와 함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데, 청교도 신앙에서는 특히 미국으로 건너간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부흥운동 등에서는 일부분이 침소봉대 식으로 강조되어서 전체적인 신앙의 건강성을 잃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운동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큰 교회들이 청교도 쪽으로 나갔어요. 물론 오순절이나 순복음교회는 다른 방향이지만, 어쨌든 한국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소위 복음주의라고 하는 쪽의 신앙 핵심들이 십자가, 보혈, 대속, 구원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비아도 사실은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지난 대림절부터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오심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보혈이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속 언급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가 보혈의 문제, 즉 예수의 돌아가심이니까요. 단지 그것만을 떼어 내서 침소봉대 식으로 그게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창조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면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들어오던 복음주의적 성서공부나 설교와는 다르게 느꼈을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어요. 지금 제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들을 ‘fundamental theology’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근본주의 신학’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은 근본주의 신학이 아니라 ‘근본 신학’입니다. 독일어도 똑같이 쓰는데, ‘기초 신학’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이라는 말이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서, 굉장히 배타적이고 독선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몰역사적인 특정한 이슈에 사로잡힌 신학을 말하지요. 그러나 영어나 독어는 그런 뜻이 아니라 기초 신학을 뜻합니다. 신학대학의 교수들 중에 주로 대가들이 기초 신학을 가르쳐요. 기초가 되는 부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거죠.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십자가, 창조, 부활, 성만찬, 구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복음주의 신학이 말하는 관점과 제가 말하는 관점이 크게 다른 게 아닙니다.

정리해보죠.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기독교 신앙이 한 부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대속을 이야기하더라도 창조, 하나님 나라, 종말이 두루 소통되어야 합니다. 그 대속의 문제만 딱 끊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둘째는 해석의 문제라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구원론적이니까요. 구원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이에요. 그게 사이비 구원론이냐 참된 구원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모두 어디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들이거든요. 그렇게 우리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구원의 지평들을 인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펼쳐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칼뱅의 이중 예정

지난 시간에 칭의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그 시간에 들어온 질문 중의 하나가 칼뱅의 이중 예정과 하나님의 배타적 행위의 연관성에 대한 거였습니다. 정확한 질문입니다. 칼뱅의 이중 예정은 만세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영벌에 처할 자가 이중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중 예정이 기독교강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다시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옛날에 읽은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렇게 봐야 할 겁니다. 이중 예정이라는 게 기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면 굉장히 독선적인 게 됩니다. 위대한 신학자들인 루터나 칼뱅이 하는 이야기들은 역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잣대로만 그 말들을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면 오해하는 부분이 많이 생깁니다. 칼뱅이 말하는 이중 예정은, 그것이 기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큰 섭리의 틀에서 보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냐고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이중 예정에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한데요. 그 당시에는 알미니안주의와 칼뱅주의의 논쟁이 심각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조금 자유주의적이고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어요. 인간의 부패도 전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이며 인간에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감리교 쪽의 존 웨슬리(John Wesley)도 알미니안적인 성향들을 보입니다. 그에 비해 칼뱅은 전적인 타락을 주장했어요. 인간은 가능성이 없다, 하나님이 무조건 선택했다고 말이죠. 그런데 이중 예정론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게 성도의 견인인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성도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성도의 견인에 대해 책에 나온 부분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택정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성령으로부터 믿음을 얻은 자는 모두 영원토록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여 끝까지 인내한다.” 이중 예정도 그것만 딱 떼어 내서 보지 말고 성도의 견인과 연관해서 본다면, 성도들의 신앙 태도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되는, 도움보다도 강력한 동기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조금 비틀거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견인해 가신다는 거죠.

이러한 칼뱅의 이중 예정과 제가 가끔 사용하는 배타적 행위라는 것이 그런 면에서는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중 예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가 그런 용어를 썼거든요. 그런데 질문의 요지 속에 그것이 들어 있어서 ‘질문한 분이 나보다 더 생각을 깊이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하나님의 배타적 구원 행위와 칼뱅의 이중 예정을 연관해서 생각한 거예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아요. 배타적 행위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사실 자체를 우리의 인식론적 틀 안에 담아내기가 불가능하니까, 그 사태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구원이 뭐냐,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거죠. 그게 얼마나 적합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칭의와 율법의

오늘은 지난 시간에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을 좀 보충하려고 하는데요. 칭의와 구원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부분을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의로움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인데요. 의를 생각해 보세요. 의와 반대되는 것은 불의인가요? 의라는 것은 불의보다도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죄와 연관되어 있다는 거예요. 죄로 인해서 죽음이 들어왔다고 바울이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요. 인간이 왜 죄를 짓는가 하는 부분에서 악마가 그 장본인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죄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면 악마, 사탄이라고 할 수 있죠. 사실은 이런 용어들을 쓰기가 조심스러워요. 우리는 이것을 자꾸 실체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이 아니면 어떤 실체나 사태를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를 사용했거든요. 인간의 삶을 보면 죄로 인해 불행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잖아요. 이런 용어들은 그것들을 해명하기 위한 성서 시대 사람들의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인의 삶은 연역적이라기보다는 귀납적입니다. 죄가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러냐는 거죠. 하나님이 인간을 귀하고 선하게 창조했는데, 인간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해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선하고 능력 있다는 것이 엄연하고도 명실상부한 사실이라면, 그가 만든 세상에 왜 악과 죄가 만연하냐는 겁니다. 형제 살해가 일어났는데,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파렴치한 변명을 해요. 이런 일들은 고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이만큼 발전했어도 계속 그 악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잖아요.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는데요. 그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거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근원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악마, 사탄, 아담과 이브를 타락하게 만든 장본인, 뱀, 종교적 상징 등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해석학적인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중간을 생략한 채 설명하는 것이라 조심스럽네요. 결국 해석의 문제거든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명인 신학 문서들도 어쨌든 다 텍스트거든요. 문제는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을 때 그것을 그냥 사실로 읽지 않죠. 그걸 통해서 괴테가 말하려고 했던 어떤 것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게 더 중요하잖아요. 그것처럼 텍스트는 언제나 해석이 관건입니다. 조금 옆으로 비껴나가는 이야기지만, 독일 신학은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나 미국은 해석보다는 적용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흐름 자체가 그래요. 독일은 좀 더 본질적인 존재론이기 때문에 성서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심을 둡니다. 예수 세미나 운동은 미국에서나 가능한 거죠. 독일은 거기에 관심조차 없어요. 그것은 성서 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니까요. 예수 퍼즐이나 예수는 신화다 등의 주장들은 교회 밖에 있는 문서들을 종합해서 어떤 가설들을 만든 것에 불과한데요. 독일 쪽에서는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둘째 치고, 우선적으로 전통 안에 있는 텍스트, 즉 교회 안에 보존된 문서들을 해석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을 해석해 나가요. 기독교가 악마나 사탄, 원죄 등의 개념이나 교리나 상징들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의 삶에 내재해 있는 죄를 심각한 어떤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의 문제로 인해서 죽음이 왔다고 볼 정도였으니까요. 안 그래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죄를 극복하는 것, 이게 구원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죄와 반대되는 것은 의니까, 인간이 의로워지는 게 바로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서 칭의의 개념이 나옵니다. 마르틴 루터의 세 가지 신학적 슬로건에 따르면 칭의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바울의 칭의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율법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건데요. 바울은 인간이 이런 것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즉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 수 없다고 전제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죄를 벗어 날 수 없어요. 여기서 가리키는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태가 아니라 더 존재론적인 의미의 죄를 말합니다. ‘라가’라고 하면 친구를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주님의 말에 근거한다면,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이 죄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런 차원에서 보면 아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죽어야만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바울의 말은 옳아요. 그러면 살아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의를 행할 수 없어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구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딜레마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말입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세요.

 

만인구원에 대해

만인구원론에 대해 질문하신 분이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인지, 하는 질문입니다. 만인구원론도 결정된 교리는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과 연관이 되는데요.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예요. 다만 성서의 가르침을 가지고 선택적 구원과 만인 구원이 경합하고 있는 거죠. 구원은 아주 궁극적인 문제인데,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궁극적인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다거나 농땡이 치던 사람들이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의 실체는 아니잖아요? 구원은 영원히 사는 건가요? 그걸 영생이라고 하나요? 영원하게 사는 걸 우리가 파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유한한데, 계속된다(무한하다)고 하는 건 무엇일까요? 계속됨과 우리의 구원은 어떤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단어들은 다른 개념이 없어서 사용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거든요.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등의 명제를 우리의 죄와 의로움의 관계 속에서 계속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세계를 늘 열어놓아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시각이에요. 그것을 우리가 말하고 있는 명제들로 혹은 도그마들로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도그마(교리)가 불확실하거나, 또는 우리가 불가지론에 빠져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 길로 나가야죠. 그것은 종말에 일어나게 될 참된 생명과 연결되어 있어요. 참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다 묘사할 수 없어요.

요한계시록이 묵시의 방식으로, 극단의 상징으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선택적 구원이냐 만인 구원이냐 하는 것도,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넓히고 이해하려는 하나의 과정이지, 칼로 무를 자르듯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택적이기도 하고 보편적이기도 해요. 오직 하나님만이 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도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엄중한 사실에 토대하고 있는데요. 그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구원 약속들의 실질들은 우리가 미숙하기 때문에 다 담아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어린아이거든요. 조금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을 뿐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어머니의 따뜻함과 호흡을 느끼는 것인데, 어머니의 실질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린아이가 뭐를 알겠어요? 영생, 구원, 하나님 나라, 시간, 공간, 우주 등 이 전체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전체가 다 하나님의 행위인데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인데 말이에요. 그런 긴장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2천 년 역사 안에서 우리가 고백했던 신조들과 교리들과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하려고 하는 실질을 느끼고 해석하는 동시에, 그것들이 독단적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마지막 세계를 향해서 열려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 활동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초 신학’의 깊이를 확실하게 붙잡으면서 아직까지 우리가 다 말할 수 없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거시는가 하는 긴장과 역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만인 구원과 선택 구원도 여전히 논쟁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에 가까이 가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증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하거든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알리심, 계시, 우리의 인식, 그 과정인 역사, 거기서 생성된 도그마들, 가르침들이 종말까지 연결되면서, 오지 않은 미래까지 내다보는 종말론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하기 싫어하고 피곤해하고 불안해합니다. 구원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고 하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불안해해요. 하나님 앞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솔직한 고백이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불안은 공포심으로 인한 불안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좋은 뜻에서의 설렘입니다. 신랑을 맞는 신부와 같다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지요. 첫날밤이 아직 오지 않은, 그래서 설레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긴장되고 불안한 그런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설레는 불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영성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해 나가는 과정이 조금 버거운 겁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많은 교리문답이 있어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하나하나가 우주적인 무게를 담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교리문답식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기독교 신앙만 그런가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잖아요? 삶 자체가 역설적이고 신비롭고 자기 해명이 안 될 때가 많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잘 안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싫은 거예요. 자신의 삶이 토대가 있고 탄탄하다고 생각합니다. 쌓아가는 업적 때문에 그래요. 여러 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자기 위치를 확고하게 잡고요. 회사나 가정에서나 자리를 잡는 게 자신의 삶을 확인해 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방식으로 가요. 그러나 솔직히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오늘 저녁에 인터넷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게 우연한 사건들이 수백 번 얽혀서 일어난 것일까요? 십 년 전으로 돌아가 보세요. 여러분과 제가 십 년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랬던 사람들이 오늘 이렇게 같은 사이버 공간 안에서 만났잖아요. 만날 수 있었던 가능성이 수십억분의 일도 없는 데 말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났거든요.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그래요. 도저히 우리가 어떤 것으로 계산해 낼 수 없는 신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살짝 맛본 사람들이 성서 기자들이고 영성의 대가들이에요.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귀한 것들을 모아둔 것이 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겠어요. 제가 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전달이 되고 있는지, 또 그것이 옳은 건지 말입니다. 하여튼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칭의와 구원은 기독교 신앙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고 늘 생각을 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거기에 100% 완벽한 대답은 없다는 걸 늘 염두에 두세요.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어머니 품속에 안겨 있더라도 그 아이로서는 완전한 어머니의 경험이거든요. 미숙하지만 완벽한 어머니 경험입니다. 우리는 2천 년 동안 그런 경험의 역사를 가지고 배워왔어요. 그러나 그 어머니 품안에 안겨 있는 경험만 갖고 모든 어머니를 경험했다고 말한다면 곤란하겠죠.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롭게 어머니를 이해해 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신학 공부도 필요하면 하고 논쟁도 필요할 때는 하고 삶에서도 좀 더 기다려 보고 살아가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레벨:18]은나라

2016.07.07 12:40:27
*.164.89.102

의문이 이글을 통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7.07 21:48:38
*.164.153.48

은나라 님이 정말 열공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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