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죽음에 대해서

기독교가 뭐꼬 조회 수 3366 추천 수 0 2012.02.11 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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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아주 필연적입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요. 평소에 이것을 의식하기도 하고 의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현대 문명은 이런 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죽음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가 적지 않았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 친가 외가 이웃에서도 늘 초상이 났으니까요. 그러면서 상여가 나갈 때 뒤 따라가는 경험도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죽음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죽지 않고 병원으로 가잖아요.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보기가 힘들도록 단절되어 있죠. 장례식장도 병원에 많이 있죠. 전문적인 장례식장은 호텔처럼 되어 있더군요. 커피숍도 있고 인터넷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어요. 죽음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죽음이 말하는 실패나 충격으로부터 우리가 단절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죽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거든요.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말입니다. 자기 업적, 취미생활, 자기 가족, 자기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단절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다 아니다 하는 그런 차원을 떠나서, 죽음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삶을 관계로 생각하잖아요. 여러분도 소유와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경험하지요, 제가 자리하고 있는 목사의 위치라든지 여러분 각자가 갖고 있는 그런 것들이 모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거란 말이죠. 우리는 그런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현대 문명이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삶을 소유하는 것으로만, 그리고 어떤 관계를 맺는 것으로만 우리 자신을 몰아가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한 겁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지게 되거든요. 그 상태가 된다면 어떻겠어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군요. 언뜻 생각이 나서요.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다가 무덤 옆에서 잠을 잤다고 하죠. 자다가 물을 마셨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그 물그릇이 해골바가지였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고는, 이게 별게 아니구나. 세상이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구나. 그릇이 물을 마시는 일반 바가지일수도 있고 해골일 수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실체는 똑같은데 받아들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거죠.

 
    
인도에서는 요가나 명상 훈련을 많이 하는데요. 어떤 곳에서는 이런 훈련까지 한답니다. 훈련갔다온 사람의 글을 읽었는데요.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정 시점에 학생을 무덤 옆에서 자게 하는데, 해골을 안고 자게 한데요.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런 상황이 되면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에 가서 혼자 자고 내려올 수 있을까요? 제가 교회에 있다가 집으로 혼자 갈 때 요즘 아주 춥습니다. 깜깜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 가끔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내가 얼마 있지 않으면 나 혼자 땅속에 묻혀서 추운 데 있어야 하는데, 그걸 인정해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나는 따뜻한 교회에 있다가 잠자리가 있는 집으로 가는데,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춥고 아무도 없는 땅속이다.’ 이 사실을 자꾸만 생각하거든요. 그러면서나도 한번 공동묘지 근처에 가서 있어볼까? 삶과 죽음을 관통할 수 있는 영적인 경지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그런데 제가 어떨 때는 그게 가능할 것 같다니까요. 죽은 자가 묻힌 무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 어떨 때는 무서울 것 같기도 해요. 우리 머릿속에는 많은 것이 각인되어 있지 않습니까? 무덤, 공동묘지, 귀신같은 것이 두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어릴 때부터 어떻게 교육받고 자랐느냐가 중요한데요. 죽음과 삶, 이런 문제들을 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혹은 훈련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는데요. 아이들에게는 그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죠. 지금은 다 좋지 않습니까? 특히 살기가 좋아진 상태에서 말이죠. 이게 아이들에게 정말 바람직한 가정교육인지, 학교교육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생명의 밑바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과 삶의 문제를 늘 붙들고 있어야 하는 거죠. 창조를 말할 때도 무()로부터의 창조잖아요. 제가 조직신학을 해서 그런지 또 신학적으로 나가네요. 무로부터의 창조거든요. 제가 왜 이런 신학적인 걸 말하는가 하면 그게 결국 우리의 영성이고 우리의 삶이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학과 삶을 일치시키지 않아요. 창조라고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지, 성서 기자들이 말하는, 2천 년 기독교 신학자들이 말하는 창조의 행위, 창조의 개념으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은 나의 삶과는 동떨어진, 그저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남아 있을 뿐, 내 삶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되는 겁니다. 삶과 신앙이 나누어져 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여러분은 이걸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반듯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들 말하는데요. 이런 사람들은 신앙을 실존적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있어도 그 속에 들어가려고 하지를 않죠. 그냥 그 신앙을 자기 삶에 적용시키려고만 해요. 게다가 그걸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실존적인 신앙과 신학과 삶이 일치된 신앙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그 차이를 말해도 어떤 사람은 그걸 이해할 거고, 어떤 사람은 그냥 상투적으로 듣고 지나갈 거예요.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전달이 될 거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야기로 들리겠죠.

하여튼 창조만 하더라도 기초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거든요. ‘크레아치오 엑스 니힐로’(creatio ex nihilo)라고 합니다. 창조 신앙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창조가 무로 만들어진 유의 이야기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창조는 유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무로부터, 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토대 위에서 창조라는 신앙, 즉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한 신앙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창조 안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전혀 없었던 무의 상태로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한번 돌아가 볼까요? 생각으로는 가능합니다.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보세요. 아니 그 이전으로 더 돌아가 보세요. 여러분은 그 때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된 배아 상태였나요? 기억이 나지 않죠? 그 배아로부터 여러분이 인간이 되었답니다. 더 들어가면 어디까지 갈까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가겠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 것이 가능할까요? 큰 우주, 120억 년이 되었다는 이 우주, 팽창된 우주 그 너머는 뭘까요? 우주 안에만 뭐가 있고 그 너머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모든 것, 내가 소유하고 만들어내고 관계를 맺었던 것들이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다가 옆으로 나왔군요.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다 그런 신학들과 연관되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reality)들을 놓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죠.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치고 들어가는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제가 창조에 대해 말했지만, 그것은 실제적인 무에 대한 경험입니다. 만약에 그 무로 우리의 의식이, 생각이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죽음도 넘어 설 수 있는 겁니다. 칭의나 성만찬이나 죄 문제 같은 것들도 사실은 우리 생명의 밑바닥, 그 심층적인 세계에서 나오는 가치거든요.

인문학적 성서 읽기는 바로 그러한 맥락을 꼼꼼히 살피면서 기독교 신앙이 풀어내려고 하는 핵심들을 잡아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죽음은 사실 끔찍한 세계입니다. 왜 제가 끔찍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과 다 단절되기 때문이죠. 제가 놓칠 뻔했는데 세례가 바로 그겁니다. 세례는 죽음과 연관된 문제인데요. 세례라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실제로 우리가 죽는 건가요? 어떻게 우리가 죽겠습니까? 실제로 죽지는 않지요. 그런데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거죠. 그런 차원에서 세례는 죽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세례를 제대로 경험하려면 실제적인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우리의 영혼이 밑바닥까지 가야만 합니다. 자기가 완전히 무가 되는 경험 말이에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 안 될 거예요. 누가 말하면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진실이 말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어른들이 암자에 들어가 수십 년 동안 용맹정진하며 구도하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배워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기독교적인 돈오가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세례는 성만찬과 연관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기독교의 교리죠.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대하는 겁니다. 세례의 반복이 성만찬이에요. 세례는 유일회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번 받고, 대신 성만찬을 정기적으로 행함으로써 우리는 세례를 반복합니다. 죽음과 삶에 대한 경험인 거죠. 얼마나 놀랍습니까? 일종의 기독교 예전(liturgy)이지요. 이것이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죽음과 삶의 우주 중심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깊은 사유에서 나왔다는 것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례와 성만찬은 기독교의 신앙을 설명하는 귀중한 예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제 신앙과 삶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성만찬은 떡 덩이나 빵 조각 하나를 하나님의 몸으로 인식하고서 그걸 먹는 거니까, 내가 하나님을 먹는 거죠. 창조자이고 영이고 종말에 생명을 완성할 분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가 우주와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거죠. 죽음을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차원으로 생각할 때, 죽음은 이 땅에 존재하는 나와의 관계로부터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관계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요?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사유의 비약이 필요해요. 우리가 누리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게 아니라 벗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옷을 갈아입는 거예요. 옷을 갈아입는 그 귀한 세계에서 우리가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요? 현재와 같은 방식이라면 우리는 만족할 수 없을 겁니다.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은 소유의 관계에서만 자신의 삶을 확인하기 때문에, 내가 계속 중심에 있습니다.

세례와 성만찬은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즉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충분하게 훈련되어 있어야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거고요. 그런 희망들을 우리가 확고하게 붙들 때 영성도 깊어지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런 표현들은 너무나 진부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네요. 그런 신학적인 용어 말고 우리에게 와 닿는 어떤 언어들이 필요한 것 같은데 조금 아쉽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확인하는 작업에 몰입해야 합니다. 이것이 죽음과 삶의 문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다른 것은 사실 다 몰라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세례와 성만찬, 하나님 나라와 종말 등을 통해서,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우리를 확 사로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해요. 좋은 뜻으로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의 내면적 세계가 더 풍요로워지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심화시키자는 거예요. 그러면 늙음에 대해서 하등의 불안을 느끼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통과해야 할 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감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설령 지금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그것들이 다 없어진다 해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죽는 연습을 늘 해야 합니다. 신앙은 사실 어떻게 보면 죽는 연습이에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신앙은 죽는 연습입니다. 예수님도 다 버리고 따르라고 했잖아요? 버림이죠.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과연 버림인가요? 명색만 그렇지 실제로는 계속 뭔가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축복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성취를 요구하니까 목회 마인드마저 그쪽으로 흘러가는데,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영적으로 공허하게 됩니다. 길이 아니니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시대정신은 사회를 개혁하고 밝히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인 시대정신들, 즉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하고 자기를 확인해야 하는 그런 것들을 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계속해서 자극하기 때문에, 얼마간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게도 하겠지만 그것이 계속될 수는 없거든요.

영성은 자기 무화(無化)의 길입니다. 결국 자기를 거의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무화시키는 거예요. 에크하르트(Eckhart)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가 쓴 글들을 보세요. 수많은 영성가들이 자기를 비우고 축소시킵니다. 말장난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그런 사람들의 가르침이 특별한 게 아니라 모두 기독교의 가르침 안에 있는 것들이에요. 무와 창조의 관계에서 창조를 생각하면 창조가 놀라운 은총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무와 창조 전체에 해당하는 분이죠. 무와 창조, 이 전체니까요. () 안에만 있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갑자기 소개할 책이 생각났는데요. 매튜 폭스(Matthew Fox)가 쓴 『창조 영성 길라잡이 원복』(분도출판사)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영성이 긍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네거티브(negative), 즉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창조는 포지티브(positive) 하지요? 포지티브는 적극적이고 실증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네거티브가 부정적이고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것은 실증과 반대되는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양쪽이 모두 기독교의 영성을 전하는 한 성격이라는 거죠. 여러분,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무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시 무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요. 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존재방식입니다. 단어들이 철학적인 용어라서 어떻게 설명해야 잘 전달될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자꾸 여기에 있는 방식으로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그런 사고의 방식을 접어야 해요. 하나님은 적극적이고 실증적인, 우리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는, 확신할 수 있는 세계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세계까지도 다 통치하는 분이거든요. 그분에게 우리를 맡기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모두 해체되어서 원소처럼 있을지도 몰라요. 원소 덩어리, 혹은 그것보다 작을 수도 있습니다. 꼭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가 너무 실증적인 방식의 삶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부분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미래를 열어두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요. 그것을 성서 기자들도 빛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었어요. 환한 빛 말이에요. 메타포(metaphor). 그 이상으로 그것을 더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요.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을 바탕에 놓고 성서 기자와 2천 년 동안의 신학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해명하려고 한 겁니다. 죽음과 삶의 문제를 해명하려고 한 거죠. 도대체 이렇게 살고 있는 이 방식은 뭐냐? 결국 죽음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는 이 방식은 뭐냐? 이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가 창조 이전과 죽음 이후까지 이루어지는가?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세계)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 개입해 있는가? 그런 것까지도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삶에 대해서 물리학적으로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그 모든 것들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제가 죽음의 순간을 자주 생각한다고 그랬죠? 누구나 다 그럴 텐데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구에 60억 명 정도 사나요? 1초에 수백 명씩 죽어가고 있는데요. 우리가 한 줄로 서서 순식간에 차례로 가고 있어요. 우리 차례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어요. 금방금방 가게 됩니다.

숭례문이 세워진 지 육백 년이 되었다고 하던가요? 그걸 세웠던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겠어요. 그런데 벌써 사오백 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요즘 그게 불탔다고 사회적으로 많이 시끄럽죠. 사오백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이 소동을 전해 듣는다면, 우리를 보고 뭐라고 말을 할 겁니다. 그 사이에 시간들은 다 지나가버리는데요. 그 안에 있던 것들은 과연 다 무엇일까요? 지구 안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에 불과할까요? 시간과 공간, 참 신기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아주 소중해요. 그러나 이 삶은 하나님의 나라, 즉 창조 이전과 종말 이후까지 모두 포함한 그 전체를 전부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그것을 설명하기는 힘이 듭니다. 이 문제는 여기까지 할게요.

 

기독교와 민중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서 그 결과에 대한 이상한 현상을 경험했어요. 기독교가, 특히 프로테스탄트가 지난 수년 동안 무지하게 욕을 먹었잖습니까? 욕먹을 짓도 했고요. 심지어 안티기독교 사이트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에서는 개신교의 색깔을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이명박 장로가 당선되었단 말이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일반 대중이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기독교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잖아요? 지난 10년 동안 말이에요. 앞으로도 기독교는 계속해서 줄어들 텐데요. 물론 대형교회는 성장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기독교의 세력은 약화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설문조사를 하면 기독교 지도자들을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한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었을까요? 그 사실만 놓고 본다면 아직도 기독교에 가능성이 있는 걸까요? 이게 좀 말이 안 되는 생각 같지만,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도대체 민중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일까, 매우 궁금했습니다.

지금 저는 기독교를 바라보고 있는 민중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민중 또는 대중은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한쪽으로는 합리적이고 정의를 추구하려고 하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적이고 대중심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요. 기독교가 잘못한 부분들, 예를 들면 대형교회에서 벌어진 세습이라든지 심각한 부도덕의 문제라든지 기복주의에 대한 강조라든지 극에 달한 교단 분열이라든지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반정부 기도회, 반북 기도회, 친미 기도회 등은 사실 욕먹을 만한 일들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민중이 어느 정도 바르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한데, 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순식간에 이기주의와 군중심리에 빠진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현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작은 분석이에요. 민중에게는 양면성이 있다는 거죠. 또 교회와 연관을 시킨다면, 대중 교회를 따라가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도 민중이거든요. 한국 민중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요. 대형교회만이 아니라 신천지에 쏠리는 현상도 거기에 종교적인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거든요. 어떤 교회를 꼬집어서 말하기는 뭐하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곳에 7-80만의 신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대중 심리나 종교적 이기주의 등이 연관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설교를 들어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전혀 내용 없는 말들의 반복인데도 수십만 명이 모이니까요.

앞으로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게 참 궁금합니다. 그런 걸 예측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그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기독교적인 색깔이 강한 대통령을 민중이 뽑은 것은 기독교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와 결부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점에서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을 기독교에서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기독교가 사회에 뭔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별로 기대를 걸만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명박 장로가 기왕 대통령이 되었으니 정치를 잘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래도 명색이 장로니까 속으로는 정말 잘하기를 바라고 있고, 당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인수위의 모습과 최근의 발언 등을 볼 때 경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잘 나가는 교회가 이벤트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생각과 비슷하게 국가를 끌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죠. 질문 있으면 하세요.
 

교회 청소년 교육

청소년 교육에 대해서 질문하신 분이 계시네요. 기독교 신앙을 버림과 무소유 쪽으로 설정하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 위주의 교육체제 아래 있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신앙교육을 제시해야 어필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다니요?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가르쳐주면 되죠. 예를 들면 ‘Boys! Be ambitious!’ 하는 방식의 청소년 프로그램들은 무익한 겁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교양강좌에 불과해요. ‘목적이 이끄는 40같은 프로그램도 기독교 신앙의 근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청소년들에게 할 수 있다, 열심히 하자는 식의 가르침은 필요가 없어요. 교회에서 그러지 않아도 사회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우리는 다른 것을 말해야죠. 구체적으로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건 우리가 모르는 일이고, 개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니까요. 십자가, 부활, 하나님 나라, 칭의, 성만찬, 세례와 같은 것들의 근본적인 의미들을 잘 살피고, 창조 안에서 창조질서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하는 종말론적인 상상력들을 가르친다면 청소년들이 스스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판단할 겁니다. 제발 교회 선생님, 목사님,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삶을 프로그램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게 너무 심합니다.
 

이슬람 신앙과 선교

이슬람 신앙에 대한 공부와 선교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 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광범위한 질문입니다. 당연히 저는 그런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걸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칠 필요는 없어요. 그거 말고도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공부할 게 많으니까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말 심심한 사람이라면 해도 괜찮아요. 이 질문을 한 선교사님처럼, 인도에 있는 사람들은 이슬람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들과 충돌할 필요는 없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도 어떤 종교성이 있으니까 그 바탕 안에서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작업이 필요해요. 개척자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대해 더 공부하라

방금 제가 이런 말을 했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공부할 게 많은데 어떻게 다른 것까지 다 신경을 쓸 수 있겠느냐고요? 이 말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데요. 옳은 쪽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우리는 공부할 게 많아요. 특히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습니다. 안티기독교나 예수 세미나 등 소위 말해 자유주의 쪽에 있는 분들에 대한 저의 아쉬움은 생각이 열려 있는 것은 좋은데 기독교 전통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을 소홀히 여기면서 다른 것을 더 많이 아는 것은 무의미하거든요. 저도 장자나 노자의 책이나 동양 사상에 대해 책도 읽고 공부를 했고, 철학이나 물리학도 개론적인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런 공부보다는 기독교 전통에 대해 더 공부해야 한다는 거죠. 2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썼는지 모릅니다. 선배 신학자들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고요.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일반 성도들에게 무엇을 어느 정도로 가르칠 것인가가 핵심인데, 일반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기독교의 근본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설교도 변죽만 울리고 말거든요. 이런 표현을 써서 송구하지만, 그냥 수박 겉핥기 정도입니다. 수박 겉은 맛이 없잖아요. 수박의 속 맛을 봤으니까 이걸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줘야지, 하는 게 제 관심사예요. 정작 수박을 쪼개서 당도도 실험하고 느끼고 비교하기 시작하면 다른 데 신경 쓸 시간이 없거든요. 그러다 보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천착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대개는 프로그램 쪽으로만 관심을 둡니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설교비평을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많은 말을 한 거예요.
 

예전관련 책자 소개

예전에 관련된 책을 소개해 달라는 분이 있네요. 제가 주로 보는 것은 두세 권 정도입니다. 하나는 『공동예배서』(미국장로교회, 한국장로교출판사)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예배기도』(박근원, 대한기독교서회)라는 책입니다. 우리가 기도문을 많이 읽어야 해요. 자기 멋대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나온 기도문들은 시의 형태로 되어 있어요. 기도문을 형식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 안에는 깊은 생명과 신비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나머지 한 권은 『새로운 예배찬송』(박근원, 대한기독교서회)입니다. 누가 제게 질문하기를 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왜 목사 가운은 입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샘터교회가 지금 아파트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가운을 입기는 좀 그래요. 만약에 우리가 더 괜찮은 공간을 얻게 되면 가운을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목사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예배 때 가운을 입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예배시간에 제가 회개의 기도 순서에 성도들을 향해 용서를 선포하거든요. 그러나 제가 어떻게 용서를 하겠어요? 다만 제가 맡은 역할을 담당할 뿐이죠.
 

결론

 

오늘 제가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신앙이 종교적 감상주의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포괄적이고 우주론적인 생명, 죽음, 삶 전체를 담고 있어요. 우리가 그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언어개념이 내 삶과 일치되는 성육신(incarnation)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오, 즉 실제적인 깨우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혹은 풀어내려고 하는 세계에 용맹정진의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두 전문적인 신학자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태도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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